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1

 

제 3 장

1

 

성시백은 북악산의 첫 가을정취를 즐기러나온 사람모양 중절모에 부드러운 연회색 양피구두, 앞섶에는 번쩍거리는 금시계줄··· 여불없는 큰 무역회사 사장이 아니면 만석군의 차림새로 단장을 내짚으며 옛빛이 그윽한 경복궁의 드높은 담장을 옆에 끼고 삼청동을 향해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구한국시절의 왕족이라고 해서,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데 한몫했다고 해서, 량반거족이란 명분에 세파를 헤쳐나가는 능란한 수완으로 해서, 나라가 망한후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계속해온 서울의 이른바 명문거부들이 주로 모여사는 곳이 북악산기슭의 삼청동이였다. 김규식이 들어있는 삼청장도 리조를 멸망에로 이끌어가는데 한몫을 한 민비족속의 한사람인 민규식이 제공해준 집이였다.

삼청장의 정문앞에서 총을 어깨에 걸치고 흔들거리며 오고가던 경찰이 다가오는 성시백을 보더니 굽석 허리를 꺾었다. 김규식을 경호해준다는 명목으로 삼청장앞에 설치한 특별파출소 순경이였다. 성시백은 지전장들을 받쳐 명함을 내주며 《점심들이나 들게.》하고 하대하는 말을 던졌다.

《지금 손님들이 계신뎁쇼.》

순경은 흘깃 명함의 글발들을 내리훑으며 말했다. 명함에는 흥국상회, 금강무역주식회사, 홍콩양행··· 그밑에 사장이란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우사(김규식의 호)는 계시겠지? 내가 왔다구 알리게.》

《미국어른이 와계시구 또 엥간히 높은분이 오세서. 비서님께 알리면 안되겠습니까? 어이, 비서님께 흥국상회 사장님이 왕림하셨다구 알리게. 성함은 정향명씨야.》

서도사투리를 쓰는것으로 보아 북에서 도망쳐온 일제때 경찰이 분명했다. 경호란 명색뿐이지 사실에 있어서는 김규식을 감시하는것을 중요목적으로 삼고있는 파출소니 인민의 징벌이 무서워 북에서 도망쳐온 이른바 경찰의 《핵심》들로 이 특별파출소를 꾸렸을것이다. 성시백은 파출소앞에 서서 담배연기를 날리며 소풍을 하러나온 산책객의 얼굴로 배기가스, 매연이 안개모양 뒤덮인 서울시가를 한가로이 굽어보았다. 서울은 2차대전후 미군강점하에 있는 세계의 수많은 도시들이 대체로 그런것처럼 미국이란 나라가 없으면 하루도 생존할수 없는 기생의 도시였다. 시민들이 먹고 입고 쓰는 대부분의것이 태평양을 건너온 미국산이였으며 미국병사들이 내버린 람루한 군복떨거지를 입은 소년이 엿장사모양 가슴에 안은 모판에 놓인 담배며 사탕, 자질구레한 일용잡화도 모두 미군창고에서 새나온것이였다. 대낮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몸파는 녀인의 머리도 검은빛을 날려버린 노랑머리로 변색했다. 이런 도시에서 수천의 정객들이 제나름의 정견을 내걸고 무슨 당, 무슨 회 하면서 필사적인 권력다툼에 열을 올리고있다고 생각하니 성시백은 절로 한숨이 새나오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정문안의 밋밋한 차도에서 자동차가 미끄러져내려오는 소리가 들려 문득 뒤를 돌아봤다. 한대의 군용차가 바람처럼 바쁜 속도로 그의 앞을 스쳐지났다. 그뒤로 휘장을 내린 미국제 대형승용차 리무진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달려왔다. 정문앞에 섰던 경찰은 어느새 막대기처럼 꼿꼿한 자세로 한옆에 비켜서있다. 승용차는 분명히 리승만의 전용차였으며 앞서 달려나온 군용차에 앉은 금발머리에 오동통한 몸매인 미국놈은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 하지한테 연설기안자명색으로 묻어다니는 버치였다. 버치는 하지의 요청에 의해 미륙군성 정보부에서 선발해보낸 수재형의 하바드대학출신 법학박사였으며 서울에 와서는 주로 김규식을 비롯한 우익계인물을 상대로 이른바 정치공작을 하고있었다.

(무엇때문에 이자들이 선생을 찾아왔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파출소안에서 술과 성병으로 해서 거칠어진 거쉰 목소리가 튀여나왔다.

《사장님, 안에서 전화를 바꾸랍십니다!》

성시백은 파출소안에 들어가 송수화기를 들었다. 중국국민당의 정치간부들을 양성하는것이 주목적인 사천대학에서 김규식이 영문학교수로 있을 때 절친해진 수제자이며 비서격인 윤명현의 목소리가 송수화기에서 울려나왔다. 그는 《과도립법의원》의 위원으로 남조선에 이름이 알려진 정객이였지만 지난해부터 성시백의 리념에 공감을 표시한후에는 그의 사업을 적극 도와주고있었다.

