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16

 

16

 

정섭이는 집을 뛰여나온길로 대로은산마루의 산불감시막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이튿날은 여기 소로은산기슭까지 튕겨와서 옛날에 시라소니가 살았다는 바위굴에서 뜬눈으로 밝혔다.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무엇때문에 자기가 이런 짐승소리가 울려오는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다니게 됐는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평소에 밉다고 보아온 리호철이와 자위대 소대장놈이 바로 할아버지에게 행패질을 하니 참을수가 없어서 받아준것은 사실인데 그것이 번져 총소리까지 울려나올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산판에서 사람을 치는것쯤 아침저녁으로 있을수 있는 일이고 사람이 죽어가는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이번 일만은 무사히 가라앉을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우선 집일이 궁금하였다. 그놈들이 할아버지를 그냥 두었을것 같지 않았다.

어제 종일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저녁녘에 동네가까이 내려갔으나 마침 어머니를 들여다보고 오는 길인 물동지기령감네 어머니에게 손목을 잡히고말았다.

바로 자기네 집뒤에 각반을 친 웬 젊은놈이 서성거리고있는데 필경 자네를 잡으러 온것이니 아예 이 어방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것이였다.

하는수없이 그길로 소로은산쪽으로 넘어가 한지에서 하루밤을 새우고나니 이제 더는 궁금증을 누를수가 없었다.

잡혀서 죽을 때는 죽더라도 우선 판이 어떻게 됐는지 알기라도 해야 할것 같았고 첫째 춥고 배고파서 견딜수가 없었다.

소로은산 남쪽골안을 타고 편벌장가까이 내려오니 목도질소리, 든장질하는 선소리가 골안을 타고 울려온다.

머지 않은곳에서 도끼질소리, 통나무 넘어가는 소리도 울려왔다.

정섭이는 가맣게 내려다보이는 편벌장이며 힘찬 률동이 느껴지는 도끼질소리가 어쩐지 가슴을 쩌릿하게 훑어내리는것을 느꼈다.

 

신랑자는 말을 타고

새각시는 가마 타고

안깐령 넘어갈 때

고개넘어 또 고개···

 

편벌장에서 늘어진 목소리로 엮어대는 노래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목소리는 맑고 해빛은 쨍쨍했지만 정섭이에게는 어쩐지 그 소리가 구슬픈 신세타령같이만 들려왔다.

정섭이는 버릇처럼 나무가지 하나를 뚝 분질러 내던지고 걸음을 옮겨놓았다. 어쨌든 사람을 만나 동네형편을 알아보고 별일 없으면 하칠소쪽으로 내뛸 작정이였다. 도끼질하는데로 가면 많은 사람 눈에 뜨이지 않고도 그 누군가를 만날수 있을것이였다.

정섭이가 빽빽한 관목덤불사이를 빠져나와 좁다랗게 난 운재길우에 나서려고 하는데 아래쪽에서 불쑥 사람그림자가 나타났다. 흠칫하여 내뛸 차비를 하면서 찬찬히 살펴보니 마침 만났으면 하던 편벌부 봉식이였다.

《너 정신이 있니?》

봉식이는 한아름 안고있던 자작나무단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치고 벗어놓았던 지게를 한쪽 어깨에 걸치더니 사방을 휘휘 살피며 정섭이의 등을 다짜고짜 후미진 산비탈쪽으로 떠밀었다.

《미친놈의 자식!》

정섭이는 어안이 벙벙해서 말도 못하고 밀려가는데 으슥한 나무그늘에 들어서자 봉식이가 다시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쏘았다.

정섭이는 성이 난듯 한 봉식이를 멀뚱멀뚱 바라볼뿐 입을 벌리지 못했다.

