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9

 

 

제 2 장

9

 

(손종준의 일지중에서)

 

1947년 7월 2일

영광스럽게도 김일성장군님의 사업을 직접 보좌해드리는 책임부관으로 다시 일하게 되였다. 그 첫 사업으로 장군님을 모시고 간리에 있는 학원림시교사작업장에 나갔다.

간리는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약 30리가량 떨어져있는 주변농촌마을이다. 리조 말기 이곳에는 새골(동로골과 강촌사이에 있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후 새골(사이골)을 한자로 옮겨 부르다나니 간리가 되고말았다. 비교적 발달된 교통망을 끼고있어 이곳의 그리 높지 않은 야산지대들에는 보안간부훈련소 제3소산하의 중대병영들이 배치되여있었는데 학원림시교사는 그중 공지가 크고 안침한 곳의 병영건물을 따로 내여 꾸리였다.

장군님께서는 세멘트가루가 뽀얗게 날리고 벽돌장들과 몰탈무지들이 사방 널려있어 발디딜 자리조차 변변치 않은 험한 작업장을 일일이 다 돌아보시면서 아이들이 림시로 생활할 곳이라고 하여 공사를 날림식으로 하지 말고 그들이 학습과 생활에서 자그마한 불편도 느끼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침실, 식당을 꾸리는 사업을 비롯하여 혁명가유자녀들을 공부시키기 위한 준비사업을 하루빨리 끝낼데 대하여 거듭 강조하시고 간리를 떠나시였다.

 

1947년 7월 6일

오전에 장군님을 모시고 만경대의 학원건설장에 나갔다.

김정숙동지와 어리신 우리 장군도 함께 가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한창 지대정리를 하고있는 작업장을 둘러보시며 학원터전을 잡아놓고 건설사업에 착수한것을 보니 학원청사를 빨리 지어 유자녀들을 공부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진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장군님의 그 모습을 우러러보노라니 희생된 동지들을 한시도 잊지 못해하시는 그 고결한 의리심에 깊이 머리숙어짐을 어쩔수 없다.

 

1947년 7월 22일

점심무렵에 문석오라는 조각가가 저택에 찾아왔다. 김정숙동지를 만나뵙자고 왔다고 하였다. 그분께서 간리에 있는 학원림시교사건설장에 나가셨다는 말을 듣고는 《전번에 왔을 때도 학원건설장에 나가시여 만나뵙지 못했는데 녀사님께서는 늘 학원에 나가살다싶이 하시는군요.》하며 무척 놀라와하였다. 무엇때문에 찾아왔는가고 물으니 그는 무슨 사연인지 선뜻 말을 떼지 못하고 갑자르기만 하더니 종시 후날 다시 보겠다며 돌아갔다. 아마 말 못할 그 어떤 소원이 있는것 같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저녁무렵에야 돌아오시였다. 로동자들과 함께 벽돌을 나르고 세멘트몰탈을 이기며 내부미장작업을 도와주셨다는데 그이의 옷자락에는 그때까지 벽돌가루며 세멘트혼합물이 묻어있었다. 김일성장군님의 걱정을 하루빨리 덜어드리시려는 김정숙동지의 그 불같은 마음을 과연 그 어느 누가 따를수 있으랴.

 

1947년 7월 25일

자정이 훨씬 지났으나 장군님의 집무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있다.

김책동지와 교육국의 남일부국장이 집무실에 들어간지도 1시간이 지났다. 또 혁명학원문제때문이다.

장군님께서 부르시여 방에 들어가니 어느 한 사람의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종준동무가 그 동무와 같이 사업해보았으니 그에 대해 잘 알것》이라고 하시며 그의 성격에 대해 물으시였다.

사업에서 책임성과 요구성은 높은데 성격이 좀 거칠고 세심하지 못한것 같다고 말씀올리자 장군님께서는 자신의 생각도 그렇다고 하시며 《남일동무, 보시오. 내 혼자의 견해만이 아니란 말이요. 그리고 그 사람은 교육사업을 해본적도 없소. 학원원장으로는 적합치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학원원장으로는 혁명투쟁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교육사업경험이 있고 유자녀들을 친부모처럼 잘 돌봐줄수 있는 사람을 선발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김책동지에게 강원도 교육부장이였던 리종익이란 사람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자신께서도 더 알아보겠다고 하시며 우선 학원림시교사가 기본적으로 다 꾸려진 조건에서 지체하지 말고 유자녀들을 불러 그들의 생활부터 안착시켜야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정말이지 장군님의 모든 관심은 온통 유자녀들에게만 가있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