《선생님은 심기가 좋지 않으시구 몹시 피곤해하시는데 지금 꼭 만나야겠습니까?》

윤명현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는것으로 보아 김규식이 일체 방문자를 받지 말라고 한 모양이였다.

《나야 한가한 사람이니 돌아가도 좋은데 선생한테 문전축객을 당한 꼴이 되고싶지는 않소구려. 혹시 선생의 무거운 심기가 나를 만나면 가벼워지겠는지 알겠소?》

《문전축객이라니, 정향명선생을 어떻게 문전축객할수 있습니까?》

윤명현은 문전축객이란 말이며 정향명이란 이름에 힘을 주어 거의 웨치다싶이 했다. 아무리 김규식의 심기가 좋지 않다고 해도 성시백을 문전에서 돌려보낼수는 없었다.

《만나시겠답니다. 파출소사람들에게 전화를 바꾸어주십시오.》

현관밖에 나와 성시백을 맞이한 윤명현이 그를 객실로 안내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버치하구 리승만이 왔다갔습니다. 나도 비서들도 내쫓구 수군거렸는데 리승만의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그 사람들이 방에서 나오더군요.》

방안에 들어서는 성시백을 보고 김규식이 안락의자에서 힘겹게 일어서려는데 지금까지 그를 에워싸고 무슨 말을 나누던 모양인 10여명의 사나이들이 황급히 선생을 부축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김규식이 일을 벌릴 때면 틀림없이 그를 에워싸는 비서명색의 정객들이였다. 우로는 친미정당인 한민당계로부터 시작해서 중간파, 온건한 좌파에 이르기까지의 각양각색의 인물들이다. 김규식은 좌우 어느쪽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공정한 립장을 견지한다는것을 보여줄 목적으로 이런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비서명색으로 주위에 두고있었다.

김규식은 병석에 누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우울한 표정탓인지 정말로 건강이 좋지 않아보였다. 중경에 있을 때와는 달리 바지저고리를 입고 발에는 마카오나 홍콩을 거쳐 들어왔을 고급양말에 미국제 모직실내화, 응접실도 양식과 조선식가구들이 뒤섞여있었다. 옷차림도 응접실도 어딘지 모르게 그의 비서진처럼 착잡하게 뒤섞여있는듯 한 느낌을 주었다.

김규식은 성시백과 인사를 나누고나자 굵은 허리통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보이는 몸을 의자등받이에 거느시 기대고는 두자남짓한 긴 장죽이 놓여있는 옆상에 손을 가져갔다. 아직도 자기 주위에 서있는 비서들에게

《자네들은 나가보게.》 한다.

리승만계에서 박아넣은 첩자로 알려져있는 비서장이 쭈밋거리며 방에 그대로 남아있다가 한마디했다.

《우남(리승만의 호)의 말씀이 옳쉐다. 극인(허헌의 호) 그 사람은 몽양보다 더 빨간 놈입니다. 손을 잡았다고해도 오래 가지 못할겁니다.》

량반행세를 하는 시골로인모양 긴 장죽으로 담배를 피우던 김규식이 입에 가득히 물었던 회색연기를 비서장의 얼굴에 끼얹으며 짜증을 냈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내가 할 말은 끝이 났으니 자네들은 나가보라고 하지 않나!》

성시백은 비서장의 말을 듣고 여간 놀라지 않았으나 오가는 이야기에 별로 흥미가 없는듯 쏘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김규식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이 다시 시도되고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민전계의 일부 인사들까지 망라된 《좌우합작》이 준비되고있다는것이다. 이것은 필경 미국놈들이 남조선의 광범한 정치력량을 망라한 제3정치세력을 조작해낼 잡도리를 하고있다는것을 의미할것이다. 좌익계까지 끌어들일 생각을 한것을 보면 적지 않은 중간파도 이른바 합작의 대상으로 되였을것이다. 미국놈들이 어째서 갑자기 《합작》놀음을 또 시작했는가? 그것은 남조선의 광범한 민중의 의사를 대변한듯한 정치세력이 필요하기때문일것이다.

성시백은 그러한 정치세력이 남조선민중의 총의에 의해 남조선괴뢰정부가 수립된듯한 인상을 조성하는데 리용되리라는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래 그는 민전계의 누가 미국놈들의 롱간질에 말려들었는지 알아보는중인데 뜻밖에도 삼청장에 와서 그가 허헌이라는것을 알았다. 민전의장단성원들가운데서도 첫자리에 놓이는 허헌이 우경화되는 《좌우합작》의 그물에 걸려들다니··· 장군님께서 구상하고계시는 전민족적인 민족자체력량을 결성하는 사업에 결정적인 난관이 조성된셈이였다.

《선생님의 건강이 이렇게 나쁜줄 알았으면 찾아오지 않는건데 제가 무리한 방문을 한것 같습니다.》

자못 걱정스러운 안색을 지으며 성시백은 나직이 말했다.

