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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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는 황철구내에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김규식은 차에서 내려 제철소전경을 에둘러봤다.

황철참관을 그닥지 않게 생각하며 지난밤 눈앞에 그려본 제철소와는 대비도 할수 없게 우선 규모가 여간 방대하지 않았다. 대도시의 고층건물인양 소소리높이 솟아있는 해탄로, 파랗고 노랗고 흰연기를 내뿜으며 줄지어 늘어선 굴뚝들, 그 밑에서 기관차가 기적소리를 높이 울리며 화차를 달고 기세좋게 달리고있었다. 거기에다 거대한 철탑모양의 한 용광로에서 출선이 시작된듯 작렬하는 백열광을 토해내며 몸부림을 치고있었다.

김규식은 창조적열의가 끓어번지는 제철소의 분위기에 어지간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북조선의 공업을 왜놈들이 깡그리 파괴하고 달아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언제 이렇게도 거대한 제철소를 재생시켰는가!

김규식이 로체에서 너울거리며 쏟아져나오는 쇠물을 바라보며 황철에서 생산되는 저 선철이 북조선에서 정략으로 내놓았다는 자립적민족경제건설에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할수 있겠는가를 생각하고있는데 등뒤에서 윤명현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들을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김규식이 말없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안내자가 있어야 필요한 설명을 들을수 있을것이다.

황철에서 무엇이 얼마나 생산되는지 알지 못하고서는 이 제철소가 북조선의 경제건설에 어떤 기여를 하고있는지 알수 없을것이였다. 김규식이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또다시 등뒤에서 《선생님, 마침 됐습니다.》 이런 윤명현의 목소리가 들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진회색양복깃안에서 와이샤쯔의 흰빛이 얼씬거리고 턱밑에는 넥타이를 드리운 젊은이와 함께 윤명현이 급히 다가오고있었다.

《련락을 늦게 받아서 마중을 하지 못해 안됐습니다. 정준택입니다.》

단정한 양복차림인 젊은이가 앞에 와서 넥타이를 옷깃안에 밀어넣으며 깍듯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상수리숙소를 떠나기직전에 황철에 간다는 통고를 해서 이제야 소식이 온 모양이다.

《북조선인민위원회 기획국장선생입니다. 현재는 산업국사업에도 관여하고있답니다. 안내하는 수고를 해주시겠답니다.》

김규식은 동그스름한 얼굴에 눈섭짙은 정준택의 얼굴을 찬찬히 여겨보며 나이를 대충 잡아봤다. 기껏잡아 30대 중엽일것이다. 이렇게도 젊은 사람이 기획만이 아니라 산업도 관여하고있다니?··· 지난해 2월 북조선에서 인민위원회를 내올 때 비서들이 북조선의 최고집행기관의 조직기구라면서 한통의 서류를 그앞에 놓아주었다. 자기의 기억력을 믿을수 없는 나이에 이르렀지만 여라문개나 되는 국의 이름이 내리적혀있는 백지에 기획국, 산업국이 맨우에 놓여있어 김규식은 의혹을 품고 이 순서가 북조선에서 발표한 그대로인가고 물었다. 첫자리는 그렇다치더라도 두번째자리는 내무국이 아니면 외무국이 차지해야 할것인데 산업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있는것이 아무래도 눈에 설었다. 비서들은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채택된 결정 그대로라고 했다. 앞에 서있는 30대 중반의 젊은이가 북조선에서 가장 중시하는 두개의 부서를 틀어쥐고있는 간부인셈이였다. 김규식은 자기도 딱 찍어 그 리유를 알수 없는 의혹에 사로잡혀 우선 나이를 물었다.

《년세는 어떻게 되시오?》

《올해 35입니다.》

《35?》

35에 북조선에서 가장 중시하는 부서들을 손에 거머쥔 《대신》자리에 올라앉다니? 좀더 나이가 듬직하고 경험있는 사람이 없었던가? 정준택의 학력을 묻고싶었지만 자신의 의혹을 너무 로골적으로 내보이는것 같아 에돌아 묻기로 했다.

《35에 두개의 국을 책임진 국장이라니 참으로 비상하웨다. 장군님과 함께 싸우셨소?》

정준택은 어줍은 기색을 지으며 빙긋 웃었지만 주저없이 말을 했다.

《부끄럽습니다만 저는 그런 자랑스러운 일에 전혀 관여해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산업국은 책임진것이 아니라 가끔 관계할뿐입니다.》

나이에 이어 경력을 묻는것으로 봐서 김규식이 뭣을 미심쩍어하는지 짐작할수 있는 일이여서 정준택은 툭 터놓고 말하기로 했다.

《저의 부친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부평에서 대청을 지키셨습니다.》

《뭐, 뭐라고 하셨소?》

너무나도 뜻밖의 말이여서 김규식은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대청을 지켰다면 군수를 하셨단 말입넨까?》

《녜, 군수로 살았습니다. 왜놈들이 우리 나라를 빼앗은 후에는 개성에 옮겨앉아 인삼포를 봤습니다. 저는 어린시절을 주로 개성에서 보냈습니다.》

옛날같으면 명문량가의 태생이라고 할수 있지만 로동자, 농민을 내세우는 북조선에서는 분명 거치장스러운 집안에서 태여났다고 해야 할것이다.

《학력은 어떻게 되시오?》

《경성고공을 마쳤습니다. 선생님에 비하면 학력이 형편없습니다.》

정녕 보잘것 없는 학력이였다. 부친이 대청을 지키고 항일투쟁에도 참가하지 않았다면 대단한 학력이라도 가지고있어야 할것인데 고작 3년학제인 고공출신이였다. 쏘련고문들이 그의 뒤에 있다고 해도 세계에 명성을 떨치는 도이췰란드나 미국의 공과대학, 하다 못해 일본의 일류급대학의 리공학부졸업생을 그 자리에 앉힐법한데 학력도 보잘것 없었다.

김규식은 남조선의 군정청처럼 북조선정권에서도 고문명색의 코큰 량반들이 판을 치고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정준택에게는 그 직책에 어울리는 점이 너무나 적은듯이 느껴졌다.

이런 생각을 하며 용광로가까이로 걸어가는 김규식의 머리에 한가지 생각이 번개쳤다. 북조선은 분명히 기술자의 부족으로 해서 큰 난관에 직면해있다. 그래 할수 없이 모든 점에서 미흡한 30대 중반의 경험이 어린 젊은이를 정권기관의 중책에 앉힐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자기를 그렇게도 감동시킨 황철의 장엄한 광경도 필시 쏘련기술자들의 힘을 빌어 재생시켰을것이다.

지금 자기옆에서 걷는 윤명현은 황철을 가리켜 자립적민족경제의 본보기라고 했다. 쏘련이 전후복구건설에 필요한 철을 실어가기 위해 복구를 다그친 제철소··· 그것을 보고 흥분한 윤명현, 만일 자기의 추측이 정확하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북조선에서는 규모가 큰 공장, 광산들이 적잖은것으로 알고있는데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네까?》

《이미 광복전수준에 도달한 공장, 기업소도 있고 올해 인민경제계획을 해야 복구를 끝내는것도 있습니다. 반면에 일제시기에는 없던 새로운 부문을 창설하기도 합니다.》

《제일 큰 난관은 무엇입네까?》

《기술자의 부족입니다.》

별로 주저하는 빛도 없이 솔직한 대답을 하는 정준택을 김규식은 의아한 눈길로 돌아봤다. 지금까지 주고받은 이야기를 미루어봐도 그렇고 얼굴생김을 봐도 그렇고 성실하고 솔직한 기술자임에는 틀림없는것 같았다.

