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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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을의 따뜻하고 쾌청한 날씨여서 김규식은 눈부신 해빛이 깔린 정원길을 단장을 내짚으며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저만쯤 등나무밑에서 원탁을 가운데 두고 홍명희, 리극로들이 윤명현과 담소를 나누고있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구태여 걸음을 다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쾌청한 날씨탓인지, 손님들에게 그늘이 낀 모습을 보이고싶지 않아서인지 걸음은 가벼웠고 얼굴에는 아침빛을 즐기러 나온 산책자의 느긋한 웃음이 어려있었다.

윤명현이 다가오는 스승을 보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홍명희와 리극로는 의자에 눌러앉은 그대로 김규식이 등나무밑에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홍명희의 기름한 얼굴에는 방금 담소를 나눌 때의 여운인지 가벼운 웃음이 비껴있었지만 네모진 모상에 목이 바틈한 고루의 얼굴에는 무뚝뚝해보이는 기색이 비껴있었다. 오늘의 방문에 별로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것을 내보이는셈인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내세우는 김규식을 아니꼽게 생각했는지 아무튼 그의 기색은 비교적 랭담한 편이였다. 김규식은 등나무밑에 들어서며 입가에 웃음을 지은 모습으로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런저런 명색의 회합들에서 여러번 만난적 있는 그들이여서 구태여 인사절차를 밟을 필요는 없었다. 김규식은 일여덟자의 장죽이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를 뒤따라 둔덕길을 올라온 하인이 네사람앞에 차잔을 나누어놓는다. 윤명현이 간소한 이날의 모임을 사회했다.

《선생님들도 아다싶이 이 삼청장에는 각이한 사람들의 출입이 번다합니다. 두분께서 선생님에게 면회를 요청했을적엔 긴하게 하실 말씀들이 있는것 같아 비서들이 모이기전에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래 이른아침에 수고를 끼쳤으니 과히 나무럼을 마시고 기탄없는 말씀들을 해주기 바랍니다.》

윤명현은 차를 권하며 개회사를 대신한 이런 말을 했다. 홍명희가 시작을 뗄줄 알았는데 언제나 직방치기인 리극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도 알고계시겠지만 쏘련군은 북조선에서 철수할 의향을 표시하면서 미군에게 동시철거를 제의했습니다. 성명에도 있는것처럼 쏘련군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기로 한것은 우리에게 자주적으로 민족적독립을 달성할 기회를 주기 위한것으로 우리들은 생각하고있습니다.》

역시 량군철거와 관련해서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할 방도를 의논하려고 찾아온게 분명했다. 리극로는 경상도사투리가 짙게 밴 청높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런 때 남조선의 량심인들이 가만 있을수 없다고 생각해서 우리는 우선 민족자체력량을 련합하는 사업에 착수하기로 했습니다.》

경상도의 락동강기슭인 의령에서 태여나 고학으로 베를린종합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리극로는 곧은박이성미의 소유자들이 흔히 그런것처럼 비약이 심하다고 할수밖에 없는 이런 말을 했다. 김규식은 장죽을 들고 만지작거리며 요즘 정세를 관망할만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민족자체력량에 관심을 보이는데 저으기 놀랐다. 허헌도 이 비슷한 말을 했다. 이것이 민심이란것일가? 하긴 자신도 귀국한 초기에는 민족의 자주권문제에 제일 크게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민주의원》, 《과도립법의원》, 《좌우합작》··· 몇고패의 실패와 좌절을 겪고난후 이것이 얼마나 먼곳에 있는 난문제인가를 깨닫고 이런 말을 입에 담지 않게 됐다.

리극로의 말을 흘려듣는 김규식의 내심을 엿본듯 홍명희가 담배연기를 날리며 충청도억양이 밴 느린 말투로 고루의 이야기에 주해를 가했다.

