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5

 

제 1 장

5

 

연길땅과 접해있는 화룡의 깊은 산간벽지, 소란한 바깥세상과 동떨어져있는 자그마한 화전마을에 화전민들의 유일한 기쁨인 간이학교 비슷한 글방이 열린것은 얼마전의 일이였다.

그 글방에서는 리동백이라고 하는, 반나마 흰 머리칼이 때이르게 주름살이 패인 이마우에 드리우고 게다가 두볼이 꺼져들어가서 사십이 훨씬 넘어보이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진중한 행동거지와 뜻이 깊은 이야기며 그리고 성긴 눈섭아래서 때때로 생기를 잃지 않고 번쩍이군 하는 눈을 보고 리동백을 은근히 존경해마지 않았다. 리동백은 낮엔 글을 가르치고 밤엔 밤마다 모여드는 아이들에게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려주군 하였다.

오늘밤도 리동백은 글방으로 쓰는 아담한 귀틀집안에 오구구 모여앉은 아이들한테 에워싸여 리순신장군이야기를 들려주기에 밤가는줄 모르고있었다. 이 밤따라 그의 말투는 격정에 넘치기도 하고 비분에 떨리는듯도 하였다. 자정 가까이 되여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문이 빠끔히 열리며 조카딸 옥선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왔냐?》

리동백은 하던 이야기를 끊고 조카딸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외삼촌을 모셔오래요.》

누이는 리동백이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면 가끔 찾으러 나오거나 옥선이를 보내군 했다. 그가 덮개를 안덮고 아이들의 글방에서 그냥 자다가 감기걸린적이 가끔 있군하기때문이다.

《하던 애길 끝내면 어련히 들어가지 않으리. 들어오너라. 잠간 앉았다 같이 가자.》

《아이참, 외삼촌이 안들어와서 어머니가 속상해해요.》

옥선이는 그냥 문을 열고 바깥에 선채 울상이다. 아이들한테 해주던 이야기를 계속하려던 리동백은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외삼촌은 정말 아무것두 모르시네. 어서 가야 해요.》

리동백은 어쩔수 없다는듯 가볍게 한숨을 쉬였다.

《알겠다. 그럼 너 먼저 가서 내가 곧 간다고 어머니한테 일러라.》

《제가 또 심부름을 오지 않게 어서 와요.》

옥선이는 오금을 박아 당부하고 문을 닫았다. 얼음버캐를 밟아부스러뜨리며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다싶이 하는 옥선이의 발자국소리가 멀어져갔다.

다시 이야기를 잇자니 흥도 깨지고 밤도 너무 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오늘중으로 끝내야 할 이야기도 아니니 그럴바에는 차라리 래일밤에 계속하여 아이들한테 이야기 듣는 재미를 돋구어주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았다.

《얘들아! 이제는 밤도 깊었는데 그만하구 래일밤에 마저 듣는게 어떠냐?》

눈이 초롱초롱해서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리고있던 아이들은 헨둥하게 아쉬워하는 기색들이였다. 그러나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것을 눈치챈 그들은

《좋습니다.》

하고 한결같이 대답하며 우르르 일어들났다.

《자, 그럼 돌아들가거라.》

리동백은 광솔불을 들어 아이들이 제 짚신짝들을 찾아신을수 있게 밝혀주었다.

《선생님, 밤새 안녕히 계십시오.》

더꺼머리 총각애들과 길게 머리채를 따늘인 처녀애들이 굽벅굽벅 인사하고 물러갔다.

아이들이 다 돌아가자 리동백은 광솔불을 꺼버리고 맨나중에 글방을 나섰다.

달이 밝았다. 보름가까운 달이 마을을 하얗게 덮고있는 눈우에 그림자를 진하게 던져주고있었다.

서로 헤여지며 인사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제 집에 찾아드는 작은 주인들을 맞으며 반갑게 짖어대는 개소리, 집에 들어선 아이들의 문여닫는 소리가 와짝 들리다가 점차 가라앉았다.

우중충한 거목들속에 여기저기 널려져있는 집들은 모두 불들이 꺼져있고 동기와추녀끝에 달린 팔뚝같이 굵은 고드름들만이 달빛에 번들거린다.

