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산마루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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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동지께서는 대동강기슭으로 나오시였다.

남강이 대동강으로 흘러드는 합수목대안인데 바다가처럼 흰 모래와 자갈이 깔려있어 걷기에도 좋았고 대동강의 장쾌함과 아름다움을 한눈에 굽어볼수 있어 좋았다.

강물이 유유히 굽이치고있었다.

그이께서는 왕무한의 편지를 다시 음미하며 사색에 잠기시였다.

이제 이 사실이 터지면 많은 사람들이 놀랄것이다. 우리 시대에 옛왕족의 후손이 나타나다니, 그것도 조상의 족보를 간직하고있은 직계후손이··· 왕씨가문으로서는 일대 사변이라고 봐야 할것이다. 대와 대를 넘겨오며 피줄과 함께 그 족보를 오늘까지 보존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깃들었을것인가. 넘겨주고 넘겨받는 600년의 나날 그들의 심중에는 과연 무엇이 끓고있었을가.

김일성동지께서는 고려태조 왕건의 후손들의 소행에서 조상을 귀중히 여기는 우리 인민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지극한 효도에 대하여 다시한번 느끼게 되시였다.

한 민족의 력사란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얼마나 많은 왕조가 바뀌여왔는가. 고려의 력사도 약 500년으로 끝났지만 민족의 력사는 줄기차게 이어져왔다. 오늘까지 반만년을···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 반만년의 력사를 똑바로 정립하지 못하고있다.

수령님께서는 우리 민족의 력사를 두고 계속 사색을 이어나가시였다.

단군이 실제한 인물이라는것을 증명하지 못할가. 문득 떠올랐던 게시는 대동강물에 흘러가버린듯 사라지고 갑자기 막막한 생각이 드시였다. 그이께서는 봉화리에 사시던 다섯살때 아버님을 따라 단군묘에 가서 숱한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광경을 목격하신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님은 저 교인들이 이 묘에 꼭 단군의 유골이 묻혀있다고 믿어서보다는 민족정신의 중심력을 잃지 않으려는 애국의 발현으로 제사를 지내는것이라고 하시였다.

아버님께서는 어리신 아드님의 손을 꼭 쥐며 말씀하시였다.

《단군에 대한 숭앙은 민족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의기이다. 저 묘를 한갖 우상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수령님께서는 그 릉을 1960년대에 돌아보신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오늘 강동땅의 《우상》은 형체마저 없어지고 그 주변에는 주택들이 들어앉았다고 한다. 김상준 등이 세웠다고 하는 기적비는 어찌 되였는지 학계는 단군연구를 아예 줴버렸는지 감감무소식이다.

그이께서는 이 문제를 두고 곰곰히 생각해보기 시작하시였다.

학자들도 민족의 아들일진대 민족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민족이란 국가의 성립으로 그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는데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처음으로 이 땅에 나라를 세운 그리하여 민족의 원시조로 된 조상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단군이 실제한 인물이고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시조이며 오랜 옛날부터 강동에 있는 단군릉을 실재했던 단군의 무덤으로 간주하고 제사를 지내왔다는것은 소설뿐아니라 옛 문헌에도 명백히 기록되여있다.

학자들도 이 모든것을 알고있을것이 아닌가. 알아도 너무나 잘 알것이다.

그이의 기억에 의하면 김석진자신이 수많은 기록들을 찾아냈다. 그런데?···

김일성동지께서는 사색을 계속하시였다.

뭔가 원인이 있다. 왕무한의 편지를 본 다음순간 그이께서는 력사학자들에게 보여야겠다는 충동을 받으시였는데 그 충동이 어디서 온것이였는지는 지금에야 정립되는것이였다. 지금쯤 김석진이 편지를 보고있을것이다. 그가 그 편지에서 무엇을 읽을것인가. 고대상형문자도 아니니 풀이하기에 어려운것도 없을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 쌓인 그 속마음을 다 헤아리겠는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한생 력사연구에 몸바쳐온 그, 거기에 애국, 애족이 있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열변을 토하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를 자신처럼 믿으시였다. 원시조를 찾는 일에서 뜻과 호흡을 같이 하자고 왕무한의 편지를 보내주시였다.

