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5

 

5

 

마침내 봄이 찾아들었다. 삼청장에도 봄빛이 가득찼다. 봄을 서둘러 맞이한 민들레꽃, 제비꽃, 노랑나리는 해밝고 산뜻한 빛으로 양지에서 웃고 살구나무, 벗나무가지에 다닥다닥 붙은 진분홍봉오리들은 봄빛과 어울려 놀며 꽃으로 피여날 시각을 앞당기려 애쓰고있다.

김규식은 봄을 맞이하는 초목의 열정과 아름다움에 취해 정원에 나가있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엄혹하고 다난했던 지난 겨울을 생각했다.

그런데 망나니들이 란입하여 꽃이며 나무는 말할것도 없고 마침내 겨울을 이겨낸 기쁨을 안고 애어린 햇순을 움틔우던 풀밭까지 마구 짓뭉개고 꺾어던졌다. 김구, 김규식이 평양방문을 결심한 자기들의 소신을 기자들앞에서 발표한 다음날부터 시작된 란동이였다. 무뢰한들의 행동이 평양으로 가는것을 막아보려는 위협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능히 짐작할수 있어 김규식은 생사를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봄을 맞이해 그렇게도 자연의 아름다움이 약동하던 초목들을 마구 짓뭉개는 그들의 무지막지한 짓에 격분하지 않을수 없었다. 또한 《반공》이니, 《멸공》이니, 《북행은 죽음》이라느니 하고 고아대는 망나니들의 거친 웨침소리를 청각이 예민한 그는 참을수가 없었다. 그래 오늘 아침부터는 귀구멍을 아예 솜으로 틀어막고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각이한 정견을 가진 여라문명의 비서들이 그를 에워싸고 목청을 돋구어가며 협상참가문제를 놓고 소란스러운 론쟁이란것을 벌리는것이였다. 정원을 짓뭉개는 불량배들을 어떻게 해서든 쫓아버리려고 경찰에 부탁도 하고 미군사령부에 통고도 했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민주주의가 시행되는 사회에서 그들의 애국적소행을 자기들로서는 어떻게 할수 없다는것이다. 다만 오늘 아침에 찾아온 버치만이 깡패들의 무지막지한 행동이 김규식과 같은 지성인에게는 지나친짓이라고 생각했던지 미군을 동원해서 망나니들을 곧 쫓아버리겠다고 장담을 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그가 삼청장을 떠난지도 이제는 좋이 서너시간이 되는데 미군이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리성이란것이 용납되지 않는 남조선이란 이 혼란된 사회에서 삼청장이라고 해서 어떻게 례외로 될수 있겠는가. 그는 체념해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를 에워싸고 론쟁이라는것을 벌리는 비서들은 김규식도 어쩔수가 없었다. 스스로 채용한 사람들인데다 김규식을 도와준답시고 왈가왈부하는데 이들을 쫓아버릴수는 없지 않는가. 사람의 몸이란 제한이 있는것이니 이제 고아대다 제풀에 지쳐서 물러나겠거니 했는데 웬걸 그대로 버티고앉아 고아대는데 그 태도가 여간만 완강하지 않았다. 리승만계로 알려진자들은 변소에 가는것도 서로 눈짓을 해가며 교대로 나드는판이다.

《아무래도 난 몸이 견딜수 없을것 같으니 자네들이 론의를 계속해서 상책을 얻거든 알려주게. 난 좀 누워야겠네.》

김규식은 이런 말로 비서라는것들을 객실속에 놓아두고 침실에 올라갔다.

침실에 들어선 그는 원탁에 놓인 전화기에서 송수화기를 들고 김구를 찾았다.

