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산마루 25


 
 

25

 

새벽에 딴 싱싱한 첫물강냉이가 전달되였다. 당에서는 이와 함께 발굴사업에 필요되는 수많은 륜전기재들을 보내주었고 각 도, 시, 군당에 과학자들의 사업조건을 잘 보장해줄데 대한 지시를 떨구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단군조선연구에 대한 수령님의 교시는 력사연구에서 주체성과 력사주의원칙을 결합시킨 가장 정당한 가르치심이라는데 대해 다시한번 강조하시면서 과학자들을 고무해주시였다.

당과 수령의 사랑과 신임을 가장 큰 행복으로, 가장 고귀한 삶으로 여기는것이 사회주의근로자인 우리 과학자, 지식인들의 가치관이다. 돈맛을 들인 몇몇 사람들이 사회의 물을 흐려놓고있는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한갖 대하의 거품이며 쌀에 섞인 뉘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주의의 흐름은 여전히 도도했다.

이 시기로 말하면 《핵문제》로부터 유발된 미제와의 치렬한 대결전이 계속되고있었고 우리 군대와 인민은 사생결단의 의지로 놈들을 호되게 답새겨대고있었다.

우리의 과학자들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안고 총쥔 병사의 심정으로 발굴사업을 했고 유적유물에 대한 과학적분석을 했으니 이것은 말그대로 하나의 치렬한 전투를 방불케 했다.

해방후 김일성종합대학의 터전을 옮기면서 살려낸 청암산의 고구려성터밑에서 고대성터가 발굴된 사실이 과학자들을 크게 고무했다.

리관직이도 성수가 났다.

그는 새로 받은 자동차에 선물강냉이를 싣고 발굴장마다 뛰여다니면서 류창한 언변으로 당과 수령의 신임과 사랑에 충정으로 보답하자고 사람들을 고무추동했다.

당의 손길아래 성장한 그에게 어찌 결함만 있겠는가.

발굴사업이 시작되여 몇달도 안되는 기간에 평양지방이 고조선문화의 중심임을 실증해주는 놀라운 유적유물들이 발견되였다.

무엇보다 고대성터들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황대성이 그중 하나에 속하였다.

황대성은 평양시 강동군 남강로동자구(향단리) 황대마을 앞산에서 발견되였다. 학계에서는 이 성을 그 지방의 이름을 따서 황대성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성터에서는 성의 축조년대를 가늠할수 있게 하는 믿음직한 물질적자료인 2기의 고인돌무덤이 발굴되였다. 여기서 가장 중시되는것은 고인돌무덤 하나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평평하게 된 성벽우에 자리잡고있는것이다. 지금까지 옛성들이 발굴되였으나 이렇게 성벽우에 무덤이 자리잡고있는것은 없었으며 오직 이 성에서만 볼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였다. 과학자들은 이 성의 축조년대를 지금으로부터 5천년전으로 추산하였다.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에 있는 지탑리토성에 대한 발굴사업도 다시 진행하였다.

이 성은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들과 주변의 유적들을 통하여 기원전후한 시기에 쌓아진것으로 인정되여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발굴하는 과정에 이 성벽의 아래층에 그보다 앞선 시기에 쌓아진 성벽층을 발견하였다.

이 성의 축조년대도 황대성과 비슷한것으로서 5천년전의것으로 추산되였다.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에서도 토성이 새롭게 발굴되였다.

여기에서도 지탑리토성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알려진 성벽아래에서 먼저 쌓았던 밑성벽이 새롭게 발굴되였다.

지탑리토성과 성현리토성의 아래성벽축조년대를 단군조선시기로 볼수 있는 근거는 첫째로 성벽축조방법이다.

둘째 근거는 두 유적아래 성벽들에서 나온 유물들을 통해서도 단군조선시기의것이라는것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100여리안팎의 지역들에서 단군조선 초기에 쌓았다고 볼수 있는 고대토성이 발굴된것은 산수수려한 평양준평원일대에 신석기시대로부터 살아오던 주민들이 청동기시대의 하나의 큰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토성과 같은 방어시설까지 구축하고있었다고 볼수 있게 했다.

다음으로 학자들은 고대문화의 대표적증거물인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을 진행하였다.

조선반도와 료하이동지역으로부터 남연해주일대에 이르는 송화강이남 동북아시아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살아온 고대조선주민들은 고인돌무덤, 돌관무덤, 돌무지무덤, 움무덤 등 각이한 형식의 무덤을 썼다. 그중에서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은 우리 나라 고대주민들이 가장 흔히 쓴 무덤이였다.