창호지에 불빛이 어려있는 집은 그가 얹혀살고있는 누이네 집뿐이다. 무슨 군불을 때는지 굴뚝에서는 불티 섞인 연기가 꾸역꾸역 솟구쳤다.

리동백은 누이네 모녀와 함께 세 식구를 이루고 살고있었다. 누이는 살곳을 찾아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이 벽지에 들어와 억척같이 땅을 뚜지며 외딸을 키워왔다.

리동백은 리동백이대로 사회운동을 한답시고 나돌다가 홀몸이 된채 번거로운 바깥세상을 피하여 재작년에 누이한테 왔었다.

《이제사 오는구만, 날래 방에 들어가서 초불이나 켜놓소.》

그가 부엌문안에 들어서자 김이 뽀얗게 서린 가마목에 앉아서 그릇에 음식을 담고있던 누이가 기다렸던듯 말을 건넸다. 누이는 그보다 여섯살 맏이였다.

《무슨 일로 찾았소, 누님?》

리동백은 신발을 벗고 정지구들에 올라섰다.

《내사 그럴줄 알았지비. 오늘이 무슨 날인줄두 모른당이.》

누이는 주걱으로 가마에서 밥을 퍼담으며 혼자소리를 했다. 옥선은 한옆에서 접시에 고사리채를 담고있었다.

《무슨 날이게?》

《에구ㅡ 기차기두, 아버지 제사를 받들 아들이 자기밖에 없는줄 뻔히 알면서 어쩌문 저럴수가 있을가···》

리동백은 누이의 푸념을 못들은척 하고 부친의 기일제를 차리느라고 잔뜩 그릇가지들을 벌려놓은 부엌을 새삼스럽게 훑어보았다.

《아버지 제사차비를 하느라구 밤중에 이 분주탕을 벌려놨소?》

리동백은 아버지의 제사마련은 생각지도 않고있었던것이 미안스러웠지만 제를 지내자고 궁색한 살림에 일부러 무얼 갖추고 만들고 하느라 어지간히 애썼을 누이가 측은하게 생각되였다.

《그러문 자식이란게 제 부모 기일도 모르고 제사두 안지내구 살아야 옳겠소?》

누이는 못마땅한듯 리동백을 흘겨보았다.

《나라고 아버지 제사날까지야 잊겠소. 허지만 나라 없는 백성이 제 아버지 제사는 지내 뭘하우? 부질없는 일이지. 제를 지낸다고 돌아간 어른이 살아나겠소, 망한 나라가 광복되겠소.》

무릎을 짚으며 일어나려던 누이는 그 말을 듣자 다리가 후들거려서인지 도로 주저앉으며 원망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에구우! 어쩌문 아버지 제사를 두고 그런 말을 입밖에 내오? 내사 오래비 속을 모르겠당이.》

《아버지는 차라리 잘 돌아가셨지. 이 빛없는 세상에 값없이 오래 살면 뭘하겠소?》

리동백은 사이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

아연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동안 사이문쪽을 지켜보고있던 옥선이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실루 오래빈 너무 하오. 아버지가 뼈빠지게 일하면서 뒤를 받쳐 학교랑 보내놓으니 운동바람이 나가지구 아버지가 돌아가두 와볼줄 알았겠소, 언제 한번 아버지 제사를 지내봤겠소? 그리구서두 상기 모자라서 그런 소릴 하오? 그래두 난 의지가지할데 없이 혼자 살다가 제 살붙이라구 오래비가 왔을 땐 이렇게 모진 말을 들을줄은 생각도 못하구 기뻐했더니··· 그렇게 제 부모두 모르면서 어떻게 나라를···》

누이는 한참 넉두리하듯 토설하다가 오랍동생의 아픈 마음을 너무 찌르는것 같아서인지 뒤말을 삼갔다.

《어머니, 그만해요. 외삼촌은 뭐나 다 귀찮아서 해보는 소린데···》

옥선이의 귀속말이였다.