《거기는 어떻습니까?》

《굉장허이, 이제야 하지나 우남(리승만)이 이 백범의 값을 안것 같소. 우리 애들이 대충 머리수를 세보니 천쯤은 된다나··· 허, 허··· 우사는 언제쯤 떠나겠소?》

《이대로 떠나다간 도중에서 무슨 일을 당할것만 같습니다.》

《난 죽더라도 38°선을 베고 죽겠소. 협상회의는 14일부터라니까 우리가 목적하는 4자고위회담은 그후에 있겠지. 길이 좀 열리는 기미만 보이면 나는 곧 출발하겠소.》

《출발할 때 내게 꼭 알려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김규식은 배포가 유하게 웃어넘기는 그의 반석같은 의지가 부러웠다. 프랑스의 심리분석학자와 도이췰란드의 철학자는 유모아를 놓고 정반대의 견해를 내놓았는데 김구의 말을 들으니 난관과 곤난을 디디고 넘은 사람의 용감한 심리의 표현이 곧 유모아라고 한 심리학자의 말이 옳은것 같다. 도이췰란드의 철학자는 절망에 빠진자의 허세라고 했다.

정작 침실에 올라온 김규식은 쏘파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장죽을 물고 현재의 자기 처지를 생각해봤다. 인생말년에 이르러 모험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극한점에 도달한 사람의 모험을 하고있는것 같았다. 하긴 자신의 일생은 시련과 싸우는 모험의 련속이였다고 할수 있었다.

《그때는 젊었지.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 새로운 모험을 할수 있는 정력이 있었구. 그렇지만 이제는 늙었어. 이번에 실패하면 그것이 끝이겠지.》

김규식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불안이 서린 이런 나직한 말을 중얼거렸다.

문뜩 복도에서 빠른 발자욱소리가 들리는가싶더니 누구인지 침실문을 다급히 두드렸다.

《누군가?》

《명현입니다.》

《왜 그러나?》

《안에 들어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김규식은 힘겹게 쏘파에서 일어나 나들문의 자물쇠를 돌렸다. 침실에 들어선 윤명현은 김규식의 귀구멍에 솜방울이 들어박혀있다는것을 알고 목청을 돋구어 웨쳤다.

《하지가 오겠답니다.》

《뭐?》

《거 이제는 솜을 빼십시오.》

윤명현이 귀지개로 솜방울을 빼주었다.

《곧 하지가 여기에 오겠답니다.》

《그 사람이 직접 그러던가?》

《전화는 버치가 했는데 옆에서 사령관이 자기의 말을 듣고있다면서 선생님이 지금 삼청장에 계신지 그걸 묻더군요.》

《그러니까 하지가 온단 말이지? 난 소란스럽게 구는 저 무지막지한것들을 쫓아달라구 했는데 행차가 너무 요란스러운것 같지 않나?》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한후 삼청장은 말할것 없고 경교장이나 리승만한테 하지가 찾아갔다는 말을 들은적이 없었다.

《그럼 사령관의 직권으로 나를 억류하겠다는걸가?》

《억류를 하겠으면 장택상이나 림병옥(군정청 경찰부장)을 시키지 자기가 직접 찾아오겠습니까?》

《하긴 그래, 사령관의 직권으로 나를 납득시키자는거겠지.》

《곧 오겠는데 준비를 해야 할것 같습니다. 객실에서 떠드는 저 비서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할게 있나? 그대로 떠들라고 하지. 아무튼 사령관이란 사람을 침실에서 맞이할수는 없으니 내 이제 객실에 내려가겠네. 자네는 진동이 어머니한테 간소한 다과나 준비하라고 이르게. 혹시 말이 길어지면 점심을 같이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 준비도 좀 해놓구···》

《그 사람이 여기 와서 점심을 먹을게 뭡니까? 젓갈냄새때문에 코를 들수 없구 마늘냄새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구 조선음식에 일체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인데···》

《됐네. 바로 그런 음식을 조촐하게 준비하라고 이르게. 그것도 외교지. 내가 장죽을 그 사람들의 턱밑에 들여대고 연기를 내부는것과 같은 외교란 말일세.》

윤명현은 김순애를 찾아서 하지를 맞이할 이러저런 준비를 시키고 되돌아섰다. 하지는 벌써 객실에 들어와있었다. 그는 웃몸을 잔뜩 제친 거만한 자세로 쏘파에 앉아 자기앞에 웅기중기 서있는 비서들을 에둘러보고있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여있는지 모르겠다는 낯색이다. 버치가 사령관의 의혹을 풀어줄양으로 몇마디의 말을 했다.

