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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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칭얼거리며 어머니의 젖을 파던 진철이도 잠들고 방안은 괴괴해졌다. 진호는 네활개를 활짝 내뻗치고 쌕쌕 코를 골고있으며 진철이는 어머니젖가슴에 코를 박은채 이따금 작은 입을 오물거린다. 꿈에서도 어머니의 젖을 빠는 모양이다.

해종일 두 아이를 거느리고 부엌일에 시달리던 녀인은 아예 젖가슴을 아이에게 내맡긴채 자리에 눕자마자 김빠진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버렸다.

필네도 참을수 없이 피로가 엄습해왔다. 오늘은 수수가 떨어져서 하는수 없이 로동자들이 이밥 먹게 됐다고 좋아했더니 웬걸 김장로는 기어코 현성에까지 나가서 수수쌀을 구해온 다음에야 점심을 짓게 했다. 그러느라고 점심이 늦어져서 볶아치는바람에 이일저일 다 밀려나서 저녁설겆이는 밤이 깊어서야 하게 되였다.

김장로는 금천동에 와서 돈을 좀 모으기 시작하더니 점점 돈맛을 들여서 푼전을 두고 아득바득하였다. 그는 한때 예수를 믿었다는 사람으로서 체통도 큼직하고 말이나 행동거지도 제법 점잖게 하였지만 갈수록 구린속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밥장사만 하는것이 아니라 광산물계에 어두운 최주사를 끼고다니며 덕대노릇까지 겸해하였다. 쉰명남짓한 로동자치고 그에게 빚 안진 사람이 없으며 또 간죠날마다 그에게 전표값 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로동자들이 다 잠든 깊은 밤까지도 김장로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혼자 장부책이머 전표쪽지들을 주런이 펼쳐놓고 떼각떼각 수판알을 튀기는 소리가 방금까지 들려왔었다. 저도 남과 같이 부자가 돼보겠다는 검질긴 욕심때문에 살이 내릴 지경으로 무섭게 이악을 떠는 그마저 잠들어버리니 길다란 밥집은 코고는 소리, 가위눌린 소리, 잠꼬대소리가 울릴뿐 괴괴해갔다. 잠을 자면서도 편안한 휴식 대신 지옥의 꿈이라도 꾸는모양 고통에 이지러진 그 숨가쁜 소리를 들을 때 필네는 자고싶은 생각이 싹 없어졌다. 저 역시 저렇게 이를 갈고 잠꼬대를 하며 뒤치락거릴것인가. 진호 어머니는 자기더러 잠자는 모양이 더 곱다고 말하군 하였지만 나라고 왜 꿈속에서 악을 쓰며 고통을 겪지 않을것인가.

머지 않아 나귀울음소리가 어둠에 잠긴 광야에 처량하게 울려퍼질것이다. 그때면 일어나서 새벽조반을 지어야 한다. 낮대거리가 미처 잠깨지 못한 얼굴로 간데라가 서로 바뀌였다고 옥신각신하며 나간 다음 인차 밤대거리가 돌아온다. 그러면 또 그들의 밥을 챙겨야 하고 이어 설겆이할 사이도 없이 최주사와 김장로의 늦은 조반시중을 들어야 한다. 지금 눈을 좀 붙이지 못하면 그 다음은 다시 캄캄한 밤이 올 때까지 자리에 앉아볼 사이도 없다. 어서 잠들어야 한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필네는 무서웠다. 사방에서 자기를 덮치려고 다가드는 악귀같은 형상들이 컴컴한 구석에서 솟아올랐다가 눈을 부릅뜨면 사라지군하였다.

이러한 밤이 시작된것은 상기란놈이 밀정이라는것을 알게 된 그날저녁부터였다.

그 이튿날 필네는 겁이 났지만 그놈이 방에서 어물거리는 짬에 마침 우물가에 세수하러 나온 윤원구에게 짧게 귀뜀했었다.

《상기를 조심해요. 그놈이 신개척에 있던 하늘소와 한패예요. 하늘소도 여기 와있어요.》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전에 밥집문전에서 상기란놈이 선하품을 하며 나타났었다. 윤원구도 제꺽 눈치를 알아채고 무슨 밥투정 비슷한 소리를 한마디 하면서 사라졌다. 그날부터는 상기의 눈초리가 더욱 검질기게 파고드는듯하였다.

