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3

 

3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강병철이 책을 한아름 안고 층계를 텅텅 구르며 2층으로 올라가고있었다.
대우가 나서 반질반질한 널마루복도를 지나 침실미닫이를 발끝으로 밀어 제끼였다. 문이 열리자 낯선 청년 셋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어줍은 웃음을 짓고 서서 실례한다고 인사를 하더니 려관주인이 한방에 같이 들도록 이야기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거나말거나 강병철은 장마당에서 만난 그 녀인에 대해 화가 한껏 동했던지라 들고온 책을 다다미방 한쪽구석에 와르르 쏟아놓았다.

《무식한것들을 치료하는 약은 왜 없는지 모르겠거든. 에익 참.》

한쪽구석에 아무렇게나 앉고난 그는 기분을 눅잦히려고 담배만 게걸스럽게 빨고있다. 먼저 든 손님이 한껏 기분이 상했다는것을 알게 된 세청년은 어색해서 절절매였다. 감각이 예민한 강병철은 널려진 책들을 한데 모으고나서 손님들과는 전혀 무관계하다고 하면서 책을 사오게 된 사연을 대충 말하였다. 그렇게 되자 얼굴색이 검고 몸이 다부진 청년이 그렇다면 마음이 놓인다면서 먼저 인사를 청하였다.

《뵈온적없습니다.》

《피차일반입니다.》

강병철이 팔을 앞으로 내짚으며 맞인사를 하였다.

《저희들은 여기 평안남도에 있는 신창탄광에서 왔습니다. 석탄을 캐는 탄군들이지요. 제 이름은 박창술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밀양박씨라고 하는데 저는 밀양이 어데 붙어있는지도 모릅니다.》

《아! 그렇습니까. 저는 서울서 왔습니다. 사실은 고향이 경상도 대구입니다만 여기 오기전에 서울서 떠났습니다. 저는 제비강자쓰는 강병철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나이로 봐서두 10년은 이상같은데요. 저는 지금 21살입니다. 여기 우리 동무들이 모두 1~2살차이 동갑입니다.》

청년은 매우 활달하고 개방적이며 주눅이 대판이라는것이 알리였다. 역시 3명이 모두 어슷비슷하였다. 강병철이 담배 《마꼬》를 한갑 내놓자 박창술은 트렁크에서 양덕초라고 하면서 노랗고 납작하게 잠을 재운 잎담배 한춤을 내놓았다.

《아, 이런, 연초공장을 통채로 넣고다니는셈이군요. 하하하. 한대 맛을 봅시다.》

손바닥에 놓고 와삭와삭 잎을 부스러뜨려 신문지에 말아 입에 꼬나물었다. 고추가루를 들이키는것처럼 입안이 싸하였고 재채기가 올라왔다.

《선생님 선생님 하니까 좀 어색한데 동무로 불러주시오.》

강병철이 재채기를 간신히 참으며 한마디 했다. 박창술은 까까머리가 아직 채 자라지 않아 총이 꽛꽛이 일어선것을 연방 쓸어넘기면서 웃는다.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존대하는거야 나쁠것이 없잖습니까. 혹시 이 친구들이 나를 그렇게 괴여올린다면 비행기를 태운다고 하겠지만 강선생님은 첫눈에 지식이 대단하다는것이 알립니다. 우선 이 책을 봐도 알수 있잖습니까.》

박창술은 책을 집어다가 벌꺽벌꺽 뒤지며 입심을 부린다.

《전부 꼬부랑글이군요. 선생님은 이걸 다 읽을수 있겠지요? 도대체 여기엔 뭐가 씌여있습니까. 죽으라고 했는지 살라고 했는지 모르는 까마귀눈이다보니.》

《강철도 만들고 금도 녹여내고 하는 기술이 적혀있소.》

강병철은 그러쯤 알면 된다는투로 말한다.

