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5


 

5

 

구질거리는 비안개속에 차가수물동이 저만치 바라보이자 필네의 발걸음은 절로 떠졌다. 찌르르 하고 무엇인가 아픈 정이 명치끝을 훑어내리는것 같았다.

일행은 는개비에 축축히 젖어서 부지런히 걸음을 다우친다. 맨앞에 나란히 걸어가는 장대선아바이와 춘길이는 곁눈 한번 팔지 않고 오솔길굽인돌이로 사라지고 큼직한 고리멜빵을 멘 윤원구는 아이를 업고 임보퉁이를 인 안해에게 무엇인가 또 지청구를 대다가 성이라도 났는지 와락와락 물탕을 튕기며 멀어져갔다. 류랑가수 김인수만이 물동다리우에서 어수선한 정경을 잠시 굽어보다가 부러진듯이 목대를 떨구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놓는다. 나들나들 해여진 춘추외투우에 색날은 중절모를 쓰고 큼직한 등산배낭과 바이올린통을 둘러멘 그는 노래를 팔러 팔도강산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으로서 어찌어찌해 산판에 들렸다가 우연히 일행에 끼여들었다.

본시 광산에서 굴러온 윤원구네 일행이 하칠소토장을 털게 되니 다시 광산으로 밥벌이를 찾아가는것이나 요즘 노다지바람이 불어 인총이 물밀듯이 쓸어든다는 그곳 금천동으로 가서 노래를 팔아보겠다는 김인수의 생각이나 생의 막다른 몸부림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한것이였다.

아무도 물동다리의 서글픈 정경같은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정섭이와 필네만이 비안개속에 떠오르는 그 어수선한 모습을 무심히 볼수 없었다.

말끔히 찍어넘긴 이깔나무의 등걸들이 마치 무덤앞의 표말처럼 는개비에 번들거리고 물동가에 앙상하게 서있는 잡관목가지들은 지나가는 바람결에 우수수 설레이며 비말을 휘뿌린다. 겨우내 실어낸 통나무들이 하얗게 눈을 쓰고있더니 이제는 첫떼를 띄울 때라 모두 헐리여 편벌장에 이리저리 헤쳐진채로 비를 맞고있는것이 불타다 남은 집터같이 허무한 생각을 자아냈다.

길가에 바투 나붙은 강기슭에 웬 낚시군 둘이 우장을 쓰고 앉아있는것이 보였으나 그것 역시 황페한 자연을 강조해주는 고목같은 인상을 자아냈다.

낚시질을 할만 한 철도 아니고 그럴만 한 장소도 아니건만 그런 생각 역시 떠오르지 않았다.

두사람의 잊을수 없는 추억이 깃들어있는 곳이였다.

그 추억마저 궂은비를 들쓰고 황페화돼버린듯 하여 떠나는 마음이 저리도록 가슴을 비틀어준다. 정든 땅을 떠나는것이 그리고 정든 사람들과 헤여지는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가 하는것을 수라에 넘치는 물소리, 앙상한 개버들가지를 울리는 바람소리가 가슴을 두드리며 하소하는듯 하다.

필네는 비풍이 치는 임밑으로 정섭이를 돌아보았다. 정섭이의 모습도 말이 아니였다. 등에 업힌 윤원구의 아들애에게 큰저고리마저 씌워주어서 홑잠뱅이에 토스레적삼을 걸쳤을뿐인 그는 퍼렇게 언 허리가 드러나서 비물에 번들거리지만 추운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침울한 눈매로 차가수의 흐름만 바라보고있다. 그렇게 비를 맞고도 길들지 않는 정수리의 총이 센 머리카락만이 뻗두룩하게 일어서있는것이 고집스러우면서도 우습강스럽고 서글서글한 성미를 엿보게 할뿐이였다.

이제 한 10리 더 가서 무포어방의 갈림길에 이르면 그는 자기 집이 있는 신사동쪽으로 갈라져갈것이다.

