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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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님께서는 마루바닥에 누운 아침빛을 밟으며 심중한 사색에 잠겨 집무실안을 오가고계셨다. 그이께서 이날 아침에 예견하였던 일정을 뒤로 미루고 이렇게도 심각한 생각에 잠기신것은 지금 집무탁에 놓여있는 한통의 문건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당의 해당 부서에서는 허헌이 금천에 도착했다는 보고와 함께 한통의 문건을 그이께 올렸다.

그 문건을 보신 장군님의 안색은 점차 심중해지셨다. 문건은 미국놈들의 교활한 책동인 《좌우합작》에 허헌이 말려들었다는것을 기본골자로 삼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서로 반목질시하고있는 남조선좌익을 단결시킬수 있는 인물로 허헌을 지목하고계셨는데 《좌우합작》에 말려들다니···

장군님께서는 허헌에 대한 견해를 다시한번 검토해보지 않을수 없으시였다. 그이께서 허헌의 부족점으로 인정하신것은 우선 정치적시야가 좁고 남조선과 같은 복잡한 정치정세를 타개할 혁명적전개력을 소유하지 못한것과 같은 문제들이였다. 우점으로 인정하신것은 광범한 남조선인민들의 신망을 얻고있으며 굴복을 모르는 결곡한 반제정신, 그 어떤 파벌도 배격하고 조선문제는 어디까지나 조선사람의 손으로 해결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청렴결백한 자주정신이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미제침략자들이 조작해내려는 제3세력에 발을 들여놓으려는것을 보면 혹시 정치적시야가 넓지 못한 허헌의 약점을 너무 가볍게 여긴것이 아닐가?

장군님께서는 마침내 결심을 내리시고 전화로 김책과 허정숙을 찾으시였다. 그들이 집무실에 들어서기전에 그이께서는 문건을 다시한번 보셨지만 번거로운 생각으로 해서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허정숙이 가벼운 걸음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아버님이 들어오셨소. 이번에도 선생님을 동무네 집에 류숙하게 할 생각이요. 그런데 미리 알아두어야 할 문제가 있소. 우리는 선생님과의 이번 상봉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있소. 우리는 남조선좌익을 단결시키는 사업에서 아버님이 주동적역할을 해줄것을 부탁할 생각이요.》

허정숙은 번민이 비낀 낯빛으로 눈길을 떨구고 앉아있다가 머리를 들었다.

《남조선좌익을 단결시키자면 정치적수완이 있어야겠는데 아버님은 사실상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장군님께서도 허헌이 이번에 《좌우합작》에 말려든것도 똑바른 전략전술을 가지고있지 못하였기때문이라고 생각하시였다.

《아버님은 남로당의 전략전술을 가지고는 남조선문제를 수습할수 없다고 생각하고계십니다. 아버님은 당의 전략전술을 권모술수로 알고계십니다. 먼저번에 평양에 들어오셨을 때 저와 좋지 않은 말이 오고간것도 주로 이때문이였습니다.》

《선생이 말하는 전략전술이란 남로당내의 실권파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애국적인 공산주의자도 함부로 배척하고 자기네 지도력을 과시하기 위해 큰 희생을 내면서 대중투쟁을 함부로 조직하는 독선적인 지도를 념두에 둔 말일거요.》

장군님께서는 앞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으며 미소를 띠운 안색으로 말씀하시였다.

허정숙은 장군님께서 자기의 의견을 참작해주셨으면 해서 간절히 말씀드렸다.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전략전술이라는것이 그런 뜻의 말인것은 사실이지만 아버님은 정말 남조선좌익을 단합시킬수 있는분이 아닙니다.》

김일성동지께서 뒤말을 계속하시려는데 김책이 여느때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장군님께서는 집무탁에 놓여있던 문건을 김책에게 주시였다.

《오늘 아침에 받은 문건입니다. 나는 그 문건을 본후에도 남조선좌익을 단결시키는 사업을 허헌선생에게 부탁할 생각입니다. 김책동무의 의견을 말해주시오.》

김책은 심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또다시 장군님의 뜻에 어긋난 일을 했다는것을 비로소 느낀 허정숙은 불안에 잠긴 눈으로 김책의 얼굴이며 장군님의 안색을 살폈다.