《김규식박사는 본래 무당파 범민족적단합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있어서 각당각파의 대변자들을 비서명색으로 주위에 두고있습니다.》

《민족적단합을 처음부터 목적으로 삼았단 말이요?》

하지는 대뜸 낯빛이 날카로와졌다. 사령관실에서 화제에 오른, 미국에 가장 큰 위협으로 되는 바로 그 조선민족의 단합을 처음부터 목적으로 삼았다는 말로 들은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한 그런 의미에서의 단합이 아니라 좌우중간 가리지 않고 편견없이 대해야 한다는 김규식선생의 정견이랄지 립장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버치는 이 기회에 김규식이 당리당략을 초월해서 광범한 정계의 지지를 받고있다는것을 알려주고싶은듯 앞에 웅기중기 서있는 비서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저 사람은 리승만, 김성수계의 아무개, 저 사람은 북조선에서 쫓겨온 아무개, 저 사람은 온건한 우익민족주의자계통의 아무개, 이런 식으로 동물의 혈통을 이야기하듯 설명을 해나갔다.

《조선사람은 당신의 그런 말을 듣는것을 좋아하오?》

《각하앞에 서있는 저 사람들은 내 말을 알아들을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학력은 대학졸업이요 뭐요 하고 요란스러운 경력을 갖고있지만 사상가행세를 하느라고 공부도 하지 않고 공부를 했다고 해도 낡아빠진 옥스포드식영어를 배워서 우리 아메리카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각하에게 자기를 유리하게 소개해주는것 같아 내가 손으로 가리킬 때 굽신거리는것을 보십시오.》

《내가 있지 않소.》

의자등받이에 웃몸을 거느시 기대고 장죽을 빨던 김규식이 불쾌한 어조로 한마디 내뱉았다.

《내 비서들이 변변치 못한것은 사실이오만 조선사람을 멸시하는 그런투의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소.》

버치는 김규식의 나무라는 말을 웃음으로 대할뿐이였다.

《박사선생도 저 사람들을 손쉽게 리용할수 있는 치레거리로 여기면서 뭘 그럽니까. 우리 미국에서도 경멸을 받는자들과 그들을 멸시할 권한을 소유한 선발된 사람들의 집단, 이렇게 명백한 구분이 지어져있습니다.》

하지도 수다스럽게 떠들어대는 버치의 말롱간질을 듣고있기가 따분한듯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김규식박사, 나는 박사선생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통고하기 위해 개인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남조선주둔 미군사령관으로서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제한된 사람들만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합니다. 나와 김규식박사 그리고 나의 고문인 버치박사 이렇게 세사람이면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저 비서라는 사람들은 우리의 대화에 관여하지 못하게 해주시오.》

김규식은 하지가 불량배들을 쫓아버리는것 같은 하찮은 문제때문에 삼청장에 오지 않았다는것을 알았다.

《자네들은 잠간 장소를 옮겨야 할것 같네. 너무 조급하게 결론을 얻으려고 하지 말구 목을 추기면서 쉬염쉬염 생각을 가다듬어가지고 론의를 하게.》

비서들은 줄레줄레 객실에서 나갔지만 윤명현은 김규식의 옆에서 움직일념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하지와 버치가 알아들을수 없는 조선말로 윤명현이 김규식에게 이야기했다.

《저 사람들이 뭔가 심상치 않은 문제를 안고 온것 같은데 내가 선생님옆에 붙어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저 사람들도 둘이니 우리쪽에도 두사람이 참가해야 대등한 립장에서 대화를 하는것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평양에 가지 말라는거겠지. 무슨 대단한 이야기거리를 들고 왔겠나··· 혹시 말을 듣지 않으면 추방이라도 하겠다고 하겠는지···》

《버치가 잔뜩 들뜬것으로 봐서 그런것 같지도 않습니다.》

《아무튼 자네는 지나치게 과격해질 때가 있으니 자중을 하라구. 자네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리유는 내가 말할테니 자네는 듣기만 하게.》

하지는 방에서 나갈 잡도리가 아닌 윤명현을 비위가 상한 랭혹한 눈길로 쏘아봤다.

