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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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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흐릿하였다.

오전한겻 줄창 눈을 퍼붓고도 아직 직성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한낮이건만 날씨는 좀처럼 푸근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싸늘해진 찬기운이 차안으로 스며들었다.

안길은 저도 모르게 외투깃을 추켜올렸다.

《해만 넘어가면 인차 바람질을 할것 같습니다.》

누빈 솜옷을 입은 젊은 운전사가 옆에 앉은 안길을 얼핏 바라보며 근심스레 말했다.

안길은 차를 타고 먼길을 달려오느라 피곤이 가득 실린 두눈을 시창에서 떼지 않은채 고개만 끄덕이였다.

살이 빠져 관골이 두드러져보이는 그의 길쑴한 얼굴과 조금 두터울사한 입술은 추위에 얼어든탓인지 퍼릿했다.

《그전에 평양엘 들어서야겠는데···》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리는 운전사의 말이였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는 달리 지금 안길을 괴롭히고있는것은 단순히 몸을 얼구는 추위가 아니였다. 몸보다도 그의 마음을 얼게 하는것은 이번에 돌아본 보안간부훈련소 산하부대들의 생활실태였다.

지난해인 1946년 8월 중순 정규군대의 핵심이 될 부대들을 먼저 꾸릴데 대한 김일성동지의 가르치심에 따라 완전한 보병사단편제들로 조직된 보안간부훈련소의 제1, 제2, 제3소가 신의주, 강계, 회령, 라남, 정주, 평양 등지에 자기의 생활터전을 잡은지는 이제 겨우 석달남짓하였다. 조직되자마자 인차 겨울과 부닥치다보니 부대들의 생활문제에서는 곤난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걸린 문제는 군인들의 병실문제였다. 주둔지역 인민위원회들로부터 적산건물들을 넘겨받기는 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병실수요를 다 해결할수가 없었다. 아직 많은 중대들이 반토굴과 천막생활을 하고있었다.

안길이 새해 1월 정초부터 열흘가까이 실태료해를 하고 돌아오는 보안간부훈련소 제2소의 제4, 5, 6분소들과 포병분소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제2소 소장 강건과 5분소장 최용진이 병실조건이 어려운 구분대들에 땔감만은 우선적으로 넉넉하게 공급해주었다고 하며 왜놈들과 싸울 때에는 남의 나라 땅에서도 추위를 이겨냈는데 해방된 제 나라 땅에서야 왜 견디여내지 못하겠는가고 오히려 안길을 위안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지나가는 말처럼 《건설자재만 보장되면 그까짓 병실 짓는것쯤은···》하며 그의 눈치를 슬쩍 살펴보았다.

물론 안길은 그들의 말뜻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건설자재를 마련하자면 자금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건설자재보장이란 곧 자금보장을 의미하는것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형편에서 그 많은 자금을 어디서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지난해에 토지개혁과 중요산업국유화를 비롯한 제반민주개혁들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지만 워낙 사회경제적토대가 허약하고 또한 왜놈들이 파괴할것은 다 파괴하고 달아난탓에 아직 대부분의 공장, 기업소들은 생산은커녕 복구사업도 미처 끝내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빈터우에서 새 나라를 일떠세우는 일은 참으로 간고한 투쟁이였다.

어디서나 자금, 자금을 달라고 손을 내밀고있었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있는 안길이로서는 강건이나 최용진의 혹시나 하는 기대에 못들은척 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앞에서는 귀머거리가 될수 있다 쳐도 장군님앞에서야 어떻게 벙어리가 될수 있으랴. 실태보고를 구체적으로 드려야 할텐데 그러면 가뜩이나 나라일의 크고작은 모든 시름을 다 안고계시는 장군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무거우시랴. 그걸 생각하면 오한이라도 나듯 속이 떨렸다. 차가 평양시내에 들어설 때까지도 안길은 이런 심중에서 헤여나오지 못하였다.

가루개를 넘어선 군용《윌리스》는 벌써 평양공설운동장(오늘의 김일성경기장)옆을 지나 만수대언덕길을 톺아오르고있었다.

언덕길은 오고가는 차들과 사람들의 발길에 다져져 저으기 미끄러웠다.

차가 숨가쁜 용을 쓸 때마다 시꺼먼 배기가스가 뿜어져나왔다. 그나마 중턱에 이르러서부터는 공회전을 거듭할뿐 도저히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였다.

《제―길···》

어지간히 긴장해진 운전사가 황급히 제동기를 밟았다.