《나도 그런줄은 안다. 그렇지만 외할아버지 제사를 앞에 놓구 너무 모진 말을 하는게 씨만해서 그런다.》

울음섞인 누이의 목소리였다.

리동백은 뜻하지 않게 누님을 너무 노엽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느덧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회의적인 인간으로 돼버려서 진지하고 정중하게 대해야 할 문제에서도 비뚤어진 말을 하는 때가 종종 있다는것을 문득 깨달았다.

《누님, 차례를 지낼 시간이 지나는데 마음을 풀구 제상을 들여오시구려. 나라구 정 아버지를 잊기야 했겠소? 어쨌든 나는 그렇다치구 누님의 성의만이라두 아버지가 받게 해드립시다.》

리동백은 도시생활의 유일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파이프에 써레기담배를 담아 피워물며 정지간에 대고 말하였다.

부모슬하에서 누이와 같이 멋모르고 자라던 유년시절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나이 마흔이 넘도록 자식된 도리를 거의나 지켜본적 없는 자신에 대한 가책, 덧없이 흘려보낸 지난날들에 대한 허무감속에 제사를 지내고 상을 물릴무렵에 마당에서 개짓는 소리에 이어 인기척이 나더니 누군가 찾는 소리가 들렸다.

리동백이 일어나기전에 상을 정지간으로 들어내갔던 옥선이가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누구세요?》

《지나가던 길손입니다.》

귀에 선 목소리였다. 기웃이 밖을 살피던 옥선은 웬일인지 목을 주춤 움츠러뜨리며 문을 닫고 황급히 사이문턱을 넘어왔다.

《외삼촌이 내다봐요.》

겁이 나서 하는 귀속말이였다.

《왜?》

《수상한 사람이예요. 권총이랑 찬것 같아요.》

어지간히 긴장해진 리동백은 제사를 끝내자마자 또 붙여문 파이프를 손에 든채 헛기침을 하며 일어서서 방문을 열었다.

정지문앞에 서있던 시꺼먼 형체가 다리를 살룩살룩 절며 방문앞으로 다가왔다. 달빛을 등지고있었지만 리동백은 그가 무슨 짐을 지고 옥선의 말대로 권총같은것도 차고있는것을 인차 알아보았다. 이 깊은 밤, 이 깊은 벽지에 무장을 가진 정체모를 사람이 찾아든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마음놓고 대할 일이 아닐뿐더러 달갑지 않은 일이였다. 비적들이 끓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혹시 그런것은 아닌지?

《어떻게 찾아온 손님이요?》

그 사람은 금시 달려들어 물어뜯을듯이 짖어대는 개를 돌아보고나서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좀 페를 끼칠 일이 있어 들렸는데 조용히 안에 들어가 의논할수 없겠습니까?》

《어디서 왔소?》

《안에 들어가 말씀드리지요.》

그 사람은 역시 낮은 목소리로 서둘러 대답하며 경계하는 눈초리로 이웃집들을 돌아보았다. 자기가 이 집에 찾아온것을 누군가 볼가 보아 안심치 못해하는 눈치였다.

정체모를 사람을 들여놓기가 께름직했지만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난처했다. 한가지 약간이나마 위안이 되는것은 손님의 공손한 말투였다.

《정 그러면 들어오시오.》

리동백은 시답지 않게 응하며 문을 틔워주었다.

《저··· 실례입니다만 부엌간에 들어가 만날수 없겠습니까?》

그 사람의 제의가 하도 류달랐던만큼 리동백은 어떻게 종잡을지 몰라 선뜻 대답을 못했다.

《신발이 얼어서···》

신발이 얼어서 쉽게 벗을수 없기때문에 신은채 부엌에 들어갔으면싶으다는 말이였다.

《그러시오.》

그는 방문을 닫고 정지간으로 나갔다. 누이와 옥선이는 불안스러운 나머지 앉지들도 못하고 해쓱해진 얼굴로 정지구들복판에 부산히들 서있었다.

리동백은 부엌문을 열어주었다.

