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7


 

제 2 장

7

 

평양

조선인민의 영명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저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모택동동지와 주은래부주석, 주덕총사령의 위임에 의하여 조선인민의 영명한 수령이시며 중국인민의 친근한 벗이신 존경하는 김일성동지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게 됨을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일성동지께서 일신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동북의 전장에까지 찾아오시여 위기국면에 처한 우리 료녕군구사령부와 우리 사령부지휘원들의 가족들까지 구원해주시였으니 대해같은 이 은정에 무슨 말로 다 감사를 올리겠습니까.

어제는 《항일원화》의 풍상고초로 중화민족의 해방투쟁에 커다란 고무를 주시고 오늘은 또 《항장원하》의 기치하에 피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는 김일성동지의 고결한 의리를 길이길이 잊지 않을것입니다.

다시한번 숭고한 경의를 드리면서

중국동북민주련군 료녕군구사령원 소화 드림

 

김일성동지께서는 안길이 가져온 전문을 천천히 훑어보신후 미소를 지으시였다.

《박락권동무가 끝내 해냈소, 끝내!···》

기쁨을 금할수 없으시였다. 그것은 비록 크지 않은 렬차습격전투였으나 자신의 명의로 한 국제적인 약속이였으므로 그 소식이 그토록 반가우시였다.

그이께서는 다시 전문을 쭉 훑어보시였다.

전문에 밝힌 《중국동북민주련군》이라는 명칭이 지난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중국당에서는 동북진출의 첫 시기 《쏘중우호동맹조약》을 고려하여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피하고 《동북인민자치군》이라고 칭했었는데 지금은 또 《민주련군》으로 바꾸었다. 그 《민주련군》은 강건, 최광, 박락권 등 조선인부대들도 포함시킨것이다.

전문에 밝혀있는 《항일원화》(일제반대 중국성원)나 《항장원화》(장개석반대 중국성원) 등의 표현들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있는것인지 공동의 적을 반대하여 피흘려 싸워온 전우들이 아니고서는 다 알지 못할것이다. (30여년 세월이 지나 중국인민해방군 친선참관단 단장으로 조선을 방문한 소화는 김일성동지의 접견을 받는 석상에서 지난 일을 회상하며 그때 주석동지의 가르치심에서 힘을 얻고 싸워이겼다고 감사의 인사를 또 드리게 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어깨우에서 흘러내리는 외투를 바로잡으며 안길을 돌아보시였다.

《그런데 박락권동무의 소식도 중국동지들한테서 듣게 된다는게 말이 안됩니다. 체신국장에게 중국동북과 직통전화를 놓으라고 과업을 주었는데 지금 어떻게 진척되고있는지 안길동무가 직접 알아봐주시오.》

《장군님.》 안길이 말씀드렸다. 《직통전화를 놓았습니다. 평양-청진-연길 우선 이 선을 놓았습니다. 청진에 가있는 박영순동무가 그새 수골 많이 하였습니다.》

《음-》

그이께서는 후더워지는 마음으로 안길을 바라보시였다. 자신께서 신의주지구에 이어 함경남도를 현지지도하시는 기간 안길은 당내부사업 즉 서기장으로서의 활동은 물론 철도경비대조직, 평양학원교재준비 등 많은 사업을 틀어쥐고 내밀었었다. 직통전화문제도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선을 늘였다. 그러고도 박영순동무를 내세우고있는것이다.

《안길동무》 그이께서 말씀하시였다. 《이제 김책동무가 오겠는데 전번에 토론하던 군사학교창설문제를 더 연구해보시오. 평양학원을 모체로 각 군종, 병종 군사학교들을 내오자면 지금부터 준비사업을 다그쳐야 합니다.》

안길은 허리를 꼿꼿이 폈다.

《장군님, 그 사업을 저에게 맡기시는것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이께서는 소리내여 웃으시였다.

