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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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타고온 승용차를 눈덮인 벌판 한가운데서 돌려보낸 성시백은 10여리 남짓한 길을 걸어 새벽어둠속에 잠겨있는 개성시내에 들어섰다. 만월재를 한옆에 끼고 골목길을 걸어올라간 그는 한채의 기와집앞에 이르러 대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곧 안에서 발자욱소리가 들리는가싶더니 대문이 열렸다. 성시백은 마치 제집에 오기라도 한것처럼 아무 말도 없이 뜨락에 들어섰다.

형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어리둥절해진 막내동생을 뒤에 달고 안방에 들어가 앉은 성시백은 이날 밤에 38°선을 넘어야겠으니 대책을 세우라고 하고는 자리에 누웠다.

조반을 먹으려고 잠시 일어나 앉았던 성시백은 이날 밤을 또 새워야 할것을 생각해서 다시 이불밑으로 들어갔지만 잠을 이룰수는 없었다. 남조선에서 고생을 한다며 다정히 손을 잡아주실 장군님의 웃음어린 존안이며 자기의 말을 주의깊이 들으실 사색깊은 그이의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규식과 언쟁을 하다싶이 하고 해운대에서 돌아온 그는 며칠을 두고 생각을 거듭한 끝에 평양방문을 결심하고 개성에 온것이다.

앞으로 김규식을 어떤 립장에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대해야 할것인가? 김규식의 《유엔의존론》이 남북협상지지세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결정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것인데 지금까지의 자기의 생각이 옳은가? 옳지 않다면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것인가? 이것은 성시백이 가볍게 결정할수 없는 중대한 사항들이였다.

성시백은 서울을 출발하기전에 그간의 김규식과의 사업정형을 어떤 방식으로 장군님께 말씀드릴것이며 우사가 미국에 대한 의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원인, 예견되는 앞으로의 동향···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을 머리속에 그려넣었지만 개성에 와서 생각하니 무엇인가 미진한 점이 있는것 같았다.

성시백은 이불밑에서 빠져나와 이미 사위여가는 몇점의 불티가 눈에 띌뿐인 화로를 안고 부저갈로 재를 헤집으며 미진한것이 있는듯싶은 이 불만이 어디에서 오는것인지 생각해봤다. 장군님 뜻대로 일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가고있는 자신에 대한 불만탓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꼭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사실에 있어 자기로서는 할수 있는 노력을 다 했다. 장군님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것은 사실이였지만 이것을 두고 아퀴짓지 못한 미진한 문제가 있는듯 께름하게 여길것은 없다고 여겨졌다.

어떻게 돼서 끝내 김규식을 개심시키지 못하는 이런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왔는가? 이것은 성시백이 서울을 떠나면서 수없이 반문한것이다. 혁명가인 그는 실패의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우선 찾았다. 그는 남북협상에서 맡은바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고 자신을 탓하기까지 했다. 민족대화합이 막을수 없는 대세로 되고있는 남조선정계에서 김규식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할수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우선 장군님께서 이름을 찍으며 민족의 편에 돌려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대상이였다. 그 김규식을 개심시키지 못한 자기따위가 어떻게 남조선에서 민족자체력량을 꾸리는것과 같은 대업을 성취할수 있겠는가? 능력이 부족하고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장군님께서는 믿음을 안겨주시였는데 그 뜻을 받들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성시백은 어쩔수없이 스스로를 비판하게 되는것이였다.

그러나 정세는 자책을 하면서 모지름을 쓰고있을수 없게 날이 갈수록 긴박해지기만 했다. 발생한 사태를 시급히 수습하고 남조선협상파가 더욱 적극적으로 장군님의 제창에 호응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자기의 이런 생각에 명확하지 못하거나 미흡한 점이 없어보였는데 개성에 와서 갑자기 그 무엇인가 빈구석이 있는듯한 불안을 느끼게 되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장군님의 의도를 깨끗하게 성사시키지 못하고 평양을 향해 가고있기때문인가? 지성인의 예리한 사색을 하는데 습관되여있으며 혁명투쟁에서 석연치 못한 흐리터분한 문제를 끌고다녀서는 안된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성시백이였지만 이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는 불안의 원인을 종시 찾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이날의 심야에 막내동생을 앞세우고 나섰다. 또골또골하게 여문 싸락눈이 하늬바람에 날려 성시백의 얼굴을 아프게 후려치고있었다.

 

부관이 조심스럽게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는 발자욱소리를 조심하며 창가에 다가가 창가림을 당기려고 했다. 랭혹한 밤추위가 방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것이다. 문뜩 뒤에서 장군님의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그대로 두오. 이제 달이 뜰게요.》

사실 창밖을 내다보니 미림벌 저끝의 군청색하늘이 은가루가 자욱히 날아예는것처럼 희벗하게 밝아오고있었다. 부관은 인민위원회의 거의 모든 일군들이 휴식하는 일요일에도 저녁 늦게까지 사업하시는 장군님을 안타까운 눈길로 잠시 바라보다 집무실을 나섰다.

