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2

 

제 11 장

2

 

쇠살창사이로 한줄기의 연하고 부드러운 해빛이 스며들자 박문필은 불덩이같이 달아오른 몸을 간신히 움직여서 창가로 다가갔다. 고문으로 상한 오른쪽 다리가 몹시 저려올라서 머리끝까지 징징 울리였지만 그런대로 한걸음한걸음 발을 옮길수 있는것이 다행이였다. 두볼이 꺼져들고 이마에 푸른 피줄이 일어섰으나 눈만은 안경속에서 불타는듯 빛을 뿜고있었다. 코등에는 한쪽다리가 부러진 안경이 간신히 걸려있었다. 밖이 몹시도 그리웠다. 쇠살창 저쪽으로 푸른 하늘이 안겨왔다. 그 하늘로 한떼의 새무리가 날아지나갔다. 일순간 수척해진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날 박문필은 비를 맞으며 만나기로 약속한 교외 농촌마을 조직책임자의 집을 찾아갔다. 시내의 한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그 조직원은 자그마한 초가집에서 살고있었다.

박문필이 약속된 저녁시간이 되여 그의 집 울타리밖에 접근했을 때 빨래줄에는 흰 빨래들이 걸려있지 않았다. 안전하다는것을 확인한 박문필은 다시 집주변을 살펴본 다음 안심하고 사립문안에 들어서면서 낮은 목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어두울무렵인데도 불은 켜져있지 않았다. 다시 주인을 찾아도 대답이 없었다. 약속된 시간에 이 집이 비여있은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방문앞에 다가서던 그는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것 같은 예감이 들어 물러서려 하였다.

그때 굴뚝모퉁이와 헛간뒤에서 달려나온 두놈의 경찰과 집안에서 문을 박차고 나온 한놈의 사복경관놈이 박문필에게 달려들었다. 집안에는 교원이 이미 묶이운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었고 교원의 처도 뒤고방에 갇혀있었다. 그제야 박문필은 사태를 짐작하였다.

체포되여 경찰서에 압송된 즉시로 박문필은 세모눈에 볼따귀가 축 처지고 코밑수염에까지 머리기름을 바른 형사놈의 심문을 받았다. 그놈은 교원과의 관계를 말하라, 조직선을 말하라, 김일성장군유격대와의 련계를 말하라 하고 처음부터 강박해나섰다.

박문필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하자 형사놈은 볼따귀를 후들후들 떨더니 사정없이 칼끝처럼 앞코가 뾰족한 양가죽 구두발로 박문필의 무릎이며 허벅다리를 찼고 그것으로도 성차지 않아서 폭이 넓고 두툼한 가죽채찍을 마구 휘둘렀다. 놈은 금시 박문필을 물어뜯을듯이 굵은 땀방울이 맺힌 코수염을 떨며 이를 사려물고 달려들었다. 박문필은 한마디로 모른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심문과 고문을 받는 과정에 박문필은 교원이 체포되게 된 까닭을 알게 되였다. 놈들은 최근시기 자기들을 매우 불안케 하는 심상치 않은 사건들 가운데서 특히 무송시내에서 눈에 뜨이게 자주 나타나는 삐라사건으로 하여 이미부터 의심스럽게 보아왔던 그 교원을 은근히 감시하고있었다.

그러던중에 종이가 절반 접혀져서 찍힌 삐라를 얻어내게 되였고 그 절반짜리 삐라 한쪽귀에서 등사잉크가 묻은 그의 지문을 발견하게 되였다.

사실 학교에서 등사기를 공작해낸 사람은 그 교원이였다. 그런데 등사기의 분실과 삐라가 나붙기 시작한 시기가 거의 일치되였기때문에 놈들이 등사기의 분실과 관련하여 의심을 품어왔던 그 교원에게 바싹 눈을 밝혀 감시하고있는줄을 박문필이도 몰랐던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체포된것은 놈들이 교원을 붙잡으러 온 그 시각에 그의 안해가 봄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날씨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흰 빨래감을 빨래줄에 널려고 하였으며 바로 그것을 눈치챈 놈들이 반드시 교원과 련결된 그 누군가가 나타날것이라고 인정하고 대기하고있을 때 자기가 나타난때문이라는것을 명백히 깨달았다.

