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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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사령부가 들어앉은 미색고층건물은 2~3층짜리 볼품없는 서울의 신문사들을 굽어보며 위엄있게 솟아있었다.

현대미를 자랑하는 이 건물에 위압을 당하며 《조선일보》를 비롯해서 몇개의 신문사들이 늘어서있다고 하여 미군사령부가 자리잡은 이 거리를 신문가라고 했다. 신문사들에서는 사람들의 환심을 살 양으로 현관앞에 게시판을 세우고 거기에 신문과 사진들을 붙여놓군 했다.

이날따라 그 게시판앞에 붙어서서 신문과 사진을 들여다보는 청년학생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4~5명씩 몰켜서있는 그들은 어째서인지 그 무엇을 기다리는 긴장한 표정들이였다. 사령부현관앞에서 카빙총을 어깨에 걸치고 껌을 씹으며 거들먹거리는 보초도 현관의 회전문 량옆에 두다리를 벌리고 버티고 선 헌병들도 아무래도 미심쩍어보이는 이들에게 가끔 의혹의 눈길을 던지군 했다. 고동소리가 서울상공에 울려퍼지는, 이날따라 행인들이 류달리 많은 정오때였다. 신문사들사이의 어둑한 골목안에서 갈색비옷을 입은 청년이 뛰여나와 주먹을 내두르며 웨쳤다.

《미군 나가라!》

게시판앞에 붙어섰던 청년학생들, 골목안에서 쏟아져나온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삽시에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3~4명, 4~5명씩 어깨를 겯고 미군사령부에 짓쳐들어가기라도 할듯이 사령부를 향해 육박해들어갔다. 그래도 병사랍시고 껌을 씹으며 오가던 보초는 어깨에서 총을 벗겨들고 격발기를 당겼으며 회전문앞에 뒤짐을 지고 버티고 섰던 《헌병》들은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얼굴을 마주봤다.

청년학생들은 어깨를 겯고 미군사령부앞도로에서 구호를 웨치고 원을 그리면서 맴돌기 시작했다.

《미군 나가라!》

《미군 나가라!》

긴급출동한 기마경찰대가 말발굽소리를 요란스럽게 울리며 달려왔다. 경찰들과 청년학생들사이에 처절한 혈투가 벌어졌다. 청년학생들은 송곳과 못으로 말의 엉뎅이를 찔러 그우에 탔던 《검정개》(검은 제복의 경찰)를 포장길우에 떨구었으며 경찰은 방망이를 휘둘러대며 청년학생들의 머리와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피투성이가 된 청년학생들이 말잔등에서 굴러떨어진 경찰들과 맞붙어 싸우며 놈들에게 피를 뿌렸다. 결사적인 격투장에서도 이보다 더 격렬한 혈투를 볼수 없을것이다. 사령부의 창문이 하나 둘 열리기 시작했다. 이 참담한 혈투에 미쳐버린듯 흥분한 미군이 상반신을 창밖에 내놓고 소리를 치며 휘파람을 불면서 《검정개》들을 부추겼다. 청년학생들이 미국놈들의 조롱을 받으며 결사적인 항쟁을 계속하는것을 본 행인들이 투쟁대오에 뛰여들었다. 달리던 전차, 뻐스형마차에서 뛰여내린 젊은이들, 중년들, 거리를 헤매던 소년들이 겨레를 모욕하는 미국놈들의 야비한 조롱에 격분하여 고함을 치고 발을 굴렀으며 끝내는 격투장에 뛰여들어 《검정개》들과 싸웠다.

신문사의 집필실, 편집실에서 일찌기 들은적도 읽은적도 없는 청년학생들의 용감한 투쟁을 지켜보던 기자들도 신문사에서 뛰쳐나와 발정한 짐승모양 고아대는 미군이며 경찰의 만행을 필림에 담았으며 끝내는 웃도리를 집어던지고 주먹을 휘둘러대는 기자들도 있었다.

