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8

 

8

 

몇그루의 정원수며 꽃나무들이 진곤색 어둠속에 잠겨들며 안식을 찾을무렵이였다. 성시백이 도착할 시간이 되자 장군님께서는 김책과 함께 현관밖에 나가시였다.

정문에 들어선 풍차에서 빠져나오던 성시백은 어스크레한 현관앞에 김책과 함께 서계시는분이 김일성장군님이시라는것을 알아보고 서둘러 모자를 벗었다. 소풍을 하려고 번화한 서울거리에 나섰던 부유한 실업계의 중진이 생각밖의 고위인사를 만나 례절을 차릴 때처럼 조금도 서둘지 않으면서 깎이고 다듬어진 세련된 동작으로 장군님께 인사를 드렸다. 장군님께서는 성시백의 손을 잡으며 웃음어린 안색으로 물으시였다.

《이제는 몸이 괜찮습니까?》

《네. 의사선생들이 어떻게나 성의를 바치는지 송구할 정도였습니다. 몸은 곧 회복됐는데 얼굴에 상처자욱이 남을수 있다고 해서 미안한대로 며칠간 더 치료를 받았습니다.》

《미안할게 있습니까? 38°선을 넘다가 그렇게 됐는데···  성시백동무가 20여년이나 우리 민족을 위해 싸운 사람이라는걸 알았더라면 의사선생들이 더 성의있게 치료해줬을겁니다.》

《제 평양에 와서 받은 인상중에서 가장 강한 인상이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 사람들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태도였습니다. 사실 저는 그런 사람들속에 들지도 못하는데 의사선생들도 려관사람들도 저에게 각별한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응접실에 들어서며 성시백은 중절모를 걸개에 걸었다. 무더운 여름에 두루마기까지 입은것으로 보아 례절을 갖추느라고 퍽 애를 썼다는것이 알렸다. 그는 장군님께서 가리키시는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남조선의 려관에서는 이런 풍조가 차츰 사라지고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성시백과 마주앉으며 리해를 표시하시였다.

《광복의 감격이 사라진데다 남조선에서는 돈을 위해 려관업을 하고있으니 돈많은 사람들이 존경을 받을겁니다.》

《저도 남조선의 시세에 맞추어 부자행세를 하는 사람이지만 그것이 여간만 큰 고통이 아닙니다. 북조선에 들어와서 돈이나 허식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건국에 헌신하고싶을 때가 있군 합니다.》

《그 마음도 리해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건국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사람들을 제일 고상한 사상의 소유자로, 인민도덕의 체현자로 간주하고있습니다. 지난날 우리 민족이 겪은 불행을 생각해서라도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자, 이것이 우리가 현재 전개하고있는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기본취지라고 할수 있습니다.》

밝은 웃음을 얼굴에 띠우며 마음을 탁 터놓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장군님께서는 문득 말머리를 돌리시였다.

《부위원장동무의 말을 들으니 성시백동무는 우리가 생산한 제품을 적지 않게 교역해가고있다는데 여기에서 나온 돈을 어디에 씁니까? 생활을 유지하는데 씁니까?》

《북조선과의 교역은 일종의 선전을 목적해서 진행하고있습니다. 저는 정치활동의 거점으로 리용할 생각으로 남조선에 여러개의 무역회사들을 내왔습니다. 서울에만도 서너개의 회사를 내왔구 인천, 부산과 같은 항구도시에도 무역회사를 두고 홍콩, 마카오, 중국관내의 여러 도시들과 무역거래를 하고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뜻을 같이하기로 한 사람들의 생활도 보장하고 정치활동자금으로 충당하기도 합니다.》

성시백은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응접실안의 소박한 가구에 가끔 눈길을 던지군 했다.

《오늘밤은 성시백동무를 위해서 시간을 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시간에 구애되지 말고 속을 툭 터놓고 이야기를 해봅시다. 우선 성시백동무의 말을 듣고싶습니다. 우리가 먼저 려관에 찾아갔을 때 무슨 이야긴가 긴히 하고싶어하는것 같았는데 그건 어떤것입니까?》

이런 좌석이 찾아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성시백은 자세를 고쳐잡으며 곧 말씀드리기 시작했다.

