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3


 
 

제 2 장

3

 

깊은 밤에 한 사나이가 현촌에 나타났다. 그는 봉화재와 잇닿은 나지막한 언덕을 타고 내려왔는데 그 언덕에 접하고있는 조영란이네 집 뒤뜨락으로 접근하여 비밀쪽문을 열고 소리없이 새여들었다.

부엌뒤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누구예요?》

잠자던 조영란이 놀라 소리쳤으나 《나요.》하는 대답소리를 듣고는 곧 문을 열어주었다.

키가 크고 버쩍 여윈자가 부엌으로 그림자처럼 들어왔다.

《어, 춥군. 술 있소?》

그는 부엌에서 서성대며 두손을 따뜻한 부뚜막에 대였다. 자다가 깨여난 조영란이는 선하품을 해가며 술상을 차려 사랑방에 가져다주었다.

사나이가 모자를 벗고 덧옷을 벗었다. 코밑과 턱과 귀밑에 검은 수염이 한벌 덮이였는데 꺼져들어간 볼과 움푹한 눈확에 그늘이 지고 그 그늘속에서 눈이 사납게 번뜩이였다.

《군치안대장》을 한 지주 현무림의 아들 현상도인데 이자가 옥금이의 아버지를 학살하였다. 서른살 좀 넘은 젊은놈인데 여위고 털투성이여서 쉰살넘은 조영란이보다 더 늙어보였다. 그가 전쟁시기 밤이면 봉화재에서 신호탄을 쏴올리군 하였다.

그는 술과 안주가 차려진 개다리소반을 마주하고 앉기 바쁘게 연거퍼 술을 서너잔 마시였다.

그리고 북어를 찢어서 초간장에 묻혀 깨물기 시작했다. 지친듯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턱을 놀려 씹는데 볼따귀에서 주먹같은 근육이 불끈불끈 움직이였다.

한동안 든든한 하악골을 놀리기만 하던 그가 우묵한 눈을 들고 이마너머로 조영란이를 바라보았다. 빈속에 넣은 알콜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가면서 기운이 뻗친듯 그늘속에서 눈알이 번뜩이였다.

《옥금이가 협동조합을 조직했다지?》

거쉰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으며 나오는듯 했다.

《조직했다구요.》

《아주머니는 그 무슨 강연회라는데 가보았소?》

《가보았지요. 그런데를 부지런히 다니며 소식을 날라다 달래지 않았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소?》

술을 새로 부어마시고 삶은 감자를 한입 물고 우물거리다가 삼키는데 그에 따라 여윈 목에서 날카로운 울대뼈가 분주하게 오르내리였다.

조영란이는 최근배가 조합을 조직하는것을 헐뜯은데 대하여 말하면서 그런것들이 뒤에서 요언을 내돌리고있어서 자기는 별로 할 일이 없었노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회의에서 론의된 근본문제보다 자기가 장칠복의 기를 눌러놓은것이 제일 인상깊어 그것을 두드러지게 장황하게 늘어놓고나서 《참 재미났어.》하고 좋아했다.

현상도는 생기에 넘쳐 반짝이는 과부의 크고 까만 눈을 쏘아보며 (바람쟁이아낙네 같은게. 제 나이 몇살이라구 아직 속은 살아서, 쳇, 더럽군.)하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최근택이가 조합을 지지하여 가입했다는것과 조합이 옥금이네 집에 사무실을 정하고 아침마다 종을 뗑뗑 울린다는 말을 듣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현덕칠이며 정의춘이며 그밖의 주목되는 집들의 형편을 더 물었다. 집에서 술도 파는 조영란이 모르는것이 없었다. 먼걸음과 지나친 흥분에 지치고 술에 취한 현상도는 곧 드러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 조영란이는 이불을 덮어주며 나직이 한숨을 쉬였다. 현상도는 잠결에도 이를 갈며 무슨 욕설을 해대였다. 전략적후퇴시기 당원들과 애국농민들을 쏴죽이고 쳐죽이던것과 같은 류혈참극이 또 생기지 않겠는지? 조영란이는 《하느님!···》하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조영란이는 속이 조마조마해서 현상도가 집에 머무른 며칠간을 불안속에서 보냈다. 그 녀자가 겁나할만도 했다. 이튿날저녁에 그 녀자는 현상도의 지시를 받고 사람 둘을 몰래 데려왔다. 한사람은 이웃마을인 당촌에 사는 부농의 아들로서 군대를 기피했다가 자수한자였는데 얼굴이 막스럽게 생기고 눈빛이 침울했다. 다른 사람은 현상도의 먼 친척벌되는 농민이였다.

《정전협정은 일시적이고 미군이 다시 북상할 날은 멀지 않소.》하고 현상도는 그자들에게 말했다.