《싸움이 붙었다!》

《미국놈들이 우리 사람들을 죽인다!》

삽시에 소문은 신문가주변의 거리에 퍼져나갔으며 신문팔이소년들이 이 소식을 온 서울시내에 비상한 속도로 날라갔다. 전차를 몰고가던 운전수, 자그마한 공장에서 수동기계를 돌리던 로동자, 점원구실을 하던 청년, 수학공식에 매달려있던 학생, 펜대를 놀리던 사무원, 빨래하던 아낙네들이 서울중심에 서있는 미군사령부앞으로 달려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구슬픈 수난의 노래를 부르며 수천명의 행진대오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는 일대 란투장으로 변해버린 신문거리를 향해 막을길 없는 강물처럼 흘러왔다. 그것은 강점자들한테서 남편과 오빠, 어머니와 누이, 자식들을 빼앗긴, 그 무엇으로도 가셔낼수 없는 원한이 가슴속에 응어리처럼 옹박힌 상복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녀인과 소년, 청년들은 자기들의 가슴속에 사무친 원한이며 피타는 호소를 머리에 감은 수건, 손에 든 나무판, 머리우에 추켜든 프랑카드에 쪼아박듯이 썼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내 남편을 왜 죽였느냐!》

《아버지, 이 아들의 복수를 보시라!》

번화한 상가인 명동거리입구, 남대문시장, 백화점들에 모여있던 겨드랑이에 짝지발을 낀 한쪽다리가 없는 청년, 팔없는 사나이, 어머니에게 의지해 걷는 처녀··· 그중에는 한다리를 잃고 하반신을 흰붕대로 감은 동생을 손수레에 눕혀서 밀고나온 조순옥이도 끼여있었다. 이 수난자의 대렬도 미군사령부를 향해 흘러왔다. 미군병사들이 입다버린 헌털뱅이로부터 시작해 교복, 작업복, 치마저고리, 양복··· 차림새도 나이도 각각이였지만 그들이 미국놈들때문에 불구의 불행을 지닌 시민들이라는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몸이 곧 조선의 불행을 말해주고도 남는다는것을 알고있는듯 나무판도 들지 않았고 머리띠도 두르지 않았다. 다만 순옥이가 밀고가는 손수레에 열두살짜리 소년에게 이런 참혹한 불행을 안긴 미군장교 죤 버턴, 부대대호, 재난을 당한 장소, 불행한 소년의 이름이 씌여있는 나무판이 꽂혀있었다. 강점군의 만행을 소리높이 고발하는 이 시위대렬의 머리우에서는 그들의 념원, 고발, 절규를 담은 몇폭의 프랑카드가 펄럭이고있었다.

《강점자의 만행을 보라!》

《사죄하라! 보상하라!》

《미군 나가라!》

구정물이 흐르는 청계천주변에 모여있던 실업자들과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 수천명이 신문가에서 싸움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즉시에 대렬을 짓고 발구름소리를 울리며 투쟁의 노래를 부르면서 처절한 피의 투쟁이 전개되고있는 미군사령부앞으로 달려왔다. 그들의 머리우에서 펄럭이는 프랑카드에서는

《배울 권리를 달라!》

《공장을 로동자들에게!》

《미군 나가라!》

이런 글발이 분격한듯 웨치고있었다.

미군의 강점으로 해서 남조선땅에 덮씌운 전대미문의 재난과 불행이 드세찬 거류를 이루고 미군사령부를 향해 밀려오는것 같았다. 미군강점으로 해서 남조선인민들이 어떤 고통과 불행을 당하고있으며 그들의 피의 요구가 무엇인지 한눈에 알수 있는 흐름이였다. 폭력을 위주로 하던 종전의 투쟁과 모든것이 달랐다. 시위대렬 그 자체가 미군철수를 주장하는것이 너무나도 응당하다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신문거리라고 해야 도무지 한키로안팎의 길지 않은 차도는 미군철거를 요구하는 수천의 시위군중으로 꽉 찼다. 신문가의 다방과 식당, 료정에 들어앉았던 신사들과 녀인들, 사무소의 사무원들도 시위투쟁에 공감하고 흥분하여 열렬한 박수를 보냈으며 마침내는 투쟁에 합류했다.

흰 위생복을 입은 의사, 간호원들이 뻐스형마차, 택시 혹은 도보로 왕진가방을 들고 달려와 시위군중들속을 누비고 다니며 부상자들을 현장에서 치료했다.

허헌은 홍명희가 내준 민주독립당위원장실(조선일보사 2층)에 들어앉아 흥분으로 해서 볼의 근육이며 손을 떨며 자신이 설계한 이 투쟁을 내려다보고있었다.

