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9


 

제 1 장

9

 

곽일무에게 전화를 건것은 평양학원련락소의 고윤이였다. 얼굴과 손발이 새까만 한종삼과 마주앉아 그의 두서없는 말을 듣다못해 곽일무를 전화로 찾았던것이다. 곽일무가 그를 잘 안다고 하니 강계에서 최현을 만났던것도 사실인것 같다. 최현이 그를 군대에 들지 않겠는가고 했을수도 있다. 덜퍽진 이 농촌태생 젊은이도 병사로서는 적합할런지도 모른다. 성실하고 꾸준하고 직심스러운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한몫 단단히 한다는것을 실지 체험으로 잘 알고있는 고윤이였다. 그렇지만 이 어리숙해보이는 청년은 평양학원에 보내달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첫 군사정치간부양성기지로 꾸려지고있는 평양학원, 한종삼이 그곳에서 군사간부로 혹은 정치일군으로 자라리라고 믿기는 어려운 일이다.

고윤은 시계를 보았다. 9시 15분, 지금 계절로는 한밤중이다. 그는 지친듯 손으로 눈두덩을 비비며 심드렁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고향이 어데라구?》

《예, 영천리…》

《?!…》

고윤은 그가 양촌리라는 자기 고향이름을 대는줄 알았다. 두눈을 슴벅거리며 다시 묻고서야 가볍게 한숨을 내그었다.

고향!…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늘 고향생각을 하군 했다. 금강의 지류인 삼계천이 흘러내리는 작은 마을 양촌리… 어린 시절이 흘러간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것은 넓은 삼계천에서의 숭어잡이이다. 7∼8월이면 잉어, 숭어, 장어 같은 민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올라오는데 그중에서도 숭어가 제일 많이 잡힌다. 특히 추석을 앞둔 때이면 조무래기들까지 떨쳐나 어른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법석대군 한다.

먼저 작은 둔덕을 사이에 둔 물곬에 대발을 쳐놓고 싸리발로는 시내바닥을 반반히 훑으며 고기떼를 몰아간다. 이윽고 대발과 싸리발이 서로 가까와지면 한군데 몰린 숭어떼가 량편 발우로 푸들쩍푸들쩍 뛰여오른다.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뛰여오르는 숭어를 날쌔게 덮쳐안는데서는 고윤을 당할 소년이 없었다. 푸들쩍거리는 놈마다 덥석 잡는것과 동시에 용을 쓰는 그 힘을 리용하여 기슭으로 쥐여뿌릴 때의 벅찬 환희!… 그러나 그뿐이였다.

가난한 고향마을은 즐거운 추억도 남겨두지 않았다. 산골짜기를 따라 초가지붕들이 수수밭모퉁이마다에 처마를 낮추고 널려져있었고 가을이면 고삭은 지붕우에 하얀 박통들이 너덧개씩 움푹 파고들며 배불러가고있었다. 극상해서 꽁보리밥과 열무김치로 이어가던 마을, 그래도 그리운 고향이였다. 그 고향을 떠나 지구의 절반길을 걸어가고 걸어왔었다. 간도와 연해주, 우즈베끼스딴, 거기서 또 제2차세계대전이 그의 젊음을 소리쳐 불렀던것이다.

20여년만에 다시 돌아왔건만 아직도 고향은 멀고 또 멀다….

고윤은 한종삼이 부러웠다. 그가 다시 돌아갈수 없는 고향에 대해 중얼거리는것을 희미하게 꺼져가는 눈빛으로 멀거니 보고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몸집이 우람한 사람이 찬바람을 몰고 들어섰다.

《따와리시 고! 잘 있었소?》

허가이였다. 고윤은 군대식으로 벌떡 일어서며 차렷자세를 취하였다. 쏘련군대군관이였던 그를 조국에 나오도록 힘써준 허가이, 고윤은 그를 존경하고있었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정열과 절제있는 생활방식을 따라배우기 위해 힘썼다.

《일이 잘 돼가오?… 보고싶어서 왔소!》

허가이는 고윤이쪽으로 한손을 내던지듯 했으나 그만 구석쪽에서 엉거주춤 일어서고있는 한종삼을 띠여보고 눈을 흡떴다.

