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3

 

 

제 1 장

3

 

허분옥이 아들 심창완을 데리고 길주군 금천리를 떠나 친정집을 찾아온것은 나라가 해방되기 석달전이였다.

그의 친정은 중국 동북의 연길현 팔도구 동신평이라는 곳이였다.

남편을 잃고 막달찬 새 생명을 품은채 시집을 찾아 떠났던 그때로부터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온 맏딸(그의 형제들은 딸만 아홉이였다.)을 맞이한 그의 친정집에서는 온통 울음판이 터졌다. 다 죽은줄만 알았던 딸자식이 손자까지 앞세우고 나타났으니 어찌 그렇지 않았으랴.

《망할년, 소고집을 부리며 떠나더니만···》

허옇게 머리가 세여버린 아버지는 물기에 젖어 분명치 않게 들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맏딸의 기구한 운명이 자기때문에 빚어진것이라는 속박감으로 하여 그 누구보다도 속을 태워온 아버지였다. 자신을 달래이느라고 화김에 술을 마시고 취한 날이면 꺼이꺼이 호곡을 하며 《불쌍한 우리 분옥이, 이 몰인정한 애비구박에 탈가하여 그만 불귀의 객이 되였구나!》 하고 구들장을 치군 하던 아버지였다.

그러느라니 아직 환갑도 채 이르지 못한 나이에 벌써 백발로인이 되여버리고말았다.

분옥은 어찌 보면 어머니보다 더 세여버린 아버지의 그 흰 머리를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고역속에 흘러가버린 소녀시절···

머리우에선 물동이를 내려놓을새 없었고 여덟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때식을 끓이느라 언제 한번 부모의 잔정을 따뜻이 느껴볼새 없이 가버린 시절이다. 아버지는 품팔이를 떠나 살 때가 더 많았고 어머니는 자갈추기와 삯빨래로 자식들 입에 거미줄치지 않게 하느라 드바빴다.

게다가 줄줄이 딸만 낳다보니 무슨 심술이 동했는지 딸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구박은 가난보다 더 집안을 괴롭혔다.

분옥이가 열일곱살되던 해에 그보다 여섯살이나 우인 심병윤이라는 총각이 청혼을 해왔는데 그때에도 아버지는 제집도 없이 8촌집에 얹혀 곁방살이를 하는 뜨내기군에게 절대로 딸을 줄수 없다고 야단법석하였었다.

그러나 총각의 름름한 체구, 시원한 이마며 열정에 넘친 눈길, 비록 가난은 몸에 배였을망정 시대의 풍운을 안고 몸부림치는 남아다운 인품에 마음이 끌린 분옥은 딸이 많은 집에서 지지리 구박을 받으며 살기보다는 의지할수 있는 남자를 만났을 때 따라가는편이 나으리라고 결심하고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심병윤과 가정을 이루었다. 남편과 함께 생활하면서야 그는 어찌하여 조선사람들이 제 나라를 버리고 이국땅에 와서 가난에 쪼들려 살지 않으면 안되였으며 가난이 원쑤가 아니라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는 왜놈들과 악착스레 빼앗고 등쳐먹는 지주놈들이 불구대천의 원쑤라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구박도 숱한 딸자식들을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지 못하는 그 안타까운 한이, 그 무정한 세월에 대한 울분이 터칠데를 찾지 못해 그러는것이라는것을 리해하게 되였다.

참으로 남편은 그에게 있어서 단순히 남편이기 전에 아버지였으며 오빠였으며 또한 선생님이였다.

분옥은 비로소 다심한 사랑을 알게 되였고 세상을 알게 되였다.

그와 가정을 이룬지 얼마후에야 알게 되였지만 남편은 지하혁명조직 성원이였던것이다. 그는 자주 집을 나가 며칠씩 들어오지 않을 때가 드문하군 하였다. 때로 잠간 집에 나타나서는 미시가루와 음식감을 준비해달라고 복닥소동을 피우는가하면 어떤 때에는 풀을 한초롱씩이나 쑤어달래가기도 하였다. 남편이 하는 투쟁을 다는 리해할수 없었지만 이것도 혁명을 돕는 일이라고 웃으며 하는 그의 말 한마디가 새색시의 마음을 붕 뜨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러한 분옥이의 행복은 1년밖에 가지 못하였다.

1932년 10월 10일(그날은 다름아닌 남편의 생일이였다.) 회의를 간다면서 아침 일찌기 집을 나갔던 남편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말았던것이다. 남편과 함께 싸우던 박성철이 그에게 비보를 안고왔다.