그는 자기의 희망이 어느만큼 실현됐는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다만 뒤설레는 거리를 내려다보느라니 흥분과 열정, 투쟁의 희열이 가슴에 가득차 자신도 시위군중속에 뛰여들고싶은 격정이 북받칠뿐이였다.

주먹밥을 함지에 담아 인 아낙네, 콩국을 담은 바께쯔를 들고 뚱기적거리며 돌아가는 료리사들, 부상자들에게 깔아주고 덮어주려는듯 이부자리를 이고 진 녀대학생들과 아주머니들, 지게군들이 수천의 시위군중속에서 얼씬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허헌의 눈앞은 불시에 뿌잇하게 흐려졌다.

좌익력량이 단결되면 일찌기 볼수 없었던 비상한 투쟁을 전개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그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눈물없이는 대할수 없는 감동적인 정경을 수없이 목격했다. 외세를 결코 이 땅에 두지 않으려는 조선민족의 기상과 불굴의 의지를 그는 눈앞에 보았다. 그는 안경을 벗어서 흐려진 알을 닦고 또 닦았다. 그는 언젠가 한번 주걱턱 하지가 불러서 올라가본적이 있는 미군사령부의 7층을 바라보았다. 만나자 곧 책상을 내려치며 싸우느라고 방안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지만 어쨌든 극도의 사치를 다했다고 해야 할 호화로운 방이였다. 교만하고 괴퍅한 하지는 지금 어떤 심정일것인가? 갈수록 시위자들의 함성은 드높아지고 규모는 확대되기만 하여 반미의 격랑이며 투쟁의 바다라고 해야 할 사령부앞거리를 내려다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할것인가?

《오끼나와의 영웅》으로 자처하는 하지이니 사령관의 체모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겠지만 틀림없이 미국의 남조선강점을 반대하는 서울시민들의 드세찬 기세에 경악과 당황함을 금치 못하고있을것이였다. 그에게서 인간적인 량심이나 사고는 기대할수 없다고 해도 감수성이란것은 가지고있을것이니 자신이 감행한 죄악에 몸서리를 칠것이며 앞으로 단선단정을 강행하자면 조선민족의 이 불굴의 의지를 상대해 싸워야 한다는것을 깨달았을것이다.

 

하지는 마치 우리안에 갇힌 맹수처럼 잔뜩 화가 치밀어올라 궁전처럼 호화로운 사령관실을 오가고있었다.

그는 사령부앞에서 수백명의 청년학생들이 결사적인 투쟁을 단행한 그 시각부터 미군의 심장부를 감히 위협할 생각을 한듯싶은 무모해보이는 시위를 지켜봤으며 붉은 창가림짬으로 지금도 시위자들을 내려다보고있었다. 처음 시위가 급격히 확대될 때는 경찰이 서툴게 진압작전을 벌려 군중에게 피를 보인데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령부소속 군인들의 조소와 야료, 휘파람이 시민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 생각은 말할것 없고 이것이 새로 탄생될 반미구국전선의 출범투쟁이라는것을 알수도 없었다.

그러나 전차와 뻐스형마차에서 뛰여내린 젊은이들, 길가던 중년, 심지어 신문기자들까지 란투장에 뛰여들 때 상복의 대하, 미군에게 팔다리와 눈을 빼앗긴 수난자들의 흐름, 일터를 잃고 학교에서 쫓겨난 실업자들과 학생들이 노한 파도모양 뒤설레며 미군사령부를 향해 밀려드는것을 보았을 때 하지는 이 소란스러운 《란동》이 미군의 남조선《주둔》이 부당하다는것을 방불히 눈앞에 그려볼수 있게 하려는 시위이며 결국에는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해야 한다는것을 립증하는 전략적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이라는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미국의 조밀한 정보망도 감촉하지 못한 이런 시위를 누가 조직했는가? 투쟁이란 혁명의 속성이라면서 극단적인 폭력행위에 매달리던 종래의 남로당의 투쟁방식과는 전혀 양상이 다른 이런 시위를 누가 조직했는가. 하지는 새로운 좌익세력이 등장한것 같아 밀려드는 불안을 물리치기 어려웠지만 시위의 양상으로 보아 선전적목적을 달성하면 해빛에 강서리가 녹아버리듯 스스로 물러갈것 같았다.