《참 욕심두··· 지금 어떤 사람들은 안길동무를 <내무총감>이라고 한다는데 그런 말을 들어본적이 있습니까?》

《예.》

《어떻게 생각하시오?》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장군님, 전 제할바를 알고있습니다.》

《사람들이 <내무총감>이라 하는건 그만큼 안길동무가 당내부사업과 행정10국의 사업들까지 도와주고있기때문에 존경을 담아 하는 소리요. 그건 그렇고··· 안길동무, 군사학교들을 어디에 정하겠는지 미리···》

다음순간 그이께서는 말끝을 잇지 못하고 안길을 여겨보시였다. 가슴을 찌르는 아픔이, 어쩔수 없이 또 새 과업을 주지 않을수 없는 괴로움이 느껴지신때문이였다.

《미안하오.》

《장군님》 안길이 목메여 속삭이였다. 《군사학교위치들을 정해보겠습니다. 념려마십시오.》

《고맙소.》

그이께서는 오늘도 분망한 하루를 보내셔야 했다. 아침 9시부터는 북조선민주청년동맹 결성준비위원회 일군들을 만나시게 일정이 짜있었다. 지금 그들은 《3.1극장》 건물 웃층을 빌려쓰고있다.

주도일부관은 벌써 발동을 건 차곁에서 기다리고있었다.

승용차가 정문을 벗어났을 때 그이께서는 검은색두루마기를 입고 목도리까지 두른 웬 사람이 보초소에서 멀찍이 떨어져서있는것을 피뜩 보시였다. 승용차쪽으로 머리숙여 인사드리는듯 했다. 다시 돌아보시였으나 어느새 승용차는 《계림인쇄소》옆 골목길로 꺾어들었다.

그이께서는 급히 기억을 더듬으시였다. 분명 홍근수목사 같았는데… 앞좌석에 앉은 주도일에게 방금 우리쪽에 인사하던 사람을 봤는가고 물으시였다. 주도일의 대답은 아리숭했다.

《자세히 보진 못했습니다.》

그러니 보긴 보았다는 소리가 아닌가. 녀간첩사건이 있은 후부터 파악이 없는 사람들은 엄격히 단속하고있는것 같다. 그때문에 경위분대장 곽일무가 홍목사를 쫓아버린 용서할수 없는 사건까지 있었다고 한다. 격노한 안길이 총을 빼앗아들고 펄펄 뛰였다고도 한다. 그 일도 알아봐야겠는데 시간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돌아가면… 알아보자. 스쳐지날 일이 아니다…

다시 그이께서는 홍목사에 대하여 생각하시였다. 분명 그가 옳은것 같다. 곽일무사건이 있은 후여서 보초소가까이 올념을 못한것 같다.

홍근수… 그는 강량욱목사와 더불어 평양에서 오래 활동한 종교인으로서 반일애국투사들을 도와 준 죄명으로 옥살이도 한바있다.

장군님께서 그를 처음 만나신것은 개선연설을 한후 평남도인민정치위원회가 해방산기슭의 《평화회관》에서 베푼 《김일성장군 조국개선환영간담회》때였다. 여러 인사들과 더불어 종교인을 대표하여 그도 간단한 축사를 했었다. 눈물을 머금고 목이 메여 겨우 이어가던 감동적인 연설이였다.

진지하고 허식을 모르는 50대의 종교인, 키가 크고 몸은 강마른 편이나 목소리는 웅글었다. 반백의 머리칼과 역시 희슥희슥해지기 시작한 구붓한 눈섭, 눈물이 끓던 두눈… 그를 쫓아내다니… 곽봉기의 아들 곽일무가 그렇듯 무지막지한 칭년이였단 말인가?…

북조선민주청년동맹 결성준비위원회 일군들과 담화를 마치고 《3.1극장》을 나서시던 장군님께서는 승용차곁에 주도일부관과 나란히 서있는 홍근수목사를 띠여보시였다. 한손엔 구리띠를 감은 단장을, 다른 손엔 털실로 뜬 까만 모자를 쟁반처럼 받쳐들고 마주오더니 허리굽혀 인사올렸다.

《장군님, 무엄한 짓인줄 잘 알면서도 또 찾아왔습니다.》

《아, 이러지 마십시오.》

그이께서 홍목사의 팔굽을 잡아 일으키시였다.

