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1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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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사나운 하늬바람에 갈가리 찢어진 구름장이 동남방으로 날려가고있었다. 벌써 허옇게 색이 바랜 늦가을의 저녁해가 빈민촌의 마지막빛까지 걷어안고 숨죽인지 오랜 시커먼 굴뚝너머로 떨어져내리고있다. 처마를 맞대고 비비적거리는 빈민촌의 하모니카집이며 공동수도칸에 모여든 아낙네들의 얼굴들, 골목에서 뛰여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도 희망의 빛이란 찾아보기 어려웠다.

외태머리처녀가 총총히 걸음을 옮기고있는 실골목도 절망의 빛이 짙게 배여있었으며 그의 신발에 묻어나는 구질구질한 흙발도 마냥 시커멓기만 했다. 처녀는 고삭은 함석지붕을 떠인 외짝문안에 들어서서 안방과 건넌방사이의 간마루에 올라섰다. 건넌방의 미닫이앞에 서서 가난이 지지리도 내밴 차림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또랑또랑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소.》

웅글은 목소리가 미닫이안에서 새나왔다. 허헌의 음성이였다. 처녀는 안방에 들어가 야음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을 색갈이 짙은 저고리에 검은 통바지를 입고 간마루에 나와섰다. 쪼아박힌듯한 오목눈에 꼭 다문 조그마한 입, 오똑한 코··· 첫눈에 씨알이 박힌 다기찬 성미라는것이 알리는 처녀였다. 이름은 조순옥, 영등포방직공장 지하조직책임자였다.

허헌이 이 집에 몸을 붙이게 된것은 이 빈민촌의 녀성들과 련계가 깊은 류영준이 조순옥을 보증한데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이 보증을 마동삼이 적극 찬성해나선탓이였다. 마동삼과 조순옥은 서로 사랑하는 한쌍의 청춘남녀였다.

허헌은 두루마기자락을 날리며 순옥의 뒤모습을 놓치지 않을만한 거리를 두고 실골목을 빠져나갔다. 뻐스형마차는 김치독이 그득히 들어찬 옹기점 뒤마당에 서있었다. 말이 코김을 불지 않으면 마차가 마당안에 있다는것을 알수 없을만큼 벌써 밤장막이 내리덮였다. 조순옥은 뻐스형마차곁에 이르러 허헌을 돌아보며 말했다.

《선생님말씀대로 7시까지 락원(고급료정)에 대라고 했습니다.》

《고맙소.》

《몇시에 돌아와야 합니까?》

《통금(통행금지)전에는 돌아와야 할테니 9시에는 떠나게 될거요. 락원에는 연무관(무술훈련장)의 젊은이들이 나와있기로 되여있으니 임자네는 그사이에 좀 쉬오. 련일 나때문에 밤을 새워서 안됐소.》

허헌이 로동자들의 건강을 걱정하는것도 무리가 아니였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매일과 같이 영등포방직공장 로동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때로는 뻐스형마차로 때로는 승용차, 지어는 화물자동차적재함에 올려쌓은 물건짝 틈새에 끼여 여기저기 장소를 옮겨가면서 남조선좌익정당지도자들과 협상을 진행해서 마침내 반미구국전선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허헌은 협상을 진행할 때마다 장군님께서 일깨워주신 조선혁명가들의 사명을 이야기하군 했는데 지금까지 반목질시하면서 권력을 다투던 좌익당 대표자들은 무당파 량심인으로 알려진 허헌의 그 말을 듣고 치졸하고 협애했던 지난날의 자기들의 행동이며 사고를 심심히 뉘우쳤다. 허헌은 령도자의 사상과 사색의 높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오늘부터 앞으로 전개할 반미구국전선의 투쟁을 놓고 론의하기로 되여있었다.

순옥이는 뻐스형마차의 마부까지 여라문명의 장정들을 허헌의 주위에 모이게 했다.

《오늘 밤엔 달도 없어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거예요. 그래 수건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목에 감는것이 좋겠어요.》

이렇게 말한 처녀는 노래하듯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선생님은 우리 보고 쉬라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수 없어요. 우리는 조직으로부터 선생님을 보호할 책임을 졌어요. 우리의 목숨이 붙어있는한 선생님에게 불상사가 있게 해서는 절대로 안돼요. 락원에 도착해서도 우리는 임무를 수행해야 해요. 그럼 떠나자요.》

장정들은 허헌을 옹위하듯 에워싸고 뻐스형마차에 올라탔다.

허헌은 차돌처럼 단단하게 여문 순옥의 성미에 다시한번 혀를 찼다. 광복직후 공장에 찾아온 대학생한테서 투쟁의 철리를 깨달은 처녀, 불과 두해사이에 영등포방직과 같은 수백명이 망라된 지하조직을 통솔하는 이런 처녀가 태여났는데 어떻게 되여 남로당이 쇠퇴해가는지 모를 일이였다.

종로네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돌아 승용차들이 겨우 엇갈릴수 있는 삼청동, 운현궁에 이르는 좁은 길에 뻐스형마차는 들어섰다. 《락원》과 같은 고급료정이 어째서 실골목을 거쳐서야 들어갈수 있는, 화신백화점 한옆의 우중충한 그늘안에 서있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어떻든 그 료정은 골목을 앞에 두고 현란한 자태를 자랑하고있었다. 이런 으슥한 구석에 들어박혀있는것으로 해서 한몫을 보고있는지도 모른다.

허헌은 뻐스형마차에서 내려 영등포방직공장의 건장한 로동자들의 옹위를 받으며 실골목을 걸어 료정의 현관앞에까지 갔다. 허헌의 옆에서 걷던 조순옥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는 방문으로 나오지 마시고 화신백화점쪽의 우측 창문을 리용하셔요. 창턱은 높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창문밖에 있겠습니다. 마차는 화신백화점옆의 골목밖에 세워두기로 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도움을 받을수 없는 경우에는 마차를 향해 가세요. 마차에는 우리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순옥의 치밀한 대책에 그저 놀랄수밖에 없었다. 이날의 모임장소를 알려준것이 점심전이였는데 그사이에 회의장을 돌아본 모양이였다. 현관안에 들어선 허헌은 접대원의 역할을 하는 연무관청년이 안내하는대로 아래층의 구석방으로 갔다. 복도끝에서 꺾어들어간 유측방이여서 10여명의 대표들이 모여앉기엔 비좁지 않겠는가 근심했는데 접대원명색의 청년이 열어주는 문안에 들어서니 삿자리 스무나문장은 실히 깔려있을 넓은 방이 나졌다. 반미구국전선에 망라된 각당 대표들은 이미 회합장에 와있었다. 때마침 뒤늦은 대표들까지 도착하여 모임은 곧 시작되였다.