《남로당의 실태는 이미 기본적으로 말씀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말씀드리지 못한 문제는 남조선좌익이 단결되지 못해서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고있다는것입니다. 이것은 주로 남로당의 실권을 쥐고있는 사람들의 독선적인 태도에 원인이 있습니다. 좌익력량의 이러한 형편은 민족적재난을 가져올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저는 그동안에 새로운 전위당을 내올 준비를 해왔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새로운 당을 발족시킬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생각이 옳은지 장군님의 고견을 듣고싶었습니다.》

성시백의 말을 주의깊이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은근하면서도 부드러운 눈길로 상대를 마주보며 무게있는 음성으로 물으시였다.

《성시백동무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성시백동무는 남조선에 새로운 전위당을 내오면 미국의 침략을 짓부실수 있다고 믿습니까? 정말 승리할수 있다고 확신해서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합니까?》

성시백은 흠칠 놀라며 눈을 크게 뜨고 장군님을 우러러봤다. 이윽고 그의 머리는 무겁게 밑으로 처져내렸다.

《저는 민족이 위험에 처한 이때 최선을 다하는것이 혁명가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시백동무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 결심을 우리는 높이 평가하고 지지합니다. 그러나 성시백동무가 말한바와 같이 최선을 다하다 실패를 해도 할수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엔 반대입니다. 조선혁명가는 자기의 의무를 다하기전에는 죽을 권리도 없다, 이것이 조선혁명가의 태도여야 합니다.》

치밀한 사고를 하는데 습관된 성시백의 얼굴에는 한순간 사색의 균형을 잃어버린듯 혼란된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우리는 성시백동무가 새로운 당을 내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리유도 리해할수 있고 그 심정도 알수 있습니다. 또 남조선좌익이 성시백동무가 말한 그러한 결함을 시급히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시백동무의 견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부드러운 웃음이 비낀 안색으로 범상한 이야기를 하시듯 온화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그러나 성시백은 몸둘바를 몰라하는 당황한 경황속에서도 장군님의 얼굴표정에서 그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듯 시선을 집중했다. 그이께서는 남조선에 새로운 전위당을 내오는것은 그렇지 않아도 집안싸움으로 어수선한 좌익진영을 더 복잡하게 만들수 있다고 하시였다. 또 정당활동을 하면 어차피 조직이 로출되여 적들의 탄압을 받을수밖에 없다는 말씀도 주시였다.

《성시백동무가 투쟁을 하자는것은 미제의 침략을 반대해 싸우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놈들이 만들어놓은 올가미속에 무엇때문에 발을 들여놓겠습니까. 성시백동무는 몇개의 무역회사를 만들어서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류동열선생, 송호성선생과 같은 애국적군인들을 납득시켜서 괴뢰군편성을 지연시켜온것이 간단한 일입니까.》

좁을사한 미간이며 곧은 코날로 해서 치밀한 사색을 하는 성격이라는것이 알리는 성시백의 단아한 얼굴에 갈피를 잡기 어려워하는 당혹한 빛이 어리는것을 보신 장군님께서는 자개박이함을 밀어놓으며 담배를 피우라고 권하시였다.

성시백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것을 본 그이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안을 잠시 거니시였다.

《조선민족을 예속시키자고 하는 적은 세계초대국인 미국입니다. 미제와 같이 강력한 적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어느 한 당이나 계급, 계층의 힘만 가지고서는 어렵습니다. 전민이 떨쳐나 거족적인 투쟁을 벌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외세의 침략과 간섭을 반대하는 정당, 단체, 개별적인사들을 모두 망라한 통일전선을 형성해가지고 전민이 떨쳐나 침략자와 투쟁을 해야 승리할수 있습니다.》

성시백은 황급히 담배불을 비벼끄고 경이와 존경의 빛이 어린 눈으로 장군님의 존안을 우러러봤다.