 

···문득 찾아든 나그네

그대는 내 번뇌를 날려줄 님이리···

 

김규식이 뜻밖에도 엘리자베스녀왕조시기의 부드러운 영어로 두어행의 시를 읊고나서 물었다.

《어떤가? 운이 부드러운 시행이 아닌가?》

영어에 능한 성시백이였지만 그것이 선생이 전공한 쉑스피어의 작품에 담겨있는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가 중국에 있을 때 간혹 펜을 들군 한 영문으로 된 어느 시작품의 한대목인지 알수가 없었다.

《제가 선생님의 번뇌를 날려버릴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나는 망명생활을 할 때가 가장 불행한 때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것 같네. 정향명군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으니 청중이나 정객들의 반응을 생각하지 않고 한담을 하던 그 음침한 안개의 도시가 그리워지기까지 했네. 그때는 꿈이 있었고 내 머리속의 공상이 생활의 전부였거든···》

김규식은 분명히 정치생활에 지쳐버린 사람이였다. 하긴 오랜만에 말의 의미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총명하고 박식한 정향명과 정말로 한담을 할 생각을 했는지도 몰랐다. 어떻든 지쳐버린 그의 내심을 엿볼수 있는 말이였다. 어째서 김규식이 이렇게 지쳐버렸는가? 리승만의 강박, 버치의 롱락탓인가? 《좌우합작》의 주동인물이 되였으면 응당 활기에 넘쳐있어야 할 그가 이렇게도 우울해하는것을 보면 필시 그 무슨 곡절이 있는것 같았다.

《선생님의 량심이 그 어느때보다도 필요한 때에 이렇게 기운을 잃고계시면 선생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선생님은 힘을 내셔야 할 때입니다.》

김규식은 수북한 눈섭을 미간에 모으고 잠시 성시백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향명군은 지금도 중경에 있을 때 그대로겠지?》

《나야 정계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행동해야 할 사람이 아니니 생각을 바꿀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하긴 나도 분렬된 조국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질 때가 있긴 합니다만···》

《나는 요즘 힘의 상실은 불행의 전부란 말을 자주 생각하게 되네.》

성시백이 중경에 갔을 때 김규식은 다년간 국민당에서 운영하는 사천대학에서의 영문학강의를 집어치우고 그 안개의 도시에 이미 와있었다. 그때 김규식은 좌경적인 강령을 내건 조선민족혁명당의 주석 겸 림정부주석이였다. 당이라 해야 보잘것 없는 자그마한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지만 김규식의 오랜 정치생활과 그의 명성으로 해서 중경에 쫓겨온후에도 권력을 다투는 몇개의 당들가운데 조선민족혁명당도 끼여있었다.

김규식을 만나 담소를 나누느라면 압록강, 두만강을 넘나들며 싸우시는 김일성장군에 대한 말을 의례히 하게 되였고 공산주의라는 말은 붙이지 않았지만 어떻든 좌익사상이 현실로 된 조국을 그리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군 했다. 김규식도 쉑스피어의 원작에서 인용한 시행들을 섞어가며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경제제도말살이니, 토지의 국유화와 토지분배니, 독점기업체의 국유화니 하는 말들을 깊은 생각에 잠겨 이야기하군 했다. 그때의 김규식이 사상적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서울에 와서도 견결한 공산주의자는 못된다고 해도 중도좌파에 속하는 정당지도자쯤은 되였을것이다.

그런데 그가 조국에 돌아오자 점차 우경화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주류를 이룬 리승만, 김성수계 친미매국세력, 완고한 민족주의적보수세력인 김구계와 함께 미군정을 등에 업은 친미세력의 대표자 우익 3령수의 한사람이 돼버렸다.

윤명현은 선생이 사상적변화를 가져온것은 단순히 언더우드2세의 롱간질에 걸려든탓이라고 했다. 학창시절부터 중경을 거쳐 서울에 와있는 지금까지 김규식과 한집에서 한가마밥을 먹으며 함께 생활해오는 윤명현의 말이니 그의 말을 믿어야 할것이다. 또 그의 말을 믿지 않을수 없는 충분한 근거도 있었다.

김규식은 미국이 조선에 파견한 첫 척후병의 한사람인 언더우드목사의 양자로 입직하여 그의 도움으로 미국의 로녹대학을 졸업할수 있었다. 언더우드가 리조말엽 조선에 건너와 왕실의 신임을 얻을양으로 별의별 롱간질을 다 피울 때 앞으로 대학과 신학교를 세울 생각을 하며 설립한 고아원이 있었다. 김규식은 바로 그 고아원에서 자라나 언더우드에게 총명성이 인정되여 미국류학까지 가게 되였다. 김규식은 원래 경상남도 동래군수를 지낸바 있는 김지성이란 량반관료의 아들이다. 그런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정치적분쟁에 말려들어 이 세상을 떠나는통에 고아로 되여버렸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에 돌아와 언더우드1세의 비서, 그리스도교청년학교 교원, 서울의 이름있는 교회의 하나인 세안문교회의 목사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뗐다. 이런 그가 조선이 일제에게 병합된지 3년만인 1913년에 인삼장사를 하러 만주로 간다는 소문을 내고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에 망명했다. 아마 그는 일제에게 강점당한 불행한 조국을 목격하면서 교회의 좁은 울타리가 아니라 더 넓은 판도에서 조선을 위해 일신을 바칠 결심을 한것 같았다. 그는 이것으로 언더우드와의 관계는 끝장난것으로 생각했을수 있다.