《공화국은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너무도 크기때문에 다시 일어서지 못하오. 큰 상처를 입고 피를 흠뻑 흘린 짐승이 어차피 죽게마련인것처럼 말이요. 그렇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단말이요. 그래서 그 숨통을 마저 끊어버리려고 우리들이 이렇게 숨어서 싸우는거요.》

그물그물 타오르는 기름등잔밑에서 이처럼 졸개들에게 지껄이는 현상도의 우묵우묵 그늘이 진 길숨한 얼굴에서 두눈이 차겁게 번뜩이였다.

《그간 당신들이 내 지시를 받들고 일을 잘했소. 당신들이 내돌린 여론이 마을에 쭉 퍼져서 최근배같은자가 그걸 받아물고 퍼뜨리고있소. 강연회에서 협동조합조직을 반대해서 연설도 하고··· 이런자들을 하나둘 거머쥐여야 하겠소.》

《정의춘령감을 어떻게 할가요?》

당촌에서 온 젊은놈이 투박하게 물었다.

《그 령감이야 자네 아버지나 같은데 뭐 어떻게 할거 있나? 기본 의거해야 할 사람이야.》

《저의 부친은 정령감을 좋게 보지 않아요. 정령감이 량다리치기를 하면서 너무 조심스럽게 사니까요.》

《그거야 공화국정권밑에서 살자니까 보자기를 쓰고 량다리치기놀음을 하는거지. 협동조합을 하면 자네나 정령감같은 부자집은 저 쏘련에서처럼 청산당하네. 토지개혁때는 나같은 지주를 청산했다면 협동화때는 부농을 청산하구 최근배처럼 밥술이나 먹는 사람들것을 빼앗아서 가난뱅이들한테 붙여주는거라구 내 말했지?》

《그건 알아요. 그래서 여론두 그렇게 내돌렸지요.》

《그런데도 최근택이는 조합에 들었단말이야! 최근택이 가을에 가서 속았다구 가슴을 치면서 통탄하지 않겠거들랑 이제라도 조합에서 나오라구 구슬리게. 한데 근본은 그런자들이 아니야. 옥금이야. 이런 열성분자때문에 마을이 녹아나네. 이년이 제 애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잘 알겠는데 아직 피맛을 더 봐야 정신 차리겠는가?》

담배연기를 코구멍으로, 수염덮인 입으로 내쏘며 현상도가 으르릉거리였다.

《그년을 아예 없애치우면 어떻겠소?》

당촌에서 온 젊은 놈이 막스럽게 생긴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말했다.

《살인을 할것까지야 있나! 》

여태 잠자코있던 늙수그레한 농민이 흠칫 놀라며 하는 말이였다.

《그것만 제껴치우면 마을이 편안할게 아니요. 해치웁시다. 오늘 밤에라도···》

사람죽이는것을 파리를 잡는것만큼이나 별찮게 보고있는 이 인물은 사실 전략적후퇴시기 멀리 강원도에 있는 외가집에 가서 《치안대》에 가담하여 숱한 사람들을 죽이였다. 그러나 자수할 때 그것은 빼놓고 했다. 미제놈이 다시 들어올 때까지만 목숨을 부지하면 되니까.

그런데 정전이 되였으니 미제놈이 다시 들어오기는 당장 틀린것이고 그래서 불안을 느끼며 자포자기에 빠져 현상도가 시키는 일을 가리지 않고 하였다. 이자와 달리 목적이 뚜렷하고 행동이 의식적이고 고등교육까지 받은 현상도는 무분별한 행위를 허용하지 않았다.

《옥금이 하나 죽이는건 간단해. 아직은 목숨을 살려두자구. 서뿔리 행동하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위태로울수 있으니까. 살려두고 괴롭히잔말이야. 이게 더 좋은 수야.》하고 현상도가 말했다.

그들은 앞으로 할 행동의 구체적인 계획을 짜느라고 밤을 거의 밝히였다.

모임이 끝나자 당촌부농의 아들 영구가 《뭐 좀 마시구 헤여집시다.》하고 간청했다. 현상도가 싹 거절했다.

《우리가 중요한 모임을 가지고 새로운 결심을 한후 술을 마시고 정신이 흐려지면 되겠나? 첫 시작부터 말이야. 아차 실수하면 망하는 판이야. 참고 견디자구! 승리한 후에 내가 서울 우리 집에 초청해다 연회도 베풀고 상금도 듬뿍 안겨줄테니까 그때 실컷 마시구 놀아보세.》하고 현상도는 엄하게 질책했다.

젊은 놈은 찌뿌둥해서 물러갔다. 그는 래일의 산해진미보다 지금의 술 한잔이 더 낫다구 여기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