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산마루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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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원사는 끝없이 불안하였다.

해외출장에서 돌아와보니 그사이 리관직부원장이 직접 인솔하고있는 발굴대가 남강1호구역에서 고조선시기 대표적유물들을 발굴하고 거기에서 함께 나온 유골이 단군시기의것으로 인정된다는 과학협의회의 견해를 김일성동지께 보고드렸다고 한다.

유골에 대한 측정은 단군유골때와 마찬가지로 류산칼시움선량계를 유골이 출토된 곳에 3개월이상 매몰하여 년간선량을 알아야 하는것만큼 그에 대한 과학적인 수자는 없지만 과학협의회에서 그렇게 보기로 합의했다는것이다.

원사의 불안은 거기에 있었다. 왜 그다지도 서둘렀는가?

자기의 대리인으로 남겨두고 간 리관직이 직접 유골을 들고 다녔고 측정에도 참가했으며 과학협의회도 주관하였다.

부원장이 소리치며 뛰여다닐 때에는 웬간한 사람은 미처 정신차릴 사이가 없어한다는것을 원사는 알고있었다.

협의회에 참가한 학자들에게 물어보니 자기들이 손을 든 문제인데도 떨떨한 대답을 하였다. 덤벼치는 일이 잘되는 법이 없고 덤벼치면 그만큼 흘리는 점이 많게 된다. 자그마한 오차도 허용되여서는 안되는 과학사업에서 덤벼치는건 절대적인 금물이다.

원사가 초보적으로 료해한데 의하면 박진규가 수령님께 올렸다는 이 보고자료에 반대의견을 가지고있다고 한다. 원사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원사는 낮에 비행장에 내렸지만 날이 어둡도록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방에 앉아있었다. 원사는 유네스코가 조직한 국제정치학토론회에 참가했었는데 그 회의에서 있었던 이러저러한 일들이 또한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김일성동지께서 이미 30년전에 예견하시였던것처럼 세계화바람으로 현시기 세계정치가 혼돈에 빠지고있었다. 세계화의 주차장인 미국에 의해서 약소국들이 그의 손탁에 휘둘리우고 민족의 전통과 문화가 말살되고있었으며 특히 수백종의 민족어들이 사라져가거나 이미 사라져버렸다.

이 회합에서 김석진원사는 세계화의 주창국들이 약소국의 민족성을 무시말살하는 리면에는 사실상 자기들의 민족성을 살리며 세계를 1극세계화하여 저들의 지배주의적야망을 실현하려는 흉계가 깔려있다고 호되게 비판하면서 조선로동당의 옳바른 정책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민족성이 옳게 계승발전되고있는데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그 례증으로 우리 나라 5천년민족사가 정립되고있는 사실을 들었다.

그의 연설을 듣고 주변나라들이 깔지락거리였다.

특히 일본대표단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이미 수십년전에 김석진 등 우리 학자들에 의해 풍지박산된 《임나일본부》설을 또다시 들고나왔다. 그들은 그 근거로 고구려의 광개토왕의 업적을 칭송하여 세운 광개토왕릉비문을 들고나왔다.

이 릉비는 광개토왕의 맏아들 고거련(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13년전인 414년에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였던 즙안에다가 세웠다. 릉비의 존재가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력사의 이끼속에 묻혔다가 1880년경에 밭갈이하는 농부에 의해 발견되였는데 비문의 글자수는 44행 1 775자 혹은 1 802자 등으로 조사자에 의해 약간씩 차이가 난다.

릉비문은 크게 세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여있다. 우선 고구려의 시조왕 고주몽(추모)의 출생으로부터 광개토왕의 등장과 사망에 이르는 내용을 서론격으로 서술한 다음 광개토왕의 령토확장업적을 년차별로 언급한 부분과 마지막으로 묘지기(수묘인)에 대한 규정내용으로 되여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고구려의 독특한 예서의 웅건한 필체로 써놓았다.

김석진원사는 30~40대의 일본의 젊은 력사학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세기전 제 조상들이 위조해놓은 자료를 가지고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까지 들고다니는데 분격하였다.

그는 아들이나 손자벌이 되는 그들앞에서 소리는 치지 않고 하나하나 조리있게 깨우쳐주었다. 그는 이 문제에서는 진정 박사였다.

···1882년 당신네 나라 륙군참모부의 군사정탐인 사까와가 릉비탁본을 이리저리 맞춘 쌍구본을 당신네 나라로 가져갔다.