《일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데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젊은이의 탓이니 부디 노염을 풀어주십시오.》

《아니올시다. 장군님!》 홍목사가 황황히 부르짖었다. 《오히려 제가 잘못을 빌어야 마땅한줄 압니다. 그 젊은일 제가 욕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디 그 젊은일 탓하지 말아주십시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자, 추운데 모자를 쓰십시오. 무슨 긴요한 일때문에 찾아오신것 같은데 차를 타고가면서 말씀하십시오.》

그이께서 그를 먼저 차에 오르도록 이끄시자 홍목사는 허둥지둥했다. 차에 올라서도 손에 든 단장을 옆에 놓았다 무르팍에 놓았다 하며 안절부절 못하였다. 장군님과 한자리에 앉고있는것이 죄스럽게 느껴지는듯 했다.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댁에서는 다 무고합니까?》

《예, 해방을 맞아서… 다들 맘 편히 지내고있습니다.》

《참, 옥고를 치를 때 병이 심했다던데… 건강은 일없습니까?》

《아니, 장군님께서 어떻게 그 일까지?···》

《얘길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장군님!》

그가 움켜쥔 단장이 부르르 떨었다. 희숙해지고있는 눈섭을 구붓하니 치켜들고 입술을 우물거리는데 아무리 해도 찾아온 용건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차를 세우시였다. 날씨도 좋은데 산책 삼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그를 이끄시였다. 칠성문을 지난 언덕길 어구에서였다.

정오가 지난 때여서 따스한 볕이 조금 린색하게 내려쪼이고있었다. 황이 든 잎사귀들이 바람결에 굴러다닐뿐 소로길은 조용하였다. 그이께서 말씀하시였다.

《따로 조용히 하실 말씀이 있는것 같아서 이렇게 걷자고 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장군님!》 홍목사는 단장을 옆구리에 끼고 버릇처럼 목에 건 묵주를 끄당겨 만지작거렸다. 《실은 제 오늘 서울로 나가게 돼있습니다. 평양과 서울, 정주와 오산 등 북과 남의 그리스도교도들이 한데 모여 련맹도 뭇고 해방후의 새 교화방책도 론의하는데··· 가기전에 꼭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복음을 듣도록 호소할가 해서 외람된 행차를 하였습니다.》

《허허··· 제가 무슨 주님이라고 새로운 복음을 내겠습니까.》

그이께서 웃으시자 홍목사는 거미줄같이 눈귀에 무수히 그어진 가는 주름살들을 펴며 황황히 계속하였다.

《아니올시다. 장군님! 이건 실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해방된 이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있는 이때··· 북과 남의 정치인들, 교인들 할것 없이 보조를 맞추어 페단을 없이 해야 할 중대사가 있는줄 압니다. 그러자면 의당 장군님께서 가르치심을 주셔야 하리라고 저는 믿고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예, 흉금을 터놓고 간할가 합니다. 혹시 제가 망녕된 말을 한다면 크게 꾸짖어주시기 바랍니다.》

두루마기속에 드리운 서른세개의 묵주알들을 재빨리 더듬고있는 목사의 얼굴엔 고뇌의 빛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있었다.

《목전현황에서》하고 그는 비통한 억양으로 계속하였다. 《겨례의 화합과 화목을 도모함이 제일 선차적과업으로 나서고있다고 저는 믿고있기에 감히 말씀드리는데… 장군님! 장군님께서 미구에 군대를 건설하실 의향이라고 인정해도 페단이 없겠습니까?··· 그러시다면 혹시 장군님의 의도에 어긋나는 미거한 생각일지 모르나 그 일만은… 부디 삼가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북과 남에서 평화를 깨치는 병쟁기를 없앰이 초미의 과제가 아닐가 생각합니다. 일찌기 예수께서도 성스러운 죽음을 당하시면서까지 <화목과 은총으로 지옥문도 이기지 못하게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 장군님께서만 동의해주신다면···》

《그러면 북과 남의 모든 그리스도교도들에게 그것을 새로운 복음처럼 호소하시겠다 그 말씀입니까?》

《예, 그렇게 해볼가 합니다. 장군님의 의향이시라면 그 누가 이의를 표시하겠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팔소매에 내린 잎사귀 하나를 잡아쥐시였다. 메마르고 쪼글쪼글 오그라든 황철나무잎사귀였다. 그것을 꼭 쥐시자 줌안에서 버석거리더니 가볍게 부서져 바람에 날려버렸다.

