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결단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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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호는 새로 수정보충한 중공업부문의 전후복구안에 대한 의견을 받아보려고 최일만을 찾아올 때까지만 하여도 이렇게 푸대접을 받을줄은 몰랐다.

최일만은 두툼한 입술을 비쭉 내밀고 손님더러 앉으라는 인사치레도 없이 책상우에 펼쳐놓은 계획문건만 신경질적으로 벌컥벌컥 뒤번지였다. 자존심이 강한 한윤호는 주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천천히 쏘파에로 다가가 깊숙이 몸을 잠그고 편안히 앉았다.

《그러니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말이겠소?》

문득 최일만은 만만치 않은 봉의눈을 치뜨고 한윤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로선에 기초해서 이번에 우리는 복구계획을 전반적으로 다시 수정보충하였습니다. 이번 계획안에 의하면…》

《알고있소.》

최일만은 한윤호의 말허리를 푸접없이 잘라버리였다. 한윤호는 국가계획위원회가 새로 완성한 부피두터운 문건의 요점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몇마디 설명하려고 했으나 상대방이 다 안다고 큰소리치는바람에 입을 다물고말았다. 최일만은 무엇때문인지 이전과는 달리 한윤호를 시답지 않게 대하며 두덜거리였다.

최일만은 자리에서 몸을 솟구더니 서가에로 다가가 화려한 군청색장정을 한 책 한권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한윤호도 본일이 있는 로어로 된 두툼한 책이였다.

《인류의 장구한 발전사를 돌이켜볼 때 중공업과 경공업, 말하자면 <아>그루빠(생산수단)생산과 <베>그루빠(소비재)생산의 호상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것이 언제나 중요한 문제로 나섰다고 볼수 있소. 동무도 알겠지만 여기에는 두가지 전례가 있었소. 그 하나는》 최일만은 손가락 하나를 곧추 펴들었다. 《<베>그루빠를 먼저 발전시켜 일정한 기간 자금을 축적해가지고<아>그루빠를 먼저 발전시키는 길이였소. 300여년전에 인류력사발전에서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한 영국을 비롯하여 많은 자본주의나라들의 바로 이 길을 걸었다고 볼수 있소.》

한윤호는 최일만이 구변이 좋다는것을 이미 알고있었지만 이렇게 류창하게 엮어댈줄은 몰랐다. 보건대 그는 경제로선상문제를 두고 상당히 깊이 연구해본것 같았다.

《다른 하나》 최일만은 두번째 손가락을 펴들었다. 《그것은 <아>그루빠를 먼저 건설한 다음 그에 의거하여<베>그루빠를 발전시키는 길이였소. 지구상에서 사회주의길에 맨 먼저 들어선 쏘련이 이 길을 걸었다고 볼수 있지. 자, 보란말이요.》

최일만이 한윤호앞에 멈춰서서 책의 어느 한 페지를 펼치더니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경제학을 전문한 한윤호로서는 경제학의 초보적인 문제를 가지고 론하는 최일만의 말과 행동이 더없이 경망스럽고 비위에도 거슬렸지만 지금까지의 그와의 친교관계를 고려하여 꾹 참고 그의 진의도를 간파하려고 주의를 집중하였다.

《맑스는 확대재생산문제를 정치경제학의 중요한 문제로 연구하면서 확대재생산에서 <아>그루빠생산의 우선적장성에 관한 중요한 명제들을 내놓았소. 레닌은 여기에 <아>그루빠를 위한 <아>그루빠생산이 가장 빠르게 장성하고 <베>그루빠를 위한 <아>그루빠생산이 그 다음으로 발전하며 마지막으로 <베>그루빠생산이 발전하는것이 확대재생산의 법칙으로 된다는것을 보충하였다. 이것만 보아도 맑스ㅡ레닌주의대가들이 중공업발전에 얼마나 큰 의의를 부여하였는가를 알수 있소.》

한윤호는 신경을 도사리고 주의를 집중했지만 상대방이 《아》그루빠니 《베》그루빠니 하면서 너무도 말을 빨리 번지기때문에 그 진의도가 무엇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상대방은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

《학사선생,》 최일만이 능청스레 히물거리였다. 《계획초안에 의하면 중공업뿐아니라 경공업과 농업도 동시에 발전시킨다고 했는데 말하자면 <아>, <베>그루빠의 동시발전이란 말인데 그런 리론이 맑스ㅡ레닌주의고전 어디에 있소?》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류력사가 알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독창적인 길입니다.》

《독창적인 길? 옳소.》

최일만이 한윤호의 말을 긍정하며 또다시 벌쭉 웃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미묘한 웃음이였다.