《이 황해제철소에는 기술자가 몇명이나 있습네까?》

《정규교육을 받은 전문가는 한명밖에 없습니다.》

《이 큰 제철소를 한명의 기술자가 운영한단 말입네까?》

용광로작업대에 올라가려고 철계단을 올려짚던 김규식은 어지간히 놀래 정준택에게 물었다.

《그 한명의 기술자도 제철제강을 전문한것이 아니라 전기동력을 전문한 동무입니다. 지금 제철소에서 기사장사업을 하고있습니다.》

그 기사장이 해결할수 없는 기술문제를 누가 해결해주는가고 자기가 목적한 곳으로 질문을 유도해가려는데 투닥투닥 철계단을 뛰여올라오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더니 웅틀뭉틀한 거밋한 얼굴에 우람찬 체구의 청년이 옆에 와서 대바람에 김규식의 팔을 붙들어 작업대우에 끌어올리면서 자기 소개를 했다.

《지배인 전호준입니다.》

전호준은 작업반사무실에서 의자 2개를 들어내오게 해서 손님들을 앉히더니 백학처럼 흰 작업복자락을 날리며 출선후 뒤처리를 하는 용해공들을 주위에 모이게 했다. 삽을 한손에 들고 김규식앞에 온 용해공이 제철소, 특히 용광로를 어떻게 복구했는가를 이야기했다. 제철소에서 제일 처음 복구한것은 해탄로였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로임과 식량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무쇠가마를 만들어 자체로 식량을 해결하면서 로를 복구했으며 용광로의 로안에 얼어붙은 무쇠덩어리를 정질을 해서 뜯어내느라고 막심한 고생을 했다는것··· 로동자들의 말을 듣고앉았던 김규식이 정준택을 돌아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부탁을 했다.

《기사장을 만났으면 하는데 편의를 봐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준택은 김규식이 손님의 례의를 지키고있을뿐 용해공들의 말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있다는것을 눈치채고있었다. 그의 관심은 다른데 있는것 같았다.

《기사장동무는 지금 어디에 있소?》

옆에 서있는 전호준에게 물었다.

《1호용광로에 있습니다.》

《손님들을 모시고 제강과(평로직장)로 갈테니 기사장동무를 거기에 데려오오.》

용해공들이 자랑하고싶어하는 말이 아직도 허구많은데 정준택은 이 상봉을 어중간에서 끝내버릴 심산인것 같았다. 전호준은 지난번에 참관을 왔던 남조선대표들과는 달리 로동자들의 로력적위훈에 별로 감동된 빛을 보이지 않는 손님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철계단을 내려갔다. 먼저번에 왔던 남조선대표들은 장군님께서 용해공들의 생활에 자심한 배려를 베풀어주실뿐아니라 손등에 있는 동전잎만한 화상자욱을 근심하여 용해작업을 결정적으로 기계화해야겠다고 하셨다는 말을 듣고 앞을 다투어 용해공의 손등을 들여다봤으며 화상자리를 어루쓰는 사람도 있었다. 부모도 안해도 걱정해주지 않았던 덴자리를 장군님께서 걱정해주셨다며 목이 메여 말하는 로동자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대표도 있었다. 참관자들이 에둘러선 가운데 출선을 시작했을 때는 정말 굉장했다. 작열하는 백열광을 눈부시게 발산하며 쇠물이 터져나오는것을 보고 조선의 쇠물이라고 웨치는 젊은이, 만세를 부르짖는 대표들, 작업을 방해하는줄도 모르고 두루마기자락을 날리며 용해공앞에 달려가 손을 붙들고 남조선에서는 모든 공장이 숨을 죽였는데 여기서는 쇠물을 뽑고있다면서 흥분해서 말을 하는 늙은이, 너무나 감격하여 손수건을 꺼내 눈굽을 훔치는 지식인인듯한 점잖은 양복차림의 중년사나이··· 그들은 분명히 북조선에서 달성한 성과를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같은 피줄을 이어받은 겨레였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오늘의 년로한 손님은 그런 흥분, 감동을 느끼는것 같지 않았다. 전호준은 서종현과 함께 머지 않아 복구를 끝낼 1호용광로에서 사업조직을 하다 전화를 받았는데 남조선대표들중에서도 특별히 중시하는 귀중한 손님이니 그런줄 알고 매사에 빈틈이 없어야겠다고 평양에서 련락이 있었다고 했다. 정준택국장도 회의를 하다말고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사무실에서 뛰여나갔다고 한다. 특별히 중시하는 고위대표여서 체면을 차리느라고 그런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나치게 랭담해보였다.

새로 장입을 끝낸 뒤여서 쇠돌을 녹이느라고 으르릉거리는 용광로를 돌아본 김규식은 작업대를 내려섰다. 강쇠를 두드려대는 요란스러운 함마소리가 울려오는 제강직장쪽으로 걸어가던 김규식이 느닷없이 정준택에게 물었다.

《내가 들은바에 의하면 북조선에서는 자립적민족경제를 건설하고있다는데 이 제철소에서 생산하는 철이 민족경제건설에 얼마나 리용되고있습네까? 기획국을 맡아보는 국장만이 알수 있는 일일것 같아 묻는거웨다.》

딱 집어 말할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숨은 내막을 이야기해달라는것과 같은 어조였다. 황철에서 생산되는 철이 모두 자립적민족경제건설을 위해 쓰일것은 뻔한 일인데 얼마나 리용되는가고 묻다니? 기획국장만이 알수 있는 일이란 또 무슨 말인가? 무엇인지 내놓고 이야기할수 없는 석연치 않은 말이였다.

《김규식선생에게 말하지 못할 문제가 뭣이 있겠습니까?》

정준택은 김규식의 물음속에 담긴 미묘한 어조를 전혀 감촉하지 못한듯이 손님을 접대하는 주인의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

《북조선에서는 올해에 지난해보다 근 두배의 선철을 생산할 목표를 세웠습니다. 생산량은 9만t입니다.》

경제에 깊지 못한 김규식이였지만 9만이란 수자가 보통수량이 아니라는것쯤은 짐작할수 있었다. 지금은 불이 꺼져버렸지만 인천의 소규모제철소의 생산을 가지고는 대비도 할수 없는 엄청난 생산량이다.