긴말을 하지 않는 성미그대로 김책은 장군님께 말씀드렸다.

《정치적시야가 좁다는것은 장군님께서 첫째로 꼽으신 선생의 부족점이 아닙니까. 남조선좌익력량의 단결이 현시기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가를 알게 되면 선생은 그 임무를 능히 수행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장군님의 결심을 지지합니다.》

《나는 이제 곧 평산에 나가서 허헌선생을 모셔오겠습니다. 먼저는 내가 늦게 와서 선생이 헛걸음을 하게 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모셔와야 합니다. 김책동무하고 선전부장은 선생을 납득시킬수 있게 설복할 준비를 잘해두는것이 좋겠습니다.》

허정숙은 아직도 파벌관계가 복잡하게 뒤엉켜있고 미제의 탄압이 가혹한 남조선좌익계를 아버지가 단합시킬수 있으리라는것을 도무지 믿을수 없는 모양이였다. 허정숙이 무슨 말을 할듯한 다급한 심정이라는것을 알았지만 김일성동지께서는 책임부관을 불러 곧 떠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시였다.

《허정숙동무는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인데 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이야기합시다.》

장군님께서는 허정숙을 눌러놓고 집무실을 나서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례성강기슭의 울퉁불퉁한 달구지길을 허헌과 함께 걷고계시였다. 쨍쨍한 가을빛이 골안에 가득차서 눈이 부신데 허헌이 입고있는 바지저고리만이 38°선을 넘나드는 사이에 어지러워져 한점의 그늘처럼 거밋해보였다. 김책이 평양을 떠나는 선생에게 새옷을 한벌 만들어드렸다고 했는데 어째선지 이번에도 철늦은 옷을 그대로 입고 북에 들어왔다. 장군님께서는 수난을 당하는 이 나라의 불행이 통털어 선생에게 덮씌운것 같아 가슴이 저리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벼이삭이며 조이삭, 풀이삭들이 여무는듯싶은 가을빛에 물든 밋밋한 둔덕을 둘러보시다 나직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먼저번 선생님을 서울에 그대로 나가게 한것은 내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제날자에 평양에 돌아오지 못했기때문입니다. 그때 나는 쓰딸린동지와 회담을 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가있었습니다. 내 방문이 비공식적이였고 목적하고 간 문제도 비밀에 붙여야 할 문제여서 김책동무는 내 행처를 말할수 없었습니다.》

허헌은 너무나도 예상밖의 말씀이여서 멈칫하며 장군님을 돌아보았다. 가을빛이 어린 그의 얼굴에 어줍은 자책이 스쳐지났다.

《이제 머지 않은 앞날에 북조선주둔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성명을 쏘련측에서 발표하게 됩니다. 물론 만주지방에서 아직도 전투가 계속되고있고 남조선에 미군이 있는 조건에서 쏘련군이 철수한다는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자면 한번은 반드시 결심해야 할 일이여서 우리는 미국이 남조선단독정부수립을 서두르고있는 이때 쏘련군의 철수를 요구하기로 했습니다.》

허헌은 가슴팍을 욱질린듯한 충격을 받은듯 흥분해 부르짖었다.

《그러니까 미군철수도 요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성명에는 그러한 조항이 담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이 쏘련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광대뼈가 두둑하고 입술이 두툼한 고집스러워보이는 허헌의 얼굴에서 흥분의 빛이 점차 사라졌다. 그 무슨 주장을 하듯 장군님께 말씀드렸다.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한것은 쏘미간의 전시협정에 의한것인데 쏘련이 북조선에서 주둔군을 철수시키겠다는것은 그 협정을 파기한다는것을 선언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미군이 남조선에 남아있겠다면 이건 협정위반으로 되지 않습니까?》

허헌은 법을 신성시하는 법조계인사의 사고를 아직도 버리지 못한 모양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밝게 웃는 안색으로 일깨워주듯 말씀하시였다.