그런데 오늘아침에 윤원구는 밤대거리에서 나오듯말듯 자기를 우물터로 불렀다. 필네가 조심스러워 사위를 두리번거리니 상기는 굴속에서 연장망태를 잃어버렸기때문에 그것을 찾느라면 한참 있어야 나올것이라고 하였다. 그놈 몰래 자기와 무슨 이야기를 하자고 일부러 그런 수를 꾸민것 같았다.

《필네.》

하고 윤원구는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나한테 뭐 감추는것 없어? 집안이랑 부모형제들에 대해서말야?》

필네는 가슴이 덜컥하였다. 여태 아무한테서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적이 없었다. 자기가 부모들을 하직하게 된 래력은 오빠가 유격대로 떠나면서 정해준것이고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되는 오누이만 아는 약속이였다. 만일 그 약속을 어기고 친한 사이라고 해서 사실을 터놓기 시작하면 어느새 말이 새여나가서 큰일날뿐아니라 오누이가 다시 만나지도 못한다는것이였다.

《그건 왜 갑자기 물어요?》

필네는 상대가 속을 터놓고사는 사이인데다 요즘 그의 거동에서 느껴지는것이 있었기때문에 긴장되는 한편 뒤흔들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눌러잡고 되물었다.

《필네 나를 믿고 말하라구. 필네를 찾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

《나를 찾는 사람이 누구예요?》

필네는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였다.

《그건 캐여묻지 말고··· 한마디만 대답하라구. 오빠가 있지?》

필네는 흠칫해서 고개를 들었다. 윤원구는 이윽히 자기 눈을 들여다보았다. 필네는 허둥지둥 눈길을 떨구었다. 그런데 윤원구는 검질기게 다그쳐물었다.

《유격대에 갔지?》

그때 시원히 그렇다고 대답했어야 되지 않았을가?

필네는 몸을 뒤져누우며 호-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그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질문이였다.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라 허둥거리는데 윤원구는 그냥 자기를 지켜보았다. 그때 마침 상기란놈이 연장망태를 둘러메고 달려들더니 《춘길이 이새끼 나오라! 너 무슨 심보로 남의 연장을 감추었어!》 하고 소리쳤다. 네활개를 뻗고 잠자던 춘길이가 부시시 일어나자 곧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윤원구는 하는수 없이 싸움을 말리러 가면서 잘 생각해보고 그러면 그렇다고 귀뜀해달라고 말하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해야 옳은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윤원구가 좋은 사람인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무엇때문에 그런것을 물을것인가, 또 어디서 그런것을 알아냈을가? 가뜩이나 상기며 최주사며 김장로며 거기에 가끔 리호철이도 나타나고 그 하늘소같이 생긴놈까지 기여든판에 남의 집안에서 유격대에 간 사람이 있다는것을 알아내서는 어찌자는것일가? 자기가 혹 그런 눈치를 어디서 챘다면 감싸주어야 할것이 아닌가···

이 답답한 심정을 누구에게 탁 터놓고 의논이라도 하고싶었다.

필네는 또다시 호하고 한숨을 내쉬며 모로 돌아누웠다. 열어놓은 바라지를 통하여 푸릿하게 채색된 달빛이 방안을 들이비친다. 아마 지금쯤 보름가까운 달이 삼선봉꼭대기에 걸려있을것이다.

오빠는 지금 어디 있을가? 오빠도 김일성장군님을 따라 무산땅에 진출하여 내가 임을 이고다니던 그 산판들을 밟았을것인가? 참을수 없이 오빠가 그립고 보고싶었다. 외로움이 탄력에 넘치는 몸을 좀먹고있다. 때로는 까닭없이 울고싶어져서 외롭게 나무그늘에 앉아있으면 밥집의 식솔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실없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처녀가 시집갈 때쯤 되면 공연히 우습기도 하고 까닭없이 눈물이 나기도 한다는것이다.