《내 그러지 않아도 너를 만나려고 혼자 빠져나온길이다.》

《내가 어데 있는줄 알구?》

《네가 갈데라고 있니, 아침나절에 대로은산의 산불막까지 타리개감을 하러 갔댔다. 거기서 네가 피우던 담배꽁초를 보고 여기까지 넘어왔지. 이젠 만났으니 됐다. 저리 좀더 깊이 들어가서 요기나 해라. 정신빠진놈의 자식, 이게 어느때라고 이런데 게바라나와서 어정거린단말이냐? 저 꿱꿱하는 소리 들리지 않니? 지금 산판마다 경찰, 자위대뿐아니라 십장, 감독까지 다 떨어나서 돌아간다.》

《십장, 감독은 왜?》

정섭이는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쩡쩡하게 물었다.

《허, 미친놈, 통 세상문세를 아는것 같지 않군. 모두 너를 잡겠다고 그런다는걸 알아라. 네가 무슨 굉장한 혁명잔가 하는 모양이더라.》

《내가 혁명자야?》

정섭이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너뿐이 아니다. 태호며 좌상령감까지 잡아가겠다고 떠든다더라. 돌아가는 말이 지금 저놈들한테 무슨 일인가 생긴 모양같다. 그래서 조선사람은 조금만 수상해도 잡아가는 판이라는구나. 너도 만호도 무서운 판에 걸렸다.》

정섭이는 기가 죽어 고개를 떨구고 나무가지를 헤치며 묵묵히 걸어갔다.

《조선사람 다 죽게 됐다.》

봉식이는 정섭이의 등을 떠밀면서 시름없이 중얼거렸다.

《어제 <이시가와구미>에서 간죠를 내줬다. 만호를 잡아가두고 당장 사람들을 쳐죽일것처럼 기광을 부리면서 내줬다는게 일당 50전도 안된다는구나. 그것도 전표예매바람에 다 떼우고 단돈 1원 한장 쥔 사람이 쉽지 않다더라. <호리모도구미>도 같애. 그래서 모두 윽윽하지만 저놈들이 자위대까지 끌어다놓고 하도 무섭게 돌아치니 말들을 못하고 신세타령만 하는 판이다.》

《에익! 개새끼들! 그래 그자식들을 가만둔단말이야? 입은 두었다 무엇에 쓰구 주먹은 두었다 무엇에 쓰는거냐?》

정섭이는 밸이 꿈틀거려 참다못해 소리쳤다.

《이자식이 왜 또 펄펄 뛰면서 이래? 네깐놈이 펄펄 뛰여서 벌어들인게 뭐냐? 숱한 사람을 고생시킨것밖에 있느냐?》

《야,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럼 만호형님이 나때문에 잡혀갔단말이냐? 동네에 무슨 일이 있는게 아니냐?》

정섭이는 봉식의 소매를 잡아흔들었다.

《저리 나앉자. 그러지 않아도 내가 너한테 그 이야기를 하러 오는길이다.》

소로은산의 남쪽기슭에 나서니 채벌장의 소요는 들리지 않는대신 나무사이로 소홍단수의 구붓한 흐름이 빤히 내려다보이고 봉식이가 일하는 편벌장과 물동다리도 손에 잡힐듯 하였다.

바위너설이 비죽하게 내솟은 풀밭에 들어앉자 봉식이는 우선 지게목발에 달아가지고온 동고리를 풀었다. 빤빤한 고비밭에 보자기를 펴고 동고리를 헤치니 감자가 듬숭듬숭 박힌 잘 퍼진 귀밀밥이 무드기 담겼는데 토장 한덩어리가 한옆에 박혀있다. 무던한 봉식이 색시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장하지? 어서 들라구.》

봉식이는 자루 부러진 숟가락을 보자기에 썩썩 문대서 내밀며 비로소 살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됐다는거냐?》

정섭이는 숟가락을 받으면서도 눈만은 친구의 입을 지켜보고있었다.

《먹으면서 들으라구.》

하고 봉식이는 옆차기에서 쌈지를 꺼내여 담배를 말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허리를 솟구었다.

《수라를 열었군.》

잠시 긴장된 침묵끝에 봉식이는 도로 풀밭에 주저앉으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물동에서 갑자기 솨- 하고 바람치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앞에서 편벌장을 덮씌우며 허연 물기둥이 치솟았다. 물기둥밑에서 한폭 또 한폭 련달아 세폭의 떼가 쏜살같이 빠져나온다. 물동가에 목도군, 든장군들이 하얗게 모여들어 손을 흔들며 떠들어댄다.

