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3

 

3

 

김규식은 의자등받이에 웃몸을 기댄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문뜩 몸을 일으키며 윤명현을 찾았다.

《내 자동차를 타구 빨리 인사동민전회관에 가보게.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것 같네. 만일 허헌씨가 인사동회관에 갇혀있으면 선생을 우리 집으로 모셔오게. 회관이 습격을 받고있으면 습격을 하는자들이 어느 계통인지 내 이름을 대고 알아가지고 오게.》

《민전회관이 습격을 받았습니까?》

《여러말 말구 어서 가보게.》

눈을 지르감고 의자등받이에 몸을 눕히는것으로 보아 김규식에게서 다른 말을 더 듣기는 어려울것이다. 윤명현은 방에서 뛰여나갔다.

삼청장에서 인사동민전회관까지는 5분안팎에 가닿을수 있는 내림받이 외통길이였다. 그런데 한시간이 지나도 윤명현은 돌아오지 않았다. 김규식이 오만가지 생각에 시달리며 장죽을 여라문번이나 갈아문 두시간쯤 지나서야 현관앞에서 자동차멎는 소리가 들렸다. 뒤미처 비명에 가까운 안해의 놀란 목소리, 복도를 달려가는 발자욱소리, 운전수, 하인들이 떠드는 소리··· 운전수와 안해의 부축을 받으며 온통 옷이 찢어지고 전신에 피칠갑을 한 윤명현이 비칠거리며 방안에 들어와 의자에 쓰러졌다. 김규식은 너무나 놀라 미국제 고급실내화를 미처 끌지도 못하며 윤명현앞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일인가?》

《선생님은 또 속았어요. 경찰이예요. 사복을 입은 경찰이예요. 서북청년단두 끼여있구···》

윤명현은 김규식의 이름을 대며 회관습격이 시작된 전말이며 습격에 참가하고있는 사람들이 어느 단체에 속한 사람들인가고 묻는 자기를 그 무슨 지휘처인듯한 야전용승용차가까이에 끌고가 뭇매를 안기는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몸을 피하려는 그를 뒤따라와 승용차의 유리창까지 박산내던 놈들의 만행이 너무도 분하고 억울해 꺽꺽 느껴울며 설분을 토했다.

《윤군은 그 사람들이 경찰이라는것을 어떻게 알았나?》

《차안에서 무선전화를 하는 말을 들었어요.》

《분명히 내가 보냈다는 말을 했겠지?》

《이렇게 매를 맞으면서 가만 있었겠어요. 지금의 이 사태를 하지사령관과 토의를 하기 위해 선생님이 나를 보냈다, 나는 립법의원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명함까지 보였는데 이놈이 아직 어느 세상에서 사는지도 모르는 미친놈이라고 하면서 안경을 잡아채서 멨다치는거예요.》

그러구보니 윤명현의 손에 유리알이 박산난 안경이 쥐여있었다. 증거물로 삼으려고 들고온것 같았다. 김규식의 얼마간 처진 량볼이며 시커먼 수미가 경련을 일으킨듯이 푸들푸들 떨었다. 그는 전화기앞으로 다가가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송수화기를 벗겨들고 303이란 수자를 돌렸다. 미군사령관과 직결되여있는 번호였다. 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사령관을 찾소. 죤 하지와 바꾸시오.》

《사령관각하는 지금 사무실에 없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사령관을 찾소. 사령관에게 련결시키라고 하지 않소.》

《사령관각하는 사무실에 안계십니다. 오늘은 일요일이 아닙니까.》

부관은 시끄러운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날은 분명 일요일이였다. 그렇지만 부관이 하지의 행처를 모를수 없는데 전화를 끊어버리다니?···

송수화기를 놓은 그는 복도에서 서성거리는 운전수에게 호령했다.