정섭의 할아버지가 자기를 보내면서 타관만리에 홀로 가서 외로와 어찌 살겠는가 걱정을 하더니 그때는 미처 깨치지 못한 그 말뜻이 이제야 알려진다. 정말 홑이불을 입에 물고 흐느끼고싶도록 외롭다. 동기가 그립고 마음 터놓을수 있는 친지가 그립다.

필네는 살그머니 허리를 일으켜 머리맡에 있는 자그마한 제 보짐속에 손을 들이밀었다. 어둠속이지만 얼마 더듬지 않아도 곧 보드라운 촉감을 가려냈다. 소리 안나게 명주수건을 뽑아낸 필네는 그것을 품안에 꼭 그러쥐고 다시 눈을 감았다. 싱글싱글 웃는 정섭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헤여질 때 로자돈을 쥐여주며 성난듯이 어마어마하게 찌프리던 얼굴도 그려졌다. 할아버지에게 드리고 온 이 수건이 이렇게 자기한테로 되돌아올줄이야 어떻게 알았으랴. 정섭이가 손질했다는 그 우물의 물맛을 다시한번 맛보고싶었다. 그런 물을 한사발 마시기만 하면 답답하고 외로운 가슴이 시원히 열릴것도 같았다.

아- 유격대, 유격대··· 유격대만 만나면 오빠도 찾고 정섭이도 볼수 있으련만···

구르릉- 별안간 먼데서 천둥소리같은것이 울리면서 구들이 흔들흔들하였다.

오늘밤은 남포도 유난스럽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며 돌아누웠다. 그런데 잠시가 못지나 따따따 하고 자지러지는 금속성이 울려왔다. 그제야 아까 울린 소리가 남포소리와는 어딘가 다를뿐아니라 의례 울려야 할 삼선봉의 관방갱쪽과는 반대편인 청지동 어방에서 울려왔다는 생각이 났다. 관방에서 울리는 남포라면 줄남포가 터지는것이요, 또 대체로는 새벽에 터지지 이런 재밤중에 남포를 놓는 일은 드물다.

필네가 이상한 생각이 나서 귀를 기울이는데 한번 터져오른 그 금속성은 차츰 더 커지면서 넓은 범위로 번져갔다.

틀림없는 총소리였다. 필네는 총소리가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하고 베개우에서 머리를 절반쯤 들면서도 아직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소린지 판단이 안가서 어둠속에 눈만 반짝거리고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라오?》

김빠진듯한 숨소리가 뚝 멎더니 진호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앉으며 눈을 두릿두릿하였다.

필네는 대답을 않고 일어나앉아 한오리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를 쓰다듬어넘기며 총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슴이 저도모르는사이 활랑거리기 시작한다. 저게 총소리가 아닌가. 무산땅에서 듣던것과 같은 그 총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

웃간에서 누가 문을 박차고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필네는 감전된듯이 명주수건을 구겨쥐고 신을 끌며 나섰다.

《아이구 아지미, 어딜 가자고 그러오?》

진호 어머니가 허둥지둥 문지방에 한팔을 내짚으며 말리려 하였으나 필네는 어느새 삼선봉마루를 향해 내달리고있었다.

산꼭대기에는 벌써 달리는 사람이 많았다. 바깥에 나서고보니 총소리는 더 뚜렷했으며 그것은 아무리 세상일에 어두운 사람에게도 청지동에서 그 무슨 전쟁이 붙었다는것을 느끼게 했다. 청지동에는 지금 왜놈의 군대가 꽉 들어찼다고들 한다. 그러니 전쟁을 한다면 그 왜놈의 군대가 하는것일것이다. 왜놈의 군대가 누구를 상대하여 총을 쏠것인가. 그것은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청지동에 유격대가 온것이 틀림없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유격대를 만나고야말리라. 필네는 명주수건을 품에 건사한 다음 이를 악물고 달렸다.

삼선봉에 올라가니 밤이면 등불이 눈부시게 반짝거리던 청지동의 밤풍경은 간데없고 캄캄한 광야가 가로누워있는데 거리의 변두리쯤 되는곳에 불이 붙어 활활 타번지고있었다.

총소리는 그냥 자지러진다.