《저 사람은 어째서 내 지시에 복종하지 않소?》

《이 사람은 비서가 아닙니다. 이 사람은 한시도 내곁에서 떠나서는 안되는, 조선말로는 수제자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뭐라고 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을수 없구려.》

여느때는 자기의 손으로 담배를 고불통에 다져넣는 일이 없는 김규식이 이때는 제손으로 담배가루를 다져넣으며 말했다. 그가 영어로 이야기한 수제자란 단어는 대변자, 후계자, 특별보좌관이란 뜻으로 해석할수 있는 낱말로서 김규식은 할말을 이미 다한셈이였다. 김규식은 장죽끝을 하지의 면전에 들이대고 담배연기를 날리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는 불쾌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피해 자리를 옮겨앉았다. 버치가 윤명현으로 해서 랭랭해진 방안의 분위기를 개선해보려고 김규식과 윤명현은 오래동안 망명생활을 같이해온 사이라느니, 조선사람들은 생사를 같이한 이런 사람을 자기의 한 부분처럼 여긴다느니, 사령관각하가 비준한 《립법의원》 관선의원중의 한사람이라느니 하며 한참 수다를 떨었다.

《의리관계를 특별히 귀중하게 생각하는 조선사람들의 관례를 따르면 이 자리에는 김규식박사 한사람이 앉아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버치의 어느 말이 하지의 마음을 돌려세웠는지 알수 없지만 그는 전투명령이라도 하달하려는것처럼 자세를 바로잡았다.

《남조선 전지역을 통제하는 주권의 모체인 미군사령부는 오늘 김규식박사를 유엔감시하에 진행된 선거를 통해 앞으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으로 추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내가 남조선주둔군의 최고통치자로 권한을 행사하는한 변동이 없을겁니다.》

너무나도 뜻밖의 놀라운 말이여서 김규식도 윤명현도 잠시 어리벙해지고말았다. 김규식은 장죽을 빠는것마저 잊고 갱핏한 모색에 주걱턱인 하지를 한동안 마주보기만 했다. 리성이 그 무슨 판단을 하기전에 참을길 없는 흥분이 가슴속에서 뒤설레며 흉벽을 세괃게 치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사이였다. 어깨우에 바위처럼 무거운 짐이 실린것처럼 몸을 제대로 놀릴수도 없었다.

(증오에 사무쳐서 분별을 잃어버린 남조선민중을 내가 다루어낼수 있을가? 도탄에 빠진 민생문제를 내가 해결할수 있을가?)

사례의 말 한마디 없이 얼굴을 수굿하고 앉아있는 김규식이 괘씸한듯 하지는 불쾌한 낯색으로 딱딱하고 랭랭한 뒤말을 이었다.

《박사선생이 이 영예론 자리를 차지하자면.》

《오늘 사령부에서 각 분야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장시간 심중히 론의를 한끝에 최종결정을 지었습니다.》

버치가 갑자기 가운데 끼여들었다. 돌대가리인 사령관이 모처럼 결정을 본 훌륭한 방안을 깨뜨려버릴것 같아 제가 맡아나서기로 한것이다.

《군정장관, 국무성파견원, 수석고문, 내부사업책임자··· 대통령을 선발한다는것은 보통 중대한 일이 아닌것만큼 여러측면을 고려한 심중한 론의끝에 사령관각하가 방금 전달한 그런 결정을 채택한것입니다.》

버치는 자기 말의 효과를 알아보느라고 김규식을 마주봤다. 하지의 말에 충격을 받은것만은 사실인것 같은데 김규식은 깊은 생각에 잠긴 평시의 표정을 유지하고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해온것처럼 박사선생이 대통령이 되여야 할것은 론의할 여지도 없이 명백한 일인데 앞으로 형식적이긴 해도 선거라는 절차가 있는것만큼 이제 와서야 박사선생에게 우리의 결심을 알리기로 한것입니다. 나는 선생이 우리의 결정을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리라고 믿습니다.》

하다 못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줬으면 좋겠는데 김규식은 두둑한 량볼에 힘을 주어 장죽을 빨뿐 통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지목해온것은 틀림이 없는 일인데 갑자기 결정을 바꾼것을 보면 그뒤에 아직 알수 없는 음모가 깔려있는것만 같았던것이다.