《아무리 국제협정이라고 해도 그것이 자기 나라의 리익에 저촉될 때 그 협정을 리행하는 제국주의국가를 본 일이 있습니까?》

장군님께서는 38°선이 생겨나게 된 경위를 말씀해주시였다. 그것은 조선을 강점하기 위한 미국의 모략의 산물이다. 미군이 조선에 상륙하기전에 혁명적인민들의 전민항쟁이 폭발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을수 있다고 본 미국은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 조선을 동강내기로 했다. 쏘미가 조선을 량분하여 일본군국주의군대를 무장해제시키자는 제안을 내놓기로 한것이다. 미륙군성전략정책부에서 권모술수를 꾸몄으며 북위 38°선에 척자를 대고 금을 그은자는 일개 대좌에 지나지 않는 촬스 엣취 분스필이라는 정책과장이라고 한다. 이 모략은 곧 트루맨대통령의 비준을 받아 미륙군의 시행세칙으로 련합국에 통고되였으며 쏘련의 동의를 얻었다.···

《이런 음모적인 방법으로 남조선을 비법적으로 강점한 미군은 지난 두해사이에 남조선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남조선의 군사기지화를 다그쳐왔습니다. 미국이 남조선에 괴뢰정부를 조작해내려고 서두르는것은 제놈들의 강점을 합법화하기 위해섭니다.》

《그러니까 미국놈들은 남조선에 정부라는것을 세워서 주둔협정을 체결할 생각이라는 말씀이신데 어쨌든 이것은 쏘미량국간의 관계에 영향을 줄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허헌은 최근 쏘미량국의 대외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되고있는지 별로 관심을 둔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쏘련이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려고 미국과의 대결을 피하고있다고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어 장군님께서는 민족자체력량을 강화해야 한다는것을 납득시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시였다.

《물론 쏘련의 권위와 리익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조국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는 아닙니다. 민족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는 우리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남조선의 반제력량, 특히 좌익력량을 단결시키는것이 중요합니다.》

허헌은 장군님께서 좌익력량의 단결을 무엇보다 중시하고계신다는것을 알았다. 그도 남조선좌익의 분렬을 가슴아파했으며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보려고 노력을 해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이가 들지 않는 너무나 착잡한 문제여서 이제는 단념해버린터였다. 그러나 남조선좌익이 왜 단합하지 못하는지 그 속내를 장군님께 말씀드려야 할것 같아 평양에 들어왔었다. 물론 그가 38°선을 넘을 결심을 한것은 이 한가지 문제에 국한된것은 아니였다. 《좌우합작》과 관련해서도 그이의 가르치심을 꼭 받고싶었다.

《남조선에서 좌익을 단합시킨다는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상태에서는 남조선좌익을 단합시키기 어려울것 같습니다.》

거뭇하게 손때가 앉은 저고리앞섶을 만지작거리며 달구지길을 걷던 허헌이 입을 열었다. 괴로운 생각을 할 때 저고리앞섶을 만지는것이 그의 습관인 모양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저고리앞섶의 거뭇한 자욱이 착잡하고 고뇌에 찬 선생의 번뇌의 흔적인듯 하여 마음이 사뭇 아프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물으시였다.

《여러 사람이 우리를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하는데 선생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를 놓고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우리 민전에서 부위원장을 하는 류영준이란 녀자가 있습니다. 남조선녀맹위원장입니다. 이 녀자가 리왕조시기에 내인으로 뽑혀서 몇년간 궁중에서 생활한 일이 있습니다. 1920년대를 전후해서는 일시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것도 사실입니다. 신간회시절에는 부녀단체를 조직해가지고 나와 같이 사회운동도 했습니다. 그때 류영준은 부자집아이를 받아주고는 거기에서 나온 돈으로 쌀을 사들고 다니면서 가난한 집의 아이들도 받아주군 했는데 나를 찾아와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조선의 가난한 녀자들이 해산후에 사흘만이라도 미역국을 먹으면서 자리에 누워있게 하고싶은것이 자기의 소원이라고 말하군 했습니다. 류영준은 의술도 능하지만 이런 실질적문제를 들고 녀성운동을 시작해서 서울장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녀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위원장이란 사람은 8. 15후에 별의별 어중이떠중이들을 다 당에 끌어들이면서 류영준을 당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에 왕실에서 살던 사람까지 끌어들일수 없다는겁니다. 지금 남조선녀맹위원장으로, 민전부위원장으로 사업하고있는데 지금도 왕정파니, 민족개량주의자니, 개인병원을 가진 부르죠아지니 하고 시비질을 합니다. 그는 한때 좌익에 등을 돌려댈 생각까지 했습니다. 류영준이 이런 배척을 받고있으니 다른 좌익당 사람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겠습니까.》