《윌리스》는 차체를 푸들푸들 떨며 흠칫흠칫 뒤로 밀리더니 가까스로 멈춰섰다. 재빨리 뛰여내린 운전사가 뒤바퀴들에 굄목을 가져다댔다. 이쯤 되면 차를 미는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안길은 견장없는 군용외투의 깃을 내리우고나서 천천히 차에서 내려섰다.

《저··· 우리 둘이선 안되겠습니다.》

차를 밀지 않으면 안되게 된것이 자기탓이기라도 한듯 운전사는 죄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만류하고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길손들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모양이였다.

때마침 대여섯명가량의 애젊은 청년들이 언덕길을 올라오고있었다.

책보같은것들을 하나씩 들고있는것으로 보아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같았다.

운전사가 다행스러운듯 그들을 향해 걸음을 내짚으려는데 불쑥 그들쪽에서 《아니, 저분이 안길동지가 아니야?》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옳구만!》

《틀림없어!》

학생들이 중구난방으로 웨치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리고는 안길에게 굽석굽석 인사들을 했다.

《누구들이더라?··· 허허··· 이거 난 잘 모르겠는데?》

안길은 낯모를 그들의 인사에 당황하여 저으기 미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자 일행중에서 제일 몸이 다부져보이는 한 청년이 한걸음 다가서며 씨원씨원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공업전문학교 학생들입니다. 안길동진 우릴 잘 모를수 있지만 우린 안길동질 잘 압니다. 지난해 보통강개수공사를 할 때 우리도 그 전투에 참가했거던요.》

그들이 자기를 알고있는 사연을 짐작할만 했다. 안길이 평남도당사업을 맡아볼 때 장군님의 과업을 받고 얼마간 보통강개수공사를 책임지고 일했던것이다.

이때 얼굴이 동그스름한 녀학생이 보매 다혈질일듯싶은 그 청년의 팔꿈치를 툭 쳤다.

《엉터리!》

《왜 그래?》

《감탕이나 좀 져나른걸 가지구 제가 무슨 항일전에라도 참가했던 사람처럼 전투요, 뭐요 하면서···》

그러자 그 청년은 픽― 하고 소리없는 웃음을 짓더니 숫보는듯 한 눈길로 처녀를 흘겨보았다.

《그게 왜 전투가 아니야?! 왜놈들이 십년동안이나 하다하다 못한 공사를 단 55일동안에 해제꼈는데! 아, 전투도 큰 전투였지.》

《하하···》

안길은 그의 말에 마음이 훈훈해져 오래간만에 큰소리로 웃었다.

《이 동무의 말이 옳소 . 그건 단순한 공사가 아니라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밑에 진행된 대자연개조전투였지. 허, 그러고보니 이거 내가 함께 싸운 전우들을 몰라봤구만. 정말 미안하오.》

안길이 이렇게 말하며 그의 한쪽어깨를 꽉 그러쥐자 그 청년은 단박에 입이 귀밑까지 벌어졌다. 얼굴이 동그스름한 처녀도 으쓱해진 그를 밉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자, 그런데 동무들, 난 오래 이야기할새가 없구만.》

안길은 아쉬운 눈길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번에도 누가 말해볼 사이없이 몸매 다부진 그 청년이 도맡아나섰다.

《걱정마십시오. 우리가 이 발바리차를 언덕우에까지 밀고가겠습니다. 자, 동무들···》

부글부글 피끓는 소리가 막 들리는듯싶은 정열적인 청년이였다. 다른 학생들도 그의 뒤를 따라 차에 달라붙었다.

《은주동문 이 책보들을 좀 쥐고있으라.》

《아니, 내가 남의 책보따리들은 왜 쥐고있어요? 나두 차를 밀겠어요.》

《아, 동무야 녀자가 아니야.》

《남녀평등권법령이 나온지 벌써 다섯달이나 지났는데 동문 아직두 몰라요?》

《됐어됐어, 언제 봐야 따벌 한가지라니까.》

《흥, 그럼 자긴 뭐 우쭐대는 수닭인가?!》

《뭐뭐?···》

《하하···》

《호호···》

그들사이에 늘쌍 오고가는 싱갱이질인지 다른 학생들은 그저 즐겁게 웃으며 힘주어 차를 밀었다. 어느새 차는 언덕우에 올라섰다.

《수고들 했소. 정말 고맙소.》

안길은 진심으로 그들의 수고를 치하했다.