《무엇을 목표로 삼아 전민을 반미투쟁에 떨쳐나서게 하겠는가? 그것은 나라의 완전독립입니다. 다시말하여 전국적범위에서 조선민족을 자주권을 행사하는 국가주권을 소유한 민족으로 되게 해야 한다는것입니다. 미제를 반대하는 거족적인 투쟁을 전개하여 민족의 총의를 모은 합법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해서 조선민족의 자주권을 전세계를 향해 선포해야 한다는것입니다. 조선은 합법적인 민족통일정부를 가진 자주적인 국가이다, 우리는 38°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을 예속시키려고 하는 그 어떤 나라도 조선인민은 물론 세계의 규탄을 받는 침략자로 간주될것이다.···》

장군님께서는 힘차게 손세를 쓰며 청높은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성시백은 너무나도 벅찬 충격으로 해서 숨이 꺽 막히는것 같았다.

그는 환희의 빛으로 불타는 눈길을 장군님의 존안에서 떼지 못했다. 눈길만이 아니라 심장도, 아니 온몸이 감탄과 환희로 뒤설레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전민족의 심장을 불타게 할 이렇게도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웅심깊은 방략을 제시하실수 있는가! 위인의 사색이란 바로 이러한것이구나! 성시백은 환희의 불길에 스스로를 던져버린 행복에 취해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달았다. 몇번 연기를 삼키느라니 천성으로 되다싶이한 랭철성과 함께 리성적인 사고가 되살아났으며 장군님께서 제시하신 방략을 실현하자면 불피코 앞을 가로막을 수많은 난관들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환희와 행복의 세계에서 탈피한 그는 흥분을 다잡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씀드렸다.

《전 장군님의 구상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또 장군님께서 말씀하신 그 방략이 조선문제해결의 최선의 방안이라는것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성시백은 이야기를 잇지 못하고 참을길 없는 괴로움에 시달리는듯한 눈길로 장군님을 마주봤다. 위인의 사색에 흥분한 자신의 머리에 거칫거린 검은 그림자가 말을 계속할수 없게 한것이다. 생각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것이 자기가 취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 그는 말을 계속했다.

《조선은 미쏘량군의 리익이 얽혀있는 대결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량국이 장군님의 구상을 반대하지 않겠는지 걱정됩니다. 미국이 결정적인 방해를 놀것은 틀림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책이 손에 들고있던 부채를 원탁에 내려놓으며 한마디 했다.

《장군님께서는 전민족적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참으로 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장군님께서 이런 결심을 하셨을 때엔 그 가능성을 확고히 내다보셨기때문입니다. 우리 장군님께서는 실현시킬수 없는 전략을 제시하신적이 없습니다.》

《성시백동무의 근심을 알만합니다.》

장군님께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씀하셨다.

《통일전선을 결성한다고 해도 자주적인 민족통일정부를 창건할수 있겠는가 이것인데 수많은 난관이 우리를 방해할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걸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쏘련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지고 노력하겠습니다. 문제는 남조선인데 거기서도 목전의 리익을 놓고 다투고있으니 그렇지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리승만일당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있다고 생각합니다. 김구선생, 김규식선생, 조소앙, 안재홍선생··· 거기에다 반미애국의 립장을 이미 명백하게 표명한 홍명희, 리극로선생같은분들을 봐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민족자체력량에 망라될수 있는 모든 정치력량을 단결시켜 거족적인 투쟁을 전개해서 민족단일정권을 세우는것이 조선민족의 당면과제라고 우리는 생각하고있습니다.》

성시백의 우려는 놀램으로 바뀌였다. 김구, 김규식같은 사람들과도 통일전선을 형성할 생각이신가? 한사람은 정치적지반이 상당한 정도로 든든한 보통 완고하지 않은 반공보수주의자이다. 다른 한사람은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난해한 쉑스피어문학에 도통한 영문학자인 동시에 30여년간이나 미국과 쏘련, 중국, 프랑스··· 세계각국을 편답하며 강대국의 힘을 빌어 조선독립을 이룩해보려고 한 외교의 능수로 알려진 사람이다.