박문필은 적들이 조직을 모르고있다고 확신하였다. 그것은 적들이 조직선을 대라고는 하면서도 박문필이나 그의 조직의 활동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를 걸고들며 따지기때문이였다.매우 의심스러운 시각에 교원의 집에 나타났다는 사실밖에는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있는 적들이였다.

놈들은 유산계급출신의 인테리인 박문필이쯤은 쉽게 다룰수 있고 잘만 하면 뜻밖의 자료를 얻을수 있다고 단단히 믿고있는듯 하였다.

박문필은 놈들의 고문시간이 길어지고 고문방법이 악착해짐에 따라 그것을 더 강하게 느끼였다. 련이어 내려치는 채찍을 받으면서 박문필은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하여 이를 악물었다.

《너희들의 지하조직을 대라! 말하라!》

놈은 박문필의 머리카락을 거머쥐고 씩씩거리며 다그쳐물었다.

《교원은 다 말했다. 그놈은 자기가 너와 련결된 조직원이라는걸 실토했다. 네가 무슨 일로 거기 갔는지 다 안다. 그러나 우리는 너를 위해서 네가 스스로 솔직하게 말할 기회를 주는것이다. 등사기는 어데다 감추었는지, 삐라관계자는 누구누군인지 우리는 알고있지만 너의 솔직성을 검열하자는것이다.》

《너는 학생시절부터 김일성장군과 련계되여있다. 김일성장군이 지금 무송경내에 와있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너는 그것까지 숨기려든다. 김일성장군이 무송에 온 때부터 이 일대가 소란하다. 과연 이것이 김일성장군과 선을 잇고 활동하는 너의 소행과 무관계한가?》

놈들은 사진사에 대해서도 의심을 가지고 물었다. 박문필은 이미 리경준이와 약속한대로 그의 전생활과 할빈에서 《금강사진관》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하여 말하였다.

놈들은 사진사가 어데 갔는가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 물음에서 박문필은 리경준이 몸을 피하고있다는것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할빈에 있는 형네 집에 다녀올 일이 있어 떠났다고 대답하였다. 그것 역시 지금 같은 불의의 정황이 생길 때 꾸며대기로 리경준과 그리고 안해 철숙이와도 미리 약속되여있는 대답이였다.

육체적고통을 당하면서도 박문필의 마음은 스스로도 놀라우리만큼 평온하였다.

경준동지는 무사하다, 조직은 살아있다, 교원은 불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견딜것이다, 따라서 경준동지도, 우리 조직도 무사히 남아있을것이다. 문필은 속으로 이렇게 뇌이며 앉아있다가 형사놈이 구두발로 콱 밀쳐버리는바람에 쓰러지면서 피가 축축히 스며있는 마루바닥에 여윈 볼을 쓸치며 쓰러졌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감방의 녹이 쓴 접철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박문필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털보순사놈이 문고리를 쥐고 서있었다. 놈은 흐리멍텅한 눈으로 빤히 박문필을 바라보다가 복도쪽으로 고개짓을 하였다. 어서 일어나서 빨리 따라오라는 수작이였다.

순간 박문필은 긴장으로 하여 오른쪽 볼편이 가늘게 떨리는것을 느꼈다. 털보순사놈의 출현은 고문외에 다른 아무것도 없으리라는것을 말해주었다.

박문필은 놈들의 출현을 기다리고있은듯이 입가에 차거운 웃음을 띠운채 주저없이 털보놈을 따라나섰다. 대결이 또 벌어질것이였다. 박문필은 고문과의 싸움을 대결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대결에서는 언제나 이길 자신이 있었다.

털보놈은 복도끝에 있는 고문실로 향한것 같더니 거기로 채 가지 않고 왼쪽으로 꺾어들었다. 털보놈은 밤색뼁끼칠을 하고 손잡이가 반들반들한 세번째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보통사무실의 세곱은 되리만큼 넓었다.

방안에 들어서던 박문필은 출입문을 마주하여 굽높은 커다란 량수책상에 시선이 끌렸다. 방안에 있는 비품이라고는 벽에 기대놓은 의자 몇개가 있을뿐이여서 가뜩이나 넓은 방안이 더욱 휑뎅그렁한 감을 주었는데 그때문에 굽높은 커다란 량수책상이 더 두드러지게 보이면서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여기 와서는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말없이 위협하고있는것 같았다.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상너머에 시선을 옮기던 박문필은 눈초리가 꼿꼿하게 굳어졌다. 서류더미사이로 은백색 호박대가리가 번득인것이였다. 정수리는 잘 여문 호박빛으로 번들거렸고 그 변두리를 빳빳한 흰털이 선을 두르고있었다. 그것은 경찰관의 관록을 말해주는 동시에 빳빳한 흰털 한오리한오리가 덧없이 센것이 아니라는것을 말해주는것 같았다.

