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1

 

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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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의 최신형급행렬차는 신음소리를 내듯 삐거덕거리며 서울역을 떠났다. 일제말기와 광복후 혼란속의 두해남짓한 사이 정비라는것을 별반 받아보지 못한 기차는 굴러다니는 파철덩어리와 별로 다름이 없었지만 이전의 화려한 최신형급행렬차라고 해서 지금도 미군장교들과 돈냥깨나 있는 호부자들의 전용차로 리용되다싶이 했다.

성시백은 이 렬차의 일등칸에 앉아 부산으로 가고있었다. 강점군의 군수품이 여기저기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서울의 화물역인 룡산을 지나 숨죽은 굴뚝들이 찬기운을 뿜어올리는듯한 을스산한 영등포산업지구를 한옆에 끼고 렬차는 숨가쁘게 달렸다. 안양의 구릉지대에 들어섰을 때 성시백은 앞에 앉은 마동삼에게 은근하면서도 무게있는 말을 한마디 던졌다.

《읽을만한걸 넣어가지고 온게 없나?》

《몇가지 가져왔습니다.》

집밖에 나왔을 때 늘 그렇게 하는것처럼 마동삼은 이번에도 풍청대는 무역상의 비서역을 수행하고있었다. 마동삼은 무릎우의 악어가죽가방에서 몇장의 영자신문과 두어권의 영문잡지를 꺼내 성시백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모두 미국의 식자들이 주로 구독하는 권위있는 신문들과 주간지들이였다. 성시백은 신문과 잡지들을 대수롭지 않게 뒤적거리다 마동삼을 마주보며 시들한 어조로 물었다.

《이게 단가?》

《저, 스케치북크를 넣어가지고 왔는데요.》

《그걸 주게.》

《스케치북크(소묘수첩)》는 미국문학의 개척자인 한 작가의 기행문집이다. 극명하고 아름다운 자연묘사로 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지만 다른 작가들보다 류달리 많은 언어를 정확하게 구사하고있어 흔히 교과서로도 리용되는 작품이였다.

서울을 떠날 때부터 병나발을 불며 법석 고아대던 미군장교들은 명주바지저고리차림의 조선의 중년사나이앞에 신문 《뉴욕 타임스》와 《트리뷴》, 주간지 《타임스》와 《뉴스위크》가 놓여있는것을 보고 어지간히 놀라는 모습이더니 학창시절에 자기들을 골탕먹이던 《스케치북크》가 놓이는것을 보고는 더욱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더구나 조선의 중년사나이는 그 골치거리던 기행문을 자못 심취되여 읽는게 아닌가. 조선사람이긴 하지만 콩알만한 청보석이 박힌 가락지를 손가락에 껴서 더구나 위세당당해보이는 성시백을 감히 넘보지 못할 상대를 보듯 흘끔흘끔 돌아보군 했다.

성시백은 이 렬차를 리용할 때마다 술취한 미국놈들이 시끄럽게 굴군 하여 그들이 범접을 하지 못하게 방패막이를 하고있었던것이다.

성시백은 자연과 풍속을 극명하게 묘사한 미문장에 정말로 심취되여 시간가는줄을 잊은듯싶고 술에 취한 미군장교들은 더욱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가운데 렬차는 어느덧 충청도와 경상도간의 경계령인 추풍령을 넘어섰다. 점심무렵에 들어선 때여서 성시백과 마동삼은 식당칸에 갔다. 여기도 절반이상의 자리를 미군장교들이 차지하고 법석 고아대고있었다. 그들은 빈자리를 찾아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접대원이 오지 않았다. 기차도 움직이는것 같지 않아 차창밖을 내다보니 렬차는 한적한 산간역에 굳어붙은듯 정착해있다. 아무리 특별급행이라고 해도 멎으면 그곳이 정착역으로 되여버리는것이 이즘의 기차이니 산간역에 멎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것은 없었지만 접대원이 오지 않는것이며 산간역의 역장인듯한 체소한 사나이가 선로를 타고 넘으며 다급히 뛰여다니는것이며 무엇인지 심상치 않은것이 느껴졌다.

《뭔가 좀 이상한것 같은데 기차가 왜 멎었는지 알아보게.》

잠시 밖에 나갔다온 마동삼이 성시백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파업입니다. 내가 이야기한 그 파업이 시작된것 같습니다.》

서울을 떠나기전에 마동삼은 어디에서 알아가지고 왔는지 근일간에 철도종업원들의 총파업이 시작된다고 하면서 성시백에게 려행을 당분간 미루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성시백은 그의 말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가 부산을 거쳐 동래에 가려는것은 가도 되고 안가도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였다. 될수록 빨리 동래에 가서 아퀴지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또 철도종업원들의 총파업은 이른바 《유엔결의》를 리행한다면서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이란것이 서울에 날아든 후 날이 갈수록 격렬해지는 반미구국투쟁의 일환이여서 근간에 어쨌든지 터지고야말 일이였다.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남조선의 광범한 인민들은 남조선을 합법적으로 예속시킬 목적으로 조직되는 단독괴뢰정부수립을 반대해 피의 투쟁을 이미 개시한터이다. 이런 때 파업이나 소요를 걱정하면서 서울에 붙박혀있어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것이였다.

