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1

 

제 6 장

1

 

동지들의 한결같은 정성과 간호에도 불구하고 최선금은 눈에 띄울만큼 하루하루 수척해갔다.

아침이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절로 걸어간다고 하면서 동지들을 괴롭히던 일도 이제는 그만두었으며 자기때문에 근심하는 동지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며칠만 견디면 회복된다고 장담하던 일도 어느새 잊어버린듯 그만두었다.

동지들은 최선금의 신상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와 자기들의 불안한 예감을 가지고 말없이 고개를 저었는데 더우기 엄중한것은 환자인 최선금자신이 희망이 없다고 단정한것이였다. 그런 생각은 어느날 밤 신음소리를 치다 말고 문득 깨여나서 강물처럼 소리없이 흘러가는 부드러운 안개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자기가 장군님을 만나뵈올 순간까지 견디여내겠는가고 의심한 때로부터 시작된것이였다. 최선금은 소스라쳐놀랐으며 자기가 어떻게 그런 약하고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되였을가 하고 의아해하였다. 그후 최선금은 깊은 고민과 자책을 거듭한 끝에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였다.

최선금은 부상을 당하기전보다 더 명랑해졌으며 동지들은 최선금의 얼굴을 의아쩍게 바라보면서도 어쩔수 없이 그의 기분에 끌리게 되는것이였다.

한겨울마냥 호함진 눈이 펑펑 쏟아져내린 날 저녁에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장철구가 최선금의 상처를 돌보았다. 리경준과 장기령은 아이들과 함께 마른풀을 한아름씩 안고 돌아와서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장철구의 얼굴을 살폈다.

장철구는 배낭아구리를 헤쳐놓고 가위밥사이에 끼여있는 잣을 고르는데 골몰하는척 하였다.

최선금은 류달리 기분이 명랑해서 명일이와 명숙이가 안고온 새둥지만 한 마른풀을 받아가지고 자리에 골고루 깔았으며 장철구의 일손을 도와서 잣을 까기까지 하였다.

《나무에 앉은 저 눈을 보니 왜 그런지 어린시절이 생각나누만요. 눈이 오면 왜 그리 좋았던지, 그리고 썰매를 타는 총각애들이 또 얼마나 부럽던지··· 계집애라고 누구도 나한테는 썰매를 만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들것채로 쓰던 대쪽을 얻었어요. 요만한건데···》

기장을 가리키려고 손을 들던 최선금은 어깨의 아픔으로 하여 눈살을 찌프렸다.

《그걸 발밑에 깔면 씽씽 잘두 나갔어요. 여러번 무르팍도 깨고 치마도 찢었지요. 그때마다 어머니는 글쎄 그 대쪽을 아궁지에 처넣으려구 하시며 <이놈의 겨울 빨리 가야지 가뜩이나 가난한 집이 뽕빠지겠다.>하질 않겠어요. 나는 그때 왜 어머니가 겨울을 그렇게 싫어하는지 몰랐어요. 차차 철이 들면서 나는 리해하게 되였답니다. 나무걱정, 옷걱정, 끼니걱정을 하게 되면서부터였지요.》

최선금은 말라든 입술을 혀끝으로 추기면서 기력이 진해진 눈에 정기를 모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속으로 겨울이 없었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가 처음 야학에 다닐 때 야학선생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을 가르쳐주면서 겨울도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세상에는 일년내내 무더운 여름만 계속되는 나라도 있는가 하면 한해동안 눈과 얼음이 녹지 않는 나라가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온 다음에는 만가지 꽃이 피는 여름이 오고 하늘이 푸르고 단풍이 붉게 타는 가을이 지나면 또 온 천지에 탐스러운 눈꽃을 하얗게 피우는 겨울이 온다, 그래서 우리 나라를 사시장철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한다, 이렇게말이예요.

그래서 난 야학선생이 돈많은 사람이 아닌가고 의심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우기였어요. 그랬더니 선생은 웃으면서 왜 우리가 겨울을 나쁘다고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헐벗고 굶주리기때문이다, 철이 원쑤로 될수 없다, 우리가 추위에 떨고 굶고 손발이 얼고 하는것은 절대로 겨울때문이 아니다, 바로 제국주의자들과 지주, 자본가놈들이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하기때문에 우리가 못사는것이다, 겨울을 원망하지 말고 원쑤들을 반대해서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하였지요. 그때부터 나는 차츰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어머님께 그런 말씀을 올렸더니 어머님은 네 말이 옳다고 하시며 설음이 북받쳐 우시였어요···》

