제3장 5


 

제 3 장

5

 

리학은 압강려관앞에서 담배를 피워물었다. 저 창가림을 드리운 2층 7호실에서 지금 라옥주가 그를 기다리고있다. 이제 영영 자기곁을 떠나가는 그 녀자를 바래주지 않으면 안된다. 짐을 싸놓고 앉아 고개를 떨구고있거나 아니면 쓰라린 아픔에 겨워 침대에 엎드려 울고있을런지도 모른다.

찬바람에 불티가 흩날렸다. 그는 담배연기를 가슴깊숙이, 쓰린 한숨과 함께 들여마시며 불이 환한2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녀자의 그림자가 창가림에 찍히더니 곧 사라졌다. 라옥주가 방안을 오락가락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고있는것 같다. 큰길쪽에서 달구지바퀴가 덜컹거리고 자전거종소리가 얼어붙은 대기를 째지게 울렸다. 또다시 창가림에 찍히는 그림자, 라옥주가 창가에 붙어서는것이 보였다. 창가림이 흔들거렸다. 리학은 벽에 붙어서며 손을 오무려 담배불을 감쌌다. 그림자가 사라져서야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웬일인지 좀 더 시간을 끌며 생각하고싶었다. 운명을 같이 할수 없는 그 녀자, 다시 만나지 못할수도 있는 그 녀자의 애끓는 눈물을 또 보리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싸늘해졌다.

그는 손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힘주어 빨고는 고드름이 떨어져 삐죽삐죽 얼어붙어있는 발끝에 뱉어버렸다. 춥고 배고프고 참을수 없이 몸이 떨려났다. 그랬어도 려관문을 열고 들어설 생각이 없었다. 모든것이 뒤죽박죽이여서 그 어떤 아쉬움도 애석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술취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서자바람으로 가래침을 퉤 뱉고 이리비틀 저리비틀 하더니 가까스로 몸을 가누었다. 별안간 머리를 떨구더니 무엇인가 깊은 사색에 잠긴듯 꼼짝하지 않았다.

아마도 술에 녹아버린 자기의 정신나간 한생에 대한 짤막한 총화라도 짓는듯 했다.

리학에게도 길지 않은 라옥주와의 련정이 마무리될 때이다.

라옥주··· 그 녀자를 처음 알게 된것은 지난해 4월이였다. 일본에서 도주하여 서울 혜화동우편국뒤에 있는 옛 스승의 집에 은신해있을 때 주인집 딸과 가까운 리화녀자전문학교학생 라옥주가 때때로 놀러오군 했었다. 부유한 기업가의 딸로서 교양이 있고 용모 또한 눈에 띄게 아름다왔다. 보통키에 티한점없이 말쑥한 얼굴에 늘 미소가 어려있는 그 처녀가 뒤고방에 숨어서 방석이나 틀고있는 리학을 찾아줄 때면 어스크레하던 방안이 환히 밝아지군 하였다. 하얀 쎄라복과 머리에 꽂고있는 붉은색, 보라빛의 패랭이꽃에서 풍겨오는것 같던 신선하고 아릿한 향기를 리학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미군이 일본본부에 상륙한다나 봐요. 왜놈들은 한달도 채우지 못할거라구 하죠. 리학씨도 맘놓고 거리를 활보할수 있을거예요. 이제 해방이 되면 리학씬 뭘 하시겠어요?》

《비행기를 타겠소!》

《아유, 무섭지도 않으신가부죠?··· 난 학교를 마저 채우고 교원을 할가 해요. 아버진 반대하시지만.》

《학교가 마음에 드오? 그··· 리화녀자전문학교는 어떻소?》

《우리 학교말이죠? 음- 1925년부터 리화녀자전문학교로 됐는데 이제 곧 리화녀자대학으로 인가를 받는다죠. 녀자전문학교래서 다들 부러워해요. 미국의 후원도 기대가 크구요.》

그 처녀가 리학의 무엇을 보고 그처럼 자주, 열심히 찾아다녔는지는 알수 없다. 리학의 코수염만 밀어버리면 좀 더 젊고 씩씩하고 지혜롭게 보일것이라고 조금 아쉬워했지만 그의 곤궁을 덜어주고 새 소식을 알려주고 책들도 가져다주었다.