그는 말미를 얻어 부모동기가 있는 제집에 다니러 가는것이니 다른 사람들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러나 정섭이의 낯색은 그 누구보다도 어두웠다.

필네는 그 역시 이 리별을 괴로와한다는것을 몸으로 느끼였다. 그것이 고맙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섭이의 낯빛이 어두운것은 그것때문만은 아닐것이다. 그에게는 남다른 근심도 있다. 얼마전에 신사동으로 이와실이를 갔던 삼수사람이 돌아가는 길에 정섭이네 집 기별을 가지고왔었다. 두 동생이 모두 홍역을 중하게 앓는데다 동네에서 경비도로 부역이 심하여 돌볼 손이 없으니 벌구를 옮기는 기회에 며칠이라도 다녀가라는 할아버지의 전갈을 받았을 때 필네 역시 가슴이 덜컥하였다. 그 귀여운 영섭이가 홍역을 앓는다니 자기아래로 동생 셋이나 홍역마마에 떼웠다는 정섭이의 말이 생각났다. 필네는 제가 등이 달아나 한시바삐 다녀오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하칠소토장이 아주 산판을 옮기는판이라 마지막 회계를 보느라고 차일피일 며칠을 끌다가 결국 화룡땅 금천동으로 가는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된것이였다. 동생들이 앓는것도 문제지만 3년전에 아버지가 죽고 60로인인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화전을 뚜져 근근 연명해가는 그 집의 살림살이 또한 말이 아니였다.

《홍역은 어려서 앓아야 쉽게 넘긴다는데···》

필네는 한걸음 떨어져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우리 집에서는 작은놈들이 더 잘 죽더구만···》

정섭은 흥심없는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홍역을 앓지 않고 넘길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흥, 무덤속에 들어가서도 한번은 앓고야 배긴다는걸.》

《그래서 모두 어릴 때 겪는게 좋다지 않아요. 작년에는 참 쉽게들 치렀다는데···》

이렇게 근심에 싸여 말하는 필네의 눈앞에 저 물동다리를 까치걸음을 치며 달려오던 영섭이의 모습이 선히 떠올랐다.

그때는 겨울이였지만 물동다리가 지금처럼 어수선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겨울보다도 더 밝게, 더 희망에 넘쳐서 물동다리를 건너서던 그런 때도 있었다.

그것은 언제였던가?

정섭이와 함께 즐거운 침묵속에 가쁜숨을 몰아쉬며 저 물동다리를 천천히, 천천히 될수록 오래 끌며 건너서던 지난해의 그 여름밤은 달이 밝았다. 여울에 흐트러지는 물속에서 절반쯤 이지러진 반달이 나란히 걸어가는 두사람을 마주 올려다보며 웃어줄 때 필네는 금시까지 밤길을 혼자 걸어온 무섬증도, 험한 숲속으로 혼자 가라고 내몬 밥집주인 김장로에 대한 원망도 다 잊어버렸었다.

그때만 해도 토장이 옮아가기 전이라 차가수를 따라 채벌장들이 널려있었다. 현장창고도 그 어름에 있었다. 밥집주인인 김장로와 함께 량식을 타러 갔던 필네는 밤이 깊어서야 두자루나 되는 호좁쌀을 이워주며 혼자 돌아가라는 그 늙은것의 말을 듣고 주저앉을번하였다. 지금은 뭇청부업자들이 송충이처럼 달라붙어 갉아대는바람에 한해사이에 홀랑 벗기우다싶이했지만 그때는 아름드리 이깔나무가 빼곡이 들어찬 원시림속이였다. 그런 숲속오솔길로 아직 달도 떠오르기 전에 어린 처녀를 혼자 보내다니··· 제가 술추렴을 하겠으면 저물기 전에 가라는 소리는 왜 못한단말인가.