성시백은 말씀드리지 않을수 없었다.

《김구가 한때 장군님과 련합할것을 제기한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색한 처지에 빠져있던 중경시절의 일입니다. 그는 현재 서울 <경교장>에 들어앉아 소위 민족적량심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제왕행세를 하고있습니다. 반공에 대해서도 제일 요란스럽게 떠들고 중국에 있을 때 한두번 성공한 테로를 리용해 자기의 정치적목적을 달성해보려고 <정치공작대>라는것을 조직해서 북조선에까지 침투시키고있는 형편입니다.》

성시백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장군님의 말씀을 기다렸다. 그이께서는 성시백의 말을 주의깊이 듣고계실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였다.

《김규식은 김구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이 사람도 한때 쏘련의 힘을 빌어 조선독립을 달성해보려고 했다는것은 장군님께서 잘 알고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쏘련의 도움도 별로 받지 못한데다 <흑하사변>을 목격한 후에는 다시 미국쪽으로 기울어진 사람입니다. 친미사상을 가졌지만 리승만처럼 야심가형은 아니기때문에 우익진영은 물론 중간파인물들한테서까지 상당한 지지를 받고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히려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놈들은 김규식이 일정한 신망을 얻고있다는것을 알기때문에 미군사령관의 정치고문들과 미국무성에 끈을 달고있는 미국놈들이 달라붙어 그를 통해 남조선의 이름이 알려진 정객들을 장기쪽 옮겨놓듯 하고있습니다. 김규식도 미국놈들이 자기를 중시한다는것을 알고있어서 그는 그대로 미국놈들을 리용합니다.》

김책이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성시백에게 몇마디 말을 했다. 그러나 어조에는 분명 불만이 어려있었다.

《나는 성시백동무가 어째서 장군님께서 김구, 김규식같은 적대진영에 속해있는 사람들까지 민족자체력량에 망라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이때를 놓치면 자주적인 통일정권도 세워보지 못하고 예속될수 있다고 간주하고계십니다. 조국광복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운 우리가 자주적인 정권건설을 위해 그 정도의 노력도 하지 못하겠습니까?》

성시백의 얼굴에 경련의 파도가 스쳐지나고 안경알속의 엷은 눈시울은 파르르 떨렸다. 김책부위원장의 어조로 보아 장군님께서는 자기가 상상도 할수 없는 그 어떤 면밀한 구상을 하고계신다.

《나는 성시백동무가 김구선생이나 김규식선생을 비교적 정확하게 봤다고 생각합니다.》

자책감에 사로잡혀 깊은 생각에 잠긴 성시백의 귀에 장군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들었다.

《정확하게 봤는데 현재는 그것이 결함으로 되고있지만 앞으로는 긍정점으로 될수 있는 점을 아직 생각하지 못한것이 결함이라면 결함입니다. 김구선생을 례로 들어봅시다. 언젠가 미군사령관이 김구선생에게 무슨 의논할 문제가 있으니 미군사령부에 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김구선생은 대노해서 제놈이 뭔데 남의 나라에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가? 이 나라는 우리 민족의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하라! 이렇게 욕을 퍼부어서 련락온 부관인가 하는놈을 쫓아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을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하나의 웃음거리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리승만이 미군정에 협력하는것이 좋겠다고 권고했을 때도 이 나라에는 림정이란 정부가 있을뿐이라고 하면서 협력을 거절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시백동무가 말하는 완고한 민족주의자라는것인데 어쨌든 여기에는 미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사상이 담겨있지 않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민족주의란 애국사상을 바탕에 두고있다고 하시면서 조선이 장기간 분렬될수 있다, 미제침략자들은 남조선을 교두보로 리용하여 앞으로 반드시 전조선을 강점하려고 할것이다, 정세라는것은 강물과 같아서 대하를 이루기전에 막아버리면 유익하게 리용할수도 있지만 큰 강을 이루면 벌써 인력으로는 어쩔수 없다, 침략의 흐름을 막을 때는 바로 지금이다··· 김구에게 이 정도의 사상도 납득시키지 못하겠는가? 김규식선생의 경우에는 다른 각도에서 그를 민족의 편에 돌려세우는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할수 있다고 하면서 그이께서는 뒤를 이어 나가시였다.