그때부터 주인집 딸은 새침해져서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일본의 무조건항복소식을 제일먼저 가져온것도 라옥주였다. 숨이 턱에 닿아 달려와 무작정 밖으로 잡아끌었다.

온 시내가 발칵 뒤집히고 거리에는 인파가 휩쓸고있었다.

《조국해방 만세, 만세!》

그들은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려 동대문구대통로로 밀려갔다. 갑자기 비틀거리며 리학은 길가의 전주대를 끌어안았다. 거의나 해빛을 받지 못하고 뒤고방에 숨어있던 그의 얼굴은 백지장같이 창백했다. 눈을 감고 휘휘 돌아가는 의식을, 현훈증을 가까스로 누르고있으려니 옥주가 놀라서 부르짖었다.

《웬일이세요. 리학씨, 예?!》

사람들의 홍수가 그들을 휩쓸며 자꾸만 떠밀어갔다. 옥주가 그를 부둥켜안고 가까스로 길옆으로 끌어갔다.

《웬일이세요. 리학씨, 예?》

얼마후에야 리학은 의식을 차리고 속삭이였다.

《날 비행장으로 데려다주. 여의도비행장.》

《아유 정신나가지 않았어요. 그저 비행기밖엔 모르셔.》

《가야 해. 비행기를··· 비행길 봐야겠소,》

여의도비행장은 한강철교를 건너 서쪽에 있는 큰섬가운데 있었다. 옥주에게 이끌려 한강제방뚝에 올라서니 비행장엔 불길이 충천하고있었다. 패망한 일제놈들이 비행기에, 연유창에, 수리소와 격납고들에 불을 질렀던것이다. 절망과 치욕에 대한 분풀이였고 미친듯한 분노의 발작이 암황색의 불기둥으로 치솟고있었다.

해방만세를 웨치며 쓸어나왔던 사람들이 그 광경에 아연해져서 제방뚝과 철교우에 가득 몰켜선채 굳어져있었다. 리학은 사람들앞에 나서서 웨쳤다.

《여러분, 나라가 해방됐으니 비행기도 우리 조선사람들의것입니다. 놈들이 불을 못놓게 합시다. 자, 다들 나를 따라오십시오!》

그러나 그를 따라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 세월 짓눌려 살아온 사람들이여서 왜놈들과 맞서는것을 무서워했다.

뿌리깊은 공포감과 순종의 관습이 그들을 못박아놓았다. 라옥주가 도와나섰다.

《내가 가겠어요. 난 녀자지만··· 무섭지 않아요. 이럴 때 청년들까지 겁을 먹는다는건··· 수치예요!》

처녀의 그 말에 청년들은 모닥불을 들쓴듯 했다. 삼베옷을 입은 청년들, 학생들 지어 바지괴춤을 잡고있던 소년들까지 리학을 따라나섰다. 그때의 라옥주는 얼마나 정답고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던가!··· 흥분으로 하여 상기된 발그레한 그 얼굴, 하얀 세라복의 동그스름한 어깨를 와락 끌어안고 싶던 마음, 리학은 앞장서 달려갔다. 그러자 왜놈들이 기관총을 란사했다. 비행장으로 달려드는 청년들의 머리우로 기총탄이 죽음의 휘파람소리를 지르며 날아갔다. 일시나마 용기를 내여 따라나섰던 청년들이 기겁을 하여 달아나고 라옥주는 저도 모르게 리학의 품속에 뛰여들며 비명을 터쳤다. 리학은 옥주를 꽉 껴안고 숨을 헐떡거리며 굳어져있었다. 연기구름을 바라보는 그의 두눈에서 초물같은것이 번득이고있었다.

그날 밤 리학은 옥주에게 이끌려 그의 집으로 갔다.

《일없어요. 우리 아버진 좋은분이셔요. 이미전부터 리학씰 만나보고싶어 했지요 뭐.》

리학의 눈에 비낀 옥주의 아버지 라영석은 꾀바르고 타산에 밝은 기업가였다. 리학이 요미우리신붕사에서 1급비행사로 일했다는것을 알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우리도 한번 크게 해보자는걸세. 해방이 됐으니 쪽발이들 못지않게 판을 크게 벌려봅세. 대만,싸할린, 요꼬하마, 싱가포르까지 갔다왔다 할수 있지. 난 벌써 임자에 대한 얘길 들을 때부터 그 생각이였어. 먼저 적산물자조달부터 시작하자는걸세. 비행기대수만 늘어나면 려객운수도 맡을수 있지. 판은 아주 큰 판일세.》

동그란 백테안경속에서 타산밝은 두눈이 리학의 금새를 저울눈금에 달아보고있었다. 리학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힘껏 창공을 날고싶은 그 한생각뿐이였다.