장군님께서는 남조선정세참고자료를 묶은 문건을 앞에 놓고 사색을 이어가고계시였다. 서류장을 번지는 그이의 얼굴에 때로는 우려의 기색이, 때로는 혐오와 분노를 참기 어려워하시는 빛이 어리군 했다. 특히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이란것을 서울에 끌어들인 후의 미제의 책동은 비렬하기 그지없었다. 저희들의 손탁에서 노는 예속국의 외교관들을 끌어다놓고서도 미군사령부에서는 그들의 눈을 가리우고 귀를 막기 위해 온갖 비렬한짓을 다하고있었다. 성시백계통에서 발행하는 신문들은 말할것 없고 일부 외신들이 지적하고있는것처럼 위원단성원들을 미군사령부의 장교숙소인 조선호텔에 밀어넣은것은 자기네 장교들과 섭쓸리게 하면서 그들의 일거일동과 동향을 감시속에 두자는 음흉한 속심에서였다. 위원단의 사무소는 또 어디에 두었는가? 세종로란 대통로 하나를 사이에 둔 덕수궁안의 석조전에 개설하게 했다. 승용차를 리용하면 불과 3분내에, 타국에 온 외교관답지 않게 걷는다고 해도 10분이내에, 그것도 절반쯤은 호텔의 구내와 덕수궁안의 화려한 정원길에서 시간을 소비하게 되는 길이였다. 이것은 《유엔림시조선위원단》입국을 반대하여 매일처럼 피의 투쟁을 벌리고있는 서울시민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려는 또 하나의 교활한 술책이였다.

거기에다 미제놈들은 리승만계의 친일친미매국족속들을 동원해서 협상단이니, 질의단이니, 위로단이니, 사례단이니··· 아무튼 사람의 머리로 생각해낼수 있는 온갖 명색의 무슨 단, 무슨 회라는것들을 수태 무어가지고 덕수궁사무소는 말할것 없고 위원단의 숙소인 조선호텔에까지 뻔질나게 찾아가 《유엔결의리행을 촉구》하기도 하고 《민족의 념원》을 전달하기도 하며 동방일각의 가난한 나라에 와서 어려운 일을 하게 된것을 위로하고 사례도 하게 한다는것이다. 낮에는 오찬회, 밤에는 호화로운 만찬회, 지어는 미모의 젊은 녀성들을 통역, 안내양 명색으로 위원들에게 붙여서 미인계까지 쓰게 하고있다는것이다. 설사 남조선인민들의 정당한 의사가 전달되였다고 해도 미제에 의해 묵살될판인데 위원단을 이 모양으로 롱락하고있으니 조선에서 《유엔의 결의리행가능성》여부를 알아볼 겨를도 없을것이다.

세론을 기만하려고 이따위 위원단을 무어 서울에 파견하는 유엔에 기대를 걸고 김규식이 정견을 바꾸었다니 장군님께서는 여간만 섭섭하지 않으시였다. 성시백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유엔을 세계의 《국회》로 본다고 한다. 한 나라의 국회도 특권층의 줌안에 든것인데 세계제패를 위해 딸라와 무력을 휘둘러대는 미국한테 유엔이 롱락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그가 정말로 생각했을것인가? 지성도 있고 일정한 판단력도 있으며 정계에서 차지하고있는 제 위치를 모를수 없는 김규식이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수 있겠는가? 남북협상을 쏘련의 적화방략으로 간주하고있다는 바로 그 의심으로 해서 그런 당치 않은 생각을 하기에 이른지도 모른다. 이것이 김규식 한사람과 관련될 문제라면 그의 의심이 풀릴 때를 기다릴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제침략자들은 남조선협상파를 어떻게 해서든 와해시켜보려고 어용신문들을 동원해서 그의 《유엔의존론》을 요란스럽게 선전하고있었다. 김규식의 동요가 남조선정계에 어느만큼 영향을 미칠것인가?···

장군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다가가 한귀가 얼마간 이지러진 열이레달이 굳게 얼어붙은 군청색밤하늘을 순결한 은백색빛으로 녹이며 하늘중천을 향해 장쾌하게 솟아오르는 광경을 내다보며 생각을 이어가시였다. 정말로 김규식이 그렇게도 종잡기 어렵고 민족을 위한 길에 돌려세우기가 그렇게도 힘든 사람인가? 성시백을 만나고 온 김책의 말을 들어봐도 그렇고 김규식을 돌려세운다는것은 사실에 있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과연 그가 민족대화합의 뜻깊은 자리에서 빠져야 할 사람이겠는가?··· 장군님께서는 김규식이 참가하지 않은 남북협상을 생각하고싶지도 않으시였다. 그가 남조선정계에서 차지하고있는 위치가 대단해서 그렇게 생각하시는것은 아니였다.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려고 고민도 하고 몸부림도 치며 때로는 마음속으로 눈물짓기도 한 정치인이 김규식인듯 싶으시였다. 그가 남북협상에 의혹을 품고있는것은 30여년간 너무나 많이 속히운 나머지 우리의 의도를 리해하지 못한탓이지 민족을 배반하려는데 있지 않다고 그이께서는 믿고싶으시였다. 이런 사람을 민족대화합에서 제거해야 하겠는가? 만일 그렇게 하면 30여년간 민족적량심을 지키며 망명생활을 해온 김규식은 어떤 말년을 맞이하게 될것인가? 그를 조선민족의 편에서 떼내여 자기네 편으로 되게 한것을 통쾌해하는 미제침략자들의 몰골이 그이의 눈앞에 문뜩 떠올랐다. 김규식에게 이런 수치스러운 말년을 보내게 해야겠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의 뜻을 믿게 할수 있을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진심을 김규식에게 전할것인가? 그이께서는 반일력량과 련합하는 방법으로 일제의 대군과 싸워 승리한 항일대전시기를 돌이켜보시였다.

