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3

 

제 2 장

3

 

리동백은 무슨 짐승의 울음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어찌나 놀랐던지 잠깨는 순간 진땀이 났다. 어떤 맹수가 잠든 자기를 노리며 달려드는줄 알았던것이다.

그러나 주위에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도, 우중충한 나무숲도, 희끗희끗한 눈무지도 보이지 않았고 볼을 찌르는 잣검불도, 뼈속까지 스며드는 랭기도 없었다. 눈 닿는데마다 귀틀벽들이 둘러막혀있고 잠자리밑은 따끈따끈한 온기가 돌았다. 한지가 아니라 집안이였다.

그제야 리동백은 간밤 마을어구에서 유격대순찰병들을 만났던 일과 어느 한집에 안내되였던 사실을 상기하였다. 그 다음일은 기억에 아리숭하다. 누이네 집을 떠난지 사흘만에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따뜻한 집안에 들다보니 이내 잠들어버렸던것 같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는지 방안은 어둑시근한데 아무리 둘러보아야 같이 들어와 곁자리에 누웠던 현팔이와 두칠이도 없고 어둠속에서 자리를 좁혀주며 어서 누우라고 자리를 권하던 다른 인민혁명군대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나만 두고 어디로들 떠나가버린게 아닐가?)

강세호네를 따라 떠난 때로부터 줄곧 그의 의식속에 잠재하고있던 불안이 머리를 쳐들자 가슴이 섬찍해졌다.

그러나 때마침 그의 의혹을 풀어주기나 하듯 바깥에서 용을 쓰며 코투레질하는 말울음소리에 뒤이어 귀에 익은 강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은 아직도 깨지 못했소?》

《말두 마십시오. 아주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됐습니다.》

익살꾸러기 현팔이의 목소리였다.

《부르튼 발이 몹시 쏘는지 끙끙 앓음소리를 내면서두 정신없이 잡디다.》

두칠이가 곁달아 말했다.

(잠결에 어지간히 추한 꼴을 보인 모양이군. 원 사람들두, 그렇더라두 좀 눈을 감아줄거지.)

리동백은 무슨 일이건 강세호에게 죄다 꼬치꼬치 보고하군 하는 현팔이와 두칠이를 나무라면서도 그들을 고맙게 여겼다. 역시 그들은 자기를 혼자 남겨두고 가버리지 않은것이다. 저렇게 배낭이랑 모포랑 주런이 있는것도 보지 못하고 한순간이나마 그들을 의심했던것이 부끄럽고 미안스러웠다.《동무네도 발이 부르텄는데 선생이야 말할것 있소? 그래두 행군할 때엔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 없이 참질 않소?》

웬일인지 강세호가 두둔해주었다.

《그건 우리가 떼놓고 갈가봐 그러지요. 아주 능청스럽단말입니다.》

《여, 듣겠어.》

두칠이의 말에 현팔이가 욱박지른다.

《아예 녹초가 돼서 곯아떨어졌는데 듣길 어떻게 듣는다구···》

《아무렇든 용한 어른이요. 그런데 어쩐다? 미안한대로 깨울가?》

강세호의 말은 의논조였다.

《당장 출발입니까?》

《아침도 안먹고 출발이겠소? 다른 일이 있소.》

《무슨 일입니까?》

《동무넨 상관없소. 아침을 치르고는 인차 출발할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고 지시를 기다리오. 옷차림이랑 잘해야겠소.》

리동백이 미처 잠자리를 거두기전에 강세호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어나셨군요! 마침 잘됐습니다. 아직도 주무시나 해서 깨우려던 참입니다.》

강세호는 뜻있게 웃었다.

《무슨 일인데요?》

《저하구 같이 갑시다.》

《어딜말인가요?》

《가보면 알게 됩니다.》

강세호는 리동백을 도와 모포를 접다가 무슨 생각이 났던지 밖으로 도로 나가더니 잠시후 주인집에서 더운 물이 담긴 세수소랭이를 빌려들고 들어왔다.