그날밤 라영석은 방 한간을 내여 리학을 자게 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그가 리학을 놓아줄리 없었다. 딸에게 밤참을 들여보내며 리학의 귀에도 들리게 그는 말했다.

《모기장도 쳐드려라. 불편한게 없는지 알아보고 네가 곁에서 시중들어주어야겠다··· 원, 부끄럼 타긴, 제 잠자릴 내준게 누군데?!···》

벅찬 날들이 흘러갔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서울에 개선하신다는 소식에 매일같이 역으로 달려나가군 했다. 그러던 어느날 라영석이 의주비행장에 아직 많은 비행기들이 그대로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순간 리학은 두눈이 번쩍 트이는듯 했다. 손에 들고있던 항공기술서적을 떨구며 벌떡 일어서기까지 할 지경이였다.

《정말입니까. 믿을만한 소식이겠지요?》

《아무렴, 그쪽에서 온 사람이 나더러 비행기부속품을 사라고 하질 않겠나.》 라영석은 정색해서 그를 찬찬히 여겨보며 속삭이였다. 《그걸 한대 가져올수 없을가?》

그러나 리학의 생각은 다른데 가있었다. 여의도비행장에서 불타던 비행기들이 눈앞에 삼삼하였다. 그 비행기들을 또 불타게 해선 안된다. 장사군들이 다 뜯어가게 해선 안된다!···

그날 밤 리학은 서울을 떠났다. 역에 따라나왔던 옥주가 물었다.

《꼭 돌아오시겠죠?》

《모르겠소.》

《그럼 난 어떻게 하라는거예요?》

《내가 오지 않으면 거기루 찾아오우.》

《어머!》

옥주는 뜻밖인듯 아릿다운 동작으로 손을 봉긋한 가슴우에 얹었다.

《아녜요. 기다리겠어요. 끝까지!···》

그때의 옥주는 밝고 단아하고 순결했었다. 처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바르르 떨리고있을 때 발차를 알리는 기적소리가 격하게, 새된 울부짖음같이 울려퍼지며 9월의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리학은 처녀의 손을 놓고 차에 오르며 손을 흔들었다.

《잘 있소, 옥주!》

《앓지 마셔요. 리학씨, 기다리겠어요!》

끝내 옥주는 기다리다 못해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다시 만났을 때 그 녀자에게는 무엇인가 터놓지 못하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옥주가 처음 꺼낸 말도 뜻밖의것이였다.

《서울선 리학씨를 대단히 높이 사고있어요. 아버지의 꿈같은건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 미국사람들이 리학씰 점찍고있는거예요. 항공대를 뭇고있는데 에-스멤버(비행사정원)제1번에 리학씰 꼽구 있는거죠. 어서 가셔요. 예?···》

전날의 산뜻하고 숫저워하던 모습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어딘가 색다른 교태와 정조를 잃어버린 처녀들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얄궂은 요염기가 느껴지는 처녀가 그앞에 나타나있었다.

리학은 그에게서 처음만났을 때 보았던 생신함과 나붓이 머리숙여 인사하던 때의 귀엽고 정겹던 모습을 아무리 해도 찾을수 없었다. 몇달새에 그리도 달라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였다. 눈물로 설복하고 애원하다 못해 목을 끌어안고 리학의 얼굴을 침으로 매닥질해놓을 때엔 진저리를 치기까지 했다.

끝내 옥주는 단념한듯 했다. 오늘 낮에 보낸 쪽지에 옥주는 이렇게 썼다.

《리학씨,

저는 결심했어요. 저녁차로 돌아겠어요. 마지막으로 저를 배웅해주세요. 나의 <제비>!··· 려관에서 기다리겠어요.》

그리하여 리학은 려관문앞에서 서성거리고있다. 또다시 창가에 붙어선 옥주의 그림자를 보았다. 맵짠 바람이 면도날처럼 볼따구의 살을 에이는듯 했다. 리학은 드디여 현관문을 잡아당겼다.

