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11


 
 

제 5 장

11

 

썼다가는 지우고 다시 썼다가는 또 지우고···

춘희는 교원실에 홀로 앉아 학원원가의 가사창작을 위해 모지름을 쓰고있었다.

며칠전 정치부원장이 《자, 이제는 원가창작을 위한 협의는 할만큼 했으니 빨리 창작에 들어가야겠소!》 하며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아무래도 주필은 매일 밤 시를 쓴다는 춘희선생이 맡아야겠다고 정식 위임했던것이다.

물어보나마나 차영진이 끝내 그에게 귀띔한것이 틀림없었다.

그 마음이 고맙기도 하였지만 한편 야속스럽기도 하였다. 그처럼 중요한 일을 전적으로 맡아안았다가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인가. 아니, 망신이 문제가 아니였다. 학원을 대표하는 그런 중요하고도 책임적인 노래창작을 망쳐놓게 된다면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가.

남의 속마음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면서도 지금껏 학원에 와서 체험한 자신의 감정을 터쳐보고싶은 그 어떤 창작적충동은 누를길 없었다.

사실 원가를 지어보지 않겠느냐는 차영진의 권고를 여러차례 들으면서 그는 남몰래 은근히 생각을 많이 해왔었다. 학원이라고 하는 이 크나큰 사랑의 집, 그 집에서 마음껏 뛰여놀며 배우는 백산이와 같은 유자녀들의 행복한 모습··· 그 품, 그 모습이 어떻게 마련된것인가를 그는 너무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며 가사를 몇편 써보기도 하였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어 영진에게조차 말하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부끄러워서라기보다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지금까지 많은 경우 목가적인 시세계에 빠져있어 그런지 절절한 감정은 있으되 격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학원학생들이 대렬행진을 하면서도 부를수 있는 원가라고 놓고볼 때 시의 양상이 너무도 잔잔했다. 더우기 간리림시교사에서 만경대의 새 교사로 옮겨와 수업을 시작한 다음부터는 노래가사에 새로운 감정, 새로운 느낌이 담겨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더 강렬하게 들었다.

《만경대의 송림초목, 푸르른 대동강!··· 어쨌든 난 우리 학원의 노래에 만경대의 모습이 꼭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오. 우리 학원이야 다름아닌 만경대의 학원이 아니요.》

언제인가 차영진이 열정에 넘쳐 하던 그 말이 요즈음 자주 때없이 춘희의 귀가에서 울리군 했다. 두려웠다. 자기가 과연 영진의 기대에 맞는 아니, 모든 학원학생들의 심정에 맞는 그런 글을 써낼수 있을가 하는 위구심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조직적인 과업으로 정식 맡아안게 된것이였다.

남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영진을 원망도 해보았으나 그 어떤 반발심으로 하여 다시금 새로운 창작을 시작하였다.

괘씸한것은 영진이 그렇게 해놓고는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것이였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시치미를 떼고 못 본척 하며 지나갔다. 처녀의 가슴에 폭탄선언(물론 춘희에게는 아직까지도 봄날에 한 그말이 사랑의 고백이였다고 믿어지지는 않았지만)을 던진 그날부터 영진은 두번다시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의 변함없는 사랑의 눈빛만 아니였더라면 춘희는 자기가 마치 꿈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을것이였다.

(그 자존심! 어깨에 별을 달았다고 저만 똑 제일인가 하는가부지. 흥, 누구에겐 자존심이 없나?!···)

《똑 똑 똑···》

교원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누군가가 불쑥 들어섰다. 차영진이였다.

《어마나.》

춘희는 하마트면 큰소리로 울려나올번 한 놀라움을 가까스로 삼켜버렸다.

《왜 그렇게 놀라오? 범이라도 본 사람처럼···》

차영진이 사뭇 의아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정말 범이 제소리하면 온다더니 어쩌면···

춘희에게는 그가 마치 방금전의 자기 속생각을 다 엿보고 들어선것처럼 여겨져 귀뿌리가 빨개졌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춘희는 얼굴을 붉히며 혀아래소리로 대답했다. 왜서인지 그와 마주서면 당황해지고 용기를 잃어버린다. 가슴속에 총알처럼 다져놓은 말마디들도 불발탄처럼 한마디도 튀여나오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할말이 없어지고만다.

왜 이럴가, 왜 이럴가.···

《벌써 창작을 시작했구만.》

영진이 그가 썼다지웠다 해놓은 종이장들을 넘겨다보며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춘희는 얼른 손바닥으로 그것을 가리워버렸다.

《하하··· 아직 볼수 없다는거군. 야, 나도 춘희동무처럼 시쓰는 재간이 있었더라면 이런 수골 하지 않는건데··· 하긴 창작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 하는거라더군.》

이렇게 말하며 영진은 책상우에 빨갛게 익은 큼직한 사과 세알을 슬며시 올려놓았다.