색이 바랜 군복에 털모자를 쓰고 멜띠를 따라 허리에는 권총을 거뜬하게 찬 키가 큰 젊은이가 들어왔다. 목소리를 듣고 짐작한것보다 훨씬 젊은 청년이였다. 그가 모자를 벗자 불빛아래 시원하고 번듯한 이마와 은은하면서도 침착한 눈이 유표해서 리동백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약간 넓어보이는 하관에는 면도자리가 푸릿푸릿하게 드러나보였다. 옷은 비록 낡았으나 가뜬한 차림새며 방안을 돌아보는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한 눈길이며 든든한 턱은 어덴지 모르게 리동백으로 하여금 그를 소홀하게 대할수 없게 하였다.

손님은 구들목에 서있는 리동백이와 구들복판에 서있는 누이네 모녀들한테 눈인사를 했다.

《이렇게 깊은 밤중에 찾아들어서 미안합니다. 불이 켜져있는 집을 찾아들다나니 이 집에 왔습니다.》

《어디서 온 손님이요?》

《저는 조선인민혁명군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그의 대답에 리동백은 저으기 놀랐다.

유격대가 전부 《괴멸》당하고 유격근거지가 해산되였다는 출판물의 보도를 본지가 벌써 반년도 넘었고 유격대가 없어졌다는 소문이 난지는 한해도 더 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기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앞에 나타난것이다.

솜군복에 연장도 견장도 달리지 않은것을 보면 전해듣던바와 같이 유격대원 같기도 했다. 혹시 《괴멸》된 유격대에서 어쩌다 살아남아 산에서 지내는 유격대원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한번 만나봤으면 하던 유격대원일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그 말을 쉬이 믿을수 있겠는가? 비적이나 밀정들도 그런 차림을 하고 또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어찌 알겠는가?

리동백이 아무 말없이 잠자코 있자 그 사람은 찾아온 까닭을 이야기했다.

《다름아니라 오늘밤 이 집에서 쉬고갈수 없을가 해서 ···산을 타고 지나가다가 불빛을 찾아 내려왔습니다.》

《···》

리동백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것을 보고 손님은 변명이라도 하듯 말을 보탰다.

《오는 도중에 성냥을 잃지 않았더라면 산에서 불을 피우고 쉬였겠는데 그만 잃어버렸습니다.》

잘못 믿었다가는 화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리동백이로 하여금 랭담성을 잃지 않게 하였다.

《딱한 사정같소만 이 집엔 오늘밤에 제사가 있어서··· 보는바와 같이 방금 제상을 차려놓던참입니다.》

하며 그는 가마목에 내놓은 상을 가리켰다. 상을 가리키는 순간 자기가 한 거짓말을 손님이 눈치챌수도 있다는것을 알았다. 물사발에 밥이 말려있고 향보시기에서 타다남은 향나무가 실연기를 피워올리고있는것을 손님이 알아볼수 있는것이다.

《제사손님이 많은가요?》

《손님은 없습니다만···》

손님은 제상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다시 리동백에게로 눈을 돌렸다. 리동백은 그 눈을 보고 그가 자기의 거짓말을 눈치채였지만 모르는것처럼 한다는것을 느꼈다.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있는 사람이라는 강한 인상이 리동백의 뇌리에 스며들었다.

《정 딱하면 어찌겠습니까. 다른 집을 구해보지요.》

이렇게 말한 손님은 벗었던 털모자를 썼다. 그러자 리동백은 그의 차림으로 보아서나 사람을 대하는 품을 보아서나 전해듣던바대로 틀림없는 유격대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기의 느낌을 확인하기 위하여 누이와 옥선이를 얼핏 돌아다보았다. 그들은 언제인가 이 마을에도 온적 있다는 유격대원들과 대면해봤으니만치 자기보다 더 잘 알아맞힐수도 있었던것이다.

옥선은 외삼촌의 묻는듯 한 눈길과 마주치자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자 리동백은 비로소 안심이 되였다.

(그래, 이 사람은 유격대에서 용케 살아남은 사람임이 틀림없어!)

랭담했던 리동백의 눈빛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의 온 얼굴에 반가움이 피여났다.