2층 7호실 문을 두드리자 나는듯 달려드는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며 밝고 훈훈한 빛과 열기와 페부를 콕 찌르는 알싸한 녀성의 체취가 일시에 홍수처럼 쓸어나왔다.

《리학씨!》

옥주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발뒤꿈치를 들어 매달리며 벌써부터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끝내 오셨군요. 얼마나 기다렸다구.》

리학은 새파란 빛이 들만큼 해쓱해져있는 옥주의 얼굴을 덤덤히 쳐다보았다. 추위에 언 몸이 와들와들 떨리는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거북스러운 이 장면이 제발 오래 끌지 않기를 바랐다. 옥주도 그의 기분을 알았는지 갑자기 물러나며 방가운데 놓인 트렁크우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싸쥐고 소리없이 흐느끼며 별안간 오연히 머리를 쳐드는데 눈물이 고인 두눈에서 불빛이 흔들거렸다.

《난 알아요. 리학씨, 더는 내가 아무것도 기대할수 없다는걸 잘 알아요. 리학씨 마음에 저를 위해 남겨둔 따뜻한 정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걸 말예요··· 아, 아니, 말하지 마세요, 아무 말도!··· 그래요. 난 변했어요. 그런데 이게 뉘탓인지 아세요? 리학씨탓이예요. 리학씰 위해, 꿈같은 사랑을 위해 다 바쳤어요. 아니, 그게 아니야, 죄다 잃었어. 잃구 말았어. 빼앗겼다구 할가.··· 그래요. 리학씨, 죄다 잃구 죄다 빼앗겼어요. 그러니 내겐 뭐가 남았죠? 나는 뭐가 되구요. 예? 리학씨, 죄많은 사람!···》

실성한 사람모양으로 머리칼속에 손을 밀어넣고 그것을 움켜쥐는가 하면 맥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뿜고는 또 흐느껴우는 그 녀자를 보느라니 소름이 끼쳤다. 그 녀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때문에 설분을 토하고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는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그 녀자는 그가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 말을 하구싶었어요. 그담 또 있었는데··· 왜 이렇게 머리속이 웅웅거릴가. 하고싶던 말들은 다 어데로 날아갔을가··· 버림을 받아 싸지. 이렇게 될줄 알았더라면 첨부터 그 사람들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어야 했어. 내가 리학씨와 가깝다구 해서, 내 말만은 리학씨가 들어줄거라구 해서 그네들이 날 꼬드겼지 뭐야. 꼬뜨기구 위협하구 끝내는 날 망쳐놓았어. 저주받을것들. 아아, 어머니, 난 이젠 어쩌문 좋아요. 리학씨, 내가 왜 당신을 알게 됐을가요. 당신은 왜 나를 뿌리치지 않았어요. 무엇때문에 나를 받아들였어요.

그리군 차버리구··· 철부지였던 내가 아니였나요. 예? 나를 왜 이 지경 만들었나요?》

《무슨 소리요. 옥주, 도대체 뭘 말하는거요?》

리학이 격하여 물었으나 그 녀자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또 하얀 두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소리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가슴을 허비는 그 울음소리를 리학은 듣고만 있을수 없었다. 그는 옥주의 어깨우에 손을 얹으며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것처럼 띠염띠염 말했다.

《자, 울음을 그치오. 그리구 천천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우. 어쨌든 옥주는 달라졌어, 그전날의 옥주가 아니거든. 솔직히 말해서···》

《아 됐어요. 그만하셔요!》 옥주가 머리를 들며 부르짖었다. 《리학씨도 달라졌어요. 두달새에 그만 딴 사람이 됐어요. 이번에 오자 난 그걸 느꼈어요. 어쩌면 그리도 달라질수 있을가요. 철부지 소녀였던 내가 달라진 이상으로··· 달라졌어요. 무엇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을가요. 아 차라리 모르고 살았던들··· 내가 리학씨를 만난게 제 잘못일가요? 리학씨한테 마음이 끌린게 죄였을가요. 그네들은 그때문에 나를 못살게 굴었지 뭐예요. 내가 리학씨를 사랑한다구 해서··· 그렇지만 이리도 달라진건 모르구. 나도 그래요. 그런줄 모르고있었어요. 전연!··· 그래서 둘이 같이 잘 살게 해준다는 꼬임에··· 끌려든거죠. 결국은 이 꼴이 되구요. 그네들이, 그 비렬한것들이 우리 사랑을 망쳤어요!》

《그네들이란 누구요. 응?!》

리학이 그의 어깨를 마구 흔들자 옥주는 그 손을 뿌리치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미친듯이 그 손을 끄당겨 눈물에 젖은 볼에 가져다 비비였다.