박문필은 대뜸 일이 어렵게 되였다는것을 느끼며 가빠지는 숨결을 가까스로 눌렀다. 그놈은 고등계주임이였다.

얼핏 백대가리가 들리우면서 도드라진 이마아래에서 얼음장같이 차거운 눈길이 번쩍이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백대가리는 다시 서류더미속에 끌리듯 천천히 묻히우고말았다.

털보놈이 기다리기에 지친듯 제자리걸음으로 발을 옮겨놓다 말고 손을 마주비비며 그 근엄한 책상앞으로 다가갔다.

털보놈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려는데 백대가리가 번쩍 들리였다. 놈은 펜대를 쥔채 털보같은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치 언제 이런 사람이 방에 와있었는가 의심스럽다는듯 한, 그러면서도 사람을 떠보는듯 한 눈길로 박문필을 바라보았다. 늙다리답게 째진 눈은 빛이 사위여있어서 놈의 속심을 알수 없었다.

고등계주임놈은 펜대로 장단을 치듯 책상을 똑똑 두드리며 《흥 흥》 하고 코소리를 냈다.

《아, 박선생이요. 알만하오.》

얼마후 그놈은 무엇을 생각했던지 이렇게 희떠운 소리를 하며 벽에 기대놓은 의자를 가리켰다.

《박선생, 인사가 안됐소. 내 직분이 이래놔서··· 널리 량해해주길 바라오.》

놈은 입까지 벙싯거리며 상냥한척 했지만 그 재빛눈은 검질기게도 박문필에게서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박문필은 벽에 기대놓은 두번째 의자에 가 앉았다. 이때 출입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등계주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러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방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맞았다.

《박오필군, 오래간만이요. 박선생, 형님이 오셨소.》

박문필은 출입문쪽으로 얼굴을 돌리였다.

거기에는 곤색세루양복에 흰줄이 간 검정넥타이를 맨 박오필이가 서있었다.

박오필은 박문필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과 입가에 비웃는듯 한 웃음을 띠우더니 고등계주임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박문필은 그처럼 곰살궂은 박오필을 처음 보았다. 이때에야 비로소 박문필은 구렝이같은 고등계주임놈한테 어떤 꿍꿍이속이 있다는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박오필은 발끝걸음으로 걸어서 고등계주임의 의자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동생하고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는것을 나타내보이려는듯 상반신을 뒤로 젖히는것으로 박문필이와의 거리를 될수록 멀리 한 다음 눈에 간사스러운 웃음을 띠우며 고등계주임놈에게 말하였다.

《주임님, 걱정을 끼쳐서 매우 죄송합니다. 형이 제구실을 못하다나니 이렇게···》

박오필은 엉뎅이를 가볍게 들었다놓았다.

고등계주임은 굽높은 량수책상에 앉으면서 이마살을 찌프렸다.

《동생이 참 안됐소. 내가 있었으면 이번 일이 이렇게 처리되지는 않았을것인데··· 내가 관하 경찰분서에 시찰하러 내려가있는 동안에 그만···》

고동계주임의 유들유들한 볼따귀에 주름이 잡히고 재빛눈에는 살기가 번뜩이였다.

《박오필군도 잘 알고있는바이지만 요즘 우리가 관할하는 이 지대가 깨끗치 못하오. 무송지구가 좀 소란하단말이요. 군들도 신문에서 봤겠지만 공산군이···》

담배를 쥔 고등계주임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는 될수록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면서 말을 이었다.

《이건 기밀에 속하는 문제이지만 군들한테야 하지 못할 말도 아니지.》

이러며 그놈은 그 재빛눈을 박문필에게 보냈다. 그놈은 《군들》이라는 말을 써가며 자기와 그대들은 같은 족속이라는것을 은근히 나타내려고 하였다.