당신네 군부는 쌍구본이 전재되자마자 륙군참모본부의 지하밀실에서 조선과 만주침략을 위한 불순한 정치적목적밑에 력사적사실과 맞지 않는 토기조일관계사의 기본틀거리를 조작해냈다. 다시말하여 야마또정권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을 가장 큰 《근거》로 하여 증명되였다고 날조한것이다. 구체적으로 신묘년(391년)기사의 내용을 중심으로한 아전인수격의 독법에 기초한 《력설》이다.

신묘년기사에 《왜》가 나오는것을 제꺽 야마또(왜)로 둔갑시켜 《4세기말 5세기초에 일본렬도를 통합한 〈야마또조정〉이 조선반도의 패권을 쥐기 위하여 남하하는 고구려와 격전을 벌렸다.》고 하는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광개토왕릉비는 아들(장수왕)이 부왕(광개토왕)을 위해 세운 고구려의 공적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도 당신네 나라 사람이 세운 비석으로 착각하거나 현혹되는 경우가 있게 되였다. 그것은 릉비가 발견된 이래 릉비문연구가 당신네 나라 특히 당신네 군부의 지하밀실에서 진행되였고 그후 도꾜제국대학의 국사과를 중심으로 제기되였기때문이다.

다시말하여 광개토왕릉비문연구는 당시의 정세하에서 당신네 나라의 주도하에 진행되였다. 조선은 당신네 나라에 의해 비법적으로 강점되였고 중국은 자기네 나라 땅에 릉비가 있었음에도 관심을 돌릴 형편이 못되였다. 일부 서예 또는 금석학에 흥미를 가진 학자들에 의해 일련의 릉비관련글들이 나왔으나 그것들은 학술상 큰 전진이 없는 글들이였다.

학술상 큰 전진이 없었다는것은 당시 여러가지 정치적요인이 있었으나 기본은 릉비가 조선사람들이 남긴 비석이고 새김글이였기때문에 청나라는 물론 력대 중국학자들도 고구려를 조선의 나라로만 보았지 중국의 나라로 보지 않았다. 이것이 릉비연구에 전진이 없었던 최대의 원인이다. 비록 리조시기 광개토왕릉비를 녀진족이 남긴 비석으로 보는것과 같은 착오를 범하기는 하였으나 당신네 나라 사람들에 의해 희여록(1889년)을 비롯한 글들이 지상에 발표되자 최대의 관심이 모아져 여러가지 글들이 신문과 잡지에 련속 실리게 되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외곡된 광개토왕릉비문을 바로잡고 당신네 《임나일본부》설을 반대하는 투쟁을 대를 이어 진행해왔고 로동당시대에 와서 우리의 력사를 바로잡게 되였다.

그런데 당신들이 이것을 또다시 꺼들고있는것은 당신네 나라가 아직도 조선에대한 재침의 야망을 버리지 않고있다는것을 말해준다.···

일본의 력사학자들은 이번 회합을 통해서 회합의 기본주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우리 나라의 옛 고분인 안악3호무덤과 덕흥리무덤의 주인공(피장자)이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낡은 보따리를 펼쳐놓았다.

김석진원사는 더는 격분을 참을수 없어 책상을 쾅 하고 치며 소리쳤다. 당신들은 력사학자가 옳긴 옳은가? 아니면 정치사기군인가? 그것도 아니면 력사무식쟁이인가?

일본학자들은 더더욱 후안무치하게 나왔다. 그들은 독도에 대해서도 자기네 땅이라고 횡설수설하였다.

원사는 이들의 뒤에 부활된 군국주의망령들이 움직이고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제 《단군릉발굴보고》가 공포되면 또 어떤 도전에 부딪칠것인가?

원사는 그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원사의 력사연구의 한평생은 실제상 일본학자들의 력사외곡행위와 맞서 싸운 한생이였다. 그러므로 그는 일본학자들의 검은 속심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자기네 《일본은 조선보다 력사도 오래고 문화도 오래니 렬등민족을 지배하는것은 예나 지금이나 력사의 필연》이라고 생억지를 쓰면서 과거 식민지지배도 이것으로 정당화하는 일본것들이 새로 정립된 고조선의 력사를 어떻게 대할것인가?

새로 정립되고있는 고조선의 력사는 일본 야요이문화의 조선적성격을 더욱 부각시켜주게 된다. 일본의 야요이문화는 신석기문화인 죠몽문화와는 달리 농경문화, 금속문화를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는데 그것이 조선적성격을 띠고있다는것은 내외학계가 인정하고있다. 야요이문화가 조선적성격을 띠고있다는것은 그것을 보여주는 유적유물들이 처음에는 조선사람들이 일본렬도에 건너가서 만들고 후에는 원주민들이 그것을 모방하여 만들어 조선의것과 같거나 류사하다는것을 말한다.