《아 리학씨, 인젠 영 리별이죠? 다신··· 다신 영영 만나지 못하는거죠?》

《옥주, 제발 정신차리오. 넉두린 그만하고···》

《됐어요. 아-됐어요.》 하고 옥주는 불같이 속삭이였다. 《모르시는게 좋아요. 난 그저··· 당신이 이렇게 와주신것만두··· 정말 고마와요.

난 당신의 사랑을 받을 그런 녀자가 못돼요. 다 망쳤어요. 정말야. 난 그저··· 울고만 파. 내 말을 막지 마세요. 실컷 울게 가만 내버려두셔요.》

옥주는 리학의 손을 헤쳐놓은 자기의 외투앞섶으로, 봉긋한 가슴앞으로 재빨리 끄당겨 힘껏 눌러 대였다.

《난 가고프지 않아요. 당신곁에서, 당신이 허락하신다면 당신품에서 죽고싶어요. 머리를 흔들지 마세요. 나의 <제비>!··· 마지막으로 이렇게 불러도 괜찮겠죠?··· 난 임무를 받구 왔어요. 그렇지만··· 첨 만났을 때 벌써 헛된짓이라는걸 깨달았어요. 당신은··· 행복해 보이더군요. 나없이도··· 그렇지만 난 당신이 행복해할수록 난 꺼져들어만 갈거예요. 난 죽을거예요. 그네들이 시키는대로 다하지 못했어요. 아- 아니 부질 없는짓이였죠. 당신이 내게서 멀어져갈 때 난 벌써 알았어요. 죽는다는걸···》

《옥주, 이것 보오.》

《가만 계셔요. 시간이 없어요. 그놈들은 당신을 서울로 끌어가든가 안되면 죽이려구 해요. 알겠어요?··· 이게 마지막이예요. 아냐, 또 있겠는데··· 그래요. 가세요. 인젠 됐어요. 내가 바란건 그것뿐이예요. 리학씨, 당신을 한번 더 보고파서··· 용서하시죠? 어서 가세요. 놈들이 올 시간이 됐어요. 아 아, 리학씨, 용서하세요. 그때 벌써 당신을 따르지 못한 날 용서하세요. 한걸음 늦어서··· 이리 됐어요. 자 어서 물러가요. 난 더러운 녀자예요. 제발 날 다치지 마세요. 모든것이 끝났어요.》

비로소 어렴풋하던 안개의 장막이 벗겨지는듯 했다. 리학은 분노와 더불어 치밀어 오른 련민과 지겨운 욕지기를 참느라고 씨근거렸다. 하지만 끝내 인간적인 동정이, 옛 사랑의 추억이 눈을 뜨고 소리치게 했다.

《아니, 이렇게 갈순 없소. 옥주, 무슨 일인지 내 알아 보고 옥주를 구원해 주겠소. 누가 옥주를 죽인다는거요?》

옥주가 벌떡 일어섰다. 리학의 가슴팍을 힘껏 떠박지르며 그 녀자는 부르짖었다.

《가세요. 난 더 할 말이 없어요. 다 말했어요. 죄다!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말아줘요. 아시겠어요? 그것들하군 내가 따로··· 말하겠어요. 저주받을 그것들!》

《어데 있소. 놈들이 어데 있다는거요?》

《아 아, 리학씨, 바보, 내 사랑, 얼간이 같은분.》 옥주는 그를 문가에로 사정없이 밀어내기 시작했다. 《가라는데. 보기 싫어!》

등뒤에서 문이 열렸다. 순간 옥주의 눈물씻은 두눈이 커다랗게 굳어지는것을 리학은 보았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의 귀재기가 바르르 떨리고 호흡이 절박해졌다. 누군가 리학을 뒤에서 콱 밀쳤다. 다음순간 세 사나이가 방안에 들어섰다. 날파람있게 생긴 사나이가 젊은 두 녀석을 달고 들어왔는데 한 녀석은 권총을 들고있었다. 권총을 쥔 젊은 녀석이 빈정거렸다.