최선금은 잠시 말이 없다가 어지간히 격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겨울을 원망하고있다고 생각해요. 하루빨리 그들이 금수강산 아름다운 우리 조국을 마음껏 즐기며 살도록 해야겠는데··· 그런걸 생각하니 막 안타깝군요.》

말을 마친 최선금은 우수수 바람이 불 때마다 숲 어디서인지 날리는 목화송이같은 흰눈발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래···》

얼마후 장철구는 손등에 떨어진 커다란 눈송이를 털며 이렇게 말했다. 리경준과 장기령이도 동감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이였는데 그들의 표정에는 공감과 함께 놀람의 빛이 력력하였다. 평소에 말이 적은 최선금이 때아닌 때에 어린시절이야기를 꺼낸것이 이상하였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는 어디까지나 행군도상의 녀성대원이며 앞으로도 계속 전투원으로 남아있으리라는 확신을 표명했기때문이였다.

동지들의 이러한 놀람은 날이 갈수록 평범한 일로 바뀌여졌고 동지들의 근심을 덜려는 최선금의 노력을 어색하게 느낄 대신 오히려 그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새삼스럽게 탄복하였다. 장기령과 장철구는 말할것 없고 남편인 리경준이조차 놀람과 감동속에서 최선금을 바라보게 되였다.

최선금은 쉬임없이 맑디맑은 정신적인 빛을 소리없이 내뿜는것 같았다.

날이 푸름해지면 최선금은 꼭 아이들을 깨웠다. 그러면 장철구가 눈을 녹여 덥힌 물을 명일이와 명숙이 앞에 내놓았다. 한고뿌가 되나마나한 물이였다.

최선금은 들것에 앉거나 누워서 두손을 모아쥔 아이들의 손에 조금씩 물을 부어주었다. 세수가 끝나면 최선금은 배낭속에 건사해두었던 참빗으로 명숙의 머리를 빗어주었고 명일이의 옷매무시를 바로잡아주었다.

우등불은 리경준일행의 충실한 벗이였다. 일행이 숙영할 때면 우등불은 눈우에서건, 바위밑에서건 어김없이 꼭꼭 타올랐다.

그날 밤도 우등불은 기다렸다는듯이 어둠과 추위를 물리치며 기세좋게 타올랐다.

일행은 좁쌀죽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나서 우등불을 바라보거나 어두워진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장철구는 소리내기를 저어하는듯 마른풀로 가만가만 밥통을 닦고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우등불주변에 감돌았다. 이맘때면 의례히 찾아드는 침묵이였다. 긴장한 행군과정에서는 잊어버렸던, 벌써 몇십, 몇백번을 곱씹은 생각들을 되풀이하는것이였다. 영 잊었으면 하는 《민생단》건이며 우리가 과연 무송땅으로 가고나 있는지 하는 불안한 생각들이였다.

문득 최선금은 애들을 불렀다.

명일이와 명숙이는 어머니가 이제 덮고 잘 솜외투를 내주려는것으로 알고 발끝걸음으로 살금살금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솜외투를 내놓을 대신 사랑하는 두 남매를 찬찬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명일이와 명숙이는 오늘 어떤 좋은 일을 했나요?》

두 남매는 어머니가 오늘따라 별스레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서 마주보았다.

놀란것은 두 남매만이 아니였다.

참나무가지 한대가 얼마나 오래 타는가 시험해보듯 우등불을 바라보고있던 구레나루가 터부룩한 리경준이도 고개를 들었고 마른풀우에 반듯이 누웠던 장기령이도 팔굽을 짚으며 천천히 허리를 일으켰다.

명일이는 부끄러웠던지 히죽 웃어보였다.

최선금은 엄한 표정을 하고 재촉하였다.

《그럼 명일이가 먼저 대답을 해봐요.》

명일이는 어머니의 엄한 눈을 피하듯 눈길을 떨구고 자꾸 옷섶을 잡아당겼다.

《명일은 낮에 아저씨를 따라다니면서 아무 일도 한것이 없나요?》

명일은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고 장기령아저씨를 보며 벌쭉 웃고나서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난, 저기··· 아저씨가 잣을 따러 갈 때 발자국을 메웠어요.》

《그래요? 우리 명일이가 참 훌륭한 일을 했군요. 아주 착한 일을 했어요.》

행복의 맑고 따스한 물결이 최선금의 눈이며 볼이며 목소리에 흘러넘쳤다. 아버지된 리경준은 말할것도 없고 장기령과 장철구도 이제까지의 시름을 잊고 따라 웃었다. 명일이는 어머니를 보고 또다시 벌쭉 웃고는 당당한 자격을 가지고 어머니곁에 앉았다.