《아! 그래요. 하하··· 그거 참 안성맞춤입니다. 우린 지금 강철정대가 없어서 큰일인데요.》

《그렇소, 그런데 이런 책을 장마당에서 파지로 팔고있었소.》

《그래요? 그건 너무한데요. 어쨌든 무식이 죄로 되는 법이 없기 다행입니다.》

《하하하.》

이렇게 시작해서 저녁 5시가 될 때까지 강병철은 탄광실태와 로동자들의 생활형편 그리고 그들의 정서상태를 많이 알게 되였다. 탄광 역시 자기가 돌아본 북조선의 금속, 제련, 화학 등 공장들과 다를바가 없었다. 갱도에 물이 찼다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형편을 충분히 짐작할수 있었다. 한편 강병철은 묻고 듣기만 할수가 없었으며 또 지꿎게 달라붙는 박창술의 수에 걸려 자기자신을 적지 않게 드러내놓지 않을수 없었다. 대학을 나온 금속전문가이며 일본 야하다제철소에 복무한 일이 있다는것, 북조선으로 오게 된것은 해방된 이 땅에 강철공업을 일궈세워볼데가 어디인가 알아보자고 왔다는것을 이야기하게 되였다. 이야기는 정해진 방향이 없이 적당히 아지를 치고 줄기를 뻗어 나라를 세우는 문제로부터 평양랭면값이 얼마라는것까지 그리고 공산주의요 자본주의요 하는 리념문제로부터 《월성표》지하족을 어데서 만드는가 하는데로까지 번져갔다.

그러다가 문득 박창술은 《선생은 미군이 들어 온 남조선에서 여기로 넘어온걸 보면 공산주의와 용케 통하게 됐는걸요. 선생은 자본가의 자식일건 뻔한데 무슨 사상가나 주의자가 아닙니까.》하고 능청스럽게 물었다.

《여보 친구, 북조선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공산주의자는 아니란말이요. 그래 당신네는 공산주의가 좋소?》

《좋지요. 로동자, 농민을 잘살게 하고 우리같은 탄군도 사람치부를 한다는데 왜 찬성하지 않겠나요.》

《하하하. 단순해서 좋긴 하오.》

강병철은 이때 자기가 가지고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감정은 깊숙이 묻어두고 로출시키지 않았다. 야하다시절에 소문을 듣거나 책에 쓴것을 읽은적이 있는데 공산주의는 말할수 없는 폭정이며 비인도적이였다. 강병철은 1944년말 제딴에는 조선로동자를 위한다고 하다가 뜻하지 않게 로가 폭파되여 부상자를 낸적이 있었다. 로폭파사건을 계기로 지하에 있는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조선로동자들을 부추겨서 강병철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이 일제에게 복무하고있는 조선인자본가의 아들과 가차없이 싸워야 한다고 선동하는바람에 강병철은 큰 시련을 겪었었다.

《두고보오만 북조선에서 공산주의는 하지 않을거요.》 강병철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말하였다. 《누가 정치를 하든 모두다 싫어하는걸 할 택이 있소. 아이를 낳아서 국가에 바친다든가 녀편네도 네것내것없이 공동소유한다는것은 악선전이겠지만 그것의 백분의 하나만 사실이라고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니요.》

《이제 다 잘되겠지요. 김일성장군님께서 정사를 펴시면 의례히 다 헤아려 하시지 않을라구요.》

《하긴 그 말이 옳소. 자! 그럼 난 좀 가볼데가 있어서 나갔다오겠소.》

강병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거리로 나왔다. 모란봉쪽으로 곧추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꺾어들어가면 기와집이 빽빽이 들어선 종로거리 뒤골목이 나진다. 여기에 경성제국대학 교수 안동권의 본집이 있다. 강병철은 며칠 벼르던 차에 오늘에야 그와 만날 기회를 얻었다. 한 보름전에 그의 집을 찾아간적이 있어서 길을 묻지 않아도 되였다. 그는 안경을 번뜩이면서 좌우를 살피였다. 대동교쪽으로 갈라지는 전차분기점을 지날 때 그는 문득 복잡다단한 자기의 행로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한달 되나마나한 사이에 참으로 변화가 많았다. 서울에서 8. 15해방을 맞고 인차 대구 고향집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되돌아서서 서울을 거쳐 38°선을 넘어 평양, 평양에서 또 흥남 그다음에는 성진 또다시 평양으로 이렇게 전전한것이다. 그러나 이 복잡다단한 로정도 이제는 끝장을 볼 때가 왔다. 바로 그 마지막지점이 혹시 지금 찾아가고있는 안동권의 집으로 될는지도 모른다. 학교때부터 강병철의 성격적특징을 찍어서 동료들은 《말뚝》이라고 불렀다. 누가 뽑아서 옮겨박기전에는 자리를 뜨는 일이 없다는것이다. 생활이나 학업에서도 그렇고 행동의 지향이나 견해 같은데서도 언제나 외통배기였고 일변도였던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해방이 되자마자 《말뚝》이 홀연 《배》가 되여 닻을 걷어안고 38°선을 넘게 되였던가. 이것을 놓고 그의 딱친구인 원시범은 8. 15해방이 말뚝을 톱으로 켜서 배를 뭇게 한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배는 어데로 가야 할지 몰랐다. 강병철은 일본 야하다에서 중병에 걸려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던 도중에 해방을 맞았다. 그는 건강이 채 회복되지 못한채로 대구에 있는 자기 집에 내려가 한동안 정세를 관망하리라 결심하였다. 그러나 인차 교또대학 공과출신인 끈덕진 원시범이 찾아와 서울로 올라가자고 하였다. 그 리유인즉은 이름있는 과학자, 기술자들이 서울에 몰려들어 앞으로 조선의 지성인들이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가를 론의하고있다는것이다.