《이건 뉘기요?》 앞으로 내던졌던 손을 들어 허공을 그러쥐며 허가이는 로어로 또 물었다.

《아뜨꾸다 브쟐라씨 따까야 보로나? (어데서 이런 까마귀가 나타났소?)》

고윤이 촌에 살던 젊은이인데… 하고 말해주려 했으나 허가이는 벌써 한종삼의 눈앞에 가있었다.

《군대가 되려구? 그래서 왔겠지.》

《예.》

한종삼은 주눅이 들어서인지 가늘게 대꾸했다.

《추천서가 있소?》

《저… 그건 무스겐지…》

《아 없다.- 제발로 찾아왔구만. 응?… 그것도 쉽진 않아.》 허가이는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가, 평양학원이 선다는것을?…》

고윤이 보다 못해 어리뻥해지고있는 한종삼을 대신하여 강계에서 최현동지를 만나 알게 된것 같다고 비록 정확치는 않으나 자기가 들은 길고 두서없는 사연을 단마디로 요약하여 말해주었다.

허가이는 로씨야식으로 두팔을 쩍 벌렸다.

《최현동지를 만났단 말이지. 허!-》

그의 몸짓과 토막치듯 내던진 웃음속에 무엇인가 최현에 대한 불신과 가벼운 비양이 숨어있다는것을 그는 알아차렸다. 무엇때문일가. 항일투사들인 김책과 안길 등에게 깍듯이 례절차려 대하는것을 보아왔는데?… 고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평양학원 학생이 되겠다?-》 허가이가 또 묻고있다. 《그렇지?》

《저… 학생은 말구…》

한종삼의 기가 눌린 말에 그는 또 토막웃음을 《하!-》 하고 내던졌다.

《평양학원이 뭣하는덴지 아오?》

《저…》

《모르겠지. 그럴수밖에… 쉽게 말해서 군대간부들을 키워내는데요.》

《간부?》

《그렇소. 수백 수천명 군인들을 지휘할 간부들을 키워내는 군사정치학원이란 말이요. 헌데… 동문 글을 읽고 쓸줄은 아는가?》

《저…》

《물론 모르겠지, 하지만 그게 동무탓은 아니야. 식민지노예살이의 후과이지. 그렇지만 락심할건 없소.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글도 배우시오. 지금 온 나라에서 문맹퇴치운동이 벌어지고있는데 글을 알아야 해. 까막눈이 돼가지군 혁명을 못해. 무슨 말인지 알만하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허가이는 고윤이쪽으록 돌아앉았다.

《쓰라주 줴 이즈고니쩨!(당장 돌려 보내오!)》

순박한 농촌젊은이였지만 한종삼은 허가이의 그 말을 찌르는듯한 감각으로 알아들은듯 했다. 흘끔 고윤이를 쳐다보는데 차거운 불신과 경멸의 숨은 그림자가 두눈에서 얼씬하였다. 고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식사는 했소?》

《…》

《미안하오. 동무, 몹시 시장하겠는데…》 고윤은 급히 상의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내게 돈이 좀 있소. 그걸 가지구 가서…》

한종삼의 두눈이 번득이였다.

《그런 걱정은 말우!》

눈앞에서 무엇인가 얼씬했다. 한종삼이 손으로 비틀어대고있던 헐어빠진 맥고모를 되는대로 머리에 올려놓고있는것이였다. 그리고는 씽 하니 문을 차고나갔다.

허가이가 주먹을 입에 갖다대고 쿵쿵 헛기침을 했다. 고윤은 맥없는 걸음으로 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동무일도 헐친 않겠소.》 허가이가 말했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겠으니.》

고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코뜰새 없는 허가이가 왜 이런데까지 찾아왔을가 하고 시진하게 생각하였다. 그의 마음속 생각을 읽은듯 허가이가 웃으며 말했다.

《동문 지금 허가이란 사람이 왜 밤중에 왔을가 하고 생각하는것 같은데… 뭐 이상할건 없소. 나도 지칠 때가 있거든. 그래서 친구를 찾아온거요. 자, 어데 가서 회포나 나누기요.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우리가 첨 만났을 때처럼 말이요.》

그들은 《계림냉료리》라고 좀 서툴게 간판을 써붙인 근화리음식점으로 갔다.

