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8

 

8

 

중일전쟁발발 2주년에 즈음하여 조선주둔군사령관 나까무라대장은 기자단과 만나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

유럽대전은 무력전과 경제전이 중요한것이였고 사상전은 오늘날처럼 별로 대단치 않았다. 그래도 그 전쟁은 5개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걸렸다. 오늘의 《지나사변》은 무력과 경제전 이외에 여러가지 착잡한것이 많은데 더우기 곤난한것이 공산주의사상이··· 각처에 퍼져있고 또한 구미 각국··· 이 간섭을 하고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문화전이다.···

국민은 사변기념일을 당할 때마다 의기를 다시 새롭게 하여 여태까지의 곤난은 차츰 정상화시켜서 국민전체가 한걸음 더 약진해야 한다.···

 

그러면서 나까무라는 그 누군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시켰다.

 

《남자는 한번 싸우다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두번 싸우다 주저앉아서도 안된다.

세번 싸우다 주저앉아서도 안된다.

칼이 부러지고 화살이 진하여도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가루되거든 그만둘지어다.》

 

이 피비린내 풍기는 음산한 말을 통해서도 느낄수 있는바와 같이 일제는 사처에서 몰리여 허덕이면서도 악을 쓰고있었다.

나까무라는 중일전쟁발발기념일이라 해서 저들의 고충을 중일전쟁과만 관련시켰지만 실상 일제는 사면팔방으로 얻어맞고있는 셈이였다.

쥐새끼가 정 급해나면 고양이에게도 접어든다고 한다.

일제의 발광상은 거리에, 마을에, 사람들의 얼굴우에, 도처에 반영되여있다.

정거장마다 출정군인들을 환송하는 눈물젖은 군가소리가 울리였으며 7월 7일 당일날은 인민들을 모조리 《신사참배》에 내몰았다. 낮에는 기발행진, 밤에는 초롱행진으로 거리마다 들썩 끓었다. 무슨 큰 승리나 한듯이 떠들어대면서도 그들의 말마디들은 걸핏하면 배를 가른다느니 죽어서 벗꽃으로 피여난다느니 《정국신사》의 귀신이 된다느니 하는 넉두리로 변했다.

자동차는 휘발유로부터 아세틸렌으로, 다시 목탄으로 개조되고 학생들의 교복은 검정색으로부터 보위색으로 변하였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통행까지 금지시켰다. 통제품의 종류는 점점 늘어나서 허리 굽은 늙은이조차 많지 못한 여생에 《게다》를 끌고다니게 되였다.

거리에서는 일체 화려한 색조가 축출되였다. 남자들은 모두《국민복》으로, 녀자들은 《몸뻬》로 갈아입었다.

7월 7일 전후해서는 국경경비가 더욱 삼엄해졌다. 얼마전 총독부 경무국장이란자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일행군을 해간 갑무경비도로를 시찰하고 일후에 다시 또 제국의 체면을 짓밟는 그러한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만단의 대책을 세우느라고 돌아친 결과 지금 한여름의 뙤약볕아래 숨죽이고 누운 그 길우에는 사람은커녕 개새끼 한마리 얼씬 안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현지의 군대와 경찰당국에서는 수많은 경비인원들과 순찰조들을 도로연선에 내보냈다.

이 무시무시한 국경경비를 돌파하기 위하여 장경수와 류진옥은 그럴듯한 변장을 하고나섰다. 류진옥은 새하얀 모시치마저고리에 양산을 쓴 세도가집 새색시차림을 하고 장경수는 그 하인행세를 하였다. 도중에 순경을 몇놈 만났으나 그들의 거동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어떤놈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하삼수평어방에 와서야 큰길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섰다. 그제야 장경수는 트렁크를 풀밭에 내려놓더니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갑자기 웬일이예요?》

진옥은 깔끔해서 물었다.

《아이구 배야.》

장경수는 꺼이꺼이 갑자르며 말을 더듬었다.