고인돌무덤은 일반적으로 지상에 큰 돌로 축조한 큰 건물을 련상시키지만 돌관무덤은 판돌로 네 벽과 뚜껑돌을 조립하거나 쪼각돌로 올려쌓아 만든것으로서 본인시신 하나를 넣을만 한 작은것이였다.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은 조선반도와 중국 료동 및 길림지방에 널리 분포되여있다. 동북아시아에는 우리 나라와 중국 동북지방에 고인돌무덤이 있다.

중국관내에는 산동반도에 그것이 몇기 보일뿐이고 우리 나라 고대주민들과 국경을 접하였던 그 주변지역에서는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

이번 조사발굴과정에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 40여km에 해당하는 평양일대에서 무려 1만 4천여기(앞으로 더 발굴되겠지만)의 고인돌무덤이 발견되였다. 그러나 료동지방에서는 기껏해서 200여기 알려졌을뿐이였다.

종래 우리 과학자들이 얼마나 청맹과니였던가! 료동지방에 있는 고인돌무덤은 고조선시기의것으로 보면서도 그밖의 지역의것들은 원시시대 말기의것으로 보았던것이다.

그렇게 된것은 고조선의 수도가 료동에 있었다고 보았고 따라서 고조선의 중심지도 료동에 있었다는 리해에서 출발한것이였기때문이였다.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고인돌무덤에서 주목되는것은 그것의 분포밀도가 매우 조밀할뿐아니라 300~500여기로 이루어진 큰 규모의 무덤떼도 류달리 많으며 초기형식으로부터 말기형식에 이르는 여러가지 류형과 형식의것들이 있다는것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대형고인돌무덤(뚜껑돌무게가 100t이 넘는것.)도 있다. 이런 무덤에 무제한한 권력과 재부를 가진 사람이 묻히였을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 학자들은 단군조선연구에 대한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천리혜안의 예지에 감복을 금치 못하였다.

평양일대에서는 돌관무덤떼도 수많이 새로 발견되였다.

이와 같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일대에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이 많은것은 이 지역이 우리 나라의 고대문화의 중심지라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우리 과학자들은 비파형단검문화에 대한 재검토를 진행하였다.

비파형단검(비파악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은 우리 나라 고대의 유물이다. 비파형단검은 고대조선사람들이 공통하게 쓴 단검이다. 그런데 종전에는 료동지방에서 드러난 비파형단검을 가장 이른 시기의것으로 보면서 비파형단검문화의 발원지, 중심지를 료동지방으로 보았었다. 그러나 비파형단검에 대한 재검토과정에 초기형식의 비파형단검은 선암리와 대아리돌관무덤에서 나온것과 같은 형식의것이라는것을 확증하였다. 뿐만아니라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유적과 상원군 룡곡리, 덕천시 남양리유적에서는 기원전 3천년기에 쓰인 비파형창끝이 발견되였다. 이런 자료들에 기초하여 비파형단검문화의 발원지, 중심지도 평양지방이라는것을 확증하였다.

언어학자들은 전국 각지의 유적유물들을 조사하고 옛 문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연구사업을 폭넓게 벌림으로써 신지글자와 관련되는 력사자료를 적지 않게 찾아내게 되였으며 새로운 연구성과를 거두었다.

력사유적유물에 대한 발굴사업과 함께 수많은 옛책들에 대한 전면적인 분석검토사업이 진행되였다.

과학자들은 지난 반세기동안에 해놓지 못한 일을 불과 몇달동안에 해놓았다. 이것은 두말할것도 없이 당과 수령의 현명한 령도의 결과였다. 김일성동지께서 단군조선연구에 대한 전환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성과를 상상이나 할수 있었겠는가!

고대조선문화의 중심이 평양일대라는것이 거의 확정적인것으로 되고 단군이 평양에서 태여나 평양에서 나라를 세우고 평양에 수도를 세웠으리라는것이 론박할수 없는 현실로 되여갈 때 과학자들의 가슴속에는 격정이 끓어번졌다.

이번 조사발굴의 획기적인 성과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우리 수령님의 과학적사색과 학술적발견이 놓여있었으니 그 로고가 얼마나 크시였겠는가. 다문박식으로 하여 우리 수령님은 동서고금의 그 어느 수령이나 령도자보다 더 큰 고생을 하신다.

과학자들은 환희와 격정속에서 뼈저린 자책과 야릇한 아픔을 느끼는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