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6


 

제 2 장

6

 

동북의 광야를 흰눈이 뒤덮었다. 모진 겨울은 이제 겨우 입김을 불기 시작했으나 첫 추위는 소리없이, 참을수 없을 지경으로 눈에 덮인 대지를 옥죄이기 시작했다.

밤이였다. 바람 한점 없었다. 수림속의 나무가지들은 차디찬 별빛아래 얼어죽은것처럼 까딱하지 않고있었다.

박락권은 기병대를 이끌고 수림속에서 빠져나갔다. 말들이 갈기를 부르르 떨며 요란스럽게 투레질을 하고 류탄포를 끄는 말파리가 눈보라를 일쿠며 찌국거렸다. 말들이 허연 입김을 내뿜고 사방에서 채찍소리가 아츠럽게 울렸다. 그들은 얼어붙은 송화강의 작은 지류를 건너 해룡쪽으로 달리고있었다. 어제저녁 나루훈에서 남으로 마당거우밀림을 헤치고 곧장 서쪽으로, 휘남과 고산자의 중간을 택하여 강행군을 벌리고있는것이였다.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화룡에서 안도, 돈화를 누비며 토비들을 추격해온 그들이 이제는 이전 만철소유의 철도를 목표로 쉼없이 달려가고있는것이다. 황옥청이 알려준 소식에 의하면 료녕군구사령부지휘원가족들이 타고있는 렬차가 어제저녁 길림을 거쳐 심양쪽으로 끌려가고있다고 한다. 가족들을 인질로 료녕군구사령부를 투항시켜보려는 심산인것 같다. 놈들을 해룡부근에서 저지시키지 않으면 영영 놓칠수 있다. 그것은 반석-해룡-매하구사이의 수림지대만 꿰지르면 심양까지 질풍같이 달려갈것이기때문이였다.

원래 장춘철도는 대련-심양-장춘-할빈 직통으로 되여있었는데 도중 렬차를 탈취한 국민당군대가 무엇때문에 장춘-길림간 지선으로 빼돌렸는지 알수 없었다. 박락권은 놈들이 길림으로 가던중 그곳에 길동분구사령부의 조선인부대들이 목단강성, 길림성 전지역을 통제한다는것을 알고 황급히 서남쪽으로 방향을 돌린것이라고 짐작하는수밖에 없었다. 길림에서 남으로 가는 기차는 반석, 해룡을 거쳐 우리 나라 북변의 만포와 마주하고있는 집안으로 갈수도 있는데 통화-집안으로 렬차를 끌고갈 리유란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그곳 역시 길동분구사령부의 통제속에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리유로 렬차가 통화방향을 택할수도 있으므로 박락권은 그 분기점인 해룡부근에서 어느쪽으로 방향을 정하든 렬차를 탈취하기로 결심한것이였다.

그는 지금 자기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열이 나고 가슴이 타들고 줄곧 메슥메슥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끊임없이 눈덩이를 입에 쓸어넣는가 하면 뿌옇게 흐려지는 눈을 비비고 얼어드는 손으로 가슴앞섶을 쥐여뜯기도 했다. 이틀전부터 그런 증세가 시작되였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렬차탈취임무를 다른 날파람있는 대대장들에게 맡길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안될 말이였다. 바로 장군님께서 박락권 자기에게 주신 임무를 고열때문에, 열병때문에 남에게 떠밀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더없이 엄격해지고 랭혹해지기까지 했다. 그 누구에게도 자기의 병세를 알리지 않으려고 련락병 왕진은 물론 처녀무전수 정희에게도 시꺼멓게 충혈된 눈자위를 굴리며 퍼렇게 고통에 떨리는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게 하군 했었다.

그러나 처녀의 눈은 속일수 없었다. 자기 상관의 떨리는 살눈섭을 작고 새까만 두눈으로 주의깊게 지켜보는가 하면 뾰족한 입술을 꼭 악물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의 손을 잡아 자기의 뺨에 가져다대기까지 했다. 박락권이 소리쳤다.

《이건 뭐요?》

《뜨거워요. 막… 뜨거워요.》

박락권은 한순간 가슴을 치는 뜨끔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처녀의 섬약한, 작은 손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난생 처음 당하는 일이여서 힘들게 숨을 헐썩거리며 손을 뽑고나서 나직이 부르짖었다.