《미제침략자들은 남조선을 강점한 후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한 시책이라는것을 대체로 김규식선생을 조종해서 시행해왔습니다. <민주의원>이니 <과도립법의원>이니 좌익중간파와의 련계를 맺는것들을 그 실례로 들수 있을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미군은 김규식선생의 권위를 리용하지 않고서는 남조선사람들의 환심을 살수 없다는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김규식선생이 리승만처럼 미국에 조선을 팔아먹자고 하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는것은 성시백동무도 잘 알고있을겁니다. 선생은 미국의 힘을 빌어서 조선독립을 달성하자고 하는데 종당에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고있습니다. 그래서 김규식선생과 미국놈들사이에는 갈피를 잡기 어려운 미묘한 암투가 계속되고있습니다. 미국의 힘을 빌리자는것은 선생의 약점이지만 독립을 달성해보자는것은 선생에게 애국의 뜻이 있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시백동무의 언변과 두뇌를 가지고 선생에게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조선의 독립을 가져올수 있다는것을 납득시킬수 없겠습니까? 이 사업에서 성시백동무가 성과를 거두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선생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애국의 편에 돌아설것은 말할것 없고 미국놈은 한팔을 잃어버리는것으로 될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민족자체력량은 강화되고 침략세력은 약화된다는것입니다. 이것이 자주적인 통일정부를 창건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을 주겠습니까.》

명백한것을 납득하기 어려워하는것이 김규식의 성격적특질이라고 할수 있었다. 김구와는 달리 일단 결심한 문제를 쉽게 버리는것이 김규식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의 일생이라고 말할수 있는 지난 기간의 정치생활이 여실히 증명해주고있었다. 성시백이 중경에 갔을 때 그는 비록 다섯명안팎의 당원이 있을뿐인 보잘나위없는 정당이였지만 좌익사상을 념원으로 삼고있은 조선혁명당의 주석이였다.

광복이 되여 서울에 돌아오자 이 주석자리를 별로 아쉬워하지도 않고 내던지고는 미군정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의 산파역을 수행했으며 지금은 미국의 침략성을 은페하기 위한 이른바 《과도립법의원》의 의장자리에 앉아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김규식선생이 유약하고 타협적인 정치인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만일 김규식선생이 그러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외국에서 30여년간이나 떠돌아다니면서 어려운 망명생활을 계속할수 있었겠습니까? 김구선생도 그렇지만 특히 김규식선생의 경우에는 마음을 의지할수 있는 사상을 발견하지 못한 탓에 정치적견해를 자주 바꾸고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지금 남조선에서 제일 부족한것이 사상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사상이 범람하고있는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 그것은 땅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민족적량심을 가진 사람들을 한품에 다 받아안을만한 사상이 없기때문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사색의 오솔길을 걷느라고 머리를 숙이고있는 성시백의 마음속을 벌써 헤아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시백은 얼굴을 들고 자신의 결심을 장군님께 말씀드렸다.

《전 부위원장동무가 저에게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의 운명과 관련된 대업을 앞에 두고 가능, 불가능을 생각하는것은 혁명가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장군님의 방략이 우리 민족을 구원할 유일한 길인것이 명백한 이상 저는 그것을 위해 한몸을 바치겠습니다.》

장군님의 안면에 순간 어두운 그늘이 비꼈다.