입에 손가락을 물고있던 명숙은 얼결에 오빠를 따라가려고 한 발을 내짚다가 어머니가 다음은 명숙이 차례라고 일러주는바람에 흠칫하고 멈춰섰다. 명숙은 어리광을 부리듯 어깨를 흔들었는데 까만 눈에는 눈물이 가랑가랑했다.

어린 딸이 가엾었던지 최선금은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명숙인 노래를 불러봐요.》

그바람에 명숙은 기운을 얻어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노래라면 명숙은 겁날것이 없었다. 명숙의 노래를 늘 들어온 어른들은 미리부터 흐뭇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명숙은 최선금의 손을 붙잡고

《엄마, 나 댕기ㅡ》 하고 까만 머리를 숙여보이였다. 노래를 부르겠으니 댕기를 달라는 뜻이였다. 최선금은 장철구를 돌아보며 잠시 망설이는듯 하더니 배낭안에서 분홍색댕기를 꺼내서 명숙의 손에 쥐여주었다. 명숙은 댕기를 받아들고는 한번 껑충 뛰며 해해 웃었다. 그러던것이 무슨 생각이 들었든지 갑자기 시무룩해지며 바람결에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분홍색댕기를 최선금앞에 도로 내밀었다.

《엄마, 나 댕기 그만둘래.》

《왜 그러니?》

최선금은 주저주저하는 명숙이의 손에서 얼결에 댕기를 받았다.

명숙은 발끝을 내려다보며 머뭇거리다가 챙챙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댕기를 매면 안되지뭐.》

《왜 안되니?》

《장군님께 인사드릴 때 댕기 맬래.》

《···》

《엄마, 그게 좋지?》

최선금은 불쑥 눈에 고이는 눈물을 감추려고 머리를 돌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장군님께 인사드릴 때··· 달자···》

이윽하여 최선금은 댕기를 차곡차곡 접어서 이번에도 역시 배낭속에 깊숙이 간수하였다.

명숙은 장한듯 댕기 없는 머리를 언뜻 들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명숙의 챙챙한 목소리가 우등불가에 울려퍼졌다.

 

어데까지 왔니 산에까지 왔다

어데까지 가려니 남호두까지 간다

무엇하러 가려니 장군님께 간다

누구하고 가려니 우리모두 간다

 

근거지의 아동단원들이 즐겨부르던 노래였다. 그러나 명숙은 본래의 가사를 좀 바꾸어 불렀다. 거기에는 장군님께로 달리는 어린것의 깨끗하고 맑은 심정이 굽이치고있었다.

노래를 다 부르고난 명숙은 까만 눈을 반짝이며 늘 차례지군 하던 어른들의 칭찬을 기다렸다. 뜻밖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명숙은 눈이 둥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아저씨와 큰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저씨도 큰엄마도 노래를 성의껏 불러드린 명숙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듯 무슨 생각엔가 잠겨있었다.

어머니는 댕기를 간수해넣은 배낭에 한손을 얹은채 머리를 숙이고있었는데 우등불에 비친 어머니의 상큼한 코등으로 이슬방울같은 눈물이 굴러내렸다. 아버지도 깊이 머리를 수그린채 손에 들고있던 참나무가지로 공연히 재를 헤집으며 앉아있었다.

노래를 듣자고 마른풀우에 일어나앉아있던 장기령아저씨는 어느 틈엔지 불무지를 등지고 옆으로 돌아누워있었는데 머리를 감싸쥔 두팔과 어깨와 잔등이 소리없는 흐느낌에 떨고있었다.

밥통을 닦던 큰엄마는 얼른 일어나 불무지곁에서 물러가며 소매로 눈굽을 훔치고있었다.

점점 당황해하며 어른들을 둘러보고 다시 둘러보고있던 명숙의 눈에도 피잉 눈물이 감돌았다. 명숙의 입술은 금시 이그러졌다.

《엄마, 울지 마!》

명숙은 불현듯 소리치며 어머니의 품에 와락 안겼다. 명숙은 어머니의 목을 그러안고 눈물에 젖은 볼에 뺨을 대고 비비며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랑 모두 울면 나두 장군님이 더 보고파.》

그 말에 울음소리를 참고있던 장기령은 흐느낌소리를 터뜨렸다.

입을 비죽비죽하며 앉아있던 명일이까지도 아버지의 잔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최선금은 완강한 의지로 아픔을 이겨나갔다. 그는 어깨에 동통이 오고 온몸이 열에 들뜰 때도 동지들앞에서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눈굽은 검은빛이 감돌면서 오목하게 꺼져들어갔고 홀로 생각에 잠겨있을 때면 전에없이 입가에 두가닥의 가느다란 잔주름이 잡히군 하였다.