허헌은 말에 열중한 나머지 울퉁불퉁한 달구지길에 발이 걸려 넘어질듯이 비칠거렸다. 장군님께서는 얼른 허헌의 팔을 잡아주시였다. 허헌은 류영준, 아니 그자신도 포함한 까닭없이 배척받고 수모를 당하고있는 수십, 수백명의 고민하는 사람들의 원한이 응어리처럼 가슴속에 맺혀있는듯 절규하듯이 부르짖었다.

그는 이어서 백남운의 경우를 말씀드렸다. 백남운은 려운형이 암살당한후 근로인민당 위원장대리의 직책에 있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광복직후에 저마다 공산당간판을 내걸고 권력싸움을 하는 파쟁군들을 보고 백남운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을 하지 않은것은 사실입니다. 서울대학교 하나만이라도 인재를 키워내는 대학으로 만들어볼 생각을 하고 당분간 정계를 외면하고 지냈습니다. 백남운은 그후 몽양(려운형)의 권고를 받고서야 인민당계에 발을 들여놨습니다. 그랬다고 해서 그를 정치성이 없는 비혁명적인 인테리라느니, 동요분자, 기회주의자라느니 하면서 배척을 합니다.》

허헌은 분개해서 팔을 내저으며 웨치듯이 말했다.

장군님의 가슴에 좀해서는 가셔버리기 어려울것 같은 짙은 그늘이 끼였다.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배척해가지고서야 어떻게 미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전민적인 투쟁을 전개할수 있겠는가. 도대체 류영준의 경력이 어떻고 백남운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류영준이 궁중내인이 된것이 제가 하고싶어 한 일이겠는가? 얼굴이 고우니 끌려갔지··· 또 평안도사람을 차별하던 리왕조이니 류영준은 내인이 됐어도 처음부터 종살이와 다름없는 허드레일이나 했을것이다. 궁중에 있었으면 대단한 신분이였을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은 천 한필에 팔려가는 노예와 같은것이다. 그가 왕정주의자가 아니라는것은 그후의 경력을 봐도 알수 있다. 어떻든 그는 서울시내의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고있으며 고학으로 의학공부를 한 녀의사이다. 인민들에 대한 영향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녀성을 배척할수 있는가··· 백남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학자는 지식을 가지고 혁명에 이바지해야 한다. 민족의 장래를 걸머질 인재를 키워내려고 한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비록 얼마간의 정견상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일제시기부터 식자들속에서 명망이 높은 백남운과 같은 학자를 배척하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도 류영준녀성에 대해서는 더러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류영준과 같은 녀성을 진짜배기애국자이구 조선의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녀성은 가난한 조선녀성들을 도와주는 과정에 공산주의사상에 접근했구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해서 공산주의의 진리성을 알게 되였기때문입니다.

백남운선생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수 있습니다. 선생은 사회경제학을 연구하는 과정에 좌익사상에 접근했을겁니다. 선생의 이 사상적경향성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더 중시하는것은 선생의 애국심입니다. 백남운선생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일제놈들이 날조해낸 정체론을 반대한 학자가 아닙니까. 일제강점하의 조선에서 이런 활동을 한다는것이 쉬운 일입니까. 학자는 학문을 가지고 혁명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어째서 백남운선생이 남조선좌익의 한 성원이 될수 없단 말입니까.》

장군님께서는 허헌을 부축하여 례성강가의 자갈밭에 내려서시였다. 일제의 어용사가들이 제창한 《정체론》이란 조선민족은 자체의 힘으로 력사를 발전시켜나갈수 없는 타률성이 강한 민족이란 황당무계한 반동적인 리론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제의 어용학자들이 이런 리론을 내놓은것은 저들의 조선강점으로 해서 정체되여있던 조선이 발전하게 되였다는 침략리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백남운은 저술활동과 교단에서 일제사가들이 제창하는 이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리론을 견결히 반대해나섰다.

장군님께서는 허헌과 함께 강변을 걸으며 말씀을 이어나가시였다.