그래도 피가 끓지 않는다면 반드시 문제가 있다. 이전에 그는 《단군릉》을 우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뭐라고 했던것 같은데···

그의 시야를 뭔가 가리우고있다. 그뿐아니라 수많은 학자들의 시야를 가리우고 그들의 사고를 마비시키고있는 장애가 있다.

일제의 단군말살책동! 그렇다, 그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벌써 항일무장투쟁시기 신채호 등 진보적인 학자들의 글을 통해 일제의 단군말살책동에 대해 그 전모를 알게 되시였다.

해방후 우리 학자들도 많은 글을 썼으며 지금도 쓰고있다.

일제는 옛기록에 전하는 단군조선의 건국년대가 저들의 허황한 건국신화에서 전하는 국가기원년대(B. C. 660년경)보다 근 1 700년 앞서게 되므로 단군조선에 대한 력사기록을 무시하였다. 일제는 단군력사를 말살하지 않고서는 《우수한》 야마도민족이 《렬등》한 조선민족을 《동화》시켜 지배해야 한다는 날강도적인 식민지지배설을 합리화할수 없다고 여겼다.

일제는 우리 력사에서 단군을 말살하기 위해 경찰들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의 책방들과 개인집들을 샅샅이 뒤져 단군관련력사책들을 비롯한 귀중한 우리 력사와 문화, 지리책들을 수십만권이나 압수하여 불태워버리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유구한 우리 민족사를 저들의 력사보다 뒤늦은것으로 만들기 위해 1915년부터 《총독부》《중추원》에 조선사편찬기관을 설치하고 력대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의 직접적인 지휘밑에 조직적인 조선사위조행위를 감행하였다. 일제는 《조선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자료가 부족하다는 구실을 걸어 《단군조선》의 력사를 빼버리였으며 이마니시와 같은 력사위조의 명수들을 내세워 단군이 후세에 꾸며낸 신적존재이며 실재한 인물이 아니라는것을 애써 《론증》하게 하고 단군이 신화적인물이기때문에 《조선사》에 서술할수 없다고 강다짐으로 우겨왔다.

또한 단군을 말살하는데서 장애가 되는 인물들은 설사 그가 일본인이라 하여도 가차없이 조선사편찬기관에서 제거해버리였다. 이렇게 되여 단군조선의 력사는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으며 단군의 신화적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였다.

만일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단군을 실재한 인물로, 건국시조로 인식하여온 조상전래의 관념은 오늘까지 계승되였을것이며 단군조선에 대한 연구에서도 상당한 전진이 있었을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아직도 학자들이 단군연구를 외면하고있는것은 단군말살책동의 후과때문이라고 일단 결론을 내리시였다.

그리고 다시 음미해보시였다.

또 다른 원인이 있는것은 아닌가?

그이께서는 왕씨가문이 내놓은 족보와 옥새를 상기하시였다.

600년간 숨겨온것을 로동당시대에 와서 내놓은것은 반가운 일이고 이 시대의 각이한 인간들이 로동당의 정치에 드리는 례찬중의 하나로 볼수 있다. 그런데···

그이께서는 당조직을 통해 올라온 왕무한의 편지와 유물을 받으셨을 때 처음 너무 희한하여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였다가 곧 표정을 흐리며 침통한 어조로 《벌써 나왔어야지. 우리 로동당의 정책을 왕씨들이 너무 관망했구만. 이게 이제야 나온걸 보니···》라고 한마디 하시였다.

그때 곁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아뢴것 같다.

《수령님, 그래서가 아닙니다. 왕씨들은 600년을 숨겨왔습니다. 로동당시대는 아직 50년도 안되지 않았습니까. 그 50년이 600년에 종지부를 찍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마음이 결코 가벼워지지 않으시였다.

강동 력사교원의 처벌문제를 저지시키던 일도 생각키워지시였다. 편협한 일군들에 의해 국보가 묻혀있은 사실에 격분하시였다.

일군의 오점은 그것으로 그치는것이 아니라 당의 권위에까지 손상을 주게 된다.

의심할바없이 김정일동지께서도 그렇게 생각한것이다. 그래서 김정일동지께서는 일군들, 특히 당일군들에 대한 요구성을 비상히 높이고있는것이 아닌가.