《언제쯤 떠날수 있겠는지 알아보지 못했나?》

《기관사, 차장, 식당칸 료리사, 접대원까지 기차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역장이 한사람 있는데 미국사람들한테 걸려들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하면서 그 사람도 달아날 차비를 하고있습니다.》

《그럼 내려야겠군.》

성시백은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려인숙도 변변한게 없겠는데 여기에서 내려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좀 기다려보는게 좋지 않습니까?》

《기다리긴 뭘 기다린다는건가?》

《1 000명이나 되는 승객을 추풍령중턱에 내버려둘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다 못해 군용차라도 동원시킬지 모르지 않습니까?》

하긴 눈에 덮인 산속에 갇힌 미군을 실어내기 위해서도 긴급대책이 있을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파업을 일으킨 로동자들을 총칼로 위협하며 기차를 움직이게 하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것이다. 군용자동차를 동원하면 좀 빠를것이지만 미군을 다 실어낸 다음에야 조선사람들에게 차가 차례질것이니 시간이 걸리기는 매일반일것이다.

《추풍령을 넘었으니 김천이 멀지 않을거네. 거기에 가면 어떻게 차편을 얻을수 있겠지. 요행수를 바랄것없이 걷자구.》

이렇게 되여 성시백과 마동삼은 눈에 덮인 산중 신작로를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볍게 걸음을 옮기던 성시백이 그닥지 않은 등성이를 하나 넘었는데 걷는 속도가 한결 떠지고 힘들어하는게 알렸다.

승용차를 주로 리용하며 서울시내를 오가기에 맞춤한 볼이 좁은 단화에 사치한 양말을 신은 발로 눈이 두텁게 쌓인 령길을 걷는다는것은 여간 고역이 아닐것이다. 거기에다 구두와 양말은 눈무지속에 빠지군 하여 벌써 질벅하게 젖었다. 그 모양을 내려다보며 성시백의 뒤를 따르던 마동삼이 분을 삭이기 어려운듯 한마디 뱉았다.

《내 이번에 김규식선생을 만나면 말을 좀 하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겠다는건가?》

산중의 무인지경이여서 풍청거리는 무역상에 그의 비서역이라는 구차스러운 관계는 저절로 사라졌다.

《책임자동지가 어떤 고생을 하는지 말해주겠습니다. 운형궁회의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책임자동지가 어땠는지 압니까? 남북협상을 제기하는 호소문을 받아안았을 때는 말할것도 없구요. 내 보기엔 자기의 임무를 다 끝낸것처럼 시름을 던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김규식선생이 온통 뒤죽박죽을 만들어놨단 말입니다. 아무리 코대가 높은 량반이라고 해도 그렇게 신의가 없어가지고서야 무슨 일을 한단 말입니까?》

《자네가 노여워하는것은 리해할만 하네만 이건 신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야. 사상과 리념문제이지. 사상이 같지 않으면 동질의것이라고 해도 같은 견해를 가질수 없거든. 고생을 몰라준다거나 신의를 지킬줄 모른다거나 하는 품성상문제라면 걱정도 하지 않겠네.》

최근의 이런저런 일로부터 시작해서 성시백이 민족자체력량을 묶어세우기 위해 온갖 정력을 다 쏟아부은 지난 수개월간의 일들이 얼씬얼씬 그의 머리속을 스쳐지났다.

