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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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섭이는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할수 없었다.

하늘에는 별빛이 총총하다. 또글또글하던 별빛들은 흐릿해지더니 엄청나게 커지면서 뿌옇게 흐려들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이렇게 서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다리고기다리던 유격대가 와서 그놈들이 꽁지가 빳빳해서 달아나는판에 이 꼴이 된것이 원통하였다. 이제 할아버지, 어머니, 동생은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갈것인가···

정섭이의 생각은 호철의 권총손잡이에 머리를 단단히 얻어맞아서인지 맥락이 닿지 않고 섞갈려있었지만 그자신은 그런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옆구리며 머리가 깨여져나가는것처럼 쑤셨다.

사지가 안아픈데라고 하나 없이 돌아가며 다 쏘고 쑤셨다. 그래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메아리와 같은 함성이 울려온다. 처음에는 그것도 무슨 소린지 짐작할수 없었다. 그러나 차츰 그 소리가 만세소리와 환호소리라는것이 뚜렷해지고 그것이 바로 신사동과 신개척에서 울려온다는것을 깨달았을 때 문득 아까 리호철이가 하던 말이 다시 생각나고 그 뜻이 뚜렷이 떠올랐다.

정섭이는 허둥지둥 일어나앉았다. 사방 쑤시고 아픈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움직일수는 있을것 같았다. 포승줄을 바위에 쓸고 팔목을 비틀고 해서 풀어던진 그는 벌떡 일어났다.

《나는 살아있다. 유격대가 왔다! 나는 살아났다!》

한순간에 온 천지를 다 그러안을것처럼 팔을 쳐든 정섭이는 이렇게 웨쳤다.

봉식이가 하던 말, 영창에서 만호가 들려주던 소문- 그것이 다 빈말이 아니였다.

《유격대가 왔다!》

왜놈들이 바로 이때문에 그렇게 미쳐서 돌아쳤던것이다.

그는 무작정 만세소리나는쪽을 향하여 산을 탔다.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다시 살펴보니 어깨와 아래다리가 휘주근히 젖었다. 칼맞은 자리였다. 토스레우로 손더듬을 해보니 상처가 그리 깊은것같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피는 멈추어야 할것이였다.

정섭이는 풀밭에 주저앉아 잠뱅이자락을 찢어냈다. 마음이 급하여 대충 한바퀴 동이고 걸었더니 다섯걸음도 못가서 풀어져버렸다. 하는수없이 다시 주저앉아 이번에는 아예 푼푼히 한쪽가랭이를 다 찢어가지고 상처를 동이고나서야 절뚝절뚝 걸음을 옮겨놓았다.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이르러 그는 우뚝 멈추어섰다.

저게 신사동이 옳기는 옳은가? 온통 불이 환히 켜져 동네는 숲우에 둥실 떠있는듯 하다. 그속에서 노래소리, 북소리가 두리둥둥 바람타고 날아온다. 명절날도 이렇지를 못하였다. 이 궁벽한 화전촌, 처서판에 명절이라는것이 있기나 했던가. 사실 유격대가 왜놈들을 물리치고 온 이날처럼 큰 명절이 어데 있겠는가.

정섭이는 상처의 아픔도 잊어버리고 허망에 빠져 딩굴고 나무에 걸채여 넘어지면서 단숨에 동네까지 달렸다.

불이 환한 골목에 들어서서야 제 주제가 사람들앞에 나설 형편이 못된다는것을 깨달았다. 한쪽가랭이는 아주 발가벗다싶이 된데다 불빛에 비쳐보니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있었다.

《이시가와구미》창고앞에서 녀대원들이 치마자락을 날리며 춤을 추는것을 잠시 서서 넋없이 바라보다가 어서 옷을 갈아입고 저판에 나가봐야지 하고 으슥한 뒤골목으로 돌아 동네끝에 있는 자기 집 문전으로 다가갔다.

《이건 또 어떻게 된거야?》

정섭이는 집 못미쳐서 다시 멎어섰다.

집집마다 불을 내걸었지만 그런중에서도 제일 밝고 제일 휘황한데가 바로 자기 집이였다.

어둠속에 숨어 기웃이 고개를 뽑아보니 활짝 문을 열어젖힌 웃간에 사람들이 앉아있다. 동네사람도 있고 유격대도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앉아있지 않는가. 만호형님도 있고 자위대영창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다 있다. 모두 풀려나왔구나. 아까 신개척에서도 만세소리가 울려오더니 그쪽에도 유격대가 간것이다.

정섭이는 같이 고생하던 사람들이 풀려나온것을 보니 불시에 눈굽이 뜨거워올랐다.

그는 기왕 이렇게 된바에는 이대로 유격대앞에 나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문앞으로 다가갔다.

《장군님, 그런 걱정은 말아주십시오. 그놈이 설마 죽기야 했겠습니까?》

할아버지의 말이였다. 정섭이는 또다시 가래나무 그늘아래 걸음을 멈추었다. 장군님이시라니··· 그럼 할아버지와 마주앉아계시는 저분께서 바로 장군님이시란말인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그분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나는 갇힌 사람들이 다 놓여났다니 그런줄로만 알았습니다. 손자 이름을 정섭이라고 했지요? 우리가 찾아보겠습니다.》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정중히 인사를 하시고 토방에 나서시였다. 할아버지와 동네사람들이 우르르 따라 일어섰다.