그러나 광복이 되여 그가 조국에 돌아왔을 때 이미 땅속에 들어간 아버지의 뜻을 이어 그리스도교의 리념을 조선에서 실현해나간다고 하면서 언더우드2세가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설립하며 포교사업을 계속하고있었다. 비록 언더우드1세는 죽었으나 종교를 리용해 미국의 영향력을 조선에 부식하고있는 미국의 선교부는 의연히 살아있으면서 김규식을 거머쥐려 하고있었던것이다.

물론 김규식은 언더우드2세와의 상봉으로 해서 미국의 손탁안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언더우드2세가 백여명이나 되는 고문을 총찰하는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사령관의 수석고문자리를 차지하고있다는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한 일요일에 김규식은 례배를 보려고 정동례배당에 갔다가 한담도중에 비록 군정이 실시되고있는 남조선이지만 조선사람들이 자주권을 다문 얼마간이라도 행사할수 있게 남조선국민대표들로 구성된 일종의 자문기관같은것을 내왔으면 좋겠다는 의향을 언더우드2세에게 비친적이 있었다. 며칠후 공식적인 미군사령관 정치고문이 그를 찾아와서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고있는 남조선과 같은 곳에서도 국민들이 민주주의적권리를 행사할수 있게 특수한 형태인 《국회》를 둘 생각이라고 하면서 《민주의원》을 내올 구체적인 방안을 이야기했다. 그는 자기와 미군정당국이 같은 견해를 갖게 된것은 미국이 민주주의를 국시로 삼고있기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여 남조선단독괴뢰정부를 조작해내기 위한 첫시작이자 미국의 침략성을 가리워주는 보자기의 역할을 수행한 《민주의원》이란것이 세상에 태여났다.

《과도립법의원》이란것을 조작해내는 과정도 이와 비슷했다. 김규식은 조선사람들이 립법권을 소유하게 되면 미군정하에서 예속된 생활을 하는 현상태를 많이 탈피한 자주적국민으로 될수 있을것 같았다. 이런 견해를 여기저기에서 몇번 이야기한적이 있었는데 《과도립법의원》을 만들어내는 산파역도 결국 김규식에게 위임되였다. 《과도립법의원》을 갖게 됐으니 행정권을 소유해야 할것은 당연한 일이여서 《민정장관》을 선출해내고 《민정이양》놀음까지 벌렸지만 사실은 미군정청의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를 만들어낸데 지나지 않았다. 김규식은 이때에야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하고있는 한 조선민족의 자주권이란 공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 무엇을 만들어낼수록 그것은 미국의 조선침략을 미화분식할뿐이라는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그는 조선의 정치인은 어쩔수 없이 미국의 남조선강점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환경속에서 활동할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체념에 사로잡혔다. 그가 유약한 정치인이라는 말을 듣게 된데는 예민한 사고와 높은 지성을 지닌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행동하기에 앞서 사색하는 습벽에 사로잡히군 하는데도 있었지만 이러한 체념이 그로 하여금 행동을 조심하게 한데도 주요한 원인이 있었다.

성시백이 서울에 와서 자리를 잡았을 때 김규식은 이미 친미의 길을 걷고있었다. 김규식이 어찌해 좌익과 손을 잡지 않고 우익의 길을 걷게 되였는지 성시백은 한때 의아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었다. 그러나 김규식이 걸어온 긴 사상행로를 더듬어보면 그가 친미의 길에 들어선것이 응당한 귀결인듯싶기도 했다. 윌쓴이 제창한 《민족자결론》에 기대를 걸고 빠리에로의 구걸행각, 그러나 미국이 내놓은 그 《민족자결론》은 약소민족해방이란 그럴듯한 말로 추동질해서 식민지나라들을 미국에 예속시키기 위한 롱간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김규식은 강화회의를 통해 깨달았다.

미국에 대한 김규식의 환멸이 어떻게나 강렬했던지 그를 180°방향전환을 하여 민족평등을 주장하는 쏘련에 접근시켰다. 이렇게 되여 모스크바의 크레믈리대회당에서 개최된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는데까지 이르렀다. 려운형과 함께 김규식은 의장단성원으로 선출되였다. 그러나 원동에 수립된 망명정부인 《조선공화국》수반의 자격으로 울라지보스또크에 갔다가 일제의 항의를 우려한 원동정부에 의해 추방을 당하는 창피를 당했다. 그는 쏘련이 추켜든 만민평등, 민족평등의 기치도 리념에 지나지 않을뿐 자기 나라의 리익을 도모하기 위한 문제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실리를 추구할뿐이라는 회의심에 사로잡혔다. 이때부터 그는 자기를 공산주의자로 자처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쏘련을 경원한다고 하여, 공산주의자로 자처하기를 그만두었다고 하여 그가 좌파에 속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건하는데는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숭상하는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창조한 공산주의사상에는 참으로 귀중한것이 많았다고 생각하는 김규식이였다.