《우쭐대는 수닭》이 그답지 않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안길동지를 다시 만나려면 어디로 찾아가야 합니까?》

《응?》

《이젠 평남도당에서 일보시지 않구 평양학원 원장으로 가셨다는 소릴 들었는데···》

《허, 이 친구 이제 보니 날 정말 잘 아누만. 하하···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업을 맡았소.》

청년은 다소 실망한듯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은 나도 군복을 입고싶어서 그럽니다. 앉아서 공부나 하자니···》

안길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욕심나는 청년이였다. 총명하고 열정적이고 힘이 넘쳐나보이는···

《군복을 입고싶다는거야 좋은 생각이지. 지금 정세가 긴장하오.

미국놈들이 저 38˚선너머에서 리승만을 부추겨 지난해초에 벌써 〈국방경비대〉를 조직한데 이어 얼마전에는 또다시 〈해안경비대〉라는걸 만들어냈소.》

안길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장군님께서 종합대학과 공업전문학교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크나큰 심혈을 기울이셨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안길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짐짓 어조를 바꾸었다.

《하지만 동무들은 공불 해야 돼. 새 조국건설엔 동무네 같은 기술인재들이 절실히 필요하거던. 공부를 하는것도 전투라고 생각해야 해. 자, 그럼···》

안길은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나서 차에 올랐다.

손목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5시가 넘었다. 그는 얼핏 뒤좌석에 놓인 농마가루가 들어있는 그리 크지 않은 자루에 눈길을 주고나서 운전사에게 말했다.

《장군님댁에 잠간 들렸다 가기요.》

《알았습니다.》

군용《윌리스》는 미끄러지듯 만수대언덕을 내려섰다.

조금후에는 중성리에 자리잡은 장군님의 저택앞에 멈춰섰다.

저택은 ㄷ자형의 단층건물이였다. 세멘트몰탈뿌리기를 한 검스레한 벽체며 재회색빛이 나는 기와를 얹은 지붕은 이 집이 지은지 20년은 실히 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스러운것은 집뜨락이 좀 넓은것인데 그 한가운데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가 무성한 가지를 펴고있어 퍼그나 그윽한 정서를 자아냈다. 지금은 가지마다에 흰눈송이들이 소복이 쌓여 고요한 정취를 한결 더 풍겨주는듯싶었다.

뜨락에 들어선 안길은 저도 모르게 가슴속에 스며드는 포근한 안정감에 잠겨 느티나무를 이윽토록 바라보고나서 농마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걸음을 옮겼다. 이때 뜻밖의 정황이 그의 걸음을 멈춰세웠다.

굴뚝모퉁이에서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뒤미처 《적들이 저기 숨었다!》하는 고함소리가 울려왔던것이다. 그가 예닐곱살정도 나보이는 두 사내아이의 모습을 미처 가려보기도 전에 《돌격앞으로!》,《만세!―》하는 새된 함성과 함께 눈덩어리들이 투닥투닥 날아왔다.

조무래기들은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면서 안길이쪽을 향해, 더 정확히는 바로 느티나무를 향해 눈덩이들을 마구 던졌다.

큼직한 눈덩이 하나가 그의 외투 앞섶에 툭 하고 달라붙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명소리는 느티나무쪽에서 먼저 들렸다.

《아야야···》

이어 깡충한 단발머리에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한 소녀애가 쿨쩍거리며 그쪽에서 나왔다.

《해해··· 나무뒤에 숨으면 못 잡을줄 알구?!》

두볼이 능금알처럼 빨갛게 얼어가지고도 두 사내녀석들은 좋아라 깔깔거렸다.

《이녀석들, 처녀애를 울려놓구두 좋아해?!》

안길은 소녀에게 다가가 눈을 털어주며 애녀석들을 향해 우정 눈을 부릅떠보였다. 새물거리던 까만 눈동자들이 딱 굳어졌다. 한 녀석이 당돌하게 대답했다.

《우린 지금 군사놀이를 하고있어요. 그 앤 돌가위보 해서 졌기때문에 〈적〉이 됐단 말이예요. 알지도 못하면서 씨.》

《뭐 군사놀이? 그런데 너희들은 뉘집 애들이게 여기 와서 그런 놀일 하는거냐? 여기서 놀면 못써.》

안길이 이렇게 사내녀석들을 타이르는데 뜻밖에도 방금전까지 콜짝거리며 그의 동정과 지원을 바라고섰던 소녀애가 오히려 눈이 동그래서 쌀쌀하게 물었다.

《아저씬 누구나요? 여긴 우리 집이예요.》

《?···》

안길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마 이때 김정숙동지께서 방문을 열고 나오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리해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아니, 안길동지가 오셨군요.》

안길을 알아본 김정숙동지께서 반가움에 넘쳐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시였다.