《무송시내의 민심도 좋지 못하오. 김일성공산군과 내통하는 자료들이 입수되고있소. 두 박군이 다 알만 한 일인데 무송시내에서 최근 적지 않은 식량과 천이 김일성공산유격대의 손에 넘어갔소. 유격대가 무송지대에 나타난 이후부터 아주 불길한 류언비어가 돌구 최근에는 와짝 불순삐라가 많아지구 민심이 소란하오. 우리 군대나 경찰들이 한발 움직이기만 하면 어느새 유격대에 내통되는지 유격대의 매복습격에 영낙없이 걸리고마오. 며칠전에는 남강부락에 유격대의 대부대가 나타나서 우리 제국에 충실했던 미야께부대를 거의 전멸시켜버렸소. 때가 이러한 때인것만큼 우리 경찰들의 신경이 매우 예민해졌다는것을 나는 군들이 리해하길 바라오.》

안경속에서 박문필의 시선이 날카롭게 번뜩이였다.

《이 소란한 시기에 주임님의 중하를 덜어드리지 못할망정··· 이제는 년세도 많으신 주임님에게 그만 이렇게 걱정만 끼치고··· 정말 뵈올 면목이 없습니다.》

박오필은 반짝거리는 금이발을 드러내보이며 진정으로 죄송스럽다는듯 허리를 굽혔다가 천천히 폈다. 그리고는 박문필의 반응을 알아보려는듯 조심조심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조소가 담긴 박문필의 눈과 부딪치자 박오필은 창황히 머리를 돌렸다.

《여기에는 박선생의 불찰도 없지는 않소.》

주임놈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오필에게 머리를 돌렸다.

《지당한 말씀입지요.》

하고 박오필은 박문필에게 어서 일어나서 고등계주임놈에게 사과를 하라고 독촉하는듯 한 시선을 보냈다.

박문필은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박오필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박오필은 불길이 타번지는듯 한 박문필의 눈과 고등계주임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고등계주임은 박문필의 그 타는듯 한 눈길을 넘겨다보더니 섭섭하다는듯 박오필을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렇게 되자 박오필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넥타이매듭을 끄르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야, 너는 왜 제 형을 원쑤보듯 하니? 응?》

박오필은 금방 튕겨일어설것처럼 엉뎅이를 들었다놓으며 소리쳤다.

《그래 지금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니? 너때문에 온 집안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기나 하는가말이다!》

박문필은 그제야 고등계주임놈의 꿍꿍이놀음이 드러났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고등계주임놈은 유감이라는듯 머리를 흔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안을 거닐었다. 박오필은 안타까운듯 두손을 마주 쥐였다놓았다 하며 고등계주임의 거동만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박오필은 박문필이가 체포되였다는 소식을 인차 들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박오필의 얼굴은 그만 흑빛이 되였다. 박문필의 신변이 걱정되여서가 아니라 그의 체포가 자기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후과가 무서웠다. 더는 참고있을수 없었다. 그는 고등계주임하고는 구면이였고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고등계주임의 집에 목침만 한 돈뭉치를 두개나 가져갔다. 두사람은 이번 기회에 박문필을 돌려세워보자고 단단히 약속하였다. 고등계주임이 념려 말라고 장담하는터여서 박오필은 어지간히 마음을 놓았었다.

《내가 한때 너를 미워한것은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형으로서 너무 지나친것도 없지 않았다. 물불을 모르는 청년시절에는 있을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러나 너도 정신을 차릴 때가 아니니? 정신을 차려야지.

공산주의사상이 너한테 어떤 결과를 가져왔니? 얻은것은 티끌도 없지만 너는 얼마나 많은것을 잃었느냐? 얻은것은 온 세계라고? 너한테는 로동자들처럼 철쇄도 없다. 잃을것이 없단말이야. 그래 얻은것을 보자. 온 세계야?》

박오필은 끄떡도 않는 박문필을 한번 쳐다보고는 이번에는 잦아드는 목소리로 달래듯이 말하였다.

《너도 인제는 가정을 가지지 않았니? 지금 네 처는 울고있다. 혼자때 하구는 달라.》

안해이야기가 나오자 박문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박문필이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였다. 시집을 와서 함께 생활한지 오래 되였으나 아직도 앉아서 이야기할 때는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던 안해였다. 안해의 이야기가 나오자 박문필은 불현듯 그가 얼마나 가슴태우며 외롭게 지낼가 하는 생각이 불같이 떠오르는것이였다. 그러나 박문필은 어지러운 환영을 쫓듯 머리를 저었다.