그는 해저물녘에 보복을 맹세하며 수치스러운대로 뒤문을 빠져나가 안해가 기다리는 경무대(일제시기의 총독관저, 후에는 력대 대통령의 관저로 리용하던 청와대)로 향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도 신문거리는 여전히 시위군중들이 차넘쳤다. 하지사령관은 이날도 뒤문으로 해서 사령부에 들어서지 않을수 없었다. 윤기흐르는 비단벽지, 여섯폭짜리 금박병풍, 조선의 국보중에서 선택한 두폭의 명화, 치렁치렁하게 드리운 붉은 창가림이 마가을빛을 가리워 천정에서 수정무리등이 눈부신 빛을 뿌리는 호화찬란한 사령관실에 들어섰다. 삽시에 신문거리에서 울려퍼지는 구호, 우렁찬 노래소리, 목갈린 성토자의 웨침이 그의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하지는 색갈이 바래기 시작한 금발머리가 곤두설만큼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올랐다. 표독스러운 노성을 내질러 부관을 찾았다. 지난밤의 《란동자》들의 동향을 보고하게 했다. 시위자는 더욱 늘어났으며 부상자들과 로약자들에게 시민들이 자진해서 그 수를 알수 없는 무수한 이불포대기와 모포들을 들고왔다고 했다. 부관의 말을 믿을수 없어 창가림의 한귀를 들고 사령부앞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시위대렬은 더욱 확대되여 수만에 이른것 같았다. 군용백화점이 자리잡은 신문가입구의 네거리로부터 시청앞광장에 이르는 포장도로는 누웠거나 올방자를 튼 롱성자들이 립추의 여지도 없이 꽉 차있다. 적게 잡아 천여장은 될것 같은 이불포대기와 모포들이 여기저기에 무둑무둑 쌓여있는것으로 보아 부상자들과 로약자들이 마가을추위속에서도 포대기를 깔고 이불이며 모포를 덮는 호사를 거절하고 맨 포장도로우에 눕거나 앉아서 밤을 새운 모양이였다. 바구니며 광주리, 흰김이 서려오르는 바께쯔를 안거나 든 수백명의 녀학생들과 아낙네들이 아침식사를 나누어주고있다. 인도에는 이른아침인데도 백발의 늙은이, 로파, 중년의 아낙네와 양복차림의 사나이, 소년소녀, 아직 소학교 문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했을 어린애들··· 줄잡아 만여의 시민아이들이 늘어서서 자기네 살붙이를 소리쳐 부르기도 하고 웃음지은 얼굴로 격려의 웨침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다가는 그 누구인가의 선창에 따라 주먹을 내두르며 노래를 불렀다.

하지는 차거운 전률이 등골을 줄달음쳐흐르는것을 느꼈다. 지난날 미국의 지배를 받아야 할 약자의 숙명을 지닌, 지지리도 가난하고 거기에다 죽음을 별로 대수로와하지 않는 우둔한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저들을 어떻게 해야 사령부앞에서 쫓아버릴수 있겠는가? 서울중심가에 땅크를 끌어들여 수만의 인명을 짓뭉개버릴수 없지 않는가? 그러지 않아도 서울의 통신사들과 방송들, 어제와 오늘의 석간, 조간신문들은 미군사령부앞에서 단행된 시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이러한 대규모의 항쟁이 폭발한것은 지난 2년간 미군의 무지막지한 군사통치의 후과라고 통렬하게 비난했다. 맥아더사령부의 엄격한 통제하에 들어있지 않다면 도꾜와 지어 오끼나와의 군용방송까지 서울의 통신사들에서 날린 이 소식과 론평을 온 세계를 향해 대대적으로 전했을것이다.

자기들에게 감히 항거해나선 시위자들의 웨침이며 노래소리를 주걱턱을 일그러뜨리고 들으며 어찌할바를 몰라 푹신푹신한 주단우를 오가고있는데 문뜩 손기척소리도 없이 씨, 아이, 씨, (미중앙정보국) 남조선지부의 정치과장 노불이 마치 제집에 들어오듯 버젓이 사령관실에 들어섰다. 그는 자리에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무겁게 드리운 붉은 창가림의 한쪽을 들치고 롱성자들을 내려다봤다. 하지는 이때에야 감히 사령부앞에서 수만의 시민이 소란스러운 롱성을 벌릴 잡도리를 하는것도 알아내지 못한 분풀이의 상대자가 제발로 찾아왔다는것을 깨달은듯 정보일군들에 대한 평소의 조심성을 잊고 한마디 던졌다.