그날 아래마을에서는 갓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에 입대시킬 청년들을 선발하기 위한 모임을 비밀리에 하고있었는데 마을에 박혀있던 밀정놈의 밀고로 불의에 왜놈《토벌》대가 달려들었다. 모임참가자들을 다 뒤문으로 빼돌린 다음 심병윤은 마지막 한장까지 문건을 소각하다가 놈들의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왜놈들은 그에게서 조직성원들의 피신처를 알아내려고 발로 차고 총창으로 찌르며 악착스레 고문하다가 도저히 비밀을 알아낼 가망이 보이지 않자 그를 모임을 하던 그 집에 가두고 휘발유까지 뿌려놓고 불을 달았다.

삼단같은 불길이 타래쳐오르는 집안에서는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혁명 만세!》의 웨침소리가 울려나왔다고 한다.

남편은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채 분옥의 곁을 떠나갔다. 목놓아울고 또 울었으나 슬픔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 자신의 몸안에서 태동하는 새 생명의 숨결만 아니였다면 그는 남편의 뒤를 주저없이 따라가고말았을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고싶어도 그럴수 없었다. 남편의 꺼지지 않은 한점 생명의 불꽃을 몸에 품은 유일한 녀성으로서 그럴 권리가 없었다.

분옥은 이를 악물고 자신을 이겨냈다. 화형터의 한줌 재가루를 남편의 유골삼아 주머니에 싸안고 그는 시집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한번도 만나본적 없는 시집식구들이였으나 이제 태여날 자식에게 제 혈기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결심을 더 굳혀주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딸의 결심을 반대해나섰다. 다른 리유는 다 불문에 붙이더라도 당장 해산달을 눈앞에 둔 몸으로 추위가 시작된 이런 날씨에 아낙네 혼자서 집을 떠난다는게 제정신이냐 하는것이였다.

그러다가는 너도 유복자도 한날한시에 제를 지내게 될터이니 가더라도 아이나 낳고 떠나라는것이였다.

분옥은 단호히 도리머리를 저었다. 죽더라도 기어이 심씨가문의 토방을 베고 죽겠다고 고집을 썼다. 이렇게 되여 찬바람부는 그해 11월 초순 허분옥은 무거운 몸을 끌고 시집이 있는 함경북도 길주군 덕인리를 찾아 동북땅을 떠났다.

길을 떠난 뒤 보름이 지나 길주에 도착했는데 읍에서 또 100여리나 되는 눈길을 헤치고 걷고 또 걸었다. 시집이 사는 곳은 앞뒤집사이가 5리나 되는 외진 산간벽촌인데 밤이면 범이 문가에까지 찾아드는 곳이였다.

왜놈들과 싸우겠다고 집을 떠난 후로는 생사여부를 알수 없었던 셋째(심병윤은 아들 4형제중의 셋째였다.)의 분골과 함께 그의 유복자를 품은 며느리를 뜻밖에 맞은 시집식구들은 오래도록 슬픔에 울고 또 울었다.

시집에서는 시부모와 시형제들이 모두 한집에 모여살았는데 식솔이 열다섯이나 되였다. 왜놈들이 화전도 일쿼먹지 못하게 눈을 밝히는통에 그즈음 시집의 생활형편은 더더욱 말이 아니였다. 바로 이 집에서 아들 창완이가 태여났다. 시집식구들은 죽은 나무에 움돋이라고 기뻐는 하면서도 갓난아기를 감싸줄 한쪼박의 천조차 없어 어쩔바를 몰라했다.

분옥은 남편이 덮던 이불거죽을 빨아가지고 나왔었는데 할수없이 그걸 잘라 애기옷을 지어입히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 북받치는 서러움속에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밤···

가뜩이나 쪼들리는 살림에 분옥이 모자까지 얹히여 그런지 시집형편은 갈수록 구차하기 이를데 없었다. 남정네들은 산림간수의 눈을 피해가며 화전농사를 지었고 녀인들은 산에 가서 닥지싹을 뜯어다가 짓이겨 범벅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나무를 해오군 하였는데 어린 창완이는 힘에 맞는것이 아카시아나무를 꺾는것이라 늘쌍 그의 손은 온통 가시에 찔려 피범벅이가 되군 했다. 그는 집안식구들의 사랑과 동정을 받으며 살았지만 제대로 먹지 못해 그런지 자주 골골 앓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분옥의 가슴은 칼로 저며내듯 저리고 아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픈것은 어린 자식의 가슴속에 나날이 차오르는 아버지없는 설음이였다.

시형제들이 산판에서 돌아오는 저녁이면 삽짝문을 열어젖힌 사촌형제들이 저마끔 《아버지―》하며 달려가 안기고 손을 잡고 들어서군 하는데 그들과 함께 달려가던 창완이는 혼자 우뚝 굳어져버리군 하는것이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가 팔을 벌리고 《우리 창완이는 나한테 오너라.》하군 하였지만 그 어린 가슴에 옹이진 피멍이야 어찌 풀릴수 있었으랴.