(안해가 눈물을 흘린다구? 어진 녀자이지만 내가 체포되였다고 하여 눈물을 흘릴 사람은 아니다. 아니구말구. 나약한 안해가 아니지.)

박문필은 속으로 이렇게 뇌이였다.

고등계주임은 이마를 찡그렸다. 입귀가 실룩거렸다. 박문필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서 한동안 눈을 감고있던 고등계주임은 량수책상옆에 놓은 철궤를 뜨르륵 소리나게 열어제끼고 침침한 철궤의 맨웃단 서류더미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하나 꺼내들고 와락와락 종이소리가 나게 번지였다. 험상궂게 이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볼편이 씰룩거렸다. 고등계주임은 애써 거칠어지는 목소리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박문필, 당신은 뭘 믿고 그리 뜬뜬하오. 당신의 운명은 내 손아귀에 있소. 1928년 가을을 기억하고있겠지?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소란때 당신은 반도들속에 섞여서 우리 황국경찰에게 돌을 던졌소. 이 한가지 건만으로도 당신은 사형감이요. 당신은 그때부터 그와 련계되여있었소. 당신은 지금 공산유격대 사령관과 이 무송땅에서 다시 접선하였소.》

고등계주임놈은 또다시 서류철을 번졌다. 그러다가 종이장을 머리우로 쳐들었다.

《당신은 이것을 기억하고있겠지?》

그것은 반일삐라였다. 고등계주임은 그것을 마구 내흔들었다.

《이 삐라는 1929년 봄에 당신이 김일성장군과 같이 다닌 그 학교에서 나왔소. 여기에 당신의 지문이 찍혀있소!》

고등계주임은 서류철을 탕하고 소리나게 책상우에 던졌다.

《주임님, 그때는 저 애가 철이 없었지요.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덤벼칠 땝니다. 널리 량해해주십시오.》

《그런 면에서 우리 대일본제국은 너무도 너그럽소. 그 너그러움때문에 우리는 종종 쓴 고패를 맛보군 하오. 그렇다고 하여 그 관용을 리용할 생각은 마시오. 참을성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주임놈은 팔을 벌려보이고는 천천히 담배를 피워물었다.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박오필에게 등을 돌린 주임놈은 한참이나 말없이 담배를 빨았다.

그러다가 박오필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너그러움은 당신에 대해서는 아주 특별한것이였지. 나는 그 대가를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소. 다른 사람 같으면 동생이 지금까지 이렇게 앉아있을수 없소.》

주임놈이 팔짱을 끼고 일어나서 왔다갔다하더니 박문필의 맞은편에 놓여있는 쏘파에 몸을 잠그었다. 그리고는 박문필을 쏘아보며 말하였다.

《박선생, 박선생도 인제는 이런 위험한 장난을 그만둘 나이가 되였다고 생각하는데. 언젠가는 꼭 그만두게 될것인데 일찍 그만하고 손을 떼는게 좋겠소. 내 오늘 박선생한데 교훈이 될만 한 이야길 하나 해주겠소.

1927년 내가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근무하고있을 때였소. 공산주의자로 자칭하는 한 청년이 경찰서에 체포되여왔는데 때마침 내가 맡게 되였소. 공부도 했고 역시 두뇌도 명석한 젊은인데 알고보니 대재산가의 아들이였거던. 그는 우리 대일본제국에 공공연히 반항해나섰소. 나는 대일본제국주의와 한하늘아래서 살수 없다, 나는 프로정권을 세우기 위하여, 무산대중을 위하여 싸움을 멈추지 않을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신념을 주장하며 으르렁거렸소. 문초를 하자 그는 더 악을 쓰며 달려드는게 아니겠소. 나는 그를 위해서 한두번 짭짤하게 고문을 하였소. 그때야 정신을 좀 차리는것 같았는데 굴복하지는 않더군. 몸이 아니라 정신이 황소같은 청년이였소. 우리 동료들은 계속 고문을 하자고 하였소. 그런걸 내가 반대했소. 왜 고문을 계속하겠소? 고문이라는것은 한두번 시험삼아 해보는것이지 그것으로 만사가 해결되는것은 아니거던. 더우기 돈많은 사람의 자식인데··· 아까운 청년이였소. 그후 난 한 40일동안 마포형무소와 교섭해서 청년한테 감옥구경을 시켰소. 사형장도 보이고 정치범 독감방도 보이고 이렇게 한 다음에 아무말 없이 석방시켰소. 그때 나는 젊었을 때이라 나많은 우리 경찰서장은 나의 처사를 매우 못마땅해했소. 그러나 나는 유능한 형사들의 지지를 받았던것이요. 그들이 내 수완을 알아차렸는지··· 그 청년은 집에 가서 휴식한 연후에 어느 금융조합서기로 들어가 일했소. 난 한달에 한번씩 그 청년을 데려다가 교수대나 고문실구경을 시키고 아무말 없이 보내군 했소···》