차를 타고온 간부들이라 해서 진하게 화장을 한 중년의 녀인이 별채의 다방으로 그들을 안내하였다.

《저… 술도 들여올가요?》

《음.》 허가이가 말했다. 《소주를 가져오우. 독한거!》

《예 알겠어요. 그런데… 술을 쳐드릴 게이샤(기생)도 요구되시겠죠?》

군턱이 진 허가이의 두볼이 움씰거렸다. 녀인을 쏘아보는 그의 두눈에서는 불빛이 파르르 떨고있었다.

《그건 무슨 소리요. 게이샤라니?!… 해방된지가 언젠데 아직도 일제잔재가 그대로 살아있는가. 에? 그런 낡은 관습은 싹 걷어치우시오!》

《예, 예, 그리 해야죠. 예.》

녀인이 황황히 물러가자 허가이는 모욕을 당한듯 얼굴이 벌개서 가쁜 숨을 몰아쉬였고 고윤은 감동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가이는 육중한 몹집과 정열적인 활동가답게 주량도 대단했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의 도량과 주량에 어지간히 놀라고 감탄했던 고윤이였다.

쥬꼬브원수가 지휘한 전선군에서 대대장으로 싸우던 고윤이 크라스노야르스크의 후방병원에서 치료받던 지난 4월초였다. 퇴원을 얼마 앞둔 그날 허가이가 찾아왔다. 전엔 우즈베끼스딴에서 구역당 제2비서사업을 했었는데 얼마전부터는 원동에서 당사업을 한다고 하였다. 크라스노야르스크로 출장을 온 그는 씨비리철도의 중요역들인 또스크, 노보씨비리쓰크 등지에 까자흐스딴, 우즈베끼스딴에서 새 조국건설의 역군이 될 수많은 병사들이 모이고있다면서 고윤이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들었다. 그들가운데는 전선군인들도 적지 않으므로 고윤이도 례외로 될수 없다고 꼭 끼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주 신문에서 병원에 입원하고있는 용감한 대대장 고이완에 대한 기사를 읽고 찾아왔노라고 했다.

조국으로 간다는 말에 고윤은 가슴이 풀떡거렸지만 그때 그는 정규군의 군인이였다. 군사규정은 물론 전시법의 엄격한 질서는 그러한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사소한 탈영, 리탈도 가혹하게 처벌되고있었다.

그러나 당사업년한이 오랜 허가이는 솜씨있는 활약가였으며 명망도 있었다. 어렵지 않게 주당과 모스크바에 전화를 걸고 지기들을 내세워 붉은군대 총참모부와도 련계를 가졌다. 드디여 고윤을 대일작전에 참가할 원동군에 조동시키기로 락착되자 그들은 즉시 상봉을 기념하여, 해방된 조국에서의 활동을 기약하며 축배를 들었다.

《베료즈까(봇나무)》라는 서정적인 이름을 단 소박한 식당에서였다. 독한 마라초연기가 구름처럼 천정에 떠돌고 한쪽에서는 경쾌한 바얀곡조에 맞추어 처녀들의 허리를 껴안은 새 군복차림의 젊은 군관들이 장화발을 굴렀다. 왈쯔로부터 까드릴, 뽈까로 춤곡이 바뀌면서 날씬한 처녀들의 굽높은 구두발들은 마치 못이라도 쪼아박는듯 마루바닥을 울리고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서는 미칠듯한 기쁨과 즐거움이 웃음발을 날리고있었다.

아직 성에가 불려있는 창밑의 식탁에서는 멀지 않은 전승의 그날을 유리잔이 깨여질 정도로 요란스레 맞쪼으며 축하했다.

떠들썩한 웃음, 거쉰 웨침소리, 휘파람소리… 루바슈까혼솔이 터져나갈 정도로 몸집이 우람한 장년의 사나이가 바얀수를 끌어가더니 웅장한 바리톤으로 민요를 뽑았다.

