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4

 

제 9 장

4

 

무송시내의 대남문거리에 들어선 리경준은 《금강사진관》을 찾았다.

사진진렬장안에는 역시 강세호가 말해주던것처럼 조선의 아름다운 산천경개를 찍은 사진들만이 걸려있었다. 그 사진들은 집주인의 됨됨과 애국적인 감정을 쉬이 엿볼수 있게 하였다.

리경준은 그 사진들을 보면서 이 집 주인인 박문필이라는 사람에 대한 새삼스러운 호감을 느낀 동시에 경험이 있는 지하공작원으로서의 예리한 감각으로 앞으로의 사업을 위해서는 사진진렬을 달리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대꾸도 없고 누가 나오는 소리도 없었다.

리경준이 다시 커다란 유리문을 두드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주인을 찾자 안쪽에서 녀인의 대답소리가 울리고 이어 신발을 끌며 바삐 다가오는 소리가 나더니 출입문에 달린 유리창으로 밖을 살피는 젊고 아련하게 생긴 부인의 얼굴이 보였다.

녀인은 리경준의 얼굴과 차림새를 두루 살피더니 걸려있던 문고리를 벗기고 빠끔히 문을 열었다. 겸손하고 소박한 조선옷차림의 녀인이였다.

《영업이 끝났는가요?》

《네, 사정이 있어서 오늘은 좀 일찍 문을 닫았습니다.》

경준은 길거리를 한번 살피고나서 낮은 목소리로 박선생이 집에 있는가고 물었다.

《어디서 오셨는지요?》

《좀 멀리서 왔습니다. 꼭 만나야 할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해주십시오.》

젊은 녀인이 좀 기다려달라고 하면서 안으로 들어간후 담배 한대를 거의 태우는데 안경을 쓴 젊은 사람이 나타났다. 후리후리한 키에 갱핏한 얼굴을 한 그 사람은 문을 열듯이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다가 말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경계하는듯 한 기색으로 리경준의 행색을 훑어보는것이였다.

《때늦게 찾아와서 안됐습니다. 박문필선생인가요?》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오시는 손님입니까?》

리경준은 지나가는 행인이 저쯤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귀속말로 산에서 내려왔는데 안으로 들어가서 만날 일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제서야 박문필은 리경준에게 문을 틔워주고 그가 안에 들어서자 다시 문고리를 걸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끝에 컴컴한 복도를 지나 옆으로 꺾어들더니 손님들의 대기실로 쓰는듯 한 크지 않은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커다란 사진액틀들이 붙어있는 방에는 손님용긴걸상 두개가 벽에 기대있었다.

주인은 그중의 한 걸상에 앉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리경준은 지나가는 행인들이 유리창으로 들여다볼수 있는 방에서 이야기하는것이 적당치 않다고 생각되여 머뭇거렸다.

주인도 다시 자리를 권하지 않고 리경준의 차림새를 유심히 훑어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지요?》

용건을 알기에 앞서 손님의 신분과 정체를 알고싶어 묻는 말임을 리경준은 대뜸 알아차렸다. 리경준은 우선 그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짤막하게 자기 소개를 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파견되여왔습니다.》

주인은 내심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안경속의 눈을 내리깔고 잠시 서있더니

《오십시오.》

하고는 돌아서서 다시 복도로 나왔다.

리경준은 주인을 따라 두번이나 좁은 복도를 꺾어돌아가서 마침내 안마당으로 나갔다. 그러고보니 그가 방금 들어갔다나온 그채는 사진영업을 위해 쓰는 채였던듯싶었다. 크지 않은 안마당 한쪽에 아담한 목조2층집이 있는데 주인은 그곳으로 리경준을 데리고갔다.

리경준은 박문필을 뒤따라 삐꺽거리는 나무층계로 올라가서 행길쪽으로 창문이 달려있는 크지 않은 방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낮은 캄캄한 방안에는 벌써 석유등불이 켜져있었다.

돗자리가 깔려있는 널마루바닥 복판에 앉은뱅이책상이 놓여있는데 그우에는 신문들과 신간서적들이 쌓여있었고 누르스름하게 퇴색한 도배지들때문인지 침침해보이는 벽에는 책을 꽂은 서가와 쇠침대가 붙여세워져있었다.