《또 한번 그러면… 용서치 않겠소!》

그러나 지금 박락권은 누구든 자기를 부축해주었으면 싶었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머리를 눈속에 처박고 딩굴고싶기도 했다. 무서운 의지의 힘으로 그것을 누르며 등자에 꿴 발을 힘껏 뻗쳐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잡고있었다.

강기슭을 따라 달려가는 기병대에 놀란 짐승들이 캥캥거리며 숲쪽으로 달려갔다. 뒤따르던 정희가소스라치듯 했다.

《저건 뭐예요? 승냥이뗀가요?》

련락병 왕진이 대답했다.

《승냥이는 무슨… 들개무리지요.》

《들개들도 사람을 해치나요?》

《그럼요. 어떤 땐 이리떼처럼 덤벼들어요.》

《아유 무서워!》

《백전마》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박락권은 눈앞에서 얼씬거리는 말궁둥이들을 꿈결에서처럼 아슴푸레 바라보며 또 한번 입술을 악물었다.

정희가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달렸다. 왼쪽에선 왕진의 거센 숨결소리가 울려왔으나 박락권은 오른쪽 정희가 속삭이듯 하는 말에 귀를 강구고있었다.

《난 알아요. 련대장동지, 그게 무슨 병인지…》

말들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허연 입김이 눈가루처럼 날리는듯 싶었다. 귀가 웅웅 울리고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에 몸서리가 쳐졌다. 여전히 귀전에 마쳐오는 정희의 목소리.

《이제 내가… 곤쳐 드리겠어요.》

정희는 《곤쳐 드리겠다》고 말했다. 이게 어느 지방사투리인가? 동북에서 나서 자란 그여서 알수 없었다. 혹시 그가 잘못 들은것인지도 모른다.

《전투가 끝나면… 내가 꼭 곤쳐 드릴게요. 걱정마세요.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앓군 했어요.》

박락권의 왼쪽에서 달리던 왕진이 비로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 소리쳤다.

《련대장동지가 앓는다구요?… 쳇》

미욱하기도 한 왕진, 정희는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살을 콕콕 찌르는 추위도 박락권은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눈앞에서 얼씬거리는 말궁둥이며 말꼬리들… 누군가 말이 뒤뚝거리는통에 가까스로 몸을 가누며 채찍을 휘둘렀다. 걸죽한 욕설, 뒤떨어 지는 류탄포… 박락권은 행군도중 번다한 구령과 지시를 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의 거동을 보고 사람들은 속보로 구보로 혹은 평보로 혹은 횡대를 지어 달리거나 급기야 전투태세로 산개대형을 이루고 습보로 내닫는데 습관되여있었다. 박락권이 앞서나가며 손을 들어흔들자 속보로 내닫던 말들이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경사면을 미끄러져 내려온 류탄포가 덜컹거렸다. 쌍두마가 그것을 끄느라고 허옇게 거품을 물고있는것이 보였다. 기병대에 단 한문뿐인 류탄포, 박락권은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이미 생각해 두고있었다. 그래서 힘들지만 포한문을 끌고온것이였다. 나루훈에서 로획한 90mm야포와 류탄포들은 국민당군 포로들한테서 포를 다루는 법과 사거리제원을 구하는법 등을 배웠었다. 포병중대를 편성하고 국민당군 포수들중 몇사람을 붙들어 두기까지 했다. 이제 그 포들이 은을 낼 때가 있을것이다. 그러나 지금 박락권은 한시바삐 그것을, 포탄을 쏴갈기고싶었다. 그 포소리로 흐릿해지는 자기의 머리를 정신들게 하고 타는듯 한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으면 싶었다. 때마침 정희가 옆구리에 차고있던 물통을 넘겨주었다.

《물을 마시세요. 련대장동지.》

박락권은 물통을 받아 입으로 뚜껑을 열고 꿀꺽꿀꺽 정신없이 들이키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붙어오던 왕진이 으시시 몸을 떠는것이 알렸다. 기겁한듯 입김을 내불며 그가 소리쳤다.

《뿌싱아 나 뿌싱아!-》(안돼요. 그러면 안돼요!)