《영화의 리별장면인가? 그런데 어떻게 된셈이야. 아직 잠자리도 구겨지지 않았군.》

날파람있게 생긴 사나이가 을러메듯이 말했다.

《까불지 말아, 병태, 그럴 시간이 없어. 한시간후엔 기차가 떠난다는거 몰라?》

그자는 옥주가 앉아있던 트렁크에 한발을 올려놓고 리학을 쏘아보며 말했다.

《실례했소. 리학씨, 실은 저 옥주아씰 통해서 좋게 의논하자구 했는데 그만··· 난 미군정청안의 북선조사반 반장 성영훈이요. 암파라고도 하지. 그런 이름 들어본 일이 없소?··· 음-모른다?!··· 그건 그렇구, 미국사람들이 리학씰 잘 모셔오라구 하더구만. 지금 서울에선 국방군창설이 한창인데 당신을 항공대사령관으로 임명하였소. 임명장을 봤소? 하지중장이 수표한 임명장과 리승만박사의 편지··· 뭐 그것도 모른다?···》

암파는 칼끝같은 시선을 옥주에게로 던졌다.

《네년이?··· 아직 그것도 안보였어?》

《필요없소.》 리학이 말했다. 《항공대사령관이 아니라 대통령을 하게 해준대도 난 싫소!》

《허-꽤나 도도하군. 그래도 임명장이야 봤어야지. 미군사령관이 수표한걸 보면 좀 생각이 달라 지지 않을가?···》

암파는 옥주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문서들을 내놔.》

옥주는 외투주머니에 손을 넣어 꾸겨진 종이 두장을 꺼내여 암파가 내민 손이 아니라 자기 발밑에 떨구었다.

순간 번개같은 일격이 가해졌다. 가느다란 비명소리와 함께 옥주가 바람벽에 날아가 세게 부딪쳤다. 벽에 걸려있던 거울이 떨어져 산산쪼각이 났다.

리학이 움쭉하자 무엇인가 목의 울대뼈를 선뜩하게 했다. 암파가 어느새 시퍼런 비수를 리학의 턱밑에 들이댄것이였다.

《리학씨.》 암파가 히죽히 웃었다. 《잘 생각해서 결심해야 하오. 하늘로 날아오르겠는가 땅속에 묻히겠는가··· 정 싫다면야 별수 없지. 저 아가씨랑 같이 목을 잘라 한이불속에 나란히 눕게 해주겠소. 모가진 없어두 그것만 붙어있으면 되겠으니까. 흐흐흐···》

벽밑에서 옥주가 신음했다. 벽을 짚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세우는 그 녀자를 바라보며 리학은 혀를 깨물었다. 턱밑에 비수를 들이대고있는 암파란 사나이의 새파란 불이 이는 뱁새눈을 스쳐보며 한순간이라도 그자가 헛눈을 팔기를 기다렸다.

옥주가 일어섰다. 손에 무엇인가 잡고있는것 같았다. 암파가 종이장을 리학의 눈앞에 내들고 권총을 쥔 젊은 녀석은 무는 낌새를 챘는지 옥주앞으로 다가갔다. 순간 옥주가 그 녀석의 면상을 깨여 진 거울쪼각으로 벅 그어놓았다. 《악!》하는 울부짖음과 총성··· 암파란 놈이 피끗 머리를 돌리는 순간 리학은 그자의 사타구니를 힘껏 걷어차며 앞으로 내달았다. 입을 벌리고 쓰러지는 옥주를 붙안았다.

《옥주!-》

《아!》 옥주가 신음했다. 《리학씨··· 나의··· 제- 제비···》

다음 순간 리학은 정수리에 가해진 세찬 타격에 붙안고있던 옥주를 떨구며 천천히 모로 나가넘어졌다. 마지막으로 《개자식, 총소린 왜 냈어?》 하고 신음하는 암파의 목소리와 《리학씨···》 하고 숨져가는 옥주의 가느다란 속삭임을 꿈결에서처럼 들었다.