그런데 최근 일본고고학계의 발굴결과에 의하면 벼농사를 비롯한 야요이문화를 특징짓는 제요소들이 지금 눌러놓은것보다 수백년 앞서 죠몽만기 즉 기원전 1천년 전반기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근거들을 제공해주고있다.

이것은 어김없이 기원전 3천년기부터 존재해온 조선의 농경 및 금속문화가 일본에 건너간것으로 된다. 발전된 고조선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하는 위력한 증거이다. 그러니 《단군릉발굴보고》에 일본사람들이 아연해져서 죽가마 끓듯 할것이며 이러저러한 도전들을 해올것이 명백하다.

이런 의미에서 김일성동지께서 《단군릉발굴보고》를 신중히 내게 하신것은 얼마나 정당한 조치인가!

김석진원사는 《단군릉발굴보고》를 서둘렀던 자신을 심각히 뉘우치면서 그야말로 완벽한 보고서를 만들어낼 결심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 마지막으로 제기하신 단군과 동시대의 유골을 찾아내는 문제에서 티끌만 한 허점도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원사가 제일 믿는 박진규가 의혹을 표시하고있다.

한사람이라도 반대한다면 거기에는 벌써 문제가 있다는것이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수령님께 올리였는가. 감히 그이께서 결론해주시기를 바라서인가.

이것은 과학문제이다. 과학문제를 수령의 권위를 빌어 해결 받자는건가?

그이께서는 과학에 권력이 개입하면 과학자체를 죽일수 있다고 한두번만 강조하지 않으시였다. 이것은 과학자들에게 책임성을 높이고 과학문제를 과학자들자신이 해결하라는 말씀이시다.

요행을 바라는건가? 아니면 책임회피인가?

만일 리관직이네가 올렸다는 보고자료가 그대로 통과되여 세상에 발표되였다가 문제가 제기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까지 흘러온 세계력사를 소급해보면 권력에 눌려 과학적량심을 줴버린 사람들, 공명에 넘쳐 사기협잡한 과학자 아닌 과학자들에 의해 인민이 우롱되고 나라의 권위가 훼손된 경우가 없단 말인가?

과학계의 원로인 김석진원사에게 있어서 이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였다. 그의 고민은 계속되였다. 비행기안에서 대충 요기를 한데 불과한 그는 저녁 끼시간이 지났는데도 배고픈줄을 몰랐다.

보고를 올린지 며칠이 지났는데 그이로부터 아무 소식도 없다고 한다. 개천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그이로부터 왜 아무런 응답도 없으시단 말인가. 어제 유골과 함께 무덤에서 나온 도기(질그릇)쪼각을 올려보내라고 해서 올려보냈다고 한다.

이것은 그이께서 과학원에서 올린 보고에 그 어떤 문제점이 있어 자신께서 직접 확인하여보려 하신다는것을 의미한다. 완벽한 보고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것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죄송스러운 일인가.

이때 당비서로부터 퇴근하지 않겠는가고 전화가 걸려왔다.

필요할 때마다 걸려오는 당비서의 전화였다.

지금과 같은 때야말로 그에게 의지하고싶은 때였다.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받으며 같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때였다. 그러나 원사는 그더러 먼저 퇴근하라고 하고는 전화를 놓아버렸다.

원사는 당비서가 과학협의회에 참가한 사실을 알고있었다. 당비서가 과학협의회에 참가해서는 안된다는 법은 없다.

수령님께 올리는 과학문제가 토의되는 중요좌석에 응당 앉아있어야지. 당비서는 당위원회의 의장격이다. 그는 당중앙의 결정과 지시, 당중앙의 의도를 먼저 알고 그것을 전달하며 당위원들에게 분공을 주며 그들을 당중앙의 결정지시집행에로 조직동원하는것으로 하여 권위를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비서를 존중하며 당비서의 의사를 개인의 의사로가 아니라 당의 의사로 받아들인다.

당비서들의 어깨가 무거운것은 이때문이다. 한걸음한걸음을 정확히 내짚어야 하고 앉을 자리, 설 자리를 정확히 가려야 하며 한마디한마디에 신중해야 한다.

그날 당비서는 과학협의회의 중도에 들어와서 뒤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의장은 어디까지나 앞자리에 앉아있는 리관직이였다.

