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3

 

제 4 장

3

 

한남실은 가냘픈 어깨를 옹송그리고 앉아서 시름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았다. 생기가 돌던 그의 반듯한 이마와 두볼은 그늘에 가리운것처럼 침침해보였다.

동굴안에서는 아동단원들이 날이 훤하게 밝은줄도 모르고 지쳐서 자고있었다.

이즈음에 와서 한남실은 아이들에게 웃음을 줄 힘이 없다는것을 두려움속에서 깨닫고 소스라쳐 놀라기도 하였다.

함박눈이 지꿎게 내렸다.

멀리 바라보이던 삼각봉도, 눈이 내리면 새끼노루를 잡을수 있다고 하던 동굴앞 맞은편의 새초밭도 모두 내리는 함박눈에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

남실은 신비스럽고 아름답고 언제나 즐거운 감정만을 불러일으키던 함박눈을 지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있었다.

함박눈은 이미 사라진줄 알았던 눈보라를 몰아올수도 있고 그끝에 강추위가 뒤따를지도 모른다.

(행군을 계속해야 하나? 그러다가는 뜻하지 않는 불행이 생길수도 있어. 인가를 찾아가서 다문 며칠이라도 아이들에게 휴식을 주는것이 옳지 않을가? 이럴 때 의논할 사람이라도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그러자 문득 장기령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 동문 지금 어데 있을가. 장군님을 모시고있겠지.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줄은 정말 모를테지···)

한남실은 서글프게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생각은 자꾸만 깊어만 갔다.

부드러운 손길이 조심스레 남실의 등을 어루만졌다. 손끝으로 더듬거리다가 바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살며시 턱을 기대였다.

살뜰한 손길과 어깨를 꼭 누르는 턱의 감각으로 남실은 그가 순녀라는것을 알아차렸다.

기특하게도 새벽잠이 없는 순녀였다.

다른 때 같으면 눈을 뜨자마자 《동무들! 기상이야! 일어낫!》 하고 한바탕 돌아치며 떠들었을 순녀가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숨소리조차 죽이는것 같았다. 그리고 남실의 어깨를 쓰다듬는 소녀의 손이 사랑스럽기보다는 어른들처럼 무겁게 느껴지는것이 이상하였다.

《선생님,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면 어떡하나요?》

《순녀는 함박눈이 싫어?》

《인제는 막 무서워요.》

한남실은 순녀의 대답에 한숨을 쉬였다.

《동무들도 모두 무섭다구 해?》

순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듯 물었다.

《선생님, 동무들을 깨울가요?》

《깨우지 말아. 모두들 순녀처럼 함박눈을 무서워할걸.》

《아니예요. 나 혼자만 무서워해요.》

《그래···?》

《나는 눈이 크니까요. 우리 할머니가 눈이 크면 무서움을 잘 탄다고 했어요.》

《정말···》

하고 남실은 순녀의 팔을 더듬어잡고 말끝을 흐리였다.

순녀는 기다렸다는듯이 남실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은근하게 물었다.

《선생님, 봄이라면 여기에두 고운 꽃이 많이 폈겠지요?》

《그럼, 사방에 꽃밭이지. 나비도 날구 꿀벌두 날구.》

《야, 봄이라면 좋겠네! 꽃다발을 만들게.》

《꽃다발은 해서 뭘하련?》

순녀는 호ㅡ 한숨을 내쉬였다.

《그저··· 소왕청에서 공부할 때 꽃다발을 만들어서 우리 아동단학교에 찾아오신 장군님께 드리던 생각이 났댔어요.》

남실은 솟구쳐오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렸다.

이윽하여 순녀는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저아래에 마을이 있는 모양이예요.》

남실이의 대답이 없자 순녀는 동굴초입의 돌우에 있는 또아리를 들어보이였다.

새초로 튼 또아리였다.

그것은 남실이가 이미 본것이였다.

또아리는 누렇게 말랐으나 속의 새초가 아직도 파란 빛을 잃지 않고있는것으로 보아 작년 여름에 튼것임에 틀림없었다.