때가 때니만치 강병철은 정세를 외면할수도 없고 또 일본에 있다보니 조선의 실정을 전혀 알수도 없었다. 그래 원시범을 따라 서울에 되돌아왔는데 행동방향을 알게 되기는커녕 반대로 점점 더 미궁에 빠져들어가고말았다. 3층짜리 《반도호텔》에 수십명의 지식인들이 모여 중구난방으로 웨쳐대는데 시간이 갈수록 론리는 더욱더 삼검불 엉키듯하였다. 정권이 설 때까지 기다리자는 패도 있고 각자 자기 분야의 연구소나 기업소에 돌아가 묵묵히 연구사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미군정청에 찾아가 고문을 초청해오자는 사람들도 있고 급선무는 과학자, 기술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사회단체를 하나 내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패도 있었다. 며칠동안 론의를 거듭하다나니 점차 몇개의 파로 갈라지게 되였다. 물리, 화학, 생물 등 전공부문끼리 모인 패가 있는가 하면 일본, 만주, 이북출신 등 지방별 패들도 나타났다. 강병철은 전기와 야금이 전문이였으므로 자연히 물리패에 끼우게 되였는데 거기에는 경성제국대학 학자들이 태반을 차지하고있었다. 론의를 거듭하던 끝에 평양에 가있는 물리학교수 안동권을 불러다가 그를 조선인테리의 대표인물로 내세우는것이 좋겠다고 합의하였다. 조선학계에서 나이로 보나 실력과 권위로 보나 안동권의 존재는 절대로 무시할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때마침 강병철과 원시범은 각각 이북에 다녀와야 할 사사용무가 하나씩 있었다. 강병철은 야하다제철소에 같이 있던 오천식이라는 친구네 집에 갔다와야 할 일이 있었고 원시범은 평양에 있는 애인을 찾아가 혼인에 대한 말미를 지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사정에 겹쳐서 강병철은 안동권에게 서울의 초청을 전달할 임무를 띠고 원시범이와 짝이 되여 출범의 닻을 올리였던것이다.

평양에 도착하는 즉시로 그는 안동권을 만났다. 그때 안동권은 모모인사들의 서울초청이요 뭐요 하는데는 관심이 없노라고 멍확히 못을 박고 그것외 자신의 개체용무로 인해서 곧 서울로 가기는 하겠노라고 대답했던것이다. 그러나 강병철은 기왕 다시 평양에 돌아온바에는 안동권에게 그동안 다른 변화가 없는가 알아보고싶어 이 걸음을 걷게 된것이였다.

강병철은 붉은 벽돌담장이 한길이나 되는 기와집대문앞에 이르자 안경을 벗어들고 대리석문패를 다시금 확인한 다음 신문과 우유배달함옆에 붙은 초인종단추를 눌렀다. 잠시후 안마당에서 찰딱찰딱 신발 끄는 소리가 나더니 삐익 하고 대문이 열리였다.

《누구세요?》 하는 애어린 목소리가 울리는것과 함께 대문짬으로 함박꽃같이 얼굴이 환한 열대여섯 났을가한 단발머리처녀가 나타났다.

《안동권선생님 계시지?》

《아침에 나가시면서 저녁 6시쯤에 오신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다시 오지.》

《누가 오셨댔다고 전하면 될가요?》

처녀는 방글방글 웃는다.

《음, 내 이제 다시 오니까 얼마전에 서울서 온 사람이라고 하면 알아.》

그가 거리구경을 하고나서 다시 찾았을 때는 초인종소리가 울리자 인차 인적기가 나더니 안에서 안동권이 《강병철군이 오지 않았소?》라고 하였다. 안동권은 그새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강병철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면서 그간 건강하였는가고 물었다.