《황철에서는 올해에 선생님이 보고 오신 용광로보다 훨씬 생산이 높은 용광로를 또 하나 복구할 생각입니다. 바로 저것이 그 용광로인데 벌써 복구를 거의 끝내고있습니다. 두달내에 쇠물을 뽑게 될것입니다.》

정준택은 저만쯤에 서있는, 방금 보고온 용광로보다 체통이 훨씬 커보이는 로체를 가리켰다. 그는 9만t의 철이 어디에 쓰이게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선반기를 만들려고 한다, 선반기가 정밀한 기계라는것을 선생님도 알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반기를 기어이 만들어낼 결심이다, 선반이 없이는 다른 기계를 만들수 없기때문이다, 왜놈들은 선반은 물론 다른 기계도 대부분 저희 나라에서 만들어 조선에 실어왔다, 그것은 조선에서는 기계를 만들수 없다는 노예적의식을 조선사람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서였다, 장군님께서는 왜놈의 이 조선민족멸시정책을 깨버릴 결심이시다.···

《장군님께서는 올해에 5백t급의 철선을 건조할 결심을 하셨습니다.》 정준택은 저으기 흥분한 목소리로 열정을 담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수산자원이 무진장한 우리 나라에서 돛배나 사돌배를 가지고는 어획고를 높일수 없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장군님께서 부강한 민주조국건설을 위해 지하자원만이 아니라 수산자원까지 리용할 결심을 하셨다는것을 말해줍니다.》

웬만해서는 남의 말을 듣고 흥분하는 일이 없는 김규식이였지만 정준택의 말을 듣고있느라니 심장이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호미와 낫가락, 달구지를 만드는것이 고작이던 우리 나라에서 선반기를 생산하다니? 헐어빠진 돛배에 운명을 의탁하고 망망대해로 나가던 어민들이 5백t짜리 철선을 갖게 되다니? 비록 그것이 아직 종이장우에 씌여있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얼마나 포부가 큰, 희망에 넘친 계획인가! 거기에다 기획국장은 철의 부족이 큰 문제라고 한다. 그의 말은 제철소들에서 지금 생산되는 철을 가지고는 수요를 충족시킬수 없다는 말일것이다.

정준택의 말을 김규식은 쏘련에서 요구하는 철을 떼주고 나머지를 가지고 급한 모퉁이를 메꾸느라고 여간만 고생을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었다. 조선의 북단 두만강류역의 석유화학공장의 설비를 뜯어간 쏘련이, 우리 나라 동력의 심장부라고 할수 있는 수풍발전소에서 그중 성능이 좋은 발전기를 두대나 반출해간 그들이 자기네 군대가 주둔해있는 북조선에서 생산되는 철을 요구하지 않을수 없지 않는가. 하긴 기획국장의 말을 들으니 전량을 수탈해가는것 같지는 않았다. 기술적방조를 하는 대가로 혹은 그 어떤 그럴듯한 명목을 붙여 북조선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을 적잖게 실어갈것이다. 숱한 군대를 주둔시키고있으면서 재부를 수탈하지 않는 나라가 이 세상에 있는가. 헐벗은 거지꼴인 남조선이지만 미국은 원조명색으로 캔디(사탕의 일종)담배, 썩은 밀가루, 술, 약품··· 쓸모없는 전쟁잉여물자를 들이밀어 민중을 기만하면서 남조선의 공장기업소, 농토, 봉사시설 지어 개인주택까지 《적산》이란 명목으로 깡그리 거머쥐였다. 오죽 지배욕에 환장했으면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도 전에 38°선이남의 남조선은 미군의 지배하에 놓이며 공용어로는 영어를 사용하며 이 포고를 위반하는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삐라를 비행기로 살포했겠는가.

지붕을 덩실하게 떠인 구내에 들어섰다. 줄느런히 늘어선 평로의 세찬 불길이 화구밖으로 널름거리고있었다. 한쪽에서는 대형함마가 가락맞게 벌건 불덩어리인 강괴를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두드려댄다. 몇번 찾아간적이 있던 남조선 공장들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김규식이 찾아왔다고 해서 대부분의 로동자들은 환영은커녕 적의까지 보였으며 생산설비들은 파철덩어리모양 숨을 죽이고있어 마치 기계의 사체실에 들어선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가 지금 서있는 제철소구내에서는 사람도 기계와 설비도 지어 제작중인 생산품까지 희열에 넘쳐 앙양된 기상으로 약동하고 웨치고 춤을 추는것 같았다. 비록 쏘련에 얼마쯤 빼앗긴다고 해도 이렇게 생산을 해서 다문 몇대의 선반기, 한두척의 철배라도 만들어내는것이 옳은 일이 아닐가? 이런 방법으로 경제를 살찌우는것도 자립적민족경제건설이라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 김규식은 곧 자기의 생각을 강력히 부인했다. 어떤 명색으로 개입하든 경제적수탈은 정치적간섭을 전제로 한것이며 정치경제분야에 대한 간섭은 반드시 군사와 문화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또한 그것은 남북협상에도 개입하고있다는것을 말해줄것이다···

우람한 체구에 얼굴이 검실검실한 지배인이 작업복차림의 기사장을 옆에 달고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을 지켜보던 김규식의 검은 눈이 처음은 의혹으로 해서, 다음은 놀람으로 하여 휘둥그래졌다. 세상에는 외모와 얼굴이 비슷한 사람이 없는것이 아니지만 걸음걸이까지 저렇게도 비슷한 사람이 있을수 있는가? 김규식은 서종현을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훌쭉한 키에 남에게 언짢은 말 한마디 할것 같지 않은 어질어빠진 길쑴한 얼굴, 상대를 마주볼 담력도 갖고있지 못한것 같은 선량해보이는 큰 눈, 말씨며 생각과는 달리 무릎을 별로 굽히지 않으면서 급한 일이라도 있는것처럼 서둘러 걷는 걸음걸이··· 김규식이 남창대학에서 출세욕에 들뜬 중국청년들에게 영문학을 가르칠 때 불쑥 찾아왔던 서상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근래에도 삼청장에 더러 찾아오군 하는 서상문의 얼굴에서 세월의 흐름이며 서종현의 행방불명, 생활고가 덮씌운 시름과 주름을 벗겨낸다면 여불없이 지금 가까이 다가오는 청년의 모습일것이다.

서종현은 김규식앞에 와서 상체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서종현입니다. 이 제철소에서 기사장으로 일을 하고있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뜻밖의 일에 맞다들었다고 해도 가볍게 행동하는 김규식이 아니였다.

《자네가 어떻게 돼서 여기 와서 일을 하나? 이제 서종현이라고 했지? 기사장을 한다는것은 적실한가?》

정준택과 이야기를 나눌 때와 다름이 없는 무게있는 어조였다.

《네, 서종현입니다. 오시느라고 원로에 얼마나 수고를 하셨습니까? 미흡한 점이 많은 접니다만 기사장의 중임을 맡고있습니다.》

《자네의 춘부장께서는 임자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알고있네. 이번에 북에 들어올 때 내 춘부장어른께 임자의 행방을 알아봐주겠다는 언약을 하고 들어왔네. 석유화학공장에서 일어난 반쏘소요에 관여해서 원동에 끌려갔다는 자네가 어떻게 되여 이런 큰 제철소에서 기사장을 하나?》

《반쏘소요에 관여한것은 사실입니다만 씨비리에 끌려갔다는것은 잘못 전해진 소식입니다.》

《그러니 반쏘소요에 관여는 했지만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현재 기사장으로 일하고있다는것인가?》

김규식은 서종현을 먼지투성이에 기름이 게발린 지하족으로부터 헝클어진 머리까지 올리훑어보며 물었다.

