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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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장에 돌아온 김규식은 쓰러지듯 쏘파에 누웠다. 회의장이 깨져나갈듯이 고함을 치며 앞탁을 두드려대던 아비규환의 소음이 아직도 귀청을 때리고 내려감은 눈시울에는 극도로 흥분되여 아귀싸움을 하는 의원들의 모습이 얼른거렸다. 의장인 자신은 어떻게 처신했던지 도무지 생각나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의 의사를 전달해보려고 마치를 두들겨댔다는것외에 머리에 떠오르는것이란 없다.

올해의 마지막회의를 끝내버리려고 《과도립법의원》이란것을 개최한지 사흘째되는 오늘 오후였다. 그러니 공교롭게도 미군사령부앞에서 서울시민들의 대시위가 터진 바로 그날 개원한셈이였다. 김규식도 눈물없이는 대할수 없는 수많은 감동적인 정경이 시위장에서 벌어지고있다고 해서 이날은 좀 일찌기 삼청장을 나서서 자동차를 롱성투쟁이 전개되고있는 신문거리를 바라볼수 있게 에돌게 했다. 곳곳에서 저녁끼니를 이고가던 아낙네, 김이 피여오르는 국을 바께쯔에 담아들고 가던 녀학생, 무엇인지 등에 지고가던 지게군··· 그들을 저지하려고 앞을 막은 경찰사이에 싱갱이가 벌어지고있는 광경을 도처에서 목격할수 있었다. 경찰에게 무엇을 빼앗긴 모양인 파파늙은 로파가 고무신짝을 벗어들고 포도를 내리치며 울부짖고있는 모습도 보였다. 아무튼 수많은 시민이 운집했다니 그들에게 먹이고 마실것을 나르자고 해도 보통 인력이 들지 않을것이였다.

김규식은 미군의 남조선강점을 반대하는 겨레의 마음이 이렇게도 격렬하고 긴박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 눈굽이 뜨거워졌으며 운현궁부근의 퇴락한 기와집에서 허헌과 마주앉았을 때 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떨쳐나서야 한다던 그의 말이 문득 머리에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미군사령부가 《과도립법의원》을 통해 목숨을 걸고 반미시위를 단행한 이 나라 겨레들에게 보복을 하려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김규식이 미군정청홀에 가설된 《과도립법의원》회의장에 들어서서 개회를 선포한 직후였다. 미국에 충실한 친리승만계의 정객이며 군정청경무부에 있으면서 남조선전역을 민중의 뜨거운 피로 검붉게 물들인 림병옥이 손을 들어 긴급동의를 요구했다. 김규식이 미처 말을 할 사이도 없이 연단에 뛰여나와 마이크를 움켜쥔 그는 유엔에 보낼 결의안이란것을 우선 채택하자고 요구했다. 김규식은 이때에야 도발에 걸려들었다는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도발에 걸려들었는가를 깨달은것은 그다음이였다. 림병옥은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문건비슷한것을 앞에 놓고 냅다 읽어던지는데 김규식의 귀에 들어온 몇마디 말들을 두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은 도저히 이 자리에서 토의할 성질의것이 아니였다. 그는 유엔을 통해서만 조선문제의 공정한 해결이 가능하다면서 그 리유를 렬거하였는데 그것은 도저히 그대로 듣고있을수 없는 망발들이였다. 남조선에서는 미군사령부의 거대한 노력에 의해 민주주의가 토착되였지만 북조선은 그렇지 못하다, 남북조선의 이러한 격차를 해결하고 조선에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서는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실시하는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총선거는 반드시 민의가 충분히 반영될수 있는 선거법이 적용되여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면 남조선민중에게 민주주의를 선물한 미군정선상의 통일정부가 서울에 수립될것이다.···

아무리 현실을 외곡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전도된 허위날조를 할수는 없을것이다. 지금 미제침략자들의 포악무도한 만행을 절규하며 수만의 서울시민들이 미군사령부앞에서 롱성투쟁을 전개하고있는데 남조선민중이 민주주의를 선물받았으며 그것이 뿌리를 내렸다니 도대체 말이 되는가? 서울에 군정선상의 통일정부가 수립될수 있다니 이것이 도대체 제정신이 있어가지고 줴치는 소리인가?