지금까지 몇차례의 회합에서 그렇게 한것처럼 이날의 모임도 허헌이 사회하게 되였다. 대표들이 굳이 권해서 상석이라고 해야 할 자리에 옮겨앉은 허헌은 개회를 선언하며 간단한 연설을 했다.

《우리가 이미 결성을 본 반미구국전선은 오래동안 남조선좌익력량의 단합을 념원해온 여러분들의 거대한 노력의 결과에 이루어진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조직을 무었다고 해도 그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헛일을 한것으로 될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구국전선의 위력을 보여주게 될 투쟁문제를 의논하게 됩니다. 미제침략자들의 간악한 책동과 남조선이 처한 정세를 십분 고려한데 기초해서 좋은 말씀들을 기탄없이 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날 모임의 중요성을 알고있어 회의가 시작되기전부터 긴장한 표정이던 대표들이 정작 개회를 선언하자 입을 열지 못했다. 옆에 앉은 남로당의 2인자인 리현상은 자기네 당이 독판을 치는것 같은 인상을 줄것 같아 자중하는 빛이였으며 다른 대표들은 남로당의 말을 들어본 후에 저희들의 생각을 이야기하려는것 같았다.

남로당대표의 한사람인 갱핏한 몸에 얼굴이 해사한 중년사나이가 날카로운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일제시기 몇년간 감옥살이를 한것으로 허헌이 알고있는 리혁이란 사람이였다. 지금까지 하는 일없이 지내기는 했지만 통일전선부장이라고 해서 대표로 선출되여 모임에 참가한 사람이다.

리혁은 원쑤놈들을 마주대하고있기라도 한듯이 격분에 찬 목소리로 주먹을 내두르며 열변을 토했다.

···남조선혁명의 주도적당인 남로당은 이번 투쟁에서도 응당 선봉적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남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파렴치한 침략책동을 감행하는 미제국주의자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전투력이 높고 조직력이 강한 대규모공장, 기업소의 로동계급을 선두로 하여 파업과 대중적인 가두시위, 폭력적인 적기관습격을 단행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혁명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사전을 전개해야 할 때이다.···

구국전선을 조직한 리유같은것은 전혀 념두에 두지 않은듯싶은 리혁의 좌경적인 발언을 들은 허헌은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다른 대표들이 그의 발언을 남로당의 견해로 받아들일수도 있었던것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게 번져지는 경우 오늘의 회합에서 그 무슨 합의를 달성할수 없는것은 말할것 없고 몇번이나 어려운 고비를 넘어 마침내 탄생을 보게 된 구국전선은 명칭만 남은 빈껍데기와 같은 조직이 될수 있었다. 리혁이 내놓은 방안인 규모가 큰 파업과 시위, 적기관습격과 같은 폭력투쟁은 남로당의 독점물과 같은 투쟁방식이였다. 좌익에 속한 다른 당들은 남로당의 이런 투쟁을 비판적으로 대해왔으며 그런 투쟁을 할래야 할수 없기도 했다. 리혁도 이것을 알고있어 남로당의 선봉적역할이니 대규모공장, 기업소 로동계급의 결사적인 투쟁이니 하는 말을 한것 같다. 그러나 리현상은 온 얼굴이 뿌잇한 회색안개속에 잠긴듯싶은 근심이 낀 모색이였다. 리혁은 당지도층과의 토의도 없이 자기가 속한 분파의 견해를 말한게 틀림없었다.

허헌은 가까이에 앉아있는 백남운의 얼굴을 돌아봤다. 그의 얼굴에도 실망의 빛이 짙게 어려있었다. 오늘의 모임을 어떻게 이끌어가는가에 따라 남조선좌익의 단합이 유지될수도 있고 사분오렬될수도 있다는것을 허헌은 순간에 감촉했다. 그는 자기의 립장을 대표들에게 알려주지 않을수 없었다.

《통일전선부장의 이야기가운데 남로당이 주도적당이라느니, 선봉적역할을 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이 들어있는데 이것은 오늘 회합의 성격을 잘못 리해한데서 온 발언이라고 봅니다. 오늘의 이 모임에 참가한 여러분은 각당의 대표의 자격으로 이 회합에 참가하고있는것이 아니라 구국전선의 대표자로 모임에 참가하고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발언도 어느 특정된 당이나 조직의 견해를 내놓을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국전선이 어떤 투쟁을 전개해야 하겠는가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반미구국전선의 활동목적을 미제침략자들의 남조선강점을 반대하고 단독괴뢰정부수립을 파탄시키는데 두어야 한다는데 대해서 이미 합의를 보았습니다. 앞으로 발언을 하시는 대표들은 이 점에 특히 류의하면서 구체적인 방도를 제기해주기 바랍니다.》

도두룩한 이마밑의 눈, 코, 입이 꼭꼭 들어박힌 백남운의 얼굴에서는 실망의 빛이 사라지고 그 무엇을 진지하게 사색하는 표정이 깃들었다. 허헌은 북조선에서 쏘련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쏘련측의 성명이 발표되는것과 때를 같이해서 미군을 몰아내기 위한 일대 대중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그가 평양을 떠나기 전에 그를 접견해주신 장군님께서는 미국이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시킨 그때에 쏘련정부는 북조선주둔 쏘련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성명을 발표할것이라고 하시면서 이 기회를 리용해서 남조선에서 미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광범하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하시였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형태의 반미투쟁을 전개해야 단합된 좌익력량의 위력을 보여주면서 미군을 철거시키기 위한 투쟁을 대대적으로 벌릴수 있겠는가? 그 방법과 형태는 어떤것이여야 하겠는가? 허헌이 아직 찾아내지 못한 문제는 이것이였다.

리혁은 자기의 주장을 고집해나섰다.

《미제놈들은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끌고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놈들은 저희들의 손탁에서 놀고있는 소위 유엔성원국들을 리용해 조선을 예속시킬 음흉한 목적을 추구하고있습니다. 이런 긴박한 정세하에서 우리는 어떤 투쟁을 전개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민족이 또다시 식민지노예살이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이 마당에서 결사적인 투쟁을 단행해야 할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현정세는 동요와 주저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피의 투쟁이 있을뿐입니다!》

전후를 가릴수 없을만큼 흥분한 그의 해사한 얼굴은 창백해지기까지 했다.