《사령부로 갈 준비를 하게. 자동차는 움직일수 있겠지? 차안에 유리쪼각이 널려있겠는데 하나도 주어내지 말구 그대로 두게.》

불안에 싸여 진정하라고 애원하는 안해에게 사령관이란 사람을 찾아가야겠으니 두루마기를 가져오라,장죽을 자동차에 내다실으라고 소리를 쳤다. 두자남짓한 긴 장죽의 한끝을 괴퍅한 하지의 주걱턱밑에 들이대고 담판을 할 생각인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군사령관이 들어있는 반도호텔의 현관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현관앞에 량다리를 벌리고 거만하게 뻗치고 서있는 헌병들이 앞을 막아 자기를 안내할자가 나타날 때까지 자동차에 앉아있을수밖에 없었다. 버치가 달려나왔다. 김규식은 결국 사령관에게 들이대려던 항의를 버치에게 퍼부어대며 민전회관을 습격한 경찰이 어떤 만행을 감행했는가 하는것을 박산난 차창유리며 차안에 널린 유리쪼각을 가리키며 항의를 들이대는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당신들은 왜 이렇게 무모하오? 왜 이렇게 오만하오? 민전을 합법화해야 한다는 나의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면 정면에서 거절을 할것이지 왜 민전회관을 습격하고 민전간부들을 체포하오? 당신들은 조선이란 이 땅덩어리를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되는 장난감으로 생각하는것이 아니요?》

이 말을 하는 순간 김규식의 눈앞에 정향명의 리지적인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그가 방금 버치의 얼굴에 뱉어버린 말은 분명히 정향명이 이야기한 말과 비슷했다. 미국은 자기 나라의 국익을 희생하면서 다른 나라를 결코 도와준적이 없는 리기적인 국가이다. 그렇지 않아도 큰 땅덩어리와 방대한 자원을 소유한것으로 해서 버르장머리없는 부자집자식같이 오만해진 미국은 제2차대전을 통해 국세가 더욱 팽창되여 약소국가 한두개를 짓뭉개는것쯤은 부자집자식이 장난감을 밟아내던지는것만큼도 여기지 않는다. 5억의 인구에 광대한 령토를 소유한 중국을 두고 미국이 어떠한 도박을 하고있는가, 미국사람이 남조선을 중국보다 더 신중하게 다룰것 같은가? 미국의 손아귀에 쥐여사는것을 숙명처럼 생각할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민족자체력량을 꾸릴 방도를 찾아야 한다.···

버치는 김규식의 말을 듣고 펄쩍 뛰며 자기들은 아직 민전의 비법화를 생각해본적이 없다느니, 남조선경찰이란 원래 패덕한, 불한당의 집단이여서 군정청에서도 골머리를 앓고있다느니, 남조선경찰의 야만적인 행동을 사죄하는 의미에서 김규식이 제기하는 민전의 합법화문제를 반드시 성사시키겠다느니 하면서 버치는 이미 발동을 건 자동차의 차창을 쥐고 연방 떠들어댔다. 그러나 장죽을 내뻗치고 앉아 담배연기를 내뿜는 김규식에게는 그의 말이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버치가 숨을 쉬느라고 잠시 말을 끊었을 때 역시 정향명의 이야기였던 좌익이 없는 《좌우합작》이란 있을수 없다고 말하고는 체포된 민전간부들을 즉시 석방하며 인사동회관습격을 당장 중지시키라고 거듭 요구하고나서 호텔앞에서 떠났다. 그는 운전수에게 정동으로 가자고 했다. 리왕조의 유적인 덕수궁뒤 정동에는 언더우드가 가끔 교인들앞에 나서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설교하는 교회가 있었다. 김규식의 귀국을 환영하는 크지 않은 모임도 바로 그 교회에서 진행되였다.

언더우드는 교회에 없었다. 혹시 감리교신자인 하지가 례배를 보러오지 않았겠는가 생각했는데 그의 모습도 찾을길이 없었다. 지금과 같은 시각에 하지가 례배를 보려고 왔으리라고 생각한것부터가 어리석은 생각이였다.

《동생은 어디에 갔나?》

김규식은 하인에게 물었다.