김규식은 하지가 수만의 서울시민들의 반미시위로 해서 야기된 분분한 세론을 《과도립법의원》의 결의안을 내둘러서 눌러버릴 생각을 했다는것을 알았다.

만일 이 결의안이 통과되여 유엔에 발송되는 경우 유엔에서의 조선문제토의는 미국의 배후조종에 의한것이 아니라 남조선 《과도립법의원》의 요구에 의해 상정된듯한 감을 줄것이다. 김규식의 등골로는 차거운 전률이 줄달음쳤다. 《과도립법의원》을 만들어낸 자기가 력사에 더러운 이름을 남긴 을사오적과 동렬에 놓일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꿰지르며 내달렸다. 김규식은 어떤 수를 쓰든 이 황당한 결의안이 통과되는것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의장마치를 두드려대며 림병옥의 제기는 군정청의 자문기관에 속하는 《과도립법의원》의 권능에서 벗어난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회의장은 벌써 의장의 의사가 전달될수 없을만큼 란장판이 돼버린 뒤였다.

림가놈의 도발에 격분한 의원들이 자리를 차고 뛰여일어나 주먹을 내두르며 웨쳤다.

《군정선상의 통일정부란 무슨 말이냐?》

《민주주의가 토착됐다니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 그래서 이 립법의원이 군정청의 시녀노릇을 하느냐?》

《경찰권을 쥐였으면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되는줄 아느냐? 누구한테 지령을 받고 긴급동의를 했느냐?》

격분한 의원들의 반박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였다. 그러나 깡패처럼 머리를 치깎은 중키의 림병옥은 밭은 목우의 네모진 얼굴을 끄떡도 하지 않고 자기를 연탁에서 끌어내리려는 의원들을 랭랭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서있다가 불쑥 몇마디의 말을 토해버렸다.

《빨갱이들이 수만을 동원해서 미국을 반대해나선것을 보지 못해? 미국사람들이 곤경에 처해있는데 민족의 의사를 대변하는 립법의원에서 이쯤한 결의를 채택해서 나쁠게 뭔가 말이야!》

림병옥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른바 《결의안》을 들고 나오게 된 까닭을 스스로 드러냈다.

김규식은 의장의 최종권한을 행사할 결심을 했다. 그는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망치를 두드리며 웨쳤다.

···림의원의 제안은 제한된 권능을 갖고있는 《과도립법의원》에서 토의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제출한 결의안에는 이 자리에서 결정할수 없는 미군정에 대한 평가, 앞으로 민의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결정할 정부의 성격 등이 언급되여있어 이 《과도립법의원》에서는 심의할수 없는것이다. 《과도립법의원》의 권능에 속하지 않는 문제가 상정되여 극도의 혼란이 조성된 결과 회의를 계속할수 없다. 휴회를 선포한다! 김규식은 망치를 내던지고 의장석에서 내려섰다. 그의 뒤를 따라 수많은 의원들이 회의장을 떠났다.

김규식의 영문비서구실을 하는 맏아들 김진동이 발자욱소리를 조심하며 방안에 들어왔다. 쏘파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몸이 많이 언짢으십니까?》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해서라기보다 꼭 알려줘야 할 긴박한 일이 있어 방에 들어온것 같았다. 의원 윤명현이 김규식과 함께 삼청장에 돌아왔으니 《과도립법의원》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모양이였다.

《좀 급한 일이긴 합니다만 정 몸이 언짢으시면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자기의 말을 지금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였다.

《무슨 일이냐?》

《민주독립당 전체 정치위원들의 명의로 아버님께 긴급면회를 요청해왔습니다.》

민주독립당은 홍명희가 성시백한테서 장군님의 민족자립의 리념을 전해듣고 그것을 정강의 골자로 삼아 최근에 출범시킨 정당이였다. 이 정당에는 리극로가 이끄는 건민회, 안재홍이 당수직을 차지하고있는 신한국민당, 민중동맹, 반리승만계의 재미한국련합위원회 등 다섯개 정당, 단체들이 망라되여있는 통일전선체형식의 정당이였다. 정치위원회는 위원장 홍명희, 부위원장 리극로, 위원 안재홍, 최동오 등 다섯명으로 구성되여있었다.

