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4

 

제 11 장

4

 

삼도묘령에서 동강으로 뻗은 인적드문 호젓한 길을 따라 한대의 마차가 고원우에 아득히 펼쳐진 밀림속을 헤쳐가고있다.

달구지나 말파리가 겨우 어길 정도밖에 안되는 넓지 않은 길이지만 무송에서 장백으로 넘나드는 유일한 길이다.

지난날 압록강을 건느고 룡강산맥을 넘어온 수많은 류랑민들이 바로 이곳을 거쳐 망국노의 이역살이를 찾아들어갔던 길이다.

그 뭇사람들의 한숨소리가 그대로 멈출줄 모르는 이고장 밀림의 바람소리로 변하고 그 설음에 겨운 피눈물이 길가의 풀숲에 영원히 스러질줄을 모르는 이슬방울로 맺혀버린듯 한 길, 살길을 찾아 헤매다가 기진하여 쓰러진대로 다시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길역의 나무밑에 묻혀버린채 벌초 한번 받아보지 못하는 무주고혼이 되여 무성한 잡초와 관목과 교목까지 떠인 허술한 봉분만을 남겨놓은 길···

그 길로 마차는 경쾌한 말발굽소리와 바퀴소리를 내며 굴러가고있다. 북쪽으로가 아니라 남쪽으로, 조국땅이 더 가까운쪽으로 향한 마차다.

마차우에는 이 세상에 그렇게도 흔한 궁핍의 모상도, 우울의 그림자도, 절망의 한숨도 실려있지 않았다.

늙수그레한 마부와 행상인의 차림을 한 사람, 그리고 안경을 낀 젊은이, 그렇게 세사람이 탄 마차에는 희망과 웃음과 기쁨이 가득히 실려있다.

리경준과 박문필이 장군님의 부르심대로 조국광복회창립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동강밀영으로 가고있는것이다.

박문필은 어제 아침에야 놓여나왔다.

그가 무사히 풀려나오게 하려고 리경준이가 조직했던 몇차례의 삐라살포와 박문필의 견결하고 사리정연한 반항이 마침내 은을 낸것이다.

놈들은 박문필을 그냥 경찰서에 붙잡아둘만 한 확실한 근거를 끝내 박문필의 입에서 받아내지 못했을뿐아니라 두사람의 체포이후에도 계속된 삐라소요로 하여 혼란과 수세에 빠져버렸었다. 그런데다 성에서 내려온 유능한 고등계형사부장으로부터 서뿔리 손을 댔다는 혹독한 추궁까지 받았다.

형사부장놈은 박문필을 서투르게 다룬 현경찰서의 백대가리 고등계주임을 풋내기 취급하듯 하면서 지체없이 박문필에게 깍듯한 사죄를 하고 놓아준 다음 그의 일거일동에 대한 면밀한 감시와 미행을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던것이다.

성고등계형사부장놈은 특별히 의의있는 박문필의 경력을 료해하고 그가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놓아주면 무송현에 있는 유격대사령부와 꼭 접선하게 되리라는것을 타산하였는데 백대가리가 그 일에 끼여들어 훼방을 놓았던것이다.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박문필을 그대로 놓아주고 그를 통하여 유격대사령부의 행방을 알아내며 유격대에 불의의 타격을 가할 작전을 세워야 한다고 백대가리를 닦아세웠다. 그제서야 백대가리는 경솔했던 자기의 실책을 느끼고 새로운 결심으로 박문필에게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리경준은 놈들의 그런 꿍꿍이속은 속속들이 알수 없었지만 놈들의 교활성에 대해서는 언제나 머리속에 계산해두고있었던것만큼 있을수 있는 적들의 감시와 미행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용의주도하게 출발을 조직하였다.

그는 박문필의 석방이 늦어진 탓에 동강에 가닿아야 할 날자가 아주 밭다는것과 걸어서는 그 먼길을 도저히 제 날자에 가댈수 없다는것, 그리고 미행이 있을수 있다는 세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무송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동강과는 정 반대방향으로 빠져나왔다가 다시 돌아서서 동강방향으로 가는 길목의 농촌지하혁명조직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행상마차를 타도록 하였다.

리경준은 마차를 리용하는김에 행상마차로 가장하고 거기에 원군물자까지 싣도록 하였다. 그리고 길을 재촉해왔다.

어서 가닿아야 할 걸음이며 어서 가닿고싶은 길이다.

리경준은 한달만에, 그렇다, 꼭 한달만에 사령부로 돌아간다.