《제재라고는 할수 없지만 얼마간 시련을 겪기는 했습니다.》

《어떤 시련을 겪었나?》

전호준이 정준택의 안색을 힐끗 스쳐봤다. 이 세상에 없는줄 알았던 친지의 아들을 뜻밖에 만났으니 그간의 소식을 물을수도 있겠지만 제철소를 참관하러 온 손님으로서는 지나친 물음인것 같았던것이다. 서종현도 이것을 느꼈던지 잠시 눈길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표정이였다.

《여긴 소란해서 말을 듣기 어려우시겠는데 우선 참관을 끝내지 않겠습니까?》

김규식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을양으로 조심을 하며 서종현이 말했다. 사실 그들이 둘러선 곳은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자리가 못되였다. 강쇠를 탕탕 두드려대는 함마소리, 쇠를 녹이느라고 으르릉거리며 몸부림을 치는 평로들, 와당탕 철썩 강괴를 밀어내는 소리··· 김규식이 정준택에게 부탁했다.

《여기 어디 가까운 곳에 이야기를 나눌만한 곳이 없습넨까? 종현군으로 말하면 나와 절친한 서상문목사의 아들이웨다. 우리는 종현군의 행방을 알수 없어 만나면 근심이였습니다.》

물론 서종현의 실종을 놓고 쏘련의 대조선정책을 이야기했다는것을 그는 말하지 않았다. 성시백이 찾아와 민족자립만이 조선을 구원할수 있는 경륜이라고 할 때마다 서종현의 실종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는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 제철소의 위용에 대단히 감동됐소이다. 그렇지만 종현군을 만나니 마음이 조급해지는구려. 참관을 간단히 끝내고 종현군과 이야기할수 있는 시간을 얻었으면 좋겠소이다.》

정준택은 다른 기색을 내색하지 않고 례의를 갖춘 대답을 했다.

《련석회의조직준비위원회에서는 선생님의 몸으로 황철의 넓은 구내를 다 돌아보시기 어려울것이라고 걱정을 했습니다. 이 구내를 벗어나면 좀 조용한 야외에 나서게 되고 말씀을 나누실수 있는 일요일휴양소가 머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타고오신 승용차를 거기에 대게 하겠습니다.》

간부숙소를 로동자들의 일요일휴양소로 전환시킨지 여러달이 되였다.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니 말을 나누기엔 십상인 조용한 장소일것이다. 전호준은 김규식을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대하는것이 불만인듯한 기색이였지만 정준택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듯 김규식을 곧 구내밖으로 안내했다.

《기사장동무가 선생님에게 해설을 해드리시오. 선생님에게 부담이 가지 않게 될수록 간단히 말씀드리는것이 좋겠소.》

일요일휴양소를 향해가는 도중에 새싹이 움트기 시작한 야산앞에 한개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고층건물들이 있었다. 서종현은 한참동안이나 걸음을 멈추고 저것은 해탄로라고 하는데 쇠돌을 녹이는 콕스를 생산하는 공장이라는것, 제철소로동자들은 해탄로를 제일먼저 복구했다는것, 복구할 때 이런저런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는것··· 얼마쯤 걷다가 이번에는 비좁게 늘어선 고층건물들을 가리키며 저기는 제철소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약을 생산하는 제약공장인데 어떤 약을 얼마만한 량을 생산하고있다는것··· 정준택의 말을 숫제 무시해버린듯 긴 이야기를 했다. 서종현은 김규식을 제철소병원에까지 데려가려고 했다.

《선생님이 피곤해하시는것 같은데 거기까지 가겠소?》

서종현을 만류한 정준택은 김규식을 마주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산굽이를 돌아서면 로동자들의 일요일휴양소입니다. 하실 이야기도 많겠는데 시간에 구애되지 마시고 마음껏 회포를 나누십시오. 저희들은 돌아가겠습니다.》

《국장선생이나 지배인이 돌아가면 종현군이 난처하지 않겠소이까?》

은근하면서도 강경한 김규식의 말이였다.

《종현군은 나의 혈육이라고 할수도 있소만 내가 북조선에 들어온것은 인정에 구애되여 모든 시간을 거기에 바치자는것은 아니웨다. 종현군의 그간의 소식도 듣고싶소만 국장선생한테 알아보고싶은 문제도 있소이다. 나를 도와주는것으로 알고 모두 같이 갔으면 좋겠소이다.》

정준택은 발길을 돌릴수 없었다. 김규식을 앞세운 일행은 화창한 봄날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 모양 느린 걸음을 옮겨 휴양소에 이르렀다. 량옆에 돌기둥을 세워 철문을 여닫게 만든 정문안에 들어선 일행은 양식으로 겉모양을 꾸린 2층집 현관앞에까지 휘우듬히 뻗어올라간 차도를 얼마쯤 걸어올라가다 몇그루의 정원수가 그늘을 던진 련못가에 이르렀다. 석탁을 가운데 두고 돌의자들을 둘러앉혀서 무르익은 봄빛을 즐기며 이야기하기엔 안성맞춤한 자리였다. 한해에 한두번 왜놈의 사장이 류숙하느라고 이렇게 요란스러운 저택을 지었다는 말을 들은 김규식은 일제의 학정이 되생각나는듯 조화롭게 안배된 갖가지 정원수들이며 그 사이사이에서 봄빛과 어울려놀며 웃음짓는 꽃포기들을 둘러봤다.

돌의자에 앉아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며 잠시 휴식한 김규식은 말을 시작했다.

《내 북조선에 들어와 대접이 너무 륭숭해 처신에 난처한 때가 있군 합네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아직 조선이 가야 할 길을 찾는중에 있는 미련한 정치인에 지나지 않습넨다. 그래 오망을 쓰는 늙은이처럼 분별없이 이것저것 묻는 때도 있으니 널리 량해를 해주소이다.》

담배연기를 내불며 생각을 가다듬은 김규식은 말을 계속했다.

《내 황철을 돌아보느라니 몇가지 리해되지 않는 점이 있소이다.》

옆에 뻗치고 선 서종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넨 왜 앉지 않고 서있나? 말을 하자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야기하기 편리하게 앉게나.》

서종현은 김규식옆의 돌의자에 엉뎅이를 붙이고 앉았다.

《자넨 황철복구과정을 말해줄수 없겠나?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끝이 없을것이니 이런 문제에 중점을 두고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네. 내가 황철에서 받은 인상가운데서 제일 큰것이 북조선에서 막심한 기술인재난을 겪고있다는것이네. 종현군은 기사장으로 일하고있으니 기술인재의 부족을 누구보다 크게 느꼈을것이니 그 곤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황철과 같은 큰 제철소를 돌아가게 했는지 그것부터 이야기해주게. 례를 들어 쏘련기술자들의 도움을 어느 정도 받았으며 그 대가로 이 제철소에서 생산하는 철을 얼마나 지불하는지 그렇지 않고 혹시 다른 방법으로 지불하고있는지 그것도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네.》

그 순간 어질어보이는 서종현의 큰눈이 휘둥그래졌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수 없는듯 입술을 떨기만 했다. 성급한 전호준이 뭐라고 말하려는것을 정준택이 무릎을 짓눌러 제지시켰다.