공산주의자들을 경원하면서 공산주의리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정치가, 이것은 김규식과 같은 복잡한 사상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생각도 할수 없는 일이다.

서울에 돌아온 성시백이 김구, 김규식에게 민족자립사상을 심어줄 방도를 모색하고있는데 뜻밖에 김규식이 민전계까지 망라한 《좌우합작》의 선두에 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 김규식의 사상상태를 알아보려고 삼청장에 왔다. 한데 허헌을 《좌우합작》에 끌어넣으려 한다는 놀라운 소식과 함께 김규식은 무엇때문인지 번뇌에 시달리고있지 않는가. 《좌우합작》을 정치적부담으로 여기고 고통스러워 하는것일가?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요구가 리승만이나 버치한테 거절당한탓인가? 김규식이 어떤 리유로 해서 지치고 울적한 심경에 사로잡혔건 미국놈들이 남조선에 괴뢰정부를 세우기 위한 정치적기반을 꾸리기 시작한것만은 틀림없는 일이였다.

성시백이 이러한 생각으로 해서 어지간히 긴장해서 담배를 태우며 앉아있는데 그 가까이에 서있던 윤명현이 문뜩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구 그렇게도 권고하는데 무엇때문에 만나가지구 건강에 해를 봅니까?》

정녕 김규식의 건강이 념려되여선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울적한 심기를 풀어주고싶어선지 윤명현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김규식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자제력을 잃어버린 돌발적인 분격이 온몸을 휩쌌다. 그는 손에 들고있던 긴 담배대를 내동댕이치며 격분해서 웨쳤다.

《이건 김규식과 그 사람들사이의 대결이 아니란 말이요! 강대한 무력을 가진 미국과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 불행한 조선사이의 대결이란 말이요. 자네 내곁에 10년이나 있으면서 이쯤한것도 모르나?》

김규식은 깊은 주름이 패인 량볼의 두둑한 근육이며 비단바지저고리속의 짧은 체구를 푸들푸들 떨며 부르짖었다. 안해가 달려들어와 주단우에 내던진 장죽을 주어 옆상에 놓고는 남편을 어린애 다루듯 어루만지며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대결한다고 해도 선생이 양보를 해야 할것은 자명한 일인데 이런 대결은 처음부터 그만두거나 선생이 그 사람들을 눌러버릴 방략을 세운 후에 만나야지 무턱대고 만나니까 이래라 저래라 버릇없이 굴지 않습니까?···》

《윤선생은 좀 가만히 계셔요. 오늘은 왜들 이러십니까?》

안해 김순애가 울상이 되여 은테안경을 낀 윤명현을 쳐다보며 애원을 했다. 리승만과 버치를 만나기전에 얼마간의 론난이 있었던 모양이다. 성시백은 김규식과 버치, 리승만사이에 분명 의견상이가 있었다는것을 알았다. 마음을 무겁게 하던 시름이 얼마간 덜리는것 같았다. 그는 가벼운 롱담조의 말을 했다.

《난 정문에서 하지사령관의 스피취라이터(연설문초안작성자)가 몰아대는 자동차에 하마트면 치여 죽을번했습니다.》

《스피취라이터가 뭡니까? 지금은 사령관의 당당한 정치고문입니다. 지성이 빈곤한 조선정계에서 대상할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다고 하면서 검질기게 감겨돌아가더니 오늘은 리박사까지 달구와서 선생님에게 무슨 일을 또 떠맡기고 간것 같습니다.》

윤명현의 말에 격분할줄 알았던 김규식이 뜻밖에도 수제자의 말을 귀등으로 흘려버리며 온후한 로학자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또다시 장죽을 물고 짙은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안해 김순애는 얼마간 마음을 놓은양 방에서 나갔다.

《향명군은 중국에서 있었던 국공합작을 어떻게 생각하나?》

만주지방을 비롯해 전중국을 전란속에 휘말아넣은 지난해에 파탄된 중국공산당과 국민당간의 합작을 념두에 둔 질문이였다. 이런것을 묻는것으로 보아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이 큰 고충과 함께 의혹을 던져준게 분명했다.