《제깍 세수하십시오.》

리동백은 여느때없이 초조하고도 엄숙한 표정이 떠도는 강세호의 얼굴을 묻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세호는 왜 세수를 제깍 해야 하는가 하는 리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내 신분과 정체를 캐보자는걸가?)

리동백은 강세호의 보고를 받은 부대장이나 또는 그 수하 사람이(그는 이 마을에서 숙영한 부대가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의 친솔을 받고있는줄은 알지 못하고있었다.) 그 무슨 심문같은것을 하려는것이 아닐가 하고 생각했다. 파악 없는 사람이 무장대렬에 끼여든만큼 어떤 류의 군대건 이런 경우에 알아보려고 안할리 없을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 강세호가 세수시켜가지고 데려갈 생각을 가지는걸 보면 딴일인지도 모른다.

《면도도 해야겠는데?··· 사흘째나 수염을 밀지 못해서···》

리동백은 수염이 더부룩한 턱을 손바닥으로 어루쓸었다. 면도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에서보다는 면도에 대한 동의여부가 무엇인가를 암시해줄수도 있지 않을가 해서 물어본 말이였다.

강세호는 그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살펴보고나서 구들에 걸터앉았다.

《약간 지체하더라도 그러는편이 낫겠습니다.》

심문은 아닐듯 했다.

그가 세수를 끝내자 강세호는 손수 세수물까지 버려주었다. 사흘만에 면도질을 한 리동백은 머리를 빗는김에 코수염까지 잘 다듬었다.

《됐습니다. 이젠 갑시다.》

세수도구들을 자기의 등산용배낭주머니속에 밀어넣고 일어나던 리동백은 문을 열고 앞서 나가는 강세호의 등뒤에 대고 넌지시 물었다.

《이 짐도 가지고 갈가요?》

《아니 그냥 나오십시오.》

따뜻한 집안에서 자고 더운 물에 세수를 해서 그런지 봄날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새벽대기였다. 하늘은 한창 푸름푸름 밝아오고있었다.

어느결에 함께 잔 부대사람들과 친했는지 주인집마당청소를 하는 혁명군들속에 어울려 밤새 추녀밑에 떨어진 고드름들을 삼태기에 주어담고있던 두칠이의 아침인사를 받으며 강세호를 뒤따라 마당밖에 나선 리동백은 역시 여러명의 인민혁명군대원들이 마을길을 쓸고있는것을 보았다.

아침연기 자욱한 마을 곳곳에서는 산간마을의 아침에 흔히 들을수 있는 각가지 소음들이 울려왔다. 그러나 인민혁명군에 대하여 탐방기자와도 같은 관심이 촉발된 리동백은 이 낯선 마을에서 듣는 아침의 소음들이 여느 산간마을에서 흔히 들을수 있는 소음들과는 전혀 류가 다르다는것을 느끼였다. 여기서 듣는 아침소음은 활기에 차고 약동감으로 충만된것이였다. 씩씩하면서도 나직한 구령소리와 언땅을 울리는 말발굽소리들,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들이 태고연한 대자연의 아침소음과 어울려 장엄한 화음을 이룬탓인지 모른다.

커다란 까치둥지를 떠이고 서있는 늙은 봇나무와 연자방아사이로 내다보이는 마을 저편 거뭇한 전나무숲 변두리에서는 몇명의 인민혁명군대원들이 매놓은 말에 비질을 해주기도 하고 마구를 손질하기도 하고 어떤 대원들은 김이 문문 나는 말여물을 날라오기도 하였다.

시뻘건 맨발에 짚신을 신은 한떼의 조무래기들이 우르르 그리로 몰려가 벅작 떠들어대며 구경들을 하고있었다.

그 애들을 보자 리동백은 불현듯 누이집을 떠나온 이후 지난 며칠동안 까맣게 잊고있었던 학생들을 상기하였다.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들은 선생 없이 어떻게 지낼는지! 낮엔 옥선이가 그럭저럭 가르치겠지만 밤엔 옛이야기를 듣지 못해 몹시 기다릴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을길을 얼마큼 걸어가다가 리동백은 강세호에게

《어디 가면 장군님을 만나뵈올수 있을지 부대사람들에게 알아봤습니까?》

하고 은근히 귀속말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리동백은 미처 그의 대답을 들을수 없었다. 강세호가 그더러 잠간 기다려달라는 눈짓을 남기고 길옆집 사립문안으로 들어간것이다.