《그건 알수 없는뎁쇼. 오전에 례배를 끝내구 오후에도 여기에 계셨는데 혹시 사령부에 가시지 않았는지···》

김규식도 언더우드가 미군정청의 유력한 방조자라는것을 이제는 대체로 짐작하고있었다. 그러나 윤명현이 말하듯 미국의 대조선전략을 현지에서 집행하는 미국무성의 현지요원이나 정보부요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생을 조선에서 살다싶이 했으니 그의 조언이 필요해서 미군사령관이나 군정장관이 그를 자주 불러들일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원한경이 윤명현이 말하는 그러한 인물이라고 해도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하고있는 조건에서 그를 멀리할수는 없었다. 어떻든 미국의 영향하에 있는 남조선이니 그를 리용할 생각을 해야 할것이다. 만일 그가 종교인, 자선가의 명망을 턱에 걸고 미국의 대조선전략을 집행하고있다면 형님, 동생하면서 때로는 속심을 터놓기도 하던 지난날의 우정을 깨끗이 줴버리고 정치계의 랭철한 타산과 론리, 때로는 권모술수까지 써가며 그를 리용할 생각을 해야 할것이다. 사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사이는 그렇게 변해가고있었다. 그런줄 알면서 김규식이 쩍하면 언더우드를 찾아오는것은 영문학이나 종교상문제를 가지고 자신의 지성을 만족시킬 이야기상대자를 그의 주변에서는 찾기 어렵고 그가 아무리 미국무부나 정보부에 리용당하고있다고 해도 자기의 등에 칼을 박을만큼 사악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있기때문이였다.

그는 차머리를 돌리게 했다.

 

바로 이때 조선사람의 피땀을 짜내서 대기업을 일떠세우는데 성공한 일본의 신흥재벌 노구찌가 남대문앞에 보란듯이 세운 반도호텔을 통채로 차지한 미군사령부의 한 방에서는 미군사령관 죤 하지가 군정장관 러취, 사령관정치정보고문들인 베닝호프, 버치, 원한경, 사령부정보책임자 로빈손대령··· 비공식행각을 한 동아시아담당 미국무성 고위관리를 앞에 앉혀놓고 모의를 하고있었다. 국무성관리는 본국의 지시가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데 불만을 품고 짜증을 냈다. 마샬의 구상이 유럽에서는 성공하고있는데 어째서 조선에서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있는가? 그것은 사령관을 보좌하고있는 고문들이 무능한탓이라고 그는 비꼬아댔다.

《우리는 북조선의 김일성장군이 수일간이나 모스크바에 체류했으며 쓰딸린과 회담을 진행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회담했으며 어떤 합의에 도달했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북조선측이 지난 2년간에 달성한 성과로 보아 다음과 같은 두가지 문제를 론의했을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북조선공산주의자들이 상당한 정도로 정치경제적인 성과를 달성하는것을 목격한 쏘련이 중국에서와 같이 미국에 조선을 양보할 생각을 하지 않고 북조선에 쏘련군을 장기주둔시킬 그 어떤 협약을 준비했을수 있다는것입니다. 이것이 북조선까지 병탄할것을 목적한 우리의 대조선전략에 어떤 장애를 조성하겠는지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르지 않을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들이 론의했을수 있는 문제는 북조선을 조선의 민주기지로 선포한 북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남으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일종의 량해합의가 이루어졌을수 있습니다. 이 모든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미국의 대조선전략이 난관에 직면했다는것을 말해줍니다.》

고위관리는 응당 책임을 물어야 할 사령관이나 군정장관이 아니라 명상에 잠긴듯한 눈길로 맞은편 벽의 비단벽지의 무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있는 고문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군정장관이나 사령관보다도 고문의 직능을 맡고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대를 걸고있다는것을 고위관리의 눈길은 말해주고있었다.

할것이 남조선의 실권은 사실에 있어 사령관 하지나 군정장관이 아니라 고문명색의 세사람―베닝호프, 로빈손, 언더우드에게 장악되여있었다.

베닝호프는 태평양전쟁이 터지기전에는 일본의 도꾜, 요꼬하마, 만주의 봉천, 할빈의 령사를 력임한 이른바 동양에 정통한 인물로 인정받고있는놈이였으며 서울에 오기전에는 미국무성 극동부 차장, 중앙사무국 차관보자리에 앉아있던 국무성파견원이였다. 로빈손은 남조선에 거미줄처럼 늘여놓은 정보망을 통해 정계의 동향, 민심의 움직임, 미군을 포함한 그 많은 폭압기구의 리용에 이르기까지 남조선에 들어박힌 미중앙정보국 요원들과 협력해서 하지사령관에게 행동을 결정할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정보장교였다.