《내 건강이야 매일 일진일퇴니까. 아무튼 수고했소. 그래 갔던 일들은 어찌되였소. 흥남제련소 사택마을에 있다던 홀어멈은 무고하시던가?》

먼저번에 흥남에 갔다올 용무를 대강 말했던것인데 그것을 기억해두고 하는 말이다. 강병철은 친구인 오천식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어머니는 만나보았노라고 하였다.

역시 안동권은 지성인답게 말로 또는 행동으로 유감없이 례의를 갖추었다. 침침한 방안보다 따뜻하고 신선한 마루가 좋다면서 방석을 내오고 담배를 권한다. 자리를 잡게 되자 부엌에 대고 커피를 끓이라고 이르고 외출하노라고 입었던 양복을 벗고 품위있게 지은 명주바지저고리를 갈아입었다.

《선생님, 이 책이 기억나십니까?》하며 강병철은 들고온 책 1권을 안동권이앞에 내놓았다.

한 300페지되는 일문판인데 자주색양장을 해서 부피에 비해서는 볼품이 있었다. 표지에는 《물리학개요》라고 쓰고 그밑에 저자 《안동권》, 발행년도 《대정11년》으로 밝혔다.

《오, 그런것이 있었지. 그런데 이런걸 강군은 어데서 구해가지고 다니오. 내 기억에서마저 삭막해진걸.》

깜짝 놀라 환성을 지를줄 알았는데 집어보지도 않고 낯부터 찡그린다.

《날이 선선해오드라니 장마당에 나가 내의를 하나 사입을가 하고 기웃거렸는데 고서점에 이것이 있더군요.》

이미 생각했던바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어서 강병철은 낯을 붉히며 슬쩍 거짓말을 해버렸다.

《철부지때 만들어낸 하나의 기형아요.》

안동권은 가슴이 꺼지게 한숨을 쉬면서 담배갑을 가지고 군손질을 한다.

강병철은 장마당에서 기술서적이나 문학도서들이 파지로 팔리고 있다는것을 죄다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였다. 하지만 안동권은 끝내 별로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반세기 가까이 노예로 있던 조선민족의 의식상태가 아니겠소. 인간은 사물의 가치를 자기가 의식한 정도밖에 리해하지 못하니까.》

담배갑을 굴리는 안동권의 손이 알릴듯말듯 떨리는것으로 보아 그는 벌써 자기 저서가 지금에 와서 휴지로밖에 인정되지 않고있는것을 알고있는것 같았다.

이렇게 되자 강병철은 화제가 다른데로 돌기전에 용무부터 볼 차비를 하였다.

《선생님, 숨가쁘게 물어 안됐습니다만 언제쯤 서울로 떠나실 작정입니까?》

《언제쯤 떠나겠는가?》하고 안동권은 받아외우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음을 터치였다.

그통에 성글성글하고 고르롭지 못한 이새가 드러났다. 강병철은 그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내심을 넉넉히 엿볼수 있었다.

《달래 그런것이 아니라》하고 그는 의아쩍어하는 강병철이 앞으로 커피잔을 밀어놓으며 말을 계속하였다. 《오늘 나는 똑같은 그런 질문을 3번이나 연거퍼 받게 되니 너무 공교로와 그러오. 하긴 그것이 우연한것이기는 하겠지만 그 어떤 징조를 말해주는것 같단말이요. 아침에는 조만식선생이 보내서 왔노라고 하면서 당신 나이쯤 된 점잖은 사람이 와서 물었네. 왜 그러느냐고 하니 인민정치위원회에서 사업을 해볼 의향이 없는가 해서 그런다고 하데. 그런데 아까는 민기환이라는 사람이 서울서 왔다면서 또 똑같은 질문을 하더란 말일세. 그 사람도 자네처럼 내가 가야 조선인테리의 앞길을 론의하는데 도움이 된다나. 결국 이런 견해가 다 무엇에 기초해서 나온것들인가. 북에 있으면 공산주의를 위한것으로 되고 남에 나가면 그와 다른 어떤 주의, 가령 자본주의를 위한것으로 된다고 하는 해석에 근거한것이네. 이것은 자연과학의 특성을 리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이거든. 나의 생각으로서는 북이다 남이다 하는 지역개념에도 관계가 없고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하는 주의개념에도 관계없는것이 자연과학이라고 보아지네. 세상에는 주의와 관계없는 사물과 현상이 얼마든지 있고 주의와 관계 안하고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라는것을 알 필요가 있지. 문제는 우리가 하는 과학이 누구를 위한것인가 하는 목적이 중요하지 않겠나. 난 결단코 주장하네. 우리의 모든것은 조선민족을 위한것으로 되여야 한다고말일세. 그리고 또 내가 서울에 가야 할 리유를 조선인테리들이 나갈 향방을 토론하기 위한것이라고 한다는데 그것도 마음에 안들거든. 인테리는 10이면 10, 100이면 100 모두가 다 대상과 방법과 수단과 목적이 다른데 그것을 한본새로 만들자니 될말인가. 그런즉 나를 서울로 끌어당기는것은 나를 누구의 리용물로 만들자는것외 아무것도 아니라는것이 명백하거든. 물론 나는 가기는 가겠소, 그런데 날자는 정하지 못하겠소 하고 대답했네. 방금 강군이 한 질문에도 그렇게 답변할수밖에 없네. 왜 그런고 하니 그 리유는 단순하고 보잘것없는것이네. 교통형편과 내 건강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거니까···》