《공산주의자란 어떤 사람인가? 인민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가장 강렬하게 지닌 사람을 우리는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맑스의 잉여가치학설이 공산주의운동의 출발점으로 되였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잉여가치설이 계급사회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해명한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구박받고 착취당하는 로동계급을 옹호하고 사랑한 맑스의 숭고한 인간애와 정신력이 없이 그 학설이 탄생할수 있었겠습니까? 민족해방투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수 있습니다. 제국주의는 그 본성적요구로부터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예속시키는것을 존재방식으로 한다는 그 학설도 인류의 재부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것은 이 지구상에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침략하는 제국주의자들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그 사상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하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말하자는것은 민족해방도 계급해방도 인간을 중시하는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것입니다. 특히 로선과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잊어버리고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유구한 세월 강물이 반반하게 씻어낸 너럭바위에 허헌을 부축해올려앉히고 자신께서도 그옆에 앉으시였다. 소리를 치며 흘러내리던 급류가 너럭바위밑에 밀려와 와류를 지으며 시퍼런 룡소를 이루었다. 장군님께서는 이 깊은 룡소와 같이 착잡한 생각에 시달려온 허헌의 마음을 깊은 사색의 세계에로 이끌어가시였다.

《우리는 공산당을 대중적정당인 로동당으로 발전시킬 때 빈궁과 억압, 천대와 불평등의 불합리성을 깨닫고 인민대중을 위해 싸울 결심을 한 사람은 누구나 당에 받아들였습니다. 민족적차별을 받아온 근로인테리를 당의 중요구성성분으로 삼을 결심을 하고 당마크에 붓을 그려넣게 한것도 이때문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정준택의 성분과 경력을 말씀하시며 일부 협애한 일군들이 인민정권의 계급적성격을 코에 걸고 그를 광산에 내려보낸것을 다시 소환해서 지금은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의 하나인 기획국을 책임진 국장으로 사업하게 했다고 하시였다.

《북이나 남이나 할것없이 지도적위치에 있는 사람은 특히 큰 도량을 가지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할뿐아니라 온 민족을 단결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단결이란 피가 흐르지 않는 유기체를 만들어내자는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열렬한 애국자만이 조선의 공산주의자로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헌은 불타는 선망의 눈길로 그이를 우러러보면서 소란스러운 강물소리를 짓누르며 울려퍼지는 장군님의 우렁우렁한 말씀을 넋을 잃고 들었다. 공산주의자라면 우선 쏘련과 만국의 로동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며 헤게모니쟁탈이니, 타도대상이니, 포섭대상이니, 동정자니 이런 말을 하는것으로 알고있던 허헌이였다. 그런데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애국과 단결, 사랑, 인간중심을 주장하신다. 허헌도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서들을 주의깊이 읽어보았다. 그들의 저서들을 읽을수록 그가 만나본 남조선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리념을 창시하고 발전시킨 사람들의 탐구와 열정의 바탕에 깔려있는 심원한 철리에서 벗어나 리념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곧 목적으로 삼고 티각태각하는듯이 생각되였다. 그것은 종교가 창시될 당시의 리념에서 벗어나 시정배들이 국가관리와 계급적리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속화시킨것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감을 주었다. 그런데 김일성동지의 말씀에서는 도무지 그런것을 느낄수 없었다. 그이한테서는 독자적인 사상을 창시한 창조자의 사색과 열정만이 느껴졌다. 공산주의자는 우선 자기 조국, 자기 민족, 자기 나라 인민을 열렬히 사랑해야 한다는 그 말씀만 해도 얼마나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

만일 장군님의 사상을 지침으로 삼고 좌익운동을 전개했더라면 미제가 남조선에 발을 붙일 시간을 주지 않았을것이며 좌익분렬은 말할것 없고 중간파, 일부 량심적인 민족주의세력과도 손을 잡고 반미투쟁을 전개할수 있었을것이다.

《류영준녀성에 대해서는 김정숙동무에게 이야기해서 고무하는 편지를 보내게 하겠습니다.》

허헌은 그이께서 친근하게 부르신분이 백두산의 녀장군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것을 곧 알수 있었다. 류영준이 김정숙녀사께서 보내신 고무의 편지를 받으면 얼마나 기뻐하고 얼마나 큰 힘을 얻을것인가!