《유격대다!》

웬 사람이 머리에 동였던 수건을 활 풀어서 공중에 대고 한번 내리치더니 내뛴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섰다. 곡괭이를 둘러메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곡괭이를 나무뿌리에 대고 힘껏 내찍어던지고 맨손으로 달리기도 한다. 옜다 보아라 나는 간다는 태도다. 대개 굴속에서 일하다가 나온 사람들이였다.

필네도 질세라 달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간다. 해란강상류의 물줄기와 맞다드는 진펄에 이르자 금천동의 사람들이 다 내려오는듯 사람들의 흐름이 사태처럼 쏟아졌다.

필네는 진펄에 발이 빠졌다. 진창이 발목을 꽉 물고 놓지 않는데 마음은 그냥 급하여 모지름을 썼더니 신 한짝이 빠져나갔다. 본시가 제발에는 큰 사내들 고무신이였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여벌이 없는 신이였다. 비로소 당황해난 필네는 한걸음 되돌아와서 진창속에 손을 박고 신을 더듬어찾았다.

《이게 누구요? 빨리 걷소.》

진펄인데다 좁은 오솔길이라 당장 사람들이 겹치고 늘어서니 추상같이 다그쳐댄다. 필네는 입을 꼭 다물고 신을 찾아냈다.

《아니, 그 무슨 처녀가 길에 나서서 그래, 어서 길내라구.》

《누군지 활 밀어넣어버려!》

자칫하면 주먹이라도 휘두를것만 같은 기세다. 필네는 깔끔한 눈으로 그 사람을 한번 쳐다본 다음 진흙묻은 신을 한손에 쥔채 내달렸다.

《이 처녀가 어디로 가느라고 이래?》

밀어넣으라고 하던 젊은이가 어느새 나란히 서며 혼자소리처럼 물었다.

《싱거운 소리 작작하고 제 갈길이나 가요.》

《야, 이것봐라. 꽤 맵짠데.》

그 청년이 얼떨해서 이렇게 중얼거리자 그뒤를 따라오던 중년사나이가 옆을 지나치면서 일부러 필네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알만하다는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라, 김장로네 식모로군. 구정물 뒤집어쓰기전에 어서 뛰자구.》

필네는 촉망중에도 우스워 혼자 웃으며 숨이 가쁘도록 달렸다. 강을 건느면서 다시 신을 신었다. 물이 쿨쩍거리는 신은 큰길에 나서자 인차 황토먼지를 빨아들여 또다시 두툼한 진창이 신에도 발에도 매달렸지만 필네는 다시는 신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멎었는지 총소리는 가뭇없이 사라지고말았다. 그런데 달려가던 군중들이 뿔뿔이 강가의 곡식밭이며 풀밭으로 홑어져달아나며 《왜놈이다! 왜놈이다!》 하고 웅성거리였다.

필네도 하는수 없이 풀밭에 몸을 쪼그리고앉았다. 잘못하다가는 또 신사동에서처럼 그놈들에게 길이 막힐수 있다. 초조감에 가슴이 죄여서 금시 입술이 초들초들 말라든다.

길우에 총을 뽑아든 왜놈의 군대 십여명이 뒤걸음질쳐온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풀밭에 숨어있는 사람을 띄여봤는지 돌아서서 냅다뛰기 시작하였다. 그놈들이 내뛰자 저 웃쪽에서 또 대여섯놈이 주먹을 부르쥐고 달려온다. 무슨 영문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다.

이때 왜놈들이 달려가는 썩 뒤쪽에서 총소리가 터져올랐다. 악-하는 비명이 들리더니 방금 그쪽으로 뛰여갔던놈들이 허둥지둥 되돌아오다가 강물속으로 첨벙첨벙 뛰여들어갔다. 왜놈들은 아래쪽으로 내뛰다가 거기서 지키고있는 유격대한테 맞다들린게 틀림없었다.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는 유격대였다. 아득히 거리쪽에서 만세소리가 울려온다. 청지동에 불이 켜졌다. 유격대가 왜놈들을 다 소탕한것이 틀림없었다. 군중은 거리쪽으로, 거리쪽으로 줄달음을 쳐갔다.

《청지동에 김일성장군님께서 오셨다!》이러한 웨침이 전류와 같이 군중의 물결을 타고 전해져왔다.