《그자식들 눈을 부릅뜨고도 청맹과니노릇을 하던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웃겠소. 야, 참 진옥동무가 그렇게 연극을 잘 놀줄은 몰랐는데··· 하하하.》

《그만두세요. 나는 다시는 이런 행색하지 않겠어요.》

진옥은 눈에 눈물이 그렁해서 자기의 화려한 옷가지들을 피뜩 굽어보고 진저리치듯 외면하였다.

장경수는 눈이 퀭해졌다.

《이거 또 우스운 소리 하는구만. 그건 또 어떻게 하는 소리요?》

《아침에도 말하지 않았어요? 아무리 공작이지만 하필 이런 변장을 할 필요가 어데 있어요?》

진옥은 애원하듯이 장경수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하고 장경수는 딱 잘라 말했다.

《이게 뭐 장난인줄 아오? 다 어마어마한 국경경비를 빠져나가는 전술이란말이요. <지하공작상식>에서 보지도 못했소. 특별히 적의 경비가 심한곳에서는 될수록 적의 조사대상밖의 신분으로 가장하는것이 좋다고 되여있단말이요. 사령관동지께서 할빈에 가셨을 때 하루 15전어치씩 강낭지짐을 잡수시면서도 백계로인들의 고급호텔에 드셨다는 이야기도 못들었소?》

《왜 그 이야기만 해요? 사령관동지께서 푸르허근방에 계실 때 머슴살이하신 이야기는 왜 안해요?》

진옥은 이렇게 맞섰으나 이미 내우길 힘은 다 빠져서 장경수의 성난듯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다 알면서 고집이거던. 참 녀성들이란···》

장경수는 일부러 못마땅한듯이 벌떡 일어나서 저쪽으로 걸어간다.

진옥은 호-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장경수는 사령부를 떠나와서 그지간에 수많은 일을 제꼈다. 풍산에 가니 정지성은 어느 산골 간이학교선생노릇을 하면서 사처의 혁명조직에서 운영하는 야학들을 지도하고있었다. 그는 진옥이와 함께 자체로도 훌륭한 교양자료들을 만들어 간이학교의 등사기로 밀어내고있었다. 그가운데서도 특히 인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것은 김일성동지의 혁명적가정과 투쟁경력을 소개한 혁명활동략력소책자였다.

장경수도 그것을 보고 기가 막히다고 감탄하였다. 그래서 세 사람이서 그 소책자를 넉넉하게 찍어 풍산지구뿐아니라 국내의 광범한 조직에 배포하기로 하고 진옥이와 함께 풍산을 떠날 때 아예 트렁크에 가득 넣어가지고 나섰던것이다. 진옥이에게 임무를 주어 혜산으로 보낸 장경수는 곧장 정지성이 대준 줄을 타고 서두수발전소공사장에 갔다. 거기에는 종시 신사동 처서판에서 쫓겨난 만호네 형제가 있었다. 그들 역시 정지성이네 공작조가 침투시킨 핵심이였다. 그들을 통하여 이미 장악된 조직핵심들과 사업도 벌리면서 새로 많은 로동자들을 조직에 흡수하였다. 그리하여 짧은 기간에 벌써 원봉, 소도, 서안 등에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렸다. 앞으로 사령관동지의 결론을 받아 이 세개 조직들을 하나로 묶은 조국광복회서두수지회를 내오게 될것이였다.

한편 진옥은 그지간에 주로 혜산에서 공작하였다.

그는 흥아목재상주인이 정귀하로인이라는것을 알고있었다. 논밭전지를 사들이는 그 집 며느리역할을 하러 간다는것이 중요한 공작상임무이기는 하지만 그때문에 그 그리운 로인들앞에 나서기가 얼마나 거북했는지 모른다.

