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12

 

12

 

강로인은 지팡막대를 짚고 신사동고개마루까지 배웅을 나왔다.

일행은 한걸음 먼저 작별인사를 나누고 고개아래로 사라졌다.

정섭이도 동구앞까지 따라나왔다가 돌아섰다.

로인은 필네의 일이 그중 마음놓이지 않는듯 다심한 부탁을 곱씹으며 어느덧 고개마루까지 올라서고야말았다.

《인심도 모질군. 네가 어린것이 외지에 홀로 가서 어떻게 살겠느냐?》

《할아버지, 이젠 그만 들어가보세요. 여태도 홀로 살았는데 못살게 뭐 있겠어요. 제 걱정 마시고 할아버지 몸조심이나 하세요.》

《나야 몸조심을 안해도 너무 목숨이 질겨서 야단이다. 일행이 벌써 저 굽이를 돌아섰구나. 어서 따라가거라.》

로인은 돌아서서 다시 인사를 하는 필네더러 어서 가라고 지팽이를 들어 앞을 가리켰다.

필네는 자꾸만 뒤로 끌리는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다우쳤다.

밤사이 등디목에 앉아 밀린 바느질도 해주고 챙챙 감겨드는 경섭이랑 윤원구네 아이들과 엇섞여 실뜨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영섭이를 여의던 이야기를 눈물속에 들었고 분해서 구들바닥을 치며 넉두리를 하는 정섭이의 어머니를 위로도 하였다. 불쌍한 어머니는 한번 서러운 사정을 터쳐놓자 기가 바싹 성해서 새벽에는 신열이 몹시 높아지고 허리증도 심해졌다. 그래서 밤을 꼬바기 밝히다싶이 하면서 병구완도 해드렸다. 그사이 웃간의 로인과도 세상 살아갈 막막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과 하루밤, 그것도 어수선한 분위기속에 경황없이 보낸 하루밤이였지만 그 귀틀집 문전에 꼭 자기 집같은 정이 끌리여 발걸음을 무겁게 잡아당겼다.

《참, 할아버지.》

필네는 이깔나무가 듬성듬성 들어선 고개길을 넘어서려다가 돌아섰다.

한자리에 멎어서있던 로인도 서둘러 마주 다가왔다.

《저 노전밑에 제가 수건 한감 끊어넣었어요.》

《그래? 그건 뭘, 저나 쓸것이지.》

《전에 장로네 옷 짓다가 자투리가 났길래··· 그럼 편안히 계십시오.》

필네는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노전밑에 넣어둔 그 명주수건은 어쩌면 정섭이의것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집의 어려운 형편에서 적지 않은 삯전을 제손에 쥐여주었으니 그걸 돌려주자면 달리는 수가 없었다.

필네는 앞선 일행을 따라잡으려고 부지런히 걸음을 다우쳤다. 그런데 얼마를 못가서 발자국소리가 마주 다가오는바람에 걸음발을 늦추었다.

《왜 이렇게 꾸물거리는가? 저기서 윤원구네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데···》

리호철이였다. 이런 산골에서는 아직 흔치 않은 《국민복》, 《국민모》에 각반을 깡뚱하게 둘러치고 딱따구리지팽이를 비껴짚은 모양이 함께 오는 제지회사 자위대 소대장 스즈끼중위보다 더 서슬푸르러보인다.

《아, 이 처녀식모도 리상이 데려가는가?》

스즈끼가 호기심이 가득찬 눈으로 필네를 찬찬히 뜯어보며 별로 감탄한듯 한 소리를 질렀다.

《말 마시오. 김장로가 장담하기에 요즘 유럽에서 류행하는 무슨 집단계약같은것을 했지요. 저쪽에 가서 내가 골탕을 먹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호철은 일본말로 이렇게 말하고나서 다시 필네를 향했다.

《국경다리에서 흐지부지하거든 스즈끼상이랑 만났다고 하라구. 내 윤원구한테도 일렀지만 앞으로는 모든 일을 빨랑빨랑하고 단체에서 떨어지지 말란말이야.》

필네는 별놈이 별수작 다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잠자코 들을만해있었다.

《저쪽은 조선과는 달라. 여기서는 이런 숲속에도 황군이 나와있고 자위대랑 있어가지고 수고를 해주니 마음놓고 아무데나 다니지만 강만 한번 건너서면 비적이 득실거리고 공산군이 아무데나 나타난단말야. 내 인차 뒤따라갈테니 도착하는 즉시로 딴생각들 말고 일이나 잘들 하라구. 그러면 내 다 섭섭잖게 해줄테니.》

그래도 필네는 듣고만 있었다. 필네가 금천동으로 밥집을 따라갈 결심을 한데는 바로 그 《공산군》을 만났으면 하는 생각이 가슴깊이 간직되여있다는것을 호철이 제가 어찌 알랴.

처녀를 떠나보낸 스즈끼와 호철이는 이마에 번지르르 내배인 땀을 훔치며 숲속을 걸어갔다.