그러나 일군들이라고 해서 다 준비된 사람일수는 없다. 지금도 그때의 강동군의 일군과 같은 사람이 있을수 있다. 성분과 계급적토대를 애국심앞에 놓는···

왕무한의 경우가 그것을 말해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과학연구부문에서 사대주의, 교조주의, 수정주의를 뿌리뽑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던 나날들을 잊지 않고계시였다. 그때 좌우경을 범하지 말라고 그렇게도 강조하시였지만 일부 무식하고 편협한 일군들에 의해 이러저러한 편향을 가져왔으며 본의아니게 과학자들의 연구에 장애를 놀았다.

지금도 그런 일들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수 없다. 그 후유증으로 과학계에서 뭔가 주저하는것은 아닌가?

강바람이 불면서 비릿한 물냄새가 풍겨왔다. 대동강은 소리없이, 순간도 쉼없이 흐르고있었다. 무심한 저 흐름속에 얼마나 많은 력사의 만단사연이 깃들어있는가.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 사색을 끊고 먼 상류쪽을 바라보시였다.

굽이굽이 맥전쪽으로 폭을 좁혀간 강물, 대동강의 시원은 어딘지··· 대홍군의 심산유곡이라는것은 알고계시였으나 가보지는 못하시였다. 조국의 최북단 선봉땅이며 비단섬에 이르기까지 80평생을 살점같이 귀한 이 나라 방방곡곡을 다 밟아보느라 하였지만 그곳만은 가보지 못하시였다.

해방직후 양덕군 구지골을 찾으시였던 때가 불쑥 생각키우시였다. 그곳이 얼마나 심산유곡이였던지 그때 구지골의 오솔길에서 처음 맞다든 한 녀인은 길을 묻는 수행원에게 어인 남정네들이 길가는 아녀자에게 함부로 말을 걸수 있는가고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사람들을 당황케 하였었다. 밤에는 불빛을 찾아 내려온 짐승들이 통나무문짝을 흔들어대는 그 험한 산속에 사람들이 나타난것도 평생 두고 이야기할 희한한 일인데 자기에게 말까지 건늬였으니 여직껏 살면서 세태에 부대껴보지 않은 녀인이 울음을 터뜨릴만 했다.

(내가 왜 여태 대동강의 시원을 찾아가보지 못했을가?)

일찌기 민족의 아들이 될것을 결심하신 그이이시였다. 그때의 민족이란 망국노가 되여 류랑걸식하는 겨레였다. 그 겨레를 자주의 나라,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사회의 주인으로 되게 하심으로써 민족의 아들로서의 초지를 실현하시였고 본분을 다하시였다. 그리하여 오늘 겨레들로부터 민족의 어버이로 떠받들리우고계신다.

허나 여전히 민족의 아들임을 잊지 않으시였다. 그이에게 있어서 민족이란 결코 오늘에 존재하는 인민일뿐아니라 먼 민족의 력사와 그리고 래일이였다.

민족의 오늘을 위해 하실수 있는것을 다하신 그이께서는 이 시기 민족의 과거를 더 많이 생각하시였다. 그 과거는 언제나 미래와 련결된것이였다.

그렇다.

그이께서는 민족의 오늘과 함께 민족의 어제와 그리고 래일까지도 다 걷어안고 모질게도 마음을 쓰시였다.

저녁노을이 비낀 강물이 붉은빛으로 흐르고있었다.

그 아름다운 저녁노을에는 이 세상을 위해 종일토록 불타온 거대한 불덩이의 마지막잔향이 비끼고있었다.

수령님께서는 얼마전에 찾아가셨던 왕건릉이 눈앞에 떠오르시였다.

··· 릉을 어루쓸며 지나가는 소슬바람, 지져대는 봄볕, 김일성동지께서는 왕건릉앞에 오래도록 서계시였다.

부관이 참을수 없어 간청을 드렸다.

《수령님, 이젠 내려가십시다.》

《만사전페하고 왔소!》

한마디 하시고는 움직이지 않으신다.

이른새벽에 평양을 떠나 먼지 이는 로상에서 간단히 아침요기를 하시고 개성시를 찾으신 김일성동지께서 왕건릉을 찾으셨을 때는 오전일정이 거의 끝날무렵이였다.