춘희는 심장이 후두둑 뛰였다. 얼굴이 그 사과알들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나이의 그 소박한 정이 처녀의 가슴에 꽉 차버렸던것이다. 녀자의 가슴은 그렇게 작고 여린것인지···

《고마워요!···》

춘희의 그윽한 눈빛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영진의 얼굴에 닿는 순간 마치 그 무엇에 찔리운 사람처럼 흠칫한다. 눈길이 허둥거린다.

《난 사실··· 저···》

영진의 주눅이 든 목소리···

《난 춘희동무에게 꼭 훌륭한 원가를 지어 장군님과 녀사님께 기쁨을 드려달라는··· 부탁을 하자고 왔소. 학원의 노래야말로 춘희동무나 나나 아니, 우리 아이들모두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참다운 삶을 누리고있는 자신들의 그 심정을 담을수 있는것이 아니겠소. 부탁이요! 》

비로소 그의 눈길이 춘희의 얼굴에 곧바로 와닿는다.

불이 이는듯 한 뜨거운 그 눈길이···

춘희는 입술을 감빨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부탁이 자꾸만 가슴에 쿵쿵 울려와 저도 모르게 두손을 가슴에 지그시 얹었다.

이때 문밖에서 인기척소리가 들리더니 리진영정치부원장이 방에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그 무슨 종이묶음이 두툼하게 들려져있었다.

《아니, 영진동문 왜 밤중에 여기와서 춘희선생을 방해하는거요? 안되겠소. 문밖에 무장보초를 세우던가 해야지···》

정치부원장이 웃음이 비낀 얼굴로 롱말처럼 했다.

《전 사실···》

《원가창작이 끝나면 춘희선생 만날 시간을 충분히 보장해주겠으니 지금은 제발 방해하지 마오. 안 그렇소? 춘희선생!》

《아이참, 정치부원장동지두···》

《하하··· 자, 이걸 받소.》

그가 들고온 종이묶음을 춘희의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아니, 이건 뭡니까?》

춘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학생들이 지은 느낌글들이요. 말하자면 학원에 와서 생활하면서 느낀 심정들을 적은것이란 말이요.》

《예?》

《내 오늘 학생들의 느낌글짓기모임을 조직했더랬소. 모든 학생들이 다 쓰도록 하였는데 채점도 하는겸 내 먼저 읽어보고 거기서 춘희선생에게 꼭 보여야 되겠다고 생각되는것들을 골라서 가져오는 길이요.》

《챠, 그러니 이걸 보면 우리 아이들의 심정을 다 알수 있겠구만요.》

영진이 정치부원장을 바라보며 환성을 질렀다.

정치부원장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이지 난 지금껏 그 애들의 심정을 다 안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이 글들을 보니 그게 아니더란 말이요. 얼마나 진실하고 생동한지 또 엉뚱하기도 하구··· 장군님께서 왜 몇몇 사람들만 모여서 그러지 말고 학원아이들의 심정도 들어보라고 하셨는지 정말 생각되는바가 많소.》

《고맙습니다, 정치부원장동지!》

춘희는 그의 뜻밖의 방조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서 한번 읽어보오. 우리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여기서 살고있는가를 잘 알게 될거요. 그 심정이 담겨진 노래야말로 명실공히 우리 학원의 원가가 아니겠소.》

정치부원장은 이렇게 당부하고나서 영진에게 말했다.

《자, 우린 물러가기요. 보라구, 춘희선생얼굴에 동물 시끄러워하는 빛이 어려있지 않나.》

그는 춘희쪽을 바라보며 한눈을 끔뻑해보였다.

《예, 나도 그걸 이미 느꼈습니다. 가겠습니다. 아, 정치부원장동지도 빨리 나갑시다.》

《하하···》

그들은 서로 밀고 밀리우며 문밖으로 나갔다.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웃음을 머금고 그들이 사라진 출입문쪽을 잠시 바라보고섰던 춘희는 정치부원장이 놓고간 학생들의 느낌글을 한장한장 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길게 쓴 글도 있었고 짧게 쓴 글도 있었다. 어떤것은 결의만 써놓은것도 있었다.

춘희는 학원아이들의 진실하고 생동한 마음이 비낀 구절구절들을 가슴에 새기며 읽어나갔다.