무송으로 나오던 때에는 수림속에 그냥 희끗희끗한 눈이 깔려있었지만 돌아가는 지금은 그도 봄옷차림을 했고 밀림도 신록으로 물들어가고있다. 건강이 회복되였다는 최선금도 지금쯤은 장군님의 새 군복을 지었을테지···

하늘엔 끝없이 부풀어오르는 마음처럼 호함지게 꽃핀 한송이 흰 꽃구름송이가 둥실 떠서 마차와 함께 둥둥 떠간다.

푸른 공간에 가득찬 신선한 대기는 알싸하도록 싱그러운 풀향기를 가슴가득 채워주며 취할듯 한 봄의 정취를 자아낸다.

조심하지 않고 눈을 팔아도 좋은 대자연속이다. 숨을 크게 쉬며 맘껏 들여마셔도 일없을 대기다.

적들은 보이지 않고 동지들은 이제 얼마 멀지 않은 숲속에 있을것이다.

이제 동강의 숲속에 가면 그리웠던 동지들이 다 모여와 있으리라.

마안산숲속을 멀리까지 함께 걸어나오시며 임무를 잘 수행하고 무사히 돌아오라고 일러주시던 사령관동지께서도, 어느 길로 어떻게 가서 어느 거리에서 《금강사진관》을 찾으라고 차근차근 대주던 강세호련대장도, 주먹밥을 싸주며 몸조심하라던 철구어머니도, 무송을 갓 다녀간 장기령이도, 왕청에서 본 다음 오래동안 보지 못한 예쁘고 얌전한 한남실이도, 그리고 건강해진 사랑하는 안해도, 아버지가 돌아오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던 귀여운 어린것들도 모두 거기에 모여 자기들이 닿기를 손꼽아 기다리리라.

앞자리에 앉은 마부는 마차가 밋밋하게 경사진 내리막길에 접어들자 리경준과 박문필을 슬쩍 돌아보고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채고 나긋나긋한 가죽채찍을 쳐들었다.

채찍은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탄력있게 허공을 걷어차고 내리꽂히면서 그 끝으로 슬쩍 실팍한 말엉뎅이를 건드렸다. 말은 벌써 채찍이 재촉하는 소리를 알아듣고 그 끝이 닿기전에 움쭉 마차를 내끌었다.마차는 덜컹거리며 흠뻑 기름을 먹은 굴대가 슬슬 구으는 소리를 내며 밋밋하게 뻗어내린 등판의 내리막길을 달려내려갔고 그냥 그 기세로 다시 밋밋하게 뻗어오른 등판길을 달려올라갔다.

마차는 꽁무니에서 뽀얗게 타래쳐오르는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봄빛어린 숲속을 굽이쳐간 고원의 한복판을 내달렸다.

《이제 동강부락은 시오리 남았습니다.》

두개의 고개를 더 넘자 말고삐를 잡아당겨 속도를 늦추며 마부가 말하였다.《인차 오솔길이 나질거웨다. 오솔길을 따라나가면 도중에 두갈래 길이 있는데 바른쪽 길로 들어서면 강과 동강부락 사이를 꿰지른 밀림에 깊이 들어가게 될거웨다.》

마부로 가장한 지하조직원은 백두산 맹수사냥군들을 따라다닌적이 있어 이 아근의 지리를 좀 안다는 사람이였다.

오솔길이 나지면 그 근방에 마차와 말을 숨겨두고 리경준과 박문필은 밀영으로 들어가며 마부만 원군물자를 지키고있다가 유격대원들이 오면 그것을 넘겨주고 떠나도록 약속되여있었다.

그러나 잠시 숨을 돌린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할 때부터 멀리 뒤따라오고있던 두필의 말과 그뒤로 묻어오는 한대의 마차도 역시 자기들과 같은 속도로 달려오기도 하고 말을 쉬우며 천천히 오기도 한다는것을 퍽 뒤늦게 감촉한 리경준은 당초의 계획을 변경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오솔길이 나지면 거기서 우리를 내리우고 아바이는 그냥 동강부락으로 곧추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가서 려인숙에 묵으면서 우리가 련락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시오.》

갑작스런 리경준의 말에 마부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우리들처럼 밀영에 찾아들어오는 사람들이 아닐가요? 그 사람들도 길이 늦어져 말을 쳐모는게 아닐가요?···》

그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무송지구에서 올 사람은 자기들밖에 없다는것을 리경준은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어쨌든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하는것이 지하공작의 원칙이다.