사실 세월이 험악하지 않아서 진옥이 그가 그처럼 민감한 가슴에 총을 품고 싸움길에 나서지만 않았다면 아마 착실한 며느리가 됐을수도 있는 그 집 문전에서 정귀하로인 역시 진옥이를 놀라서 맞이하였지만 그들은 지금은 며느리도 시부모도 아닌 혁명동지간이였다.

그리하여 사령관동지께서 가르쳐주신대로 과업만 충실히 집행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정귀하로인은 진옥이가 자기앞에 며느리명색으로 나타난 그 좋은 기회를 그냥 스쳐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날 뜻밖에도 옥암동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꺼번에 나타났을 때 진옥이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무산지구를 다녀가신 뒤에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온 집안이 다 무고하다는 소식은 그를 더없이 기쁘게 했지만 부모들이 혜산장을 보러왔다고 하면서 사흘씩이나 돌아갈 생각을 안하고있는데는 여간 거북하지 않았다. 공작상일로 바깥에 나가있을 때는 모르지만 집에 들어가면 정귀하로인량주는 말할것 없고 지성의 누이까지 《아가, 아가》하며 안방구석에 모셔놓고 그냥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형편인데 거기에 부모들까지 나타나서 서로 《사돈, 사돈》하고 부산을 피우며 돌아가는바람에 진옥은 부끄러워 숨도 못쉬고 얼굴도 들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흘동안은 얼마나 행복한 나날이였던가.

장경수와 진옥은 사령관동지께서 제시해주신 방향에 따라 조직핵심들과 면밀히 짜고 흥아목재상이 돈더미에 올라앉았다는 소문이 퍼지게 땅사들이는 거래를 트기도 하고 산판흥정도 벌렸으며 한편에서는 경찰, 관청의 우두머리들에게 줄을 놓아 정귀하로인과 그 일가의 래력을 더욱 그럴듯하고 든든하게 만드는 일련의 공작을 진행하였다.

그런 과정에 뚱딴지같은 군청 호적계에 있는 허줄한 서기나부랭이로부터 정귀하로인의 뒤를 캐기 위하여 리호철이가 화룡에서 건너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경찰계통에 연줄을 놓아 다시 확인해보니 모두 사실이였다. 그놈이 새로 알아낸 흥아목재상의 자료를 이미 그 어디에 보고했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만일 정귀하로인의 생활경로를 계속 더듬어올라간다면 어차피 재미없는 일이였다. 그럴 가능성은 많았다. 그래서 옥돌골공작조에 련락을 띄우고 13도구의 류창표와 백바위골의 곽병철이에게도 그놈을 경계할데 대한 통보를 보냈다.

그럭저럭하는 사이 장경수도 서두수지구에서 공작을 끝마치고 혜산에 와서 함께 사령부에 가지고 갈 물자들과 출판물, 보고자료들을 준비하였다. 장경수는 혜산에서의 공작정형을 료해하고 아주 멋이 있게 됐다고 하면서 함께 떠나자고 하였다. 그것이 마침 7월 7일께였다.

특별경비중인 국경은 빈몸으로도 돌파할 길이 없었다. 진옥이는 특히 하삼수평일대의 조직들을 돌아보고 그길로 마천령산줄기를 타고 넘어가면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조직들에 김일성장군님의 혁명활동략력소책자를 비롯한 교양자료를 전하여야 하였다. 그래서 장경수가 궁리해낸것이 그 행장이였던것이다.

하삼수평에서 강건너 세진평방향으로 더 좀 올라가면 츠렁바위가 강심으로 내뻗친 가운데 채양버들이 무성한 후미진 강굽이가 있었다. 하삼수평의 조직에서 매생이를 거기에 대기시켜놓기로 되여있었다.

이 일대는 장경수에게나 진옥이에게나 낯익은 통로였다. 위험물자나 비밀문건을 가지고는 다리도 건늘수 없고 나루배도 탈수 없었다. 장경수는 최근에 내내 하삼수평의 조직의 방조하에 날이 어두워서 그 매생이를 타고 세진평쪽으로 건너가는 경로를 택하군 하였다. 세진평에는 기왕부터 그와 련계를 가지고있는 낚시군 령감이 있어서 아무때나 매생이를 건사했다가 때를 봐서 다시 하삼수평으로 건네다주군 하였다.