그는 자기가 어느새 중국말로 소리쳤다는것도 의식하지 못한듯 했다. 그러건 말건 불이 일던 목구멍에 물을 량껏 쏟아붓고 박락권은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퍼리끄레한 달빛이 마구 흔들렸다. 저 먼 지평선까지 잇대여진 새로운 수림이 눈앞으로 일어서며 마주오는듯 싶었다. 그는 물통을 넘겨주고 얼어붙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됐어, 이제야 속이 좀 열리는군.》

해룡역에서 30리쯤 떨어진 철길에 가닿은것은 새벽녘이 가까와서였다. 박락권은 해룡쪽으로 정찰을 파하고 모두 불을 피우게 했다. 황옥청이 알려준데 의하면 국민당군대는 밤에 기차를 몰아갈 때 불도 끄고 기적소리도 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동북에서는 아직 적아의 점령지역이 뚜렷하지 않고 그 어느때 유격대 혹은 팔로군(놈들은 이들모두를 《비적》이라고 불렀다)의 습격을 받을지 알수 없기때문이였다. 그러나 밤을 무서워하는것은 놈들뿐이다. 한생 밤과 수림, 광야의 주인으로 싸워온 박락권이 불도 피우지 못하고 놈들을 기다릴수는 없는것이다.

불을 피우고 얼어든 몸을 녹였다. 대부분의 전사들이 닥쳐온 추위를 막기 위해 개가죽을 신발모양으로 오려내여 울라초를 깔고 신고있었다. 울라초(신발속에 가는 새초의 일종)야 말로 예로부터 동북땅의 세가지 보물 즉 인삼, 짐승가죽, 울라초로 유명했는데 유격투쟁에서의 공적으로 치면 제일 첫 순위에 꼽힐것이다. 울라초, 가죽, 인삼…인삼, 가죽, 울라초… 그 글자들을 손으로 써보고싶었다. 자기의 마음속 생각을 거침없이 다 쓰고싶었다.… 저도 모르게 불꼬챙이를 집어 땅바닥에 글을 쓰는데 그것을 읽고 정희가 탄성을 질렀다. 《장군님 주신 과업, 조국, 군건설, 혁명, 정규군… 참 잘 쓰시는군요. 련대장동지!》

화토불우에 군용밥통을 끓이고있던 왕진이 웃었다.

《그것보라요. 탄장동지가 앓는다구요?》

그는 어느새 눈을 파헤치고 마른 버섯들을 따왔는데 그것을 군용밥통에 넣고 배낭속에 간수해두었던 미국제통졸임통을 떼고있었다. 언 강낭떡이나 짠무우쪼각으로만 굼때여오던 그들로서는 호화로운 식사준비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박락권은 그것들을 아무 흥미없이 보고있었다. 참을수 없을 지경으로 눈까풀이 내려 덮이고있었다. 눈시울밑에 짝지발을 세우지 않는다면 금시 곯아떨어져서 불타는 화광속에 영영 잠겨 버릴것만 같았다.

중대장과 소대장들을 불러오라고 했다. 전투에 앞서 자기의 결심을 말해주면 될것이나 그는 그 어떤 경우든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묻군 했다. 그들의 전술적안목을 틔워주기 위한것이였다.

때로는 보통 대원들과도 전투계획을 토의했다. 그들속에서 지혜롭고 담찬 전사를 발견하면 그를 곧 분대장으로 소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중대장 김영걸과 소대장들이 달려왔다.

전투방안이 토의되였다. 먼저 철길가운데 통나무들을 가로지르고 포좌지도 만들기로 했다. 적들이 알아볼수 없게 잘 위장하였다가 렬차대가리부터 박산내고 기병대의 돌입으로 3등차칸을 떼여놓는 등의 방안이였다.

중대장 김영걸이 정희에게 가만히 물었다.

《련대장동지 무슨 탈이 나지 않았소?》

《열병이예요.》

박락권이 그들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중대장, 거기서 뭘 수군거리는거요. 빨리 전투조직을 하시오!》

그때부터 박락권은 김영걸이 소대장들에게 몇마디로 전투임무를 하달하는것을 듣고만 있었다. 머리를 수그리고 불꼬챙이로 불담옆의 흙을 파헤치며 무슨 글자들을 쓰는체 했다. 옆에 바투 다가앉은 정희가 다른 꼬챙이로 한자한자 글을 썼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련대장동지.》

날이 밝을 무렵에야 기다리던 렬차가 오고있다는 정찰의 보고가 왔다. 전체 기병대대가 말에 올라 철길량옆의 숲머리에 나와섰다.