못가겠다고 발버둥이라도 치고싶었다. 그러나 필네는 입을 감쳐물고 군소리 한마디 없이 길을 떠났다. 더러운놈, 어차피 돈있는놈들이란 그런것이다. 오빠 태혁이가 유격대로 떠나가면서 아무리 괴롭고 슬픈 일이 있어도 울지 말라고 당부했다. 더구나 돈푼 있는놈에게서는 절대로 동정이나 인심을 바라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마음을 모질게 도사려먹고 떠났다. 그러나 정작 숲속에 홀로 나서고보니 새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조막만큼 죄여들고 식은땀이 발발 내솟아 어느새 적삼이 화락하니 젖었다. 한참 깊은 숲속에 들어서니 달이 솟아올랐다. 달빛은 깊은 숲속에 더 무시무시한 그림자를 던져주었다.

너무나 겁이 나서 한절반 얼이 빠져 차가수물동다리에 접어들었을 때 귀에 익은 휘파람소리가 울리여왔다.

정섭이였다. 정섭이도 사무실에 회계를 보러 왔고 창고앞에서도 어슬렁거리다가 한발먼저 돌아갔었다. 그가 어떻게 이 물동가에서 혼자 기다리고있었을가? 실은 토장이나 밥집에서 제일 만나기 두려운것이 정섭이였다. 총이 센 머리카락이 뻗두룩하게 일어서가지고 아무에게나 덥적덥적 우스개소리를 던지고 싱글싱글 웃기 잘하는 그를 누구나 사랑하였다.

화전농의 집에서 태여난 그는 열대여섯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겨울이면 이와실이를 다니다가 아버지가 세상떠난 다음은 아예 벌목부가 되여 리명수, 압록강 줄기의 목재판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덩치가 크고 힘꼴이나 쓰는 정섭이는 남들이 손붙이기 싫어하는 일거리를 말없이 찾아가서 도끼를 휘둘러대기도 하고 둔장대를 어깨에 들이대고 힘을 쓰기도 하였다. 밥집에 돌아와서도 어려운 일손을 거들어주는것은 정섭이였다. 그런가 하면 지금도 업고가는 윤원구네 아들형제를 끔찍이도 귀여워했다. 멀지 않은 신사동 자기 집에도 동생들이 있다고 하면서 진철이의 오줌을 잠뱅이에 몇번이나 받아냈는지 모른다.

그런 그가 한번은 군산림주사 리호철이와 대판으로 싸움을 하고 주재소에 잡혀가서 매를 맞은 일이 있다. 쉬쉬하고 돌아가는 소린즉 정섭이가 토장에서 쉴참에 전년 봄처럼 유격대가 쳐나와서 이놈의 세상 활딱 뒤집어놓았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했는데 그것이 마침 지나가던 리호철의 귀에 들어가서 크게 동티가 생긴것이라고 하였다.

필네는 자기 마음이 은근히 그에게 끌린다는것을 문득 깨달은 어느날 너무나 부끄러워 부엌에서 한동안이나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싸쥐고 쩔쩔맸으며 그날은 종일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고 그 누구와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날부터 정섭이와는 일부러 푸접없이 굴었다.

오빠가 유격대로 떠나가서 고생하시는데··· 왜놈들이 돌리는 말을 들어보면 유격대가 숲속에서 몽땅 굶어죽고 얼어죽었다고 떠드는데··· 그것이 설마 사실은 아닐테지만 깨끗한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오빠를 기다려야 할 자기가 흉흉한 소문이 들려오는 이런 때 마음이 들떠있다는것은 부정스러운 행실이라고 생각되였다.

하지만 그 사람도 유격대를 기다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였으나 모진 마음을 먹고 그런 생각을 눌러버렸다.

자기가 푸접없이 굴어주면 정섭이는 어이가 없는지 멍하니 바라보다가 흥 하고 코방귀를 내불고 휘적휘적 걸어가며 휘파람을 불어대군 하였다. 그 거동이 우스워서 때로는 모질게 먹었던 마음을 비집고 저도 모르는 사이 따뜻한 미소가 피여오르군 하였다.