서낭당언저리에서 그 소리를 얻어들은 필네는 치마자락을 걷어잡고 달렸다. 사람들이 밀린다. 낮에도 인적이 드물던 서낭당근방에 사람사태가 나서 먼지가 자욱하게 솟아올랐다. 필네는 또 신이 벗겨졌다.

이번에는 진창속도 아니기때문에 허리만 굽혀도 되고 제창 발끝으로 더듬어찾아도 될것이다. 그러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오셨다는데··· 그까짓 사내고무신···》

필네는 남자들 틈을 비집고 쏜살처럼 달렸다.

거리는 집집이 불을 내걸어서 대낮처럼 환한데 전날 사람들을 환락의 세계에로 부르던 청등홍등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중심을 썩 지나서 보니 옛날 수백명 가병을 거느린 토호가 살았다는 큰집이 불타고있었다. 그 집에는 널직이 토담을 둘러치고 네귀에 포대가 있었는데 아마 처음에 천둥소리같이 울리던 소리가 그 포대를 폭파하는 소리였던지 그렇게 엄엄해보이던 루다락이 폴싹 무너져내려앉았다.

왜놈군대는 바로 그 집에 둥지를 틀고있었던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비비대고 밀치면서 손을 흔들기도 하고 무엇이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짐을 둘러멘 사람들이 대렬을 지어 숲쪽으로 빠져나간다.

필네는 이 사람 등을 밀치고 저 사람옆을 빠지고 하면서 가까스로 길복판까지 나왔으나 영문을 알수 없었다.

《유격대는 어디에 있어요?》

어떤 중년사나이가 열광적으로 손을 흔드는것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에, 한 댓살만 젊었어도··· 이 사람들, 우리 몫까지 해야 하네.》

그 사람은 왕청같은 소리를 했다. 아마 짐을 둘러메고 따라가는 사람가운데 아는 얼굴이 있는 모양이다.

《유격대는 다 갔나요?》

필네는 안타까와 재차 물었다.

《유격대? 아니 이게 김장로밥집의 식모처녀가 아니야?》

그제야 다시 돌아보니 아까 진펄에서 신때문에 꾸물거린다고 지청구를 대던 바로 그사람같다.

그는 필네의 발을 내려다보더니 씩 웃었다.

《또 신을 잃었군. 큰 처녀가···》

《유격대는 어디 있어요?》

《유격대는 벌써 왜놈들을 다 족치고 떠나가는길이라네. 김일성장군님께서 연설하시는걸 못봤지? 나도 한걸음 늦어서 앞은 못 들었는데 참 시원하게 말씀도 잘하시더군.》

《장군님께서는 어디에 계세요?》

《아마 저 맨앞에 계시겠지. 참 생각했던것과는 달리 젊으시더군. 장군님께서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총잡고 싸움에 나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청지동, 금천동의 청년들이 저렇게 너도나도 유격대에 참군하겠다고 따라나서지 않았나.》

이미 대렬은 지나가고 군중들이 와- 밀려간다. 필네는 그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였다. 깽깽이통을 둘러멘 김인수였다.

필네도 무작정 뒤를 따랐다. 거리를 벗어나자 군중들은 차츰 떨어지고 앞에는 그쯘하게 대렬을 지은 유격대에 참군하겠다고 따라나선 청년들 수십명이 걸어갈뿐이였다.

필네는 멀찍이 뒤를 따랐다. 이제는 한결 가슴이 진정된 대신 현실적인 걱정이 이것저것 살아났다. 차츰 대렬은 숲속으로 깊이 들어가는데 신 한짝을 잃었으니 어떻게 따라갈가 하는것이며 밥집에 수수쌀을 미리 담가놓지 못했는데 진호 어머니가 그런줄 알고 여느때보다 일찍 일어나주겠는지 하는따위들은 떠올랐다가도 인차 사라지군하는 잔걱정들이지만 암만 둘러봐야 유격대에 들겠다는 사람들가운데 녀자는 한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꽤 유격대에 받아주겠는가 하는것이 그중 큰 걱정이였다. 오빠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풀리겠지만 어디 가서 말을 붙여볼것인가.

유격대는 점점 깊은 숲속으로 빠져들어간다.