《고루가 말씀한 민족자체력량을 꾸리자면 겨레의 장래문제에 관심을 두고있는 각당, 각파, 각계각층 민중을 광범하게 망라한 범민족적인 정치조직을 내올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습네다. 그러자면 각당, 각파, 각계각층 민중이 마음을 합칠 사상이 있어야 할것이 아니웨까. 말하자면 정강이 있어야 할것이라는 말씀이웨다. 우리는 그 정강을 민주독립당이 이미 공포한바 있고 많은 중간파인사들의 찬동을 받고있는 민족자립사상을 중심에 놓고 마음을 합치는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네다.》

장편소설가들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있던 김규식은 자기도 모르게 등어리가 뻣뻣해지는 긴장을 느꼈으며 그의 말에 끌려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량군철거가 론의되는 현시점에서 민주독립당에서 내들었다고 하는 민족자립사상은 확실히 시기적절한 정강이였다. 이 정강을 추켜든 조직이 앞으로 어떤 활동을 전개하겠는지 그것은 두고봐야겠지만 이 련합체는 확실히 강유력한것으로 될것이다.

《다음에는 조직방식인데 8. 15후 남조선정계에는 사이비정치인들이 수많이 창궐해서 아무리 정당한 사상을 추켜들었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것이웨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자립을 지향하는 정치인들이 자기의 당과 단체, 파를 보유한 상태에서 이 정강밑에 모이는 련맹형식의 단결을 하여 행동통일을 기하는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범민족적인 조직의 명칭은 달리 정할것이 아니라 민족자주련맹이라고 하는것이 좋을것입네다. 이 련맹에는 우리 민족독립당의 다섯개 정당, 단체들이 가입할것이구 뒤이어 몇개 정당단체들이 더 가입할 의향을 표시했습니다. 말을 들으니 김구선생도 우익정당, 단체의 행동통일을 얻으려고 노력을 하고계신다는데 우사의 노력으로 김구선생의 한국독립당이 자주련맹에 가입하면 더 좋고 그렇게 할수 없으면 련계하는 방식으로 행동을 일치시킬수 있을것입니다.》

얼마나 폭넓고 치밀한 생각을 한 사람들인가! 자기가 《좌우합작》의 방법으로 제3정치세력을 꾸릴 생각을 할 때 미국장단에 춤을 추는 일이라면서 헤살을 놓던 이들, 정치계에서는 사실 아류에 지나지 않는 문필가, 학자들이 이런 조리있는 사고를 하다니··· 혹시 민주독립당에 가입했다는 안재홍의 배후조종을 받은것이 아닐가? 김규식은 마음속으로 도리머리를 저었다. 안재홍은 김규식이 손을 잡아이끌어서 《민정장관》자리에 올라앉기는 했지만 이런 폭넓은 사고는 물론 정치적으로 예리한 문제를 이렇게 조리있게 감수할수 있는 인물이 못된다. 그렇다면 우익정계의 설계자라는 명성을 얻고있는 자기도 미처 생각할수 없었던 이런 원대하고 웅심깊으면서도 치밀한 사색을 이들이 어떻게 할수 있었는가?··· 심장이 들먹거리는 흥분을 느끼기도 하고 의혹에 사로잡히기도 하면서 김규식은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광범한 각당, 각파, 각계 민중의 관심을 모으자고 해도 그렇고 련맹형태의 큰 조직을 운영해나가자고 해도 그렇고 명망높은분이 위원장자리에 올라앉아야 할것이 아닙네까. 우리 민주독립당에 안재홍선생이 계시지만 자주련맹이 내건 정강에 비추어볼 때 재목이 좀 모자란것 같아 우리는 선생에게 기대를 걸고 찾아왔습니다.》

김규식은 자기의 앞을 가로막았던 아아한 절벽이 무너져나가고 그 자리에 탄탄한 대로가 곧추 뻗어있는것을 감촉할수 있었으며 머리우에는 해빛에 물든 푸른 창공이 비껴있음을 느꼈다. 야음이 짙어가면 새벽이 가까이 다가올 징조란 속담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어제 저녁까지 무자비한 정치경기장에서 수치스러운 락오자로 굴러떨어진줄 알았는데 별로 귀한 손님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이들이 아귀다툼을 하는 정치인들의 맨앞에 자기를 내세우려는것이다. 그것도 리왕조가 비틀거리기 시작한 백년래의, 아니 사대를 국시로 삼아온 통치배들에게 불만을 느낀 선각자들이 념원해온 대경륜을 높이 추켜든 정치집단의 지도자로···

《알겠소이다. 그런데 민주독립당에서는 그런 련맹을 만들어 당면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까?》

김규식은 뿌잇한 담배연기 저쪽에 앉아있는 홍명희, 리극로를 마주보며 물었다.