그 정섭이가 그중 후미진 차가수물동가에서 기다리고있는것이였다. 거기서 하칠소토장의 밥집까지는 댓마장 잘되였다. 놀러나올만 한 길도 아니였고 그럴만 한 곳도 못되였다. 차가수가 굽이돌아가는 바위벼랑에는 언젠가 시라소니가 나타나서 사람을 해쳤다는 말도 돌아갔다.

필네는 정섭이라는것을 알자 금시 소리치며 달려가고싶도록 반가왔다. 그러나 정작 다가가서는 어떻게 알고 기다렸느냐는 말도 하게 되지 않았다.

《두자루씩 포개이고··· 무슨 목대가 그렇게 든든한가.》

정섭이 역시 이런 소리를 하며 이고가던 낟알자루를 닁큼 빼앗아멨을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또아리를 탈아쥐고 꼬깃거리며 자루 하나는 도로 내라고 말하고싶었지만 인두로 지지는것처럼 입안이 말라들어서 한마디 말도 번질수 없었다. 결국 물동다리를 건너서도 5리나 되는 밤길을 두 사람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걸었다. 밥집의 불빛이 바라보이는데 와서야 정섭이는 자루를 도로 이워주며 《에- 잠만 밑졌군.》 하고 싱거운 소리 한마디를 남기고 휘적휘적 먼저 사라져버렸다.

웬일인지 그날부터 두사람사이는 가까와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버성겨진듯싶었다.

그무렵부터 벌써 하칠소토장의 분위기는 어수선하였다. 산판이 다 파먹은 김치독같이 되여 채벌장을 더 깊이 옮기는데 이 봄에는 어디에 가서 밥탁에 얻어걸릴것인가 하는 골치아픈 공론들을 밤마다 벌리고있었다.

필네와 함께 이태째 김장로밥집에서 거접하고있는 윤원구며 대선아바이, 춘길이 같은 사람들은 본시가 벌목부가 아니라 멀지 않은 고진동에서 광산이 망하는바람에 쫓겨난 광부들이였다.

하칠소토장이 파장이 됐다면 백두산기슭에 숲이 없겠는가. 지금 왜놈들이 《북선개척》이라 해서 남도치들을 《보국대》로 기수없이 끌어오는판에 걱정이 무슨 걱정이냐고 모두 말은 태평스럽게 했으나 속들은 다 편안치 않았다. 윤원구는 안해가 기다리다못해 아이들을 업고 찾아왔으니 별문제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돈을 벌어서 돌아가리라 다짐을 두고 떠나온 고향이 있고 식솔이 있는것이다.

그런판에 군산림주사 리호철이가 최근에 군청일을 그만두고 화룡땅 금천동에 금광을 벌렸다는 소문이 돌아가더니 김장로밥집에 오랜 굴쟁이들이 거접한다는것을 알고 밥집식솔을 통채로 끌어갈 꿍꿍이를 꾸몄다.

그 흥정이 근 한달가까이나 끌다가 마침내 오늘 이 길을 떠나게 된것이였다.

고진동에서 윤원구네와 함께 있으면서 밥집의 식모살이를 해온 필네는 강을 건너갔대야 식모살이하기는 매일반이였다. 그러나 필네도 윤원구네와 함께 김장로밥집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빠가 유격대로 떠나갈 때는 유격대가 장백땅을 완전히 깔고앉아있을 때라 만날 날이 그리 오래지 않다고 오빠도 타일렀고 어린 필네도 그 말을 믿었었다. 유격대가 보천보를 들이칠 때 필네는 자기도 이제는 오빠를 만나 더는 외롭게 살지 않아도 될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게 지난해부터 차츰 흉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겨울에 접어들면서 왜놈들은 이제는 유격대를 완전히 없애버렸다고 떠들어댔다.