이채롭게 눈에 띄우는것은 책상 맞은편벽에 걸려있는 한폭의 조선화였다. 거기에는 소나기가 지나간 뒤에 푸른 하늘을 향하여 한껏 싱싱해진 가지와 잎새들을 펼친듯싶은 참대가 그려져있었다.

주인은 방석을 돗자리우에 내놓으며 자리를 권하였다. 그리고 창문에 휘장을 치고 화로불우에 늄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그런 뒤에 화로를 들어 손님앞에 놓고 책상우에 있던 담배함도 내려놓았다. 그가 열어놓은 함안에는 권연이 빼곡이 들어차있었다.

리경준은 담배를 권하는 주인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여 사의를 표하며 담배를 붙여물었다.

박문필은 담배를 피울 차비가 아니였다.

박문필은 안경속에서 리경준의 얼굴을 다시한번 뜯어보고는 손님의 거동에서 진실한 구석을 찾아보았던지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으나 여전히 참을성있게 손님이 먼저 용건을 내놓기를 기다렸다.

리경준은 피우던 담배를 끄고 곧장 자기를 소개했다.

《저는 김일성장군님의 특명을 받고 박선생을 찾아왔습니다.》

화로에서 주전자를 들어내리던 박문필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졌다. 놀라운 빛이 안경에 번쩍하고 어리였으나 그것은 순간의 일이고 박문필은 인차 태연해지며 은근히 리경준을 쳐다보았다.

《박선생은 길림에 가서 중학을 다녔다지요?》

《네, 무송엔 중학교가 없어서요.》

리경준은 장군님께서 박문필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실 때 학창때를 회고하시며 해주시던 말씀을 상기하였다.

《장군님께서는 학창시절에 박선생과 같이 교정에 나무를 심으시던 일을 감회깊이 회고하시였습니다···》

박문필은 리경준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손을 틀어잡았다.

《그럼··· 김일성동지께서 무송현에 나와계신다는게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이 무송진에서 과히 멀지 않은 산에 와계십니다.》

《이렇게 찾아주시니···》

박문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떨며 리경준의 손을 더 억세게 그러쥐였다. 안경알너머로 따뜻한 눈물방울이 괴여올라 그렁그렁하였다.

리경준은 자기 손을 으스러지게 그러쥔 박문필의 떨고있는 뜨거운 손길에서 그의 가슴속에 파도치는 격정의 높이를 력력히 헤아렸다. 장군님을 오래동안 사무치게 그리며 기다려왔던 박문필의 이 순간의 심정을 충분히 리해할만 한 체험을 그자신이 얼마전에 하였던것이다.

《그래 장군님께서는 건강하십니까?》

얼마후에야 박문필은 손수건으로 눈물에 젖은 눈과 안경을 닦고 벌겋게 된 눈으로 리경준을 쳐다보며 그이의 안부를 물었다.

《네 건강하십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기쁩니다.》

하고 그는 또다시 리경준의 손을 그러잡았다.

《사실 저는 신문에서 김일성장군님께서 무송땅에 나오셨다는 보도를 읽고 며칠째 아예 잠을 자지 못하였습니다. 요즘은 내내 장군님에 대한 생각뿐이였습니다. 어떻게 하나 장군님께서 계신데를 알아가지고 만나뵈오러 갈 궁리뿐이였습니다. 간밤에는 학창시절에 장군님과 같이 지내던 일을 꿈에 다시 당하기까지 하지 않았겠습니까. 제 오늘 이런 행운을 받아안자고 그런 꿈까지 꾸었던 모양입니다.》

박문필은 다시금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며 환하게 웃음지었다.

《바늘이 없습니까?》

리경준은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박문필에게 물었다. 그를 의아쩍게 넘겨다보던 박문필은 손을 내밀며 청하였다.

《바느질할것이 있으면 인주십시오. 우리 집 사람에게 맡깁시다.》

《아니 바느질을 하려고 그러지 않습니다. 송곳이 없습니까?》

《송곳은 여기 있는데요.》

박문필은 책상우에 있는 필갑안에서 송곳을 꺼내여 리경준에게 주었다.

경준은 양복저고리를 뒤집어서 펴놓고 안겨드랑이실을 송곳끝으로 뜯어냈다. 그리고 가슴팍의 심지속에 감춰넣었던 편지를 꺼냈다.

《장군님께서는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네?!》

너무나 뜻하지 않았던 일에 놀란 박문필은 한동안이나 어디둥절해서 리경준이와 그가 내민 편지를 번갈아보기만 했다.

