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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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빨리요, 빨리-》

상철이가 숨가쁘게 달려오며 소리쳤다. 그뒤를 재영이도 달려오는데 조그마한 손도끼를 한손에 들고 다른 한손에는 비서처의 정지성이가 정찰을 나가면서 맡겨두고 간 붓이며 먹통 같은것이 든 길다란 통을 들고있다.

《아니 왜 이렇게 덤벼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벌떡 일어서서 꼬마들을 향해 마주 다가가시였다. 금숙이도 웬일인가 해서 우물가에 벌려놓은 일감들을 주섬주섬 거두기 시작하였다.

《작식대의 칼 좀 줘요.》

상철이는 칼도마우에 놓인 칼을 닁큼 집어들며 말하였다.

《아니 작식대의 칼을 가져가면 점심은 굶겠어요?》

금숙이가 얼른 칼자루를 마주쥐고 깔끔하게 말하였다.

《야 참 답답하네. 구호를 쓴단말이예요, 구호를!》

《왜 이렇게 덤벼요? 차근차근 말하지 않구.》

김정숙동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셔서야 상철이는 시무룩해서 설명하였다. 뒤미처 재영이도 와서 지금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받들고 모두 구호를 쓰자고 나무껍질을 벗기는데 작식대 칼을 가져가기만 하면 우리가 단연 일등을 한다는것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사령관동지께서 왜 그런 지시를 하시였을가 하는것이 마음속깊이 짚여오시였다.

《금숙동무, 서둘러요, 우리도 어서 가자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자신께서 쓰시던 칼을 집어드시고 달리시였다. 그뒤로 금숙이도 달려오고 두 전령병은 어느새 보얗게 앞서 달아났다.

숙영지중심에 오니 통로를 따라 유격대원들이 법석 끓고있었다. 나무꼭대기에 올라가서 두다리사이에 나무그루를 끼고앉아 도끼로 나무껍질을 벗겨내려오는 동무가 있는가 하면 손칼로 두터운 껍질을 벗기노라 서둘다가 손가락을 찔러서 한쪽다리를 들고 냉큼냉큼 뛰는 동무도 있었다.

7련대, 8련대, 독립대대- 구분대들마다 승벽을 부리며 떠들어대는데 사령부부근에서는 의례 붓글씨는 내가 써야 한다는 표정으로 벌써 먹을 듬뿍이 찍은 붓을 입에 물고 수첩장을 번지면서 구호를 고르고있는 오비서의 얼굴도 보이였다.

방금 강철룡소대장이 정찰에 나가고 없어서 그렇지 그가 있었더면 그 소란스러운 목소리와 체격에 어울리는 큼직한 치도로 한몫 단단히 막았겠는데 지금은 오히려 경위중대쪽이 덜 설레이는 편이였다.

여기에 두 꼬마가 달려들어 쨍쨍한 목소리로 숲속을 휘저어놓았다.

《여기요, 여기 이 나무가 제일이라는데··· 아지도 없고···》

상철이가 다람쥐처럼 굵직한 이깔나무를 타고 올라가며 김정숙동지께 빨리 오시라고 손을 흔들었다.

정말 곧기도 하고 굵기도 하여 구호를 쓰기는 안성맞춤인 나무였다.

《도끼로 아래우를 어이고 벗겨요. 그렇게 억지로 덤비다간 손만 다쳐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재영이가 가져온 손도끼로 밑껍질을 쳐서 세로 어인 다음 칼을 가져다대면서 말씀하시였다. 꼭대기에 나무를 끼고앉아 억지로 껍질을 벗겨내느라고 갑자르던 상철이는 그제야

《도끼, 도끼, 도끼 좀 올려보내라는데.》

하고 소리쳤다.

눈치빠른 재영이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도끼를 상철이에게 넘겨주고 어디론가 힝하니 달아났다.

김정숙동지께서 칼로 껍질을 벗기시는 사이 금숙이는 도끼를 가지고 다른 나무로 달려갔다.

어느새 숲속에는 갑주같이 두텁게 둘렸던 껍질을 벗기우고 수십년 감추고있던 순결한 속살을 새하얗게 드러낸 나무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저쪽에서는 벌써 구호를 다 썼는지 쓰는중인지 랑송조로 《꿈속에서 잠잘 때가 아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사면포위에 빠졌다!》하고 읽는 목소리도 울려왔다.

오비서도 붓을 들고 나무앞에 붙어서서 아래우를 가늠하고있다.

《누나, 자 여기 올라서라요.》

어느새 재영이가 도끼모태같이 잘라낸 통나무토막을 방금 벗긴 멋진 나무밑에 갖다세우며 소리쳤다. 그의 손에는 먹을 먹인 붓까지 들리여있었다.

벌써 석대째 껍질을 벗기고있던 김정숙동지께서는 깜짝 놀라며 누가 듣지 못하게 말씀하시였다.

《어서 오비서를 청해와요. 난 이런 구호는 써본 일이 없어서 못써요.》

《오비서는 이런거 해보았어요? 사령관동지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신건데··· 우리가 벗긴 나무는 아무도 못써요. 누나가 써야 해요.》

그렇게 의젓하고 리해성있던 소년이 얼굴이 시뻘개서 고집을 썼다.