고등계주임놈은 거퍼 담배를 빨았다.

《1932년초에 라남에서 우연히도 경찰제복을 입은 그 리군을 만나지 않았겠소. 리군이 날 먼저 알아보구 달려왔더군. 아주 뜻깊은 상봉이였지. 내가 맑스머리가 어떻게 제복을 입었느냐고 물으니까 리군은 얼굴을 붉히면서 하는 말이 과거는 다 잊어주시오, 그때는 젊은 혈기에 그랬는데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했소. 리군, 당신은 인제야 제길을 찾았소 하구말이요. 일전에 편지에서 리군이 만주 어덴가 전근될것 같다고 하였소. 리형사의 과거이야기는 우리한테 많은 교훈을 던져주고있소.》

박오필은 머리를 끄덕이며 메밀눈을 깜박이였다.

《주임님, 믿어주십시오. 주임님이 우리 동생을 두고 지금처럼 그런 옛말을 할 때가 꼭 있으리다.》 하고 박오필은 박문필이쪽을 흘끔 건너다보았다.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주임놈은 갓 태우던 담배불을 재털이에 비벼끄고나서 빠른걸음으로 박문필에게 다가갔다.

《박선생···》

놈은 떠보는듯이 바른쪽 엄지손가락으로 박문필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차거운 미소가 그놈의 입가를 스쳐지나갔다. 놈은 박문필의 안경에 번들이마를 바싹 들이대며 속삭이듯 말하였다. 속에서 불덩어리가 쏟아져나올것만 같았다. 그 불덩어리를 한가슴에 안고있자고 하니 격분으로 온몸이 떨렸다.

《여보 박선생, 안심하오. 당신의 체면이 깎이지 않게 절대비밀을 보장하겠소. 당신이야 유산층 출신이구 우리편 사람이 아니요!》

박문필은 지하사업은 단 한순간의 비리성적인 행동도 허용치 않는다고 자주 일러주군 하던 리경준의 말을 잊지 않고있었다.

박문필은 입술을 악물면서 머리를 수그렸다.

《왜 그렇게 몸을 떠오?》

고등계주임놈의 물음이였다.

《겁이 나오?》

《···》

《겁이 난단말이지?》

그 말을 되뇌이는 주임놈의 어조에는 자기만족이 력력히 비껴있었다. 제 수가 마침내 은을 냈다고 생각한 모양이였다.

《겁낼건 없소.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당신의 솔직하고 기탄없는 고백이면 당신의 생명뿐아니라 안락한 장래와 출세가 담보된다는것을 내 이 하얀 머리로 보증하오. 이야기해보시오.》

박문필은 이 호박대가리가 아직 이렇다할 단서를 잡지 못하여 퍽 초조해한다는것을 감촉하였고 따라서 견디여내기만 하면 다시 대오에 돌아가 싸울수 있다는것을 느끼였다.

박문필은 분노를 의지로 애써 누르며 말했다.

《나에 대한 체포와 당신이 그렇게도 자랑하는 경찰관 관록과는 아주 모순된다는걸 당신자신이 인정하겠지요? 근거없이 체포하는건 당신의 명예손상이 아닌가요? 나는 우선 나를 체포한 근거를 내놓기 바라오.》

그러자 주임놈은 고개를 저으며 박오필에게

《박군, 나는 바쁜 시간을 모처럼 냈는데 늙은이에 대한 례절이 이렇소. 동생은 당분간 내가 돌봐주어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놈의 마지막 말마디가 떨리는것을 박문필은 알아들었다.

박문필은 일이 간단하지 않을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