두놈 다 겉은 흔연한척하고있지만 실상 마음속은 대단히 번거로왔다.

《스즈끼상, 그래 15도구와 반절구에 나타났던 공산군이 이미 국경을 넘어선 기미가 보인다는것은 무슨 근거가 있는 소리요? 아니면 그저 그러루한 추측이요?》

《그야 나도 모르지, 명령이니까 그대로 집행할밖에···》

스즈끼는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매번 보면 무슨 토벌놀음이 벌어질 때마다 스즈끼상같이 충실한 사람만 고생을 한단말이요. 그래봐야 뭐 특별한 승진도 시키지 않으면서···》

《아, 아 그런 소리는 무엇때문에 자꾸 하는가? 이미 명령이 내렸는데 말을 자꾸 하면 좋지 않아. 그런 소리는 그만두고 여기 형편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라. 나는 사실 이 지대는 아는것이 없다.》

스즈끼는 날콩 씹은 상을 하고 말했다. 그는 방금 삼장에 있는 중대본부로 가서 중대는 당장 혜산, 포태리계선으로 진출하는만큼 여태 중대가 맡아보던 구역을 소대무력으로 맡아서 보되 종전보다 더 만전을 기하라는 엄명을 받고오는 길이였다.

처음에는 일거리가 좀 늘어나기는 했지만 어쨌든 후방에 떨어진셈이니 괜찮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리호철을 만나 이 수작, 저 수작 건늬는사이 자꾸만 의심증이 생겨났다. 호철의 말을 들어보면 관동군특수선무공작반원들이 무산대안일대에서 활발히 움직이고있다고 한다. 리호철이도 지금은 광산업주로 변신했으나 그가 군산림주사로 있을 때부터 관동군특수선무공작반장 시마끼소좌의 끄나불이라는것을 스즈끼는 알고있었다. 그런자가 이 일대에 나타났다는것부터가 심상치를 않다. 하기는 이자의 집이 옥암동에 있고 또 기업을 꾸리는 일때문에 화룡땅과 무산사이를 분주히 드나들어왔으니 새삼스러울것이 없다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공산유격대가 대판 국경으로 진출하고있는 이때 이렇게 후미진 곳을 텅 비우다싶이해도 일없을것인가.

이 점에 있어서는 이 일대에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있는 리호철이도 같은 불안을 느끼고있었다.

그들은 기왕부터 술친구이면서도 상대가 하나는 헌병대의 끄나불이요 하나는 관동군 특수선무공작반의 요원이라는것을 알면서 모르는척하고 지내왔었다. 그러나 같은 불안에 시달리는 지금 어느새 그런 허울들을 벗어버렸다. 두놈 다 이것이 정보사업에서 넘어서는 안될 계선을 멀리 벗어져났다는것을 느끼면서도 바로 이렇게 서로 협조하는것이 도문회담정신이 아닌가 하고 내심으로 변명하고있었다. 사실 그사이 약간의 마찰이 없지 않았던 관동군과 조선주둔군사이에서도 조선인민혁명군이 두 계선을 쳐가르고 국경지대로 진출하자 혼연일체가 되였으며 시마끼소좌가 직접 두 군대의 련계를 짓기 위해 혜산에 나와있다는것이다.

《문제는 백성들이란말이요. 중대가 다 있다 하더라도 군대만 가지고 이 밀림을 메꿀수야 없지요. 유격대가 발을 붙이고있는것이 백성들이기때문에 여기에 주목을 돌려야 한단말이요.》

《그러게 내가 아까부터 당신의 협력을 요청하는것이 아닌가.》

《그런것은 새삼스럽게 요청하고말고 할것도 없지요. 옥암동은 걱정 마오. 거기는 우리 아버지도 있고 또 그러루한 눈이 박혀있소.》

리호철은 회좁은 얼굴에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스즈끼는 어쩐지 자식이 놀아나는것이 목이 요골요골해서 저도모르게 한마디 긁었다.

《그 당신이 달고온 하늘소같이 생긴자말인가?》

《허- 스즈끼상 눈이 밝은데···》

호철은 띠끔하였으나 아닌보살하고 너스레를 피웠다.

《여보, 당신네 관동군만 똑 제일이고 우리 눈은 모두 곰발바닥같은줄 아는가. 그러지 말고 툭 터놓고 말하란말야.》

《허허허, 덜미를 단단히 잡혔군. 그러면 내 고스란히 다 게워놓지.》

하고 호철은 별안간 신중한 낯빛이 되여 수군거렸다.