《아시아의 례법으로는 두번 거절하고 세번만에 수락을 한다는데 박사선생이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현대인이니 낡은 례법을 따를 생각이야 없겠지요? 반대를 하지 않으면 수락한것으로 우리는 인정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제로 삼을것도 없는 일이긴 한데 대통령으로 내정된 이상 앞으로 정부수반에 오를 정치인으로서 이제부터 어떻게 행동해야겠는가 이것을 우리는 론의해봤습니다. 우리는 박사선생을 대통령으로 내정하고 준비를 해왔지만 박사선생에겐 갑작스러운 일이여서 대통령의 사명을 다할 방략을 빠른 시일내에 책정할수 있겠는지 우리는 이것이 근심스럽습니다. 례를 들어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진행될 남북협상을 어떤 태도로 림하겠는가? 쏘련의 적화정책과 제1선에서 대결해야 할 대통령으로서 어떤 방략, 어떤 결심을 갖고 지금부터 행동하겠는가?》

김규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사람들은 나의 북의 방문을 막을 생각으로 대통령이란 큼직한 미끼를 던진것이 아닐가? 김규식은 김일성장군님에게 반드시 남북협상에 참가하겠다고 언약한 자기와 김구 공동명의로 보낸 마지막서한을 생각했다.

《우리는 선생이 반드시 평양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웬만해서는 상대의 주장이나 권고에 놀라거나 당황해하는 빛을 보이는 일이 없는 김규식이였지만 이때만은 놀란 기색을 짓지 않을수 없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롱간을 피우려고 이런 말을 하는가?)

미국인들은 빠져나올 구멍을 찾을수 없는 미궁속에 자기를 던져넣으려는것 같았다. 김규식이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려는듯 윤명현이 한마디 했다.

《내가 담배를 담아드릴가요?》

《그만두게. 담배도락이란것은 담배를 피우는데만 있는것이 아니라네. 담배를 고르고 대통에 다져넣는것도 도락이라네. 체면을 생각해서 난 이 도락을 즐기지 않았을뿐이네. 어떤 이들은 담배대, 고불통, 물주리를 고르는것을 도락으로 삼는분들도 있지.》

《그러니까 남들의 힘을 빌리는것보다 제손으로 고르는데 도락의 본도가 있다는 말씀인데 지금과 같은 경우도 그것과 비슷한것 같습니다.》

《고마우이. 제정신을 잃지 말라는것인데 이 나이에 롱간에 넘어가기야 하겠나?》

이제는 버치와 하지의 말을 리성적판단을 하며 대할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얻었다.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평양에 가야 한다는 박사선생의 말이 옳다는것을 우리는 인정했습니다. 민족단결을 하자는 회의에 가지 않으면 민족단결을 반대하는것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공포되지는 않았지만 유엔감시하의 선거를 통해 서울에 서게 될 정부수반이 그 회의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것이 옳겠는가? 평양에서는 틀림없이 남북에서 선거를 진행해서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하겠는데 이런 주장을 박사선생의 립장에서 어떻게 대하겠는가? 우선 남조선에서 선거를 진행한다는것은 선전을 위한 공담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북조선에서 진행한 선거를 통해 정부를 세우겠는데 그 정부의 수반자리를 누가 차지할것 같습니까? 더구나 그 정부는 쏘련의 대조선적화방략의 산물이 아닙니까?》

버치는 저혼자만 지나치게 지껄이는것 같았던지 잠간 입을 다물고 하지를 돌아봤다. 괴퍅한 성미여서 여간해서는 남을 칭찬하는 일이 없는 하지가 자못 만족한 모습으로 파이프를 빨고있다. 그는 오늘에 와서야 버치의 외교적수완이며 능란한 말솜씨에 감탄한것 같았다.

《버치박사는 지금까지 나한테 와서 오늘처럼 에도는 일이 없지 않았소? 이전에 찾아왔을 때처럼 터놓고 이야기하구려.》

김규식이 퉁명스러운 말을 던졌다. 이제는 미군사령부에서 어떤 론의가 있었는지 대체로 짐작할만 했지만 버치의 마지막말을 들어보자는것이다.