잠시동안 차를 마시노라고 이야기가 중단되였다. 강병철이 얼굴이 벌겋게 되고 안동권이도 차의 자극이 있어 그런지 음성이 한결 높아졌다.

《민기환이란 사람은 자신이 그 어떤 전공이 있는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 조선의 과학계를 환히 꿰뚫고있더군 그래. 강군이 여기 왔을거라고도 하더란말일세. 이따금 <당국에서는>하기도 하고 <그쪽에서는>하고 표현하는것을 보면 미주둔군과 어떤 련계가 있는것 같기도하데. 어쨌든 나로서는 관심을 가져주어 매우 고맙노라고 하였네.》

《체통이 크고 얼굴이 희멀쑥한 사람이 아닙니까?》 하고 강병철이 앞질러 물었다. 반도호텔에 드나드는것을 본적이 있고 언젠가는 원시범이 군정청과 련계된 요원같다고 하던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옳거니, 옳거니.》 안동권은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계속하였다.

《인생이란 어느 정도 불공평한데가 있는것 같아. 왜 그런고 하니 어떤 사람들은 갈길이 없어 자살참극을 빚어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갈길이 너무 여러갈래가 돼서 야단이거든. 벌써 몇해 되였소만 독일에서 제노라 하는 리론물리학자 와인 켐이라는 사람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적어도 자기앞에는 3개이상의 인생의 길이 열려있다고 하였네. 하나는 히틀러를 따르는 길이요 하나는 동족인 유태인들이 가는 길이요 또 하나는 자멸하는 길이라고 했네. 그이듬해에 일본 와세다대학에 있는 사까이교수한테서도 그와 신통히 비슷한 편지를 보내온적이 있네. 내가 이 말을 왜 하는고 하니 민기환이란 사람도 결국은 우리 인테리를 어느 한 갈래길로 끌어들일 심보가 아닌지 몰라 그러네. 어쨌거나 관심을 가져주는것은 방임하는것보다 나으니까. 그건 그렇고, 그래 흥남으로 말하면 우리 나라에서 첫번째가는 공업지구인데 형편이 어떻던가? 여기 강선이나 송림 제철형편은 대강 들었소만···》

강병철은 들어올리던 담배갑을 도로 놓고 머리를 흔들며 대답하였다.

《완전히 페허올시다. 수라장이구요. 왜놈들이 요진통은 무자비하게 다 파괴했습니다. 흥남지구에 있는 제련소, 화학공장, 비료공장 다 다녀봤는데 어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조선의 공업은 현재 0입니다. 너무 한심해서 성진고주파공장은 어떤가 하고 가보았더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청진에는 가기를 단념하고 돌아섰습니다.》

《음! 그렇군. 그럴거요. 다른놈이 아니고 바로 일본놈이니까 잔인성에서는 그 누구보다 못지 않은 야만이요.》

무릎에 놓인 자그마한 손이 갑자기 후드드 떨리였다. 마주앉은 그들은 처량한 낯을 짓고 각각 긴 한숨을 내쉬였다. 이윽해서 안동권이 피발이 선 눈을 들고 강병철을 쳐다보다가 약간 갈린 목소리를 내였다.