박문필은 일어나서 정중히 편지를 받아들고 아무 글자도 씌여지지 않은 겉봉을 또 한동안이나 들여다보았다. 편지를 든 그의 손이 가볍게 떨리였다.

《한일없이 지낸 저같은것을 잊지 않으시고 이렇게 편지까지···》

눈을 들어 리경준이를 쳐다보며 뇌이는 그의 목소리는 갈려있었다.

《어서 개봉하십시오.》

리경준은 언제까지나 봉투를 든채 그냥 서있을것만 같은 박문필에게 이렇게 권하고 화로옆에 앉았다.

박문필은 책상앞에 돌아앉아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활달한 필체로 편지지의 첫머리에 내리씌여져있는 글줄에서 박문필은 오래동안 눈을 돌리지 못하였다.

박문필동무라고 불러주시면서 시작하신 편지를 읽으며 친근한 동무로 자기를 불러주신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이 너무나 가슴에 벅차올라 솟구치는 눈물때문에 다음의 글줄을 훔쳐가며 세번이나 거듭하여 편지를 읽었다.

알고보니 박문필은 생김새와는 다르게 다정다감한 사람이였다.

《꿈만 같은 장군님의 편지를 받고보니 감회가 새로와집니다. 오래간만에 눈에 익은 장군님의 필체만 보아도 회포가 깊어지는군요. 사실 장군님께서 저를 이끌어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지금도 저는 캄캄한 어둠속에서 헤매고있을것입니다.

저는 부농출신입니다. 그래서 같이 학교를 다닌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학비나 기숙비를 못내서 학교나 하숙집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교복도 학용품도 다른 학생들보다 빛이 나는걸 입고 썼구 용돈도 과히 부족은 느끼지 않을만치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그닥 텁텁한편이 못되여서 저는 매우 가난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의 따돌림을 받았달가, 학생들속에서는 좌익서적들이 비밀리에 돌아가고 비밀독서회가 조직되여있었는데 저는 거기에 섭쓸리고싶었지만 동무들은 될수록 저를 멀리하여 곁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중에 한번은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시내 학교 체육선수들의 대항경기가 있었습니다.》
그날의 경기에서 여러 학교 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을 끈 경기는 장거리달리기였는데 박문필도 선수로 나갔다. 친일분자였던 키가 구척같은 체육교원은 출발선에 나가는 박문필과 다른 선수들에게 괜히 승벽을 내지 말고 1등은 일본인학생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출전하는 선수들의 기색이 별로 좋지 않은것을 보자 체육교원은 그것이 운동회를 주최하는 시교학의 방침이라고 은근히 위협조로 덧붙였다.

그러나 박문필은 민족적의분과 정의감을 품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일본인학생선수를 뒤떨구어놓고 단연 우승테프를 끊었었다.

그 사건으로 하여 박문필은 체육교원에게 불려가서 격검채에 얻어맞았을뿐아니라 출학처분까지 당할번 했으나 학생들이 들고일어나는바람에 무사할수 있었다. 후날 그는 자기가 출학처분을 당할번 했을 때 학교가 몽땅 들고일어나도록 하신분이 바로 김일성동지이시라는것을 알았었다.

잊을수 없는 운동회가 있은지 며칠 지나서 학교운동장주변에 버드나무를 심던 날 문필은 학교도서관 책임자이신 김일성동지를 처음으로 가깝게 알게 되였다.

워낙 그는 길림에 중학공부를 오시기전부터 독립운동자들과 여러 학교 학생들속에 확고한 권위를 가지고계시는 뛰여난 학생으로 널리 알려지시였던 김일성동지에 대한 소문도 들었고 몇번 거리를 지나가시는 모습을 뵙기도 했지만 가까이 사귈만 한 기회도 없었고 또 그럴 엄두도 못가지고있었다. 이 학교에 와서 그는 상급학년에 계시는 그이를 뵈옵고 그이와 한학교에서 공부하게 된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해왔지만 전교학생들속에서는 물론 교원들속에서도 존경받고계시는 김일성동지께서 자기를 상대해주시리라고는 아예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이날 김일성동지께서는 친히 그의 곁에 오시여 같이 나무를 심자고 하시며 내내 그와 같이 삽질을 하시였던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박문필을 퍽 너그럽고 소탈하게 대해주시며 운동회날에 아주 잘 싸웠다고 치하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날의 운동회는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민족정신과 투지의 대결이며 투쟁이였다고 하시면서 앞으로도 언제 어디서나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말고 민족적의분을 간직하며 사회적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일깨워주시고 고무해주시였다. 그리고 체육교원이 그에게 가한 란폭한 행위에 대하여서도 자세히 료해하시였다.