민족자립사상을 받아안고 서울에 돌아온 성시백은 남조선의 중간파 우익에 속한 정치세력을 그이의 위대한 사상의 기치아래 묶어세우기 위해 그야말로 침식을 잊고 사업했다. 결과 김구가 당수직을 차지하고있는 한독당을 중심으로 한 림정계의 정치인들이 민족자립을 주장하면서 한갈래의 정치세력을 형성했으며 홍명희, 리극로를 선두로 한 중간파정치인들이 군소정당들을 묶어세우면서 마침내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한 범민족적인 조직인 《민족자주련맹》을 내온것이 또 하나의 정치세력이였고 온건한 좌익에 속한 당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이 또 하나의 갈래였다. 이 세갈래의 정치세력을 하나로 묶어세워야 민족자립을 위한 거족적인 투쟁을 전개할수 있을것인데 성시백은 이 마지막과제를 해결할 방도를 아무리 모색해도 찾아낼수가 없었다. 민족자립만이 장기분렬에 직면한 조국을 구원하고 나라의 완전독립을 달성할수 있다고 모두들 인정은 했지만 지금까지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아귀다툼을 해오던 남조선의 그 많은 정당단체들을 하나로 묶어세우자면 아직도 높은 령을 넘어야겠는데 그렇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정세는 때가 성숙되기를 기다리고있을 형편이 못되였다. 이런 때 남북협상을 호소하시는 장군님의 연설이 그에게 전해졌다. 연설문을 받아안은 성시백의 감동은 얼마나 벅찼던가. 연설에는 우선 현난국을 타개할수 있는 명철한 방략이 제시되여있었다. 남조선에서 그래도 앞날을 얼마간 내다본다는 사람들도 기껏해야 《단선단정》이 강행되여 남조선에 괴뢰정부가 수립되는 경우 우리 나라는 장구한 기간 분렬의 비운을 겪어야 할것이며 남조선은 전조선을 예속시키기 위한 미제침략자들의 발판으로 리용될것이라고 생각하고있는 정도였다. 이런 판단에 기초해 그들은 단독괴뢰정부수립을 반대하는것을 최대의 과제로 내세우며 싸우고있었다. 장군님께서 연설에서 명시하신것처럼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미국의 침략을 쳐물리쳐야 한다는 대담한 방략을 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쏘련군의 철수를 요구하여 외세를 배격하는 기상이 온 나라에 차넘치게 하신것도, 우익보수정객들까지 민족자립의 기치밑에 단결시켜 통일전선을 형성할 과업을 제시하신것도 결국 오늘을 위한 준비였다.

얼마나 원대하게 구상하시며 깊이있게 사색하시는 장군님이신가. 세계초대국의 파렴치한 전횡을 앞질러가며 예견하고 그 횡포한 책동을 제압할 방략을 사전에 마련하고계신 그이이시였다.

성시백이 세갈래의 정치세력을 단합시킬 방도를 찾지 못한것도 당쟁에 습관된 정치인들에게 그 허물이 있는것이 아니라 장군님께서 호소하신바와 같은 대과제를 찾지 못한데 있었다. 이제는 남조선의 각이한 정치세력을 남북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한 투쟁에 나서게 하면 그들을 애국애족의 거류속에 합류시킬수 있을것이였다. 성시백은 크나큰 감동에 휩싸여 환희의 함성을 웨치고싶은 심정이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감동의 시각에 지나지 않았다. 장군님께서는 호소문을 남조선정치인들에게 전달할 신임을 성시백에게 안겨주셨을뿐아니라 현시기 가장 중요한 력사적과제인 남북협상을 성사시키는 사업에서 큰몫을 맡아달라는 부탁의 말씀까지 보내주시였다. 자기가 이러한 일을 과연 담당할 능력이 있는가? 민족자립사상의 정당성을 인정한 정치세력마저 하나로 묶어세우지 못한 자기가 아니였던가. 리성적사고를 하는데 습관된 성시백이였지만 눈굽에 뜨거운것이 맺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한달쯤 지나 한독당(당수 김구)본부가 자리잡은 운형궁에서 지금까지 적대시하거나 반목질시하던 13개 정당, 22개 단체 대표 수백명이 참가하여 진지한 협의를 진행한 끝에 장군님께서 호소하신대로 남북정치인들이 평양에 모여서 민족이 직면한 엄혹한 난관을 타개할 방략을 토의하는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것을 인정하고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리승만계를 제외한 온건한 좌익, 중간, 우익을 망라한 남조선정계의 총련합체라고 할수 있는 이 협의체가 결성되기는 8. 15후 처음 보는 력사적사변이였다. 성시백은 남북협상을 성사시킬수 있다는것을 확고하게 믿을수 있게 됐다. 협상이 실현되여 조선의 중앙정부가 창건될 경사로운 그날을 눈앞에 그려보기도 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할수 없었던 뜻밖의 사태가 터졌다. 미군사령부가 앞에 나서서 김구, 김규식과 《유엔림시조선위원단》사이에 회담이라는것을 진행하게 했다. 성시백은 이 소식을 듣고도 별로 위구를 느끼지 않았다. 김구도 김규식도 민족자립사상을 나라를 구원할 대경륜으로 받아들인데다 민주자주련맹의 제2인자인 홍명희, 한독당의 제2인자인 조소앙이 13개 정당협의회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였으니 별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런데 김구는 조선문제는 조선민족의 자주의사에 맡겨야 한다는 종래의 립장을 지켰지만 김규식은 180° 방향전환을 한 견해를 표명했다. 조선문제의 공정한 해결은 《유엔》의 힘을 빌릴 때에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심지어 평양에서 제기한 남북협상에 대한 자기의 의사를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이 앞에 나서서 북에 전달해달라는 말까지 했다. 유엔에서 결의한 《총선거》를 단호히 배격하고있는 평양에 자기의 견해를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거쳐 보내겠다는것은 본질에 있어 북조선이 《유엔결의》를 인정해야 한다는것과 다름이 없었다. 남조선신문들이 소란스러운 찬부의 론쟁을 벌린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김규식이 근래에 와서 입을 다물고 사색의 바다에 잠긴 리유를 성시백은 이제야 알았다.