지붕우에 묵은 풀대들이 비죽비죽 돋아나있는 허술하고 자그마한 그 집 마당안에서는 웬 젊은 혁명군이 장작을 패고있다가 강세호가 들어서자 허리를 폈다.

무어라 이야기하는 강세호의 말을 들으며 사립문밖의 리동백을 돌아본 젊은 혁명군은 손에 들었던 도끼를 방금 패자던 나무토막에 박고 손을 털었다. 그리고는 손수건으로 땀난 이마와 목을 훔친 다음 끌러놓았던 웃단추들을 채우고 비록 무릎어방에 동전잎만큼 덧대인 자리가 력력한 군복바지를 입었으나 매우 단정한 차림새로 사립문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오랜 지인을 만난듯 반가운 웃음을 띠우며 친절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멀고 어려운 길을 오시기에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두손으로 다정히 꼭 잡아주는 젊은 혁명군의 손길에서 리동백은 하치않은 자기의 로고따위를 깊이 헤아려주는 따뜻한 심정을 대번에 느꼈다.

《저야 고생이 있습니까? 길 걷는 사람의 고생따위를 강도 왜놈들과 혈투를 벌리며 풍찬로숙하는 혁명군동지들에게 비기겠습니까?》

《각오하고 나선 젊은 저희들 혈기에야 얼음우에선들 못견디겠습니까. 발탈이랑 났다는데 몹시 쏘지 않습니까?》

《일없습니다. 저 강세호동지가 성냥딱총이랑 놔줘서 무탈해졌습니다.》

《다행입니다. 아직 날씨가 쌀쌀한데 방에 들어갑시다.》

젊은 혁명군은 마치 부축해주듯 그의 팔을 잡고 안내하였다. 뜰안에서 장작가치들을 우물정자모양으로 차곡차곡 쌓고있던 애젊은 혁명군이 오돌차게 경례를 붙였다.

리동백은 수고한다는 말로 인사를 받으며 방문앞에 다가갔다. 그는 자기가 방안에 있을 그 어떤 상관에게 안내되는가부다 생각했다. 그러나 방문앞에는 벗어놓은 신발이 없었다.

그를 안내하던 젊은 혁명군은 방문을 열어주면서 어서 방안으로 들어가라고 권하였다. 젊은 혁명군더러 먼저 들어가라고 사양했지만 결국 혁명군들이 하라는대로 할수밖에 없으리라 생각되여 삿자리를 깐 방안에 들어갔다.

꺼멓게 끄슬은 서까래가 그냥 드러나 보이고 바람벽에 붙인 우불구불한 시렁우에는 헌 이부자리와 모서리를 쥐가 썬 궤짝 등 가난이 여실히 드러나는 가장집물들이 얹혀있었고 방 한구석에는 목침 서너개가 쌓여져있었다. 방금 아침을 지은 불을 화로에 담아 들여놓아서인지 연하고 푸르스름한 연기가 떠도는 방안에는 화기가 돌아 아늑한 맛이 있었다.

애젊은 혁명군에게 무슨 말인가를 일러주고나서 강세호와 함께 리동백을 뒤따라 들어온 그 혁명군은 방아래목에 덧깔아놓은 돗자리우에 리동백을 앉히고 앞에 화로를 들어다놓았다. 그리고 강세호와 나란히 웃목에 앉았다.

《담배를 퍽 즐기신다는데 피우십시오.》

《고맙습니다.》

리동백은 외투자락을 헤치고 양복주머니에서 가루담배를 넣은 가죽으로 만든 갑과 파이프를 꺼내면서 젊은분으로서는 놀라울만치 세심한 관심을 돌릴뿐더러 매우 부드럽고 친절한데 은근히 놀랐다.

