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4

 

4

 

좌현이가 떠난 후에 박원식은 안명숙에게 무슨 용무가 있기에 그러는가고 물었다. 그러나 안명숙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보이면서 처녀가 샤쯔를 만들어왔길래 입어보고 가라고 그랬다고 했다. 처녀말이 나오자 공연히 몸이 굳어진 그는 빨리 철도에 나가봐야겠다면서 휙 돌아서 나갔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어깨가 넓으며 미끈하게 생긴 박원식은 제입으로 군복을 입었을 때보다 격이 뚝 떨어졌다고 하지만 안명숙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사나이답게 언틀먼틀하게 생긴 얼굴륜곽이며 름름한 그 체구가 사복, 제낀옷에 의해 한껏 효과를 내고있었다.

《아니 넌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평양처녀가.》

안명숙이 옆에 서있던 처녀의 등을 탁 밀쳐서야 비로소 필남이 걸음을 뗄수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이제 놓치면 열흘이 될지 한달이 될지 기약이 없는것이다. 치마자락이 날릴만치 총총히 뒤따라가건만 저쪽에서는 뒤를 한번 돌아다보지도 않고 무엇에 쫓기듯이 내빼고있다.

《저! 이보세요, 이거.》

혼신의 힘을 다해서 웨치건만 귀에는 모기소리만큼도 울리지 못한다. 젊음이 가득찬 가슴이 급히 오르내리고 숨이 턱에 닿았다. 한데 천만다행으로 어떤 할머니가 박원식에게 길을 묻고있었다. 할머니가 길을 물었는지 그가 말을 걸어서 그 핑게로 처녀를 기다렸는지 알수 없으나 어쨌든 필남이는 그사이에 따라잡을수 있었다.

록록치 않은 깔끔한 눈을 치켜뜨면서 처녀는 박원식이앞에 불쑥 나섰다.

《할머니, 조심해 가세요. 요 골목 지나서 인찹니다.》

성급하고 거칠다고 보았던 그는 심술궂을만치 깐깐해져서 골목어귀까지 로인의 손목을 잡고 가기까지 한다.

필남이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혹시 그러다가 그쪽 골목으로 아주 빠져나갈것 같아 처녀는 그의 뒤에 붙어서지 않을수 없었다.

《필남인 정말, 남보는데서 졸졸 따라다니면서···》

말로는 노엽다는것이지만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있었다.

《누가 따라왔나요. 그쪽에서 막 내빼구선.》

긴 살눈섭을 들어올리자 흑진주같은 눈동자가 사나이를 옴짝 못할만큼 취하게 만든다.

《왜 왔어?》

《옷이 됐으니 입어보라고 그래서.》

서로 번연히 알고있는 숨박곡질대화가 몇마디 오가는 사이에 그들은 꼭같이 이대로 헤여질수 없다는 속심을 드러내보이고야말았다. 하긴 이렇게 되기를 그들이 서로 바랐을수도 있다.