진심이면 돌우에도 꽃을 피울수 있다는 신심, 넓은 도량, 옳은 정책과 로선··· 바로 이것으로 민족적량심의 소유자들과 련합하지 않았던가! 반일부대와의 련합, 민족주의자들, 종교인들과의 련합도 그것으로 이룩했다. 하긴 38°선이라는것이 가로막아 항일무장투쟁시기처럼 김규식과 마주앉아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하혁명투쟁에 오랜 경험을 가진 능력있는 성시백이 있지 않는가. 사람의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과 방법도 여러가지가 아닌가.

그이께서는 집무탁옆에 돌아와 탁상전화기에서 송수화기를 들고 김책을 찾으시였다.

《성시백동무가 지금쯤은 잠자리에 들었을것 같습니까?》

《그 동무는 요즘 장군님께서 부르실 때를 기다리느라고 좋아하는 술도 입에 대지 않고 언제나 대기하고있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시간이 좀 늦기는 했지만 성시백동무를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밤참에 습관된 동무이니 저녁식사를 같이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성시백동무를 데리고 우리 집에 가시오. 나는 30분쯤 후에 집에 들어가겠습니다.》

송수화기를 놓은 장군님께서는 정세자료를 마저 읽고는 김책이 제출한 문건을 앞에 놓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이 문건을 벌써 세번째 읽으신다. 오늘 밤에는 연필로 밑줄을 그은 대목, 의문부호를 단 부분만을 다시 읽으며 자신께서 심중에 품고계신 생각을 더욱 심화시켜나가시였다.

 

김책에게 말한 시간보다 얼마간 늦게 그이께서는 댁에 이르셨다. 언제나 그런것처럼 김정숙동지께서는 현관앞에 서시여 그이를 맞이했다. 장군님께서는 웃음지은 안색으로 모자와 외투를 김정숙동지에게 벗어주며 현관안에 들어가시였다. 응접실 문밖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그이를 기다리는 성시백의 모습이 제일먼저 눈에 띄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앞에 다가가서 손을 굳게 잡으시며 걸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적구에서 수고하는 동무를 기다리게 해서 안됐습니다. 평양에 와서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까?》

《마음을 푹 놓고 그저 휴식을 하고있습니다. 김책동지가 매일이다싶이 찾아와서 북조선에서 달성되고있는 성과도 말해주고 제가 고충으로 생각하고있는 문제들을 들어주기도 합니다. 장군님께서 국기, 국장제정사업을 벌써 지도하고계신다는것도 알았습니다.》

성시백은 장군님을 뒤따라 응접실에 들어서며 감동에 젖은 음성으로 말씀드렸다.

《김책동무가 그렇게 자주 찾아갔습니까? 나한테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아무튼 중요한 사업을 하는 성시백동무에게 성의를 바쳤다니 됐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성시백을 응접실벽에 기대놓은 의자에 눌러앉히시였다. 그를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자리를 잡은 그이께서는 성시백의 얼굴과 외모를 잠시 살펴보시였다. 차림새는 남조선의 혼란을 리용해 일확천금한 무역상처럼 보였지만 진지하고 지성이 내밴 소박한 표정이 어린 얼굴은 전혀 다른 인상을 안겨주었다. 사심이란 없는 순결무구한 그런 소박한 표정은 진정한 혁명가에게서만 찾아볼수 있는것이며 때묻지 않은 지성도 또한 그러한것이다. 그이의 얼굴에는 흡족해하시는 밝은 웃음이 피여났다. 담화를 나눌 때 늘 그렇게 하시는것처럼 장군님께서는 우선 가족의 안부를 물으셨다.

《처켠까지 온 집안을 혁명투쟁에 인입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습니까?》

성시백은 전번 평양에 들어온 기회에 누이 성소조를 서울에 데리고나가 안해와 함께 시내의 련락임무를 담당하게 하고있었으며 막내동생에게는 그가 이번에 리용한 련락통로를 개설하게 했다. 처켠의 친척들은 주로 적중에 들여보내 조직을 엄호할 과업을 맡겼다. 개중에는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한 중심가를 관할하는 경찰서장자리를 타고앉은 사람까지 있었다. 종로경찰서장 민병홍이 바로 그런 사람이였다. 온 일가친척이 남조선혁명에 떨쳐나선셈이였다.