《그것은 우사가 위원장으로 선출된 다음에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합넨다. 민족자립을 위해 지금 할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해결할 문제가 없어 빈곤감을 느끼는 일은 없을것입네다.》

생각이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구나··· 친미정치인으로 알려진 자기앞에서 미쏘량군철거와 같은 당면목표를 이야기하고싶지 않아 그러는것 같았다.

《알겠소이다. 소인에 지나지 않는 나에게 분에 넘친 기대를 걸고 이렇게 찾아와주어 고맙소이다. 한데 내 한가지만 더 묻겠소이다. 내가 위원장의 소임을 받아들일 생각이면 그쪽에서 나에게 요구할 조건이 있을것인데 그것까지 말해줄수 없겠소이까?》

김규식은 사색에 습관된 평시의 침착한 모습으로 물었다.

리극로가 청높은 경상도사투리로 전제조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조건이라기보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우사에게 상기시키고싶소이다. <좌우합작>이나 <립법의원>의 성격과 민족자주련맹의 성격은 많은 점에서 상이한바이니 우리는 우사가 전환적인 결심을 해주기를 기대하는바입니다. 민족자주련맹과 <좌우합작>이 병립할수 없는것은 아니로되 <좌우합작>을 주도하면서 민족자주련맹위원장의 소임을 맡아할수 없지 않소이까. <립법의원>은 명색이 각당, 각파를 수용한 국회비슷한것이니 우사가 자주련맹위원장의 립장을 명백히 지켜주기만 하면 의장자리에 그대로 눌러있을수도 있을것이웨다.》

《그러니 <좌우합작>을 해산하고 민족자주련맹을 주도해달라는 말씀이구려?》

《우사의 영향을 받던 사람들을 자주련맹에 인입해주면 우사로서도 명분이 서는 일일것입니다.》

얼마나 빈틈없는 의논을 해가지고 찾아왔는가.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면 초청받은 위원장이란 뒤소리를 듣지 않을것이였다.

《민주독립당에서 좋은 생각을 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사람도 민족의 권리를 얻어보고자 노력을 해왔소만 지금 생각하면 허망한 일에 매달려서 시끄러운 일만 해온것 같소이다. 민주독립당에서 큰일을 발기한것 같소이다.》

이 웅심깊고 원대한 사업이 평양에서 발기되였다는것을 그는 알수가 없었다.

《아무리 좋은 의견이라고 해도 나로서는 생각해야 할 문제도 있으니 며칠간 말미를 주시오.》

《우리도 그러한 시간이 있어야 할줄 압네다. 그러나 민주독립당에서는 될수록 가까운 시일안에 성대한 발기인대회를 가지기를 희망하고있습네다. 그 리유는 우사도 짐작하리라고 생각합네다.》

홍명희의 말이였다. 유엔에서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가 채택되여 남조선정치인들이 태도를 명백히 해야 할 때쯤에는 발기인대회를 갖고싶다는 말일것이다.