《누나, 빨리 쓰라요. 우리 혁명이 승리한 다음에 난 여기 와서 누나가 쓴 구호를 찾아보겠어요. 그때 누나가 쓴것이 없다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상철이가 바로 나무꼭대기에서 이렇게 말하는바람에 김정숙동지께서는 당황해지시였다.

그러는데 금숙이가 재영이 손에서 붓을 받아들고 다가와서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언니, 다같이 혁명을 한다지만 혁명자마다 남다른 심정이 있지 않겠어요. 난 정말 언니의 심정이면 그대로 내 심정일것 같아요. 그런 마음을 여기에 남기자요. 그리고 우리가 여기까지 오느라고 겪은 시련이랑 또 잃어버린 전우들이랑 이런걸 남들이 어떻게 다 알겠어요. 언니가 꼭 써야 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일손을 멈추고 금숙이를 돌아보시였다. 커다란 눈에 글썽하니 눈물이 괴여있다. 금숙이는 무엇을 말하고싶을가? 그 말에 얼마나 많은 호소가 담겨져있는가. 또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 다 잃고 혁명의 총을 메고나선 나어린 상철이며 재영이의 가슴엔들 얼마나 절절한 소원이 간직되여있을것인가. 그것은 김정숙동지자신의 가슴을 두고봐도 그렇다. 실로 몇십권의 책을 써도 다 표현하지 못할 기구한 사연들이 가슴마다에 깃들어있다. 그것을 몇글자의 구호속에 어떻게 다 담으라는것인가.

김정숙동지의 사색은 차츰 깊은 곬으로 파고들어갔다. 상철이며 재영이의 부모형제들이, 부암땅에 묻고 떠난 어머니와 사슴페골짜기에 묻힌 동생이 무엇때문에 왜놈들의 총칼을 맞고 쓰러졌는가. 재주도 뛰여나고 인품도 의젓하던 전우들이 부모처자 기다리는 따뜻한 아래목을 마다하고 눈바람 사나운 《고난의 행군》길에 나서서 청춘의 가슴으로 혁명을 보위하다가 목숨을 바친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조국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헐벗고 굶주리는 근로대중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였다. 혁명의 길에 쓰러진 그들이 오늘 세상사람들을 위하여 웨치고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원쑤와의 결사전에 떨쳐나서라는 호소가 아닐것인가.

《언니, 내 생각을 해서라도 하나 써주세요.》

금숙이가 다시 이렇게 말하며 칼을 받아들고 붓을 쥐여드리였다.

형세가 피할길이 없게 되시였다. 김정숙동지자신의 심중에도 갖가지 감회가 소용돌이치면서 무엇인가 이 세상을 향하여 말하고싶으신 절박한 생각을 몰아왔다.

《내 글씨가 서툴다고 흉보지 말아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세사람을 돌아보며 웃으시였으나 그들은 벌써부터 긴장되여 닭알침을 삼키며 그이의 손만 지켜보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재영이가 단단히 뻗쳐놓은 통나무우에 올라서서 잠시 감을 바라보시였다. 글자가 너무 많아도 안될것이다. 그러나 지내 짤막하게 쓰자면 우선 글자가 커야 하겠는데 큰 글씨에는 자신도 없거니와 이 절박한 심정들을 담아낼것 같지도 못하시였다.

《야, 저쪽에서는 벌써 다 쓰는것 같아요.》

하고 상철이가 마른침을 삼키며 재촉하였다. 아닌게아니라 독립대대숙영지에서도 7련대와 8련대의 숙영지에서도 와- 와- 끓어번지는 소리가 울려오고 멀지 않은 곳에서는 오비서를 둘러싸고 기관총소대원들이 웅성거리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한번 쓰면 다시는 지울수도 고칠수도 없다는것을 명심하시고 머리속에 그리는 구호의 글자수와 감의 기장이며 폭을 몇번이고 가늠해본 다음 결단성있게 붓을 갖다대시였다.

《일어나라.》

몇자 쓰기도 전에 벌써 나무밑에서는 《일-어-나-라》하고 읽어내려갔다.

《일어나라 단결하라 전체 로력대중들아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싸우자.》

이러한 구호가 새하얀 나무결우에 선명한 먹자국을 남기며 두드러져올랐을 때 밑에서는 숱한 사람이 와- 하고 떠들며 손벽을 두드렸다.

이마에 보송보송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나무토막에서 내려서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깜짝 놀라서 돌아보시였다. 어느새 주변에는 수많은 유격대원들이 모여들어있었고 저쪽에서는 《김정숙동무가 구호를 쓴다!》하고 웨치며 달려오는 동무도 있었다.

《야, 이건 꼭 내 마음이로구나.》

기관총수 최병규가 이렇게 말하며 전에없이 활달한 태도로 김정숙동지께 악수를 청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붓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자고 하시였으나 아무도 받자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에는 직관물공작을 하던 동무도 있었으나 기를 쓰고 김정숙동지께서 쓰셔야 한다고 우기고 나섰다. 점심차비가 늦어진다고 걱정하시자 제가 가서 짓겠다고 팔을 걷우고나서는 사람까지 있었다. 결국 자신께서 벗긴 나무는 말할것 없고 다른 동무들이 벗긴 나무에까지 가서 구호를 쓰게 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 석대째 구호를 쓰셨을 때였다.

농민복으로 변장한 기관총수 장경수가 달려와서 금숙이와 김재영이를 사령부로 불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