그들은 강가의 채양버들숲에 들어서자 긴장했던 마음이 누그러져서 그지간에 미처 아퀴짓지 못한 공작상 이야기랑 나누며 한 트렁크속에 꾸려넣었던 짐을 갈라놓기 시작하였다.

매생이는 아무래도 날이 완전히 저물어야 띄울수 있을것이고 진옥이도 이제는 밤이 깊어야 움직일수 있었다.

《이건 재봉침바늘이예요. 따로 잘 건사해요. 여느 바늘하구 섞지 말구. 그리구 이건 군수관동지한테 주지 말고 정숙동무나 옥금동무에게 바로 전해줘요.》

진옥은 트렁크를 헤쳐놓고 올망졸망한 꾸레미들을 책보우에 갈라놓으며 말하였다.

《내 다 알만하오. 그거 뭐 조진범동무한테 안갔다고 소문이 안날것 같아서 그러오.》

《말만 내보세요. 내 어떻게 하든지 련락을 해서 장경수동무를 고립시켜놓을테니.》

진옥은 깔끔하게 돌아보며 이렇게 위협하였다.

《히야, 녀대원들한테서 고립되면 야단은 야단이지. 내 비밀을 지킬테니 걱정마오. 자, 그건 이리 주오. 중요한것은 이거란말요.》

장경수는 등사원지꾸레미를 따로 뭉그려 가슴속에 깊숙이 찔러넣으며 말하였다.

짐가운데 태반은 인쇄물이였다. 신문과 잡지들은 사령부로 가는것이였고 등사물들은 태반이 진옥이가 가지고 가야 할 선전물, 교양자료들이였다.

짐을 갈라싸는 일은 인차 끝났다.

장경수는 갈밭에 숨겨놓았던 매생이를 밀어내여 기슭에 띄우고 자기 짐을 옮겨놓았다. 이제 어둠이 설핏하게 깔려들면 노를 배길판이다.

《이제는 가보는게 어떻소?》

장경수는 할일이 없어져서 새삼스럽게 진옥을 바라보니 아무래도 그 녀인의 행장이 이 거칠은 강기슭풍경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것을 느끼고 좀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직 밝은데 어디를 가겠어요.》

진옥은 이렇게 말하면서 불안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무엇인가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표정이였다.

《하긴 아직 좀 이를것 같기도 하구만. 그래도 그렇게 척 차리고나서면 감히 어떤놈이 시비를 걸겠소. 그건 그런데.》

장경수는 진옥올 안심시키려 하였으나 까닭없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 역시 무엇때문인지 가슴속이 편안치 못하였다. 적후든 밀림속이든 아무데나 제집 안마당 거닐듯하던 그로서는 이런 일이 거의 있어본적이 없었던것이다. 그것이 진옥이에게도 인차 감촉되였다.

까닭없이 마음속이 초조하고 불안할 때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더라는것은 오랜 지하공작원들이 자주 하는 말이였다. 그게 다 과학적인 세계관으로 무장 못됐기때문에 그런것이라고 그때는 웃어주었지만 정작 자기가 겪고보니 간단치를 않다. 이런데서 무슨 사고라도 나는 날이면 앞뒤로 련계된 중대한 고리가 다 튀여난다.

셈평좋은 장경수도 안절부절못하여 허리를 일으켰다.

그것은 까닭없는 일이 아니였다.

발자국소리가 울려온다. 잡초속에 묻힌 오솔길로 풀대를 밟아헤치며 오는 그 발걸음은 몹시 급하였다.

두사람은 얼른 사위를 더듬어보았다. 더듬어보나마나 이제는 어디에 몸을 숨길만한 장소도 시간도 없을만큼 벌써 발자국소리는 지척에 다가왔다.