새끼오리도 있고 도토리열매를 깐 흔적도 남아있었다.

《선생님, 그런데 이런게 왜 굴안에 있을가요?》 하고 순녀는 물었다.

《여름에는 굴안이 시원해서 쉬기가 좋단다. 나무단을 이고 가다가 여기서 쉬고 내려간 모양이구나. 비를 그었던지···》

《마을은 먼데 있을가요?》

《그리 멀진 않을거야···》

금시 순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경수는 알지도 못하면서 우쭐대기만 하지. 또아리를 보고 새둥지라고 하지 않아요. 아래에 마을이 있을거라구 하니까 마을은 무슨 마을인가구 야단만 하구요.》

《경수가 뭐 우쭐하겠니. 순녀가 어쩌는가 보느라구 그랬겠지.》

《아니예요. 막 야단했는데요뭐.》

한남실은 웃어보였다.

《그야 순녀가 경수의 마음을 몰라주니까 그러지.》

《저는 성을 내지 않았어요···》

한남실은 잘했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아이들중에서 그중 나이 차고 셈이 든 경수가 또아리인줄 알면서도 새둥지라고 우긴 까닭을 짐작할수 있었다.

한남실은 아동단원들의 마음이 자기가 여직껏 알고있는것보다 더 깊고 넓다는것을 그리고 자기가 아이들을 알고있다고는 하지만 그보다 모르는것이 많다는것을 새삼스레 느끼였다.

그 느낌이 깊어질수록 한남실은 아이들을 위하여 바친 정성이 모자라는것을 뉘우치게 되였다.

그러나 한남실은 생각과는 달리 자기의 힘이 진했음을 가슴아프게 느끼였다.

인제는 자신도 누구에게나 의지하고싶었다.

그리하여 한남실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결심하고 길떠날 차비를 하였다. 인가를 찾아서 아이들에게 다문 며칠이라도 휴식시키고싶었다.

그와 함께 자기도 쉬고싶었으며 인정이 많은, 그리운 마을사람들에게서 위안이라도 받고싶었다.

아동단원들은 선생이 돌아올 때까지 동굴안에서 꼭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깊은 골짜기어구까지 내려왔을 때에야 함박눈은 멎었다.

골짜기어구에서 아래로 세갈래의 작은 골짜기가 흘러내렸다.

한참동안 망설이던 한남실은 그중 넓고 평평한 가운데골짜기를 바라고 다시 길 없는 숲을 헤치며 바삐 내려갔다.

소나무숲에 이른 그는 걸음을 멈추고 밋밋하게 자란 소나무줄기를 더듬어보았다.

소나무껍질을 벗긴 자리가 력력히 드러나보였다.

어른의 키가 미칠만 한 줄기에 네각을 지어 벗겨낸 자리에는 속살이 하얗게 드러나고 거기에 구슬같이 맑고 투명한 송진방울이 층층히 맺혀있었다.

어떤 송진방울에는 허리가 잘룩한 개미가 매달려서 잠자는듯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그옆에 서있는 여러 그루의 나무줄기에도 역시 송기를 벗긴 칼자리들이 희뜩희뜩했다. 더러는 껍질을 벗긴 자리가 낮은것으로 미루어보아 분명 어린아이들의 손자리였다.

그것들은 이 근처에 사람 사는 집들이 있다는것을 말없이 귀띔해주는것이였다.

남실은 어머니를 따라 산에 가서 송기를 벗기던 어릴적 일이 생각났다.

인가가 있으리라는 반가움보다는 인민들의 굶주리는 정상에 부닥칠것만 같은 불안이 앞선다.

남실은 거기서 얼마 내려가지 않아서 네채의 귀틀집을 발견하였다.

첫번째 귀틀집은 커다란 이깔나무에 의지하여있었는데 웬일인지 부엌문이 한쪽 돌쩌귀가 떨어진채 바람에 거들거렸다.

마당가에 이르니 새무리가 인기척에 놀란듯 휑뎅그레 열린 문으로 우르르 소리를 내며 밀려나와 바삐 어디로인가 날아가버렸다.