《유엔이 지지하는 조선의 중앙정권의 대통령으로 협상에 참가했으니 선생님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구 서울에 돌아와서는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를 박사선생이 모를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이런 방향에서 론의를 해봤습니다. 평양에 가서는 유엔의 결의를 따르는것이 조선의 장래를 위해 유리하다는것을 회의참가자들에게 납득시키는것이 제일 좋을건 명백합니다. 그러나 분위기가 그런 말을 할수 없는 경우에는 회의에 참가하지 않고 일체 발언을 하지 않는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박사선생을 대해본 경험에 비추어보면 선생은 평양에 가서 능숙하게 일들을 처리해나가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돌아와서는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자들과 앞으로 본격적인 대결을 해야 할터이니 견결한 태도를 보여야 할것이 아닙니까? 정계란 원래 생사를 겨루는 랭혹한 전투장이라는것을 선생님도 알리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최대의 국제기구인 유엔에 의거해야 조선의 장래를 담보받을수 있다는 말도 할수 있고 특히 북의 정치체제를 부인하는데 힘을 넣어야 할것입니다. 북에 가보면 선생으로서는 그렇게 말할수밖에 없는 현상들을 많이 목격하게 될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있습니다. 저 유명한 작가 앙드레 지드가 쏘련의 실태를 목격하고 프랑스에 돌아와서 쓴 쏘련기행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까?》

《우리 선생님을 대통령으로 천거하겠다는것을 무엇으로 담보할수 있습니까? 사령관각하는 미국대통령한테서 이런 담보를 해도 좋다는 위임을 받았습니까?》

윤명현은 김규식이 뭐라고 하기전에 무뚝뚝한 어투로 물었다. 김규식은 자기가 희망하던 대통령자리가 차례질 가능성이 생겼으니 버치와 하지의 요구를 승낙할수도 있을것 같았던것이다.

버치의 능숙한 설복을 만족해하던 하지의 얼굴에 한순간 당황한 빛이 스쳐지났다.

《수일내로 사령관각하의 담보에 찬성하는 회신이 올겁니다.》

버치가 얼른 가운데 끼여들었다.

《나는 버치박사 당신에게 물은것이 아니라 사령관각하에게 물었습니다.》

하지가 불쾌한 낯색으로 무뚝뚝한 대꾸를 뱉아냈다.

《당신은 이 사령관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가? 내가 조선의 한 정객을 기만하기 위해 이렇게 당신들을 찾아다닐 사람 같은가?》

하지는 파이프를 쥔 손을 내두르기까지 했지만 윤명현은 조금도 굽어들지 않았다.

《본국에서 사령관각하의 의견을 부정하면 나의 스승을 기만한것으로 되지 않습니까?》

《내 관할하에 과거의 총독부에 들어앉은 군정청이 속해있소.》

하지는 어성을 높였다.

《나의 관할하에 미국무성 파견원이 속해있구 100여명의 고문이 있소. 정치는 반드시 정보를 중시해야 하는것만큼 그 분야의 권위자도 나와 협조하고있소.》

《우리도 대체로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귀국에서 사령관각하의 의견을 부인할 때는 결국 나의 박사선생을 기만한것으로 된다는것은 간단한 론리가 아닙니까. 사령관각하가 본국의 회보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삼청장을 찾아온 리유는 알만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존경해오고 고락을 같이해온 김규식박사는 그런 투전놀음에 기대를 걸고 수십년간 지켜온 신념과 량심을 함부로 내대는분이 아닙니다.》

윤명현은 김규식에게 조선말로 물었다.

《내가 말을 잘못했습니까?》

《자네로선 그렇게 말하는것이 옳겠지. 그렇지만 지나치게 과격한것 같구만···》

김규식은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해온 대통령의 직책을 허수하게 대하고싶지 않은 모양이였다.

《이런 때는 과격해야 저 사람들한테 양보를 받아낼수 있습니다. 만일 미국이 정말로 선생님을 대통령으로 천거할 결심을 했다면 저 사람들의 기분을 좀 상하게 했다고 해서 결정을 취소할것 같습니까?》

《우둔한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하는것은 감정이네. 잘못했다는것을 깨달았을 때에야 리성이 영향을 주기 시작하지.》

김규식은 대통령의 직책을 수락할 생각인것 같았다. 최고의 지성인으로 자처하는 김규식도 얼마나 생각이 짧은가? 우리 민족이 이때를 놓치면 자주권을 쟁취할 중요한 계기를 잃는다는것을 어째서 생각하지 못하는가? 윤명현은 김규식이 말하는 바로 그 과격한 행동을 계속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미 주둔군사령부에서는 박사선생을 대통령으로 천거하기로 결정했다니 우선 그에 상응한 대우를 해줬으면 합니다.》

《윤명현씨가 요구하는 그 대우란 어떤것입니까?》

버치는 분위기를 흐리게 하지 않을양으로 웃음지은 얼굴로 물었다.