당비서는 이 과학협의회에서 한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등장은 회의분위기를 대번에 변화시켰다. 론쟁이 줄어들고 리관직이 지금까지 회의를 주도하면서 《수령님께서 바라시는건데》, 《그 방향에서》라고 강조한 바로 그 방향으로 회의참가자들의 기분이 돌아갔던것이다.

결국 리관직이 제안한 문건이 통과되였다.

당비서로서도 그것을 막아낼 힘이 없었던것 같았다. 리관직의 주장이야말로 얼마나 정정당당하며 혁명적이였던가!

그런데 김석진원사가 왜 당비서를 다시 만날 흥미를 잃었는가?

그는 과학원에 도착하자 당비서부터 만났다.

당비서는 그에게 박진규가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그리고 객관적자료가 아니라 자기식의 자막대기로 평가하고있지 않는가고 하였다. 지금까지 박진규를 적극 지지하며 지켜주던 당비서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원사는 가슴속에 떠돌던 불안이 더욱 짙어지는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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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기의 무덤에는 두가지의 구조형식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돌각담무덤이다. 문제의 유골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무덤인 돌각담무덤떼의 한 무덤에서 나왔다.

남강1호구역의 그 장소에는 수십기의 돌각담무덤이 있는데 그 구조형식이 아리숭한 하나의 무덤에서 고조선시기를 대표하는 비파형창끝과 조롱박형단지쪼각이 나온것이다. 그밖의 무덤에서 나온 유골의 존재년대는 불과 2천년에 불과했다.

박진규는 여기에 의문부호를 달았다.

그러나 리관직은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였다.

《진규동무, 고대성터는 고구려의 성터밑에도 있었소. 이번 발굴과정에 성토우에 무덤이 덧놓인 경우를 보지 못했소? 세계적으로도 그렇소. 유명한 트로이유적은 9층으로 도시유적이 겹쳐있었단 말이요. 그러니 고구려무덤떼에서 다른 시기의 유적이 나왔다고 뭐가 이상할게 있소?》

《문제의 유골이 구조형식을 알수 없는 무덤에서 나왔다는데 문제가 있는거요. 어떻게 그럴수 있겠소? 청암토성이나 지탑리토성은 부원장이 말하고있는 트로이유적과는 다르단 말이요.》

두사람은 화해한 직후였던만큼 서로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학술론쟁을 벌렸다.

 

리관직;《무덤떼안에 있는 무덤이라고 하여 모두 같은 시기에 속하는것이라고 단정할수 없지 않소? 고구려무덤과 고인돌무덤이 같은 떼안에 있는 실례도 있지 않는가 말이요. 내가 당비서에게 설명해주었더니 그는 인차 리해했소.》

박진규;《이 문제에서 당비서는 왜 꺼들이는거요? 그는 과학자가 아니요. 그러나 나는 고고학자로서 의문을 제기하는거요. 고구려무덤과 고인돌무덤이 한곳에 분포되여있는 실례들이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지점을 달리하고 분포되여있소. 남강의것처럼 한곳에 밀집되여있지 않단 말이요. 솔직히 말해서 내 눈에는 유골이 나온 무덤주변에 좀 남아있는 돌들이 돌각담무덤의 흔적으로 보아진다는거요.》

리관직;《그럼 비파형창끝을 믿지 않소? 그것이 고조선시기를 대표한다는것은 내 머리속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력사학계의 굳어진 견해가 아니요. 진규동무, 아직 나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되는건 아니요?》

박진규;《부원장이 그렇게 생각할가봐 자중했소. 그러나 말이 나왔으니 할 말을 합시다. 관직동무, 난 동무가 지난날의 결함을 고치려고 한다는걸 의심치 않소. 그런데···》

리관직;《그런데? 어서 말하오.》

박진규;《너무 조급해하는것 같소.》

리관직;《꼭 짚어 말하오.》

박진규;《과학적성과로 자기를 보여주는것은 좋은 일이요. 허지만 결함은 량심으로 고치는거요.》

리관직;《동무가 마음을 털어놓은 이상 나도 할 말을 해야겠소. 진규동무, 이번 발굴에서 고조선시기 무덤이 나왔으면 다가 아니요? 거기에서 마침 유골도 나왔으니 우린 응당 그것을 고조선시기 유골로 봐야 하지 않소? 수령님의 기대에 대답을 올릴수 있게 된것이 동무에게는 기쁘지 않소? 난 누구보다 동무가 기뻐하리라 믿었소.》

박진규;《나도 그 유물이 기쁘오. 그리고 한점의 의문도 가지지 않소. 내가 의문을 가지는것은 왜 5천년전 고조선시기의 유물이 고구려무덤떼에서 나왔겠는가 하는 점이요. 옥에는 티가 있을수 있어도 과학에는 한점의 티가 있어도 안되는거요. 원장선생도 없는 때에 심사숙고해주길 바라오.》

이 론쟁이 있은지 며칠 안되여 리관직은 박진규를 참가시키지 않은채(참가대상이 아니긴 하지만)과학협의회를 열고 급기야 수령님께 올릴 보고문건을 채택하였다.