《손님, 노여워마시오.》

리동백은 손님의 손을 덥석 그러잡았다.

《나의 지나친 조심성을 리해해주시오. 세상사람들이 다 진실만을 말하며 사는건 아니지요. 허투루 믿은 탓에 화를 당한 사람들도 적지 않지요. 세상이 하도 흉흉하니 참과 거짓을 분별한다는것도 헐치는 않습니다. 유격대는 다 없어지고 그대신 비적들이 사처에 끓인다니 진짜 유격대조차 몰라볼번 했습니다.》

리동백은 거듭 손님의 손을 꽉 쥐여흔들며 중언부언 사죄하고나서 어서 신발을 벗고 올라오라고 끌었다.

《안심하고 올라오시오. 나는 이 마을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사람이구 저인 우리 누님과 조카입니다.》

《고맙습니다. 같이 온 동무들이 있습니다.》

《그럼 어서 데려오시오. 우린 세식구뿐인데 자리는 넉넉합니다.》

그 손님은 두 청년을 데리고 왔다. 한 청년은 그처럼 낡은 솜군복을 입고 배낭과 장총을 메였지만 한 청년은 촌젊은이 차림처럼 토스레 덧저고리에 머리에는 털모자 대신 토목수건을 싸맸고 짚신을 신었다. 그에겐 총도 없었고 배낭도 없었다. 그저 흰 광목보자기에 무언가를 싸서 둘둘 말아 어깨에 걸멘 괴나리보짐이 가진것의 전부였다. 모든것을 잃고 몸만 간신히 빼여낸후 어디서 얻어입은것이라고 생각되였다. 그들이 산에서 고생했을것을 짐작하니 몹시도 측은하고 불쌍하게 여겨졌다.

리동백은 질화로를 손수 들고 부엌에 나가 이글이글한 새 불을 담아서 들여왔고 담배도 권했다. 그리고 누이와 옥선이더러 산에서 몹시 굶주리며 지냈을 손님들에게 아끼지 말고 음식들을 지체없이 들여보내라고 일렀다.

그가 일러준대로 담배 한대씩 마저 태우기전에 음식을 받아달라고 옥선이가 사이문밑에서 귀속말로 찾았다. 그는 사이문을 열고 상과 음식들을 받아들여놓았다.

나중에 들여보낸 토기술병과 잔을 받아놓고난 리동백은 음식을 권하기전에 손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이 마침 우리 부친의 기일제날이랍니다. 나는 명심치도 못했거니와 누님이 제상을 차리는걸 보면서두 부질없는 일을 한다구 나무랐구 그래서 핀잔과 노여움까지 샀댔는데 마침 내가 전부터 한번 꼭 만나보구싶었던 유격대를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제물을 준비한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변변찮은대로 허물 말고 드십시오. 우선 술부터 마시십시오. 몸들이 얼었겠는데 술이 들어가면 나을겝니다.》

《술은 그만두십시오. 우린 마실줄들 모릅니다.》

하고 맨 처음 찾아들어왔던 손님이 사양했다.

《원 별말씀, 사내대장부들이 술을 못마시다니? 딴 사정이 없다면 어서 드십시다. 나라를 찾자고 싸움길에 나설 때의 초지를 버리지 않은채 여직껏 용케 살아온 당신들을 만나보게 된 나를 축하해주는셈치고···》

《우린 못마십니다.》

다시금 잘라 말한 그 손님은 리동백의 손에서 병을 앗아들었다.

《그대신 선생한테는 우리가 부어드리지요.》

손님은 리동백의 잔에 찰찰 넘게 술을 붓고 받쳐올리기까지 했다.

《어서 드십시오.》

《술잔을 혼자 드는 법이야 어디 있습니까?》

《만일 진정으로 우리들을 위해주고싶으면 권하지 말고 드십시오.》

그 사람의 례절바르고도 위엄있는 태도에서 종시 뜻을 이룰수 없다는것을 깨달은 리동백은 그가 권하는 잔을 할수 없이 받아들었다. 그는 멋적은김에 허거프게 웃었다.