《신문을 보니까 대체로 두가지 견해로 갈라졌더군요.》

성시백은 별로 깊은 관심을 두고있는 문제가 아니라는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장총통은 중국공산당을 없애버리는것을 최대의 정치적과제로 삼고있었으니 중일전쟁이 종식된 지금 내란은 불가피하다고 보는 견해와 미국의 배후책동에 의해 근 5억의 인구가 전란속에 말려들었다고 보는 견해인데 나는 두가지 요인이 다 작용해서 중국내란이 터졌다고 봅니다. 장총통이 아무리 중국공산당을 없애고싶어도 미국의 현대적무기로 국민당군을 무장시키지 못했다면 중일전쟁시기에 크게 장성한 중국혁명군을 감히 공격할 생각을 할수 있겠습니까? 나는 미국이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놀라운 도박을 하고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막대한 그 투자란것이 이제는 쓸모가 없는 제2차대전시기 잉여군수물자이긴 합니다만···》

《조선에서의 좌우합작은 어떻게 될것 같나? 성사될것 같나?》

성시백은 신경이 날카로와질대로 날카로와졌지만 얼굴에는 짐짓 말뜻을 알아듣기 어려워하는듯한 어리벙한 표정으로 김규식의 얼굴을 잠시 마주보았다. 높직한 코마루, 기름한 인중밑에 담배대를 가로 문 큼직한 입, 고집스러워보이는 두툼한 입술, 넓은 미간에 패인 깊은 주름, 수북한 검은 눈섭··· 대가 굵고 무게있는 사색을 할듯싶은 그의 온 얼굴이 어지간히 긴장되여 성시백의 대답을 기다리고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리해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남경(후에 중경)과 연안간의 합작이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서울과 평양간의 합작을 도모할 뜻이 있다는 말씀이신데 선생님은 이런 중임을 미국사람들한테 위임받은바가 계십니까?》

성시백이 일부러 이죽거리는듯한 이런 말을 한것은 조선을 북과 남 둘로 갈라보지 말아야 한다, 조선은 하나의 민족이 사는 하나의 강토란 견지에서 사색해야 한다는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광복전에 코레아(조선)라고 말하는데 습관돼서 내가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네. 코레아가 아니라 싸우스 코레아(남조선)라고 말해야 했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리해하기 어렵습니다. 미군정은 이미 남로당을 해산시키고 그외의 좌익정당사회단체들도 가혹하게 탄압하고있지 않습니까. 민전이 아직 해산령을 받지 않고있지만 그것은 서울뿐이지 지방에서는 사실상 존재를 끝마쳤습니다. 좌우합작을 하자면 좌익이 있어야겠는데 좌익이란 없지 않습니까?》

성시백은 집요할 정도로 김규식을 궁지에로 몰고 들어갔다.

《내 힘으로 량심적인 좌익계인사들이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할수 있게 할수도 있지 않나. 물론 나는 불행한 조선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고있는 남로당사람들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네. 례를 들어 아깝게 쓰러졌네만 몽양같은분, 극인(허헌)같은분, 김창준목사같은분, 이런 량심적인 인사들이 앞에 나서서 좌익을 대표하고 우익에서도 역시 독재를 반대하는 량심적인 정치인들이 앞에 나서서 좌익과 손을 잡으면 하나의 큰 중간파정치세력이 형성되지 않겠나. 이렇게 되면 극좌극우로 분렬돼서 갈가리 찢어져나가고있는 우리 나라의 정국도 어느 정도 수습될것이구 강력한 중간파정치세력이 형성되면 민의를 대표해서 남조선에 정권을 세울 가능성도 있지 않나. 그렇게 되면 조선의 분렬을 끝장낼 돌파구도 열릴수 있구···》

김규식으로서는 흥분하지 않을수 없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의 안색은 의연히 무거웠다. 혹시 그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는것이 아니라 누구에게서 강요당한 견해를 내비쳐보는것이 아닐가?

《이젠 버치와 다툰 까닭을 알겠습니다. 사령부의 요구와는 달리 선생님은 허헌선생이나 김창준목사같은분들과 손을 잡고 좌우합작을 계속하겠다는데 버치나 리박사가 선생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것이겠습니다?》

김규식의 수북한 눈섭이며 장죽을 쥔 손이 한순간 푸드득 떨렸다. 성시백을 마주보는 검은색이 짙은 그의 눈도 노여움으로 번쩍거렸다.

《정군, 자네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버릇없이 대하게 됐나? 자넨 중경에서부터 날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내가 언제 하청을 받아가지고 정치활동을 하는것을 봤나? 우리가 남의 나라 군대가 주둔해있는 조건에서 정치활동을 하고있는것은 사실이네만 나는 량심적인 정치인들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 일을 시작했네. 이제 보게. 내 극인이나 김창준목사같은분들의 정치활동을 보장해주고야말테니.》

김규식은 정향명에게 이런 말을 한 자신을 곧 뉘우쳤다. 허헌과 접촉을 가진것도 사실이였으며 하지사령관에게 허헌과 김창준목사같은 온건한 좌익인사들이 정치활동을 할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줄것을 요구한것도 사실이였지만 몽양 려운형이 피살된후 《좌우합작》을 다시 시도해나선것은 그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미군사령부의 요구에 의한것이였다.