《알겠소이다. 근간에 내 소신을 알리겠소이다.》

찾아온 손님들도 주인도 흔연하게 합의를 본 회합이였다. 홍명희, 리극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것이 자못 기쁜듯 몇분간 별치 않은 시국담을 나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규식은 가벼운 마음으로 포도주까지 두어잔 받쳐 점심을 들었다. 간밤의 번거로운 생각을 깡그리 잊고 낮잠을 푹 잤다. 해묵은 병까지 털어버린것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비를 몰아오는 구름발같은것이 문뜩 머리에 거칫거렸다. 민주독립당에서 어떻게 정세의 추이를 그렇게도 예민하게 감수하고 대책을 세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던것이다. 쏘련측이 량군철거안을 천명한 시간은 오후 5시, 홍명희가 방문의사를 표명해온것은 7시 30분, 김규식이 평양방송을 들은것은 홍명희한테서 전화를 받은 1시간 30분후인 9시, 민주독립당에서 평양방송을 들은후 2시간 30분사이에 민족의 총의를 대변한것과 같은 그런 리념적인 대강만이 아니라 민족자주련맹의 조직방식까지 생각해냈다면 홍명희, 리극로는 남조선정계의 그 누구와도 대비할수 없는 정치적사색가들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편협한 야심가인 리승만은 말할것 없고 김구, 조소앙, 안재홍··· 남조선정계의 거물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을 눈아래 굽어보는 김규식자신도 홍명희, 리극로와는 도저히 견줄수 없는 비범한 정치인들이라고 해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평양방송을 통해 성명이 발표된후의 짧은 시간을 생각해봐도 그렇고 비록 문필가, 언어학자로서는 명성이 높아도 어떻든 정계의 아류에 속하는 그들이 그런 심원하고도 치밀한 생각을 할수는 도저히 없을것 같았다.

그는 생각을 정리할양으로 안해가 내주는 단장을 들고 또다시 정원에 나섰다. 홍명희, 리극로의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하는 인물이 있다고 해도 그의 지향이 정당하다면 구태여 마음을 쓸 필요는 없을것이였다. 짙은 안개속을 헤매며 갈구하던 그것을 스스로 찾아와 안겨준 그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고싶을뿐이였다.

김규식이 미국인들이며 리승만의 노여움을 과히 사지 않으면서 《좌우합작》을 포기해버릴 방도를 생각하면서 정원길을 천천히 걷고있는데 동작이 날렵한 윤명현의 빠르면서도 가벼운 발자욱소리가 들렸다. 윤명현이 김규식의 등뒤에서 불만과 비양이 뒤섞인 말을 던졌다.

《버치가 오겠다고 합니다.》

쾌청한 이날의 날씨처럼 가볍던 기분은 순간에 흩날리고 번거로운 검은 그림자가 김규식의 머리에 비껴들었다.

《일체면회를 사절하라고 하지 않았나?》

김규식이 뒤를 돌아보며 불만을 터뜨렸다.

《문전파출소에서 오전에 누가 왔다갔는지 알려줬겠는데 버치가 가만있겠습니까? 직통전화 303번이 울어대서 송수화기를 드니까 선생한테 지금 떠나는 길이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리지 않겠습니까. 15분쯤후에는 삼청장에 들어설겁니다.》

김규식은 불쾌감을 걷잡을수 없어 두툼한 큰 입을 일그러뜨렸다.

《건방진놈!》

《버치가 건방지다는것을 이제야 알았습니까? 정문을 그대로 통과해들어오겠는데 준비를 해두어야 할것 같습니다.》

《기다리게 하게. 나는 산보를 계속해야겠네.》

《지금까지 상종해오면서 버치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까? 선생님을 찾아서 여기에 올겁니다.》

김규식은 정원길에 단장을 박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문뜩 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나왔다. 조선이 걸머진 숙명적인 불행이 일시에 어깨에 실리는것 같았다. 사실 그가 정세의 추이에 별로 깊은 관심을 두지 않은것도, 쏘미간의 각축전이 종당에는 어디에 이르겠는가를 근래에는 별로 깊이 사색하지 않은것도 쏘련이 개입할수 있는 안보리사회가 아니라 미국의 의사가 그대로 통과될수 있는 유엔총회에 조선문제를 상정시키게 된다는 버치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린데 있었다. 수십개 나라를 제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미국이 일단 결심을 한 이상 조선의 앞날이 달리 될수는 없다고 김규식은 생각했다. 남조선단독정부는 어차피 수립될것이다. 분렬이 장기화되지 않고 종당에는 국내전쟁에로 줄달음치게 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길은 미국의 충실한 졸개이며 독재광인 리승만을 정권의 정상에 올려앉히지 않는것이였다. 물론 그는 자기와 같은 리성적인 정치인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유엔총회에 상정시키는것과는 대비도 할수 없는 자기 군대의 철수의사를 확고하게 표시한 량군철거와 같은 현실적인 안을 쏘련측에서 내놓았다.