《허허··· 이런 괴이한 술자린 나도 처음입니다. 그럼 어서 편들을 드시오.》

리동백은 손님들이 수저를 들고 음식을 집는것을 보고서야 술을 마셨다. 손님은 다시 빈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그러나 리동백은 한잔을 여러번씩 꺾어마시며 어쩌다 한점씩 안주를 집었다. 그러면서 그는 음식을 먹는 그들의 모습을 동정어린 눈으로 찬찬히 지켜보았다.

먼저 수저를 놓고 양치물을 마신 그 사람(그는 자기를 강동무라 불러달라고 했다)은 깍듯이 인사를 하고나서 스스럼없는 어조로 어째서 인민혁명군을 만나고싶어했는지를 물었다.

리동백은 손에 들었던 술잔을 비우고 코수염에 묻은 술방울을 손수건으로 훔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 까닭을 제대로 온전히 이야기하자면 아마 며칠을 두고도 다 말하기 힘들겁니다. 몹시 곤할 손님들앞에서 긴 사연을 굳이 말해 뭘하겠습니까? 별로 들을만 한 가치도 없는 은둔자의 구슬픈 회고담으로 모처럼 차례진 이 귀중한 밤을 보낼게 있습니까? 경박한 호기심에서라고는 생각지 마시오. 단순한 호기심에 넋을 팔기에는 이젠 내 나이도 적지 않았구 가슴에 서린 교훈도 엷지 않소. 솔직히 말해서 한때 나는 당신들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품구 동경까지 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관심을 갖고있습니다··· 혹 당신들께는 내가 괴이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벽지를 일부러 선택하여 은둔한 처지에 있으면서 력사에서 교훈을 찾아보고저 하는 사람입니다. 시간도 갔으니 내가 꼭 알고싶던걸 한두가지 묻고싶은데···》

《말씀하십시오.》

《내가 알기에는 당신들이 유격구역에서 <공산제도>를 실시하다가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유격구역까지 철페당하고 만것 같은데 그 주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리동백의 이 솔직한 질문을 받자 그 사람은 웃으며 되물었다.

《선생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말씀합니까?》

《근거라니?··· 그거야 당신들자신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굳이 내가 말해야겠습니까?》

《어디 말씀해보십시오.》

《좋습니다.》

움쭉 일어난 리동백은 앉은뱅이책상앞에 가서 서랍을 열었다. 그는 거기에 따로 건사해두었던 신문장을 뽑아들고 왔다.

《자, 이걸 좀 보시오. 산에서 지내는 당신들도 본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신문을 펼치고 꼬직활자체의 커다란 기사제목을 가리켰다.

《반년전 신문기사입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가요?》

리동백은 손님앞에 신문을 밀어놓고 믿지 못하겠으면 제눈으로 어디 보란듯이 초불을 들어 신문지를 밝혀주었다.

손님들은 그 기사를 눈으로 읽었다.

그 기사에는 아래와 같이 씌여져있었다.

 

동양평화의 화근 드디여 제거

 

황군은 5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후에야 공산유격근거지 소탕의 성공의 날을 보게 되였다. 이로써 난공불락이라던 공산군유격대근거지는 종말의 종을 울리고 공산군은 소탕되고 아울러 동양평화의 화근은 제거되였다.

이는 황군의 대승리이며 대일본제국의 경사이다. 세상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바와 같이 공산군유격근거지는 전동아의 번영과 안녕을 추구하는 대일본제국의 심장부에 박힌 종처였던바 그것은 심장부를 썩이고 나중에는 불치의 종양으로 화하고있었다.

그러므로 개전하여 사흘만에 흉악한 만주군벌을 물리치고 심양을 함락시켜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한 우리의 무적황군이 그것을 제거하는데 5년이 걸린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 할수 없는것이다···

 

강동무라는 사람은 몇줄 읽다말고 신문을 접어 리동백의 앞에 돌려주었다.

《선생은 이것을 믿습니까?》

《아니 그럼 유격구역이 그냥 존재한다는 말씀인가요?》

눈으로 날려드는 담배연기를 피하여 실눈을 지으며 손님의 표정을 지켜보고있던 리동백은 물었던 파이프를 뽑아들었다.