며칠후 체육교원을 축출하기 위한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있었고 그후 체육교원은 끝내 학교에서 쫓겨나고말았다.

그뒤 어느날 박문필은 학교도서관에 구경을 오라는 김일성동지의 초청을 받았다. 이때 학교는 경찰대의 수색을 받고있는중이여서 공기가 자못 험악하였으나 그이께서는 웃는 얼굴이시였다. 그이께서는 박문필을 반갑게 맞아주시고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다.

그때로부터 박문필은 강도 일제에게 빼앗긴 아름다운 조국산천과 일제의 압제밑에서 피흘리며 신음하는 겨레의 고통을 더 깊이 알게 되였고 학교에서 배울수 없었던 조선의 찬란한 민족문화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에 대하여 새롭게 알게 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박문필에게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를 선물로 주시였다. 그다음에는 《공산당선언》과 맑스의 《자본론》을 주시였다.

박문필은 모든것을 잊고 밤을 밝혀가며 그 책들을 읽었으며 읽은 다음에는 그이를 찾아가서 그이와 함께 독후감을 나누었다.

김일성동지의 지도밑에 박문필은 자기는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조선민족의 아들이라는것과 이 세상에는 서로 용납할수 없는 두 계급이 존재하며 그 두 계급간에는 치렬한 투쟁이 계속되고있다는것을 알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가 전혀 알지 못하던 새라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여주시였다.

방학때가 되여 무송에 왔을 때 박문필은 처음으로 소남문거리에 있는 김일성동지의 댁을 찾아가보았으며 김일성동지께서도 박문필의 집으로 한두번 오신적이 계셨다. 그이께서 오실적마다 박문필은 그이의 댁에 비하면 너무나 유족해보이는 자기 집이 오히려 역하게 느껴졌고 자기 처지가 부끄러웠다. 그 어떤 고상한 욕망이라고는 한가지도 없고 오직 치부욕밖에 없어보이는 아버지까지 원망스럽게 생각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에게도 한가닥 민족의식은 남아있어서 김일성동지의 뛰여난 인품과 감화력에 탄복하여 그이를 그저 아들의 동무를 대하듯 하지 않았으며 어려워하는 기색까지 있었다.

그 방학후부터 박문필은 그이의 지도밑에 비밀독서회에도 참가하고 청년학생운동에도 참가하게 되였다.···

박문필은 소리없는 한숨을 짓고 리경준이한테라기보다는 자기자신의 혼자소리처럼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29년여름엔가 그이께서 놈들에게 체포되시여 감옥에 들어가셨을 때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갑자기 지도자를 잃고보니 창졸간에 고아가 된 어린아이의 심정과 같았다할지··· 그런데다 학생조직에서는 당분간 피신하라는 권고가 있었습니다···》

그즈음 그의 가정에도 둘째아들 박문필이를 길림에서 데려다 다른데 돌리지 않을수 없는 사정이 생겨났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 류학을 보낸 맏아들 박오필에게 자기의 적지 않은 땅과 재산을 상속시킬 생각을 품어왔었는데 그 아들이 류학이라는데를 가서 공부할 대신 돈만 물쓰듯 하고 건달을 부리다가 방탕한 난봉군이 되여 중도에서 돌아왔던것이다. 돌아온 첫날부터 아비 얼굴에 흙칠하다싶이하며 별별 추한 꼴을 다 보이기 시작한 맏이한테 환멸을 느끼게 된 아버지는 얌전하고 똑똑한 둘째아들 박문필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길림에서의 학생소요들에 이어 학생운동지도자와 핵심들이 체포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자기 아들도 그 운동에 관련되여있을수 있다는것으로 하여 아버지는 즉시에 아들을 길림에서 떼여다 할빈에 보냈던것이다.