성시백은 그들모두가 장군님의 건국로선을 관철하기 위해 일신을 돌보지 않고 투쟁을 전개하고있다고 말씀드렸다.

《지금쯤은 아주머니가 해산을 했을것 같은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성시백은 열적은 얼굴로 생남을 했다고 말씀드렸다. 장군님께서는 집안의 경사처럼 기뻐하며 김정숙녀사를 부르시였다.

녀사께서는 팔소매를 걷어붙인 그대로 손의 물기를 미처 씻지도 못하고 급히 응접실에 오시였다.

《성시백동무가 옥동자를 보았다오. 종발에 조각한 그 이름이 어색하지 않게 됐소.》

녀사께서도 못내 기뻐하며 민순임동무에게 생남을 축하하는 자신의 인사를 전달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다. 그이의 축하속에 얼마나 뜨거운 정이 담겨있었는가 하는것은 성시백이 서울에 나갈 때 들고 나갈수 있게 산후의 건강회복에 특효가 있는 산삼을 비롯한 여러가지 보약을 준비하신것만 보아도 능히 알수 있는 일이다.

흥성거리던 응접실의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장군님께서는 자세를 바꾸며 이날의 상봉을 마련한 본문제로 말씀을 돌리시였다.

《성시백동무의 견해를 김책동무를 통해 들었습니다. 북조선민전의장단회의에서도 말했지만 그사이에 성시백동무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부드러운 웃음이 비낀 안색으로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의장단회의에서 남북협상이 성사될수 있는 가능성의 하나는 남조선의 중간과 우익민족주의세력과의 통일전선사업에서 일정한 성과가 달성된데 있다고 하시였다. 이름을 들어 이야기하지는 않으셨지만 장군님의 이 말씀은 성시백의 사업에 대한 평가였다.

《특히 13개 정당 협의회를 조직한것은 큰 성과입니다. 성시백동무는 단결과 련합의 시대를 열어놓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못내 만족한 안색이였다.

《그런데 성시백동무의 견해에는 리해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한두군데 있습니다. 김구, 김규식선생에 대한 견해가 그렇습니다. 특히 김규식선생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명백하지 못하고 혼란된 감이 납니다. 다른 문제들은 분석이 정연하고 평가도 정확한데 김구, 김규식선생 특히 김규식선생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성시백동무답지 않게 어딘지 모르게 혼란된 감이 납니다.》

장군님께서는 부드러운 눈길로 성시백을 마주보시였다. 김규식문제는 아직 수습되지 않은 혼돈된 상태에 있으니 그럴수밖에 없을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성시백은 장군님의 말씀을 자기의 부족점을 정확히 지적한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그이께서는 성시백의 이러한 마음속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것처럼 문제의 본질을 찌른 질문을 하시였다.

《김규식선생은 유엔의존론을 내놓는것으로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놓았다고 성시백동무는 말한다는데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김구, 김규식선생들이 남보기엔 형제간처럼 지내지만 남북협상에 대한 견해는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결국 김규식선생이 김구선생한테서도 배척받을 날이 가까와왔다는것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김규식선생이 더는 쓸모가 없는 인물이 되였다고 생각한다는것이겠습니다?》

《선생의 마음을 돌려세워보려고 노력을 하느라고 했는데 그는 민족을 등지는 길에 들어서고말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심중한 정치적사색이 흐르는 방안의 팽팽한 분위기를 순간에 흩날려버리는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시였다.

《내 성시백동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줄 알았습니다. 김규식선생이 민족을 등졌다··· 하하하··· 다른 일에서는 빈틈이 없고 정세도 정확하게 판단하는데 김규식선생에 대해서는 락제입니다.》

성시백은 장군님의 의도에 맞지 않게 김규식을 평가하고 대할 생각을 했다는것을 순간에 깨달았다.

그런데 장군님께서 웃으실만큼 잘못 생각한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그것이 어째서 잘못된것인지 아직은 똑똑하게 알수가 없었다. 다만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것만은 틀림이 없어 머리를 깊이 떨구었다.

《성시백동무는 김규식선생이 우리와 손을 잡을수 있는 우점을 먼저 보지 않고 결함을 먼저 보았습니다. 림병옥이란 사람이 우리 민주기지에서도 유엔감시하의 선거를 진행해야 한다, 앞으로 수립될 정부는 군정선상의 정권으로 되여야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했을 때 마치를 두드리면서 의장석에서 떠나버린 선생의 견결한 태도를 우리는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동래의 동헌문에 매달린 세사람의 머리를 보고 선생이 눈물을 흘린것은 가혹한 탄압을 막지 못한것이 너무 괴로와서 참을수 없었기때문입니다. 선생은 흑하사변 때 참살당한 독립운동자들을 오늘도 잊지 못하고있다는데 그 세사람의 주검도 선생이 눈을 감을 때까지 잊지 못할것입니다.》

장군님의 얼굴에서는 어느덧 웃음이 사라지고 김규식이 체험한 그 고통을 감수하고계시는듯 괴로운 빛이 비낀 무거운 안색이였다.