정섭이는 그만 옆에 선 가래나무줄기를 안고 그 터실터실한 줄기에 이마를 비비며 어깨를 떨었다.

장군님께서 우리 집에까지 오시여 매를 쳐도 시원치 않을 이 말썽군의 이름을 외우시며 걱정을 하시다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수 있는가.

(아, 장군님, 장군님.)

그는 마음속으로 장군님을 부르고 또 부를뿐 자기가 느끼는 이 크나큰 감동, 끝없이 샘솟는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똑똑히 분간할수 없었다.

다만 죽을번하다가 장군님 덕분에 살아났을뿐아니라 세상에 태여나서 단 한번도 느껴본적 없는 통쾌감속에서 하염없이 흘려보는 이 눈물이 곧 장군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뜯기고 짓밟히고 억눌리다가 마침내는 짹소리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원쑤의 손에 죽을수밖에 없는 가련한 조선사람들이 그렇게도 목마르게 기다리던 김일성장군님의 넓고 억세고 따사로운 품에 안긴 그 감동이라는것만은 똑똑히 깨달았다.

그는 두손을 벌리고 온 누리를 향하여 웨치고싶었다.

《보아라. 우리 조선사람들에게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신다. 우리 조선사람들을 수모하던놈들은 다 여기 나서라! 어디 한번 맞서보자!》

정섭이는 실지 장군님앞으로 나서려고 하였다. 한쪽다리를 발가벗었다고 꾸중을 하시면 곧 옷을 갈아입겠다고 사과를 드리면 될것이 아닌가. 그런데 피칠갑을 한것을 보시면 어떻게 한다? 머리를 만져보니 큼직한 혹까지 불거졌다.

정섭이가 잠시 가래나무 그늘에서 망설이는데 웬 지휘관이 달려들어온다. 경위중대장 오백룡이였다.

《사령관동지, 적들이 림철종점까지 다가왔습니다. 얼마전에 전초대동무들에게 얻어맞고 달아났다는놈들이 다시 대부대를 끌고 온것 같습니다.》

《이제야 나타났소?》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군님의 얼굴에는 방금까지 그리도 부드럽고 인자하게 느껴지던 모습우에 실로 한번 노하시면 산천초목도 땅바닥에 엎드린다는 기상이 내풍기였다.

그러나 이어 적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리신듯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시고 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몸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신 다음 경섭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였다.

장군님께서 거듭 동네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시고 골목으로 나오시자 유격대지휘관들이 그이의 곁으로 다가왔다.

장군님께서는 조용조용하면서도 우렁우렁하게 잘 울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우리가 타산한것보다 놈들의 기동속도가 좀 굼뜬것 같습니다. 아마 그놈들은 우리가 이렇게 빨리 신사동에 나타났다는것이 잘 믿어지지 않아서 좀 꾸물댄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가 파놓은 함정으로밖에 찾아갈데가 없는놈들입니다. 저놈들을 계획대로 대홍단벌로 끌어내시오. 이 새벽에 우리 조선사람들의 한을 풀어야겠습니다. 우리가 그립던 동포들을 만나 반갑게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하고 웃기도 하였지만 억울하게 짓밟히고 매를 맞아 험하게 갈라진 그 상처를 볼 때 치가 떨려 견딜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조선인민혁명군이 총을 들고있는 한 그 어떤놈도 우리 조선사람들을 건드리지 못한다는것을 놈들에게 똑똑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장군님의 말씀은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처럼 부드럽게 웃으시던 장군님께서 가슴깊이 품고계시던 서리발찬 분노의 분출이고보니 삽시에 사위가 얼어드는듯 숭엄해졌다.

장군님께서는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인민들과의 사업을 잘 결속지어야겠습니다. 적들은 이미 우리 낚시에 걸려들었으니 우리가 끄는대로 끌려올것입니다. 그러니 은밀하게 신사동을 출발하여 예정된 계선을 차지하고있다가 적을 무리로 섬멸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얼마후 노래와 춤도 멎었다.

사령관동지의 명령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은 바람과 같이 어둠을 누비며 대렬을 지었다. 어느새 로획물자들은 다 꾸려져서 대오마다에 배정되였다.

한오리 흐트러지지 않는 이 정연한 군사행동에 약간한 혼란을 준것은 어떻게나 장군님을 돕고 혁명군을 돕겠다고 로획문자를 빼앗아지고 따라나선 인민들과 작별이 아쉬워 멀리까지 따라나온 동네 늙은이들, 아낙네들때문에 인사를 두번, 세번 거듭 나누지 않으면 안된것이였다.

정섭이는 비로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것을 깨닫고 집으로 달려들어갔다.

《어머니, 나 잠뱅이 하나 주오다.》

혁명군을 배웅하러 나가던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놀라서 정섭이의 어깨며 머리를 어루만지며 무엇인가 물었으나 그는 외마디소리를 몇마디 내던지고 제절로 어머니의 웃보퉁이를 와락와락 잡아헤쳤다.

《원, 저런 덜퉁한놈이 어데 있나. 장군님께서 제놈때문에 그렇게 걱정하시는것도 모르고··· 어서 옷을 갈아입혀서 내보내라. 떠나시기 전에 내가 장군님께 저놈이 돌아왔다고 말씀올려야겠다.》

할아버지는 지팽이를 질질 끌며 유격대가 지나가는 골목길로 허둥지둥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