《수령님.》

부관이 재차 청을 드리려고 하자 《만사전페하고 왔다질 않소.》하고 일축하신다.

고령이시였지만 여전히 다망하시였다. 오후에도 돌아보실 곳이 많았다.

그 전날도 자정이 넘도록 금방 유발되고있는 《핵문제》와 관련한 김정일동지와의 토론이 있었고 이제 돌아가시면 몸소 비준하셔야 할 문건이 수십건이나 쌓여있다. 그밖에도 그이께서만이 하실수 있는 미룰수 없는 하나의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집필이였다.

그이께서는 얼마전 탄생 80돐을 맞으며 회고록 1~2권을 내놓으시였다. 해내외 우리 겨레는 물론 세계적인 반향이 대단하였다. 그리스도교권에 있는 나라들에서까지 그이의 회고록을 예수의 복음서를 무색케 하는 《인간성서》라고 찬미하고있었다. 수많은 해내외 인사들과 우리 인민들로부터 련속편을 하루빨리 써주실것을 요망하는 편지를 보내여왔고 각급 당조직들이 회고록을 마저 써주실것을 조직적으로 제기해왔다. 마치 그이의 중요한 국사가 그것이고 오직 그것만을 하셔야 하는것처럼···

여기로 떠나오기 전에 자신을 바래주시며 김정일동지께서도 그것은 당과 인민의 요구라고 하시였다.

인민의 요구를 언제한번 무심히 흘리신적 없는 그이이시였지만 김일성동지께서는 기어이 떠나시였다. 그렇게 떠나신 걸음이니 어찌 유원지 돌아보듯 하고 돌아서실수 있으랴.

해선리··· 38°선이 해체된 곳이라고 해서 전쟁후에 붙은 지명이였다. 차길도 변변치 못하여 수행일군들의 만류를 제지하느라 적지 않게 마음을 쓰셔야 했다.

천천히 릉주변을 돌아보신다.

벌써 몇고패째였다.

《촌부자무덤같소!》

역시 몇번 곱씹으신 말씀이였다. 울분이 어린 어조···

역적 리성계의 외면과 외적의 침노로 왕건의 유골은 몇번 옮기지 않으면 안되였고 그 과정에 릉은 형편없이 초라해졌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는 고려 32대왕 공민왕릉이 웅장하게 앉아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고려의 시조왕릉은 실로 촌부자무덤이였다.

《첫 국토통일의 조상을 이렇게 모셨으니···》

그이께서 혼자말씀처럼 뇌이시였다.

그이께서 추연히 머리들어 바라보시는 곳에 국토분렬의 상징인 콩크리트장벽이 막아서고있었다. 저앞의 갈숲에서 한무리의 메새들이 무리지어 날아올라 소란스럽게 울어댔다.

부관은 물론 당과 정부의 어느 간부도 더는 내려가시자는 청을 드리지 못하고 입을 봉하였다.

그이께서는 당시 릉을 굽어보시였다.

외세에 의해 3천리강토가 둘로 갈라진지도 어언 반세기가 되여온다. 그러니 국토통일의 조상이 어찌 맘편히 눈을 감고있었으랴.

이윽고 고개를 드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또박또박 점찍어 말씀하시였다.

《왕건릉을 개건해야겠소!》

그이의 마음속에는 왕건이 세운 통일국가의 국호로 불리우는 흰바탕에 푸른색의 지도가 새겨진 통일국기가 나붓기고있었다. ···

강풍이 불고 강물이 멀기를 일쿠며 밀려오더니 처절썩 기슭을 쳤다. 그 소리는 작은 메아리였으나 그이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력사의 풍운속에 묻힌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아니랴.

저쪽 차를 세워둔 곳에서 김석진에게 다녀온 전기철이 운전사와 함께 그이를 기다리고있었다.

하지만 그이께서는 좀처럼 강기슭을 떠나려 하지 않으시였다.

(단군력사를 밝히는데 또 어떤 장애들이 있을것인가?)

그이께서 강동의 단군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신것은 바로 이 순간이였다.

(김정일동지가 종합대학에 다닐 때니까 벌써 30년세월이 흘렀군.)

그이께서는 단군묘를 돌아보신 그날을 다시금 더듬어보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