정문쪽에서 자동차의 동음이 들리는가싶더니 삼청장현관앞에서 버치의 래방을 알리는 경쾌한 경적이 둬번 울렸다. 자기의 주위에서 끈질기게 맴도는 버치를 시끄럽게 여기면서도 미군사령관의 고문직에 있으면서 미국의 대조선정책을 현지에서 조종하는 그를 무시할수는 없었다. 현재 김규식이 우익3령수의 한사람으로 중시되고있는것도 지성인을 존중하는 버치의 뒤받침에 크게 의거하고있다고 할수 있었다.

김규식은 윤명현을 돌아보며 우울한 낯빛으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버치씨에게 내가 지금 정원을 산책중이라고 말해주게. 내 오래 걸을수는 없을것이니 아침에 회합을 가진 그자리에 간단한 좌석을 마련해주게.》

윤명현이 버치한테 갈것도 없었다. 김규식이 갑자기 쇠작대기처럼 무거워진 단장을 내짚으며 몇걸음을 옮기지도 못했는데 윤명현과 인사를 나누는 쾌활하면서도 경박한 버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규식은 몸을 돌리지 않을수 없었다. 삼청장의 원주인이 정취있게 꾸려놓은 정원길을 짤막한 키에 얼굴이 오동통한 버치가 마치 뒤발꿈치춤이라도 추듯이 들까불며 걸어오고있었다. 김규식은 사교적인 표정치고는 밝고 친절한 웃음이 자기 얼굴에 떠오르는것을 느꼈다.

한사람은 엘리자베스왕조시기의 무게있는 세련된 영어로, 다른 한사람은 양키식 청높은 목소리로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악수를 나누었다. 엇비슷한 나직한 키의 두사람은 그이상 더 절친한 사이를 생각할수 없을듯싶은 모습으로 보조를 같이하며 잠시 정원길을 걸었다. 김규식의 건강상태며 오늘의 쾌청한 날씨에 대해 사뭇 유쾌한 목소리로 떠들어대던 버치가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민주독립당사람들이 평양방송에 지나친 기대를 걸고있지 않았습니까?》

김규식이 예견했던것 이상으로 급소를 찌른 질문이였다.

《조선사람치고 그 방송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독립당사람들의 요구는 뭡니까?》

《그분들은 요구를 하기 위해서 찾아온것이 아니요. 급변하는 정세에 대응할 대책을 의논하려고 나를 찾아왔소.》

《그러니까 선생도 저 음험한 슬라브족의 선전에 관심을 두고있다는겁니까? 선생은 로씨야인들의 특질을 잘 모르고있는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천진한 랑만가들입니다. 그래 어떤 대응책을 세우겠는가 하는 문제에서 합의를 보았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되게 하는 언어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았으면 하오. 내가 마음을 의탁하고있는 감리교도 그리스도의 말을 빌어 인류를 정화시키고있소. 쏘련측의 제안에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 두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 나라에 두 나라 외국군대를 두고있는 민족이라는것을 우선 념두에 두어야 하오. 조국의 허리가 잘리운 불행한 민족성원들인 우리가 이미 철군준비를 시작했다고 하는 쏘련측의 성명에 관심을 두지 않을수 없지 않소. 만일 그네들의 제안이 선전이라고 해도 쏘련측이 발표한 제안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대응책을 세우지 않을수 없단 말이요.》

김규식은 민족자주련맹발기인대회가 열리게 될 때까지는 자기들이 내들기로 합의한 그 원대한 정치대강을 버치에게 알리고싶지 않았다.