박락권은 자기의 《백전마》에 올라있었다. 전투를 앞둔 흥분과 격렬한 총포탄속을 누비며 달려나가는 습관된 몸의 긴장이 머리를 빠개놓던 고열도 잊게 한듯 싶었다. 그는 렬차탈취 같은것은 문제로도 삼지 않았다. 비록 적들이 포와 기관총들로 무장하고있다 해도 포탄 한발이면 기차대가리를 박산낼것이며 150명의 일제사격은 렬차를 벌둥지처럼 만들어버릴것이다. 문제는 가족들이다. 그들이 어느 차칸에 타고있는지 알수 없으므로 무작정 총포탄을 쏘아댈수도 없다. 박락권이 손을 내밀자 어느새 왕진이 목에 걸고있던 쌍안경을 벗어주었다.

얼어붙은 대기속으로 숨가쁘게 달려오는 기차가 쌍안경의 렌즈속에 또렷이 드러났다. 기차대가리안에 좌우로 걸어놓은 미국제대구경기관총 두문, 다음 창유리를 단 객차방통들, 박격포와 류탄포들이 실린 무개화차 여섯개, 불담을 놓고 둘러서있는 철갑모 쓴 포병들… 맨 뒤쪽에 유개화차 두개가 또 달려있었다. 뜻밖의 정황이였다. 적들이 려객렬차를 군수렬차로 새로 편성해가지고 오는것이였다. 저만한 화력이면 한개 보병련대와도 맞설수 있을것이다. 눈에 띄운것만도 그러한데 얼마나 더 많은 기관총과 신식보총들이 객차방통과 유개화차속에 숨어있을지 알수 없는것이다.

박락권은 종전의 전투계획을 수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인제는 벼락같이 답새기고 렬차를 탈취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가족들… 장군님께서는 그들이 한 사람도 상하지 않게 구원하라고 명령하시였다. 가족들, 가족들이 문제이다.

점점 커지는 차바퀴소리가 귀전을 후려쳤다. 박락권은 숲가에 늘어선 대오앞으로 말을 몰았다.

《류탄포, 객차방통을 겨눌것!… 3중대는 맨 뒤쪽의 방통 두개를 떼내시오. 나머지는 일제히 돌입하여 차에 뛰여오를것. 벼락같이 해치워야 하오. 반항하는 놈들은 모조리 쏴갈기라. 돌격준비!》

앓고있던 병자같지 않았다. 어느덧 목소리는 쩡쩡해졌고 두눈에서는 불이 황황 일었다. 그가 손을 내젓자 150명 기병대가 숲가에서 바람같이 달려나갔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돌진해오는 기차와 씻은듯 맑고 검푸르게 열리는 새벽하늘뿐, 백오십필의 말들이 철길량옆에서 기차로 달려들었다. 무개화차우의 철갑모 쓴 적병들이 불담앞에서 머리를 돌리고 멍하니 굳어져있는것이 보였다. 소리도 없이 달려드는 수많은 기병들을 꿈에 보듯이 퀭해진 눈으로 바라보고있었다. 놈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엔 벌써 사나운 말들이 철길로반에 들이닥치고있었다. 박락권의 싸창 두개가 불을 토하며 기관차앞대가리의 기관총수들을 쓸어눕히자 먼 뒤쪽에서 펑끗 하더니 어느새 포탄이 객차방통의 등가운데를 무섭게 때렸다. 기세좋게 달리던 기차가 흠칫거리고 완충기들이 덜컹거렸다. 일제사격이 터진것은 다음순간의 일이였다. 불담곁의 포수들이 나딩굴고 유리창들이 박산났다. 많은 전사들이 말잔등에서 몸을 날려 객차방통에로, 무개화차에로 뛰여올랐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터지고 비명소리, 아우성소리가 한데 어울려졌다. 기차대가리우에서, 객차방통에서 기관총들이 울부짖었지만 그것도 잠간새 입을 다물고말았다. 말투레질소리와 《손들엇!》 《총을 놓앗!》 하는 격한 웨침소리들이 잇달렸다.