두번째 귀틀집에도 역시 사람이 없었다. 지붕에 얹은 동기와는 반나마 흘러내리고 마당 한쪽구석에 세워둔 나무절구안에는 눈이 수북이 담기고 그옆에는 손때묻어 반들반들 닳은 절구공이가 주인을 기다리는듯 눈을 들쓴 기다란 머리를 기웃하니 내밀고 서있었다.

한남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였다.

얼마후 그는 연기내를 맡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오동나무 두그루가 서있는 산비탈에 한채의 귀틀집이 있었다.

마당 한쪽구석에 서있는 오동나무밑에서 한남실은 누런 종이쪼각을 덧붙인 부엌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떻게 주인을 찾을가 하고 망설였다.

주인을 찾는 자기의 목소리에 집안사람들이 놀랄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때 부엌문이 밖으로 힘없이 밀리더니 먼저 메마른 기침소리가 흘러나오고 뒤따라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함지박을 들고 나타나 마당가에 무둑무둑 쌓인 눈더미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함지박에 담긴 물을 쏟았다.

한남실은 오동나무밑에서 한걸음 나서며 나직이 불렀다.

《할머니.》

주름살에 둘러싸인 할머니의 눈은 먼데서 그 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듯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한남실은 오동나무밑에서 몇걸음 더 나서며 이번에는 전보다 더 크게

《할머님ㅡ》 하고 불렀다.

《게 누구요?》

한남실은 할머니앞으로 성급히 걸어갔다.

《저예요. 유격대원이예요.》

한남실은 할머니의 손에서 함지박을 받았다.

《아이구, 이게 웬일이요!》

할머니의 눈언저리에는 눈물이 축축하였다.

할머니의 온기 없고 딱딱한 손이 남실의 어깨를 더듬었다.

남실은 함지박을 마루에 놓고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할머니는 두손을 맡긴채 머리를 돌리고 누군가를 찾았다.

동그란 얼굴에 까만 머리가 곱슬곱슬한 예닐곱살의 처녀애가 지게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보고있었다.

《옥이야, 인사를 드려라. 에구, 철두 없지. 네가 그렇게두 기다리던 유격대언니다. 어서 인사를 드려라.》

옥이는 귀여운 얼굴에 웃음 한점 담지 않고 한남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린것이 세상을 등지고 살다나니 저렇게 사람을 두려워한다우.》

할머니는 살이 터진 노전우를 손으로 문다지며 한남실을 아래목에 앉히였다.

그리고 한남실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아 그의 얼굴을 오래동안 쳐다보고 또 보았다.

한남실은 흰머리가 하얗게 이마를 덮은 할머니의 얼굴에서 고향어머니의 모습을 보는듯 하여 가슴이 저려왔다.

주름밭이 된 눈언저리에는 아직도 눈물자리가 축축하니 젖어있었다.

할머니는 왜놈《토벌대》들이 반년전에 들이닥쳐 네채의 귀틀집을 들추고 주인들을 끌어갔으며 웃집에 있던 옥이 어머니는 한달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옥이를 자기한테 맡겼다는 기막힌 이야기를 하였다.

인제는 자기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처지인데 여직껏 저 어린것이 불쌍해서 살아간다고 하였다.

《아들딸 먼저 보내구 저 웃집 젊은것들을 모두 먼저 보내구 무슨 렴치에 내가 더 살겠나? 지금이라두 저 죽일 왜놈들이 망한다면 내 머리 검어지련만.》

《할머니, 뒤에 남은 우리까지 약한 마음을 가지면 되나요? 어떻게 하나 왜놈들과 싸워 이겨야지요.》

할머니는 천정에 매달았던 자그마한 쌀자루를 풀고 먼지를 털었다.

《할머니, 배고프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인제 곧 돌아가야 해요.》

《산으루? 거기선 누가 기다리나?》

남실은 차마 굶주리고 지친 숱한 아이들이 산에서 자기가 입을것과 먹을것을 구해가지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다는 말을 할수 없었다.

오히려 자기에게 한줌의 쌀이나마 남아있으면 할머니에게 주고싶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담?)

한남실은 안타까와 울고싶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