《어제 첫떼가 내렸지···》

봉식이는 담배연기를 구수하게 날리며 조용히 입을 벌렸다.

정섭이는 밥 한술을 큼직이 떠넣고 우물거리며 친구의 입을 지켜보았다. 첫떼가 내렸는데 어쨌단말인가. 봄이 오면 농사군들이 화전을 일구고 씨를 뿌리듯 해마다 이맘때 첫떼를 띄우는것을 이 산판 사람치고 누가 모를것인가.

《치갑이가 그 떼를 타고가다가 지난밤에 부랴부랴 돌아왔다.》

정섭이는 또 한숟갈 떠넣으려던 숟가락을 슬그머니 드리우고 다음말을 기다렸다.

그러니 아까 신랑자와 새각시가 안깐령을 넘어간다는 서글픈 노래는 치갑이가 부른것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봉식이는 왜 이렇게 갑자르는가. 치갑이가 아무데나 바람처럼 나돌아다니기 좋아하는것은 그가 아무데서나 노래를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이 로은산기슭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일이 아닌가. 아무래도 눈치가 심상치를 않다.

봉식이는 한참이나 동안을 두었다가 뜨직뜨직 입을 열었다.

《지금 삼장일판에 너를 잡겠다고 강기슭에 순사들이 개싸다니듯 한다누나. 너하고 하칠소에 같이 있다가 강 건너가느라고 <이시가와구미>밥집에서 묵고간 사람들말이다···》

정섭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 무릎을 끌고 나앉았다.

《그런데? 어서 시원히 말하라구. 이거야 답답해서 견디겠나.》

《그 사람들도 여태 강을 못건너가고 객주집에 잡혀있다는구나. 치갑이가 두만강초입의 삼일객주집에서 밥사먹다가 아무래도 네가 강쪽으로 게바라나올것 같아서 떼를 매놓은채 달려왔다더라.》

《아니 그 사람들을 왜 잡아?》

정섭이는 숟가락을 동고리에 꽉 박으며 한쪽무릎을 일으켜세웠다.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해서 그러겠지.》

《아니 그 사람들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말이냐?》

정섭이는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다.

《이자식 성미도 더럽다. 내가 상관이 있다나, 왜놈들이 그러지. 그것은 또 약과야. 어서 먹기나 해.》

하고 봉식이는 담배연기를 시름없이 날리며 이제는 잔잔해진 흐름을 타고 량기슭에 늘어선 묵은 채양버들사이를 누벼나가는 세폭의 떼를 바라보았다.

 

에헤 어허루야

물길이 좋다

 

첫떼의 뒤동갱이에서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지난밤에 삼일객주집에서 부랴부랴 달려왔다는 치갑이의 목소리가 분명하였다.

《저녀석도 친구를 잘못 만나서 고생을 한다. 회령까지 가야 할 떼를 두만강초입에 매놓은채 달려왔다고 호리모도란놈한테 경을 쳤다. 그래도 저녀석은 흥타령만 부르고있으니··· 어서 밥을 먹으라구.》

봉식이는 측은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며 다시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정섭이는 숟가락을 받아쥐기는 했으나 이미 무엇을 입에 떠넣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치갑이에게도 미안했지만 윤원구네 일이 궁금하여 입안이 불시에 깔깔해지도록 몸이 달아났다.

그는 당장 치갑이를 잡고 똑똑히 물어볼 생각이 나서 벌떡 일어나며 떼가 흘러가는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달려가면 소홍단산을 돌아갈 때는 흐름이 순하니 따라잡을수도 있을것 같았다. 그 눈치를 챈 봉식이가 담배불을 집어던지고 정섭이의 어깨를 잡아눌렀다.

《놓아라, 내가 가서 알아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정섭이는 봉식의 팔을 뿌리치며 부르짖었다.

