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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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럭한 고무신을 털썩털썩 옮겨짚으며 안동권은 마당을 거닐고있었다. 반반하게 다져진 석비레땅을 내려다보다가는 고개를 들어 유리처럼 파란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였다. 왜 그런지 안정이 되지 않는것이다. 독서를 하면 번민을 얼마간이라도 가실수 있을것 같아 몇장 읽었더니 혈압이 오르면서 머리가 휘휘 돌아간다. 그는 문득 김책이 또 나타날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우정 피할 필요도 없었고 또 그닥 싫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요청에 성근히 응할수 없는것이 매번 안타까울뿐이다. 독실한 농민같이 수수하게 생긴 김책은 침착하고 내성적이면서 또한 완강하였다. 공산당 본부의 요직에 있다는 그는 온적마다 한본새로 맑지 못하게 대하건만 낯색 한번 달리하지 않고 계속 같은 용무를 안고 또 같은 기분으로 찾아온다. 그래서는 똑같은 음조로 왜 교단에 나와주어야 하겠는가, 그것이 건국사업과 어떻게 련관되여있는가를 해설한다.

초인종이 울리였다. 아니나다를가 안동권은 김책이 온것으로 짐작하고 급히 대문을 열어주었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하는것은 예상과는 판이한 서울신사였다. 향수내를 확 풍기면서 몇초동안 서있다가 이쪽에서 인사차림을 하자 중절모를 벗어들며 천천히 걸음을 내짚는다.

《선생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한달전에 잠간 들렸던 일이 있었습니다만.》

《알만합니다. 민씨라고 하셨지요.》

《옳습니다. 민기환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잊지 않으시고 친절히 맞아주시니.》

안동권은 역시 그의 고유한 품성대로 손님을 친절히 안내해서 응접실로 들어갔다. 검소한 방에는 키낮은 네모탁자가 놓이고 그 둘레에 방석이 널려있었다. 창가에 놓인 화분대에는 유능한 원예사의 정성이 깃든 키낮은 무궁화 한그루가 청자기화분에서 싱싱히 자라고있고 벽 한쪽에는 김홍도의 그림을 모사한 족자 한폭이 단정하게 걸려있었다. 방안을 잠간 둘러보고있던 민기환은 눈부시게 흰 와이샤쯔목깃과 밤색바탕에 흰점이 찍힌 넥타이를 만져보고나서 침착하게 말을 떼였다.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건강하시니까 저의 기쁨을 무어라 표현하기 힘듭니다.》

먼저번이나 이번이나 다같이 그의 침착한 거동이라든가 세련된 언어구사를 통해서 대단히 능란한 외교관같은 인품을 느낄수 있었다.

《온, 천만에, 저같은것이 뭣이기에.》

안동권은 손을 내저었다. 보다 세련된 몸가짐과 보다 능란한 례법을 그도 갖출수 있었지만 저쪽에서 정도를 초과하는 때는 불쑥 이렇게 엇나가는 괴벽한 점이 있었다. 그는 부엌에 대고 차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민기환은 방바닥에 놓았던 가죽트렁크를 가져다 절컥 열었다. 텍사스주 특산품인 고양이표 브란데와 담배 럭키스트라이크가 나오고 브라질제 커피도 한통 나왔다. 그것들은 모두 지함에 든것이였다.

《선생님, 달리 생각지 마십시오. 이것은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제가 여기서 소비하고 갈것들입니다.》

빨락지를 째고 병을 내놓으니 술이나 담배들에서는 벌써부터 각각 향기를 풍기였다. 민기환은 담배를 테서 안동권에게 권하고 자기도 한대 붙여물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선생님께서 예정한 날에 나타나지 않기때문에 무슨 변고가 있든지 아니면 몸져누우신것으로 짐작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정하시니 참말 감개무량합니다.》

《아니, 내가 그쪽과 언제 날자를 정한적이 있었던가요?》

예민한 안동권은 과분한 치하속에 은근히 까닭을 캐는 뼈가 숨어있다는것을 감촉하고 웃으면서 되물었다.