그 어떤 위험이 닥쳐왔다는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차라리 두사람은 태연해졌다.

장경수는 진옥에게 눈을 끔쩍하였다.

진옥이도 방금전의 흔들리던 마음을 딴 사람처럼 눌러버리고 그러한 외양에 어울리게 고개를 끄덕거려보인 다음 그 화려한 양산을 펼쳐서 얼굴을 가리웠다.

이윽고 당꼬바지를 입고 《국민모》를 쓴 사나이가 양복저고리를 어깨에 걸치고 땀을 훔치며 나무그늘속에 나타났다.

양산기슭으로 얼핏 눈길을 돌려본 진옥은 흠칫하더니 얼굴이 핼쑥하게 질리였다.

그는 허둥거리며 손가방을 열었다.

《웬일이요?》

장경수가 낮으나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호철이예요. 저놈을 내 손으로 처단해버리겠어요.》

《정신있소?》

장경수는 다가오는 사나이쪽으로 몸을 돌려대며 수군수군 속삭였다.

《절대로 덤벼서는 안되오. 트렁크속에 있는 장군님의 략력을 생각하오. 여기서 총소리만 울렸다가는 모든 공작은 다 파탄이요.》

진옥은 손가방고리에 갖다댄 손을 가늘게 떨며 입술을 감쳐 물었다.

《연극을 계속해야 하오.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마님행세를 하오. 저놈은 내가 처리하겠소.》

이러는 사이 리호철이도 강가에 서있는 두사람을 띄여보고 우뚝 멎어섰다.

호철이가 바로 이 시각에 여기에 나타나게 된것으로 말하면 그로서는 아무리 그럴듯한 리유가 있다 하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숙명적인것을 느끼게 하는 점이 없지 않다.

호철이는 시마끼로부터 당장 흥아목재상의 아들이라는 사나이의 신원을 확인할 과업을 받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는것은 밝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남대천가의 고향에 그의 누이라는 녀자가 나타나서 땅을 사들이고있다는 통보가 왔다는것이였다. 시마끼의 어조로 미루어보면 김일성유격대의 동태와 기도를 알아내기 위하여 공산당내부에 줄을 뻗칠데 대한 추궁을 심하게 받는듯하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사실을 확인한 기초우에서 흥아목재상의 아들을 본격적으로 써먹을 생각인 모양이였다.

하기는 호철이자신도 말하였지만 그 경력가운데서 좌익독서회에 가담했다는것은 이러한 사업에서는 대단히 주목되는 점이였다.

자칫하면 독서회시절의 동무가운데서 유격대에 가있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는것이다.

때마침 호철이에게는 자기 집에도 들려갈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강을 건너왔던것인데 혜산에서의 일은 별로 품을 들이지 않고도 시마끼가 대단히 흡족해할 보고자료를 손쉽게 걷어쥘수 있었다. 아버지는 땅을 사들일뿐아니라 목재도매상을 더 크게 벌려서 차츰 군용달에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했는데 그 기업이 장차 얼마나 뻗어나갈지 모르겠다는 소문이였고 직접 그와 거래하고있는 거간군들을 만나보아도 대단한 실력이라고들 하였다.

이제 강을 건너가서 흥아목재상이 한꺼번에 목돈을 걷어쥐였다는 자료만 확인하면 될판이다. 혜산에서 걷어쥔 자료를 청료리점의 끄나불을 통하여 시마끼에게 보낸 그는 그길로 대마록구로 서둘러 떠났다. 흥아목재상이 크게 목돈을 번것은 대마록구였다. 평소에 호철이는 삼장다리로 강을 건느군하였다. 오늘도 그럴 작정으로 떠난길인데 큰길을 가자니 볕이 따가와 길도 지를겸 그늘이 짙은 이 오솔길을 택하였던것이다.