그의 말은 분명히 남로당의 좌경적인 투쟁에 회의적이며 비판적인 태도를 품고있는 백남운을 비롯한 좌익당 대표들에 대한 비판이였다. 허헌은 또다시 백남운에게 시선을 보내기는 했지만 좀전과 같은 불안과 위구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백남운은 리혁의 말을 숫제 무시해버린 따스한 인정미가 잔잔히 흐르는 표정을 짓고있었던것이다.

미국이 저희들의 지배하에 있는 나라들을 동원하여 급기야 조선문제를 유엔의 의제로 결정을 내린것은 며칠전의 일이다. 조선문제가 언제쯤 토의되겠는지는 알수 없지만 일단 의제로 되였으니 가까운 앞날에 그 무슨 《토의》라는것이 진행될것이다. 그러니 쏘련군의 철수성명도 곧 있을수 있었다. 일이 여간만 다급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힘겹게 탄생시킨 반미구국전선을 위험에 빠뜨릴수는 없었으며 남조선인민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도 못하면서 막대한 희생만 입게 될 좌경적인 투쟁을 전개할수도 없었다.

《미제침략자들과 투쟁해야 한다는것은 옳지만 어떤 투쟁을 전개하는것이 가장 효과적이겠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미군을 철거시키기 위한 대중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미군을 철거시켜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미군은 부당하게 남조선을 강점했으며 우리 나라의 모든 민족적불행은 미군의 남조선강점에 근원을 두고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구국전선을 발족시키는 취지문에 미군의 강점을 반대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조문을 명기한것으로 소인은 알고있습니다. 둘째로, 미군철거를 요구하는 투쟁은 구국전선에 망라된 각 당이 자기 당의 성격에 맞게 각이한 투쟁을 진행할수 있는 여지가 있기때문입니다.》

평시에는 말을 더듬는 늘변이지만 일단 법정에 나서면 일제의 검사, 판사들을 궁지에 몰아넣던 그때처럼 허헌은 가끔 왼손을 들군 하면서 달변으로 론리정연하게 이야기해나갔다. 그는 백남운이 위원장을 대행하는 근로인민당 당원들이 교단과 가두, 집회장에서 미군철거투쟁을 전개했을 때 어떤 영향을 줄수 있는가를 례를 들어가며 말했다.

《일견 살 걱정, 먹을 걱정이 없어보이는 학자들과 회사원들이 투쟁에 나서면 지금까지 정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사람들도 미군철거가 더는 뒤로 미룰수 없는 절박한 문제라는것을 깨닫게 될것입니다. 내 말은 남조선인민모두가 반미투쟁에 떨쳐나서게 해야 한다는것입니다.》

허헌은 저로서도 뜻밖인 긴 연설을 한것으로 해서 입안이 말라들었다. 앞상에 놓인 차잔을 들어 입안을 추겼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각 당의 성격에 맞는 투쟁을 한다고 해서 산발적인 규모가 적은 싸움을 하자는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구국전선을 조직한 의의도 없을뿐아니라 미제놈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겨줄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단합된 좌익력량의 위력을 보여주면서 미군철거를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하자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대표 여러분의 기탄없는 발언이 있기를 바랍니다.》

백남운, 최근에 와서 접촉이 빈번한 리현상까지 사뭇 놀란 눈길로 허헌을 쳐다봤다. 애국자들을 변호하는 법정이라면 몰라도 오늘의 모임과 같이 까다롭고 심중한 회합을 이렇게도 능숙하게 사회할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였다.

허헌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대표들은 생각에 잠겨있을뿐 조리있는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뜻깊고 폭넓은 투쟁을 생각해본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단편적인 의견을 말하는 대표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허헌의 요구를 충족시킬수 있는 답변이 못되였다. 허헌은 오늘의 회합을 다시 가질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실망한 빛을 구태여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대표들에게 말했다.

《반미구국전선이 태여난 이상 투쟁방법, 투쟁형태도 달라져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구국전선은 미군을 철거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정확한 투쟁목표, 투쟁방법과 형태를 사전에 예견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은 항쟁은 실패를 면할수 없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허헌의 말은 평양을 떠나기 전에 장군님께서 하신 말씀의 반복이였다. 반미구국전선이 조직되면 큰당, 작은 당 할것없이 모두 미군철거를 요구해서 한결같이 떨쳐나서야 한다고 그이께서는 가르치시였다. 그이의 이 가르치심이 구현된 투쟁방법을 찾아보려고 허헌은 그사이에 얼마나 모색을 거듭했던가. 얼핏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법인지 어떤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기껏 머리에 떠올랐던 생각을 또다시 부정했다. 리혁의 독선적이며 좌경적인 발언은 뜻밖에도 자기가 지금까지 생각해온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확신을 품게 했다. 대표들속에서도 신통한 방안이 제기되지 않았다. 회의를 다시 여는 한이 있어도 최선의 투쟁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허헌은 생각했다.

《우리가 시작을 떼려는 반미투쟁은 전민적인 투쟁으로 되여야 합니다. 그런데 나자신을 포함해서 대표 여러분도 이런 싸움을 깊이 생각한것 같지 않습니다. 최상의 투쟁방식을 찾기 위해 오늘의 이 회합을 사흘간 휴회하겠습니다. 그사이 우리모두 생각을 깊이 합시다.》

허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있는것 같아 회합장에서 나오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허헌은 다음날 최선의 투쟁방식을 찾으려고 리현상과 종일토록 론의했지만 만족할만한 방안을 찾아내지 못했다. 오늘 아침 조반을 물린뒤에도 조급한 마음을 안고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뒤울안에 나가 잠시 거닐양으로 방을 나섰다. 울안이라고 해야 두어뙈기의 남새밭이 있는 조그마한 공지였다. 간마루에서 디딤돌을 짚고 울안에 내려선 허헌은 검푸른 잎이 마가을 해빛을 걸탐스럽게 빨아들이며 번들거리는 무우밭 한가운데서 조순옥과 남동생 순남이가 이마를 맞대다싶이 하고 마주앉아있는것을 보았다. 눈이며 입이 쪼아박힌듯해서인지 반듯한 이마며 오똑한 코가 눈에 띄게 방정해서인지 여간만 다기차보이지 않는 조순옥의 얼굴이 해빛을 머금은 아지랑이에 감싸인듯 부드럽게 보였다. 동생을 마주보는 그의 얼굴은 사랑에 넘쳐있었으며 행복스러워보이기만 했다. 깐지고 오돌차기만한 성미인줄 알았던 순옥에게서 이렇듯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표정을 발견하게 된 허헌의 마음은 여간만 유쾌하지 않았다.