봄빛처럼 따스한 정찬 눈매며 연한 볼우물속에 함뿍 어린 곡진한 미소로 하여 그이의 모습은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해보였다.

안길은 그이의 두손을 부여잡았다.

《정숙동무,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라남에 가셨다더니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지금 막 오는 길입니다. 그래 장군님께선 건강하십니까?》

《예, 건강하십니다. 강건동지랑 그곳 동지들은?···》

《다들 잘있지요. 이건 그 동무들이 보내는 함북도 농마가루입니다. 장군님께서 국수를 좋아하시는데 잘 눌러 대접해주시우.》

이렇게 말하며 안길은 농마가루자루를 토방우에 꿍 하니 올려놓았다.

《원, 그렇다고 안길동지가 이런걸 다 들고다니시다니요.》

안길은 고마움과 미안스러움이 어린 김정숙동지의 말에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털어놓고말해서 정숙동무가 누르는 국수는 내가 늘 곱배길 하군 하는데 나도 무슨 인사가 있어야 할게 아니요.》

《호호··· 안길동진 위탈때문에 얼마 잡숫지도 못하면서···》

김정숙동지께서는 차츰 말끝을 흐리시였다. 안길을 바라보는 그이의 눈에 근심의 빛이 어리였다.

《어쩐지 안색이 좋지 않군요. 더 상하신것 같애요. 그렇지 않아도 장군님께서 안길동지가 추운 날씨에 외지에서 고생이 많을거라고 걱정하시댔는데···》

《허허··· 이 안길이 언제 앓아눕는걸 보셨습니까?》

그는 애써 김정숙동지의 눈길을 피하였다. 그리고는 방안쪽을 넌지시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거 집안이 너무 조용하다? 우리 장군이 어디 가셨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자기의 건강소리만 나오면 늘 화제를 피해 달아나군 하는 그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다가 그만 가볍게 웃으시였다. 김책동지며 안길, 최현을 비롯한 항일투사들이 다들 이렇게 어리신 아드님을 부르다나니 이제는 《우리 장군》이라는 부름이 호칭처럼 되고말았던것이다.

《이번 양력설에 만경대 조부모님께 세배드리러 갔다가 너무 보내기 섭섭해하시길래 그냥 남겨두고 왔습니다.》

《예. 할아버님, 할머님이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 장군을 무릎에 척 앉히면 아마 한 10년은 더 젊어지실겁니다. 암, 그렇지 않구요. 하하···》

안길은 소리내여 웃었다. 느티나무가지마다에 무겁게 쌓인 소담한 눈송이들이 포실포실 떨어져내릴만큼 큰소리로 웃던 그는 여직껏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자기를 쳐다보고있는 아이들을 보자 웃음을 뚝 그쳤다.

《참, 그런데 이 애들은 누굽니까? 처음 보는 아이들같은데···》

《아니, 그러니 아직 통성을 못하셨군요. 얘들아! 어서들 인사드려라. 이분은 너희 아버지들과 함께 싸운 안길아저씨란다.》

그이의 말씀이 끝나기 바쁘게 아이들은 기다리고있은듯 굽석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안길은 놀랐다.

《그러니?···》

《이 앤 김룡수동무의 딸이구 사내애들은 박창성동무와 신재호동무의 아들들이랍니다. 어머니들마저 잃고 여기저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고있는걸 얼마전에 황동무가 혜산에 갔다가 찾아서 데려왔어요.》

김정숙동지의 목소리는 저으기 갈려드시였다.

《그렇군요.》

안길은 그제서야 사연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것이 다 리해되였다.

아이들이 어찌하여 이 저택에서 뜨락이 좁다하게 뛰여놀수 있었는지, 어찌하여 여길 《우리 집》이라고 당돌하게 말할수 있었는지.

한껏 인정에 주렸던 저 어린것들이 장군님과 녀사의 그 따뜻하고 다심한 사랑을 어찌 친어머니의 젖줄기처럼 정신없이 빨아들이지 않았으랴. 그 누구의 설명이 없이도 장군님과 녀사께서 저 애들을 어떻게 품에 안아 보살펴주셨으리라는것을 다 알수 있었고 저 애들이 이 뜨락에서 어떻게 그분들의 옷자락에 묻어돌아가리라는것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남달리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그 천품들이야 어디 가랴. 산에서 싸울 때조차 아동단원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것을 아끼시지 않던분들이 아니신가!···

안길은 깊어지는 생각으로 하여 아이들의 등을 말없이 어루만져주었다.