강가에 서있는 두사람을 보자 호철은 턱을 끄떡거렸다. 그는 대뜸 그들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자는 밀수군이라고 짐작하였다. 저 사치한 트렁크속에는 틀림없이 귀금속이나 아편덩어리가 들어있을것이다.

(흥, 행장은 괜찮게 차렸는데··· 하기는 모르지. 요즘은 큰 관리나 부자들치고 밀수를 안하는자가 없으니 혹시 만만찮은 인물일수도 있지. 그러나 어딜···)

호철은 속으로 코방귀를 뀌며 뚜벅뚜벅 강가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달고칠것인가 어쩔것인가 하고 속궁리를 하였다.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여기서 잡아족쳐봐야 경찰에 넘겨주고 나는 빈손 털고 나앉아야 할판인데 무슨 재미가 있는가. 모처럼 배도 있으니 얼려서 같이 타고가는것이 좋다. 강만 건너놓으면 그때는 별문제지. 저 양산속에 가리운 미인이 어느놈의 첩인지 그때 까밝혀도 늦지는 않을것이다.)

《강을 건너가실 손님인가요? 좀 이르지 않을가요?》

호철은 매우 싹싹한 말투로 마치 가까운 친지에게 의논을 걸듯 말을 붙이였다.

녀인은 양산으로 얼굴을 더 좀 깊이 가리우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하인같은 사나이가 난처한듯이 우물거리더니 떠듬떠듬 말을 받았다.

《주인나으리께서 저 강건너에서 아씨를 찾으시기때문에 갑자기 떠난 길이 돼서··· 증명서를 해가지고 떠나자면 시간이 퍽 걸려야 한다던데요. 저 짐을 보시면 알겠지만 가져가는것은 별로 없는뎁쇼.》

이건 완전히 무슨 세관이나 경찰 앞에 가서 하는 말투다.

《허허허, 걱정 마시오.》

호철은 하인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양산 저쪽에 숨어있는 녀인을 향하여 말하였다.

《나도 별로 버젓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건 좀 가져갈것이 있어서 이리로 왔는데 정 곤난하지 않으면 나도 배신세를 좀 지게 해주십시오. 삯전은 후히 치르겠습니다.》

《그럼··· 저···》

여전히 양산은 아무런 동정도 없고 하인같은 사나이가 말을 받았다.

《그래, 나도 그렇고 그런 사람이야.》

호철은 하인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그제야 하인도 마음이 놓이는지 얼굴의 주름살을 펴며 어줍게 웃었다.

《그런걸 난 또··· 간이 콩알만해졌어요. 아씨, 마음을 푹 놓으십시오. 이 선생께서도 몰래 물을 건너가는 손님같사와요.》

양산이 가볍게 쳐들린다. 호철은 저도모르게 허리를 낮추었으나 종시 턱밖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그스름하고 흰 그 턱을 통해서만도 그 녀자의 비상히 아름다운 얼굴의 전모를 어느정도 머리속에 그려볼수 있었다. 그럴수록 청초한 모시치마저고리를 몹시도 강조해주는 그 얼룩덜룩 화려한 양산을 와락 잡아헤치고 미인의 생동한 얼굴을 빨리 보고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배우에 올라앉은 다음에야 가능할것 같다.

그럭저럭 흥정은 쉽게 락착된 셈이라 호철은 날이 완전히 어두울 때까지 기다린다는것이 참을수 없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는 담배 한대를 붙여물고 하인에게도 한대를 내밀었다.

《어때, 이제는 배를 띄울 때가 되지 않았나?》

《글쎄요. 저쪽은 별일 없겠지만 이쪽은 좀 이를것 같은데요.》

《일이 없어. 호랑이 날고기 먹는줄 누가 모르나. 내가 이 근방 경찰과는 안면이 통하니 떠나보자구.》

《글쎄요.》

하인은 황송한듯이 담배가치를 두손으로 가리워들고 아씨의 눈치를 살핀다. 철저한 주종관계다. 그러고보면 그들의 말과 같이 대안에 그 녀자의 남편이 와있고 그것이 대단한 세도가나 명문가의 주인일수도 있을것 같았다.