《혁명도 건국도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련합을 하자면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시백동무는 김규식선생과 사업하면서 너무 애를 먹다나니 그만 선생이 갖고있는 우점을 보지 못하게 된것 같습니다. 우리는 분렬된 조국을 구원하고 전민족의 단합을 위해 싸우는 조선의 혁명가들입니다. 조국을 위해 자기를 바칠 결심을 하고 투쟁에 나선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자기를 바친다는것은 목숨을 바친다는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리익, 사생활, 감정까지 조국을 위해 바친다는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시백동무는 그만 감정에 사로잡혀 예리한 판단력과 분석력까지 무디여진것 같습니다.》

김규식의 종잡기 어려운 행동에 격분을 느낄 대신에 서울에 있는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그의 우점을 먼저 말씀하시는 장군님의 너그러운 도량과 대해같은 자애로운 동족애에 성시백은 머리가 숙어졌다. 김규식의 우점을 먼저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해서 그가 견해를 바꾸었겠는지 이것은 아직도 의심스러운 일이였지만 자기따위는 감히 가늠할수도 없는 거대하고 아아한 산악과 같은 위인의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조선민족을 자주독립에로 이끌고 나가신다는것만은 틀림없는 일이였다. 그는 얼굴을 곧추 들고 부드러운 웃음이 비낀 장군님의 존안을 우러러봤다. 자책감이나 회오감을 느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왜 판단이 무디여졌다고 하는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장군님께서는 응접실안을 오고가며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남북협상을 전민족의 대단합회의로 되게 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명실공히 전민족의 의사를 반영한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이런 회합이 반드시 개최되여야 한다는것을 성시백동무도 잘 알고있을겁니다. 그렇게 하자면 좌익만이 아니라 중간, 우익민족주의자들까지 민족단일정권수립을 찬성해야 한다는것도 성시백동무는 모르지 않을겁니다.》

성시백도 장군님의 이 웅심깊은 의도를 리해하고있었으며 그이의 의도를 어떻게 해서든 받들려고 모든 노력을 다해왔다.

《그런데 김규식선생이 동요를 좀 한다고 해서 먼저 봐야 할 우점을 보지 않고 구렁텅이에 빠져들어가는 선생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규식의 《유엔의존론》을 미국놈들이 지지하는것만큼 어차피 론박을 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명사들이 앞에 나서서 성명이나 담화를 발표해야 하고 언론을 동원해서 선생을 시비해야 할것이다. 이렇게 되면 민족화합을 목적한 남북협상이 개최되기전에 김규식선생의 《유엔의존론》을 가지고 시비를 가르는 싸움을 먼저 하게 될것이라고 장군님께서는 말씀하시였다. 사태가 이렇게 번져지면 남조선인민들의 관심이 남북협상에 집중되지 못하게 미국놈들은 언론을 《유엔의존론》에 집중시켜 소란스럽게 떠들어댈것이다···

《이렇게 되면 김구선생이 어떤 태도를 취할것 같습니까? 김규식선생을 배척할것 같습니까? 나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유엔의존론을 반대한다고 해서 김규식선생의 사상과 정견을 근본적으로 부정할것 같습니까? 여기에서 반드시 고려에 넣어야 할것은 두 선생은 림정 주석, 부주석으로 수년간 고락을 같이해온 형제간처럼 지내는 사이라는것입니다. 또 김구선생과 같이 정치적신조를 여간해서는 바꾸는 일이 없는 사람은 의리나 인정관계도 그렇게 쉽게 버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민족적화합을 목적한 납북협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시백은 김규식의 《유엔의존론》이 일으킬 련쇄반응을 예견하지 않은것도 아니였고 그에 대한 대책을 대충 머리속에 륜곽을 그려보기도 했었다. 이러한 소란스러운 사태가 남북협상의 근본목적과 상반되는 현상을 빚어낼수 있다는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째서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는가? 미흡한 점이 있는듯 싶었던것은 바로 이것이였던가?

《성시백동무는 지난 7월에 우리를 찾아왔을 때 전위당을 내오겠다는것을 왜 우리가 반대했는지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보는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때 전위당을 내오는 방법으로는 미국의 대조선전략을 짓부실수 없다고 하면서 기본은 전민족의 단결이라고 했습니다. 민족적단결이란 정견과 신앙, 주의주장이 각이한 사람들이 민족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고 단결한다는것을 의미합니다. 김규식선생이 민족자립사상을 접수하기 어려워하는것은 사실이지만 민족의 리익을 앞에 놓고 무엇인가 해보려고 노력하고있는것도 사실이 아닙니까. 정견이 각이하다는것을 인정한 기초우에서 민족대단결을 이룩하자는것인데 김규식선생이 남북협상에서 제외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니 성시백은 스스로도 어떻게 되여 남북협상의 근본목적을 망각하고 김규식문제를 생각했는지 리해할수가 없었다. 중경시절부터 그를 가깝게 지내고 의사를 소통하기도 했던 김규식이였는데 어째서 이국의 안개짙은 도시에서처럼 량심인으로 대할 생각을 못했는지 모를 일이였다. 김규식을 적대진영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경원하고 경계하며 일방적인 요구만 한게 틀림없었다. 민족의 자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길에서 뜻을 같이할 벗으로, 동료로 생각하며 중경에서처럼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냈더라면 그가 구렁텅이에 빠지는것을 방관할 생각을 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김규식선생이 아주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것을 부인하는것은 아닙니다.》