《···김일성동지의 몸가까이에서 상시적인 지도를 받고있는동안은 저도 자기의 처지로부터 오는 제한성을 어느정도 극복하고 동지들의 투쟁대오에 합류할수 있었지만 할빈에 가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투쟁의 변두리에 서있는것 같은 자신을 느끼면서도 학교를 그만두고 혁명투쟁의 한복판에 대담히 뛰여들 결심을 못내렸지요. 또한 그곳에는 불철저했던 저같은 사람까지 투쟁의 소용돌이속에 말려들게 할만 한 학생대중의 앙양된 기세라는것도 별로 없었지요··· 이거 주전자가 끓는줄도 모르구 말만 하는군요.》

박문필은 차를 따라 리경준에게 권하고 자기도 한모금 마셨다.

《···그렇게 한동안 지내다가 저는 자신을 돌이켜보기 시작했습니다. 원쑤놈들자신이 저에게 충격을 가한셈입니다. 무덤에 들어간다 해도 잊지 못할 나라 없는 민족의 뼈에 사무친 모욕을 몇번 받고난 뒤부터 저의 머리속에서는 김일성동지께서 깨우쳐주신 진리가 되살아났습니다. 홍역을 거친 셈이랄가 정신적인 열병을 겪고난 다음부터 무어랄지···

스스로 이렇게 말씀드리긴 외람됩니다만 저의 세계관도 이제는 그 골격이 선것 같습니다. 저는 김일성동지께서 싸우고계신다는 동만으로 갈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안되느라고 저는 진짜 몹쓸 열병에 걸려 눕게 되였습니다. 속이 탔습니다. 그렇게만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껏 외따로 떨어져 지내진 않았을겁니다···》

박문필은 그때를 회고하고나니 지금도 속에서 불이 일며 입술이 말라드는듯 어지간히 식은 차물을 다시 한모금 마셨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제가 지금껏 변함없이 싸울줄로 믿고계신다고 편지에 쓰셨는데 그 뜨거운 믿음을 저는 이렇게 빈손으로 접하게 되였으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이께서 인민혁명군을 조직하시고 여러 동지들과 함께 고난에 찬 혈투를 벌려오신 지난 몇해동안 저는 무맥하게 지내왔습니다. 리경준동지도 아까 말씀했지만 제가 어떤 사람입니까? 벌써 중학시절에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는 행운과 특전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그이의 믿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이께서 기대하신것처럼 지내오지 못한것입니다. 뒤늦게나마 그릇되게 살고있는 자신을 깨우치고 다시 투쟁을 시작하자고 결심해나서서 하였다는것이 고작 몇몇 동지들로 동지회 비슷한것을 무어본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 조직은 지금 어떤 활동을 하고있습니까?》

하고 리경준은 박문필이 잠시 사이를 두었을 때 물었다.

《아직 활동이라고 할만 한것을 별로 벌려보지 못했습니다. 갓 조직한 관계도 있습니다만 그저 앞으로 인민혁명군과 선을 잇게 되면 모두가 인민혁명군에 참군할것을 각오하고 무기와 탄약을 준비할 계획을 가지고있을뿐입니다.》

《그건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사령관동지께서 보고받으시면 몹시 기뻐하실것입니다. 친히 편지에 밝히셨겠지만 그이께서는 이것을 기대하시고계십니다. 그이께서는 저를 떠나보내시면서 박문필동무가 그간 지내온 형편을 알아보고 조국광복회창건을 위한 준비사업을 의논하도록 지시하시였습니다.···》

리경준은 장군님께서 구상하시고계시는 조국광복회조직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네, 편지에도 그렇게 쓰셨더군요.》

《그런만큼 지금 있다는 조직은 조국광복회의 하부조직으로 전환시킬수 있게 개편하고 확대발전시켜야 할것입니다.···》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그들은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마당에서 녀인의 가벼운 기침소리를 듣고 리경준의 신변때문에 은근히 신경을 쓰고있던 박문필이 밖을 살피려고 창문에 걸친 휘장을 들쳤을 때에야 그들은 벌써 거리에 인적이 드물어지고 밤이 꽤 깊었음을 알았다.

구름속의 어스름달이 희미한 빛을 뿌렸다. 마당에도 키낮은 널울타리근처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박문필은 마음놓을수가 없었던지 삐걱거리는 나무층계를 조심스레 밟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후 리경준은 널대문 근처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얼씬거리는것을 보았다. 그 그림자는 마당복판으로 나오며 2층에서 내려가서 역시 마당에 나선 박문필이와 마주섰다. 리경준이를 처음으로 맞아주던 녀인이라고 짐작되였다. 아마도 그 녀인은 대문근처에서 망을 보고있었던게 틀림없었다.