《그거야 없었지만 저번에 왔을 때 감기가 나으면 지체없이 떠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어쨌든간에 서울서는 지금 선생님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우정 찾아왔을거루 저는 알고있습니다.》

《오! 왔소 그런 일이 있었지. 려순공대출신이라고 하면서 안경을 낀 젊은이가 왔댔소. 그 사람은 인차 돌아간다고 했었는데 그후 어떻게 됐는지.》

《그 사람도 소식이 없고 선생님도 통 기별이 없으니 궁금할밖에요.》

홍차 잔을 밀어놓고 민기환은 브란데를 부어 권하였다. 안동권은 잔을 받으면서도 약간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상대가 인차 속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멀리 환을 지어 죄여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툭툭 타진도 해오기때문에 한껏 정신이 긴장되였다. 한동안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펼치던 민기환은 제낀옷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 하얀봉투 하나를 정중히 꺼내놓았다. 그는 이름이 보이는쪽으로 돌려잡더니 안동권앞에 두손으로 밀어놓는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안동권이 드디여 예측이 맞았다고 생각하면서 눈덕을 들어 예리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속을 보시면 아시게 됩니다.》

민기환은 안동권의 기분을 살피며 잘못하다가는 《무기명봉투를 나는 개봉할수 없소.》하면 안될것 같아 인차 봉투를 뜯어 단정히 내놓았다.

안동권은 무심히 속지를 집어들고 탁자에 놓인 돋보기를 걸치였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예리한 빛을 뿜고있는 그의 눈은 잠시동안에 한장의 글을 다 읽어치웠다.

속지는 영문자로 된 글이 타자기를 거쳐 나온것이였다. 안동권은 돋보기를 벗고 속지를 한쪽으로 밀어놓더니 입가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본 민기환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혹시 그 편지를 북북 찢어 창밖에 내던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상대자의 면상을 후려칠 경우도 예상했던것이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것은 선생님에 대한 저희들 그리고 저쪽의 최대의 신임의 표시인줄 압니다.》

《그렇소. 그것은 참말 고마운 일이요.》

이쯤되면 안심할수 있는것으로 보이는 모양인지 민기환은 기분을 돌리기 위해 술을 따서 각각 잔을 채우더니 《축하를 받아주십시오.》하고 잔을 들어올린다. 그러는 민기환의 얼굴에는 자못 희열이 넘쳐흘렀다.

《여보! 민군!》 안동권은 갑자기 하대하는쪽으로 호칭을 돌리면서 허리를 꼿꼿이 폈다. 《이 신임이라는것은 내게 과남할뿐더러 격에도 맞지 않소. 거치장스럽기까지 하구. <서울대학 학장으로 초대한다. 미군정청 고문 송성수> 여보! 똑똑히 듣소. 이 안동권이는 송성수따위의 추파에 매혹을 느낄 인간이 아니요.》

《아? 선생님,고정하십시오.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라 저희들이 너무 선생님을 기다리다가 나중에는···》

《무엇때문에 당신네들이 나를 기다리는가 하는거요.》

안동권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안을 왔다갔다하였다. 언제 보나 온건하던 그의 언동은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졌다. 민기환이로서는 그것이 도저히 리해되지 않았다. 묵묵히 앉아있던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인테리들의 경우에는 이런 때 단단히 눌러놓아야 한다. 그의 자존심을 그대로 두면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는지 모르는것이다.

《안선생!》하고 민기환은 나직이 불렀다. 안동권이 자리에 앉자 그는 엄엄한 눈길로 쏘아보면서 말하였다. 《우리가 선생님을 존경하고 기다리였다는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라고 칩시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신임이야 그렇게까지 타기할수 없잖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저쪽의 동의와 지원밑에서 행동하는것만큼··· 이에 대해서는 먼저번에도 약간 말씀올렸습니다만···》

불을 끄려고 쏟아부은것은 물이 아니라 기름격으로 되였다.

안동권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소리쳤다.