《선생을 만난 기회에 우리가 여러가지로 알고싶었던것을 두루 묻고 이야기를 들었으면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시간이 없을것 같습니다. 강동무에게서 얼핏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돼서 길을 떠나오셨는지 좀 말씀해주십시오.》

젊은 혁명군이 청하였다.

리동백은 담배연기를 내뿜고나서 대답하였다.

《그저 한마디로 말씀올린다면 당신들의 사령관이신 장군님을 만나뵙자는 목적입니다.》

《어째서 꼭 만나자는것입니까?》

리동백은 대답을 고르느라 잠시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걸 한마디로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려니 자기의 가슴속에 숨은 열망이 너무나도 크고 벅찬것이였다. 아니 그것을 표현할만 한 그 한마디의 말을 찾을수 없었다.

그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고나서 허거프게 웃었다.

《이거 참··· 내가 온 목적에 관한것인데 몇마디로 여쭙기 어렵습니다. 장군님을 만나뵈야만 풀이가 저절로 될수 있는 성질의 문제이지요. 그러니 꼭 장군님을 뵈올수 있도록 도와들 주십시오. 나의 간절한 심정은 이 강세호동지도 잘 압니다만···》

그는 차츰 열을 올리며 자기의 심정을 하소연하였다.

《솔직한 말로 나는 장군님을 찾아뵙기 위해 만난을 각오하고 길을 떠났지요. 젊다고 할수 없는 내가 길 없는 산발을 수없이 타구넘으면서 얼어죽을수두 있구 왜놈들에게 잡혀죽을수도 있는 사지판을 감히 헤매다닐 결사적인 각오를 품고 길을 떠났을 때엔 그만큼 깊은 사연이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그 사연을 말씀드리십시오.》

강세호가 귀띔해주었다.

《장군님을 만나뵈오면 다 말씀드리겠으니 그이께서 계시는데를 알려만 주시구려.》

그러자 강세호가 웃음지으며 대꾸하였다.

《어서 말씀올리십시오. 선생이 만나뵙자는 장군님께서 여기 선생앞에 계시지 않습니까!》

《네?!》

해가 서쪽에서 떴다 해도 이 순간의 리동백이처럼 놀라진 않았을것이다. 너무나 뜻밖의 사실을 당한 리동백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그 말을 한 강세호와 조용한 웃음을 짓고계시는 젊으신 분을 번갈아쳐다보기만 하였다.

그 말이 참말인가! 과연 이 젊으신분이 세상에 그렇게도 유명하게 소문이 나신 장군님이시란말인가! 기운 군복솜바지를 입으시고 마치 고향집 방에 앉아계시듯 가난하고 허술한 농가의 때묻은 구름노전우에 앉으신분, 더없이 인자하신 얼굴에 부드럽고 겸허한 미소를 띠우시고 말없이 앉아계시는 이분이 과연 30년대 력사우에 높이 솟아오르신 새로운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이시며 항일유격대 사령관이신 김일성장군님이시란말인가!

청년장군이시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리도 젊으신분이실줄은 상상도 못해본 리동백이였다.

그의 머리속에는 단꺼번에 수많은 의문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강세호의 정중하고도 정색한 태도와 장군님의 겸손하면서도 끝없는 무게와 깊이가 감출수 없이 풍겨나오는 미소에서 의심할나위 없다는것을 륙감으로 느낀 순간 리동백은 격한 흥분때문에 후들후들 떨면서 일어났다.

《제 미처 장군님을 알아뵙지 못하구 변변한 인사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격식을 갖추어 절할 차비라는것을 헤아리신 장군님께서는 마주 일어나시여 만류하셨다.