다시 올라온 박문필은 저으기 미안해하며 말하였다.

《이거 용서하십시오. 피가 끓게 하는 이야기를 오래간만에 듣는 재미에 저녁대접할것도 잊어버렸습니다. 먼길을 오시기에 꽤 시장하셨겠는데···》

《아닙니다. 저도 밤이 깊어지는줄 몰랐습니다.》

리경준은 머리를 젓고나서 부인도 조직에 관계하고있는가고 물었다. 박문필은 멋적게 웃었다.

《아직 그런 수준에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 사업도 비밀에 붙이고있습니다. 아직 의식수준이 어립니다.》

《나는 조직원인줄 알았습니다.》

박문필은 스스럼없이 안해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저의 집에서는 안해가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고 하여 우리가 결혼한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박문필의 형과 형수는 문필의 안해 철숙이를 내놓고 랭대하고 온갖 욕설을 다하였으나 철숙은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서 싸우지도 않았고 그들이 하는 무례한 행위를 남편에게 이야기하지도 않았다는것이다.

가정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철숙은 남편이 형 아닌 형을 두고 분노하고 참지 못해한다는것을 안후부터는 남편에게 괴로움을 줄것만 같아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는것이다.

박문필이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철숙이가 박문필에게 시집온지 얼마 안되여 형수라는 녀자가 찾아왔었다. 와서 하는 말이 시동생인 박문필이 근본이 가난한 철숙에게 홀려 신세를 망쳤다고 하였다. 철숙은 너무도 분하여 눈물을 흘리였다. 그때 밖에 나갔던 박문필은 안해가 눈물을 흘리는것을 보고 무척 괴로와하였다. 그후부터 철숙이는 혁명하는 남편에게 자그마한 걱정도 끼치지 않으리라 결심한듯싶다는것이다.

《박동무, 내 생각에는 부인을 꼭 조직에 망라시키는게 좋을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리경준의 권고였다.

《저도 사실 생각이 없지 않아서 요즘 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고 혁명에 대한 눈이 틀만 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좀 해주고있습니다. 이제 좀더 준비시킨 다음에 정식 조직성원으로 받으려고 합니다. 아직은 이른것 같아서···》

《시제 당장은 다소 미숙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조직에 망라시키고 사업을 통해 키우는것이 어떻습니까?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미구에 장군님께서 창건하시게 될 조국광복회는 광범한 반일대중을 망라하는 통일전선적인 조직체입니다. 그런만큼 준비된 공산주의혁명가들만 조직에 망라시킬게 아니라 광범한 대중을 흡수하는 방향에서 사업해야 할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여태까지 조직을 넓히면 많은 사람들이 대렬에 들어오게 되는데 개중에는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가지고 조직의 비밀을 지키지 못하면 어쩌나?

오히려 그렇게 될바에야 조직을 넓히는것보다 비록 몇이 안되더라도 준비된 사람들로 알심있게 꾸리는것이 더 낫지 않는가 하고 그릇되게 생각했습니다.》

리경준은 겸하여 생각난김에 박문필이 주의하지 못하고있는 한가지 점에 대하여서도 일러주었다.

《저 그리구 진렬장안에 전시한 사진들을 바꾸는게 어떻습니까? 지금 전시해놓은 사진들이 너무 표가 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그 사진들을 보고 문득 떠나온 조국산천과 고향을 생각할것입니다. 박동무의 의도도 여기에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 사진들을 보면 누구나 사진관주인이 남달리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란걸 알수 있습니다. 왜놈들과 밀정놈들이 이것을 보지 못할가요? 지하사업인데 이것은 고려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지하사업에서는 자그마한 부주의도 뜻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수 있다고 가르치시였습니다.》

그제야 박문필은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지었다. 여직껏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 지내던 일이였다.

《저자신도 어떻게 되여 그런 사진만 골라 붙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사람의 사상이란 숨길수 없는가봅니다. 자, 어서 아래에 내려가서 늦은대로 저녁이나 듭시다.》

두사람은 철숙이가 정성스럽게 차린 저녁을 같이 나눈후에 다시 마주앉아 앞으로 할일을 의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