몸이 불편해 침실에 들어박힌 김규식을 버치가 위문이란 명색으로 뻔질나게 찾아가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지시키고는 한나절씩이나 쑥덕거리다 돌아가군 한다고 윤명현이 근심을 하더니 그의 롱간질에 넘어간 모양이였다.

성시백은 서울에 그대로 붙박혀있을수 없었다. 김규식과 마주앉아 어느쪽이 진심인지 알아봐야 했다. 만일 《유엔의존론》이 그의 진심일 때는 격렬한 론쟁을 해서라도 그 견해의 부당성을 납득시켜야 했다.

성시백이 신음하듯 삐거덕거리는 남행렬차에 몸을 실은것도 산중의 눈길을 걸으면서 마동삼이 볼부은 소리를 한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도중에서 옹근 하루를 지체한 성시백은 부산에 주재하는 무역지사 (지방조직을 겸한)에서 잠시 휴식하고는 동래를 향해 출발했다. 동래도 남조선전역이 그런것처럼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항쟁이 터져 읍거리는 거의 페허와 다름없이 초토화되여있었다. 경찰서는 항쟁자들의 습격을 받아 휑뎅그렁하니 비여있었으며 군청도 파괴된 책상이 나딩굴고 다리부러진 의자며 문서장들이 사무실들에 널려있었다. 급사구실을 하는 허리가 구부정한 로인이 그림자를 끌며 오가고있었다. 그에게 혹시 서울에서 점잖은 손님 한분이 찾아온 일이 없느냐고 물어봤다. 머리도 들지 않고 한참 생각을 굴리던 늙은이가 알아듣기 어려운 짙은 경상도사투리로 사흘전에 《하이야》를 탄 량반어른이 왔댔다면서 동래에서 그중 깨끗한 려관이 어디 있느냐고 묻더라고 했다. 성시백은 늙은이가 가리켜주는대로 상객들만을 받아들인다는 려관을 찾아갔다. 마동삼을 뒤에 단 그는 뒤문으로 해서 그 려관에 들어섰다. 로인의 말대로 이전의 동헌을 개축한 려관이여서 덩실한 기와지붕을 떠이고있었다. 김규식이 어린시절 동심을 즐기며 뛰놀았을 집이다. 성시백의 눈에 제일먼저 띈것이 박산이 난 장독들이였다. 시커먼 간장이 도랑에 고이고 여기저기에 깨진 질그릇쪼각과 함께 된장, 고추장이 널려 찝찌레한 군내가 코를 찔렀다. 도대체 누가 이런 무지막지한짓을 했는가? 분격한 항쟁자들이 려관에 란입해서 장독을 박산내는 이런짓을 할수는 없지 않는가? 동헌의 앞뜰에 나가봤다. 이전에는 원님이 거드름을 피웠을 대청의 마루판대기들이 여러장 뒤집혀있었다. 이것은 마루밑에 숨은 그 누구인가를 찾아내려고 대청마루를 온통 들추며 돌아갔다는것을 의미할것이다. 성시백은 이 집의 살붙이가 그 어딘가에 반드시 숨어있을것 같아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늦은오후의 석양빛에 거뭇한것이 삼문에 매달려있는것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히 죽창에 꽂힌 사람의 머리였다. 성시백은 등골을 치달아오르는 차거운 전률과 함께 겨드랑이밑에 축축하게 땀이 고이는것을 느꼈다. 그들은 잔혹하게 참살당한 세구의 주검을 마주볼수 있게 삼문앞에 나가섰다. 삼문을 개조한 넓은 대문의 문테에 중년으로 보이는 사나이로부터 열대여섯살나이의 단발머리소녀에 이르기까지의 세개의 머리가 매달려있었다. 시들어빠진 보리감자빛으로 변한 얼굴들은 분명히 고된 로동에 시달린 순박한 농사군의 모습들이였다. 더우기 단발머리소녀의 얼굴은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모습이였다. 이들이 도대체 무슨 죄를 졌다고 대청을 온통 들쑤셔 찾아낸 후에 이런 참혹한 죽음을 가했는가? 40전후의 농사군은 고률공출을 반대했거나 북조선과 같은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미군철수를 몇번 웨쳤을것이며 나어린 소녀는 단독괴뢰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선 어른들의 그닥지 않은 심부름을 몇번 했을것이였다. 조선민족이면 응당 요구할것을 요구한것이 무슨 죄가 되여 이런 참변을 당해야 하는가! 성시백의 눈에서는 연덩어리처럼 무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으며 가슴팍은 날카로운 칼끝으로 저며내는듯 아팠다. 이것이 이른바 《유엔감시하의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선거》의 분위기라는것인가? 김규식도 이 려관을 찾아왔을것이니 이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을것인데 그는 유엔에 의거해서 조선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자신의 말을 어떻게 생각했을것인가? 자기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했을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견해가 잘못이였다는것을 마침내 깨닫고 가슴을 쥐여뜯고싶은 자책에 사로잡혔을것인가? 성시백은 김규식이 이 무고하고 참담한 주검앞에서 조선의 정치인의 책임을 느끼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으리라고 믿고싶었다.