《그 사람들이 무엇때문에 날···》

김규식은 눈을 뜨고 아들을 시답지 않게 쳐다보았다. 홍명희는 《과도립법의원》을 만들어낼 때 문필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고려하여 관선의원으로 되게 해주었는데 제일 선참으로 거부성명을 신문에 내서 김규식을 곤경에 빠뜨린 사람이였다. 그래 그는 홍명희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긴 그때만해도 김규식은 《과도립법의원》이 조직되면 우선 정치범석방, 경찰기구전면개혁, 부일자(친일파)숙청문제들을 법화하여 시행하게 될줄 알았다. 그러나 김규식의 의도는 하나도 리행된것이 없었다. 부일자숙청법안만이라도 어떻게 해서든 법화해보려고 했지만 군정청의 압력을 받아 법화는커녕 의안으로 상정시키지도 못했다.

홍명희는 《과도립법의원》이 오늘과 같은 형편에 이르리라는것을 그때에 벌써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아버님은 등원을 하고계셔서 아직 모르는것 같은데 오늘 오후 5시에 쏘련측이 쏘미량군의 동시철군을 제의했습니다. 그네들은 이미 철수준비를 개시했다고 합니다. 지금 장안은 그 성명으로 해서 온통 끓어번지고있습니다.》

《엉?》

김규식은 마치 뒤등에 불이 달린것처럼 쏘파에서 뛰여일어나 앉았다. 그의 얼굴에 짙게 어려있던 지친 빛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건 네가 직접 듣고 본 일이냐?》

《5시에 북조선에 주둔한 쏘련군사령관이 쏘련정부의 위임에 의해 평양방송으로 성명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나도 7시에 반복방송을 듣고 알았습니다. 장안의 분위기는 비서들을 내보내서 알아보게 했습니다. 호외를 준비하고있는 신문사도 있답니다.》

응당 흥분해야 할 일인데 어째선지 김규식은 또다시 절망과 상실의 회색운무속에 온몸이 잦아드는듯한 감을 느꼈다. 벌써 그의 머리에서는 《과도립법의원》에서의 소란스러운 사건같은것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구속력도 없는 문서장을 만들어내는 그따위짓을 쏘미량군철수와 같은 중대사에 대비할수는 없었다. 그의 눈앞에 문뜩 운현궁부근에서 만났던 허헌의 얼굴이 다가들었다. 그것이 사실이였구나! 극인은 어떻게 극비에 속하는 이런 중대사를 알수 있었는가? 지금은 어떻게 알수 있었는가 하는것이 문제가 아니라 급변하는 정세의 추이를 그렇게도 뜨겁게 선통해준 허헌을 아량없이 대한 자기의 태도를 생각해야 할 때였다. 어떻게 돼서 일단 수긍이라도 해놓는 여유있는 태도를 취하지 못했는가? 자기는 벌써 이런 중대사를 예감할 능력도 없고 선통해주는 말을 받아들일 아량도 없는 고집스러운 늙은이가 돼버렸는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정세의 추이에 둔감해졌는가? 정치인에게 있어 이러한 둔감은 민중의 버림을 받게 마련이여서 정계에서 조락될 징조라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김규식이였다.

《9시보도시간에 반복방송이 또 있다고 하는데 들으시겠습니까?》

김진동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군정청의 회의장에서 아귀다툼을 하는 사이에 벌써 통행금지시간이 머지 않은 9시를 가까이하고있었던것이다.