필네는 더는 앉아서 오빠를 기다릴수 없었다. 그래도 강을 건너가면 무슨 확실한 소식을 알수 있을것이였다. 잘하면 유격대를 찾아갈수도 있을것 같았다.

필네가 금천동으로 가겠다고 나섰을 때 정섭이는 기를 쓰고 말렸다. 말려도 듣지 않으니 성을 내고 돌아앉아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말렸다. 어린 처녀가 거칠은 남의 나라 땅에 홀몸으로 가서 어떻게 살겠느냐는것이였다. 아무에게도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 그럴만도 한 일이였다.

정섭이는 이 며칠째 통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도 무거울것이다. 한겨울 기를 쓰고 일했지만 정작 회계를 보니 밥값, 빚값 두루 제하고 남은것이 한달 품삯도 되나마나하였다.

그런데 집에는 어려운 살림이 기다리고 또 두 동생이 앓아누워있다. 동생을 셋이나 홍역에 떼운 그 집에서는 벌벌 떠는 눈치였다. 그나마 경비도로부역때문에 돌볼 손까지 없다니 그의 마음이 개운할리 없었다.

영섭이가 홍역을 앓는다는것을 알았을 때부터 필네 역시 까닭모를 불안에 시달렸다.

필네도 영섭이를 잘 안다. 할아버지가 보천장을 보러 가고오면서 큰손자 있는데 들려가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영섭이가 놀러왔다. 한번은 형이 보고싶다고 추우나추운 겨울날 제혼자 달려온적도 있었다. 사납게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날 말파리꽁무니에 매달려 100리길을 와서 언 돌배를 내놓던 그 애의 수글수글하고 정다운 모습이 눈앞에 사물사물하였다.

영섭이가 앓는다는 말을 들은 그날로 필네는 진개에 사는 포수에게 달려가서 노루피 말린것을 얻어왔다. 홍역에는 그것이 제일 좋은 약이라니 이제 갈라질 때 정섭이에게 주어보내리라 마음먹고있었다. 정말 그 애가 그 노루피를 우려먹고 일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기는 벌써 털고 일어나서 또 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며 온 산판을 돌아다닐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오죽이나 좋을가···

그렇게 걸음을 늦잡았지만 어느새 물동다리는 눈앞에 있었다.

두사람은 나란히 물동다리를 건넜다. 지난해의 그 달밝은 여름밤처럼 말없이 걸었다. 그날처럼 정섭이는 숨을 씩씩거린다. 필네의 가슴도 그때처럼 답답하고 안타깝다. 그러나 그 밤의 그 따뜻한 느낌은 어디로 갔는가. 그 열정, 그 희망, 그 행복감은 하나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터놓지 못한 리별의 애달픔, 그 리별을 강요한 세상에 대한 원한 그리고 장차 두 사람의 운명앞에 닥쳐올 불행에 대한 막연한 예감이 있을뿐이였다.

물동다리를 그때처럼 천천히, 천천히 걸었으나 종시 아무런 일도 없이 마지막 가름대를 짚고 저쪽 기슭에 한발을 내려놓자 필네는 저도모르게 눈시울이 화끈해지는것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지난날과 완전히 갈라진것이다.

이제 십리나마 더 가면 새로 닦은 신작로가 나질것이다. 그 길을 따라 삼수평, 붉은바위를 거쳐 오늘중으로 무산지경까지 가대야 한다. 들리는 말에는 그 길이 경비도로인데다 아직 개통이 되지 않아서 여느 사람은 다니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포에서 유곡쪽으로 꺾어져 대홍단, 신사동으로 해서 농사동으로 돌아갈수밖에 없다. 그래봐야 한 20∼30리 돌뿐이라고 하지만 워낙 인적 드문 산골리수라는것이 대중이 없는것이다. 길을 물을 때 《한 십리 되오다》하고 턱을 쳐들어 가리키면 30리는 되는것이고 팔을 쳐들어 가리키면 줄잡아 50리는 되는것으로 봐야 한다. 어쨌거나 길을 좀 돌더라도 오늘중으로 삼장지경까지 나가기만 하면 래일은 국경다리를 건늘수 있을것이다.