《선생님은 뭣인가 오해를 하고계신것 같습니다. 내가 황철에 온 후에는 말할것도 없고 내가 여기에 오기전에도 쏘련기술자가 황철의 복구를 도운 일은 없습니다. 또 우리 제철소에서 생산되는 철가운데서 쏘련에 납입되는것은 1t도 없습니다.》

훌쭉한 량볼만이 아니라 길숨하고 섬약한 손까지 푸들푸들 떨고있었지만 목소리만은 똑똑하고 단호했다. 그 무슨 항변을 하는듯한 서종현의 말을 듣고 어지간히 놀란 김규식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돌상우에 놓았던 담배갑에서 담배 한가치를 빼서 입에 물고 연기와 함께 긴숨을 내쉬고는 은근한 음성으로 달래듯 말했다.

《종현이 이보게, 나는 다른 뜻이 있어서 쏘련의 방조를 물은것이 아니네. 자립적민족경제를 건설하는것이 북조선의 정략이라는 말을 나도 들었네만 그렇다고 해서 선진국의 기술적협조까지 받지 않는다는것은 아니겠지? 만일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임자는 두가지 문제에서 나에게 납득이 가는 설명을 해주어야 하네. 이 큰 제철소에서 기술자란 자네 한사람이라고 하네. 자네 한사람이 왜놈들이 무지막지하게 파괴하고 달아난 이 큰 제철소를 어떻게 복구할수 있었는가. 이것을 우선 내게 설명해주어야 한다는것이네.》

산전수전 다 겪은 년로한 정치인답게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것이 알렸지만 서종현의 대답을 못마땅해하는 눈빛까지 감출수는 없었다.

《다음엔 우리 나라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대국과의 관계를 말해주어야 하네. 자네도 기사장이란 조련치 않은 직책에 있은즉 임자가 관여한 반쏘소요가 미쏘간의 비밀협정에 근원을 두었다는것을 모를수 없을것이네. 내 말은 46년 봄에 미쏘간에 비밀리에 체결된 적산이양협정을 두고 하는 말이네. 그 협정이 체결된 후 남조선에서는 몇개의 조선인자산가들의 공장, 광산을 제외하고 일본인소유였던 모든 공장기업소, 철도, 항만, 농경지, 산야 지어는 개인주택까지 적산의 명목으로 군정청관할하에 넘어갔네. 그런즉 체약상대국인 쏘련이 북조선의 일본인재산을 그대로 내버려둘수 없지 않나? 더구나 쏘련은 쏘독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어 경제를 복구하느라고 전력을 다하고있는 나라이네. 이런 나라가 년산 수만t이나 철을 생산하는 이 제철소를 관심밖에 둘수 없지 않나?》

머리를 수굿하고 김규식의 말을 듣고있던 정준택이 비로소 얼굴을 들고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다.

《이제야 의문이 풀립니다. 서종현동무는 말할것 없고 황철의 로동자들이 말할수 없는 고난을 이겨내면서 수만t의 철제품을 생산하기에 이른 제철소를 선생님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말수 적고 고정해보이는 정준택의 얼굴에 한시름을 던듯한 안도의 빛이 어렸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두해전의 그 비밀협정에 대해서는 서종현기사장도 지배인도 알지 못할겁니다. 저도 직책상관계로 해서 그런 협정이 있었다는것을 알고있을뿐 깊은 내막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 그 협정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그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알고있습니다.》

정준택은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정경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알수 없어 모대기는 모습이였다.

《제가 명백하게 말할수 있는것은 쏘련측에서 북조선의 몇개 공장기업소에서 설비를 해체한것은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전혀 사전토의가 없이 진행된 일이라는것입니다. 그무렵 저는 장군님의 부름이 계셔서 그이의 집무실에 갔는데 전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장군님께서는 여간해서 노하시는 일도 없고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아래사람들에게 그런 기색을 보이시지 않는분입니다. 아래사람들이 신심을 갖고 일을 할수 있게 늘 웃으시는 모습으로 깨우쳐주시고 고무를 주시는 우리 장군님이십니다.》

···장군님께서는 정준택이 방안에 들어온것도 느끼지 못하신듯싶었다. 침통한 표정이여서 정준택은 온몸이 굳어붙는것만 같았다. 그이께서는 준절한 안색으로 창밖에 시선을 던지고계시다 노기를 품은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내 책상우에 있는 명세표를 보오.》

정준택은 발자욱소리를 조심하며 집무탁에 다가가 얄팍한 서류를 들고 본래의 자리에 돌아와 명세표를 읽었다. 그 순간 그는 심장에 드센 타격을 받은듯한 충격을 느꼈다. 쏘련이 자기 나라에 실어가려고 해체한 설비명세표였다.

《읽었소?》

《읽었습니다.》

《그 기계설비들을 해체하는것으로 해서 우리 나라 경제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되는지, 손실액은 얼마나 되는지, 왜놈들이 파괴하고 달아난 그 기계설비들을 복구하느라고 우리 나라 로동자, 기술자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로력을 얼마나 투하했는지 기획국이 중심이 돼서 문건을 만드시오. 왜놈들이 어떤 악착한 방법으로 조선인민의 피땀을 짜내서 그 공장기업소들을 세웠는지 력사적자료를 안받침해서 구체적으로 쓰시오.》

괴로와하시는 장군님을 위안해드릴 말을 하고싶었지만 그이의 심정을 얼마간이라도 가라앉힐 낱말이 이 세상에 있을것 같지 않았다. 정준택은 발이 어디에 놓이는지 알지도 못하며 명세표를 들고 출입문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다시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장군님께서는 준절한 안색으로 틀어쥔 주먹을 량허리에 얹고 방안을 거닐며 격분을 삭이기 위해 애쓰고계시였다. 웬간해서는 감정의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없는 정준택이였지만 울음이 북받쳐오르는 격렬한 충격을 느꼈다.···

《며칠후에 장군님께서는 모스크바를 향해 평양을 출발하셨습니다.》

마음을 진정시키느라고 잠시 입을 다물고앉아있던 정준택은 나직하고 고르로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장군님께서는 며칠 걸리지 않아 귀국하셨는데 귀국하신 후에 시간을 다투는 긴급한 문제들을 처리하신 후 저를 포함한 경제실무일군들과 법조계인사들을 몇명 부르셨습니다. 그이께서는 중요산업국유화법령을 공포해야 하겠다고 하시며 국유화의 대상으로는 일본국가, 일본인개인의 소유였던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상업, 문화기관 기타 모든 재산이 포함되는데 그것은 무상몰수되여 인민의 소유로 된다고 하시는것이였습니다. 또한 얼마되지는 않지만 민족을 반역하고 친일을 한 매국적인 자본가들의 소유도 이번 기회에 국유화하게 되는데 민족자본가의 기업활동을 침해하는 현상이 없어야겠다고 강조하시였습니다. 저는 수첩을 앞에 놓고 만년필을 손에 쥐고있었지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아무것도 쓰지 못했습니다.》