《로동은 이 세상에서 에, 에, 지일, 지일, 에.》

순남이는 손에 쥔 책을 들여다보며 더듬거리면서 읽고있었다.

《얘두, 참 지일이 뭐냐? 호호···》

조순옥은 뽑아놓은 무우옆에 앉아 푸른 잎을 따내서 광주리에 담다말고 대굴대굴 굴듯이 허리를 꼬부리고 웃었다.

《제일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하지 않던.》

웃음을 참기 어려워하며 이렇게 말한 순옥은 애써 정색을 지었다.

《내가 외울테니 따라 읽어봐.》

순옥이는 노래하는듯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동생의 손에 들려있는 책의 내용을 뜬금으로 외웠다.

《로동은 이 세상에서 제일 신성하다.》

순남이는 책을 내려다보지는 않고 웃음띤 누이의 얼굴을 행복한 눈길로 바라보며 되뇌였다.

《로동자는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받아야 한다.》

누이가 외우는 말을 이번에도 반복하고난 순남이가 의연히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순옥에게 물었다.

《누이, 병삼이가 그러는데 로동자는 꼴치래. 내가 제일이라고 하니까 천치라는거야. 꼴치니까 학교두 못가구 배속에서 꼬르륵소리가 난다는거야. 제일이면 왜 거지라는 말을 듣겠느냐는거야.》

《그건 병삼이가 몰라서 그래.》

순옥이는 무우무지속에서 그중 단맛이 날듯싶은것을 하나 골라서 껍질을 벗겨 쥐여주면서 동생을 납득시킬수 있는 그럴듯한 말을 찾는듯 잠시 말없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동생이 무우를 절반쯤 씹어삼켰을 때 순옥이는 그 노래하는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책을 다 공부하게 되면 너도 로동자가 제일이라는것을 알게 돼. 난 석달에 그 책을 다 따루외웠는데 넌 공부를 시작해서 한달이 넘는데 이제 겨우 몇장을 공부했니?》

순옥이는 동생의 손에서 수첩장 크기만한 그닥 두텁지 않은 책을 달래서 책장을 번졌다.

《겨우 다섯장을 공부했어. 아버지두 로동자였구 누이두 로동자구 병삼이의 맏형님 병일아저씨두 로동자인데 로동자가 세상에서 제일이라는것을 알고싶지 않니?》

분명히 동생을 나무라는 말을 하고있는데 목소리는 말할것 없고 얼굴에도 순남이를 귀해하는 상냥한 빛이 어려있었다.

《너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나니?》

실한 무우 한개를 게눈감추듯한 순남이는 누이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어리둥절한 기색이였다. 란숙한 과일을 련상케 하는 오누이의 자별한 관계에도 감동을 받았지만 순옥의 다심하고 부드러우며 세심한 마음씨에 취해버린 허헌은 간마루턱에 걸터앉아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알지 않구. 사진 있잖아. 아버지가 징용갈 때 생각이 나. 어머니는 울었지. 난 어떻게 했더라.》

《넌 인사를 드렸어. 동네사람들은 어린게 용타구 칭찬을 하시구. 아버님은 돌아올 때까지 어머님에게 근심을 끼치지 말고 앓지도 말라고 하셨어. 그런데 아버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못하고있어.》

마가을 태양에 건듯 구름이 낀듯 순옥의 얼굴에 한순간 그늘이 졌다. 그러나 그는 곧 밝고 부드러운 웃음을 되살려가지고 뒤말을 계속했다. 순남이가 공부를 잘해서 방금 손에 쥐고있던 책을 리해하게 되면 아버지가 왜 돌아오지 못했으며 왜 지금 하루에 두끼도 변변히 먹지 못하게 됐는지를 알게 된다고 그는 말했다.

《미국놈들도 왜놈들하고 같애. 로동자가 이 세상에서 제일이고 로동은 신성한데 미군도 로동자들을 사람으로 치지도 않고 천시하는 자본가군대거든.》

자기네 일가를 빈궁과 불행의 나락속에 떠밀어넣은 침략자들을 어떻게 웃음지은 살뜰한 표정을 짓고 이야기할수 있는지 허헌은 리해하기 어려웠다. 순옥이네의 령락과정을 허헌은 류영준과 마동삼한테 들어서 알고있었다.

부지런하고 눈썰미있는 목수인 아버지가 이악하게 노력을 해서 집안사람들에게 밥술이나 떨구지 않고 먹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목수일솜씨를 탐낸 일제놈들이 그를 징용으로, 향방도 알수 없는 먼곳으로 끌고가자 일가는 빈궁의 밑바닥으로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조순옥은 학교를 그만두고 방직공장의 살인적인 로동속에 뛰여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광복은 이 일가에 더 큰 불행을 안아왔다. 일제놈들은 세식구가 목숨을 붙이고 살던 공장을 파괴하고 달아났다. 그래도 자치위원회가 공장을 관리운영할 때는 얼마간의 천을 생산하여 하루 세끼 밥을 먹을수는 있었다. 말로는 도저히 그 곤궁상을 표현할수 없는 지금의 기아생활이 시작된것은 공장자치위원회가 인민위원회의 지시를 받는다고 하여 미제놈들이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그때부터였다. 그런데다 미군사령부는 《적산》이라고 해서 공장을 몰수해버렸다. 천수백명의 종업원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대군속에 휘말려들었다. ···

조순옥이 동생의 손에 다시 쥐여주며 공부를 해야 한다고 타이르는 그 소책자에는 남조선의 로농대중이 기아의 나락속에 굴러떨어진 원인이 알기 쉽게 해설되여있는 모양이였다.

《로동자가 제일인 세상이 정말 오나? 그땐 나두 공부를 할수 있구?···》

《온다는데두. 그래서 우리가 싸우고있지 않니.》

동생이 자기의 말을 믿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어조로 순옥이는 말했다.