《실례의 말을 하는것 같습니다만 내 선생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솔직한 대답을 해주십시오. 김규식선생이 쏘련측의 제안을 지지하는것은 민심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미군의 철수를 진심으로 바라기때문입니까?》

《그것은 앞으로 정세의 추이에 따라 이렇게도 될수 있고 저렇게도 될수 있는 일이요. 쏘련측이 정말 조선민족의 자유의사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할수 있게 철군한다면 미군의 철수도 요구하지 않을수 없을것이요. 쏘련측이 단지 선전적인 목적으로 량군철거를 제안했다면 민심의 버림을 받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치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량군철거를 주장하지 않을수 없을것이요.》

마치 유쾌한 담소를 나누듯 밝은 웃음이 어려있던 버치의 얼굴에 한순간 분개한 빛이 스쳐지났다.

《선생은 남조선에 미군이 진주함으로써 민주주의적인 정치가들에게 어떤 행운이 차례졌는지 잊은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서울에 입성하기전의 남조선은 완전히 좌익세력에 장악되여있었습니다. 우리를 인천에까지 나와 맞이해준 정치인들도 려운형일파였습니다. 우리가 최근에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려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가지고 그 무슨 공화국정부를 조작한 허헌이 좌익정당들을 단결시키고있다고 합니다. 오늘 오전에 민주독립당의 지도성원을 이끌고 선생을 찾아온 홍명희는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를 구성해가지고 서울역전에서 밤을 새우며 기다리고있던 사람입니다. 만일 미군이 진주하지 않았더라면 남조선도 적화되여 김규식선생도 조국에 귀환할수 없었을것이구 설사 귀국했다고 해도 또다시 외국으로 망명하지 않을수 없었을겁니다.》

새벽참에 황철나무에 다붙어 재잘거리는 참새처럼 버치는 지금 김규식이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의 말만을 냅다 엮어내렸다. 허헌이 좌익세력을 단결시키고있다는 버치의 말은 마치 청천벽력과도 같이 김규식의 머리를 내리쳤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그는 지금 다른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를 가질수도 없었다. 버치의 이 말이 사실인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허헌이 어떻게 좌익계의 주도자로 될수 있었는가? 민전의 합법성유지를 조건으로 삼아 《좌우합작》에 응한 허헌이 아니였던가. 만일 좌익계의 단결을 주도하고있다는 버치의 말이 사실이라면 허헌은 쏘련군철수와 같은 극비에 속하는 중대사를 사전에 알수도 있을것이다.

《쏘련군이 설사 철군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후경제복구를 위한 일시적양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건대 쏘련군의 철수선전은 분명히 변화된 쏘련의 대조선적화방략에 따른것입니다. 지금 로씨야인들은 <좌우합작>에 호응했던 허헌을 내세워 남조선좌익을 단결시키려는것 같습니다. 이것만 봐도 그들의 적화방략이 어떤것인지 알수 있지 않습니까? 또 일정한 성과도 거두고있는것 같습니다. 그래 우리를 직접 겨냥한 투쟁을 하는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고수하기 위한 세계의 십자군의 모국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조선에서 내쫓으려고 무식한 민중을 선동해서 우리 사령부앞에서는 벌써 나흘째 미군철거를 요구하는 롱성을 벌리는데까지 이르렀다는것입니다. 홍명희가 민주독립당패를 끌고 선생을 찾아온것도 쏘련의 새로운 적화방략이 분명합니다. 선생님은 이런 기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까?》

김규식은 대답을 할수 없었다. 다만 사색의 심연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이제는 몽롱한 운무속에 잠긴듯 뿌예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길뿐이였다. 홍명희, 리극로들이 쏘련의 새로운 적화방략의 사촉을 받아 민족자주련맹을 생각해냈다는것은 지나친 억측일것이다. 허헌이 주도자가 된후 남조선좌익이 단결을 이룩했다는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지만 그가 수많은 서울시민들을 동원한 반미시위를 조직했다는것은 믿을수 없는 일이다. 좌익측인물가운데서 그중 많이 상종해본 사람이 려운형, 허헌이지만 려운형은 말할것도 없고 허헌은 그 무슨 대중운동을 조직할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결곡한 민족적량심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자신의 내심을 감출줄 모르는 급급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다. 30여년간 정계에서 부대껴온 체험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그 무슨 운동의 조직자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운현궁부근의 퇴락한 기와집에서 허헌을 만났던 일을 돌이켜보면 버치가 말하는 바로 그 쏘련의 새로운 적화방략에 자기를 끌어들이려고 한것 같기도 했다.