《오솔길은 얼마나 남은것 같습니까?》

《이제 저 앞등판길만 넘어서면 나집니다.》

리경준은 등판길을 넘어서 뒤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마차를 멈추게 하였다.

《아직 이릅니다. 저 밑바닥에 떨어져야 오솔길이 나집니다.》

《여기서 내려야 합니다. 어서 권총들을 꺼내십시오.》

리경준은 박문필을 부축하여 마차에서 내리웠다. 마부는 마차밑으로 기여들어가 짐판밑에 감춰가지고 왔던 유지에 싸고 또 헝겊으로 싼 권총들을 꺼내다가 두사람에게 주었다.

《자 그럼··· 참 수고가 많았습니다. 려인숙에 묵으십시오. 될수록이면 제가 아바이한테 가겠습니다. 어서 떠나십시오.》

《조심들해서 가시오. 길을 헛갈리지 말고···》

마차는 다시 떠나자바람으로 속력을 내여 달렸다.

리경준이와 박문필은 도랑을 넘어 바삐 이깔나무숲속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금방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숲은 아직도 앙상하여 그들을 깊이 숨겨주지 못하였다.

리경준은 박문필이 따라오기 힘들어할것을 알면서도 빨리 따르라고 재촉하며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벌써 꽤 멀어진 길에서는 잰 말발굽소리와 잦은 가락으로 덜커덩거리는 바퀴소리, 짐판이 들추는 소리, 그리고 굴대에서 나는 삐거덕소리가 점점 더 약하게 들렸다. 그에 뒤이어 다시 새로운 여러 마리의 말이 달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차가 굽이돌아간 뒤를 쫓아 다급히 박차를 가한듯 말발굽소리가 잦게 울리다가 점차 멀어져갔다.

《좀 쉽시다. 무슨 사람들인지 모르겠지만 다 지나갔소. 걷기가 급했지요?》

리경준은 부축해오던 박문필을 돌아보며 미안쩍은듯 웃었다.

헐썩거리며 숨차하던 박문필은 푹신한 락엽우에 쓰러지듯 앉더니 손에 들고오던 권총을 그냥 틀어쥔채 그 손등으로 땀방울이 보송보송 돋은 창백한 이마를 훔쳤다. 그는 잠시 숨을 돌린 뒤에야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고문에서 상했던 발목을 주물렀다.

얼마쯤 쉰 다음 다시 걷기 시작해서 사냥군들과 고기잡이군들의 발길에 다져진, 그러나 거기에 오솔길이 있는지 없는지 쉽게 알아볼수 없는 숲속길에 접어들던 리경준은 누가 자기들의 뒤를 따르고있는것 같은 륙감을 느끼고 얼핏 뒤를 돌아다보았다.

숲속은 바스락소리 하나 없이 괴괴하고 사방에 보이는것은 한결같이 미츨하게 뻗어오른 이깔나무줄기들뿐이였다.

너무 긴장했던 탓인듯싶었다. 뒤따르던 말도 마차도 이미 지나갔고 여기는 아무도 있을수 없는 밀림이다.
이제 좀더 걸어가면 두가닥 길이 나질것이고 그 바른쪽길을 따라가면 아직도 드문드문 성에장이 떠있을수도 있는 백두산마루턱밑에서 시작된다는 강물을 보게 될것이며 다른 한길을 따라가면 모르긴 해도 장기령이가 찾아오라고 알려주던 새로운 밀영이 꾸려진곳에 그립던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을곳에 들어서리라. 조금만 더 가면 밀영에서 연기없이 피우는 내내와 음식 끓이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와서 그 냄새를 그리도 맡아보고싶어하며 그리워했던 경준이의 후각을 자극할는지 모른다. 이처럼 청신한 밀림의 대기속에서는 약간만 색다른 냄새도 인차 구별되는것이다. 그리고 또 이토록 적막한 숲속에서는 총을 다루는 소리나 나직한 구령소리도 쉽게 알아들을수 있다. 이제 유격대원들이 모이는곳이면 언제나 있기마련인 씩씩한 노래소리도 어느 시각에 들려와줄는지 모른다.