정준택은 그때의 감격이 되살아오르는듯 잠시 말을 멈추고 차잔을 들어 목을 추겼다. 그는 전에 없이 흥분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장군님께서 가셨으니 성과가 있으리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사실 저는 그사이에 도무지 마음을 안착시킬수 없었고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일제의 소유는 북조선재산의 90%에 달합니다. 그것이 우리 나라의 소유로 되지 못하는 경우 일제놈들한테 놋그릇, 놋숟가락까지 수탈을 당하고 농토는 황페해질대로 황페화된, 극도로 빈궁해진 인민들의 생활을 무엇을 가지고 안착시키며 민족경제는 무엇을 가지고 건설하겠습니까. 더구나 적산이양인지 뭔지 하는 그 협정은 쏘련의 단독결심도 아니고 미국과 합의를 본것이니 파기를 하고싶어도 체약상대국의 량해를 얻어야 할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약소민족이라고 하는것을 제일 싫어하시지만 저는 그때 정말 약소민족의 설음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불과 며칠동안에 민족의 재산을 다시 찾아가지고 오신것입니다. 사실 큰 산업은 북조선에 집중되여있지 않습니까. 남조선에 큰 공장기업소가 몇개나 됩니까? 북조선의 산업을 찾았으면 우리 민족의 산업을 찾았다고 할수 있지 않습니까!》

비록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일장의 웅변이라고 할수 있는 정준택의 말을 흥분해서 들으며 그 우람한 몸을 궁싯거리던 전호준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 했다.

《그 좋은 이야기를 어째서 오늘까지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까?》

《꼭 말을 해야 할 계기도 없었지만 우리의 우방인 쏘련의 일부 사람들이 실수를 한것인데 떠들고 다닐 필요가 어디에 있소. 내가 한 이야기도 여기에 있는분들이나 알고 말을 옮기지 않았으면 좋겠소.》

윤명현이 담배를 피워물며 사뭇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민족의 재부를 찾았다는 국장선생의 말씀은 적실한 표현입니다. 발전능력을 봐도 그렇고 제철소, 비료공장, 굴지의 광산, 탄광은 모두 북조선에 있지 않습니까. 국유화법령은 언제 공포됐습니까?》

《1946년 8월 10일에 공포됐습니다.》

윤명현이 흥분한 빛을 지으며 말했다.

《조선사람의 피땀을 악착하게 짜내서 건설한 산업시설들이 우리 민족의 재부로 됐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하루빨리 남북이 통일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흥분되거나 충격을 받은 기색이란 전혀 없이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빛이던 김규식이 될수록 목소리를 부드럽힌 어조로 서종현에게 말했다.

《자네도 담배를 태우게. 내가 있다고 해서 삼가할게 있나? 자네 손을 보니 담배엔 고질인것 같은데 어려워하지 말고 피우게. 지배인은 아직 30전의 청년인것 같은데 지배인도 담배를 태우시오. 국장선생이 좌석을 화기에 넘치게 만들었은즉 구습에 구애될것 없이 담배들을 피우면서 속을 터놓고 말을 합시다.》

그러니 김규식은 들어야 할 이야기, 해야 할 말이 아직 많다는 뜻이였다. 그가 구습에 구애되지 말고 담배를 태우라고 마치 선심이나 쓰듯이 이야기한것은 자기의 말이 유표해보이지 않게 하려는데 있는것 같았다.

《우선 국장선생에게 한가지 묻겠습네다. 선생은 김일성장군님과 쓰딸린사이에 단독회담형식의 회담이 있은것처럼 말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또 장군님께서는 어떤 말씀으로 쓰딸린을 납득시킬수 있었는지 알고있는 한도에서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습네다. 적산이양협정은 미쏘간의 비밀협정이니 일방이 파기하려는 경우 최소한 사전통고라도 하여야 외교적례의를 갖추는것으로 될것이웨다.》

량볼이 두둑한 온후한 학자풍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고 점잖게 묻는 말이였지만 김규식에겐 아직도 무엇인가 납득되지 않는 점이 있다는것을 정준택은 감촉하지 않을수 없었다. 경계심이 살아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접이 들 필요는 없었다.

《저는 단독회담이라고 말한적이 없습니다. 두세명의 정치위원들이 참가했다는 장군님의 말씀을 들은적은 있습니다. 회담의 구체적인 내용을 당정치위원회 범위내에서는 말씀하셨는지 알수 없습니다만 저희들에게는 이야기하신적이 없으십니다. 다만 사업과정에 장군님께서 저에게 말씀해주신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북조선에 있는 일제의 재산은 조선인민을 가혹하게 수탈해서 축적한것이여서 응당 조선인민의 소유로 되여야 한다는것을 쓰딸린에게 설득시켰다는 말씀이였습니다.》

김규식의 얼굴에 의연히 납득이 되지 않는듯한 의혹의 빛이 스쳐지났지만 내놓고 하는 몇마디의 말은 별다른 기미를 느낄수 없는것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민족을 위해 참으로 큰일을 하셨습네다. 국장선생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감동을 금하기 어려웠습네다.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조선의 장래를 생각할 때와 같은 청춘의 흥분을 느꼈습네다. 조선민족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협정을 체결하고 산업설비를 해체했다는것을 아셨을 때 장군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을것이웨다. 결연히 모스크바를 향해 출발하실 때의 장군님의 심정과 결심도 짐작할수 있습네다.》

사실 정준택의 말을 들었을 때 김규식의 충격은 컸다. 너무나도 갑자기 너무나도 드세게 가슴팍을 줴지르는것과 같은 충격이여서 그는 생각을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북조선정권을 쏘련의 대조선적화방략의 시행거점으로 생각해왔다. 미국인들도 그것이 엄연한 사실인것처럼 김규식의 귀에 부단히 불어넣었다. 그런데 북조선정권, 이 정권을 령도하시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선민족의 리익을 지켜내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이고계시지 않는가. 그렇다면 장군님께서 제창하신게 틀림없는 민족자립사상이 쏘련의 대조선적화방략이라는것도 미국놈들이 날조해낸 거짓말이며 남북협상이 남조선을 적화하기 위한 쏘련의 방략이란것은 터무니없는 망언일것이였다. 남북협상은 민족자립사상에 기초해서 민족대화합을 이룩하여 통일정부를 세우는데 그 목적이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정준택의 말을 들은 후에도 김규식의 머리에는 거밋한 떼구름과 같은 의문이 아직 남아있었다.

자기네의 국가적리익을 위해 사선을 뚫고 국경을 넘은 조선의 독립운동자들을 가차없이 처형하고 감옥에 처넣고 사지에 추방하던 쏘련이 그렇게도 갑자기 관용을 베푸는 너그러운 나라로 될수 있겠는가. 김규식이 수십년간 세계를 편답하면서 뼈에 사무치게 깨달은것이란 국가간의 관계도 정치계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약육강식의 법칙이 작용하며 리익의 교환도 수학공식과 마찬가지로 정확하고도 각박하다는것이였다. 아무리 체통이 큰 대국이라고 해도 힘이 약한 나라를 침해하는데서 조금도 가차가 없다는것을 김규식은 혀를 짓씹는듯한 심정으로 한두번만 체험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인민의 피땀을 짜내서 건설한것이라고 해서 북조선산업의 90%나 되는 막대한 재부를 쓰딸린이 그렇게 쉽게 내놓겠는가? 경제적리권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보다 큰 다른 리익을 추구하지 않았겠는가? 중국혁명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제정로씨야시기의 그닥지 않은 리권을 취한 쏘련이 아닌가. 그렇다면 쓰딸린은 무엇을 요구했겠는가? 김규식은 몸서리칠 자기의 생각을 20대, 30대의 청년들에게 내놓고 이야기할수는 없었다. 국가관계란 정치계와 마찬가지로 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뒤에 숨어있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인생길에 갓 들어선 이들이 어떻게 리해할수 있을것인가? 이것을 알게 되였을 때는 자기처럼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고 모든것을 의심하고 따져보는것이 고질로 되였을 때이며 회복될 가망이 없는 이 정신적질병으로 해서 늘그막의 쇠잔한 정력을 소모해야 한다는것을 이 젊은이들이 어떻게 리해할수 있겠는가?··· 말을 하면 로망이 든 늙은이가 헛소리를 한다고 할것이다.