《평화를 깨치는 총이라···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손에 쥐여져있는가 하는데 따라 평화가 수호되기도 한다고 생각해보시진 않았습니까?》

홍목사는 어색한 동작으로 옆구리에 끼고있던 단장을 내렸으나 잠시 어떻게 할지 몰라 망설이였다. 이윽고 자신없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여나왔다.

《어쨌든 총이 있으면 쏘기 마련이고 총을 쏘면 사람이 죽고 재앙이 일어날것이 아니겠습니까.장군님! 통일이 되기전까지 당분간은 화근을 없애는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건 저 혼자의 생각만도 아니고 고당(조만식의 호)선생도 북과 남이 서로 총을 가지면 반목질시 내지는 분렬의 각도만 크게 하고 동족간의 피투성이 싸움도 피할수 없다면서 몹시 우려하고있습니다.》

《?···》

김일성동지께서는 심중해지시였다. 단순히 목사로서만이 아니라 그 누구의 추종을 받고있는지 스스로 드러낸것이였다.

순박성도 한도를 넘으면 어리석음으로 되고 만다. 이러한 사람이 《성삼위일체》요 《성령》이요 《수호의 천사》를 설교하는데서는 적합할지 물라도 인간의 존엄과 민족의 운명을 두고 정사를 론하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는것이 명백해졌다. 그는 하늘을 밟고 다닐지언정 땅에 발을 붙이지는 못하고있다.

그래도 한때 그는 독립운동자들을 도와주지 않았던가. 옥고를 치르면서까지 일제에 항거하지 않았던가!··· 결국 그는 조만식에게 리용당하고있는것이다. 북선일대에서 교인들의 거두노릇을 하는 조만식의 음흉한 계책에 눈이 멀고있는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요새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남의 말에 너무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시대와 력사의 요구에, 다시말해서 민의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결코 시대와 력사의 관조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되여야 하며 겨레의 위업을 대하되 론객이 되지 말고 주인이 되여야 합니다.》

《···》

목사가 의문어린 눈길을 쳐드는것을 주시하며 그이께서는 계속하시였다.

《목사님은 임진왜란전야에 10만양병국방설을 주장한 까닭에 조정의 밀총을 받고 락향하여 억울한 만년을 보낸 률곡의 경우와는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시는데··· 그럼 보다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보는게 어떻습니까··· 나는 믿고싶지 않지만 설혹 북과 남의 그리스도교도들이 다 총을 없애기로 결단하고 그것을 호소한다고 해둡시다. 또 그들이 수천수만명의 사람들을 설교하여 돌려세운다고 봅시다. 그렇지만 미국의 총과 대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국이야 해방자가 아니겠습니까.》

《해방자라··· 그들이 무엇을 <해방>했다고 보십니까, 총 한방 쏘지 않고 이 나라의 절반땅을 가로 타고앉았을뿐입니다. 그들이 총을 쏘았다면 우리 조선사람들을 향해서였습니다. 그들을 <해방자>라 믿고 환영나간 우리 동포들이 수십명이나 사살되였습니다.》