성시백은 한시바삐 김규식을 찾아가 그의 그릇된 견해를 시정시키고 뉘우치게 하지 않고는 자기의 아픈 가슴을 도저히 진정시킬수 없었다. 다음날 그는 바다바람에 휘날리는 회색장막을 헤치며 얼음버캐가 서걱서걱 부서지는 모래길을 걸어 해운대(신동래)로 갔다. 마동삼과 무역지사의 성원이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왜놈들의 전용유흥장이였던 그 온천지에 김규식이 려장을 풀었다는것을 알아냈던것이다.

일제시기에는 조선팔경의 하나로 꼽히여 그렇게도 번창했다고 하는 해운대도 페가만이 들어앉은 황페한 마을모양 어둠속에 묻혀있었다. 몇점의 희미한 불빛이 사나운 바다바람에 꺼져버릴듯 어둠속에서 사물거릴뿐이였다. 마치 영원한 동면속에 잠긴것 같은, 모래불을 후려치는 파도소리만이 드높은 야음속의 해변가였다. 마동삼이 김규식일가가 들어있는 려관을 알아냈다. 로대에 나서면 뒤설레는 격랑을 눈아래에 굽어볼수 있는 해운대에서도 그중 호화로운 바다가의 최상급려관을 통채로 세냈다고 한다. 밤중으로 김규식을 찾아가고싶었지만 그래도 랭철한 리성이 아직은 그를 다잡을 능력을 갖고있어 마음을 누그러뜨릴 시간을 얻게 했다. 그는 맞다든 려관에 들어 김규식을 설복시킬 준비를 했다. 그는 뒤설레는 현해탄 저쪽에서 솟아오른 붉은 태양이 김규식이 들었을 호화로운 방에 눈부신 해빛을 가득히 채울무렵 그를 찾아갔다. 병약한 몸이여서 해빛을 쬘 시간이 적은 그는 언제나 남향받이 방에 들군 했다.

김규식은 로대밑에서 들려오는 뒤설레는 파도소리를 즐기며 찬란한 해빛에 물든 푹신한 쏘파에 앉아있었다. 그는 맏아들 김진동의 안내를 받으며 방안에 들어서는 정향명을 보고 사뭇 놀라는 기색이였다. 성시백은 김규식의 이런 표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모양 그를 마주 대하고 이야기할수 있는 쏘파에 걸터앉았다. 김규식은 수북한 눈섭밑의 부리부리한 눈에 경계하는 빛을 띠우고 성시백을 지켜봤다. 웬간한 일에 맞다들지 않고는 외인에게 결코 침착성을 잃은 태도를 보이지 않는 김규식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뜨아해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당황해하는 표정이였다. 동래의 옛 동헌의 삼문에 매달려있는 세구의 주검을 본 후의 자책감때문인가? 세론을 피해 조국의 남단 한끝에 왔는데 별로 만나고싶지 않은 이 정향명이 찾아왔기때문인가? 아무튼 김규식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수 있는 자리인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는 김규식에게 량해를 구하고나서 담배에 불을 달아 입에 물었다.

《제 이 가까이에 볼일이 있어서 내려왔던 길에 선생님이 여기에 계신다기에 잠간 들렸습니다. 선생님에게 꼭 말씀드리고싶은 이야기도 있구···》

성시백은 한담을 하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래에도 들렸는데 한해전에 왔을 때하고는 너무나 많이 달라졌더군요. 선생님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옛 동헌삼문에 죽창이 꽂힌 머리가 매달려있었습니다. 남조선은 극한점에 이른것 같습니다.》

김규식은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고불통에 담배를 다져넣었다. 두둑한 량볼도 경련이 인듯 떨렸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잠시 담배연기만 날리며 앉아있었다.