미국측은 민중의 배척을 받는 리승만을 가지고서는 남조선에 괴뢰정부를 세우기 어렵겠다고 생각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세력을 형성하면 그에 상응한 고려가 있을것》이라고 하면서 온건한 우익, 중간파, 필요하다면 좌익냄새가 얼마간 풍기는 사람들까지 포함한 제3세력을 빠른 시일내에 형성해줄것을 김규식에게 부탁했다. 만일 김규식이 이 요구를 듣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이 일을 맡아나설수도 있다는 시사도 있었다. 감성이 예민하고 정치적판단이 빠른 김규식은 미국측에서 어째서 이렇게도 급급하게 제3세력을 만들어내려고 하는지 이내 간파할수 있었다. 남조선정부란것을 만들어낼 밑거름으로 삼자는데 목적이 있을것이다. 버치는 남조선의 복잡한 정계를 이끌 사람은 김규식밖에 없다면서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그의 정치적수완이 립증되여 커다란 영예가 차례질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는 이 말도 믿지 않았다. 자기가 또다시 국내민중은 말할것도 없고 국제사회까지 기만하는 롱락물로 리용될수 있다는것을 그도 알고있었다. 그런데도 이 일에 발을 들여놓은것은 정권욕에 환장한 리승만과 같은 독재자형 야심가에게 남조선의 운명을 내맡길수 없다고 생각한탓이였다. 김규식은 미국측이 요구하는 그 제3세력을 리승만이 독재자로 군림하는것을 저지하는 자기의 정치세력으로 만들 결심이였다. 만일 김규식이 조국에 돌아와 남들처럼 정당을 만들고 자신의 지반을 구축했더라면 이런 구차한 놀음을 구태여 할 필요가 없었을것이다. 그러나 귀국한 그는 쏘미량군을 철거시켜 조선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자면 정권욕을 버리고 민족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한다고 하면서 정당을 만들지 않았다. 남조선의 중산층과 지식인들가운데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온건한 우익과 중간파계렬에 그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상당한 정도로 강했지만 김규식과 조직적으로 련결되여있는 사람이란 오늘도 삼청장에 모여든 10여명의 비서진가운데 두세명과 그의 힘을 빌어 《과도립법의원》이 된 이삼십명의 정객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자기가 의도하는 정치세력에 허헌을 비롯한 온건한 좌익인사들을 끌어넣으려는것은 그와 같은 권위있는 사람들을 인입해야 리승만과 대결할 조선의 민의를 모은 세력이라고 말할수 있겠기때문이였다. 리승만은 그의 내심을 간파했는지 허헌과 손을 잡는것을 극력 반대했다. 김규식이 울적하고 지친 빛인것은 전에 없이 리승만이 자주 삼청장에 나들면서 온건한 좌익과의 련계를 반대하는데도 있었으며 민족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정강을 내들고 공개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있는 스스로에 대한 불만탓이기도 했다.

성시백은 김규식의 이러한 속심을 알수는 없었지만 그의 기도가 김일성장군님께서 의도하고계시는 전국적인 민족자체력량을 준비하는데 방해로 된다는것은 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설사 버치나 리박사가 선생님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민전의 활동이 자유롭게 되였다고 해도 사태는 미국사람들이 요구하는 방향에로 흘러갈겁니다. 미국사람들이 좌우합작을 지지하는것은 미국의 대조선전략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받을수 있다고 인정하기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리박사가 미국에 가서 워싱톤의 유력자들과 남조선단독정부수립을 약속하고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 얼마전에 서울을 방문한 웨드마이어도 군정선상의 남조선단독정부수립을 촉구하고 돌아갔다는 항간의 소문도 들었습니다. 선생은 미국이 자기 나라의 국익을 희생하면서 다른 나라에 자선사업을 하는것을 봤습니까? 더구나 대쏘전략의 중요한 지탱점으로 되고있는 조선과 같은 지역을 두고서말입니다. 미국이 좌우합작을 지지하는것은 우익세력과 함께 온건한 좌익까지도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는데 리용하자는데 목적이 있을겁니다.》

《향명군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좌우정치세력의 단합이 조선을 점유한 량군에 대한 저항이라고 간주하네. 민족을 구원할 방도로 생각하구.》

《합작은 구원이 아니라 우롱을 당하면서 파멸에로 가는 길입니다. 선생님이 자기의 뜻을 달성하자면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선생님자신도 미군이 남조선을 점령한 현실태를 어쩔수 없는 운명으로 간주하시니 그 사람들한테 리용당하게 될것은 자명한 일이 아닙니까. 그것도 선생님 혼자만 리용을 당하면 모르겠는데 선생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선생의 말을 듣고 선생의 뒤를 따르다가 미국에 리용당했다는것을 알게 되면 이것은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향명군도 나를 친미분자로 간주한다는것인가?》