어느덧 렬차는 통나무들을 가로지른 철길굽인돌이에 멎어있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일로 두개의 유개화차방통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녀인들과 아이들의 새된 울음소리가 터지는데 그속에서 기관총이 널판자벽을 물어뜯으며 울부짖었다. 화차문을 열려던 몇사람이 허공을 그러안으며 로반아래로 나딩굴었다. 무턱대고 사방 쏴갈기는 총탄에 두툼한 널판자들에 숭숭 구멍이 뚫리고 나무쪼각들이 뜯기워 삐죽삐죽 비수같이 튕겨나왔다.

박락권은 대원들을 물러서게 했다. 절망에 빠진 유개화차속의 적들이 가족들을 폭살시킬수 있었다. 숨을 가쁘게 내뿜으며 온몸을 떨었으나 어쩌는수가 없어 싸창쥔 손으로 이마언저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바로 그때 정희가 포로된 장교 한놈을 끌고왔다.

《련대장동지, 이놈을 시켜 손들게 합시다.》

과연 정희다운 생각이였다. 별안간 처녀를 와락 부둥켜 안고싶은 충동이 일 지경이였다. 박락권은 포로된 장교(국민당군 소좌였다.)를 물어뜯을것처럼 바투 다가서며 억눌린 소리로 부르짖었다.

《저 안의 놈들을 손들게 하라. 그대신 포로들을 이 자리에서 풀어주겠다. 그렇게 할수 있는가?》

《예, 약속만 지켜주신다면…》

《난 조선인민혁명군 련대장 박락권이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그렇지만… 저 안의 사민들이 한 사람이라도 상하는 날엔… 모두 가차없이 총살해버리겠다. 알겠는가?》

국민당군 소좌는 퍼렇게 질린 낯으로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이윽고 그가 유개화차에 대고 소리쳤다.

《두호영소위! 나 대대장이다. 황개정이다. 우린 모두 포로되였다. 총을 놓고 나오면 다 살려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내 말을 듣는가?》

안에서 사천지방의 심한 사투리말이 울려나왔다.

《대대장님, 누가 우릴 습격했습니까. 팔로군입니까?》

《아닐세 두호영!… 조선인민혁명군이야. 그저 총이 필요하다는거야. 우리하군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네. 어서 나오라구.》

드디여 화차문이 열렸다. 맨먼저 기관총이 굴러나오고 뒤따라 국민당군 소위와 병졸 두명이 손을 들고나섰다. 소위가 사방을 둘러보다가 포로된 소좌를 비롯한 자기네 상급들이 군복차림 그대로 서있는것을 보더니 안도의 숨을 내뿜으며 손을 내렸다. 그러나 미처 화차에서 내리기도전에 와-하고 밀려나오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철길로반우에 나딩굴었다. 울고불며 정신없이 헤덤비는 사람들, 늙은이, 아이들, 녀인들이 무너지듯 화차에서 쓸어나왔다.

…50여년 세월이 지난뒤 황옥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중국혁명에 사심없는 지지성원을 주신 하많은 사연들을 회고하여 쓴 글 《고결한 혁명적의리를 되새기며》를 로동신문에 발표하였는데 거기엔 이런 구절도 있다.

《…그때 공산당가족이라고 하여 도륙을 당할번 했던 우리 지휘원들의 아들딸들이 이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여 저마끔 번창한 가문을 거느린것을 보느라면 주석동지가 아니였던들 어이 그들의 오늘이 있었을가 하는 생각으로 그분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에 쩌릿이 눈굽이 젖어든다.》