《···우리 학원은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어머님의 품입니다. 그 품에 안겨 너도나도 행복한 우리들은 모두 친형제입니다. 정말 우리 학원처럼 자랑높고 긍지높은 학원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만경대의 새 교사에서 공부를 하니 공부가 더 잘되는것 같아요. 김일성장군님께서 탄생하시고 어린시절을 보내신 고향집이 있고 나라찾을 큰뜻을 품으시고 군사놀이를 하시던 사연깊은 만경봉이 있는 만경대! 푸르른 소나무의 설레임소리도 흘러가는 대동강의 물결도 그날의 이야기를 전하여주며 날보고 공부를 잘하라고 속삭여주는것만 같아요. 장군님께서 날마다 지켜보시는것만 같아요.···》

《···만경대의 교실에 앉아 글줄을 읽어나갈 때면 저도 모르게 여기가 만경대가 아니라 저 백두산이나 만주의 광야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아버지들이 장군님을 모시고 싸운 항일의 그 싸움터! 바로 그 뜻을 배우라고, 그 뜻을 안고살라고 장군님께서 여기 만경대에 훌륭한 우리 학원을 일떠세워주시고 온갖 사랑을 다 돌려주시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만경대의 품에 안겨 다시 태여난 만경대의 아들딸들이다. 만경대가문의 자손들은 모두 고향집사립문을 나서 나라찾는 싸움의 길, 애국의 길을 걸으시였다. 만경대의 아들인 나도 그분들의 뒤를 따라 조국과 인민을 위한 혁명의 한길로 걸어갈것이다. 아버지처럼, 선렬들처럼!···》

춘희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격정이 솟구쳐올랐다.

학생들의 마음속에 간직되여있는 긍지로움, 깨끗함, 억세임, 웅심, 맹세··· 그 모든 감정이 얼마나 진실하면서도 구체적인가. 그들은 장군님의 고마움에 눈물만 짓고있지 않았다. 그들은 만경봉의 솔바람소리도, 대동강의 물결소리도 다 장군님을 잊지 말고 장군님처럼 살라는 조국의 당부로 듣고있으며 배움의 글발마다에서조차 장군님의 애국의 정신을 새겨안고 장군님의 뒤를 따라 혁명의 선렬들처럼 싸워나갈 불타는 맹세를 다지고있었다. 자기에게는 바로 그러한 의지가 없었다. 그러한 맹세가 없었다. 그러니 잔잔한 세계밖에 창조되지 못하였던것이다. 감격의 절절함만으로는 천만사람들의 격정과 격조를 다 담을수 없었던것이다.

불쑥 우리 학원의 노래에 만경대의 모습이 꼭 있어야 한다던 차영진의 그 말이 다시금 울려왔다.

만경대의 모습··· 만경대의 모습···

언제인가 교무부장 허상봉선생도 그런 말을 한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때 그 선생이 제가 쓴 가사를 들고 흥분하여 달려왔던 일이 생각났다.

물론 춘희자신도 만경대혁명학원의 노래인것만큼 만경대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온것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이 순간 춘희에게는 그 만경대의 모습이 단순히 만경대의 그 어떤 자연의 모습이 아니였음을 절감하였다.

아이들의 마음에 비낀 만경대의 모습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있지 않는가!

아이들의 마음에 비낀 우리 학원의 모습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있지 않는가!···

어쩐지 아이들의 그 마음이 자기의 심장 가까이로 다가오는듯싶어졌다. 아니, 아이들의 그 마음속으로 자신의 심장이 풍덩 빠져드는듯싶어졌다. 용암이 끓듯 가슴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세차게 끓었다.

그는 참을수 없는 흥분으로 하여 두눈을 감았다. 문학소녀시절처럼 눈만 감으면 늘 귀전에서 울리군 하던 그 어떤 시구절이 멀리에서 간간이 울리여왔다.

무엇일가? 《님의 침묵》의 한 시구절일가?···

아니였다. 그것이 아니였다. 춘희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자리잡고있던 《님의 침묵》은 이미 침묵을 깨치고 강렬한 웨침을 세상에 대고 터치고있었다. 그는 두눈을 번쩍 떴다. 먼곳에서 울리던 시구절이 가까이에서, 그의 심장속에서 울렸던것이다.

가볍게 떨리는 손을 흰 종이우에 올려놓았다.

그는 다만 그 심장의 목소리를 글로 적어나갔다.···

 

만경대 송림초목 우리 장군 지니여 푸르고
대동강 쪼각배 력사싣고 감돈다
아 경개절승 장군 나신 터전에
장엄토다 우뚝 솟은 만경대 우리 학원

 

투사들이 남긴 뜻 꿈속깊이 맺히고
시간마다 읽는 줄엔 백두산숲 어리고
글자 쓰는 붓끝에는 섣달만주 눈보라친다
아 애국렬사 고이 잠든 우리 학원

 

조국광복 페지마다 선렬들이 빛나고
민주건국 새 마당에 우리 갈길 찬란하다
나아가자 동무들아 장군님 기치들고
선렬들이 걸어온 싸움터로 나가자

 

춘희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영진동무! 원가를 지었어요. 아니, 우리 아이들의 그 마음이 끝내 우리 학원의 노래를 만들어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