《지금까지는 미국사람들이 선생님을 교묘하게 리용해왔을뿐이지 선생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두해동안 미국사람들한테 속아오면서도 중간파 지어 좌익진영 사람들까지 끌고 미국이 만들어놓은 올가미속으로 들어간다면 선생님에 대한 견해를 달리 가질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사람들에게 필요한 조선사람은 미국의 리익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 리용할 가치가 있는 조선사람들뿐이라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향명군은 중경에 있을 때보다 더 강경해졌군.》

《남조선현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내가 오늘 선생님을 찾아온것은 경교장(김구의 저택)에 가니까 선생님이 나의 행방을 물으면서 선생님을 잊어버린것 같다고 말씀하더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짧은 시간이나마 선생님의 상담역이 됐으니 다시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시백은 김구와의 친분관계만이 아니라 무역을 해서 번 적지 않은 돈을 한국독립당(당수 김구)의 정치자금으로 밀어넣고있어 경교장출입이 많았다.

《선생님이 일생을 바쳐서 지켜낸 민족적량심을 존중하신다면 민족자체력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셔야 합니다. 미국의 힘을 빌리자고 할것이 아니라 민족의 힘에 의거해서 분렬의 비운속에 있는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여생을 바쳐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쏘미량군의 영향에서 벗어날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남북조선을 점령한 2대강국을 당해낼 힘이 있나? 나도 젊었을 때 세계를 메주밟듯 했네만 조선을 저희들의 국익을 위해 희생시키려고 하는 대국을 보았을뿐이구 조선의 독립운동자들을 극형에 처하면서 민족평등을 부르짖는 정치인들을 봤을뿐이네. 조선이란 새는 날개가 든든하지 못해서 이 초대국들이 불러일으키는 강풍을 이겨내지 못하네. 그 어느 한쪽의 바람을 탈수밖에 없는것이 조선민족의 숙명이란 말이네.》

김규식은 미국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그 어떤 유연한 저항을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그렇게 해서 미국의 힘을 빌어 정치세력을 꾸릴 생각인것 같았다.

《력사는 현재를 판단하는데 도움을 줄런지 모르지만 현재 그것은 아닙니다. 또 과거의 체험을 선생님이 정확하게 평가하고있다고 말할수도 없지 않습니까.》

성시백은 쓰딸린의 대외정책은 미국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쏘련의 일부 대외정책작성자들이 정세판단을 잘못해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곤경에 처하고 조선을 두동강내려는 미국의 롱간질에 걸려든것은 사실이지만 북조선에는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령도아래 자주적인 인민적시책이 실시되고있다, 김규식이 중경에서 주장한 토지개혁, 중요산업국유화가 북조선에서 이미 단행되였다는것을 선생도 알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고싶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쏘련이라면 아예 머리를 흔들었으며 북조선도 남조선과 마찬가지로 외세의 지배를 받고있는것으로 생각하고있어 성시백은 자기의 견해를 내놓고 주장할수가 없었다.

《나는 미국의 힘을 빌어서 우리 민족에게 리익이 될 일을 하시겠다는 선생님의 견해에 찬성할수 없습니다. 또한 쏘미량국을 그렇게도 크게 평가하면서 민족자체력량을 과소평가하는 선생의 견해도 나는 찬성할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힘을 우선시해야 할것인데 이 점을 보려고 하지 않는 선생님의 견해도 안타깝게 생각됩니다. 사실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민족력량을 단결시키기 위한 거족적인 투쟁이 벌어지고있습니다. 서울정계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시야를 조금만 넓혀도 민족자체력량으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고있는 북과 남의 수백만 민중을 볼수 있는데 건강탓으로 활동이 제한받고있기때문인지 선생은 이것을 보지 못하고계신것 같습니다. 이것은 원한경이나 버치같은 사람들이 선생님에게 큰 영향을 주고있는탓이 아니겠는가 나에겐 생각됩니다. 쉑스피어도 얼굴에 웃음을 짓고 가까이 접근하는자, 귀속에 달콤한 말을 불어넣는자를 경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긴장한 표정으로 성시백의 말을 듣던 김규식의 얼굴에 지친빛이 더욱 짙어갔다. 문득 그는 엘리자베스녀왕조시기의 한수의 시를 영어로 읊기시작했다.

 

막연한 추측은 애매한 희망을 말할뿐

희망은 환영의 힘을 빌어 파멸에로 유혹하거니···

 

성시백은 참을길 없는 혐오감이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김규식은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현실기피자, 자기의 생각에 자신이 우롱당하고있는 사상의 희롱자로 돼버린것 같았다. 과연 이런 사람을 단결된 민족자체력량의 앞장에 세워 장군님께서 구상하고계시는 그 웅대한 위업에 이바지하게 할수 있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할것만 같았다.

《나는 성의를 다해 말씀드렸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다만 선생을 존경하는 수천만의 량심적인 인사들과 민중이 선생님과 함께 세계제패를 꿈꾸는 횡포한 외래침략자들에게 우롱을 당했다는 력사적평가를 받지 말기를 바랄뿐입니다.》

성시백은 김규식에게 몸을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삼청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