아, 밀영에 들어서면 마음을 풀어놓고 실컷 부르고싶던 노래도 불러야지. 오락회가 있게 되면 틀림없이 사령관동지께서는 또 우리 부부를 불러내여 2중창을 시키시겠지. 그이께서는 늘 우리의 2중창을 퍽 좋아하셨거던. 그 사람도 건강해져서 대오로 돌아오고 나도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고··· 기쁜김에 부부가 나란히 서서 부르는 노래를 듣고싶으시다면 우리 같이 불러드려야지, 그이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사향가》를 불러드리지···

리경준은 마침내 앞에 나타난 두가닥 길을 보고 성큼 바른쪽길로 발을 내짚으려다가 다시금 무엇인가 자기들을 뒤따라오는것 같은 느낌을 받고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는 온몸이 오싹해지고 머리칼이 주뼛해졌다.

(꼬리를 밟혔구나!)

번개같은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얼핏 나무그루뒤에 몸을 숨기는 그림자를 보았던것이다.

가슴이 뛰고 진땀이 났다.

리경준은 그냥 곧추 강쪽으로 나간다는 오솔길로 걸음을 옮겨짚었다.

그는 아무것도 못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걸어가며 박문필에게 낮은 소리로 말을 하였다.

《박동무. 내 말을 들으시오. 놀라지도 말고 뒤를 돌아보지도 말고 따라오시오. 뒤에 꼬리가 붙었습니다.》

《잘못 보지 않았습니까?》

놀라움때문인지 박문필의 목소리도 역시 떨렸다.

《아니요, 잘못 보지 않았소.》

어찌되여 이런 일이 생긴것인가?

리경준은 무송서 떠날 때부터의 걸음걸음을 더듬어보았다.

적들이 박문필을 석방하고 감시할수 있다는것을 리경준도 타산하였기때문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길로 하여 멀리 에돌아서 시내를 빠져나왔었다. 그리고 동강반대방향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딴 길을 에돌아오다가 마차에 올랐었다.

그때에는 뒤따르는 기미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 꼬리를 잡혔는가?

사실 적들은 교활하였다. 놈들은 형사부장놈의 지시대로 박문필을 놓아주었지만 그 순간부터 빈틈없는 감시를 하고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음을 놓을수 없었던 적들은 무송과 동강주변의 밀림으로 들어가는 길목마다에 밀정들을 파견하여 지하조직원들과 유격대원들의 류동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리경준의 세밀한 행동계획에 따라 두사람은 무송시내에서 감쪽같이 빠져나올수 있었고 역시 동강밀영근방까지 무사히 들어설수 있었다.

이때까지도 무송시내의 적들은 이들의 행방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리경준일행은 한길에서 오솔길로 들어서는 갈림길에서 적들의 미행을 받게 되였다. 거기에 적의 특무놈들이 엎디여있다가 마차에 탄 일행을 수상하게 보고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던것이다. 물론 밀정놈들은 일행이 어떤 사람들이라는것을 알지 못했지만 끝까지 미행해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미행경과를 알지 못하며 알수도 없으며 또 그것을 충분하게 추리해볼만 한 여유를 가지고있지 못한 리경준은 그것이 어떻게 되였든 이 위험한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것인가 하는데 머리를 썼다.

이대로 그냥 적을 꼬리에 달고가다가는 밀영의 위치를 로출시키고 사령부와 동강에 모여있을 모든 혁명동지들을 위험에 빠뜨릴수 있다.

적을 따돌려야 한다. 그리고 무송의 조직과 군중을 대표하는 박문필 한사람만이라도 회의에 참석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리경준은 다리가 아파서 주먹으로 무릎을 두드리는척 하면서 박문필을 앞세웠다. 나무뒤에 숨으며 따라오던 세놈의 적들은 앞에서 미행당하는줄을 아직도 모른다고 여겼던지 리경준이 허리를 굽히고 다리를 주무르는동안에는 숨어있었다. 리경준은 앞세운 박문필에게 바싹 붙으며 귀속말을 하였다.

《내 말을 명심하오. 내가 이제 조금후에 신끈을 매는척 하고 주저앉아도 기다리지 말고 그냥 걸어가시오. 그러다가 내가 적을 갈기게 되면 달리시오. 내가 적을 견제하는동안 필사적으로 달려 적의 눈에 뜨이지 않을만 한 곳에서 옆으로 빠지시오. 오른쪽으로 꺾어 그냥 달리면 아까 들어서자던 오솔길을 찾을수 있을것이요. 그길을 따라 백두산방향으로, 남쪽방향으로 들어가면 밀영을 찾을것이요.》

《그건 안됩니다! 안됩니다!》

박문필은 걸음을 주춤거리며 돌아서려 했다.

《서지도 돌아보지도 마시오! 아직은 적이 우리가 눈치챈줄 알게 하면 안됩니다.》

박문필은 할수 없이 돌아서지도 멈춰서지도 못하고 그냥 걸으며 낮으나 격해서 말하였다.