동지들은 최선금을 위하여 그처럼 세심한 관심을 돌리면서도 그의 생명이 아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있다는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오히려 동지들은 최선금이 중환이라는것을 잊어버리고 즐겨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였으며 때때로 말없이 아픔을 참는것을 보면 그가 또 무슨 아름다운 환상에 잠겨있는줄 알고 빙긋이 웃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허리에 늘 피나무껍질을 달고다니는 장기령이 한남실의 편지를 두고 최선금의 조언을 받으려고 은근히 기회를 엿보고 있은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였다. 다음날 쉴참이였다. 최선금의 들것에 깔아주려고 송라를 한아름 뜯어안고 돌아오던 장기령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최선금의 조언을 받기에 딱 좋은 기회였다. 최선금은 들것우에 한쪽 팔굽을 짚고 엇비슷이 누워있었고 다행히 동지들과 어린것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송라가 아니예요? 어디서 뜯었어요? 수고했어요. 그런데 왜 이러구 서있어요? 빨리 와서 불을 쪼이지요.》

장기령은 들것을 에돌아서 가물가물 소리없이 타오르고있는 우등불곁에 앉았다. 그는 마른나무가지를 두어개 골라서 우등불에 꽂아넣고나서 용기를 내여 최선금을 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목안에 잦아드는 소리였기때문에 최선금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장기령은 고개를 들고 다시 최선금을 찾으려다가 그만 시선이 꼿꼿해지고말았다.

최선금은 수첩을 보고있었다. 그러나 장기령을 놀라게 한것은 수첩을 보고있는 그 사실보다 그의 입가에 잡힌 두가닥의 가느다란 주름이였다.

장기령은 가슴이 섬찍했다. 동지의 아픔이 절절하게 안겨왔고 그러한 동지에게 부질없는 소리를 하려고 한 자신이 심심히 뉘우쳐졌다.

《우리 녀성들에게는 참말로 일이 많아요.》

최선금은 밑도끝도없이 이렇게 말을 하였다. 장기령은 의아한 눈으로 최선금을 쳐다보았다. 최선금의 눈은 열정에 불타고 두 가닥의 잔주름이 잡혔던 입가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물결쳤다.

《장동무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는지 아세요? 3년전의 일인데 소왕청 마촌에서는 왕청지구부녀회열성자회의가 있었답니다. 그때 글쎄 장군님께서 몸소 회의에 나와주시지 않았겠어요. 장군님께서는 그때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하셨댔어요.》

최선금은 빛나는 눈을 들고 숲우에 펼쳐진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구름떼들이 어데론가 가볍게 흘러가고있었다.

《···이 회의에 참가하고있는 부녀회열성자들은 물론 근거지의 부녀회원들모두가 우리 나라 녀성운동의 선봉대이며 녀성혁명가들이다. 지금 우리 조국에서는 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녀성들이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의 2중3중의 억압과 착취 속에서 신음하고있다. 동무들은 바로 이들에게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의 권리와 자유와 녀성해방을 가져다주어야 할 영광스러운 사명을 지닌 일군들이다···》

온화한 정오의 한때였다. 이따금 이깔나무가지에 앉았던 눈덩이가 제 무게에 못이겨 소리없이 떨어졌다. 그때마다 이깔나무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눈안개가 뽀얗게 일어나군 하였다.

최선금의 목소리는 다시 울렸다.

《우리 녀성들이 할 일이 정말 많아요. 조국이 해방되면 우리 녀성들은 먼저 부녀회중앙을 세워야 할거예요. 지금까지는 촌부녀회, 구부녀회가 있었지만 그런 자그마한 조직만을 가지고 어떻게 삼천리에 널려있는 천만 녀성들을 조직하고 지도하겠어요? 부녀회중앙간부라면 교양이 높고 부녀회사업경험도 많고 모범적인 동무들이 되여야 할것 아니예요. 그것도 그렇고 한 부녀조직에 50명씩 넣는다치고 온 나라에 20만의 부녀조직이 있어야 하는데 부녀책임자만 해도 20만이야요. 이 많은 간부들을 어디서 구해오겠어요? 그렇다고 부녀조직을 꾸리는 일을 미루겠어요? 이 일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할 일이 무척 많아요.》

최선금은 근심어린 얼굴을 장기령에게 돌렸다.