언더우드란자는 서울연희대학 학장, 정동례배당 목사로 세상에 알려져있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일제놈들이 조선사람의 피땀을 짜내서 남조선에 이루어놓은 방대한 《적산》을 손아귀에 거머쥔 적산관리처장일뿐아니라 국무성, 군부, 정보부에서 파견된 미국인들은 말할것 없고 미국에 붙어살 결심을 하고 고문자리에 올라붙은 리승만, 김성수계 친미친일분자들을 한손에 거머쥔 사령관수석고문의 책임을 지니고있는놈이였다. 이자는 미국의 대조선전략이 조선에 구현되고 집행되는 과정을 모색하고 감독하고있었다.

《당신들은 국무성의 각서를 받군 했으니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웨드마이어장령이 워싱톤에 와서 남조선에는 용단이 부족한 무능한자들이 틀고앉아있다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마샬국무장관에게 보고했습니다. 죠지 케난(미국의 정책기획본부 부장)은 쏘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조선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북조선까지 병탄할수 있는 강력한 남조선정부를 시급히 수립하라고 웨드마이어에게 대통령특사의 직권을 주어 파견하기까지 했는데 도대체 해놓은것이 뭣입니까?》

베닝호프와 언더우드가 고관의 추궁에 별로 송구해하는 빛도 없이 엇바꾸어가며 남조선의 실태를 이야기했다.

워싱톤에서는 조선문제가 전패국인 일본이나 도이췰란드와는 성격이 다르다는것을 잘 모르고있다. 북조선병탄도 남조선정부수립도 공산주의세력을 소멸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조선의 공산주의세력이 얼마나 뿌리가 깊고 광범한 민중의 지지를 받고있는지 본국에서는 아직 알지 못하고있는것 같다. 《관동》군과 대적한 북조선의 항일군이 공산군이라는것을 국무성에서도 알고있지 않는가···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장군을 전설적영웅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조금도 과장된 점이 없다. 일본에 남아있던 얼마안되는 공산주의자들의 대부분도 조선인이였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숭배자이다. 그러니 조선반도에 박혀있던 공산주의자들 대부분이 김일성숭배자들이라는것은 말할것도 없다. 우리는 지난 두해동안 공산주의자들을 청산하기 위해 그들이 단합하지 못하게 하면서 정체를 로출시킨자들을 가차없이 처형해왔다. 국무성에서는 북조선공산주의자들이 이제부터 남으로 세력을 확장할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두해전부터 북조선의 영향력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는 《공산란동분자》들의 청산도, 분렬리간에도 전력을 다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돌파구가 열렸다. 우리는 중간파로부터 좌익까지 북조선의 편에 서서 단합시킬수 있었던 지도적인물인 려운형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그의 동료이며 단합의 중심으로 될수 있는 두번째 인물인 허헌이 《좌우합작》에 호응해나섰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지금에도 남조선공산주의진영 상층부는 령도권문제를 놓고 암투를 계속하고있다.···

《이제야 우리가 의거할수 있는 기둥을 세울수 있는 터를 닦았다는 말인데 유엔총회가 시작되는 9월 세번째 화요일은 20일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시키겠다고 한지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시키기로 한것은 현지에 파견된 미국관리들이나 여기 모인 사람들을 가지고서는 조선문제를 해결할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때문입니다. 그래 20일어간에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지지할 확신성있는 정치세력을 만들어낼수 있습니까? 리승만은 미국에 충실한 미국국적을 가진 조선인이기때문에 그의 지지는 별로 효력이 없습니다. 조선에서도 국제사회계에서도 공인을 받을수 있는 인물을 내세워야 합니다. 마샬장관이 지시한대로 리승만에게 의거하되 민중의 환심을 살수 있는 제3세력이 있어야 합니다.》

워싱톤의 고위관리는 오금을 박듯이 따지고들었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버치가 통통한 몸을 곧추 세우며 얼른 말가운데 끼여들었다.