《예, 저도 들었습니다만··· 무슨 곡해가 있었던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허허··· 곡해라··· 미국해적선 <셔먼>호도 교역을 목적으로 왔다면서 대포를 쏘았습니다. 그후 대동강에 수장된 <셔먼>호의 행방을 묻는다면서 기여든 미국군함 <쉐난도아>호는 또 그 무슨 <우의>와 <화목>을 도모하자면서 총포탄을 쏘았습니다. 남연군묘를 도굴하러 기여들었던 놈들이 그 무슨 <오해>가 있었다느니 하고 떠들어댄것만이라도 상기해보십시오. 오늘 미국을 <해방자>라고 믿고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늘의 미국은 결코 어제날의 미국이 아니라고도 하는데··· 지금 미국은 남조선을 강점하기 바쁘게 괴뢰군조작에 미쳐날뛰고있습니다. <군사영어학교>라는 간판을 내걸고 군의 중추가 될 장교들을 육성하는 한편 <국방경비대>라는 명목으로 벌써 다섯개 려단무력을 키우고있습니다. 지어 지난날 일본군대에 복무했던자들에게까지 총을 쥐여주며 동족상쟁을 부추기고있습니다. 그래도 북과 남의 그리스도교도들이 <복음>을 호소하면 그들이 총을 놓고 물러가리라고 믿으십니까.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또 총탄을 퍼붓고 그 무슨 <오해>가 있었다고 하진 않겠습니까?···》

《···》

홍목사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눈길을 내려깔고 숨소리 하나 없이 서있는것이 측은해보일 지경이였다.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피곤하시지 않습니까?》

《아-아닙니다. 장군님!》 눈을 번쩍 뜨며 그는 부르짖었다. 《저는··· 저는··· 흉중에 사무치는 그 말씀을 귀담아 듣고있습니다. 좀더 깨우쳐주십시오.》

《위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생각납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 글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되고있습니다.

<일전에 이또가 우리 나라에 오매 어리석은 사람들이 서로 이르기를 이또는 평일에 동양구국정립의 안녕을 스스로 담당주선하는 사람이라 그가 오늘 우리 나라에 온것은 반드시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할 방책을 권고하리라 하야···> 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기에 기뻐 날뛰였는데 그가 어찌 우리 나라를 멸망케 할 <5조약을 제출하였는고… 이또의 당초의 속심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고!> 이렇게 울분에 차 웨쳤습니다. 마감엔 또 뭐라고 했습니까. 기억나는대로 더듬어보면 이런 내용이였습니다.

<아 통분토다, 아 비분하도다!

노예된 우리 2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력사이래 4천년 민족정신이 하루밤사이에 멸망하여 끝장나고 말겠느냐!

통분하고 통분토다!

동포여! 동포여!>》

홍목사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두눈은 벌써 물기에 젖어있고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새여나오고있었다. 2천만동포를 울게 하고 땅을 치게 한 그날의 《황성신문》의 글줄들이 그의 온넋을 뒤흔들어놓은듯 싶었다.

《이것이 바로 력사의 교훈입니다.》 그이께서 계속하신 말씀이였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또 미국의 군화발밑에 강토가 짓밟히고 겨례가 짓밟힐 때 <통분토다, 아 비분하도다!> 하고 또 <방성대곡>을 터칠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 총을 무서워 마십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그것이 누구의 손에 쥐여지는가 하는데 따라 노예가 되느냐 자주독립을 지키느냐 하는것이 결정됩니다. 군대가 든든해야 합니다. <병패여도산>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군대가 패하면 산사태같이 무너진다- 다시말해서 나라도 민족도 주권도 화목도 다 무너져버린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동강을 건느는 나루배가 내려다보였다. 머리에 수건을 질근 동인 사공이 노를 저으며 별스러운 목청으로 한곡조 길게 뽑아대고있었다. 만경창파를 헤가르며 어부들이 부르는 곡조를 제멋대로 고쳐부르는것이였다.

 

노 저어라 배 떠나간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에헤요 류수대하에

정든 님 어이 올소냐

 

사창장마당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웨침소리도 바람결에 실려왔다. 대동강기슭에 배를 대고 팔을 내젓고있는 사나이가 유표하게 눈에 띄였다.

《무명천, 당목천, 잡화라두 좋수다. 아무거나 다 가져오시오. 마우재 <군표>만은 받지 않습네다.》

소금을 싣고온 사나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떠들어대는데 아마도 김장철이 지난 오늘까지 소금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것 같았다.

장마당변두리에서는 한 녀인이 지나가고 오는 사람들에게 등유, 어유, 밀초를 사라고 거의 애원하다 싶이 하고있었다. 웅성거리는 소음을 누르며 그 무슨 《해방탕약》을 부르짖는 호기어린 웨침소리가 제일 높았다.