《북조선녀성동맹을 대표해서 남조선녀성동맹에 편지를 보내는 형식을 취하는것이 더 좋을것입니다. 백남운선생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우리의 뜻을 전해주십시오. 하긴 앞으로 선생님이 남조선좌익을 단결시키는 사업을 하게 되면 최소한 백남운선생이 겪고있는 그런 고통은 없어질것입니다.》

허헌은 너무나 뜻밖의 말씀에 어리둥절해서 장군님의 정력에 넘친 얼굴을 마주봤다.

《이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남조선좌익계를 결속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신것 같은데···》

《선생님이 남조선좌익을 반목질시가 없는 하나의 혁명력량으로 단합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단결의 절박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느끼고계시지 않습니까?》

허헌은 저고리앞섶으로 손을 가져가며 긴숨을 내쉬였다.

《절박성을 느끼고있는것은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그런 큰일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민전의장단성원으로도 제구실을 못하고있는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복잡하게 뒤엉킨 좌익계를 단합시킬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이 어째서 남조선좌익을 단결시킬수 없단 말입니까? 선생님은 일제놈들의 가혹한 탄압속에서도 애국자들을 변호해주었구 반일사상을 견결히 지켜내서 남조선인민들의 존경을 받고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남조선좌익을 단결시키는 사업이 어렵다고 해도 감옥살이를 하면서 반일을 할 때보다 더 어렵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말씀을 끊고 허헌을 돌아보시였다. 허헌은 깊은 생각에 잠긴 괴로운 안색으로 그이의 말씀을 듣고있었다.

《선생님이 남조선좌익을 단합시키는 사업을 맡아야 한다고 우리가 주장하는것은 쏘련군이 북조선에서 철수하는 이 기회를 반드시 민족단합의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기때문입니다. 우리가 쏘련군의 철수를 요구한것은 전민족이 단합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의사에 따라 조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북조선은 하나의 정치적력량으로 이미 결속되여있으니 크게 문제될것이 없지만 남조선은 그런 상태에 있지 못하지 않습니까. 남조선애국력량을 단합시키자면 어느 계렬이 먼저 단결해야 하겠습니까. 좌익력량이 먼저 단결되여야 할것이 아닙니까. 이 사업을 선생님이 주관했으면 좋겠다는것이 우리의 견해입니다.》

허헌은 미흡한 자기를 장군님께서 지나칠만큼 믿어주신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이 뜨거워지고 그이께 깊이 머리를 숙이고싶은 심정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반목질시하면서 서로 배척하던 남조선좌익당들이 자기의 말을 듣겠는지 그것이 걱정되여 결심을 선뜻 내릴수 없었다. 그는 손으로 저고리앞섶을 또 만지기 시작했다.

장군님께서는 이 문제를 평양에 가서 아퀴짓기로 하시였다.

《이 문제는 평양에 가서 다시한번 이야기합시다. 그런데 내 선생님에게 한가지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김규식선생이 제창한 좌우합작에 응했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그 좌우합작이 어떤것인지 깊이 생각해보고 그런 결심을 했습니까?》

《내가 지난번 평양에 들어오면서 장군님께 말씀드리고저 한 문제의 하나가 그 문제였습니다. 나도 김규식이 많은 경우 미군정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는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민전의 비법화가 눈앞에 닥쳐왔구 만일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민전의 비법화를 앞당기는 사태가 발생할것 같아 일단 전제조건을 내걸고 응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김규식이 그렇게도 무력한 인간인줄은 몰랐습니다. 이번에 민전회관이 습격을 당하는것을 보고서야 김규식의 값을 알았습니다. 그래 떠나오기전에 김규식에게 당장 회관습격을 중지시키고 민전간부들을 석방하라고 항의를 하기는 했는데 그 요구조건이 별로 접수될것 같지는 않습니다.》

뒤에서 자갈을 밟는 발자욱소리가 들렸다. 책임부관이 뒤에 와서 언제쯤 들어오시겠는지 숙소사람들이 기다린다고 했다. 이를테면 빨리 들어와주셨으면 좋겠다는 뜻이였다. 아마도 례성강의 명산인 자라탕이라도 끓여놓고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선생님, 이젠 들어가보지 않겠습니까?》