울적한 기분에 휩싸여있던 김규식이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

《좋을대로 해라.》

김진동이 라지오의 조절기를 평양방송에 맞추어놓았다. 서울방송의 가냘프고 애상적인 노래와는 전혀 색갈이 다른 창조적기상이 약동하는 씩씩한 선률이 갑자기 온 방안에 울려퍼졌다. 윤명현도 방에 들어와 라지오앞에 앉았다. 김규식은 장죽을 빨며 귀를 기울이였다. 녀성방송원이 드높고도 챙챙한 목소리로 보도를 시작했다. 첫 순서가 쏘련군이 남조선주둔 미군에게 동시철거를 제안했다는 보도였다. 내용은 김진동이 이미 이야기한것과 비슷했지만 심장을 들때리는 그 챙챙한 목소리탓인지 김규식의 마음을 대번에 휘저어놓았다.

쏘련군사령부는 위임에 의하여 이 성명을 온 세계를 향해 공포할 영광을 지녔다.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조선인민이 자주적인 의사에 따라 민족통일정부를 세울수 있게 할 목적으로 쏘련군은 조선의 38°선 이북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쏘미간의 합의에 따라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도 이 정당한 조치에 응당한 호응이 있으리라는것을 기대한다··· 이런 전환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몇개의 조항을 찍어가며 론증한 다음 쏘련군은 이미 철수준비에 착수했다는것을 특히 강조했다. 이것은 철수란 념두에도 없는 미군이 철거를 하지 않는 경우에도 쏘련군은 일방적인 철수를 단행할 결심이라는것을 명백히 하는 말일것이다.

김규식은 맏아들이 언제 라지오를 껐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는 사품치며 내닫는 거류와도 같은 정세의 흐름에서 자기가 멀리 뒤떨어져있다는것을 뼈저리게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쩐지 자기는 검은 구름이 머리우에서 날고 세찬 바람이 락엽을 날리는 아아한 벼랑끝에 외롭게 서있는듯한 감이 들었다. 30여년간 이국의 지경을 수많이 넘나들며 겨레를 위한 그 무슨 일을 한다고 동분서주해왔지만 결국에 이른것이 이런 벼랑끝이였던가? 정치인으로서의 존재가치를 부여해주는 주장해야 할 정견도 갖고있지 못한 자신은 분명히 파멸의 심연가에 서있는 버림받은 정치인이였다. 그러나 지난 시기엔 이런 궁지에 몰려도 용케 다시 솟아오르군 했다.

빠리강화회의에서 쫓겨나다싶이 했을 때도, 망명정부의 수반의 자격으로 원동에 갔다가 추방을 당하는 창피를 당했을 때도 그러했다. 이런 좌절과 실패를 다 세자면 열손가락을 꼽아도 모자랄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나래쳐오를 틈새를 전혀 찾아낼것 같지 못했다. 그는 차겁고 세찬 바람이 늙은 자기의 몸을 후려치는듯한 감을 느끼며 장죽을 석대째 입에 물었다.

전화종소리가 그의 초조한 사색을 중단시켰다. 종소리를 울리는 전화기에 다가가는 윤명현에게 김규식은 짜증이 어린 말을 던졌다.

《나를 찾거든 당분간 삼청장에 없을것 같다고 하게.》

민주독립당 정치위원들의 면회요청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였다. 그들을 만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으니 면회를 거절하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것이다. 윤명현은 대꾸없이 송수화기를 들었다. 김규식이 예측한대로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홍명희였다.

《30분후에 다시한번 수고해주십시오. 그때쯤이면 돌아오실것 같습니다.》

윤명현은 김규식의 말을 쫓지 않고 이런 대답을 하고는 송수화기를 내려놨다.

《어째서 내가 말하라는대로 하지 않나? 30분후에 전화를 다시 하면 어떻게 하자는건가?》

김규식은 윤명현에게 발작적인 노기를 폭발시켰다. 윤명현은 스승을 납득시키기 시작했다.