《제 말에 의심이 가는 점이 있거나 리해하시기 어려운 점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정준택의 말이였다. 김규식의 얼굴에 풀길없는 의문을 품고 정신적고통을 느끼고있는듯싶은 표정이 어려있는것을 똑똑히 찾아볼수 있었던것이다.

《선생님의 리해를 돕기 위해 말씀을 드렸는데 리해되지 않는 점이 있으면 말씀을 하셔야 제가 아는껏 설명을 해드릴게 아닙니까.》

김규식은 말하기로 결심했다. 할 이야기도 못하며 구경을 하러 다닐바에야 무엇때문에 북조선에 들어왔겠는가. 더구나 옆에는 혈육과 다름이 없는 서종현이 앉아있다. 지금은 황철의 기사장을 하고있지만 알아야 할것은 알고있어야 앞으로 똑똑한 립장을 취할수 있을게 아닌가.

《미쏘량국간에 체결한 비밀협정이야기부터 하고싶소이다.》

김규식은 담배연기를 날리며 나직하나 위엄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협정을 어느쪽에서 먼저 발기했는지 나도 아는바 없소이다. 그러나 세계 량대국이 그런 협정을 체결했을적에는 사전에 론의도 있었을것이요 면밀한 타산도 있었을것이웨다. 고대로 조선은 전략적요충지에 위치해서 여러차례의 전란을 겪지 않을수 없었고 망국이 빨리 닥쳐온것도 바로 이 위치상특성에도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하고있소이다. 북조선만을 한정해서 말하면 민족적재부의 9할, 전국적으로 계산한다고 해도 8할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을 막대한 재부를 쏘련이 그렇게 쉽게 내놓을 생각을 했으리라고는 나는 믿기 어렵소이다. 그것도 이미 체결한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말이웨다.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이 지구상에 그런 선심을 쓰는 나라는 없었소이다.》

자기의 견해는 의심할나위가 전혀 없는 정확한것이라는것을 확신하는듯 김규식은 70이 불원한 늙은이답지 않게 빛을 뿌리는 검은 눈을 흡뜨며 두터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윤명현까지 포함하여 좌중의 모든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무쇠처럼 굳어져있는 김규식의 얼굴을 지켜봤다. 에둘러 이야기할줄 모르는 직통배기인 전호준이 상혈된 얼굴로 팔을 내두르며 부르짖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말씀은 뭡니까? 산업국유화법령이 발포됐을 때 나는 유선탄광에서 지배인을 했습니다. 우리는 공장은 로동자에게!라고 쓴 구호를 내붙이고 탄광을 공장위원회에서 관리하게 된것을 경축해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췄습니다. 그것이 가짜라는것입니까?》

김규식은 입을 꾹 다물고 앉아있을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정준택이 또 뭐라고 웨치려는 전호준의 팔을 붙들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경제적리권을 돌려받는 대가로 다른 리권, 조선이 전략적요충지에 위치하고있다고 말씀하시는것으로 보아 군사적지배를 념두에 두고계신것 같은데 쏘련군이 주동적인 철거성명을 냈다는것을 알지 못합니까? 조선에서 일체 외국군대를 철수시켜야 조선문제를 자주적원칙에서 해결할수 있고 쏘미간의 대결을 방지할수 있다고 생각하셔서 우리 장군님께서는 지난해에 모스크바에 가시여 쓰딸린에게 쏘련군철거를 요구하셨습니다.》

김규식은 무엇인가 묻고싶은 안색이였지만 이번에도 입을 욱다물고 앉아있을뿐이였다. 당황한 표정을 짓고 김규식옆에 앉아있던 윤명현이 자기가 북조선사람들을 진정시킬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듯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미국사람들한테도 잊을수 없는 배신을 당한적이 계시고 쏘련사람들한테도 일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모욕과 배신을 당한 때가 있습니다. 서울에서도 쏘련군이 주동적으로 쏘미량군동시철거를 제기했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선생님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보아 나라와 나라들 사이에 흔히 흥정이 오고간다는 말을 하셨을뿐이지 북조선에서 꼭 흥정을 했다는 말씀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김규식이 담배를 피우라는데도 굳이 례의를 지키느라고 담배가치를 꺼내들지도 않고 돌의자에 엉뎅이를 붙이고앉아 오가는 말을 주의깊이 듣고있던 서종현이 그 어떤 비상한 결심을 한듯 창백해진 얼굴을 곧추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이 저를 자식으로 생각한다고 하셨으니 저는 선생님을 아버님으로 생각해야 할것입니다. 저는 자식의 도리를 지키자면 반드시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처음엔 얼마간 떨리던 목소리더니 점차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서종현은 눈길을 떨구고 돌탁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김규식한테 돌렸다.

《저는 선생님을 량심을 지키며 민중을 위해 싸우시는 남조선의 년로한 애국지사로 생각해왔습니다. 지금도 저의 이 생각엔 큰 변화가 없습니다만 선생님에게는 확실히 무엇인가를 오해하고계시는, 바로잡아야 할 문제가 있는것 같습니다.》

김규식은 서종현의 돌연스러운 말에 저으기 놀란듯싶었다. 노여운듯 숱많은 눈섭과 두터운 입술이 한순간 푸드득 떨렸다. 그러나 그는 곧 스스로의 마음을 눅잦힌듯 느긋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나로 말하면 환심을 얻기 위해 속에 없는 말을 할수 없는 사람일세. 비위를 상하게 할수 있다는것을 알면서도 할말은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것이네. 이것을 리해해야 하네.》

어질어보이는 서종현의 커다란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한순간 번뜩이였다.

《저는 우리들의 비위가 상하지 않게 마음이 없는 빈말을 해달라는것이 아닙니다. 또 명성높은 정치가인 선생님은 그래서는 안될것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우리 장군님을 너무나 모르고계시고 북조선을 너무나 알지 못하고계십니다. 선생님은 북조선의 중요산업을 쏘련과 그 어떤 흥정을 해서 바꾼것으로 생각하시는데 쏘련군의 철거는 이미 선포됐으니 군사적종속관계를 생각하시지는 않을것입니다. 그러면 남은 분야는 정치적종속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은 사대는 곧 굴종이고 굴종은 민족을 배반하는 길에 굴러떨어지게 한다는 말을 들어보신적이 있습니까?》

서종현이 김규식을 똑바로 마주보며 물었다.