《나도 봤네.》

김규식의 말은 목에 걸려 뒤말이 제대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무고한 죽음이지. 그네들에게야 무슨 잘못이 있겠나.》

흐느끼는듯한 음성이였다.

《난 그 참상앞에서 눈물을 흘렸네. 혼란된 이 사회를 원망하기도 했네. 나는 자결을 반대하는 사람이네만 차라리 죽어버리고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네. 그러나 내가 할수 있은것은 그네들 명복을 비는것이 전부였네. 이것이 약소민족의 슬픔이라는것이겠지.》

김규식은 질벅하게 젖은 눈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마치 느껴울듯이 중얼거렸다.

《향명군은 나의 이런 애상적인 감정을 좋지 않게 생각하겠지. 나를 찾아온것도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일거구. 그렇지만 나는 그 주검앞에서 나를 위시해 우리 정치인들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네.》

김규식이 그 세구의 주검을 목격하고 여간만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몇방울의 눈물과 량심의 가책으로 그의 변심이 보상될수는 없었다.

《사실 전 선생님의 말씀에 의견이 있습니다. 무고한 수천수만의 민중이 무참한 참변을 당하고있는 때에 눈물과 량심의 고통으로 정치인의 명분을 다할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 민중은 선생님에게 그런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부산에 왔다가 여기까지 찾아온것은 선생님도 짐작을 하겠지만 조선이 처한 현정국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해서입니다. 제가 서울을 떠나올 때 신문을 보니까 조선문제의 공정한 해결은 유엔에 의거해야만 가능하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는데 어떤 저의가 있어 이런 말씀을 했는지 중경에 있을 때부터 선생님을 사숙한 저로서는 꼭 알고싶습니다.》

《무슨 다른 뜻이 있겠나? 언론에서 지나치게 과장한 감이 없지 않지만 방금 향명군이 말한 그대로네.》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생님의 말뜻을 리해할수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남쪽끝에 있는 동래에서도 볼수 있는것과 같이 남조선에서 오늘과 같은 참변이 벌어지게 한 장본인은 미국이 아닙니까. 또 유엔이란 미국의 손아귀속에 들어있는 국제기구로 저는 알고있습니다. 미국이자 유엔이구 유엔이자 미국이라는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유엔만이 조선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할수 있다고 하시니 이게 가당한 말씀입니까?》

눈을 지르감고 성시백의 말을 끝까지 듣고난 김규식이 한마디한마디의 말에 힘을 주며 이야기했다.

《유엔에 의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내가 오래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네.》

성시백은 티끌만한 괴로움이나 부끄럼도 없이 김규식이 이렇게 명백하게 말할줄은 몰랐다.

《쏘미량군을 철거시켜 우리 민족의 자주의사에 의거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는것이 가장 리상적인 방도일것은 분명한데 어째서 유엔에 의거해야 합니까? 더구나 평양에서 남북정치인들의 의사를 모을수 있는 협상을 제기한 이때에 말입니다.》

김규식은 깊은 생각에 잠긴 느릿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는 그 제기를 손가까이에 두고 몇번이나 곱씹어 읽었네. 자자구구를 따져보고 사상을 도출해보기도 했네만 거기에는 뭣인가 리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단 말이네. 수백년간 핍박속에 살아온 조선의 민족성을 고려할 때 도저히 생각할수 없는 너무나 탁 트인 원대한것이 있단 말일세.》

차잔을 다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던 녀동생 제식이가 오빠의 마지막말을 듣고 한마디 끼여들었다. 성시백이 처음 보는 세련된 옷차림을 한 초로의 녀인이였다.

《남북협상을 두고 하시는 말씀같은데 그거야 김일성장군님의 인품이 그러니까 그런 호소를 하실수 있다고 봐야겠죠. 15년이나 경비가 그중 삼엄한 백두산일대에서 총을 들고 항일을 하신것도 원대한 뜻이 없고서야 할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차잔이나 놓고 어서 나가봐라.》

녀동생을 아끼는 모양 노여운 목소리는 아니였다.

《누굽니까?》

눈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가는 제식의 뒤모습을 바라보던 성시백이 물었다.

《녀동생인데 리화녀대에서 음악학부장을 한다든지. 다 늙어가지고 어린애처럼 세상리치란 통 모른다니까.》

김규식에게 저런 녀동생이 있는줄은 알지 못했던 일이였다.