《지금은 어렵더라도 래일의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중공업을 중심고리로 틀어쥐고 우선적으로 발전시키자는것입니다. 그리고 경공업과 농업의 튼튼한 토대도 축성해놓자고 합니다.》

한윤호가 조금 목소리를 높이였다.

《튼튼한 토대?》

최일만이 의혹이 실린 눈으로 한윤호를 흘끔 치떠보았다.

《예.》

《순전히 제 힘으로 한다는 말이겠소?》

《그렇게 타산했습니다.》

《의도는 좋소. 그런데 자재, 자금, 로력이 다 문제란 말이요. 나라가 송두리채 재더미가 된 이 엄연한 현실로부터 문제고찰을 시작해야지. 그렇지 않소? 문제는 계획의 현실적가능성을 잘 타산하는거요.…》

한윤호는 최일만의 말을 들으며 그가 우려하는것과 자기가 골머리를 앓고있는것이 일맥상통한다는것을 느끼고 은근히 놀랐다.

한윤호는 최일만이와 나눈 대화를 그대로 정준택에게 보고하였다.

정준택은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벗어지기 시작한 반드러운 이마에 바늘로 그은듯 한 잔주름이 건너가고 검정테의 안경알속에서 쌍까풀진 큰눈이 한점을 응시하며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는것으로 보아 한윤호는 자기의 말이 상대방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는것을 대뜸 느끼였다.

한윤호는 정준택의 말문이 열리기를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당의 로선에 대한 반신반의가 아니요?》

문득 정준택이 침묵을 깨뜨렸다. 그러자 한윤호는 금시 등골로 찬물이 건너가는것 같았다. 방대한 계획을 세워놓고도 과연 자체의 힘으로 해낼수 있겠는가고 은근히 의혹을 품고있는 자기의 속마음을 정준택이 빤히 들여다보는것 같았다.

《뭐 그렇게까지야… 복구자금이 너무나도 긴장하기에 그렇게 말하는거겠지요.》

《현장로동계급의 립장은 다릅니다. 국장동문 강선제강소 기사장이 주관하여 작성한 새 복구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준택은 전에 없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한윤호는 모를 일이라는듯 고개를 외로 틀었다. 그는 강선제강소 지배인 차승룡이 주관하여 작성한 복구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세부까지도 잘 알고있었다. 강선제강소에 복구자금을 떼주는데서 큰 역할을 한것도 그였다. 그런데 새로운 복구안이 제기되였다니 한윤호로서는 금시초문이였다.

《새 복구안에서는 순전히 자체의 힘으로 전쟁전의 전기로와 압연가열로들을 대대적으로 확장하여 그 능력을 몇배로 높일것으로 타산하였습니다.》

《그래요?》

한윤호는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듯 말꼬리를 흐리였다.

정준택은 좀더 명백히 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압연가열로를 어떻게 확장하려 하는가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한윤호는 대방의 말을 한마디도 꺾지 않고 주의깊이 듣고있는것처럼 외양을 꾸미고있었으나 실상 머리속에서는 전혀 딴 생각이 고패치고있었다.

(공명인가? 허풍인가? 아니면?…)

《빨리 강선에 나가 리웅천기사장을 만나 새 복구안을 잘 검토해보시오.》

정준택은 오금박듯이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담화는 끝난것이였다.

정준택의 방에서 나온 한윤호는 갱도밖에 나서서 《까즈베끄》담배 한대를 꼬나물었다. 엷은 입귀로 푸실푸실 담배연기를 날리며 한윤호는 세모진 눈을 가늘게 뜨고 방금 정준택과 나눈 대화를 거듭 음미해보았다. 정준택은 최일만에 대해서는 분명 비난하였지만 자기한테는 조금도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윤호는 어쩐지 정준택한테서 여지없이 무시를 당한것 같아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하여튼 강선에 나가보자. 리웅천이란 위인이 허풍쟁이가 아닌지 만나보고싶은걸.…)

한윤호는 입에 물었던 절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홱 내던지고 감북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