《자네 이제 뭐라고 했나? 다시한번 말해보게.》

《사대는 굴종이고 굴종은 민족을 배반하는 길에 굴러떨어지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건 누구의 말인가?》

《장군님의 말씀입니다.》

《어느 문헌에 그런 구절이 있나? 연설중에 하신 말씀이라면 어떤 자리에서 그 말씀을 하셨나?》

김규식도 그 말씀에 얼마나 깊이있는 민족자립사상이 담겨있는지 알수 있었던것이다.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제철소에 찾아오시여 대국의 위세를 어쩔수 없는것으로 생각하면서 비굴하게 굴종하고있는 저를 힐책하며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순종이 타고난 천성인듯 로동자, 사무원, 제철소구내에 들어온 장마당의 아낙네들에게까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머리숙이는 서종현이 김규식을 똑바로 마주보며 이런 무게있는 말을 할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였다.

《그러니까 장군님께서 자네를 만나주셨단 말인가?》

《만나주신것이 아니라 장군님께서는 제가 고민을 안고 힘들게 일한다는것을 아시고 제철소에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서종현은 그날의 감동이 불시에 북받쳐오른듯 음성은 갈리고 눈에는 이슬이 번져갔다. 그동안에 복구해놓은 그닥지 않은 성과를 돌아보시던 그이, 잠자리, 일자리까지 걱정해주신 장군님··· 서종현은 모든것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반쏘》소요에 관여했다고 해서 보안서에 구류되고 출신까지 껴들면서 산업국에서 광산에 내려보낸 자기에게 황철을 복구할 중임을 맡겨주신 장군님!

《나를 모욕하고 구박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압니까? 쏘련군이 진주할 때 통역명색으로 껴묻어 나온 일부 얼마우제들입니다. 자기네 조상이 조선민족인것을 수치로 여기고 조선말보다 로씨야말을 더 능란하게 씨부렁거리는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나를 구박하고 천대했습니다.》

최부국장이 자기를 어떻게 대했는가도 이야기했다. 희생을 당하는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한, 정신적인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자기의 정신상태도 말했다.

《쏘련군이 철수를 한다고 해도 막강한 힘을 가진 그 나라의 영향에서 조선이 벗어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쏘련이 장구한 기간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얼마우제들에게 머리를 숙일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김규식은 자기가 30여년간에 걸쳐 체험한 그 고통과 수치를 서종현은 불과 2∼3년사이에 체험했다는것을 알았다.

《저는 선생님이 어째서 경제적리권을 찾는 대가로 일종의 흥정이 있었을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 마음을 리해할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한것과 똑같이 작은 나라인 조선이, 그것도 38°선으로 해서 분렬되여있는 북쪽 절반을 차지한 북조선이 어떻게 쏘련의 간섭과 영향에서 벗어날수 있겠는가? 선생님은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고계시지 않습니까?》

담배에 불을 달려고 성냥을 그으려던 김규식이 손을 흠칫 떨며 노여움과 공포가 한데 뒤섞인 눈길로 서종현을 흡떠보았다. 너무나도 야박하고 거칠게 자기의 속심을 까밝혔기때문이였다. 사실 김규식은 서종현이 말한것처럼 정치적으로 제압할 땅에서 조선인민의 노여움을 사면서 산업설비를 뜯어올 필요가 없어 쏘련이 양보를 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조선은 자주권이 없는 그런 국가로 건설될 나라가 아니라는것을 선생님은 아셔야 합니다. 장군님께서 저와 이야기를 나누실 때 제일 섭섭해하시고 노엽게 생각하신것이 대국에 대한 숭상과 굴종이였고 대국을 등에 업은것처럼 행세하면서 전횡을 일삼는자에게 굴복한 저의 정신상태였습니다.》

서종현은 자기를 그렇게도 못살게 군 최부국장은 당에서 날카로운 비판을 받은 후 쏘련에 쫓겨들어가 어느 변강에서 지금 일하고있다고 했다.

《장군님께서는 저에게 엄하게 물으셨습니다. 외세가 득세를 한다면 그편에 서겠는가? 민족을 버리고 외세에 굴복하겠는가? 사대는 굴종이다, 대국을 숭상하는 노예적근성이 낳은 비겁한 정신이다, 대국에 굴종하면 민족을 배반하는 길에 굴러떨어지게 된다, 일제시기에도 산에 숨어서 어지럽히지 않은 민족적량심을 어째서 이제와서 더럽히려고 하는가? 경제건설도 신념이 없이는 못한다. 장군님께서는 격한 음성으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김규식은 가슴팍을 줴질린것 같은 충격에 어쩔바를 몰랐다. 그는 어망결에 얼굴을 들고 서종현을 쳐다봤다. 자기의 진심을 리해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선량하고 어진 눈이 자기를 마주보고있었다. 김규식은 그 무엇인가를 암벽처럼 굳고 아아한 산봉우리처럼 큰것이 사태가 난듯이 가슴속에서 무너져내리는것 같은감을 느꼈다.

《외세가 득세를 한다고 해서 그편에 서겠는가고 하셨단 말이지. 경제건설도 신념이 없이는 못한다고 하셨단 말이지···》

김규식은 저도모르게 장군님의 말씀을 되뇌였다. 이제와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홍안의 30대 중반의 젊은 국장의 말, 어질어빠진 아버지를 빼닮은 서종현의 너무나도 진실한 체험담, 거기에 의심을 품을 빈구석이 어디에 있는가?··· 장군님께서는 상수리숙소에 오셨을 때도 사대를 한다는것은 망국에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며 민족자체의 힘을 믿을 때에만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수 있다고 하시였다. 그런데 자기는 무엇을 의심했는가? 그 의혹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된것인가?

김규식은 쇠집게같은것이 자기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죄는것 같은 감을 느꼈으며 숨구멍이 콱 막힌듯 가슴이 답답했다. 이마와 살쩍, 코등, 미간에서 소나기를 만난듯이 땀발이 내돋기 시작했다. 민족을 반역하고 민중을 배반한다는것은 돈에 매수되고 대국의 롱간에 현혹되여 침략자들에게 아부하는것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꿰지르고 지났다. 눈에 흘러드는 땀을 훔치려고 손을 들었는데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것 같아 두손으로 돌탁모서리를 움켜잡았다.

《왜 이러십니까?》

김규식은 윤명현의 다급해하는 말소리를 먼 메아리처럼 어렴풋이 들었다. 그는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모지름을 썼다. 자기의 몸을 부축하는 손길을 느꼈다. 서종현과 윤명현의 손길이였다.

《오늘 지나치게 무리를 한것 같습니다. 좀 안정을 하셔야 할것 같습니다.》

《괜찮네. 숙소로 돌아가세. 자동차는 와있겠지?》

서종현이 정문밖에 와있는 승용차를 불러왔다. 윤명현에게 의지해 승용차를 향해 걸어가던 김규식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배웅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싶은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현재의 그로서는 적당한 말을 생각해내기 어려웠다. 승용차에 들어앉기전에 몸을 돌린 그는 상체를 숙여 절을 하면서 쇠잔한 목소리로 사죄를 하는 말을 했다.

《량해를 해주시오. 실례가 많았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