《엄마, 우린 왜 아버지가 없나? 나 아버지 있구파.》

《창완아!》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피눈물이 쏟아져내렸다.

불로 지진들, 칼로 저민들 어린 아들의 그 말보다야 더 아프고 쓰리랴!···

창완이 공부할 나이가 되였으나 《공산비적》의 가족이라 호적에도 올리지 못하고 숨어사는 신세였고 돈 한푼 없는 처지니 학교에 보낼 생각은 엄두조차 낼수 없었다. 그래도 죽은 남편앞에 조금이나마 떳떳하고싶어 이른새벽부터 온종일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뜯고뜯은 산나물을 팔아 창완이를 서당에 들여보냈다. 그 보잘것 없는 학비조차 제대로 낼수 없어 구박을 받으며 쫓겨오기가 일쑤였다. 하루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칠보산에 간적이 있었는데 그 준비로 돈 3원과 쌀 두되를 내라는것이였다.

온밤 슬피 울다가 꿈속에서조차 헛소리로 칠보산소릴 하더니 다음날에는 하루종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슴이 덜컥하여 온 산판을 찾아헤맸는데 땅거미가 질무렵 뒤산 솔밭속에서 죽은듯 잠들어버린 아들을 찾아냈다.

그를 깨워 물어보니 칠보산에 간 동무들이 너무 부러워 뒤산에 올라 그들이 간쪽을 바라보며 있다가 배가 고프기에 솔순을 뜯어먹었다는것이였다. 아마 정신없이 솔순을 뜯어먹고 그에 취해버린 모양이였다.

그해에 시집에서는 금천리에 세방을 내여 분옥이네를 따로 내주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젊은 녀자를 혼자 내놓을수가 없다며 어머니를 잃은 맏시형네 두 아들을 따라보냈다.

분옥이로서는 다 자란 시조카들까지 돌보는것이 더 큰 부담이 아닐수 없었지만 시부모의 뜻을 거역할수가 없었다.

삯짐으로 물고기함지를 이여날랐고 철도주변에서 탄덩어리들을 주어 팔았다. 고기장사, 두부장사, 사과장사, 땔감장사 등 못해본 일 없었다. 홀어머니의 고생살이를 체험하면서 남보다 일찍 철이 든 창완이는 아홉살에 정미소잡부로 들어가 온갖 잡일에 시달렸다. 눈치 빠르고 손발이 잰 그를 동정이나 하듯 주인은 정미소에서 쓸어모은 북데기를 자루에 넣어주군 했는데 그대신 높다란 기대꼭대기에 올라가 피대를 거는 일을 도맡아해야 했다.

어느날 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분옥은 다시는 아들을 정미소에 보내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젊은 녀인이 나이든 시조카들을 데리고 함께 있다고 비웃었다. 사실 조카들이래야 그보다 서너살아래의 장정들이였던것이다.

분옥은 지칠대로 지쳤다. 더이상 자신을 지탱해내기가 힘들었다.

하여 그는 산에 가서 돌버섯을 뜯어다 팔고 살림살이를 위하여 조금씩 모아두었던 돈으로 겨우 이부자리 한채를 마련하여 맏시조카를 장가보냈다. 그나마 첫날옷은 마련할길이 없어 남의 옷을 빌려입혔는데 이튿날에 옷임자네가 찾으러 오는통에 새색시앞에서 벗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렇게 시조카에게 살림을 시켜 세방집까지 넘겨주고나서 그는 창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떠났다. 시집에서도 이제 헤여지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영리별이 될수 있는 길이라는걸 번연히 알면서도 그들의 모진 고생살이를 덜어줄 아무러한 방도가 없는지라 차마 붙들념을 하지 못하였다.

《용서해라, 애어미야. 널 죽도록 고생만 시켰구나. 그래두 제 피줄이라고 찾아온 창완이를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공부시키지도 못하구 이렇게 되돌려보내고마는구나. 짐승도 제 새끼는 품어줄줄 안다는데 아마 이 천덕꾸러기집안에선 피줄을 잇는것도 푼수에 닿지 않는 일인 모양이다.

내 이제 저승에 가면 무슨 낯으로 저 창완이 애비를 만나겠느냐.