그이께서 먼저 너럭바위에서 일어나시였다. 가을해빛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자갈을 밟으며 장군님께서는 허헌에게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선생님의 요구가 얼마쯤 실현될수도 있고 실현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자는것은 민전의 합법, 비합법이 지금에 와서는 큰 의의가 없을뿐아니라 좌우합작을 성사시킨다는것은 민전의 합법화와는 대비도 할수 없는 큰 정치적리익을 미국놈들에게 제공해준다는것입니다.》

장군님께서는 미국놈들이 《좌우합작》을 서두르는 까닭을 말씀하시였다.

《미국이 쏘련의 남하를 막는 군사요충지로 조선을 리용할 생각이라는것은 선생님도 알고있을겁니다. 미국은 아직 쏘련군철수에 대해 알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떻든 그들로서는 남조선만이라도 장기적으로 강점할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두는것이 안전할겁니다. 그래 남조선괴뢰정부를 수립해서 선생님이 말씀한 주둔협정을 체결하자는것이 현재의 미국의 대조선정책입니다. 그런데 정부라는것을 세우자면 민의를 대변한 정치세력이 있어야겠는데 남조선에는 그런것이 없습니다. 그래 김규식을 내세워 좌우합작을 해서 좌익, 중간, 우익의 제3세력이 단독정부수립을 찬성하는것처럼 내외에 선전하자는것이 미국의 음모입니다. 미국놈들은 허헌선생을 이 음모에 끌어넣은것입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밝은 웃음이 어린 장군님의 얼굴을 돌아보는 허헌의 눈에서는 고통스러운 자책이 몸부림쳤다.

《김규식이 그것을 알고 좌우합작에 나섰을가요?》

《물론 알았습니다. 미국측의 암시도 받았고 리승만의 요구도 들었다고 합니다. 김규식선생을 조종하고있는 버치의 검질긴 설복을 받고있는 선생이 그걸 모를수 없지 않습니까?》

격분한 허헌이 왼팔을 내두르며 무슨 말을 웨치려는듯 입가의 근육을 푸들푸들 떨었다.

《내 앞으로 다신 김규식을 대상하지 않겠습니다. 이번에 서울에 나가면 합작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좌우합작의 정체를 폭로하겠습니다.》

허헌은 말을 더듬으며 부르짖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심중한 안색으로 아무 말씀없이 허헌을 부축해 울퉁불퉁한 달구지길에 올라서게 하시였다.

《선생님의 심정은 리해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김규식선생도 미국의 의도를 알면서 합작을 주도해나선걸 보면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것 같습니다. 고민이 많아서인지 요즘 자주 발작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앞길을 찾지 못해 고민하는 선생을 낭떠러지에 떠밀어넣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김규식선생을 도와주는것이 옳다고 생각하고있습니다.》

《도와주다니, 그럼 장군님께서는 김규식같은 사람도 우리 조선에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계십니까?》

《우리는 김규식선생만이 아니라 김구선생과도 손을 잡을 결심을 했습니다. 오래동안 망명생활을 하면서 고생을 한 김구, 김규식선생들이 말년을 값있게 살게 하는것은 한 민족성원인 우리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김구, 김규식을 한 민족성원으로 생각하신단 말씀입니까?》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김구, 김규식선생을 돌려세운다는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조국을 잃은것으로 해서 장구한 기간 외국에서 고생을 한 선생들을 나라잃은 슬픔을 다같이 체험한 한 민족성원으로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고있습니다.》

《아―》

가벼운 탄성을 내지른 허헌은 얼굴을 돌리며 안경을 벗어들었다.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는 우선 사상적으로 적대되여서 서로 용납할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쑤지간이라고 허헌은 생각해왔다. 또 허헌자신도 일제의 탄압이 가혹한 광복전, 특히 3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량심적인 민족주의자들과 친교를 맺고 래왕을 한다고 하여 좌익으로부터 별의별 시비와 비방을 다 들었다. 그런데 자타가 공인하는 견결한 공산주의자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민족의 슬픔을 말씀하시며 동포애적감정을 지니고 김구, 김규식의 말년을 념려하신다. 이것은 령도자의 관용이나 박애의 사상으로는 해석할수 없는 뜨거운 동포애의 발현이 아니겠는가!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조선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조금전에 정력적으로 말씀하신 바로 그 웅심깊고 뜨거운, 가장 열렬한 민족애의 체현자는 장군님자신이 아니시겠는가!