《그렇게만 볼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얼마나 정확한 말입니까. 김일성장군님께서 백두산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항일을 하신것은 반드시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광복시킬수 있다는것을 확신하셨기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 이런 신념을 품고 무장투쟁을 전개한분이 김일성장군님 이외에 또 누가 있습니까? 난 선생이 민족자립사상의 위력을 아직 알지 못하고계신것 같습니다.》

다그어대는 성시백의 말에 김규식은 대응할 말을 찾을수 없는 모양이였다. 이윽고 생각을 가다듬은듯 김규식은 느긋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듣게. 조선은 백년래 세계렬강들이 흉심을 품고 침략할 기회만 찾던 동방의 요충지네. 일본인들이 선손을 써서 우리를 예속시키기는 했네만 일본이 강점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나라가 무사했을것 같은가? 아라사와 미국, 중국, 멀기는 하지만 영국이나 도이췰란드, 프랑스에 반드시 예속됐을것이네. 그네들은 강성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거든. 지금도 사정은 그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네. 우리가 완전독립을 하라고 그네들이 내버려둘것 같은가? 북조선에 아라사군대가 주둔하고있으니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지 않나?···》

《선생님도 평양의 주동적인 노력에 의해 쏘련이 쏘미량군철수를 제안하게 됐다는것을 알지 않습니까? 평양에서는 우리 민족의 자립을 위해 쏘련군을 철수시킬 결심을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란 앞보다 뒤가 더 깊은 법이네. 만일 남북협상이 쏘련의 적화방략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그런 경우 우리가 남북협상에 호응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겠나? 우리는 쏘련의 철권속에 들고말것이네. 우남(리승만)같은 사람은 협상에 응한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거구. 남조선정계에 몇사람 남지 않은 량심인은 자취를 찾을수 없게 될것이라는것이네. 그래 생각끝에 나는 제3의 길을 택하기로 했네. 조선을 쏘미량군에 맡길것이 아니라 제3자가 개입할수 있는 유엔에 의거하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단 말이네. 유엔이 미국의 조종을 많이 받고있는것은 사실이네만 비유해서 말하면 세계의 국회라고 할수 있는 국제기구가 아닌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정의파가 노상 없는것은 아니지 않나?》

성시백은 장죽을 빨며 한마디한마디의 말에 뜻을 부여하듯 느릿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김규식의 말을 듣느라니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힌것 같은 그의 생각이 놀랍기도 하고 혐오스럽기도 했다.

《나는 선생님의 말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북조선에 쏘련군이 주둔해있으니 쏘련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것은 어페겠지만 김일성장군님은 강유력한 항일혁명군을 령솔하고 개선하신분입니다. 그러니 자주적인 정치도 펴나갈수 있고 쏘련군철거도 요구할수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동족보다 외국사람들을 더 믿으려고 하니 저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평양까지는 동래에 내려오는 절반길밖에 안됩니다. 만일 협상에 참가해서 쏘련의 적화방략같은것이 느껴지면 그대로 돌아오면 그만일겁니다. 그런데 협상에 참가해보지도 않고 유엔에 의거할 생각부터 하시니 저는 선생님의 저의를 리해할수 없습니다. 좀전에 이 방에 들어왔던 동생되는 녀성이 말한것처럼 절대다수 민중은 남북협상을 지지한다는것을 아셔야 합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집니다. 13개 정당협의회가 빠른 기간내에 결성된것만 봐도 알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정향명의 사리정연한 대꾸에 김규식은 할말을 찾을수 없는듯 담배연기만 내불었다.

《민족자주련맹발기인대회에서 한 선생님의 발언을 생각해봐도 그렇고 지금까지 선생님이 주장해온 소신을 고려해도 그렇고 정견을 자주 바꾸는것은 정치인이 할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네는 혹시 나를 설복시키라는 평양의 지령을 받고 오지 않았나? 지나치게 태도가 강경하군.》

《저는 선생님의 그 사고방식에도 견해를 달리합니다. 선생님은 필경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바라는것 같은데 만일 그 방안이 실현된다면 자유롭게 선거활동을 전개할 분위기가 보장되여야 할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은 평양에서 나온 사람이 제가 방금 말씀드린 말을 한다면 단순히 평양에서 나왔다는 리유로 해서 정당한 주장을 배척하시겠습니까? 외세에 의해 우리 나라가 두동강이 난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민족은 38°선을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의 마음속에 만일 38°선이라는것이 들어앉았다면 단연코 그것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진리는 국경이란것을 인정하지 않고 세계에 파급되기마련인데 하물며 우리 민족문제를 북이니 남이니 하면서 옳은 해결방도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벌써 분렬에 동조한 당파심리가 작용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선생님이 해외에서 고생하면서 지켜온 량심을 본의아니게 저버리고 민족의 지탄을 받는 정치인이 되지 않기를 바래서 이런 말을 하는겁니다.》

량볼이 두둑한 김규식의 얼굴은 모욕감으로 해서 일그러졌으며 입귀의 깊은 주름은 자신을 다잡기 어려운듯 푸드득 떨렸다.