《나도 누이가 왜 싸우는지 알아. 그렇지만 미국놈들은 총을 가지고있는데 어떻게 하나? 누이랑, 병삼이 형님이랑 싸워두 이기지 못하문 난 공부를 못하지 않아.》

순옥의 말이 미덥지 못하거나 정녕 공부를 못하게 될가봐 근심이 되여 하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어리광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허헌은 간마루턱에서 일어나 헛기침을 하며 의좋은 오누이에게 다가갔다. 지지리도 가난하고 불행한 이 집에서 뜻밖에 알게 된 그들의 행복에 뭣인가 자기도 보탬을 주고싶었던것이다.

다가오는 허헌을 본 순옥은 무우잎을 따던 식칼을 광주리안에 넣고 오금을 펴며 일어섰다. 순남이도 몸을 일으키는데 얼굴에는 누이의 부드럽고 자심한 사랑을 즐기던 웃음이 아직도 얼마간 어려있었다. 허헌은 자기부터 오금을 꺾고앉으며 오누이를 두팔로 그러안듯 해가지고 량옆에 앉혔다. 순남의 손에 들려있는 손때묻은 소책자를 손에 들고 몇장 번져보았다. 자본주의사회의 불합리성을 알기 쉽게 해설한 책이였다. 광복직후에 대학생이 공장에 나와 운영했다는 야학이나 독서회의 교재로 리용하던 책인 모양이였다.

《순남이는 로동하는 사람이 제일 존경받는 세상이 오지 않을가봐 걱정하는데 그런 세상은 반드시 온다. 북조선은 벌써 그런 세상으로 되였다.》

누이에게 응석을 떨던 란만한 웃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순남이의 얼굴에는 엄엄한 할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진지한 빛이 어려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을수 있겠는가. 할아버지가 건넌방에 들기 전부터 집에 어떤 사람이 들었는가 하는것을 알려고 해서도 안되며 밖에 나가서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더욱 안된다는것을 누이한테 여러차례 다짐받은 순남이였다. 그런데다 엄엄해보이는 늙은 할아버지가 집에 몸을 붙인 후에는 빈민촌에서 날파람있고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 형님들이 자기네 집을 밤낮으로 지킨다는것을 순남이는 알고있었다. 얼마나 큰일을 하는 높은 선생님이면 빈민촌이 온통 떨쳐나 지켜주고 뻐스형마차로 모시고 다니겠는가. 바로 그 범접하기 어려운 선생님인듯싶던 할아버지가 누이의 말이 옳다고 하는것이다.

《북조선에서는 로동자들이 공장의 주인이 되였다. 로동계급을 나라의 맏아들이라고 한다. 로동자들의 아들딸들이 대학생이 돼서 새로 선 종합대학에서 공부를 하고있다. 통일이 되면 남조선도 북조선처럼 로동자의 아들딸들이 중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될것이다. 평양에 가서 종합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대학생도 생기게 될것이다. 그래 순남이 생각엔 어떠냐? 평양에 가서 대학생이 되고싶은 생각이 없냐?》

선망으로 해서 불타는듯싶은 까만 눈동자며 흥분으로 해서 벌거우리하게 상기된 오돌찬 얼굴을 허헌은 부드러운 눈길로 이윽히 들여다봤다.

《그렇게 되자면 공부를 해야 한다. 누이는 힘든 일을 하면서 석달에 그 책을 다 암송했는데 순남이는 한달에 몇페지? 그것도 제일이라는 제자를 몰라서 지일이 뭐냐? 제일을 지일이라고 하는 학생이 평양에 가서 대학생이 될수야 없지 않니. 허, 허, 허···》

허헌은 순남이의 등을 다독이며 오랜만에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두 석달에 따루욀래요. 할아버지, 이제 보라요! 내 따루외지 않나.》

《나도 순남이가 그렇게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남이에겐 그 책이 좀 어려울수 있지만 모르는것은 누나에게 물어보면 되지.》

허헌은 몸을 일으키며 무엇이라고 사례의 말을 하려는듯싶은 순옥이를 웃음이 비낀 눈길로 내려다봤다.

《나는 오늘 순옥이한테서 참으로 좋은 측면을 발견했소. 그것은 사랑할줄 안다는것이요. 사랑할줄 아는 처녀가 투쟁의 정당성을 확신하고있다는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오. 나는 얼마전에 영명한 스승의 가르치심을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께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해서 위대한 사상을 제시하고계셨소.》

허헌의 가슴속에서 초가을 해빛이 눈부시던 례성강가에서 체험한 희열과 흥분이 설렜다. 장군님의 존함을 들면서 이야기하면 순옥의 감동은 더없이 클것이며 그이의 심원한 사상을 더욱 깊이 리해하게 될것이지만 허헌은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 자기의 신분을 지금은 로출시키지 말아야 했다.

조급하게 사색을 이어가던 머리가 한결 거뿐해진 흥그러운 심정으로 허헌은 자기의 방으로 돌아왔다. 점심후에 지난밤을 모대기며 새우다싶이 한 잠을 봉창하려고 잠시 자리에 누워있었다. 미닫이밖의 안채쪽에서 순옥이 어머니의 지청구소리가 들려와 허헌은 눈을 떴다.

《열두살이면 이젠 헴이 들 나이인데 왜 이렇게 에미의 속을 썩이니? 값을 후하게 줄테니 청피무우를 갖다달라구 한다고 네입으로 말하지 않았니. 계집애는 늘 밖에 나가 살지, 넌 책을 들고 시간가는줄을 모르지. 너도 저녁거리가 떨어졌다는것을 알지 않니?

《이제 간다는데두요. 조금만 더 공부하면 돼요.》

어머니의 독촉을 안타까와하는 순남의 목소리가 안방에서 들려왔다.

《이제 간다는게 뭐냐? 이렇게 놔두면 무우가 말라서 근수가 떨어지지 않니. 얼른 갔다와서 공부를 해라. 책이야 근수가 떨어지는것도 아니잖니. 어머니의 속을 그만 태우구 이젠 일어나거라.》

《조금만 더 공부하면 된다잖아요. 대학생이 되자면 난 공부를 해야 해요.》

《너 이제 뭐라고 했니? 대학생? 끼니도 에우지 못하는 집에서 소학도 아니구 대학을 다녀? 네 누이년이 또 바람을 불어넣었구나.》

곤궁한 살림에 치여서 악에 받치고 성미가 거칠어진 순옥이 어머니의 눈물에 젖은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이 에미의 속을 이렇게 썩이겠니?》

허헌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까지 몇번 그렇게 한것처럼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순남이의 꿈을 지켜주고싶었다. 미닫이를 열고 순옥이 어머니를 불러 쌀 둬말 살수 있는 돈을 내주었다.