허지만 며늘애야, 너에겐 조금도 잘못이 없으니 아직 젊으나젊은 나이인데 이제라도 새 사람을 만나거라. 제 피줄 하나 품어주지 못하는 이 심씨집안과 인연을 끊고 어서 너희들 모자에게 좋도록 살아가거라.》

《아―버―님.》

분옥은 허연 수염발을 타고 락수물처럼 흘러내리는 시아버지의 눈물을 목덜미에 맞으며 그앞에 풀썩 엎드렸다.

그럴수 없노라고, 그 어디에 가건 절대로 심씨집안의 피를 바꿀수 없노라고 웨치고싶었지만 목이 꽉 메여 아무 말도 나가지 않았다.

하긴 이 리별의 마당에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에 닿으랴.

허분옥은 이렇게 시집을 떠났다. 그들모자는 이렇게 조국을 떠났다.

아, 뼈에 절도록 새겨진 그 가슴아픈 만단사연을 어떻게 한두마디의 말로 친정집부모님들에게 다 터놓을수 있단 말인가!···

《그 까닭을 구태여 캐물어선 뭘하겠수. 이 애의 정상이랑 저 창완이 꼴을 좀 보소그레. 약하디약한게 어디 사람모양이요? 헝겊막대기지.》

맏딸의 마음속 상처를 서둘러 헤집어놓을가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미리 침을 놓았다. 분옥은 자기의 심정을 헤아려주는 어머니가 고마왔다.

아닌게아니라 어머니의 푸념 그대로 쌓이고쌓인 고생살이의 그 자욱자욱은 창완이의 앙상한 가슴과 해진 베잠뱅이에 다 새겨져있었다.

분옥은 몇십번을 덧기워입힌 아들의 옷을 몸으로 감싸며 오래간만에 소리내여 울었다. 자식을 가진 어머니도 제 어머니앞에서는 여전히 자식인것이다. 그들모자간이 이렇게 동북에 온지 석달이 지나서 왜놈들이 망했다 . 그렇게도 악착하게 기승을 부리던 놈들이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쏘련군대의 진격으로 하루아침에 물먹은 담벽처럼 허물어지고말았던것이다.

만주땅에서도 왜놈들이 쫓겨났다.

이듬해에는 조국땅에서 토지개혁이라는것이 실시되고 농민들이 땅의 주인으로 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련이어 김일성장군님께서인민을 위한 정사를 펴시여 북조선방방곡곡에 사람답게 사는 별천지가 펼쳐지고있다는 희한한 소식들이 전해왔다.

허분옥은 기쁜 마음으로 그 소식들을 들으며 시집식구들을 생각했다.

열다섯이나 되는 대식솔이 심심산중의 한뙈기 화전에 명줄을 걸고 산나물과 풀뿌리를 뜯어먹으며 짐승처럼 살아온 그들이였다.

과연 그들에게도 사람다운 생활이 차례졌을가? 이제라도 창완이를 데리고 다시 시집으로 돌아가는것이 옳지 않을가? 왜놈세상에선 지지리도 못살고 째지게 가난하여 제 피줄 하나 품어주고 키워주지 못했지만 해방된 새세상에선 혈육의 정을 마음껏 나누며 살수 있지 않을가?

우리 창완이 아버지도 김일성장군님을 받들어 왜놈들과 싸우다가 그렇게 되였는데 제 아버지의 피줄을 이어주기 위해서라도 그분께서 계시는 조국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가?···

《아서라, 이번만은 소고집 쓰지 말고 이 애비의 말을 들어라. 예로부터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하물며 애아버지가 잘못된지도 10년이 썩 지나질 않았느냐. 그래도 이곳에선 네 남편이 불타죽는걸 함께 겪은 사람들이 많아 창완이를 혁명가의 자식으로 알고 돌봐주지만 그곳에서야 누가 그걸 알기나 하겠니. 고작해서 애비없는 자식이라고 동정이나 하겠지. 항차 너의 시집살림살이형편이 아무리 해방덕에 좀 펴였다 한들 그 대식솔에 죽물이나 푼푼히 돌아갈상싶으냐? 그러다간 창완이를 영 버리고만다, 버리고말아!》

그 곡진한 말속에 슴배여있는 자식에 대한 진정과 무시할수 없는 진실이 분옥이의 마음을 지그시 눌러앉혔다.

(아버지의 말씀이 옳아. 그곳에 창완이 아버지를 기억할 사람이 몇명이나 되랴. 제 피줄도 돌봐 못 주는 인정인데 하물며 남들이··· 그저 죽은 사람 하나 불쌍한 법이지. 이 어머니밖엔 우리 창완이를 키워줄 품이 없어.)

허분옥은 자꾸만 허전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아직 연약하고 어린 아들의 몸을 그 어떤 기둥삼아 꼭 그러안았다.

조국땅에서 지금 자기들을 찾고있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그는 알수 없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