《못하는 말이 없군! 자넨 아직 어려! 아직 어리다니까! 나는 쏘미량국의 타민족지배정책에 일생동안 시달려온 사람이야! 남북협상을 하고 구국전선을 형성했다고 해서 미국이 조선에서 손을 뗄것 같은가? 유엔에서 결의한대로 선거는 진행될것이구 정부는 수립되고야말것이야. 그때 나와 같은 사람이 남에 있어야겠나? 없어야겠나?》

김규식은 수북한 수미를 굼틀거리며 불쾌한듯 이런 말을 뱉아냈다.

《저는 선생님의 그 말씀도 리해할수가 없습니다. 남조선전역의 소박한 민중이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 싸워도 분렬정부수립을 막을수 없고 남북정치인이 한자리에 모여서 통일정부를 수립해도 민족의 자주권을 보존할수 없다면 선생이 제기한 유엔의존론은 무엇을 위한 방안입니까? 미국에 괴뢰정부를 세울 시간을 주자는겁니까? 선생님은 미국의 강대성을 전제로 삼고 모든 사색을 하시는데 이것 역시 추종이고 굴종이라는것을 아셔야 합니다. 추종과 굴종은 매국노들의 인생관입니다. 선생님은 항쟁이 무의미하다고 하시는데 어째서 민족자립을 위해 싸우는 민중의 투쟁이 무의미하다는겁니까. 남북정치인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자립을 요구하고 남쪽 민중과 북의 민중이 힘을 합쳐 외세를 반대한다면 미국의 침략을 과연 저지할수 없을것 같습니까? 막대한 희생을 당하면서도 미국의 간섭을 반대하는 민족자체력량에 합세는 못할망정 그들의 력량을 분산시킨다면 이것은 민족사에 오명을 남길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시백은 두손으로 쏘파의 팔걸이를 움켜쥐고 온몸이 그대로 불덩어리가 된듯 어깨를 떨면서 김규식의 가슴에 날카로운 말을 쏟아부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정향명의 모욕적인 말을 도저히 참을수 없는듯 김규식의 검은 눈은 숯불처럼 불탔으며 목덜미의 시퍼런 피줄은 금시 터져버릴듯 꿈틀거렸다. 그 역시 금시에 쏘파에서 뛰쳐일어날듯 팔걸이를 량손으로 꽉 움켜쥐고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는 성시백의 불같은 말이 계속되자 김규식의 온몸은 그대로 푹신한 쏘파에 잦아들고말듯이 갑자기 허리가 굵은 비대한 몸이 오그라드는듯싶었으며 주글주글한 눈시울이 이글거리던 눈을 내리덮었다. 문득 다시는 열릴것 같지 않던 두툼한 입술안에서 뜻밖에도 한숨을 내쉬듯 흐느끼는듯한 한수의 시가 흘러나왔다.

 

고통은 고통으로 풀고

이 불행한 땅에서 받아안은 롱락은 꺼꾸로 풀고

애끊는 슬픔은 슬픔으로 씻으리

···

 

내 정의의 저울대 한쪽에 올라앉아

그대가 다른쪽을 차지하기를 기다리겠노라

그러면 내 가슴속의 량심, 정의

그 무게를 그대 알리니···

 

성시백은 분화구에서 분출하는 불덩어리같은 격분이 가슴팍을 뚫고 폭발할것 같은감을 느꼈다. 도대체 이 자리에서 쉑스피어의 시를 읊는다는것이 말이 되는가!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해도, 가슴을 쥐여뜯으며 절규를 해도 가슴속에 불덩이처럼 뭉친 원한, 안타까움을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풀수 없을것인데 수백년전의 시구를 생각해내다니··· 성시백은 치밀어오르는 환멸과 울화로 해서 가슴속의것을 토해버릴것만 같았다.

자기가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인다는것을 알았지만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제 선생님에게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란 민족을 속인 죄인으로 림종을 맞이하는 사람이라는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것 같아 제 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선생님에게 이런 가혹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 곧 은인이라는것을 선생님은 머지 않은 앞날에 알게 될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가능성을 다 놓쳐버린 옮겨앉을 저울판이 없는 때라는것을 아셔야 합니다.》

김규식은 고함을 칠듯 입을 벌리며 자리에서 뛰여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튀여나오지 않았다. 증오에 넘친 번뜩이는 눈으로 성시백을 쏘아볼뿐이였다.

성시백은 김규식이 민족자립을 위한 조선민족의 거세찬 대오속에서 영원히 떨어져나간 혐오스럽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굴러떨어졌다는것을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