만일 허헌이 권하는대로 그와 손을 잡고 미군철거운동에 나섰더라면 현재 자기는 어떤 처지에 있을것인가? 미군사령부앞에 가서 수만의 롱성자들을 고무하는 연설을 했을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겨드랑이밑에 땀이 고이고 등골에 차거운 전률이 줄달음쳤다. 자기를 어쩔수 없이 리용하고있기는 해도 제거할 기회만 찾고있는 리승만에게 다시 일어설수 없는 타격을 가할 구실을 줬을것이다. 리승만은 자기의 가장 위험한 적수가 김규식 자기라는것을 알고 심지어 비서진속까지 밀정을 박아넣고있다는것을 그는 알고있었다.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무려 반년동안이나 미국에 체류하면서 김규식의 영상을 어떻게 해서든 흐리게 하려고 《공산주의자》라느니, 머리에 암종이 있어 곧 죽어버릴것이라느니, 미국의 리익에 무관한 무맥한 인간이라느니··· 온갖 악담을 다 퍼붓고 다닌 리승만이였다. 이런 리승만이 본의아니게 좌익에 리용당한 김규식을 그대로 내버려둘리 없었다.

김규식은 윤명현이 이야기를 나눌수 있게 원탁이며 의자를 내다놓은 등나무밑으로 걸어갔다. 그는 의자에 무거운 몸을 털썩 던졌다. 그는 장죽끝을 버치의 턱밑에 들이대고 그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답변을 몇마디 웅얼거렸다.

《나는 이미 버치박사에게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쏘련이 어떤 목적에서 량군철거를 제안했건 그 제안을 지지할수밖에 없다는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오. 우리 문필계의 대가인 홍명희선생이나 저 가혹한 일제하에서 조선말을 고수발전시키느라고 분투해온 리극로박사가 쏘련에 리용당하는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믿소.》

버치는 얼굴에 날아드는 담배연기를 마주 내불려고 빨간 동그라미상표가 그려있는 《럭키스트라이크》(미국담배)를 꺼내 저도 한대 꼬나물었다.

《미군이 철수하면 남조선이 적화될수 있는데도 량군철수를 지지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내가 자살행위를 했다고 해서 미군이 정녕 남조선에서 나가겠소?》

《미군의 군부와 대통령은 리성적인 사람들입니다.》

《리성은 자기와 함께 상대를 리해할줄도 아는 지성의 심도를 가리키는 말이요. 철학에서는 사물의 본질과 합법칙성을 인식하는 능력을 리성이라고 하오. 버치씨는 정말로 미국이 조선문제를 리성으로 대하고있다고 생각하오?》

《쏘련이 철군선전을 하리라는것을 본국에서 몰랐을수 없습니다. 북조선의 청년장군 김일성이 갑자기 모스크바에 갔다는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준 정보부에서 협상내용을 모를수 없지 않습니까? 철군문제와 함께 남조선적화방법을 협상했을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거짓말에 이골이난 음모군도 말이 많으면 비밀의 항아리속에 감추어두어야 할 진실을 로출시키기마련이다. 김규식은 뜻밖의 소식에 긴장했다. 그는 담배를 빠는것마저 잊고 김일성장군의 모스크바방문, 틀림없이 진행되였을 고위급회담··· 그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쏘련측의 량군철수제안, 좌익계의 단결을 허헌이 주도··· 이 모든것이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진 여러개의 고리인듯 느껴졌다. 하긴 아무리 김일성장군이 강력한 무장력을 이끌고 조국에 개선하셨다고 해도 세계초대국의 하나인 쏘련군이 북조선에 진주한 조건에서 쏘련군의 철거를 요구하거나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것과 같은 대외적발언권을 소유했을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조선의 절반땅에 수립된 정권기관의 수반이 쏘련의 수도에 가서 최고위급인물들과 당당하게 조선문제를 의논했다는것은 놀랍고도 부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리승만이 비록 반년동안이나 미국에 가있었지만 워싱톤의 고위급인물에 접근하지 못한것은 말할것도 없고 흔해빠진 국회의원들도 변변히 만나보지 못하고 엄청난 돈을 마구 뿌려던지면서 자기를 대통령으로 내세워주면 조선을 미국의 한개 주로 만들겠다고 어처구니 없는 망발을 떠들어대다 귀국했다. 미국이 남조선 《민주진영》의 3령수중 한사람이라고 하는 김규식자신도 지금 미군사령관의 애젊은 고문을 상대하고 앉아 정치를 론하고있지 않는가.