《그건 물론 없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믿고 안믿고 하는거야 문제설 여지도 없지 않소?》

《아까 선생자신이 저를 처음 만났을 때 세상사람들이란 모두 진실을 말하고있지는 않다고 하셨는데 어떻습니까? 놈들이 진실을 말할것 같습니까?》

대답이 궁해진 리동백은 입에 다시 문 파이프를 뽑지 않았다. 일단 뽑으면 입을 열어야 하는 더 난처한 립장에 빠지게 되는것이다.

《유격근거지는 적들에 의하여 <철페>당했거나 <소탕>당한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동적으로 해산한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민혁명군은 <소탕>된것이 아니라 장성강화되고있습니다.》

리동백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파이프를 다시 입에서 뽑아들었다.

《아니 그럼?!··· 그건 당신네들의 주동적조치였다는 말씀이요?》

《네.》

리동백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것은 자기의 의혹이 풀려서가 아니라 손님의 이야기를 정 못미더워하는 태도를 거듭 보이는것이 미안스럽기때문이였다.

리동백은 될수록 상대방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자기가 관심하는바를 알아내려고 하였다.

《만일 강동지의 말씀대로라고 하면 당신네 유격대는 아직도 적잖게 남아있는셈이겠습니다?》

강동무는 빙긋이 웃었다.

《왜 그것도 믿어지지 않습니까? 여기 있는 우리들 세사람뿐인것 같습니까?》

《정 그렇진 않겠지만 최근 반년나마 되는동안 이 일대에서 유격대의 활동에 대한 소문을 얻어듣기 힘들게 된것만은 엄연한 사실이 아닙니까?》

《인민혁명군의 군사행동도 정세의 요구와 혁명의 전략전술이 변하는데 따르는것입니다. 이제 오래지 않아서 인민혁명군의 대부대가 조선에까지 나가서 원쑤놈들을 벌벌 떨게 한다는 소식이 날아들겝니다. 항상 진실을 말하고있지 않는 일제의 어용신문들까지도 조만간에 있게 될 그 사실을 다는 감추지 못할겝니다.》

회의적이던 리동백의 눈도 이때만은 동자가 커졌다.

《그건 물론··· 실례입니다만 놀래우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의 사령관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확정하신 결심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리동백의 두눈은 타는듯이 이글거렸다.

《장군님께서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장군님께서도 건재해계시단말씀입니까?!》

《네, 무고하십니다. 앞으로 오래지 않아 일제에게 짓밟힌 3천리조국강토가 혁명의 대군을 거느리시고 압록강을 건너서시는 장군님을 맞이하게 될것입니다.》

《아, 그래요!》

가볍게 탄성을 올린 리동백은 그 사람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대체 지금 장군님께서는 어디 계신가요?》

《조만간에 알려지게 될겁니다.》

그 사람은 자기들의 가장 큰 비밀로 될 이야기여서 그런지 두리뭉실하게 말했다.

속이 안달아난 리동백은 진지하고도 열렬하게 간청하였다.

《동지, 솔직히 말해주시오. 나를 믿어주시오. 이래뵈도 나는 량심을 지니구 순결한 어린 눈동자들앞에 서군 하는 교사입니다. 어용교과서의 랑송자라고 여기지 마시오. 량심밖에 가르칠것 없는 내가 량심을 파는 인간으로 되지 않으리라는걸 믿으십시오.》

《못믿어서가 아니라 딱히 어디라는걸 우리자신도 모르기때문입니다. 그이께서 어느 방향으로 향하시고계시다는것을 아는 정도입니다. 저희들도 장군님을 찾아가던 걸음입니다.》

그 말을 들은 리동백은 그의 손을 꽉 잡아쥐였다.

《동지, 고맙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리동백은 두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흔들었다. 그리고는 일어났다.

《이거 내가 너무 체면없이 이야길 시켜서 미안합니다. 밤도 퍼그나 깊었는데 이젠 눈들을 좀 붙이십시오.》

리동백은 사이문을 열고 누이를 불러 상을 내가고 자리를 펴드리라고 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