《자, 너희들은 어서 집안에 들어가 젖은 머리칼이랑 손이랑 아래목에 말려라. 그러다가 감기들라.》

김정숙동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이들은 참새들처럼 조잘거리며 오구작작 집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애들이 참 귀엽군요.》

아이들의 뒤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던 안길은 잠시 주저주저하더니 힘들게 말을 이었다.

《정숙동무, 내 애들 소리가 나온김에 말 좀 하랍니까?》

《예, 어서 하세요.》

다소 의아함이 비낀 그이의 대답에 안길은 왜서인지 눈길을 떨구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느때없이 진중했다.

《물론 나도 장군님께서와 정숙동무가 희생된 전우들의 자식들때문에 몹시 마음쓰고계시는줄 모르는바는 아닙니다. 해방된 조국땅에 나온 첫날부터 아니, 산에서 싸울 때부터 동지들의 자식들 걱정을 오죽이나 하셨습니까. 여북했으면 장군님께서 개선연설을 하시고 스무해만에 고향 만경대를 찾으신 자리에서 거기에 혁명가유자녀들을 위한 학원을 세워야겠다고 말씀하셨겠소. 하지만···》

안길은 눈길을 들었다. 그가 몹시 힘들게 말하고있음이 알렸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다른 일은 다 뒤전에 밀어놓더라도 당장 정규군도 꾸려야지, 공화국도 창건해야지··· 정말 산같이 크고 무거운 력사적과업이 다름아닌 장군님의 두어깨에 실려있는데 우리가 대중소사를 잘 가려서 받들어드려야지요.》

《···》

《정숙동무, 이 안길이 직통배기라구 나무람 마십시오. 우리야 모든 희생을 다 각오하구 혁명에 나선 사람들이 아니요. 아직 개인들의 상처까지 가셔줄 형편이 못되지요. 먼저 간 동지들도 이걸 리해할겁니다.》

《그렇다고 형편이 될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기다릴순 없지 않겠어요.》

《정숙동무두 참, 그렇다구 그 애들을 다 찾아서 이 뜨락에서 키울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아, 여기가 뭐 보통살림집입니까? 황동무도 한심하지, 글쎄 애들을 찾아 넌떠덕 정숙동무에게 맡겨놓으면 어쩌는가 말입니다.》

안길은 열이 올라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였다.

《아이, 목소릴 좀 낮춰주세요. 아이들이 듣겠습니다.》

《예?》

안길은 김정숙동지께서 황급히 두손을 저으며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추시는통에 그만 굳어져버리고말았다.

《저 애들은 고생고생하며 살아오다나니 눈치가 여간 아니예요. 애들이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그렇지 않아도 황동무가 자기가 키우겠다는걸 내가 우겨서 우리 집에 데려왔어요. 그 동무야 얼마 안있으면 해산달이 되여오는데 애들까지 어떻게···》

그이께서는 여전히 조용조용한 어조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리고··· 안길동지가 말씀하시는 뜻은 잘 알겠습니다. 제 꼭 장군님의 사업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안길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저 애들을 내가 데려가게 해주십시오.》

《아니, 안길동지가 어떻게?···》

《무슨 수가 나겠지요. 당장은 우리 보안간부훈련대대부(오늘의 인민무력부 전신)합숙에서 잘 키우도록 할터이니···》

《그렇게는··· 안됩니다. 아마 저보다도 장군님께서 더 승낙하지 않으실겁니다.》

《예― 에?》

안길은 묵묵히 고개를 떨구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너무나도 명백한, 백번이면 백번 다 그렇게밖에는 달리 될수 없는 일이였던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옆에서 그냥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바야흐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더없이 중대하고 책임적인 위업들이 놓여있는 이때, 그 모든것이 오직 김일성동지의 현명하고 정력적인 령도에 의해서만 비로소 이룩될수 있는 이때 유자녀들문제로 하여그이의 위대한 사업에 지장이 되고 부담이 되여서야 되겠는가!···

그는 힘껏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물기를 머금고 바라보는 김정숙동지의 절절한, 애원에 가까운 간절한 그 눈빛앞에서 안길은 리성으로 다잡았던 자신의 마음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져내림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더는 그 문제에 대하여 말할수 없으며 또 말해서도 안되리라는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눈앞에서 미세한 유리가루같은것들이 반짝거렸다.

그것들은 별찌가 들여박히듯 얼굴에 달라붙었다. 느티나무가지마다에 쌓여있던 흰눈이 마구 흩날리기 시작했던것이다.

《허, 끝내 바람이 터지는군. 이거 잠간 들렸다 간다는것이 너무 지체했나봅니다.》

안길은 당혹한 심정에서 벗어나고싶어 서둘러 자신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