양산이 약간 제껴지면서 녀자는 고개를 돌린채 하늘을 올려다본다. 큼직하게 쪽진 머리가 여름날의 잔광을 받아 빛을 뿌린다. 산밑과 숲속은 이미 어두워졌고 강우에도 설핏하게 안개같은 어둠이 깔려들어 강심은 부잇해보였지만 하늘가에는 아직 노을이 타고있었다.

《좋도록 하여라.》

녀인은 다시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우며 짤막하게 말했다.

그것은 놀랄만큼 낮고 짧았지만 대단히 아름답고 위엄에 찬 목소리였다.

호철은 틀림없는 세도가집의 그것도 첩따위가 아니라 바로 본댁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떠나보겠사와요.》

하인은 이렇게 말하며 채양버들에 매인 바줄을 풀었다.

호철은 얼핏 그 말이 좀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어쩐지 저혼자 떠나는 인사같이 들렸기때문이다. 그래서 녀인쪽을 돌아보았으나 그 녀자는 등을 반쯤 저쪽으로 돌려대고있었다.

가는것이 녀자가 아니라 하인만이라면 이처럼 맹랑한 일이 어데 있는가. 그러나 따져물을수도 없는 일이고 또 설마 그러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여 하인이 권하는대로 배전에 한발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하인은 녀인도 트렁크도 돌아보지 않고 벌써 배를 밀어내는것이였다.

어디에 자리를 잡을것인가 잠시 망설이며 서있던 호철은 불시에 배가 밀려나는바람에 기우뚱거리며 이물에 아무렇게나 펼썩 주저앉았다.

《아니, 어쩌자는건가?》

호철은 저도 뜻을 잘 모를 이런 질문을 던지며 기슭을 바라보았다. 녀인은 그대로 강가에 서있다.

하인이 대답대신 마지막으로 배를 힘껏 강심으로 밀어내면서 성큼 배우에 올라타더니 《그럼 다녀오겠사와요.》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제야 녀인은 이쪽으로 돌아서서 양산을 제꼈다.

《아!》

호철은 허리를 불쑥 솟구쳤다.

《손님, 가만히 계십시오. 배 번져지겠습니다.》

하인같은 사나이는 어느새 맹렬한 기세로 노를 배기면서 주의를 주었다.

《배를 돌려라! 어서 배를 돌려!》

호철은 배전을 두드리며 옆구리를 더듬었다.

진옥은 이미 침착성을 회복하고 선녀같은 모습으로 강가에 서서 미소를 짓고있었다.

《리호철씨, 참 오래간만이군요.》

《류진옥이, 네가 여기에 나타났구나. 이자식아 배를 냉큼 돌리지 못해.》

호철은 권총을 꺼내들며 악을 썼다.

진옥은 여전히 웃음지은채 악어가죽손가방을 열었다. 그 녀자의 손끝에 호신용권총이 묻어나왔다.

《아차차, 배 번져진다. 손님, 좀 얌전히 못 앉아있겠소.》

장경수는 노젓던 손을 멈추고 호철의 목을 뒤로 그러안았다.

《그놈은 헤염을 잘 쳐요.》

하고 진옥은 다시 손가방을 열고 권총을 건사하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알겠소. 조심해 가시오.》

장경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려보였다. 그리고는 권총을 천천히 제 옆차기에 건사하면서 말하였다.

《네놈이 리호철이라니 참 반갑다. 뭐 뛸 궁리는 하지 말어. 나도 강가에서 자라서 헤염깨나 칠줄 아니까.》

《아이구···》

호철은 마지막 노을빛을 받으며 강가에 그린듯이 서있는 진옥을 바라보다가 이를 부드득 갈며 주먹으로 배전을 탕 내리쳤다. 이어 그의 머리는 갑자기 부러진것처럼 탁 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