엄하게 꾸중도 하고 착오를 뉘우치게 할 힐책의 말씀도 계실줄 알았는데 장군님께서는 성시백을 위로하듯 너그러이 웃으며 말씀하시였다.

《또 성시백동무가 김규식선생을 옳은 길에 들여세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것도 아닙니다. 동요가 있긴 했지만 선생을 민족자립사상의 공감자로 되게 한것은 성시백동무가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도 웅심깊은 구상을 하고 이 방략을 실현시키려고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크나큰 로고를 기울여오신 장군님의 민족적위업을 하마트면 위험에 빠뜨릴번한 성시백을 그이께서는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성과를 높이 평가해주시는것이였다. 사람을 대하시는 장군님의 이 아량과 폭넓은 사색을 몸에 익혔더라면 김규식을 그렇게도 일면적으로 거칠게 대했겠는가?

《문제는 매듭을 잘 짓지 못한것인데 이것은 이제부터 바로 잡으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대하기 까다롭고 주견이 강한 선생에게 우리의 마음을 리해시킬수 있겠는가?》

장군님께서는 깊은 생각에 잠기여 응접실안을 잠시 오가시였다.

《어떻게 해야 김규식선생을 고민과 동요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할수 있겠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조선혁명가의 의무를 다할수 있겠는가?》

그이께서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성시백을 마주보시였다. 그이께서는 의미깊은 말씀을 할 때마다 가슴노리까지 올리군 하던 오른손을 굳게 틀어쥐고 가슴앞에까지 올리시였다. 그이의 웅심깊은 사색이 틀어쥔 주먹에 응어리처럼 응결되는것 같았다. 나직하나 단호한 음성으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항일무장투쟁시기 그렇게 한것처럼 우리의 진심을 보여주는 외에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그이께서는 항일대전의 첫시기 별동대를 조직하여 반일부대와의 련합을 실현한 일이며 각계각층 인민들을 조국광복의 기치아래 단결시킨 사실들을 말씀하시였다. 지금은 성시백이 민족대단합을 위해 이런 역할을 하고있다고 하며 이처럼 중요한 사업을 하는 성시백에게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고 하시였다.

《그럼 어떻게 하는것이 좋겠는가? 내 이름으로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는것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편지를 쓰되 김구, 김규식 두 선생앞으로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는것입니다. 편지 앞머리에 김구, 김규식선생 공감 이렇게 쓴다는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두 선생의 래왕도 빈번해질것이구 남북협상에 대해서도 같은 립장을 취하게 될것입니다. 성시백동무는 우리의 서신을 두 선생에게 전달하는 수고를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항일대전시기 이룩한 장군님의 풍부한 경험을 생각하며 그이의 말씀을 듣고 앉았던 성시백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항일무장투쟁시기에는 그렇게 하셨다고 해도 조선혁명의 민주기지에서 건국사업을 령도하고계시는 장군님의 존함을 모신 편지를 보내다니?

그이의 존함을 동요가 심한 우익정객을 위해 쓰실 생각을 하시다니? 이런 일이 있을수 있는가. 그뿐이 아니라 최근에 와서 멀어져가는 김구, 김규식사이를 밀접한 관계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두 선생이 어차피 의견을 나눌수밖에 없는 서신을 보낼 생각까지 하신다. 우익민족주의자들의 단합을 위해 이토록 마음을 쓰시는 장군님, 혁명리론이 생겨난 이래 이렇게도 도량이 넓고 사색이 비범한 수령이 그 언제 있어보았던가!

성시백은 장군님의 민족자립사상의 깊이와 넓이, 아니 그속에 담긴 새로운 철리를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것 같았다. 그럴수록 그이의 존함을 가볍게 써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굳어지는것이였다. 그의 리지적인 얼굴에 비장하다고 해야 할 심각한 빛이 어렸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장군님이 존함을 모신 편지를 보낼 결심을 하시게 된것은 제가 생각을 잘못하구 제가 일을 잘못했기때문입니다. 서신을 보내는것을 당분간 미루었으면 합니다. 제가 서울에 나가서 다시한번 노력해보겠습니다.》

김책도 자세를 바로잡고 말씀을 드렸다.