《저 삼청장에 란입한 무뢰한들때문에 선생은 어제밤에도 한잠도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저 망나니들을 내쫓아주시오.》

《사령부는 저따위 불량배들을 쫓아버리는 일에 개입하지 않소.》

하지는 성이 나서 뇌까렸다.

《저 무지막지한 망나니들은 그대로 내버려두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박사선생의 북의 방문이 더욱 극적인것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삼청장에 들어오면서 보니까 수십명의 기자들이 자리싸움을 하느라고 야단이였습니다. 파출소지붕에 올라가 붙어있는 기자도 있었습니다. 루즈벨트대통령은 일본의 진주만공격을 극적인것으로 만들기 위해 진주만의 군함을 희생시키는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버치도 하지도 망나니들을 삼청장에 둬둘 심산인것 같았다. 평양으로 훌쩍 떠나버릴가봐 겁이 나는 모양이다. 윤명현은 더욱 중요한 다음 문제를 위해 더 싸우지 않기로 했다.

《다음은 박사선생을 38°선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갈수 있게 해주는것입니다. 사령부에서 대통령으로 천거한 박사선생이 테로라도 당하면 큰일이 아닙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도 생각이 있습니다. 충분한 경찰력이 박사선생을 경호할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박사선생이 20일이 지나서 서울을 출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수백명쯤은 모이는 회의를 준비하고있는것 같은데 이런 회의장에서 박사선생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발언할수 없지 않겠습니까. 박사선생이 평양에 들어가면 별도로 좌담회라든가 작은 범위의 회담이라든가 아무튼 그 어떤 형식의 회합을 마련할겁니다. 박사선생에겐 이런 자리가 더 편리할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윤명현은 미군사령부에서 얼마나 치밀한 음모를 꾸몄는지 알수 있었다. 분격이 혈관을 지지며 온몸을 줄달음쳤다. 그러나 수제자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끼여든 그로서는 분격을 폭발시킬수가 없었다.

《선생님, 저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무서운 함정을 파놓고 선생을 그속에 밀어넣을 음모인것 같습니다.》

윤명현은 대통령이란 미끼에 김규식이 걸려들것 같아 겁이 났다.

《걱정말게. 내가 정치란것을 모르는 사람 같은가?》

윤명현에게 얼마간 짜증이 섞인 말을 던진 김규식은 하지가 취한 그 비슷한 자세를 취하느라고 웃몸을 일으켜세우며 장죽을 옆탁에 놓았다.

《나를 대통령으로 천거해주겠다니 나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너무나 과남한 일인줄 압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앞날의 일인즉 두고봐야 할 일인줄 압니다. 내가 평양에 가겠다는것은 공산주의자가 되겠다는것도 아니고 또 그 누구의 말에 동조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내 눈으로 북의 현실을 보고 지금까지 평양측과 서찰을 통해 주고받은바 내용이 정말로 북의 정책인지 쏘련의 적화정책인지 내 스스로가 확인하자는것입니다. 사령관각하와 버치박사의 말을 충분히 고려할터이니 그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줄 압니다.》

김규식의 이 말은 사실이였다. 만일 서신에 언급되여있는 북의 정책이 사실이라면 야심가형의 독재광인 민족반역자 리승만을 밀어제치고 자기가 남조선정권의 대통령자리에 올라앉아 평양과 련계할수 있는 길을 찾고싶었다.