《우리는 성시백동무한테 반성하는 말이나 결심을 듣자고 시간을 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민족을 구원할 방안을 찾자고 마주앉았습니다. 김구, 김규식선생, 아니 민족적량심을 조금이라도 가지고있는 모든 정당, 단체, 개별적인사들을 한데 묶어세울 사상이 정말 없을것 같습니까?》

장군님께서 말씀하신것처럼 남조선이란 온갖 사상이 별의별 형태로 둔갑을 해서 판을 치는 사상의 범람지대라고 할수 있었다. 공산주의, 사회개량주의, 허무주의, 민족주의, 세계주의, 봉건주의, 친미사대주의, 개인주의··· 그것이 또 분파를 이루고 새끼를 쳐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는 잡사상을 정견으로 내걸고 악마구리 끓듯 하는 정계에서 남조선민중을 반미구국투쟁에 불러일으킬수 있는 견인력과 감화력을 가진 사상이란 어떤것이겠는가? 성시백이 혼신의 힘을 다 바쳐 조선민족의 진두에 세울 기발의 명구를 생각하고있는데 가벼운 손기척소리가 들리는가싶더니 응접실문이 열렸다. 김정숙동지께서 웃음지은 밝은 모습으로 방에 들어오셨다. 장군님께 가까이 다가가시여 나직한 음성으로 몇마디 말씀을 하시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우리 식사를 한 후에 이야기를 계속하는것이 어떻습니까?···》

몇명이 둘러앉아 식사를 할수 있는 검소한 안방에 안내되였다. 두칸 남짓한 방이였다.

김정숙녀사께서 친히 음식그릇을 들고오군 하시였다. 장군님의 가장 가까운 전우이며 백두의 녀장군이신 녀사께서 접대원이 해야 할 일을 손수 맡아하시다니? 부엌을 향해 말씀을 할 때도 동무라는 친근한 호칭을 달아 상대를 불렀으며 음성은 무척 부드럽고 다정하시였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부엌에서 녀사를 특별히 존대하여 부르는 말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지어 사모님이라는 존칭사마저 쓰는것같지 않았다. 직무에서는 차이가 있을수 있어도 인간으로서는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리념이 장군님댁에서는 벌써 구현되고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사상과 리념을 생활에 구현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는 성시백은 마음이 정화되는듯한 뜨거운 감회에 휩싸였다. 장군님댁에 이런 숭고한 가풍이 형성된것은 녀사께서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셨기때문일것이다.

깊은 상념에 빠져있는 성시백에게 기울여주는 녀사의 정성은 또 얼마나 각별하신가. 적구에서 사업하시자니 고생이 얼마나 막심하겠는가? 긴장한 생활을 계속하느라고 음식맛을 즐기며 때식을 들기도 어려울것이라고 하며 그의 식성에 맞는 낙지, 명태같은 마른 음식을 성시백앞에 놓아주시는것이였다. 항일대전시기 녀사께서 적구투쟁을 많이 하셨다는것을 알고있는 성시백은 그 경험을 듣고싶은것이 소원이였는데 오히려 자기의 그닥지 않은 사업과 고충을 이렇듯 크게 사주시니 몸둘바를 알수 없었다.

《성시백동무는 자기전에 밤참을 먹는 버릇이 있다는데 혹시 지나치게 무리를 해서 벌써 수면장애를 받고있는게 아닙니까?》

녀사께서 마른 음식을 좋아하는 자기의 별스런 식성을 알고계시여 저으기 놀랐는데 장군님께서는 늦은 저녁을 먹군 하는 습관까지 알고계신다. 혹시 호텔의 료리사들이며 의사들이 자기의 남다른 습관을 말씀드린것이 아닐가?

《그런것이 아니라 광복전에 밤에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밤참을 먹군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져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놓입니다. 모든 사업이 다 그런것처럼 혁명투쟁에서도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식탁을 차려놓고 방에서 나가시려는 김정숙동지를 불러세우시였다.

《거 내게 말하던것이 준비됐으면 지금 들여오오. 정숙동무의 성의인데 식사를 하기전에 봅시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곧 별로 크지 않은 함통을 들고 들어오시였다. 정성을 들여서 짠 함인데 부드러운 인견으로 싼 그릇같은것이 들어있는것 같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영문을 몰라하는 성시백앞에 찬합을 놓으며 소박한 선물을 송구해하는듯한 빛으로 말씀하시였다.