《옥암동에서는 주목해야 할 대상이 류석진이라는 령감네 집이요.》

《나도 그 령감이야기는 알아. 손녀를 찾아 장백땅을 헤매다가 어제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그 령감네 집이 본시 이 일대에서 모든 말썽의 중심이라더군. 여차직하면 잡아넣어버리겠다니까.》

《아직 그렇게까지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소. 어쨌든 옥암동에는 우리 집이 있으니 퀴퀴하면 인차 냄새를 맡을거요. 그뒤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것이 중요하지. 그 령감자체야 제 아무리 용을 쓰면 별수 있소? 따귀만 한대 갈겨도 숨을 거두겠는데··· 문제는 옥암동이 아니라 이 신사동과 두지바위요. 이게 행정상 다 농사동에 속해있기때문에 우리 집 령감이 구장으로서 자주 드나들기는 하지만 일본제국으로 볼 때는 완전히 통제밖에 있으나 같단말이요.》

《흐흠- 그래서 우리 소대를 여기다 구겨박은게로군.》

스즈끼는 신음소리처럼 중얼거리며 흰자위만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렇다고 뭐 대단할것은 없소. 이러루한것을 알고 감시의 눈만 떼지 않으면 고작해야 제까짓 화전농과 처서군들이 뭘 하겠소. 일없소. 오늘 우리 집 령감도 농사동주재소의 요시다랑 같이 청결검사다 하고 떠났는데 아마 여기 어디서 돌아갈거요. 이렇게 사방에서 각종 명목으로 감시를 하면 샐 구멍이 있겠소? 이 일판에서 한시도 소홀히 할수 없는 대상이 몇이 있소.》

하고 리호철은 스즈끼의 볼에 뜨뜻한 입김을 불어대며 더 낮추 수군거렸다.

《첫째 <이시가와구미>에 만호, 태호라는 형제패가 있소. 이놈들이 그중 불량하고 불평이 많은놈들이요. 들으니 그 형이라는놈은 그제 당신네가 영창에 쓸어넣었다더군.》

《흠, 그놈인가? 지금 조금이라도 수상한 눈치만 보이면 엄단하라는 토벌본부의 지시니까 <이시가와구미>의 요청을 받고 잡아넣기는 했다는데 본시 그런놈이였군. 그렇다면 단단히 조겨봐야지.》

《그래봐야 별건 없을거요.》

하고 호철은 랭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놈들이라는게 본시 화전농출신으로 몇해째 처서판을 돌아다니다가 페가를 했으니 걸핏하면 당국을 물고늘어지는것이지 애초에 무슨 사상같은것이 있어서 그러는것 같지는 않소. 문제는 이러루한 기분, 말하자면 분위기란말이요. 스즈끼상은 광산이나 탄광 같은것은 잘 모르겠지만 이런자들의 기분이라는것이 꼭 탄광굴속에 가스가 잔뜩 들어차있는 상태와 비슷하단말이요. 여기에 불만 달리면 튀오. 그래서 냄새를 잘 맡아야 한다는거요.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제국에 대한 감정이 제일 나쁜것이 강석보라고 아까 그 옥암동 류석진령감과 아주 가까운 령감이 있소. 게다가 강정섭이라고 그 령감의 손자가 다 커서 여태 하칠소토장에서 벌어먹고있소. 이놈이 원체는 나한테 팔려서 금천동에 가게 되여있었는데 딱 맞서서 돈을 떼먹을 차비요. 내가 하칠소에서 알아보니 이놈이 거기서 불온한 말을 많이 했소. 유격대가 쳐나왔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소. 그러니 이놈의 집과 가까운것들은 늙은것이나 젊은것이나 다 일단은 점을 치고 봐야 한단말이요.》

《가만, 이제 그 령감 이름이 뭐라고?》

스즈끼는 웃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여 제창 그 뒤등에 꽂혀있는 가는 연필의 심을 혀끝으로 추기며 물었다.

《강정섭이 그리고 령감은 강석보던것 같소. 보오, 바로 저놈이요.》

하고 리호철은 마침 나무사이로 바라보이는 동구길을 가리켰다.

《대체 어떤놈이야?》

스즈끼는 서둘러 수첩에다 몇자 적어넣더니 그것을 웃주머니에 건사하느라고 몇번 헛손질을 해가며 호철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동네로 들어가는놈 있지 않소?》

두놈은 땀내를 맡을만큼 바투 붙어서서 나무사이를 기웃해보았다.

토스레적삼을 걸친 더벅머리 총각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터벌터벌 걸어가고있다.

《저건 애숭이가 아닌가? 저런게 그렇게 말썽인가?》

스즈끼는 리호철을 경멸에 찬 눈으로 돌아보며 말하였다. 어떻게 놀았으면 저런 애숭이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가 하는 눈치다.

호철은 속으로 발끈하였지만 참았다.

《난 이제는 아무래도 여기를 떠날 사람이니 스즈끼상이 한번 겪어보오. 어떤가?》

《여보, 여보, 당신네 조선인들은 과연 말을 좋아한단말이야. 무슨 긴말이 필요한가. 말 안들으면 들을 때까지 잡아족칠판이지.》

《흥, 덮어놓고 그래보오. 그들은 몽땅 공산당을 찾아가서 당신을 고발할게요. <일시동인>정책이 왜 나온줄 아오?》

《지금은 비상시국이란말이야. 불온분자는 모조리 잡아족치라는 토벌본부의 엄명이 내렸단말이야.》

그들은 이런 수작을 나누며 산비탈을 다 내려서서 우선 《이시가와구미》현장사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