《이것으로 낟알을 사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나한테도 이 집에서 먹는것과 똑같은 음식을 주십시오. 점심도 따로 끓이느라고 하지 말고.》

빈민촌사람들은 요즘처럼 해가 짧아졌을 때는 대체로 아침저녁 두끼로 허기진 배를 달래군 했다. 순옥이네도 두끼로 연명했다. 허헌에게만은 미리 들여놓은 식비가 있어 점심상을 차려주군 했다.

순옥이 어머니는 자기 손에 쥐여준 돈을 내려다보다 기겁을 해서 검은테안경을 건 손님을 쳐다봤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한테서 돈을 받는다고 순옥이년이 앙탈인데 이러시면 안됩니다. 순옥이가 알면 야단을 또 하겠는데 무우를 팔면 낟알을 바꾸어올수 있으니 걱정마십시오.》

《무우 한짐으로 낟알을 바꾸면 얼마나 바꾸겠습니까? 방세로 치고 받으십시오. 순남이는 공부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앞날을 생각해야 할 자라는 아이인데 공부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건넌방할아버지와 어머니사이에 오가는 말을 듣고있었던 모양인 순남이가 미닫이를 열고 꾸벅 절을 했다. 소년의 얼굴에서는 기쁨과 고마움이 한껏 빛나고있었다.

석양빛이 사위여가는 이날 늦은 오후였다. 아직도 아퀴짓지 못한 사색을 쫓으며 뒤울안을 거닐던 허헌이 방에 들어와 잠시 쉬고있는데 안방에서 두런거리는 사나이의 나직한 말소리가 들렸다. 허헌이 이 집에 몸을 붙인후 찾아오는 이웃도 없고 경비를 서는 로동자들도 토방밑에 와서 순옥의 지시를 받고 돌아서는것이 보통인데 누가 왔는지 모를 일이였다. 간마루를 건너오는 발자욱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제가 왔습니다.》

마동삼의 말소리가 미닫이밖에서 들렸다.

《자넨가? 들어오게.》

마동삼은 미닫이를 열고 방안에 들어섰다. 그의 손에 순옥이 어머니에게 주었던 지전장이 들려있었다. 그는 손에 든 돈을 방바닥에 놓으며 말했다.

《선생님에게 무슨 돈이 있겠다고 자꾸 내놓습니까? 있다면 비상시 써야 할것이겠는데 그걸 내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얼마간 내놨으니 이 집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마동삼은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허헌에게 물었다.

《오늘 밤에 김규식선생을 만날수 있을것 같은데 시간을 낼수 있겠습니까?》

허헌은 좌익력량의 행동통일을 이룩할수 있다는 전망이 보인 때부터 어떻게 해서든 김규식과 마주앉을 기회를 마련해보려고 애써왔다. 김규식이 감시를 받고있으며 전화가 도청당하고있을것은 뻔한 일이여서 원쑤놈들의 눈에 띄지 않게 련계를 맺어야 할것인데 허헌은 그런 길을 갖고있지 못했다. 그래 할수 없이 마동삼을 통해 성시백에게 부탁했다. 그 부탁이 오늘에 와서야 실현될수 있게 된 모양이다.

《지금은 맞추어놓은 시간이 없네.》

《그럼 밤 8시에 제가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자동차를 갖고올테니 여기 사람들은 동원시키지 마십시오.》

이렇게 되여 김규식과의 상봉은 삼청장에서 멀지 않은 운현궁부근의 퇴락한 기와집에서 이루어졌다. 허헌은 김규식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우선 미군사령부에서 배후조종하는 《좌우합작》에 어째서 자기를 끌어들였는가고 점잖게 따지고들었다.

당황할줄 알았던 김규식은 조금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서 정치란 원래 뒤가 더 깊은 법이니 일이 성사된 다음에 말하려고 했다고 했다.

김규식을 만나려고 한것이 그 무슨 화풀이를 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던것은 아닌것만큼 허헌은 미군사령부에서 배후조종하고 리승만이 강박을 들이대는 《좌우합작》과 같은 일에 앞으로는 일체 자기를 개입시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오금을 박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허헌은 김규식을 민족자주를 위한 보람찬 위업에 여생을 바치게 하고싶었다. 아직 입밖에 내기 어려운 일이였지만 쏘련군이 머지 않은 앞날에 북조선에서 철수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평양의 노력에 의해 민족대단합을 이룩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든 때 남조선의 량심적인 정치인들은 마땅히 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서야 한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김규식은 진정이 담긴 허헌의 말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것이였다. 아직 검은 빛이 날지 않은 눈이 무거운 생각으로 해서 더욱 검게 보이기는 했지만 얼굴에 비낀 기색은 허헌의 말을 숫제 무시해버린 온후한 학자의 표정을 유지하고있을뿐이였다. 마침내 김규식은 북조선에서 쏘련군이 철수한다는것은 도저히 믿을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미쏘량국은 저희들의 국익으로부터 출발해서 조선을 분렬시켰는데 어떻게 쏘련이 조선을 통일국가로 만들 생각을 할수 있겠소?》

김규식은 장죽을 빨며 여담을 하듯이 수백년래의 쏘련(혁명전에는 제정로씨야)의 령토확장정책을 띠염띠염 이야기했다.

《내정에서는 혁명적인 전환이 있었지만 로씨야의 대외정책은 사실 오늘까지도 큰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합네다. 조선은 로씨야가 남쪽으로 령토를 팽창하는데서 관문과 같은 위치에 놓여있지 않습네까? 이런 땅에 발을 붙이는데 성공했는데 그 사람들이 무엇때문에 군대를 철수시키겠습네까?》

김규식은 허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기로 작정한게 틀림없었다. 30여년간 뼈저린 실패와 좌절을 수없이 체험하며 약육강식의 법칙이 가장 가혹하게 작용하는 령역이 곧 정계라고 생각하게 된 김규식은 허헌의 말을 믿을수 없었던것이다.

허헌은 회의적인 인간으로 되여버린 김규식을 가련하게 여겼으며 그가 앞으로 민족을 위해 그 무슨 큰일을 할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기가 어려웠다.

《난 우사의 의심이 섭섭하오. 이 허헌이란 사람이 그렇게 허망한 늙은이 같소?!》

허헌은 끝내 노여움을 보이고야말았다.