해살이 숲속에까지 퍼져들어올무렵 유격대는 행군을 멈추고 꽤 넓은 림간공지에서 휴식에 들어갔다.

필네는 어느 진대통옆에 홀로 앉아 두손바닥에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겼다. 발이 몹시 아프다. 신을 신고 따라온 청년들도 물집이 생겼다고 야단들을 하는데 맨발로 왔으니 아플수밖에 없다. 아픈것은 참으면 되겠지만 아까 얼핏 만져보니 발바닥이 헤여져서 피가 나오는 모양같다.

필네는 몹시 쓰리고 아팠으나 눈을 꼭 감고 어떻게 먼저 유격대에 말을 붙여볼것인가 하는 생각만 하였다.

《동무는 어떻게 왔어요?》

이런 녀자목소리에 필네는 눈을 뜨고 올려다보았다. 총을 어깨에 걸친 녀자군대다.

《아이.》

필네는 너무 반가와서 벌떡 일어났다.

《동무도 입대하러 왔어요?》

《난 유격대에 들러 왔어요. 김일성장군님께서 왜놈들과 싸울 사람은 다 유격대로 오라고 연설하셨대요.》

녀자군대는 방그레 웃었다.

《그런데 왜 여기 혼자 앉았어요? 우리 있는데 가자요.》

녀자군대는 필네의 손을 잡아이끌었다.

《무슨 짐같은것은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자다가 총소리를 듣고 그냥 뛰여왔는데··· 금천동은 질러가도 십리가까이나 돼요.》

《그래요?》

녀자군대는 놀랍다는듯이 한걸음 비켜서서 필네를 새삼스럽게 뜯어보더니 새끼손가락을 까부려붙인 손을 들어 군모채양밑으로 흘러내린 굽슬굽슬한 머리를 조용히 모자속으로 쓸어넣었다.

《장하군요.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나 혼자예요. 오빠가 있지만···》

《아니 그런데 다리는 왜 절어요? 저런, 신은 어떻게 했어요?》

《달려오다가 길에서 잃었어요.》

《찾아신고와야지, 애들같군요. 유격대에서는 무엇보다도 발건사를 잘해야 해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발이 유격대의 날개라고 말씀하셨어요.》

금숙은 처음보는 그 억실억실하고 깔끔해보이는 처녀에게 무엇인가 친절을 베풀고싶은 생각이 나서 숙영지로 가다가 말고 제 배낭을 끌렀다. 그는 한쪽무릎을 꿇고 차곡차곡 속옷들이며 학습장들을 챙겨넣은 짬을 헤치며 아직도 선채로 있는 필네에게 말했다.

《녀자몸으로 산에서 살며 싸운다는것이 헐치 않아요. 유격대에 들 생각은 전부터 했어요?》

《전부터 유격대에 들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난 그저 철이 들면서 유격대를 뭐라고 할가··· 꼭 우리 집같이 생각하고있었어요. 난 고아랍니다. 오빠 한분밖에 계시지 않는데··· 오빠가 유격대에 있어요.》

《그래요?》

금숙은 배낭 맨밑창에서 예비로 가지고 다니던 로동화 한컬레를 꺼내들고 배낭끈을 조이며 무심히 물었다.

《오빠가 누구예요?》

《한태혁이라고 하는데 벌써 입대한지 네해나···》

금숙은 벌떡 일어났다. 눈이 황황 불탔다.

《그럼 동무가, 동무가···》

금숙은 입술을 파들파들 떨며 필네의 두손을 더듬었다. 로동화는 풀밭에 나떨어지고 금숙은 필네를 와락 그러안았다.

《동무가 필네지? 내가 얼마나 필네를 찾았는지 알기나 해···》

필네는 자기 볼에 줄줄이 떨어져내리는 그 녀대원의 눈물을 느끼면서 까닭도 모르고 마주 그러안았다.

두 처녀는 차겁게 가들어들었던 외로움이 뜨거운 눈물과 함께 녹아내리는것을 느끼였다. 동시에 폭풍같은 격정의 뒤를 따라 마치 졸음기와 같이 나른하고 아늑하고 따뜻한 정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흘러드는것을 느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