《네가 아직도 정신이 덜 들었구나. 이번에는 치갑이랑 나까지 잡혀가는 꼴을 보고싶어 그러니? 이 어방에 자위대, 순사, 형사가 꽉 덮였다. 물동지기령감네 어머니한테서 무슨 말을 못 들었어?》

정섭이는 그 말에 기가 꺾이여 무너져앉고말았다. 너무나 절통하여 주먹을 움켜쥐고 땅을 내리치니 노르께한 고비밭에서 풀물이 튀여올랐다.

이제는 퍽 멀어진 떼우에서 놀대를 잡고 흔들거리는 치갑이의 구성진 노래소리만 가물가물 울려왔다.

 

님은 청산에 두고

이내 몸은 어디로 가나

록수구만리에

타고가는것이 칠성판이라

어허루야- 물길이 좋다

 

《자식두.》

봉식이는 이미 숲에 가리워 보이지 않는 떼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너도 저녀석처럼 성미가 누긋했으면 좋지 않니. 어서 밥을 마저 먹어라. 밥을 다 먹기 전에는 말하지 않겠다.》

정섭이는 봉식의 뜨거운 진정을 저버릴수가 없어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정섭이가 밥을 퍼먹기 시작하자 봉식이는 담배 한대를 다시 말아물었다. 그리고는 정섭이의 손을 잡아끌어 꼭 눌러잡더니 말하였다.

《너네 할아버지도 자위대영창에 잡혀갔다.》

《뭐?》

정섭이는 벌떡 일어났다. 내내 근심스럽던 일이 종시 현실로 되고만것이다. 할아버지가 잡힐바에야 자기가 무엇때문에 몸을 피해다닌단말인가. 그는 입술을 푸들푸들 떨며 숲에 가리워 보이지 않는 《호리모도구미》창고쪽을 쏘아보았다.

《어제밤에 우리 물동지기령감이 구미사무실에 갔다가 오는 길에 너 할아버지를 피뜩 만나본 모양이더라. 할아버지가 너더러 이 어방에 얼씬 말고 멀리 내뛰라고 당부하시더란다. 내 생각에는 하칠소쪽에도 얼씬 안하는게 좋을것 같다.》

정섭이는 《할아버지.》하고 입밖으로 새여나오려는 웨침소리를 가까스로 눌러참았다.

《너 어머니도 몰래 우리 집까지 나왔더라.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를 않으니 어디 멀리 피하라는거다.》

《야, 내가 이 지경이 돼가지고 어디로 피한단말이냐. 나 혼자 살겠다고 피하란말이냐.》

정섭이는 눈물이 그렁해서 부르짖었다.

《네 마음도 짐작이 간다. 하지만 너는 잡히면 살아남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야 좀 고생스럽더라도 한다리 건너가 아니냐. 허지만 넌 경우가 다르단말이다. 이 험한 세상에 왜놈장교를 그 지경으로 쳐놓았겠다, 또 산림주사란놈이 들리는 말에는 비밀형사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저러나 저놈들이 지금 꼬리에 불이 달린것처럼 미쳐돌아가는판에 네가 잡히기만 해봐라. 당장 목을 썩둑 자르고말것이다.》

정섭이는 이미 봉식이의 말을 귀담아듣고있지 않았다.

윤원구네도 자기때문에 갈길이 막히고 할아버지까지 그 봉변끝에 묶여갔다니 인두겁을 쓰고야 어떻게 자기 몸을 돌아볼 궁리를 하겠는가.

징역을 살아도 내가 살고 목을 잘리여도 내 목이 잘려야 한다. 그는 당장 어쩌자는 작정도 없으면서 벌써 마음이 급하여 오금을 일으켜세웠다.

《너 왜 그러니? 덤비지 말아라. 네가 이럴가봐 내가 품을 팔고 찾아다닌다지 않니.》

봉식이는 마주덤비며 그의 팔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봉식아, 나는 어찌라니! 개새끼처럼 빌어먹으며 돌아다니다가 죽으라니···》

정섭이는 붙잡힌 팔목을 비틀며 한손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야, 조용해라, 저기 무엇이 또 온다.》

봉식이가 그를 나무그늘로 밀어던지며 앞을 막아섰다.