《남북에 협상의 분위기가 조성된것은 장군님께서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진행해온 투쟁본위의 방법을 버리고 화합을 통한 민족대단결을 이룩하는 방식으로 혁명투쟁을 전환시켰기때문입니다. 지금도 민족해방을 우선시하는 장군님의 로선을 두고 뒤에서 쏠라닥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김구, 김규식이 이런 깊은 내막을 알지 못하고 장군님의 권위에 손상이 가는 행동이라도 하게 되면 내부의 음모군들이 머리를 쳐들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성시백동무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구, 김규식선생들은 그렇게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편지를 불손하게 대할만큼 그렇게 식견이 얕은 선생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또 우리 조국의 현재 형편은 이런저런 고려를 하면서 늦잡고있을 때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위험까지 각오하면서 오늘을 위해 준비를 했습니까. 이런 때 김일성이란 이름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주저를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풍찬로숙하면서 혁명을 해온것은 무슨 명예나 직위를 바라고 해온 일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우리는 조선민족, 조선혁명을 위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장군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성시백은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경건하고 숙연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도 20여년간 수많은 시련도 겪었고 눈굽이 뜨거워지는 감정도 체험했다. 그러나 심장과 뇌리, 아니 전신에 충격을 가하는듯싶은 이런 감동은 처음 체험했다. 혁명을 위해, 민족을 위해 일신을 바치는것을 의무로 간주하시는 장군님의 헌신성, 스스로를 인민을 위해, 민족을 위해 바치는것을 본분으로 간주하시는 그이의 고결한 풍모에는 조선의 혁명가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모든것이 응결되여있지 않는가. 불과 1시간도 안되는 짧은 사이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감동되기도 하고 깨달은바도 많지만 성시백의 흥분이 남다른것은 개성에서부터 막연하게 느껴온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된것인지 똑똑히 알게 된탓이였다. 사상, 사색, 감정··· 통털어 자신의 모든것을 민족을 위해 바치시는 장군님의 위대한 풍모에 비추어볼 때 너무나 부족한것이 많은 자신에 대한 불만에서 오는것이였다.

새 세계를 발견한듯, 스스로의 풍모와 사색도 비약을 한듯한 흥분에 휩싸여있는 성시백의 귀에 걸걸한 장군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문제는 편지를 어떤 방법으로 전달하겠는가 하는것인데 내 생각엔 이 문제도 성시백동무가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것입니다. 어째서 이 문제를 특별히 강조하는가? 직접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수 없어서 편지를 보내는것이니 편지를 전달하면서 성시백동무가 보충해야 할 일이 있을수 있습니다. 이런 때는 우리의 뜻을 상대에게 해설해줄 필요가 있기때문입니다.》

성시백은 한동안 그이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것처럼 그저 놀란 기색으로 앉아있을뿐이였다. 장군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대사를 맡겨주다니? 이제 비로소 자기에게 가장 부족한것이 뭣인지 깨달은 사람에게 이런 신임을 베푸시다니···

《이번에 편지를 전달하는 사업만이 아니라 앞으로 남북협상을 진행하고 공화국을 창건하는 사업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사업을 능동적으로 처리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시백동무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우리가 지나친 요구를 하는것 같지 않습니까?》

성시백은 마음을 다잡기 어려웠다. 지나친 요구를 하는것 같아 걱정을 하시다니···

장군님의 자애에 넘친 말씀을 들은 성시백의 가슴속에는 뜨거운것이 고였다. 그는 뿌잇하게 흐려진 눈길로 부드럽게 웃으시는 그이의 모습을 우러르며 목멘 소리로 말씀드렸다.

《지나친 요구를 하시다니··· 저와 같은 사람이 장군님의 뜻을 받아안을 재목이 되는지 저는 다만 그것이 걱정될뿐입니다.》

《우리의 제기가 간단치 않다는것을 알면서 받아들일 결심이라니 됐습니다. 사실 서울에 있으면서 여러가지 문제를 풀어나간다는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편지라는것은 아무래도 제한성이 있는것만큼 우리의 서신을 두 선생에게 전달하면서 상대를 납득시키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합니다. 그후에 협상을 성사시키고 통일정부를 창건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성시백동무가 능히 이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나갈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에게 돌려주시는 장군님의 신임이 어떤것인지 저는 오늘에 와서야 안것 같습니다. 주로 중국관내에서 생활한 저는 장군님의 사상과 풍격을 접할 기회가 너무나 적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이란 사상의 공통성으로 해서 어디서 싸우건 큰 차이가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저의 큰 잘못이였습니다. 지난번 평양에 왔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저는 참으로 많은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미흡한 제가 장군님의 뜻을 원만하게 받들수 있겠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성시백은 깊은 생각에 잠긴 음성으로 말씀드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진행하고있는 혁명은 세계의 그 어느 나라에서도 수행해본 일이 없는 새로운 투쟁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왜 새로운 투쟁이라고 하는지 손가락을 꼽으며 설명을 하셨다. 국토의 분렬, 미제의 남조선강점과 정권도 정당도 존재하지 못했던 지난 반세기, 유엔의 개입, 이런 상태에서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대과제···

《새로운 과제는 새로운 립장과 태도를 가질것을 요구합니다. 기성관념에 포로되거나 경험에 매달린다는것은 진보가 아니라 답보와 침체를 가져올뿐입니다. 적과 정면으로 대결하고있는 적구에서의 침체란 실패를 면할수 없습니다. 성시백동무처럼 박식하고 판단이 빠른 동무가 자기를 반성할줄까지 알면 됐습니다. 성시백동무의 사업을 믿을수 있다는것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성시백의 손을 굳게 잡고 흔들며 밝게 웃으시였다. 성시백은 수정처럼 맑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얼굴을 숙였다.