 

볼가강하류로 물결따라 흐른다.

 

허가이는 격동되여있었다.

정든 로씨야를 떠나게 될 아쉬움때문인지 아니면 한시바삐 가고싶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때문인지… 팔소매로 눈굽을 찍으며 노래를 따라불렀다.

 

니쥬니노브고로드에서 떠나는 배에는

용감한 배군이 마흔두사람

 

《그래, 그래!》 허가이가 목메여 부르짖었다. 《내가 탄 배에도 마흔두사람, 그리운 조국으로 떠나는 배에는… 아니 그보다 더 많아. 스쩨까 라진의 용사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가, 여보 고이완, 아- 고윤이라구 했지. 동문 왜 한마디도 하지 않는가. 그래 조국으로 돌아가게 됐는데 기쁘지 않은가?…》

《물론 기쁩니다.》 고윤은 딱딱하게, 아무런 감정표현도 없이 말했다. 《기쁨도 크고 근심도 많습니다.》

《그건 왜, 무슨 근심말인가?》

《조국에 돌아가서 무슨 일을 했으면 좋겠는지… 총밖에 모르는 제가 말입니다.》

《걱정 말라구, 고이완, 동무의 침착성, 랭정성, 결단성, 이거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나. 나와 같이 일해보자구. 조국을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

허가이는 그때처럼 번마다 고윤의 어깨를 두드리고 무르팍을 건드리며 한잔 또 한잔, 기울이군 하였다. 하바롭스크에서 나서자란 그여서 자기의 어린 시절이 흘러간 아무르강기슭이며 혁명을 배운 우즈베끼스딴의 싸마르깐드를 가슴저미는듯한 애수속에 추억하기도 하였다.

고윤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앉아 한가지 생각에만 골몰하고있었다. 해방된 조국에서는 붉은군대 소좌였던 그를 그닥지 필요로 하지 않는것 같다. 쏘련군사령부에서 통역원으로 있었고 지금은 평양학원련락소에 옮겨와 인원선발과 료해문건작성 그리고 쏘련군사규정책들을 번역하고있을뿐, 군건설사업이 한창인데도, 경험있는 사람들이 부족하여 애를 먹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건설의 변두리에서 꾸무적거리고있다. 당사업경험이 풍부한 허가이는 단번에 자기의 존재를 드러냈지만 사선을 헤치며 지구의 절반길을 걸어온 고윤 자기의 존재는 아직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있다.

그는 입술에 대고있던 술잔을 맥없이 도로 놓았다. 허가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오. 고이완, 몸이 편치 않소?》

《아닙니다.》

《그럼 기분상한 일이라도 있는게 아니요?… 고이완, 왜 그러오?》

《허가이동지, 전… 제 이름은 고윤입니다.》

허가이는 눈꼬리를 치뜨고 그를 여겨보았다.

《미안하오, 고윤동무.》

허가이가 쥐고있는 잔에서 술이 쏟아지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있는듯 했다. 입술을 가늘게 떨면서 나직이 경고하듯 그는 말했다.

《내가 동물 추천했다는걸 잊지 마시오. 내가 직접 장군님께!》

《알고있습니다. 허가이동지.》

《그럼 됐소.》 허가이는 그의 무르팍을 건드리며 잔을 돌려주었다. 《난 동무가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리라는걸 믿소. 그래 여전히 문건을 만들고 차조직을 하고 번역하는 일을 하오?》

고윤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틀전 안길동지가 와서 평양학원의 학제를 1년으로 하는 경우에 군사교육과정안을 어떻게 짤수 있겠는지 연구해보라고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니 그럴리야!》 허가이가 소리쳤다. 《안길동지가 설마!… 다른 나라들에선 수재들을 골라가지고도 4년이나 닥달질하는데 1년안으로 군사간부들을 키워낸다?- 여보 고윤동무, 그럴 때 동무가 조언을 줄수도 있지 않소. 빨찌산들이야 산에서 피흘리며 싸우다보니 공부도 못하고…》

여기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엷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조용히 계속했다.