《그러니 당신은 나더러 어데다 대고 굴복하라는거요. 나는 조선사람이란말이요. 서울대학 학장으로 초대한다는 글을 꼭 영어로 표기해야만 하겠소, 응? 미국? 그것으로 위압될 촌뜨기가 아니라는것쯤 당신은 모르오? 나를 뭐 어째보자구. 하긴 그것도 자유일수 있겠지. 그러나 하는짓이 어리석단말이요. 이제는 내가 공개해도 되오. 안동권으로 말하면 1944년 12월에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데리러온것을 물리친적이 있소. 그 사람들은 나의 개인연구소를 꾸려준다고까지 했댔소.》

민기환은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놀랐다. 그런것까지는 몰랐던것이다.

《여보, 당신 똑똑히 들어두오. 내가 서울에 가는것은 당신들에게 필요되는것이 아니라 안동권 나자신의 필요에 의한것이란말이요. 그래 안동권을 무슨 미끼로 하려는건가? 응? 너절한 속물들같으니.》

《고정하십시오, 선생님. 사실은 저의 잘못이 큽니다. 선생님께서 여기 눌러앉으시면 서울과 남에 있는 그 숱한 지성인들을 이끌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래서···》

민기환은 돌변하는 저쪽 기분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였다. 한참동안이나 분노를 터뜨린 안동권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랭랭히 앉아만있다.

《이렇게 하면 내가 무례한 인간으로 된다는것을 나도 잘 아오. 그러나 난 지금 이렇게밖에 달리 할수 없소. 민군! 돌아가오.》

《선생님! 저는 이대로 돌아갈수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서울로 오시겠다는 의사가 있었기때문에 그것이 빨리 성취되도록 도와드리기 위해서 한것인데 어째서 오늘에는 선생님이 이렇게 생각을 달리 하시는지 알수 없습니다.》

《달리 한다?》

안동권은 바퀴가 큰 귀를 상대쪽으로 돌리면서 반문하였다.

《그렇습니다. 왜 서울에 가신다는 예정을 바꾸시였는지.》 민기환은 울상이 돼서 두손을 앞으로 내대고 머리를 흔든다.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납득될수 있게말입니다.》

그렇게 되자 안동권은 더 론의할것이 없다는 투로 편지를 앞으로 썩 밀어놓으면서 차잔을 들어올린다.

《당신하군 우선 론리가 통하지 않아 말을 해낼수 없소. 달라지긴 누가 달라졌나, 응! 나는 서울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단말이요. 그런데 당신이 군정청이요 학장이요 하면서 잔꾀를 부리고있단말이요. 응? 누가 달라졌나 보오. 달라진건 그쪽이지. 그렇지 않소?》

민기환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안동권의 명석한 판단과 빈틈없는 론리를 도저히 허물어낼수 없었다. 더구나 서울로 간다는것이 스스로 명백해졌고 그자신을 통해서 재삼 확인되였기때문에 그는 환성을 지를만치 기뻤다. 불행중 다행이라 할가. 하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체면을 유지하면서 후퇴해야 하였다. 결론이 이렇게 떨어지는것을 공연히 처참하다 할 정도로 빌붙은것이 후회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봉투를 다시 안동권이 앞으로 밀어내놓고 또 한번 잔을 찧을것을 제의하였다.

《감사하네!》 안동권은 시초에 유지했던 존대로는 끝내 돌아가지 않고 계속 도고하게 하대를 한다.

민기환은 잔을 비우고 거듭 건강에 류의할것을 말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동권은 민기환을 친절히 배웅하였다. 그가 늘쌍 자녀들에게 《상대가 누구든 관계없다. 집에 찾아온 손님은 문밖까지 잘 바래주어야 한다. 이것이 안동권의 집안의 가풍이다.》라고 훈계하군 했는데 이때도 그 생각을 하면서 고무신을 끌고 문밖까지 따라나갔다.

민기환은 두세번 거듭 인사를 하고나서 한길쪽으로 멀어져갔다.

《아! 이건 큰 고역이군. 오늘이나 래일쯤 김책이 또 나타나겠지··· 허허 참.》

그는 고개들 쳐들고 긴 한숨소리를 터치였다.

언제 보나 맑고 깨끗하던 가을하늘이 피빛으로 물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