박원식은 우정 역전쪽으로 나가지 않고 양기산기슭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날은 어두워져 거리는 네온으로 장식되였는데 그들이 한가롭게 걷고있는 아카시아숲속만이 가뭇 정적에 잠겨있었다. 바람이 불적마다 동전잎같은것이 우수수 떨어지군 하였다. 박원식은 드문드문 서있는 외등밑에 이르게 되자 처녀를 몇걸음 앞세워놓기도 하고 또 뒤에 두기도 하면서 얼굴이며 몸맵시를 앞뒤로 뜯어보는것이였다. 알맞춤한 키에 급하게 곡선을 이룬 어깨와 목 그리고 팽팽한 앞가슴은 오늘따라 처음보게 된 깜장치마에 흰저고리와 황홀하게 잘 어울려있다. 건강미가 안받침된 감실감실한 살결에 언제나 사색하고있는듯한 눈과 약간 도드라진 입술, 그것들은 평양고녀출신이라고 볼수 없을만치 순박하고 어져보이였다. 하지만 박원식은 처음부터 이토록 아름다운 처녀의 용모에 대해서는 그닥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기를 그리워한다는 그것을 처녀의 얼굴에서 읽는 순간에 가슴에서 확 불길이 용솟음쳐올랐던것이다. 부모와 형들을 부암동근거지에서 다 잃고 토스레잠뱅이적삼을 걸친채 마안산밀영을 찾아갔던 그였다. 그는 이때까지 오직 전우들의 보살핌과 지휘관들의 관심속에서만 살아가는데 습관되여있었다. 한데 눈앞에 아릿다운 처녀가 몸에 감쌀 속옷이며 양복을 해들고 나타났을 때 그는 머리가 뗑 하고 리성이 혼미해지고말았다. 하여 그가 여태 상식으로 간직했던 우정을 거치지 않은 애정은 백년불행의 시작이라든가 애정은 공통된 지향과 행로에서 얻게 되여야 한다는 등의 교훈을 고려할 여유가 전혀 없었던것이다. 인정에 주려왔던 그가 이성이라는것을 처음으로 대상하게 되였을 때 이미 간직했던 리상이나 기존지식같은것은 모두 걷잡을수 없이 무너지고말았다. 하지만 이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로정을 처녀나 주변사람 그 누구도 알수 없었다. 다만 지금 바싹 붙어서서 거의 공포에 질리다싶이 되여 따라오고있는 필남이만은 저편에서 자기를 굴복시키고도 남을만 한 야심과 정열과 과격함이 있다는것을 알고있을뿐이다. 처녀도 고녀시절과 그 이후에 사람들한테서나 또는 책에서 얻은 남성에 대한 견해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박원식을 만나는 순간부터 처녀는 남성의 미는 행위의 고상한 목표 또는 애정을 영원히 지켜낼수 있는 완강한 의지라는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게 되였다. 처녀가 보건대 박원식은 열정의 화신이였다. 예리하지 못하고 뭉툭한 심리, 세련을 거치지 못한 대인관계에서의 조잡성, 군사, 전투 그것외에는 모든것을 무시해버리는 일면성, 이를테면 9가지 단점에 단 하나의 장점이라 할수 있는 그의 열정 그것이 이여의 모든것을 압도해버린 그런 남자였다.

《그만하고 돌아가오.》

박원식은 앞을 막아서며 약간 갈린듯 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여기서 옷을 입어볼수도 없는거구 또 입어봤대야 그게 무슨 소용이요.》

처녀는 긴 살눈섭을 들어올리며 절망적으로 쳐다보는것이였다. 처녀의 그 시선은 (왜 그래요. 나는 그래도 이것을 정성껏 만들었는데··· 캄캄하고 바깥이니까 입어볼수는 없다쳐도 소용없다는건 또 뭐야요.)하고 웨치고있었지만 오히려 그의 입술은 피가 날만치 씹혀있었다.

한동안 서로 말없이 서있었다. 그러다가 박원식이 까닭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했음인지 가던 길로 또 걸음을 내짚으며 무뚝뚝하게 입을 놀리였다.

《지금 철도가 잘 운영되지 못해 온 나라가 큰 난관에 처해있소. 역전마다 인산인해요. 물자를 싣지 못해 공장이 못돌아가고 식량이 없어 아우성이고···》

《그런데 그것이 누구탓이게 그쪽에서 그렇게까지.》

처녀도 얼마간 대담해져서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탓으로 말하면 일본제국주의탓이지. 그렇지만 그걸 해결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들한테 있단말이요.》

《해결할 의무와 책임이요?》

처녀는 더욱더 미궁으로 들어가는것 같았다. 자기가 알고있는 범위에서의 의무나 책임은 그런것이 아니였을뿐더러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때문에 자기들의 사랑이 파동을 겪어야할만 한 그 어떤 타당성이나 필연성을 꼬물만치도 찾아낼수 없었다. 더구나 며칠전까지 그렇게 소망했던 샤쯔가 이제는 전혀 쓸모없는것으로 보이게 되는 그것과 전혀 련결시켜낼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하고 처녀는 따지고들었다.