《나라가 해방됐으니 질병에서도 해방이 돼야지요. 여러분네들, <해방탕약>이란 말 들어보셨소?고뿔에도 좋구요 몸보신에도 좋수다. 까마귀간 두돈에 후초, 생강 다섯량중, 깜장닭알 하나 마늘 한톨에다 능금씨 열알을 재운 인삼탕이오다. <해방탕약> 사소!-》

련광정의 원주들이 수면우에 거꾸로 서서 흐느적거렸다, 그 우에서 둥그런 파문을 지으며 헤염치던 물오리들이 경쟁적으로 자맥질을 하고있다. 부리에 물고나온 은빛물고기, 푸들쩍거리는 그놈을 부럽게 쳐다보는 아이들, 낚시대를 들고가는 농립을 쓴 늙은이, 손을 잠그면 금시 파란물이 들것 같은 맑은 수면으로 구을러가는 팔매질한 조약돌, 강건너 문수벌에서는 새떼가 날아오르고 뒤켠의 대통로에서는 거리를 질주하는 전차의 종소리가 끊임없이 울려오고있었다.

이 모든 정경을 홍목사는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보고있는듯 했다. 해방의 기쁨이, 생활이 들끓고있는 이 평화로운 정경과 지금껏 론의된 총이며 대결이며 전쟁이요 하는것과는 너무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기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눈길은 마치 저쪽에서 《평화를 깨치는 총》이라도 찾는듯 선창가에서 사창장마당에로, 그곳에서 또 숭실중학교의 지붕으로, 련광정에로 휘둘러졌다. 그러나 그속에서 총을 찾는다는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수 없다. 더우기 전쟁의 불씨는 결코 찾아내지 못할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여겨보시였다.

《얼마나 평화로운 정경입니까. 비록 갓 해방된 평양이니 어려움도 적지 않지만 모든것이 새롭게 시작되고있습니다.》

그이의 말씀에 홍목사는 목이 잠긴듯 이상해진 목소리를 짜내였다.

《예. 모든것이 훌륭하고 아름답게만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저 련광정에 <제일강산>이라고 쓴 글이 바로 오늘을 위해 씌여진 글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예-그렇습니까? 하지만 그 글발에도 가슴아픈 사연이 있는데··· 들어보신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저··· 옛날 어느 명현의 필적이겠거니 하고만 여겨 왔댔습니다. 장군님,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즉 우리의 이야기는 또 처음으로 되돌아가는셈입니다.》 하고 그이께서는 웃으시였다. 《제가 알기에 그 글은 명나라의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간 주지번이라는 사람이 련광정에 올라 평양성일대를 둘러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손수 <천하제일강산>이라는 여섯자를 써서 정각에 높이 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후 청나라의 왕족 한 사람이 왔다가 그것을 보고 낯색을 흐리며 <중국엔 금릉, 절강과 같은 명승지가 있거늘 어찌 평양이 천하에 제일이라 한단 말인고!> 하면서 당장 <천하>라는 글자를 지워버리게 했다는것입니다.

보십시오. 남의 나라에 와서 삿대질을 해도 분수가 있지 이런 고약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어찌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고 또 어찌 보면 민족적의분에 가슴떨리는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제 나라의 절경도 마음 놓고 자랑하지 못하고 남들의 눈치만 보며 살아온 민족의 아픔과 설음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국력이 약한탓에 게다가 제 민족을 지켜줄 군대가 없었던탓에 수치와 굴욕만을 받아온 지난 력사를 돌이켜보십시오. 듣자니 목사님은 김규식선생과도 교분이 두터우시다던데 그분한테서 피눈물나는 얘길 들어보시지 않았습니까. 이전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헛된 희망을 품고 만국평화회의에 갔다가 문전거절을 당한 일을!… 베르사이유궁전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울부짖고 호소했지만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실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렬사 리준선생이 피를 뿌리며 웨치던 일만이라도 상기해보십시오. 더이상 피눈물나는 민족사의 갈피갈피를 번져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

홍목사는 잠자코 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 화제를 돌려 물으시였다.