《아무래도 우리 녀성들의 해방과 권리를 찾는 일에 남성동무들이 도와나서야겠어요. 혁명적으로 녀성간부들을 키우자면 근거지에서처럼 강습과 야학의 방법으로 해야 하겠는데 남성들이 큰몫을 맡아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땐 장동무도 강사가 돼줘야지요. 어때요?》

《네··· 아직··· 전···》

장기령은 자기도 모르게 최선금의 이야기에 끌려들어가서 어줍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사실 장기령은 녀성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니 처음이였다. 최선금은 소리내여 웃었다.

《아니··· 2천만 겨레를 왜놈의 야만통치에서 해방하고 새 사회를 세우자면서 2천만의 반을 차지하는 녀성들을 생각 안했단말이예요? 유격대원답지 않아요.》

《사실은 그런게 아니라··· 왜 생각 안했겠습니까? 생각을 하긴 했는데 아주머니처럼 구체적이 되지 못하였을뿐입니다.》

장기령은 얼굴을 붉히며 변명삼아 이렇게 말했다. 최선금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녀성문제가 이만저만한 문제가 아니였다. 결국 장기령은 최선금에게 조국이 해방되는 날 민족군대를 조직하고 강화하는 일도 바쁘겠지만 어떻든 녀성들을 위해 강사로 출연할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장기령은 해방된 그날 숱한 녀성들앞에 강사로 나설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이때까지 그는 학습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고있었을뿐더러 정치사업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로 여기고있었다.

장기령은 이때 그렇게 망설이던 한남실의 편지를 최선금앞에 내놓았다.

《나한테 오는 편지예요? 누가 보냈을가? 아유 한남실동무가 보낸거군요. 마음씨 곱고 착한 남실동무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남실이가 보고싶군요. 그런데 남실동무가 왜 나한테 편지를 보냈을가?》

최선금은 접은 쪽지편지를 앞뒤로 살피면서 의아해하는 눈을 장기령에게 주었다.

거기에는 또박또박 한남실이라고 박아썼을뿐 받을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장기령은 얼굴을 붉히고 더수기를 긁었다.

《네··· 저··· 사실은···》

장기령은 용기를 내여 이야기했다.

《저를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저는 이처럼 어려운 때에 딴 생각을 하군 하는것을 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바는 아니지만 그게 사··· 사실 기관총알을 쏴내갈려버리는것처럼 씨원씨원하게 잊어버리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선금동지한테 방조를 좀 받자고···》

최선금은 말없이 웃는 얼굴로 편지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장기령은 어떻게 리해해야 좋을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나는 아까부터 장동무의 눈치가 좀 수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잘못하면 큰 실수를 할번 했군요. 남의 편지를 내가 왜 읽겠어요. 그것두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온 편진걸요.》

장기령은 손을 내흔들며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한번도 한적이 없습니다. 더우기 지금같은 처지에 있는 제가···》

《그게 무슨 말이예요? 장동무가 어떻다구요? 난 장동무가 장군님의 훌륭한 전사라는것을 단한번도 의심한적이 없어요. 나는 누구앞에서도 그걸 이야기할테예요. 인주어요. 그렇다면 읽어보겠어요.》

장기령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얼굴을 돌렸다. 이윽하여 부드럽고 맑은 최선금의 목소리가 울렸다.

《장동무 량해해주세요. 일이 바빠서 못가고 이렇게 인편에 전합니다.

만나면 꼭 하자던 말인데 장동무 정말 부탁입니다. 학습을 하셔야 해요.

동지로서 부탁합니다.

한남실 올림》

《아니 무슨 편지가 이래요? 암호를 쓰듯 했군요.》

최선금은 유쾌하게 웃었다. 장기령도 빙그레 따라웃었다. 최선금의 얼굴에 자리잡았던 긴장한 빛은 사라졌다.

《난 왜 그러는지 통 모르겠군요. 뻔한걸 가지고 벙어리 랭가슴 앓듯 하다니?》

최선금은 그를 나무라며 편지를 돌려주었다.

《장동무한테 좀 이야길 해야겠어요. 장동무는 이런 때에 남실동무생각을 하는것을 큰 죄악으로 생각한다고 하는데 그것부터가 잘못이예요. 그래 이것이 동지적인 심정에서만 쓴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구 이렇게 쓴 사람이니 지금 같은 처지에 있는 장동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도 않을게라구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잘못이예요.》

장기령은 고개를 떨구었으나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장기령은 명랑해진 최선금을 보는것이 기뻤고 한남실의 진정을 안것이 또한 기뻤다.

리경준이가 아이들을 앞세우고 돌아왔다. 그들은 잣송이를 얻으로 갔다오는길이였다. 장기령과 최선금은 명일과 명숙이를 맞노라고 편지건에 대한 이야기를 맺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