무수한 별찌들이 눈앞에서 사물거리더니 그마저도 어느새 캄캄한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공허··· 시꺼먼 공허뿐···

그가 의식을 차린것은 다음날 아침이였다. 개인업을 하는 어느 자그마한 병원이였다. 침대앞을 서성거리던 군복입은 사람이 소리쳤다.

《아, 정신을 차렸나?》

권총을 찬 젊은이였다. 리학은 창가로 흘러든 해살에 견딜수 없어 가늘게 눈을 좁혀뜨고 비좁은 방안을 살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메슥메슥하여 금시 토할것 같았다. 머리를 두텁게 감은 붕대가 손에 감촉되여서야 비로소 지난 밤의 일들이 떠올랐다.

《여기가 어데요?》

리학은 힘없이 물었다. 그런데 기대했던것과는 전혀 다른 몰풍스러운 목소리가 청년의 입에서 울려나왔다.

《그런건 알아 뭣해. 이제 곧 땅속에 들어가겠는데.》

그는 밖에 대고 소리쳤다.

《여, 박동무, 이놈을 와 지키라구, 내 전활 하구 올게.》

보총을 멘 젊은이가 대신 들어와 섰다. 그제서야 리학은 이들이 보안서원들이며 자기의 일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것을 짐작했다.

보총을 멘 순박해보이는 청년에게 어떻게 된 일인가, 려관에 왔던 놈들은 어찌 되였는가고 물었다. 청년이 대답했다.

《그놈들은 다 잡혔소. 밖에서 망보던 놈까지, 간첩놈들끼리 싸우긴 왜 싸워. 한놈은 불두덩이 터진것 같애. 원, 더러운것들, 녀자때문에 쌈질을 했지?》

《그래- 녀자는··· 어떻게···》

리학은 숨이 막혀 말끝을 맺을수 없었다.

《그년도 간첩이지?··· 다 조사해 봤어.》

《그래 그 녀잔?···》

《죽었어. 우리가 쳐들어가니 벌써 뒈졌더군.》

리학은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은 담배말이종이처럼 달달 말려서 누렇게 뜨고 터갈려있었다. 보총을 멘 청년이 궁금한지 물었다.

《당신은 비행사지?··· 그런데 왜 간첩놈들과 손잡아?··· 항공대사령관?··· 임명장에 지장까지 찍었더군. 미국놈들한테 가서 큼직한 자릴 타구앉자구 했드랬지?···》

《?···》

리학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톱으로 침대모서리를 박박 허비며 모지름쓰고있을뿐이였다. 일이 이렇게 번져지리라는것을 어이 알았으랴. 어제는 간첩놈들로부터 오늘은 또 제편으로부터 수모를 받고있는것이다.

옥주가 가엾었다. 그처럼 순진하고 아름다운 처녀가 어찌되여 놈들의 마수에 걸려 비참한 종말을 고했는지 아무리해도 알수가 없었다. 애통한 비감도 아니요 가슴저미는 아픔도 아니였다. 그저 한없이 가엽고 불쌍하였다. 그럴줄 알았으면 서울에서 떠날 때 끌고왔어야 했을것을··· 옥주는 말했다. 《그것들이 날 망쳐놨어요.》 그가 자신을 망쳤다고, 더러운 녀자라고 한것은 무엇을 의미한것이였을가.··· 숨쉬기가 헐치 않았다. 자기를 둘러싼 방안의 고요가 무덤속같은 적막으로 그를 질식시키는듯 하였다. 권총을 찬 그 사람이 들어왔다.

《일어낫, 보안서루 가자!》

리학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침착하게 말했다.

《나를 김일동지한테 데려가주오.》

김일은 얼마전부터 평북도당사업을 맡고있었다.

《김일동지? 도당책말야?》

《그렇소.》

《주제넘게스리, 김일동진 지방에 나가구 안계셔. 도보안서장동지가 당장 너를 끌어오라는거야. 이제부터 반동놈들은 즉석에서 총살이야. 알겠어?··· 쁘로레따리 도-독재야!》

그는 마지막말을 겨우 발음하고서 리학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늙수그레한 의사가 들어와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환자를 어데로 끌고가느냐고 놀라서 물었다. 권총을 찬 사람이 정중하게 말했다.