허헌은 축축하게 젖어드는 눈을 비볐다. 뿌잇하게 흐려진 안경알을 닦고는 다시 귀에 걸었다. 흐드러지게 하얀 꽃이 구름처럼 피여난 메밀밭이 문득 눈앞에 펼쳐졌다. 쏟아져내리는 가을해빛에 눈이 부시고 강렬한 향기가 코밑을 간지럽힌다. 김규식의 말년이 저 메밀밭처럼 눈부시고 향기로우며 순결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며칠전에 합작에 응했다가 불과 10여일후에 반대성명을 낸다는것은 선생님을 위해서도 좋을것 같지 않습니다. 또 앞으로 두분이 손을 잡고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무엇때문에 미국놈의 롱간에 걸려들어서 싸우겠습니까. 김규식선생이 말년을 값있게 살기 위해서는 미국놈들에게 의거할것이 아니라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김규식선생을 대미의존사상에서 벗어나게 하자면 이번 기회에 좌우합작을 시도할것이 아니라 민족자주를 지향하는 련맹같은것을 조직하는 용단을 내려야 합니다.》

《김규식에게 민족자주를 위한 정치조직을 내오게 한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중간파, 우익계의 량심적인 인사들을 망라한 민족자주련맹같은것을 조직해서 미제의 괴뢰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강력한 제3세력을 편성하면 조선민족을 위해 얼마나 유익한 일을 하는것으로 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내 김규식에게 얼마간 영향을 줄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김규식의 눈을 틔워주어 매국이 아니라 애국의 길을 걷게 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접촉을 가졌으니 노력을 해보는것은 나쁠것 같지 않습니다만 선생님은 남조선좌익력량을 단결시키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남조선에 광범한 반제력량을 결속했다고 해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정녕 나같은 사람이 남조선좌익을 단결시킬수 있다고 믿고계십니까?》

허헌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안경속의 눈이며 관골이 두둑한 볼이며 튼튼해보이는 턱을 한껏 긴장시킨 모습으로 물었다.

《우리는 선생님보다 더 좋은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정색을 지은 빛으로 대답하시였다. 허헌은 육체적고통이라도 당하는듯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무거운 숨을 내쉬였다.

《나를 그렇게 높이 쳐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만 나는 사실 정치인으로서는 적합치 못한것 같습니다. 광복전에 신간회에 관여한것이나 광복직후에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것은 세상형편이 내게 정치인행세를 할수밖에 없게 한것입니다. 하나의 정치세력을 단결시키자면 장군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고견을 얼마쯤은 갖고있어야겠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8. 15전에도 그렇고 8. 15후에도 그렇고 나는 별로 정견이라는것이 없이 불의에 항거해왔을뿐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할 각오만 있으면 그 다음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선생님은 류영준녀성과 백남운선생에 대해서 얼마나 좋은 말씀을 했습니까. 인민을 위한 태도와 애국심을 놓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습니까. 분파적인 립장에서가 아니라 혁명과 인민에 대한 태도를 놓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서로 단결하면 아무리 간악한 적도 그것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 문제는 평양에 가서 구체적으로 의논하기로 하고 우선 점심부터 먹구봅시다. 숙소사람들이 저렇게 대문을 열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있지 않습니까.》

김일성동지와 허헌은 푸른 하늘에 들연을 내뻗친 산턱의 기와집대문앞에 이미 와있었다. 숙소에 근무하는 일군들이 새옷을 떨쳐입고 활짝 열어놓은 대문안에 늘어서서 그이께서 들어오시기를 기다리고있었다. 허헌은 남조선좌익단결이라는 너무나도 예상밖의 중임을 앞에 놓고 어쨌으면 좋을지 아직은 결심이 되여있지 않았지만 어떻든 자기가 갑자기 거인으로 성장한것만 같아 얼굴에 희벗한 웃음을 띠우고 팔을 내저으며 장군님과 함께 박수로 맞이해주는 숙소사람들앞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