필네는 적삼말기를 더듬어 노루피 말린 솜뭉치를 꼭 그러쥐였다.

이제 곧 신작로가 나지겠으니 이 굽이를 놓치면 단둘이 말을 나누게 되지도 않을것이였다.

필네가 줌을 폈다오무렸다 하며 망설이는데 정섭이의 갈린 목소리가 울리여왔다.

《자리잡거든 인차 편지하라구. 나도 집형편이 웬만해지면 이놈의 고장 뜨고말겠어.》

무슨 소릴가? 금천동으로 오겠다는 소리는 아닐가?

필네의 가슴은 활랑거리기 시작하였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할것 같았으나 인차 대척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리호철이와 엇서지 말아요.》

쭈밋거리다가 한다는 소리가 왕청같은 말이 돼버렸다. 하기는 그것이 은근히 가슴깊이 숨어있던 불안이기도 하였다.

《흥, 그자식하고 말썽없이 지낸 사람이 이 처서판에 어디 있어.》

정섭이는 코방귀를 내불며 희떱게 말했다. 필네는 안타깝게 덧붙였다.

《그래도 딴 사람과 같아요? 집에서도 리호철이네 빚을 많이 졌다지 않아요. 누가 말하는데 그 사람이 륙혈포를 차고있더래요.》

《나도 다 알아. 그자식이 제 애비랑 같이 혁명자들을 고발해넣은 값으로 만주에 가게 됐다는거야. 광산도 그래서 벌어들이고···》

《그런줄 알면서 왜 자꾸 엇설가···》

필네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그자식한테 무엇을 잘못했다고 벌벌 긴단말이야. 더럽게시리 쳇!》

침을 탁 뱉더니 모처럼 부드러워졌던 성미가 살아나서 와락와락 걸음을 다우친다.

필네가 원망스럽게 한참이나 뒤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따라가자 정섭이는 얼마 못가서 다시 걸음발을 늦추었다. 저로서도 제 마음을 어떻게 주체할수가 없는것이다.

또다시 무거운 침묵속에 철떡철떡 진창을 밟는 발걸음소리만 오래동안 끌었다.

가까스로 비가 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시원히 개일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거···》

어수선한 생각에 잠겨 말없이 걸어가는 필네의 손끝에 무엇이 와닿는다. 돌아보니 정섭이는 무엇을 움켜쥔 주먹을 엎은채로 내밀며 얼굴이 벌개서 말을 갑자른다.

《별스럽게 생각지 말구 받으라구.》

엉겁결에 손바닥을 펼친 필네는 그 순간에 그것이 돈이라는것을 깨달았다. 손에 와닿는 느낌이 적잖은 액수였다.

낯선 땅, 거친 생활속으로 홀로 떠나가는 자기에게 다만 얼마라도 로자를 보태줄 생각을 했다는것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겁도록 고마왔다. 일상 셈평좋게 휘적휘적 돌아가는 그에게 이처럼 깊은 속이 숨어있다는것은 놀라운 일이였다.

그러나 그것이 구리반지나 분곽따위가 아니라 적잖은 액수의 돈이기때문에 그대로 받을수 없었다. 지금은 자기보다 그 집 사정이 더 절박하다.

필네는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돈을 어떻게 돌려줄것인가 궁리하다가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저도 무작정 손을 내밀리라 생각하고 그것을 노루피약과 함께 감싸쥐였다.

그러나 필네가 손을 내뻗치려는 순간 곧게 열린 길이 툭 트이면서 바로 그 굽인돌이에 일행이 몰켜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무봉 《이와이구미》토장을 지난지는 5리나 되였다. 그러니 새로 닦은 신작로에 접어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