《그래도 김책, 안길동지들은 달라. 그들은 존경이 가거든. 그렇다해도 할말은 해야지. 아까 본 그 잠뱅이청년들을 가지구 1년안으로 군사간부를 키우다니. 그래 동문 그걸 믿소?》

고윤은 대답을 피했다. 그 역시 믿지 않지만 전투의 나날에 절대복종의 정신으로 훈련되여온 그였으므로 안길의 지시를 집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물론.》 허가이가 계속했다. 《뒤에서 시비질이나 하는건 당적원칙과 어긋나는 짓이요. 그래선 안돼. 그대신 정정당당하게 자기의 뜻을 주장해야 하오. 동무도 용감한 전선군인이였지. 주장하시오. 내놓고!… 그게 혁명에 리롭소. 푸룬제군사아까데미야의 본보기가 있지 않는가. 어떻소. 고윤동무?!…》

흥분으로 상기된 허가이의 얼굴에서 가늘게 좁혀 뜬 두눈이 탄알같이 고윤을 내다보고있었다.

《…》

고윤은 이번에도 대답을 피했다. 피곤했다. 한잠 푹 자고싶었다.

실컷 자고나서 또 생각해보자. 지금 하고있는 일이나 마무리짓고나면 또 무슨 일을 하게 될지….한때 우즈베끼스딴에서 꼴호즈의 수의사로 일한 일도 있으므로 다시 그 일을 시작할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붉은군대 소좌였던 자기가 군건설사업이 한창인 때 소나 말, 돼지의 혀바닥이나 뒤집어본다는것이 될 말인가? 웬일인지 서글퍼졌다. 그가 조선사람으로서 붉은군대의 대대장으로까지 된데는 그의 피속에, 정신속에, 박달나무같이 단단한 육체속에 남다른 그 무엇이 있었던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그의 담찬 기개도 의지도 불굴의 투지도 인정받지 못하고있다. 보병련대나 사단도 지휘할수 있는 그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 그러오.》 허가이가 또 물었다. 《오늘은 전혀 들지 않누만.》

고윤은 자기 속마음을 내비치고싶지 않아 심드렁한 어조로 화제를 돌렸다.

《저… 부장동지, 실례지만 본래 이름은 어떻게 불렀습니까?》

허가이는 뜻밖의 그 물음이 언짢은듯 미간을 찌프렸으나 꼬집지는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내야 허가이지. 고윤동무가 무슨 뜻에서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뭐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그저…》

그는 말끝을 흐리며 허가이의 찌르는듯한 눈길을 태연히 무심한체 마주보았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김스딴께비치, 최마리야, 박쎄르게이, 오줴냐 등으로 불리우던 로씨야식이름을 다 줴버린지 오래나 허가이만은 조국을 잃고 헤매던 지난날의 굴욕을 꼬리처럼 그대로 달고있는것을 고윤은 늘 이상하게 생각해 왔었다. 지금 쏘련에서 나온 사람들, 흔히 항간에서 《얼마우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속에 류가이라는 사람도 있다. 류가이, 허가이,… 우리식 이름이 없어서 류가이, 허가이, 박가 등으로 불리우고있다는것이 말이 되는가?…

《조국에 돌아왔으니.》 고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당 자기이름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실 쏘련사람들은 왜 이름까지 바꾸도록 했는지 리해할수 없습니다. 사회주의쏘련에서!》

허가이는 인차 입을 열지 않고 조을고있는듯 눈을 감았다. 그러나 내심의 격렬한 분노가 거친 숨결로 새여나오고있었다. 마침내 엷은 입술을 바르르 떨더니 고윤을 향해 탄알같은 눈을 뜨고 매몰스럽게 말했다.

《쏘련을 건드리진 마오. 고윤동무, 그래도 거기선 동무를 소좌로, 대대장으로까지 승급시키지 않았소!》 잠시 숨을 돌리고나서 천천히 매 말마디들에 힘을 주며 그는 계속하였다. 《그리고 내 이름은, 허가이란 이 이름은 이미 너무도 유명해졌단 말이요. 그걸 바꿀 필요는 없소!》

《?!…》

고윤은 잠자코 있었다. 허가이의 그 말이 자기자신의 운명을 규정짓는것이였다는것을 그는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속은 언짢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