《극인의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을 말씀하고계신다는거웨다. 현하 조선은 념원이나 희망이 용납될수 있는 고장이 아니웨다. 쏘련은 최근에도 려순이나 중장철도같은 크지 않은 리익을 얻는 대가로 세계의 최대의 동맹자로 될수 있는 중국당을 저버렸는데 이런 쏘련이 저희네 군대를 북조선에서 철수시킨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믿을수 있겠소?》

《일어날수 없는 일을 일어나게 하는 비범한 정치가가 있을수 있지 않소? 난 평양측의 노력에 의해 쏘련군이 철수한다는 말을 들으면 남조선에서도 미군을 철수시킬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말할줄 알았소. 섭섭하오.》

《이런 문제는 확실한 근거를 쥔 다음에 일을 도모해야 할것이요. 믿을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얼굴을 붉힐것 없이 우리 좋은 낯으로 헤여집시다.》

허헌은 김규식에 대한 환멸을 안고 한강다리를 다시 건넜다.

허헌은 괴로운 생각에 짓눌려 빈민촌의 질적거리는 실골목을 꿰여나갔다.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있는지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 걸었다.

《여기 잠간 계십시오. 제가 먼저 가보고 오겠습니다.》

마동삼이 이런 말을 했을 때에야 허헌은 얼굴을 들었다. 순옥의 집이 분명한 거뭇한 형체인 외짝문안에서 불빛이 얼른거리고 여러 사람들이 오고가는게 어렴풋이 보였다. 밤에는 말할것도 없고 낮에도 빈집처럼 사람들의 래왕이 적은 집에 무엇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찾아들었는가. 되돌아온 마동삼이 허헌에게 짧은 말을 한마디 했다.

《순남이가 다리를 상했습니다.》

무우짐을 지고가다 다리목을 삐지 않았으면 길에서 넘어져 상처쯤 입었으리라고 허헌은 생각했다. 그런데 마동삼의 얼굴기색은 자못 심각하고 목소리도 심상치 않은 그 무엇을 느끼게 했다.

《많이 상했나?》

《미국놈의 자동차에 치여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허헌은 앞으로 내짚으려던 걸음을 문뜩 멈추었다.

《다리가 부러지다니 왜? 무우짐을 지고가는것을 내눈으로 봤는데···》

무지막지하게 조선사람을 마구 깔아뭉개는 미국놈들이기는 하지만 무우짐을 지고가는 소년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분지를수는 없지 않은가.

《리병남선생도 와계시고 류영준위원장도 와있으니 이제 가면 자세한것을 알수 있을겁니다.》

마동삼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앞에 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정말 외짝문안에 들어서는 허헌을 리병남이 토방에서 내려서며 맞이했다. 허헌과 리병남이 인사의 말을 나누는 말소리를 듣고 류영준이 급한 걸음으로 안방에서 나왔다. 그는 너무나 억이 차고 기막혀 말을 더듬으며 순남이가 일생 불구의 신세를 면할수 없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우를 판 돈을 주머니속에 넣고 순남이는 집에 돌아오고있었다. 너무나 허기져 눈앞이 어질거렸지만 저녁거리를 걱정하던 어머니를 생각해 전차도 타지 않고 한강다리를 향해 걸었다. 서울역전의 번잡한 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입안에 술을 쏟아넣으며 찦차를 몰고오던 미국놈이 배를 그러안고 비칠거리며 걸어오는 소년의 모습이 우습강스럽게 여겨졌던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안주감으로 씹던 쵸콜레트를 던졌다. 순남이는 발앞에 떨어진 쵸콜레트를 주어서 자기를 모욕한자들을 뒤쫓아가며 온 힘을 다해 내던졌다. 뒤따라 자동차를 전속으로 몰고오던 미군장교놈이 저희들의 《호의》에 반항해나선 조선소년에게 차를 들이몰았다. 순남이는 날쌔게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한다리를 미처 빼지 못했다. 자동차는 다리를 짓뭉개며 타고넘었다.···

방안에서 순옥의 애절한 울부짖음소리가 튀여나오고있었다. 가슴을 쥐여뜯으며 원쑤를 절규하는 목소리, 동생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너무나도 억울하고 통분하고 절통하여 원쑤를 저주할 말을 찾지 못해 몸부림을 치는듯한 날카로운 음성··· 살뜰하고도 부드러우며 행복한 눈매로 동생을 마주보며 밝게 웃던 순옥의 얼굴이 지금 어떻게 변했겠는지 허헌은 상상할수도 없었다. 문뜩 온후한 학자의 품위있는 모습으로 변하던 김규식의 얼굴이 눈앞에 비껴들었다. 미제침략자들을 절규할 말을 찾지 못해 몸부림치며 원쑤를 갚겠다는 조순옥이, 아직도 미국에 의거할 생각인 김규식, 누가 더 강점군의 본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있는가? 광복후에야 투쟁의 철리를 깨달은 나어린 녀공 조순옥이 더 정확하게 깨닫고있다는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데도 김규식이 남조선정계의 최고의 지성을 소유한 정객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허헌은 김규식을 이 자리에 끌어다 앉혀놓고 조순옥의 웨침을 듣게 하고싶었다.

《다리를 상했으면 수술을 받게 해야지 여기에 눕혀두면 어떻게 하오?》

허헌이 리병남, 류영준을 마주보며 물었다.

《리박사선생도 그렇게 할것을 권하는데 순옥이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말을 듣지 않다니 왜?》

《그 미군장교놈에게 기어이 사죄를 받아내겠다는겁니다.》

《서울에 미군장교가 얼마나 많다구 그놈을 찾아내겠소?》

《행인들이 격분해서 그 장교놈의 자동차를 멈춰세워가지구 몇글자 써놓고 가게 했습니다. 순남이는 동통으로 해서 정신을 잃으면서도 이 종이쪼각만은 쥐고있었구.···》

류영준이 치마끈끝에 돌돌 말아넣었던것을 허비여내서 허헌에게 내주었다. 허헌은 그것을 받아들고 방안에 들어가 등불밑에서 조심스럽게 폈다. 검붉은 피와 새까만 땀에 아직도 눅눅하게 젖어있는 수첩에서 뜯어낸 손바닥만한 종이장···

허헌은 미국놈들의 모욕에 항거한 조선소년을 치여죽일 잡도리를 하고 자동차를 내몬 미군장교를 둘러싸고 격분해서 웨치며 주먹을 내두르는 소란스러운 노성이 들리는것 같았으며 증오로 해서 일그러진 얼굴들이 눈앞에 보이는것 같았다.