《나도 삼청장에 돌아와서야 쏘련측에서 량군철수를 제기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에게 뜻밖인것처럼 제게도 뜻밖이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중대한 시기에 문을 닫아매고 들어앉아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다는겁니까? 저는 이런 때일수록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찾아오겠다는분들을 막을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민주독립당은 영향력있는 중간파정치인들의 련합체입니다. 그분들이 선생님에게 도움이 될 말을 할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정치에 밝지 못한 지식인들인데 들을 말이 뭣이 있겠다고 그러나?》

《허헌선생이 정계에 밝은 정치인이여서 오늘과 같은 중대한 사변을 선통해줬습니까? 민주독립당의 그분들이 문필가, 학자들이 대부분인것은 사실이지만 지성의 대표자들인데 어째서 도움받을 일이 없겠다고 단정하십니까? 출중한 정치가는 평백성의 하찮은 말에서 정책을 찾고 사상을 얻는다고 합니다.》

윤명현의 론박에 김규식은 할말이 없었다. 천박하고 소란스러운것을 멀리하며 영문학과 종교의 세계에 곧잘 취하군 한 자기의 생활방식이 외계와의 교류를 차단해버려서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정치인이 돼버린것 같았다. 언젠가 찾아왔던 정향명도 한발자욱만 밖에 나서면 민족자립력량을 편성하기 위한 거창한 투쟁을 목격할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자기를 탓하며 삼청장을 떠나갔다. 실지 그런 투쟁을 오늘 《과도립법의원》에 갈 때 보기도 했다.

《민중은 나를 령수급정치인으로 대한다는것을 알아야 하네. 그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나는 령수급의 준비를 해가지고 나서야 할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에겐 아무 준비도 없네.》

《그렇다고 담을 쌓고 이 삼청장에 앉아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문필가, 학자들과는 의사를 소통하기도 쉬우니 그분들을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쏘련측의 성명이 있은 후에 면회를 요청하는것을 보면 량군철거와 관련해서 의논하고싶은 문제가 있는것 같은데 신의를 가지고 찾아오는분들이야 만나는것이 좋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나누고있는데 전화종이 또다시 주인을 찾았다. 윤명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언제 만나시겠습니까?》

김규식은 잠시 망설이다 대꾸를 했다.

《만나되 접촉을 비밀에 붙여야 한다고 하게. 비공식접촉이라면 만날 의사가 있다고 말하게.》

윤명현은 갑자기 소심해진 스승이 민망스럽게 여겨진듯 젊음이 넘쳐나는 팽팽한 얼굴에 그늘을 지었다. 홍명희는 롱담이 섞인 말을 전파에 태워보내며 김규식과의 면담을 재촉했다.

《우사형을 만나기가 이렇게 어려울줄은 몰랐소. 통금시간이 림박했으니 이러다간 사옥(조선일보사)에 갇혀서 밤을 새워야 할것 같소.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돌아오셨습니다.》

윤명현은 저쪽의 롱담에 웃음이 섞인 말로 대답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지 않는데 민주독립당어른들과의 접촉을 저에게 일임하셨습니다. 벽초(홍명희의 호)선생은 언제쯤 만나기를 희망하십니까?》

《우린 빠를수록 좋소.》

《그럼 래일 아침 9시로 하시죠. 라지오에서도 래일은 쾌청한 날씨라고 했으니 그때가 좋을것 같습니다. 정치위원 다섯분이 다 오시겠습니까?》

《그건 그쪽에서 좋을대로 하겠소. 나와 부위원장 고루(리극로의 호) 이렇게 두사람이 정치위원회를 대표해두 좋구···》

《그것이 좋겠습니다.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이 래왕하는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니 두분이면 정치위원회를 대표했다고 할수 있겠습죠. 그런데 선생님은 기자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말씀을 조심하시구 또 선생님들도 자유롭지 못할것 같으니 이 면회를 비밀에 붙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왕년의 신문사사장이 그쯤한것을 모를것 같소? 그럼 시간은 아침 9시, 나와 고루 두사람이 삼청장에 가겠소.》

《알겠습니다. 정문에 말을 해놓겠으니 명함을 놓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아직도 장죽을 빨며 수제자의 말을 주의깊이 듣고있던 김규식이 면회시간을 지나치게 바투 정했다며 까박을 붙였다.

《저쪽에서 서두는데 이쪽에서 시간을 늦추면 오히려 선생님에게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래일 면담에는 제가 옆에 붙어있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김규식의 낯색은 얼마간 가벼워진듯싶었지만 깊은 주름이 패인 볼이며 수북한 눈섭밑에는 지친 빛과 무거운 근심이 여전히 짙게 어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