박락권은 료녕군구지휘원들의 가족들을 미리 준비하여온 말파리들에 태우고 한개소대를 붙여 조선으로, 북부국경대안 의주에로 떠나보냈다. 이윽고 눈물어린 감사의 인사말들이 멀어져갔다. 박락권은 말발굽밑에서 뽀야니 일어나는 은빛눈가루들을 점도록 지켜보며 후들후들 몸을 떨고있었다. 그들은 강건너로 가건만 그는 또 멀리 북동쪽으로 행군해야만 했다. 아직은 기약할수 없는 길, 싸움은 이제 시작에 불과한것이다. 시뻘건 태양이 눈덮인 광야를 붉게 물들이고있었다. 온통 붉은색일판이였다. 하늘이 타고 수림이 타고 광야를 덮고있는 눈더미들이 불타고있었다. 피빛으로 물든 붉은 눈,시뻘건 하늘, 무어라고 웨치며 그를 부축하는 정희의 해쓱하던 얼굴도 온통 피빛이였다. 그는 그렇듯 진하고 뜨거운 불길속에 몸을 잠그고 서있었다. 목이 타들다 못해 숨이 막혀 더는 견딜수 없어 몸부림치며 버티려고 했으나 눈조차 뜰 힘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헤쳐놓은 가슴팍을 박박 허비며 두눈의 흰자위를 번뜩이던 끝에 그만 의식을 잃고말았다.…

후에 가서야 알게 되였지만 100여명의 전사들이 자기네 련대장을 위해서 사냥에 떨쳐나섰다고 한다. 해룡과 휘암, 반석사이의 광대한 산악수림지대를 말을 타고다니던 끝에 곰을 한마리 잡아냈다. 정희가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하였던것이다.

수림속 깊은 골안에 아편굴모양의 반토굴을 짓고 돌로 깐 바닥을 불을 때여 덥히였다. 곰의 생피를 억지로 박락권의 입에 쏟아넣고 곰가죽을 씌운채 정신없이 땀을 뽑게 하였다.

박락권이 눈을 떴을 때는 저녁무렵이였다. 설핀 해빛이 뙤창으로 흘러들고있었다. 그는 눈을 뜨고 지금 자기가 어디에 와있는것일가 하고 생각하다가 주의깊게 들여다보는 정희의 해쓱한 얼굴을 발견하였다. 땀에 얼룩진 얼굴에서 유난히도 푹 꺼져들어간 두둔이 웬일인지 가슴을 쿡 찌르는듯 했다. 그것은 날씬하고 말쑥하던 처녀의 얼굴이 아닌 늙고 처량하고 힘없는 늙은이-어머니다운 애정과 사무치는 련민의 정이 비낀 전혀 달라진 낯선 녀인의 얼굴이였다. 비로소 그는 자기 역시 온몸이 땀에 젖어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손을 내밀어 정희의 말없는 얼굴의 땀을 더듬어 훑었다.

《그것 보세요.》 정희가 힘없는 속삭임으로 말했다. 《내가 이미 말했지요? 꼭 곤쳐 드린다구.》

《…》

그는 손을 내려 땀에 흠씬 젖어있는 처녀의 군복을 더듬었다. 힘을 주어 비틀면 물이 뚝뚝 떨어질것 같이 온통 젖어버린 군복… 어깨우에서 가슴으로, 다시 옹크리고 앉은 무르팍에까지 손이 내려왔다.

여전히 정희는 꼼짝하지 않고있었다. 두눈만이 펀뜩 광채를 뿜고 소스라치듯 몸을 떨었을뿐이였다. 한없는 피로와 기진함에 당장 쓰러져 잠들것 같던 늙은이의 얼굴이 생신하게 밝게 빛나고있었다.

《됐어요. 이젠 다… 잘 될거예요.》

《…》

누가 이 처녀를 오라고 했는가?… 모든것이 생생하게 기억에 떠올랐다. 어떻게 되여 이 처녀가 곁에 오게 되였던가?… 일찍 경험해본적이 없는 애틋한 정과 고마움이 목구멍 가득히 고여올랐다.

정희가 그의 손을 들어 땀에 젖은 볼에 가져다대였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

여전히 아무말없이 처녀를 지켜보았다. 땀방울이 줄지어 흐르며 두눈을 쓰리게 했다. 정희가 그것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팔로군가족들은 다 무사히 의주에 도착했답니다. 련락이 왔어요.》

그것도 생각 났다. 그들과 같이 조국으로 가고싶던 그 타는듯 하던 욕망도 생생하였다. 별안간 그는 몸을 움쩍거리며 이불을 벗어던지려 했는데 벗겨지지 않았다. 비로소 자기가 곰가죽을 쓰고있고 칡으로 꽁꽁 동여 매여있다는것을, 자기가 알몸으로 땀에 젖어 그속에 누워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까닭모를 수치심과 공포와도 비슷한 전률에 온몸이 저려났다. 누군가 무수한 바늘끝으로 그의 머리를, 그의 온몸을 콕콕 찔러대는듯 했다. 그는 부둥거리며 팔을 내저었다.