《그러니까 가져다 둬두오.》

《둬두라구요?》

너무나 놀라와 처녀는 무의식적으로 받아외웠다. 그것만으로도 처녀는 며칠사이에 박원식에게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것을 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가슴에 안았던 보자기를 동댕이치고 목청껏 울음을 터칠만치 분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처녀는 참았다. 아직 열어보아야 할 미궁의 칸은 얼마든지 있었고 또 이 자리에서 설음을 보인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의것도 아니였다.

《그런 의무와 책임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내가 알기에는 김일성장군님부대는 10년이상 산중에서 초근목피를 달게 여기며 일제와 싸웠다지 않아요. 그래서 인민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나도 역시 그렇고. 그런데 철도가 어떻고 공장이 어떻고 식량이 어떻고 그게 왜 거기 책임이겠어요. 그건 다 거짓말이고 결국 내가 싫어서···》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숨을 흑 들이그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니요, 아니요.》하며 박원식은 마치 새새끼를 덮치는 아이들처럼 처녀의 어깨를 덥석 부둥켜안았다. 처녀가 본능적으로 반발하자 그는 억센 팔로 더 부쩍 그러당겨 가슴에 머리를 눌러대였다.

《난 달라진것이 없소. 진정이요. 나는 필남이를 사랑하오.》

짓눌린 박원식의 목소리가 아카시아숲속을 울리였건만 그 누구도 그것을 들을수가 없었고 지어 턱밑에 안긴 처녀마저도 들은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처녀의 얼굴과 입술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으며 온몸으로 이성의 애무를 갈망하고있었으나 행동은 그와 정반대였다.

끝내 몸을 빼낸 처녀는 두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서 박원식이 안고있는 보자기를 쏘아보며 명령하였다.

《그걸 이제 입어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겠어요.》

박원식은 입을 한 반쯤 벌리고 저편을 쳐다보면서 울상이 된다.

《그렇게 똑똑히 말했는데 그래도 못믿겠소?》

《그런게 아니예요.》

또 부인하게 되자 박원식은 상의를 풀밭에 벗어던지고 보자기의것을 와락와락 헤치더니 와이샤쯔에 팔을 꿰였다. 그러자 처녀는 빽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하였다. 무엇때문에 우는지 자기자신도 몰랐다. 욕할 때는 삐쭉했다가 얼리며 가슴에 안아줄 때 울음을 터치는 어린애심정과도 같은것인지 덮어놓고 눈물이 그칠새없이 흘렀다.

귀전에 울린 박원식의 음성이 《이제 석탄투성이가 되겠는데》하는것 같아 처녀는 《아무래도 좋아요. 불에 타도 좋구요.》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종시 입안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걸어서 평양역쪽 한길에 들어섰다. 밤이 깊어 사람들 래왕이 거의 없었는데 다만 야경을 서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이따금씩 보일뿐이였다. 박원식은 묵묵히 길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이런 때 무슨 말을 해야 처녀에게 위안이 되겠는지 알지도 못하였으며 설혹 그것을 알고있었다 해도 입술에 발린 그런 천박한 말을 번지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노상 고민이 없는것도 아니고 또 처녀와 의논하고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얼굴에 내비친것을 보고 처녀가 그토록 강경해지고 초조해졌는지도 모른다.

며칠전에도 그랬고 또 오늘도 그런 충격이 있었는데 동무들가운데서 유격대원들의 사랑, 결혼, 그런것은 지금 너무 시기상조라는것이다. 어떤 친구들은 공공연히 비난조로 말하기도 하였다. 군복을 벗자마자 기다렸다는듯이라든가 아직 행군길이 멀고먼데 벌써 배낭을 벗자고 하는가 그런것이였다. 좌현이의 귀띔에 의하면 지휘관들가운데도 머리를 흔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때문에 박원식은 이런 정도로 있다가 적절한 기회를 볼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소탈하게 필남이를 설복해서 자기와 같은 립장에 서도록 만들고싶었다. 그러나 매번 만나기만 하면 감정은 심술궂게 조급한데로 끌고갔으며 자기와 다른 또하나의 박원식이가 제멋대로 휘둘러놓는것이였다. 마치 처녀의 빛나는 눈동자는 그 모든것을 꿰뚫어보고있는듯 하였다.