리관직이 자기가 찾아낸 유골을 참말로 믿었단 말인가?

그랬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마음을 돌려먹기로 했던 박진규는 이 일로 해서 다시 생각이 번거로와지기 시작했다. 또 무슨 일을 칠것만 같은 불안이 들었던것이다.

박진규는 당비서를 찾아갔다.

오래간만에 당비서방의 문을 여는 박진규였다. 모든데서 정확하고 투철한 그는 세포비서와는 자주 만나 자기 사업을 보고하고 의견도 나누며 당생활을 해왔지만 당비서방만은 부르기 전에 먼저 찾아가 두드린적이 없었다. 당비서 또한 부르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박진규가 과학원당비서 한응삼의 앞에 나타났을 때 당비서는 그를 마치 처음 보는듯 한 표정으로 대하는것이였다.

박진규는 당비서의 표정을 보고 당혹감을 금할수 없었다. 《잡소리》문제가 제기되였을 때 자기를 지켜준 당비서가 아닌가. 그밖에도 이러저러한 힐난속에서 자기를 보호해준 당비서였다.

유골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기하자 당비서는 왜서인지 짜증이 섞인듯 한 어조로 《박진규선생, 좀 복잡하게 굴지 마시오!》라고 한다.

복잡하게 군다구?! 박진규는 더욱 당혹해졌다.

더 상소할데가 없게 된 박진규는 해외출장을 간 원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원장을 만나자 또 다른 실책을 범했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비파형창끝과 함께 나온 도기에 대하여 관심을 돌리지 못했던것이다.

뜻밖의 유적이 출토된 무덤의 구조형식에만 주의를 돌리던 나머지 도기에 대해서는 방심하였다. 그 도기는 료동의 고조선유적에서 대표적인 유적의 하나인 쌍타자유적에서 나온 도기와 색갈과 모양이 같기때문에 더 다른 고증없이 청동기시대의것으로 단정해버린 사실에 류의하지 못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도기를 찾으시여 올려갔다고 하니 과학자로서 이보다 더 큰 실책이 어디 있겠는가. 그가 이 문제를 이처럼 크게 보고 가슴아파하지만 사실 그에게 직접적책임은 없는것이였다. 왜냐하면 도기에 대한 처리를 리관직이 전적으로 도맡아했으며 박진규는 조롱박형단지쪼각이라고 단정지은 그 도기를 구경도 못했던것이다.

하지만 단군문제를 연구하고있는 학자로서 이 사실을 외면할수 없으며 책임을 회피할수 없다고 생각하는것이였다.

더구나 리관직이 찾아낸 5천년전의 유물에 대해 미타한 점이 있을가보아 그와 싸움싸우듯 했던 그가 아니였던가.

박진규는 원장을 만나고보니 그가 자기보다 더 상심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의 얼굴이 꺼멓게 죽어있었다. 나이가 근 열살우이고 스승인 원장의 그 모양을 보니 또한 가슴이 아팠다. 2중3중의 고통이였다.

박진규는 원장을 위로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원장선생님, 저까지 복잡하게 굴어서···》

《뭐, 복잡하게 굴다니?》

《당비서동무도 그렇게 말합디다.》

《음···》

원사는 어째서인지 신음소리를 내였다.

박진규는 더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매다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당비서도 심사가 좋지 못한것 같던데···》

말없는 원사의 얼굴에 엄엄한 기색이 어리였다. 그것은 교단에서 일을 친 제자를 바라볼 때마다 어리군 하던 기색이였다. 그 기색을 띄여본 박진규는 말을 끊고 고통속에 두주먹을 부르쥐였다. 그리고 어금이를 뿌드득 갈았다.

《리관직이! 내 그저···》

벌떡 일어선 박진규는 원장방문을 차고 나갔다. 뒤에서 놀라서 부르는 원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으나 그를 멈춰세우지는 못했다.

《박선생! 박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