《거기서도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것을 알지 못했소?》

《무엇이 있으리라는것은 알았지만 놈들은 란동개시시간을 극비에 붙인것 같습니다. 이런 큰 규모의 란동을 우리도 모르게 어떻게 조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령관각하도 나도 허헌을 좌익의 주도자로 내세운것을 공산주의자들의 영상을 개선하기 위한 술책으로만 생각했는데 그런것 같지 않습니다. 그 령감태기가 주도자로 나선후 화해할수 없을것 같던 좌익진영의 여러 정당을 단결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허헌을 잘못 알고있었던것 같습니다. 허헌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있는지 그것은 알수 없지만 그는 종래의 남조선란동자들과는 다른 특이한 능력을 갖고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사령부앞에서 벌어지고있는 란동을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미처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던 하지는 드센 주먹으로 정수리를 얻어맞은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기와 상대해 싸우게 된 대상이 고작해서 변호사의 퇴물이며 정치엔 문외한이라고들 하던 바로 그 허헌이란 말인가?

《로씨야인들이 배후조종을 하고있을것이요! 나는 그 허헌이란자를 이 방에서 한번 만난적이 있소. 내가 불렀다는것을 알면서도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입에서는 마늘냄새인지 그 코린내가 나는 김치냄새인지 역스러운 냄새를 풍기며 이 사령관실에 들어왔댔소. 사령관도 몰라보는 고약한 놈이였단 말이요. 그래도 그자를 회유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생활상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온 남조선을 폭압의 란무장으로, 기아지대로 만든 당신이 무엇때문에 적선을 베풀려고 하는가? 주겠으면 인민위원회를 다시 내올 권리를 달라, 시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 이런 말을 하는것이 아니겠소. 그자는 그때에도 분수없는 반항아였소.》

하지는 허헌을 진작 없애버리지 못한것을 후회했다.

《조종을 받든 주동적으로 조직했든 그자가 미국을 반대해나선 이상 그대로 둘수는 없소.》

하지가 끝이 없을듯싶은 넉두리를 하며 사령관실을 오가는데 정보기관요원이 사진기를 두개나 목에 걸고 방에 들어섰다. 노불의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였다.

노불은 치렁치렁하게 드리운 창가림을 얼마간 들어올리고는 대여섯대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촬영을 하게 했다. 그중에는 순남이를 손수레에 눕혀가지고 밀고나온 조순옥이도 들어있었다.

노불은 쏘파에 엉뎅이를 붙이고 앉아 담배연기를 날리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령관각하의 마음은 알만하지만 시위를 조직한 솜씨로 봐서 종전과 같은 탄압을 하는것만으로는 부족할것 같습니다. 철저하고도 면밀한 대책을 세워서 뿌리를 뽑아버리지 않으면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큰 위험이 조성될것 같습니다. 유엔에서 조선문제토의를 앞두고 미군철거를 주장하는 대시위를 미군사령부앞에서 단행한것을 보면 상대가 간단치 않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지는 사령부앞에서 벌어지고있는 《란동》이 유엔에 상정될 조선문제토의에 영향을 주게 되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그 볼품없는 옷주제에 검은테안경을 걸었던 령감태기가 워싱톤까지 소란스럽게 만들수 있다는것이 아닌가? 국무장관 마샬, 이제 곧 국방장관으로 발탁되리라는 웨드마이어, 그들은 길들이기 어려운 짐승의 무리와 같은 조선인들에게 시달리고있는 이 《오끼나와의 영웅》따위는 백명이라도 수치스러운 패자의 구렁텅이에 던져넣을수 있는 인간들이다.

하지는 겨드랑이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고이는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앞에 앉아있는 노불에게 해결방도를 묻고싶지는 않았다. 노불은 조선사람들만이 아니라 미국병사와 장교들, 지어 자기도 감시의 대상으로 삼고있을것이였다.

하지는 자기가 거느리고있는 두뇌진에 의거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