《누가 이렇게 했소. 엉?…》

《…》

대답이 없었다.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는 처녀의 눈가에서 이슬이 반짝이였다. 하여 그는 깨달았다. 이 처녀 정희가 환자를 맡은 녀성의 권리로, 녀성들만이 해낼수 있는 사심없는 모성의 권리로 처음부터 줄곧 그를 지키며 돌보았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숨막힐듯한 침묵… 수치심은 곧 미칠듯 한 분노의 발작으로 바뀌였다.

《거기 누가 없어?》 하고 소리쳤는데 자기 목소리같지 않았다.

《련락병!…》

별안간 밖에서 발자국소리들이 요란스레 울려왔다. 말투레질소리와 《련대장동지가 부른다!》 하는 웨침소리가 터졌다. 문이 벌컥 열리며 련락병 왕진이 뛰여들고 중대장 김영걸과 또 낯익은 몇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다들 시퍼렇게 얼어있는듯 했다.

그는 팔을 내저었다.

《다들 나가!… 련락병 빨리 내 옷, 총이랑 다 가져오라구.》

모두 쫓아버린 다음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싸창 두개를 옆구리에 차고 련락병 왕진이 들여보낸 채찍까지 손에 감아쥐였다.

그는 채찍을 풀며 뙤창을 노려보았다. 바위벽에 붙여지은 반토굴에서 유일한 뙤창을, 해쓱하니 질려있는 정희의 얼굴처럼 작고 희미한 뙤창과 짐승가죽을 쳐놓은 문, 일본놈들한테서 빼앗은 화식도구들, 바닥에 깔아놓은 울라초무지 등을 둘러보았다.

천천히 채찍을 들어 뙤창을 후려쳤다. 아니 정희의 정겹고도 해쓱한 얼굴을, 어쩐지 마구 때려주고싶은 그 얼굴을 노려보며 채찍을 안겼다. 이끼들이 살점같이 뜯겨 날아나고 통나무의 껍질이 벗겨졌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는가. 숱한 사내들이 있으면서 죄꼬만 처녀한테 이 련대장을 맡겨버리다니… 정희, 너 맞아보라. 왕진이 이 녀석 너도 한번 죽어봐라! 중대장은 또 뭘하는거야!…

숨을 헐썩거리며 채찍을 내던졌다. 가죽문이 드리운 밖에서 정희가 흐느껴우는듯 했다. 무엇때문인지 가슴이 섬찍해났다. 숨죽은 정적, 삼실로 꿰맨 가죽문을 젖히고 밖에 나선 그는 바위벽 모서리에 오도카니 서있는 정희를 보았다. 바위쪽에 머리를 돌리고 가느다란 어깨를 떨고있는것을 띠여보자 손끝까지 저려나는것을 느꼈다. 정희!… 인젠 동물 어떻게 하면 좋겠소, 도대체 동문 내게 뭐가 되오?… 무선수요, 련락병이요, 아니면 선생? 애인?… 별안간 숨이 차올라 견딜수 없었다. 애인이나 안해로 못될건 뭔가, 동무만 반대없다면… 반대없다면… 그럼 난 선포할테요, 나의 안해라구!…

그때 소식을 들은 대원들이 우-밀려왔다. 기쁨에 넘쳐 《련대장동지!》 하고 소리쳐 부르는데 누군가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번득이고있었다.

박락권은 그들앞으로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그들모두를 한꺼번에 얼싸안고 볼을 비비고싶은 마음, 그러나 한손으로 터질것 같은 가슴을 비벼대며 늙은이같이 석쉼해진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럴새가 없소, 동무들. 승마!…》

빨리 련대를 모여 재편성해야 했다. 로획한 포들로 포중대를 강화하고 싸우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또 끝없이 싸워야 했다. 조국으로 가는길은 아직 멀고 또 험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