《허헌씨가 좌익계를 단합시키고있다는것은 사실이요?》

김규식은 담배연기를 내불다 넌지시 물었다.

《선생은 미국의 정보망이 어느정도 조밀한지 모르는것 같은데 내가 말한 모든것은 다 사실입니다. 허헌이 좌익당들의 싸움질을 중재했다는것도 물론 사실입니다. 쏘련의 남조선적화전술에서 변화가 있다는것도 물론 사실입니다. 그것은 명목상 허헌을 앞에 내세워 좌익진영을 일시 단결시킨것만 봐도 알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남조선의 <민주진영>정치인들에 대한 일대 경고신호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신심에 넘친 모습이였구나.)

김규식은 운현궁부근에서 만났을 때의 허헌의 모습을 눈앞에 다시 그려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버치가 말하는 이른바 새로운 《적화방략》이 자신의 정치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겠는가를 김규식은 생각해보았다. 경고신호로 될것까지는 없다고 해도 우익에 속한 자기는 다른 한쪽 기슭에 밀려나 더욱 고립된 처지에 이를것이였다. 그런데 버치의 말대로 홍명희, 리극로들이 새로운 《적화방략》에 따라 자기를 찾아와 범민족적인 조직인 민족자주련맹의 위원장자리에 올려앉히겠다 했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것이겠는가? 그가 알고있는 공산주의리론에 의하면 자기는 도저히 통일전선의 일원이 될수 없으며 타도대상으로 되여야 할 사람이였다. 버치의 말에서 그가 인정할수밖에 없었던것은 미군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남조선은 적화될수 있었다는것이며 만일 그런 사태가 발생했다면 자기는 오늘과 같이 삼청장에 있을수 없다는것이였다.

《버치씨가 오늘 나를 찾아온 목적은 뭐요? 몇달전에 나를 찾아왔던 미국무성의 관리가 말한것처럼 나는 김규식쿨리(병약자)요. 내 날씨가 너무 좋아 밖에 나오기는 했소만 이것은 나의 건강상태로 보아 지나친 부담이요.》

김규식은 빨리 버치를 쫓아버리고 오늘 하루사이에 찾아든 수많은 중대사들을 조용히 사색하고싶었다.

《조선은 전후 미쏘간의 가장 치렬한 대결장이며 미국의 존재를 념두에 두지 않은 조선문제의 해결이란 있을수 없다는것을 선생에게 상기시키고싶었습니다.》

《지나치게 가혹한 말이구려.》

《우리 미국은 이 남조선땅에서 가장 능력있고 믿을수 있는 정치가는 김규식선생이라고 인정하기때문에 가혹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겁니다.》

 

···님의 말 믿고싶은 간절함을 안고

새날을 맞으니

허나 어둠과 함께 찾아드는 이 무거운

의혹을 날리고싶어 모대기며 지새운 밤

몇번이던가···

 

김규식은 유연하면서도 세련된 시어로 운률을 맞추어가며 이렇게 웅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명현과 함께 안해가 달려와서 그의 량옆을 부축해주었다. 버치는 그를 뒤쫓아가서 더 수작을 붙이고싶었지만 안해 김순애와 윤명현의 차거운 눈길에 부딪쳐 짧은 두팔을 벌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