《결국 지내보니까 필남이는 제마음대로 할수 있는 그런 남자를 요구하는거지?》

하고 박원식이 롱을 걸자 《그렇게 보이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 세상의 모든 남녀관계는 그렇게 되기마련이라나요.》하고 천연스럽게 응수하였다.

《아니 뭐?》

놀라와하는데 처녀는 《왜요?》하고 제편에서 오히려 놀라움을 보인다.

그들은 서로 롱담을 하고있었지만 그안에는 진심의 알맹이가 깃들어있었다.

《그렇단말이지.》 박원식은 처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정하게 말하였다. 《필남이,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남편이 차지하는 안해, 안해가 차지하는 남편 그것은 옳소.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수는 없고 그렇게 돼서는 안되오. 내 말 좀 듣소. 필남이는 나를 완전히 제것으로 만들고싶겠지.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는 바보구실밖에 못하오. 이 박원식은 필남이보다 먼저 혁명이 차지해야 하오, 알겠소? 지금 내가 어데로 가는가. 철도기관구로 가오. 혁명이 거기서 부르고있단말이요. 우리는 이렇게 여태 살아왔소.》

잠간 이야기가 중단되였을 때 마주서있던 처녀는 어깨를 들었다놓으며 긴숨을 내쉬였다. 어쩌면 그렇게도 솔직하고 고상한가, 여직 들어본 일도 없고 따라서 상상도 할수 없었던 그런 숭고한 이야기가 지성이 깊지 못하다고 보았던 저편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고있다.

《필남이 내 말을 듣소. 우리도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웠소. 또 안해와 자식을 아침저녁으로 쳐다볼수 있는 단란한 가정도 필요했구. 그런데 우리는 눈구뎅이속에서 잤고 가정을 뒤에 두고 밀림속을 걷고걸었지. 그러다는 전투에서 희생되고, 그래 지금 평양에 온 조선인민혁명군은 얼마 많지 않소. 그들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살아남은 사람들이요. 알겠소. 숱한 사람들이 해방된 조국이 그리웠지만 종시 오늘을 못보고 갔거든. 자! 이렇소. 이런데두 내가 깡그리 필남이가 차지하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소? 우린 할 일이 많소. 이 땅에다 나라를 세워야지 또 세계혁명도 해야 하구. 와이샤쯔에 넥타이를 매구 필남이와 나란히 대동강가에 앉아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고싶소. 나에게 하고싶은 말이 오죽 많은줄 아오. 나의 어머니, 아버지 고생한 이야기두 하구, 유격대밀영생활도 참 재미있었소. 필남이 알겠지, 내 말을···》

《알겠어요.》

처녀는 불타고있는 사나이의 눈을 말끄러미 쳐다보면서 입새로 대답을 겨우 내보내였다. 하지만 그것은 가슴속깊은데서 퍼올린 진심이 담긴것이였다.

《후회하지 않겠지. 사람이 슴슴하구, 뚝바우구. 그렇지만 한가지만은 좋은점이 있을거요. 그건 뭔가. 변하지 않는다는거요. 우리가 배운것은 변절하지 않는다는것을 목숨을 걸고 배웠소. 혁명앞에서도, 동지앞에서도 또 처녀앞에서도 그것을 담보한단말이요. 그만하고 난 가겠소. 자 다시 만나기요.》

박원식은 철길옆 느티나무밑에 이르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래일 서울로 떠나오. 보름이 될지 한달이 될지 모르겠소. 어쨌든 갔다오겠소.》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것을 꿀꺽 삼키였다. 무슨 말인지 할듯할듯하면서도 자꾸 손만 흔들어준다. 또 휘딱 장면을 뒤집어놓는데 놀란 처녀는 손을 내밀기는 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손을 놓고 박원식이 돌아설 때 《좀 서세요.》하고 엉겁결에 소리를 쳤다. 박원식은 돌아섰다. 한걸음 사이를 두고 마주섰는데 처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쳐다본다. 이윽해서 박원식이 또 자리를 뜨려고 하자 다시 같은 구령을 반복하는것이였다. 《좀 서세요.》 그다음에도 두번이나 같은것이 반복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