《보아라, 저놈이 바로 너네 집을 지키고있던 형사놈이다.》

봉식이가 가리키는쪽을 내려다보니 두지바위쪽으로 통한 길을 따라 웬 녀자가 앞장서 걸어오고 그뒤에 스키모를 쓴놈이 바투 따라온다.

《아니?》

정섭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 무릎걸음으로 바위끝까지 나섰다.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보는 그의 입귀는 푸들푸들 떨리였다.

《아는 녀자냐?》

봉식이의 물음에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침만 꿀꺽 삼켰다.

《옳지, 그저께 너네 집에서 같이 묵고간 처녀로군.》

정섭이는 잠자코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편벌장에 이르러 물동다리를 건넌 필네는 그대로 강기슭을 따라 꼿꼿이 걸어오더니 신개척쪽으로 꺾어져 듬숭듬숭한 이깔나무사이로 사라졌다.

틀림없이 자위대병영으로 쓴다는 《호리모도구미》현장창고로 가는 길이다. 다시 운재길우에 나타났을 때 스키모를 쓴놈이 필네와 나란히 서더니 무슨 수작질인가 붙이는 모양이나 필네는 들은체 않고 걷기만 한다.

《그럼 또 잡혀가는 모양이군.》

그들의 모습이 나무사이로 아주 사라져버릴 때까지 지켜보고있던 봉식이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정섭이는 그의 말이 사실인가 확인하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 왜 그러니?》

봉식이는 정섭을 마주보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정섭이의 얼굴에는 피기라곤 하나 없었다. 둥글둥글하고 부리부리하던 모습은 간곳 없고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린것이 꼭 실성한 사람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섭이는 그냥 친구의 얼굴을 뻔히 바라보면서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어디 아프지 않니?》

《아무렇지도 않아,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난 곧 떠나겠다.》

정섭이는 이미 결심을 한듯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잘 생각했다. 그래 가면 어디로 가겠니?》

《좌우간 가겠다.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난 그렇게 데데하게 죽지는 않겠어.》

《그럼, 그러찮구. 어디 가거든 곧 기별을 해라.》

《기별을 하겠는지 그건 모르겠다. 내가 인차 못 돌아오더라도 우리 집을 좀 봐다구.》

《자식 별걱정 다 하지 않니. 동네에 사람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는데 그런 부탁을 안하면 너의 집을 돌아보지 않겠니. 걱정 말고 림시 몸이나 피해라.》

《고맙다.》

정섭이는 잠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았다가 동고리를 정성스레 쌌다.

《너 색시한테 잘먹었다고 말해다고. 그리고 치갑이 그자식이 돌아오거든 내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전해다고.》

《이자식이 미치지 않았니? 너 그러다가 치갑이한테 든장대로 좀 얻어맞아보려구 그러니? 익은 밥 먹고 그따위 선소리는 하지도 말아라. 옜다, 이거나 껴입고 가라. 널 주려고 일부러 껴입고왔다.》

그러면서 봉식이는 제 큰저고리를 벗어서 어깨에 걸쳐주었다.

정섭이는 그 소매자락을 한참 내려다보며 쓰다듬다가 조용히 끌어내려 봉식이에게 도로 걸쳐주며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난 일없다. 물동에서 사는 너나 껴입어라.》

그리고는 잠시 멍하니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뜻모를 웃음을 입가에 짓고 돌아섰다.

소로은산 깊은 숲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뒤모습은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뒤모습만 봐도 착잡한 생각에 시달리고있다는것이 뚜렷이 느껴졌다.

《엎친데덮친다더니···》

봉식이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게를 어깨에 걸쳤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서서 정섭이의 모습을 찾았다.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정섭이가 또 무슨 재구를 치자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한 말들이 다 심상치를 않다.

《야- 정섭아.》

봉식이는 다시 다짐을 두려고 소리쳐 부르며 그가 사라진쪽으로 달려갔으나 정섭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