《내가 남겠습니다. 경준동지는 가야 합니다.》

《안됩니다. 흥정해서는 안됩니다. 내 말을 명심하고 찾아가십시오.》

《나는 산길을 모릅니다. 나는 뛸 형편이 못됩니다. 뛰지 못하는 내가 남아야 합니다. 경준동지는 나보다 열배나 빨리 적의 감시에서 벗어날수 있지 않습니까?》

《고집하지 마시오. 박동무는 세놈을 다 없애치울수 없습니다. 만일 막다가 한놈이라도 놓치면 사령부와 온 밀영이 적의 포위에 들수 있습니다. 온 민족의 대표들이 위험에 처합니다. 사령관동지께서 그렇게 심혈을 기울이시여 준비하셨던 창립대회도 예정대로 못하게 될수 있습니다.》

《부탁입니다. 나를 믿으시오. 한놈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으니···》

《아니 박동무는 기어이 가야 합니다. 창립대회에 참가할 무송지구대표는 박동무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무사히 뒤따라갈터이니 안심하고 행동하시오. 필사적으로! 더는 돌아보지 말고 걸음을 다우치시오···》

리경준이의 요구대로 그이상 고집하지 못하고 얼핏 경준을 돌아본 박문필은 입술을 악물었다.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됐습니다. 자연스럽게 걸음발을 재촉하시오.》

리경준은 웃으며 눈짓으로 그를 슬쩍 떠밀었다. 그러나 박문필은 발길을 떼지 못하였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어서 가시오! 총소리가 나면 뛰다가 옆으로 빠져서 가닥난 오솔길을 찾아 그 길로 따라가시오.》

리경준은 머리를 숙이고 마지못해 걸음을 떼는 박문필의 뒤잔등을 바래주며 거듭 타일렀다. 그리고 신발끈을 매는척 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따라오던 세놈의 적은 제가끔 분비나무 그루뒤에 몸을 사리며 숨었다.

리경준은 일부러 늦잡으며 햇잎이 돋기 시작한 들쭉덤불뒤에 주저앉았다. 지루함을 느꼈던지 저으기 안달아난 놈들은 나무뒤에서 눈알을 번들거리며 권총구를 내밀다가 리경준의 눈에 띄울것 같은 위험을 느꼈는지 다시 디밀었다.

그러나 리경준은 놈들이 다 감춰낼수 없는 모자채양과 옷자락을 보고 놈들이 숨어있는 나무들을 쉽게 가려냈다.

들쭉덤불뒤에서 다시 일어난 리경준은 몇걸음 걷는척 하다가 놈들이 나무뒤에서 나왔다고 생각된 순간에 홱 돌아서며 먼저 눈에 드는놈을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야무진 총소리가 고막을 멍멍하게 하는것과 거의 동시에 적의 비명이 들려왔다. 리경준은 물씬 코구멍에 날아드는 화약내를 맡으며 금방 나무뒤에서 나왔던 회색양복쟁이가 두팔로 분비나무줄기를 부둥켜안고 몸을 뒤틀다가 땅바닥으로 처져내리는것을 보았다.

다른놈이 쏘아댄 탄알이 귀부리를 스쳐지나가며 아츠럽게 공기째는 소리를 냈다.

리경준은 허리를 굽히고 오솔길을 내달리다가 길옆에 있는 분비나무를 붙잡으며 그뒤에 숨었다.

그 경황없는 가운데도 그는 박문필을 눈으로 찾아보았다. 박문필은 이미 자취를 감춰버렸는지 눈에 띄우지 않았다.

리경준은 한결 마음이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박문필이가 일러준대로 하겠는지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도 그가 자기의 뜻대로 해준것이 기뻤다.

(고맙소. 박동무! 무사히 제발 무사히만 가주오.)

경준은 적의 동정을 살펴보다가 날쌔게 다음나무를 향해 자리를 옮겼다. 나무뒤에 붙어서기전에 또다시 탄알이 곁에 있는 나무의 껍질을 뚜지며 지나갔다. 나무에 의지하여 돌아선 그는 들쭉덤불에 발을 걸채이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놈을 향해 총알을 안겼다. 두팔로 땅을 짚고 일어나던 그놈은 면바로 이마에 탄알을 받았던 모양 비명도 지르지 못한채 그대로 땅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리경준은 걷잡을수 없는 통쾌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면 그렇겠지. 내가 어느분한테서 권총사격술을 배웠다고? 마지막으로 남은 네놈도 내 눈앞에서 이 밀림을 벗어나지 못한다!)