《강군! 이번에는 내가 하나 묻겠네.》하고 그는 잠간 중단하였다가 다시 뒤를 이었다. 《강군은 언제 떠나겠나, 서울로 가든 대구로 가든간에.》

《저말입니까? 저는 오늘 선생님을 만나는것으로 여기 온 용무가 끝납니다. 경상골에 있는 친구를 만나 별일없으면 인차 떠날가 합니다.》

《인차 떠난다.》

안동권은 침울해진 기분을 좀처럼 돌리지 못하면서 마당 한켠에 놓인 화분대를 처량하게 바라보고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느덧 강병철이도 기분이 몹시 흐려졌다. 흥남비료공장에서, 제련소에서, 성진에서 본 광경들이 일시에 떠올랐다. 연기에 끄슬린 비료공장 압축기들, 꽛꽛이 얼어붙은 제련소의 합금로들, 박쥐가 푸덕이던 성진고주파로의 검은 형체들이 그가 시선을 던지고있는 마당 한복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있다.

《인차 떠난단말이지?》

안동권은 명상에 잠겨있는 강병철에게 따지듯이 묻는다.

《네! 곧 가자고 합니다.》

《여기 온 용무가 다 끝났다고 했지요?》

《네!》

저쪽에서는 번연한것을 거듭 묻고있고 이쪽에서는 별로 생각없이 같은 대답을 반복하고있다. 그러나 완연히 달라진것은 반말투를 존경투로 계칭을 바꾸어버린 안동권의 내심이였다. 강병철은 순간 온몸에 긴장이 쭉 흘렀다. 이윽해서 안동권이 담배불을 사기재털이에 던져넣더니 뜨직뜨직 말하였다.

《안동권이를 초청한다는것은 안동권 본인이 정확하게 전해들었으니 그것은 됐습니다. 흥남제련소에 있다는 친구의 어머니를 만났다니 그 용무도 끝난셈입니다. 사람이 친구간의 의리를 지키는것은 응당한 도리구 인간다운 선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군! 강군은 전기기사이구 또 겸해 야금기사라고 했습니다. 나는 강군이 처음 내앞에 나타나 개인용무도 볼겸 전기공업이나 야금공업의 실태를 알아보자고 왔다고 했던것으로 기억하고있습니다. 강군이 그때 무심결에 말한것 같지만 조선의 강철을 만들어보는것이 소원이라고 했을 때 나는 대단히 놀랍기도 하고 대단히 기쁘기도 해서 진심으로 손을 잡아흔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에 전력공업이라고하면 여기 북부조선입니다. 야금공업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파괴되였다고 했습니다. 아! 이것은 한 민족의 또 하나의 수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하는가. 누가? 어떻게?··· 아!》 장탄식을 하면서 추녀끝에 드리운 보라색하늘을 쳐다본다. 그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다시 말하였다.

《너무 야박하게 말해서 안됐소만 량해하시오. 나는 강군이 내 나라의 강철을 한차지만 녹여보아도 원이 없겠다고 말했을 때 눈물이 날만큼 고마웠댔소. 나는 강군의 이번 걸음이 이러저러한 몇가지 개인용무가 있었다고 한가운데 이북의 전기와 강철 형편을 알아본다고 한것을 가장 귀중한것으로 보았었소. 이건 개인의 취미나 용무가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 관련되여있는 군의 량심이나 어떤 리념의 계시에 의한것으로 보고싶었소. 그런데 지금 군이 말하는것을 보면 다 파괴되였기때문에 절망이다, 스위치를 넣어 기술을 시험할만한데가 없다. 누구든 다 복구한 다음에 보자. 아! 량해하시오.》 안동권은 붉어진 얼굴을 또다시 흔들며 하던 말을 계속하였다. 《그저 내가 공연한 소리를 하고있습니다. 량해하시오. 본의아니게 환상에 사로잡혔습니다. 허허허.》

이때 안동권은 분명히 웃고있었다. 그렇지만 안동권의 말마디들은 누구에 대한 저주같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원망같기도 한 미묘한 색갈을 띠고 강병철의 가슴을 사정없이 찌르고 휘저어놓았다. 강병철은 가슴을 움켜잡고 컬럭컬럭 기침을 하였다.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손발이 떨리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때문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도 알수 없었다. 한편 손으로 턱을 고이고 전혀 움직일것 같지 않게 앉아있던 안동권은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 한쪽벽에 걸어놓은 족자앞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책으로 한켠벽을 완전히 메워버린 서가쪽으로 나와서 서성거리였다. 강병철은 그가 정신적안정과 균형을 잃고있다는것을 확연히 알수 있었다.

이윽하여 강병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대화를 나눈 몇시간사이에 어느덧 흠뻑 늙어버리는것 같은 안동권의 주글주글한 얼굴을 쳐다보면서 부디 건강에 류의해주기를 바란다고 진심으로 인사를 하였다. 안동권은 골목길어름까지 따라나와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한동안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