《이놈은 환자가 아니라 극악한 반동이웨다. 리승만놈한테 달아나려던것을 우리가 붙들었시요.》

《?!···》

놀라서 눈이 떼꾼해진 의사의 눈앞을 지나면서 리학은 머리를 떨구었다. 드디여 자신을 보증할 아무런 수단도 방법도 없다는것을 절망속에 깨달았던것이다.

밖의 날씨는 맵짜고 어수선했다. 죽음을 예감한 감정때문에 그렇게 느껴진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이렇게 오는것일가? 느닷없이 아무런 항소도 받아들임이 없이 억울하게 때아니게 찾아오는것일가?··· 두 보안서원의 호송이, 한사람은 뒤에서 보총으로 잔등을 겨누고 옆에서는 권총을 빼들고 좀 우쭐한 기색으로 리학을 끌고가는 그들의 남다른 모습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입빠른 아낙네들이 먼저 수군거리고 길가던 사람들이 껴들어 떠들었다.

《비행사를 잡아가는게 아니요?》

《옳구만, 쯧쯧··· 저 사람도 반동인가부지요?》

《그게 리장수아들이래요.》

《뭐, 리장수아들?》

신의주일판에서 리장수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그의 아버지였다. 키가 크고 체중이 백키로이상 나가는 유명한 씨름군으로서 한해에 스무짝이상의 소를 상으로 타군했다. 그리하여 리가 성에 장수라는 별명을 붙여 부른것이 그만 이름처럼 되였던것이다.

그렇다. 리학은 바로 그 리장수의 아들이다. 몸은 호리호리 하지만 힘이 세고 특히는 유명한 비행사로서 단단하고 기민하고 날파람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보안서원쯤 순식간에 제끼고 내뺄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빼면 어디로 간단말인가?···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비참한 처지에 빠진 그로서는 자기의 인생행로가 끝나는 이 길을 터벌터벌 머리를 짓수굿하고 걸어가는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저리도 푸르건만 그 하늘조차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리도 어질었건만 그 사람들은 그에게 비난과 욕설과 멸시만을 퍼붓고있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지나가던 자동차가 멈춰서며 운전수가 그를 향해 소리친것이였다.

《아, 회장동무, 어디로 가시우?》

권총을 찬 사람이 사납게 소리쳤다.

《이놈은 반동이요. 상관말고 가시오!》

《아니, 우리 회장이 반동이요?》 운전수가 땅에 내려서며 머리에 쓴 모자를 벗어쥐였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하라는거요. 예, 회장동무?!》

순간 리학은 머리를 치는 생각에 소스라쳤다. 그렇다, 이렇게 끌려가면 항공협회는 어떻게 하는가, 장군님께서 주신 임무는 누가 맡아한단 말인가?···

보안서원들이 짜증을 내며 그를 밀치였다.

《어서 걸어!》

순간 리학은 권총을 쥔 사람의 면상을 호되게 후려치는것과 동시에 보총을 멘 보안서원을 발길로 걷어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어쿠!-》 하는 외마디소리와 함께 권총이 땅에 떨어지고 보총을 든 청년은 얼어붙은 길바닥에 나자빠졌다.

본의아니지만 드세게, 번개같이 일격을 가하고나서 그는 권총을 발길로 차던진 다음 뒤통수를 땅바닥에 짓쪼은 청년에게 달려들어 보총을 나꾸채였다. 다음 순간 그것을 가지고 냅다 뛰면서 입을 딱 벌리고 굳어진 사람들 반대쪽에, 얼음버캐가 희끗거리는 개울창에 던져버리고 차에 뛰여올랐다.운전수를 태울 새도 없었다. 문짝을 쾅 닫고 발동을 걸자 가속답판을 밟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두 보안서원이 헤덤비며 총을 찾고있는것이 보였다. 권총을 쥐고있던 사람은 손으로 타격을 받은 눈두덩을 감싸쥐고 먼지 오른 길섶의 눈더미속을 마구 헤집고있었다. 그러나 벌써 차는 속도를 높이며 길 가운데를 미친듯 달려가고있었다.

비행장으로, 어서 비행장으로!··· 하고 리학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가속답판을 밟고있는 발에 경련이 일 지경으로 힘을 주었다. 가로수들이 휙휙 지나갔다. 길복판에서 어정거리던 검둥개가 화닥닥 뛰쳐나가고 함지를 이고오던 녀인이 땅바닥에 어푸러지며 무엇인가를 길가에 쫙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