《그러질 마십시오. 인사는 이미 아까 나누지 않았습니까?》

《장군님! 불민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손을 맞잡는것이상 더 좋은 인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답지 않습니다. 강동무는 선생을 아주 현대적인 지성인으로 소개하던데요. 허허허··· 어서 앉으십시오.》

그 친절하고 소탈한 말씀과 가슴을 울려주는 통쾌한 웃음에 리동백은 어쩔수없이 주저앉고말았다. 그는 돗자리에 장군님을 모시고 자기는 구름노전에 내려앉으려고 애썼지만 종시 그렇게 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이의 인품에 끝없이 끌리우면서도 제가 오히려 돗자리에 앉아있다는것이 어느모로보나 온당치 못하게 생각되여 바늘방석에 올라앉은것처럼 한동안은 거북하고 송구스러웠다. 그러나 장군님께서 하시는 스스럼없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어느덧 송구스러움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말로써는 설명할수 없는 특유한 친화력으로써 한순간에 자기 마음을 사로잡으시는 장군님께 이끌리여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 리동백은 장군님을 우러러보고 또 보았다.

현실적으로 뵈옵는 장군님은 참말 상상밖에 소박하시고 겸손하시며 소탈하시였다.

장군님을 우러러뵈옵는 리동백의 머리속에는 아직도 뇌리에 선히 박혀있는 지난날 제노라고 자처하던 사람들의 표상이 떠올랐다.

그가 서울과 상해와 연해주에서 만나본 공산주의운동의 《거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거개가 최신 류행복차림에 《맑스머리》를 하고 개화장을 들고다니였고 강당의 연탁 아니면 료정 뒤고방의 주연탁에 마주앉아있는것이 일상사였으며 또 그것이 언제나 띠여보게 되는 생활자세였다.

리동백이 본 독립군두령이라는 사람들도 역시 그 차림과 거처와 음식부터 병사들과 엄격한 차별을 두고있었다. 제노라는 공산주의운동의 《거두》들이나 독립군두령들이나 모두가 무엇인가 류다른 행색과 언동으로, 혹은 높은 대우와 절대적권력자세로 자기들을 비범하게 돋보이려고 하였었다.

지난날의 생활만이 아니라 력사와 전기들을 통하여 리동백의 머리속에 오래전부터 형성되여있는 영웅호걸들과 위인들에 대한 표상들 역시 그중의 어느 하나도 바로 그가 이 자리에서 받아안게 된 표상과 같은 모습을 하고있지 않았다.

《비범성》대신 철저한 평범성에 접한 리동백은 그 철저한 평범성이야말로 그 어느 영웅호걸이나 위인에게도 없었던 비범성으로 되지 않는가 하는 여적 가져보지 못한 생각에 잠겼다.

《찾아오신 까닭을 말씀해주십시오. 무슨 사연이 있어서 오셨는지?》

장군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리동백은 생각에서 깨여났다.

《무어라고 말씀드렸으면 좋을지···》

잠시 담배를 빨고난 그는 말을 이었다.

《차츰 말씀드리지요.》

《아침을 마친후에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하기때문에 만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선생께서 불원천리하고 찾아오셨는데 그대로 돌아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자기를 위하여 일부러 출발전의 바쁜 시간을 내시였다는것을 깨달은 리동백은 가슴이 후더웠다.

《장군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장군님을 찾아온 저의 걸음이 하루이틀사이에 뵙고 돌아갈만 한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 소청을 들어주십시오. 제가 며칠간만 따라다니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로 그럽니까?》

《후에 아뢰겠습니다. 장군님, 허락해주십시오.》

장군님께서는 난색을 지으셨다.

《며칠간이라고 해도 저희들과 같이 다니자면 고생이 막심합니다. 강세호동무네를 따라 여기까지 오시며 고생한 정도가 아닐겝니다. 년세도 적지 않으신데 유격대에서 단련된 젊은 사람들도 겪어내기 어려워하는 고초를 어떻게 견디여내겠습니까?》

《그것은 념려마십시오. 제 따라다니다가 길가에 쓰러져 숨이 진다 해도 절대로 뉘우치지 않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고쳐 생각하도록 그냥 권유하시고 강세호 또한 두세번씩 리동백을 타일렀지만 고집스럽게 거듭 승낙해주시기를 간청하였다.

끝내 아퀴를 짓지 못한 가운데 주인집에서 아침상이 올라왔다.

···마을에 해살이 비쳐들무렵 류랑한 나팔소리가 울려퍼졌다. 출발준비를 위해 예비집합을 알리는 신호나팔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