 

김구는 경교장을 에워싼 폭력단의 눈을 속이느라 집안에서 신던 끌신을 신은 그대로 뒤문으로 빠져나가 대기시켜놓았던 승용차를 타고 평양방문을 단행했다. 노불의 권고따위는 처음부터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그는 떠나기전에 김규식한테서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을 전화를 통해 듣고 《나는 떠나겠소. 뒤따라오리라고 믿소.》 한마디를 내뱉고 송수화기를 내려놨다. 그가 은밀하게 조직해놓은 20명의 대표들과 수원들이 도중에서 그와 합세했다. 그는 자기의 전용차 서울2253번 비크38년형을 타고 미군헌병들이 어리벙벙해있는 사이에 38°선을 넘어 기다리고있던 우리측의 안내를 받아 곧장 평양으로 향했다. 그가 서울을 출발했다는 대변인의 성명이 전해지자 그의 영향하에 있던 정당단체대표, 수원 80명이 13대의 승용차와 화물차에 나누어타고 곧 그의 뒤를 따랐다.

김구가 서울을 출발했다는 소식은 김규식을 한자리에 앉아있을수 없을만큼 초조하게 만들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김구, 김규식 련명으로 된 편지를 보내주시군 하여 협상과 관련해서 언제나 공동보조를 취해온터인데 이제 자기가 서울에 남아있으면 세상사람들은 자기를 어떻게 볼것인가? 사실 김구의 출발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남조선전역의 민심을 뒤흔든 신문들은 김규식의 동향에 날카로운 주목을 돌리면서 그의 출발을 촉구해나섰다. 이즈음 삼청장에서 매일 진행되는 민족자주련맹 정치위원들의 모임에서도 리극로는 로골적으로 김규식에게 본심을 밝히라고 들이댔다.

하루는 깡패들이 둘러싸고있는 삼청장에 어떻게 뚫고 들어왔는지 가깝게 지내는 서상문목사가 찾아왔다. 김규식이 조선을 떠날 때 새안문교회의 목사직을 물려준 사람이였으며 광복후 서울에 돌아와서는 상종이 많은 량심적인 그리스도교인이였다.

그는 근심에 잠긴 선량해보이는 큰눈으로 김규식을 마주보며 물었다.

《선생님은 떠나지 않으십니까?》

《보다싶이 앞길을 막아서 이러구 있습니다. 곧 떠날 예정입니다.》

김규식은 길쑴한 목사의 얼굴을 마주보며 앉았느라니 부지중 량심이 가책되였다. 때묻지 않은 서상문에 비해 자신이 너무나 어지러워진것 같았다.

《내 서목사님 아드님행방을 어떻게 해서든 알아보겠습니다.》

서상문이 일제시기 감옥살이를 하고있을 때 종교계에 들어서는것을 반대해오던 아들이 북조선의 산중으로 들어갔다는데 그후 어떻게 되였는지 도무지 행방을 알수 없었다. 들려오는 소문에는 쏘련군에게 억류되여 씨비리에 끌려갔다고도 하고 처형을 당했다고도 하는데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목사의 아들을 그대로 두었을것 같지는 않았다. 서상문을 만날 때면 그 아들의 운명을 놓고 쏘련의 종교정책이 이야기되군 했다.

서상문이 불량배들속을 뚫고 찾아온것은 바로 아들의 행방을 알아달라는 부탁을 하러 온것으로 김규식은 생각했다.

《그 일로 찾아온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북으로 가시는데 미미한 성의나마 보이고싶어 모금을 해서 그걸 가져왔습니다.》

서상문은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돈뭉치를 꺼내놓았다.

《선생님은 구차한 걸음을 하지 않겠지만 대표와 수원들이 따라야 할것이니 아무래도 로자가 있어야 할것이 아닙니까. 약소하지만 교인들의 성의이니 받아주십시오.》

김규식은 민심의 흐름에 가슴이 옥죄이는것 같은 압력을 느꼈다. 회계를 불러 서상문이 가져온 돈을 이번길에 필요한 자금으로 쓰게 하라고 했다.

그에게 출발을 촉구하는 사람은 서상문만이 아니였다. 자동차를 무료로 봉사하겠다는 사람들, 대표와 수원들이 평양에 갈 때 써달라며 와이샤쯔, 내의, 넥타이, 양말들을 보내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과일상점에서는 사과, 배, 곶감을 수십구럭이나 보내오기도 했다. 민심을 얻자면 한시바삐 서울을 출발해야만 했다. 김규식은 하지에게 더는 서울출발을 지체할수 없다는 전화를 벌써 몇번이나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