《아까 말씀하기를 고당의 부탁도 있고 해서 찾아왔다고 하셨는데 그가 우리의 군건설을 한사코 반대하는 속심이 어데 있다고 보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남의 꿈속길을 동행할수야 없지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남의 장단에 피리를 부는건 좋은 일이 못됩니다. 남의 장단에 매워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장군님, 전··· 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옳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지만 남들의 독설에 너무 귀를 기울이진 마십시오. <분렬의 각도>요 또 <동족상잔>이요 하는 주장을 말입니다. 미국이 만드는 군대는 못 본척하고 제 나라 제 민족을 지켜줄 군대는 무서워하니 과연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발밑에서 가랑잎들이 부시럭거렸다. 홍목사는 머리를 숙이고 단장으로 부스러진 가랑잎들을 헤집으며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고있었다. 발밑에 드리운 짤막한 그림자도 까딱하지 않았다. 고뇌의 빛이 어린 그의 강마른 얼굴에서 주름살들이 더 깊어지고 단장을 쥐고있는 손회목에 두드러진 피줄들은 퍼렇다 못해 시꺼멓게 보였다.

마침내 그는 머리를 들었다.

《장군님, 미거한 저의 의문을 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까 장군님께서는 미국이 해방자가 아니라 새 전쟁의 불씨를 갖고 온것처럼 말씀하셨는데… 참으로 그럴가 싶어서···》

장군님께서는 불현듯 추위를 느끼시였다. 지금까지 력사상의 실례들을 들어가며 열심히 설명하셨는데 홍목사의 숭미사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것 같다. 정녕 이 목사는 력사 그자체도 미덥지 않단 말인가?… 력사를 돌이켜봄은 래일을 내다보기 위해서이다. 거기서 교훈을 찾기 위함이다. 그런데 력사의 그 교훈조차 새겨두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력사의 그 교훈조차 못 미더워 한다면 그런 사람을 두고 뭐라고 하겠는가?!… 진정 숭미사상은 이렇듯 뿌리깊고 검질긴것인가?···

장군님께서는 안타까움에 겨워 어쩐지 피기까지 가셔진것 같은 홍목사를 여겨보시였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열번 스무번을 반복한다 해도 그의 뇌리속에 세워진 《해방자 미국》의 탑은 끄떡도 하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또 말씀하신다.

《지금 우리에게서 제일 위험한것은 미국에 대한 환상입니다. 미국을 해방자로 보는 이것때문에 우리 시대의 새 <시일야방성대곡>이 터질수 있습니다. 그때 가선 아무리 통탄하고 후회해도 필요 없습니다. 오늘 눈을 뜨지 않으면 래일은 늦습니다. 하기에 우리는 때늦지 않도록 제때에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군대를 세우고있습니다.

이제 서울에 나가신다니 스스로 보고 판단해보십시오. 후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눔이 어떻겠습니까?》

《장군님.》 홍목사는 경건한 자세로 웅글게 말을 이었다. 《천금같은 시간을 타내여 정말 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구··· 장군님의 웅도에 어긋나는 생각을 함부로 간하여 죄송합니다.》

장군님께서는 그가 자기 집으로 멀어져갈 때까지 한자리에 그린듯 서계시였다. 주도일부관이 초조해하며 킁킁 헛기침을 하고있는것도 알지 못하시였다. 가슴은 바위돌에 짓눌린듯 무거우시였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여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군건설을 저애하는 모든것이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미국의 본성을, 그의 침략적야망을 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눈을 틔워주어야 한다. 경제적 밑천이 마련된 다음에 군건설을 시작해도 된다는 주장이나 지웅도기사가 무기수리를 못마땅해 한것도 《분렬의 각도》를 부르짖는 궤변도 다 여기서 시작된다.

장군님께서는 가랑잎들을 밟으며 걸음을 옮기시였다, 찬바람이 그이의 외투앞섶을 열어젖히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더는 추위를 느끼지 않으시였다. 안타깝고 괴롭던 마음이 활 열리며 12월의 찬 바람을 한껏 들이쉬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