일대일로 남은 역전된 정황에서 나머지놈은 감히 그이상 따라올념을 못하고 숨어있었다. 한놈만이라도 놓치면 이미 나가너부러진놈들에 대한 통쾌한 명중도 아무런 보람없이 되고말것이다.

그놈이 살아 달아나기만 하면 수많은 적을 달고 올것이다. 밀영의 위치를 로출시킴이 없이 사령관동지께서 계획하신 위대한 사업이 무사히 진행되게 하기 위해서는 저놈을 절대로 놓쳐버리지 말아야 한다.

리경준은 맞은편 이깔나무뒤에 숨어서 머리를 빠끔히 내밀고 이쪽 동정을 살피고있는 적의 공포에 질린 눈을 살펴보고는 그놈이 도망칠 구멍수를 노리고있다는것을 눈치챘다.

그놈이 기회를 보다가 몸을 날려 몇걸음 뛰여갈 때 리경준의 권총이 땅하고 야무지게 울리였다.

리경준은 죽어너부러진 그놈에게서 권총을 빼앗아들고 허리를 펴다가 뜻하지 않았던 총알을 받았다. 몸을 비틀며 쓰러질듯 했다가 간신히 돌아선 그는 맨 처음에 자기의 총탄을 얻어맞고 쓰러졌던 회색양복쟁이가 한팔로 땅을 짚고 비스듬히 누운채 또다시 자기를 겨냥하고있는것을 보았다.

리경준은 권총쥔 손을 쳐들려 했지만 손은 이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손을 눈앞에 쳐든 그는 방아쇠를 당기기전에 자기의 바른쪽 가슴노리가 뜨끔해짐을 느꼈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자기에게 거듭 발사했던 양복쟁이가 악-하고 지르는 짐승의 비명같은 소리를 이미 흐리마리해지는 감각속에 가까스로 가려들으며 햇풀이 돋기 시작한 땅바닥에 쓰러졌다···

몽롱한 의식속에서 누군가 자기를 마구 흔들며 부르는 소리를 느끼고 온힘을 다 짜내여 몹시 무거운 눈두덩을 올려밀었을 때 그의 눈에 먼저 비쳐진것은 분비나무숲사이로 빨갛게 타고있는 쪼각하늘이였다. 그리고 역시 그렇게 빨간 한쌍의 둥그런 유리알이였다. 그 한쌍의 유리알 아래쪽에는 반짝거리는 붉은 구슬알이 맺혔다가는 길죽하게 늘어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잠시후 리경준은 그것이 박문필의 안경이며 웬일인지 그가 자기 몸을 받쳐 안고 울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적의 미행을 받은 뒤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일시에 생생히 되살아났다.

《동무는 왜 여기 있소?》

《···》

박문필은 눈물에 젖은 입술을 감빨뿐 대답하지 못하였다.

《밀영을 못찾았소?》

《···》

박문필은 밀영에 아직 가지 않았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하늘이 왜 저렇게 붉소?》

《저녁노을이···》

흐느낌에 떨며 박문필은 겨우 대답하였다.

《아, 벌써 저녁이··· 지내 어둡기전에 어서··· 나를 두고 어서 가서···》

점점 더 잦아드는 목소리로, 점점 더 숨차하며 가까스로 떠듬거리던 리경준은 마침내 입술만 움쭉거릴뿐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사령관동지를···》

그는 자기에게 이토록 빨리 말할 힘마저 없어질줄 모르고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그렇게도 많은 말중에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한것을 안타까이 여기고 입을 벌리려 하였지만 이제는 그 입술도 영원히 붙여버렸는지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아, 입술을 벌릴수 있었던 좀전에 왜 가장 남기고싶은 말부터 꺼내지 못했던가?

몸은 자꾸만 땅속으로, 땅속으로 꺼져들어갔다. 붉어보이던 쪼각하늘은 자꾸만 어두워졌다.

리경준의 두눈에 담겼던 노을은 갑자기 사라졌다. 그는 영원히 눈을 감은것이다.

하늘에 비꼈던 노을도 차츰 스러져갔다.

숲속엔 갑자기 짙은 어둠이 덮씌웠다.

《경준동지!》

울부짖는 박문필의 슬픔에 찬 목소리만이 짙은 어둠과 무시무시한 적막을 발기발기 찢으며 광막한 공간에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