순남이는 어떻게 되여 전신에 퍼져가는 참을길 없는 아픔으로 의식을 잃으면서도 이 자그마한 수첩장을 움켜쥐고있었을가? 언제나 헌털뱅이를 걸치고 채전농사를 짓고 남새짐을 지고 시내에 들어가군 하던 소년이 사죄를 받아낸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을 요구하는 기상이 얼마나 존귀한것인지 알고있어 이 종이장을 쥐고있었을가? 도저히 그럴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순남이는 의식이 흐려지는 그 순간에도 하나만은 잊지 않고있었을것이다. 미국놈들은 원쑤다. 아버지를 끌고간 왜놈들과 같은 원쑤다. 이런 놈들한테 업심을 받아서는 안된다. 복수해야 한다. ···사죄를 받아내겠다고 다짐하는 순옥이도 물론 민족의 존엄을 걸고 이런 결심을 한것은 아닐것이다. 자기네를 기아의 빈궁속에 밀어넣고 사랑하는 남동생의 그닥지 않은 자존심을 짓뭉개버리려고 자동차를 몰고 달려든 미군장교를 용서할수 없을뿐일것이다. 그러나 허기진 배를 안고있으면서도 쵸콜레트를 주어서 되던진 순남의 그 기개는 얼마나 장한것인가. 남동생이 당한 모욕, 조선사람을 내버린 고양이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미군장교의 만행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순옥이의 결심은 얼마나 훌륭한것인가! 조선의 정치인이라면 바로 이런 기개와 결심을 지지하고 발양케 해야 할것이 아닌가.

눈을 아프게 찌르는 피와 땀에 젖은 종이쪼각을 등이 꼿꼿해지는듯한 긴장을 느끼며 들여다보는 허헌의 눈앞에 미군장교의 비행을 절규하는 수백명 군중의 격노한 모습이 떠올랐다.

자동차번호, 군사칭호, 이름은 죤 버턴, 미군장교놈은 흥분하고 격노한 군중에게서 한시바삐 벗어나려고 비웃음을 띠운 빈정거리는 얼굴로 수첩장을 뜯어 몇글자 휘갈겼을것이다. 조선사람의 분격을 하찮게 여기는 그 장교놈의 오만성을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허헌의 머리에서 지난 며칠간 모색에 다쫓겨오던 초조와 불안이 세찬 바람에 흩날리고 눈앞이 탁 트이는것 같았다. 바로 이것이다!

열두살짜리 순남이로부터 시작해서 순옥의 강경한 태도, 분격한 수백명의 군중··· 미제침략군이 조선인민에게 어떤 불행을 들씌우고있는지 눈앞에 본 그때에는 민족적분격이 폭발한다. 조선인민은 민족적존엄에 손상을 입혔을 때 분연히 떨쳐난다. 돌이켜보면 일제를 반대하는 조선민족의 대중투쟁도 모두 민족적분격의 폭발로부터 시작됐던것이다.

허헌은 래일 회합에서 내놓을 명백한 해답을 찾았다.

그는 피와 땀에 젖은 수첩장을 조심스럽게 접어서 조끼주머니에 밀어넣었다. 그는 리병남과 류영준에게 순남이를 어떻게 해서든 오늘밤중으로 남대문부근의 큰 병원에 입원시켜 수술을 받게 해야 하겠다고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이 순옥이에게 고집을 버리라고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류영준의 부탁이였다. 리병남까지 이 빈민굴에 데려온것을 보면 조순옥의 고집이 여간만 완강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건 걱정마시오.》

허헌은 흔연히 승낙했다. 그는 두 의사를 뒤에 달고 순남이가 누워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누데기이불을 들치고 아직도 검붉은 피가 군데군데 엉켜붙은 소년의 새까맣고 가냘픈 손을 꼭 쥐였다. 순남이는 무거운 눈시울을 가까스로 들고 허헌의 얼굴을 말끄러미 마주봤다. 심한 출혈로 해서 정기를 잃었을줄 알았던 소년의 눈은 티없이 맑기만 했다.

순남이의 눈이 그렇게도 맑은것은 자기의 일신에 어떤 재난이 덮씌웠는지 알지 못하고있기때문일것이다. 순남이를 위로해줄 생각으로 안방으로 건너갔던 허헌은 비감에 젖은 말을 할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검붉은 피가 엉켜붙은 순남이의 조그마한 손을 찾아쥐고 힘주어 말했다.

《용타! 네가 수첩장을 끝까지 쥐고있은것은 대단한 일이다. 너는 앞으로 대학생이 될수 있다. 네가 대학생이 될수 있게 우리는 반드시 제구실을 하겠다!》

허헌의 이 말은 단순히 순남이를 격려하려고 한 말은 아니였다. 비록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라 하더라도 열두살 어린 나이에 민족적존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고 할수 있는 순남이와 같은 소년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누가 공부를 하겠는가. 희망과 기쁨으로 까만 눈동자를 빛내던 순남이가 눈시울을 내려감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고마와요. 할아버지.》

소년의 눈귀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먼지를 씻으며 굴러내렸다. 거지라는 말을 들으며 가는 곳마다에서 업수임을 받던 자기와 같은 로동자의 자식에게 그렇게도 희망찬 래일이 차례졌다고 생각하니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는 모양이였다.

《넌 우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내가 하라는대로 너는 꼭 해야 한다.》

허헌은 순옥이를 이끌고 자기의 방으로 건너왔다. 그는 지도일군의 존엄을 갖고 순남이를 미군사령부에서 머지 않은 한 병원에 입원시킬것과 래일은 아침부터 하루종일 시내에 들어가 있어야겠으니 수고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튿날 아침 허헌은 제일먼저 백남운을 찾아갔다. 광복전부터 가깝게 지내는터였지만 금천에서 하신 장군님의 말씀을 전해준 후부터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수 있는 친밀한 사이가 되였다. 허헌은 순남이가 의식을 잃으면서도 움켜쥐고있던 검붉은 피가 말라붙은 쪽지를 백남운에게 내보이면서 자기가 생각한 투쟁방안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검은때와 검붉은 피자욱으로 얼룩진 쪽지를 들여다보며 허헌의 말을 주의깊이 들은 백남운은 그가 생각해낸 투쟁방식, 구호··· 모두에 열렬한 찬의를 표시했다.

《미군 나가라!》

이번 투쟁에서 추켜들어야 할 구호는 바로 이것이여야 하며 반미구국전선에 망라된 남조선좌익은 바로 이 구호를 실현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허헌은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