《민순임동무(성시백의 안해)마음에 들겠는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준비하느라고 그릇을 고르롭게 갖추지 못했어요. 남쪽에서 사업하시니까 태여날 아이가 백날이 돼도 가보지 못할것 같구 돌잔치에는 가봤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겠는지···》

아직 세상에 태여나지도 않은 아이의 백날이며 돌을 위해 선물을 마련하시다니··· 내가 무엇을 했기에! 존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이런 선물까지 준비하셨는가. 김책의 말이 아직도 머리속에서 어른거려 부끄러움을 금하기 어려운데 선물까지 준비하시다니···

김정숙동지께서 그릇을 덮었던 부드러운 천을 들어 한옆으로 제쳐놓으시였다. 어린애의 밝은 웃음처럼 눈부신 빛을 뿌리는 은으로 만든 중발이며 종발, 애기은수저··· 동그랗게 꽃모양을 세공한 그 가운데에 역시 섬세한 솜씨로 새겨넣은 글씨가 보였다.

《자립》

순간 성시백은 전기에 감전된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환한 웃음을 짓고계신 장군님을 마주보고 김정숙녀사를 마주보는 안경속의 두눈이 환희로 불탔다. 격정을 억제하는데 습관되고 세련된 동작이며 말투가 몸에 밴 성시백이 거치장스러운 이른바 례절이라는것을 순간에 날려버리고 흥분한 목소리로 웨쳤다.

《알았습니다. 장군님! 어떤 사상을 단결의 기둥으로 삼아야 하겠는지 알았습니다.》

《정숙동무가 생각해낸 이름인데 사내가 태여나면 별루 이상할것 같지 않은데 처녀애가 태여나면 좀 유별나게 들릴것 같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아이의 장래가 아니라 민족의 장래를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신문에서 보기도 하고 방송을 통해 듣기도 했는데 어째서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장군님!》

《성시백동무가 마음에 든다니 나도 기쁩니다. 남조선인민들을 단결시킬수 있는 사상을 발견했으니 성공의 첫 대문을 열었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그런데 내 성시백동무에게 한가지 의견을 말할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시백동무가 정치가로 활동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상선전, 통일전선사업이 첫째이고 이 사업을 위해 다른 사업도 해야 한다는것입니다.》

장군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경험을 말씀해주셨다. 어느 한 지역을 혁명화하기 위해 투사들이 파견되였을 때 어떤 방법으로 사업했는가, 김정숙녀사, 권영벽의 사업경험을 특히 자상하게 말씀하시였다.

성시백의 간곡한 소청을 받은 김정숙녀사께서도 식당에서 들어와 항일대전시기의 투쟁경험을 직접 말씀해주시였다.

녀사께서 경험담을 끝내시자 장군님께서는 말씀하시였다.

《남조선은 어느 한 지역이 아니라 조국의 절반땅이니 똑같은 방법으로 사업할수는 없을겁니다. 그러나 신갈파나 연사, 장백이나 신흥지역을 혁명화한 경험은 오늘도 참고로 할수 있을겁니다.》

장군님께서는 한 지역을 혁명화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조직을 꾸리고 지도핵심과 대중과의 련계는 어떤 방법으로 취했으며 선전은 어떻게 하고 자체보위를 위해서는 어떤 대책을 세웠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였다.

《우리의 생각을 간단히 말하면 성시백동무는 민족자체력량을 편성하기 위해 사상사업, 통일전선사업을 하는 정치가가 되여야 한다는것입니다. 이 사업을 성과적으로 진행할수 있게 신문도 내고 조직도 더 잘 꾸리고 자체보위를 할수 있는 대책도 세워야 합니다.》

말씀을 끝낸 장군님께서는 성시백의 사업을 위해 축배를 들자고 하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