때늦은 저녁식사가 시작되였다. 그것은 수령과 제자간에 격식없이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참으로 흥그러운 좌석이였다.

성시백은 요즘 남조선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제2의 광복을 앞둔것 같은 흥분을 안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있다고 말씀드렸다.

장군님께서는 남조선정치인들이 흥분하고있다면 그것은 벌써 성공을 믿어도 좋다고 하시였다. 흥분과 열정은 목적의 정당성과 신심의 산물이다. 흥분과 열정은 사사로운것을 버리고 대의에 자신을 복종케 하는 단결의 촉진제역할을 한다. 혁명투쟁은 흥분과 열정이 없이는 수행될수 없다고 하시였다.

《김규식선생이 고민하고 동요하는것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있는 흥분과 희망을 아직 느끼지 못하고있기때문입니다. 그것은 선생의 사색이 그만큼 신중하고 시련을 많이 겪은탓입니다. 나는 김규식선생이 불행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이 동요하고 고민할 때 그뒤에는 뼈를 깎는것 같은 고통과 눈물이 있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군님께서 권하시는 음식을 들려던 성시백은 저가락을 든 손까지 후두둑 떨리는듯한 감동을 느꼈다. 그이의 말씀은 중경에 있을 때 성시백이 김규식을 두고 생각한 바로 그것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중경에 모여든 수십명의 조선망명객들중에 김규식은 남달리 예민한 감정과 출중한 지성을 소유한것으로 해서 고민도 많고 눈물도 많은 정치인이였다. 그래서 성시백은 남달리 그와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정계에서 밀어낼 생각을 할만큼 제일 거리가 멀어진 적수와 같은 사이로 되여버렸다. 성시백은 자신의 심중을 장군님께 솔직히 말씀드렸다.

흥그러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저녁식사를 거의 끝낼무렵에 성시백은 허헌선생의 신상에 려운형이 당한것과 같은 위험이 들이닥칠것 같다며 시급한 대책을 세워야 할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장군님께서는 대번에 심중한 안색을 지으시였다.

《무엇을 보고 성시백동무는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성시백은 이런 판단을 내리기까지의 경위를 자세히 아뢰였다. 허헌선생은 얼마동안 영등포방직공장 지하조직책임자인 조순옥이란 녀공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있었다는것, 적들이 어떻게 이것을 눈치챘는지 조순옥을 집요하게 미행하고있다는것···

《적들의 미행이 선생가까이에 거의 접근했습니다.》

《허헌선생을 하루라도 빨리 북에 들어오게 해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남북협상에서 주도적역할을 담당해야 할 사람들은 좌익진영사람들인데 만일 허헌선생이 잘못되면 주도적역할을 담당해야 할 사람을 잃게 됩니다. 김책동무, 빠른 시일안에 허헌선생을 모셔오게 해야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결연히 말씀하시였다.

《제가 나가면 선생을 안전하게 평양에 들여보낼수 있습니다.》

《성시백동무는 우리가 김구, 김규식선생들에게 보낼 편지를 만들 때까지 여기에서 며칠간 쉬는것이 좋겠습니다. 림정 주석, 부주석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흰종이봉투에 넣어보낼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생산하기 시작한 인견에 붓글씨를 쓰든지 타자를 치든지 아무튼 우리의 성의가 알려지게 준비를 하자면 시간이 좀 걸릴겁니다. 준비를 끝낼 때까지 휴식도 하고 아들들도 만나보고 북조선의 변모되는 현실도 돌아보는것이 좋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양복저고리밑의 조끼에 달린 회중시계를 떼내셨다.

《새로운 사업을 앞둔 기념으로 이걸 받으시오. 특별히 좋은것은 못됩니다.》

성시백은 자기의 손에 쥐여주시는 금시계의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며 장군님의 밝은 웃음이 핀 얼굴을 우러렀다.

《분에 넘친 믿음을 안겨주신것만도 고마운데···》

그는 목이 메여 말을 하지 못했다.

《시계소리를 듣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것으로 생각하라는것입니다. 적들과 싸우자면 외로울 때도 있겠는데 그런 때 시계소리를 들으면 한결 마음이 든든해질겁니다.》

성시백은 그이의 믿음이 너무나 크고 고마와 눈앞이 뿌잇하게 흐려졌다. 부드러운 안개가 낀듯한 시야속에 태양처럼 그이의 존안이 밝은 빛을 뿌리고있었다.

《언제나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심정으로 시계소리를 들으며 투쟁하겠습니다.》

성시백은 물기에 젖은 음성으로 말씀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