《김규식을 제외하고는 남조선에 그런 역할을 할 인물이 없습니다. 중간파정치세력을 하나 만들어낼 생각으로 그에게 중국에서의 국공합작 비슷한 좌우합작을 시작하게 했는데 시간이 급하다는 리유로 서툴게 행동해서 그의 노여움을 사고있습니다.》

참을성이란 꼬물만치도 없는 하지가 마치 병졸을 닦아세우듯이 버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 고문이요. 웨드마이어장군이 대통령각하의 특사로 래방했을 때 남조선에 아직도 공산주의단체가 합법적으로 존재하는것을 얼마나 놀라와했소? 당신은 좌우합작을 권고해놓고 민전을 비법화하는것은 미국정책의 공정성을 의심케 한다고 하는데 나는 김규식을 만난 자리에서도 좌익정당단체의 합법성을 인정하겠다고 말한 일은 없소. 어느 정도 좌익의 냄새가 나는 개별적인 인사들을 좌우합작에 망라시킬수 있다고 했을뿐이요.》

《김규식선생은 민전간부들의 석방과 인사동회관에 대한 습격을 중지하지 않으면 나를 포함한 그 누구와도 상면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원한경이 점잖은 목소리로 버치를 타일렀다.

《조선속담에 생일에 잘 먹으려고 이레를 굶겠는가, 이런 말이 있습니다. 허헌을 비롯해 두세사람을 낚자고 좌익계의 총련합체인 민전을 그대로 둘수는 없습니다. 민전을 좌우합작에 망라시키면 북조선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공산주의세력이 반드시 개입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요구하는 제3세력을 만들어내기 어렵습니다. 민전을 없애고 우리와 손을 잡을수 있는 사람들을 골라내서 김규식과 손을 잡게 해야 합니다.》

버치는 민전을 습격하는 도무지 리해할수 없는 이 돌발적인 사태가 사실에 있어서는 하지사령관과 원한경의 머리에서 고안되였다는것을 알았다. 원한경은 고위관리에게 《좌우합작》을 촉진시키기 위해 자기들이 취한 긴급조치를 간단히 설명했다. 연극의 첫째목적은 이미 말한바와 같이 민전이란 좌익의 련합체를 없애는데 있으며 동시에 김규식과 좌익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허헌을 《좌우합작》이란 그물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사흘전에 허헌의 가족들을 체포하고 어제밤부터 경찰과 테로단을 동원하여 민전회관을 습격하게 했는데 김규식이 《좌우합작》의 대상인 민전을 건드렸다고 항의를 하고있다. 김규식을 리용하기 위해 그의 요구를 얼마간 받아주겠다.···

《허헌의 가족을 석방하고 민전회관습격을 중지시키겠습니다. 그러면 김규식도 허헌도 좌우합작의 덕을 입어 가족들을 구원하고 회관에 대한 테로도 중지시켰다고 생각할것입니다. 말하자면 좌우합작의 중심인물인 김규식과 허헌은 우리가 둘러친 그물안에서 좌우합작을 성사시키기 위해 성의있게 노력할것이라는겁니다.》

미국의 고위관리는 추리소설의 한 대목을 읽는듯한 원한경의 말에 별로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유엔총회가 시작되기전에 믿을만한 제3세력을 만들어낼수만 있다면 수단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유럽정치도 대체로 그러하지만 아시아정치는 음모의 대명사라고 한다는데 가능한 노력을 다하시오.》

국무성고위관리가 이러한 말로 결론을 대신했다. 베닝호프가 그 말을 받아 버치에게 김규식을 찾아가 그의 항의가 대체로 다 접수되였다는것을 알려주라고 했다. 그자신은 의자에서 일어나 사령관의 탁상우에 놓여있는 전화기에서 서슴없이 송수화기를 들고 수도경찰청장을 찾았다.

《하지사령관각하의 지시를 전달합니다.》

하지는 손을 내밀어 베닝호프한테서 송수화기를 뺏아들었다. 그는 불쾌한 목소리로 수도경찰청장에게 지시했다.

《인사동민전회관습격을 중지하고 허헌의 가족을 석방하시오. 민전은 앞으로 군정장관이 비법화를 공포한후에 무장한 경찰을 동원해서 없애버리시오.》

베닝호프가 송수화기를 되받아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허헌의 가족을 자동차로 집에까지 데려다주어야 합니다. 아래사람들이 허헌선생을 몰라보고 손을 댔다고 룡산경찰서장이 사과를 하도록 하는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되여 그날 밤으로 허헌일가는 룡산경찰서에서 집으로 실려갔다. 서장이 허헌을 찾았으나 그는 집에 없었다. 허헌은 이때 북으로 향한 승용차안에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