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산마루 23


 
 

23

 

복순은 딸때문에 속이 바질바질 탔다.

병원에서 나온 례영이는 다시 정상상태로 돌아갔다. 하지만 어머니로 보건대 그 자체가 비정상이였다. 한번 죽을 고비를 넘겼으면 며칠쯤은 집안에 박혀서 몸과 마음을 정돈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례영이는 그 이튿날로 출근길에 올랐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출근한다고는 하지만 초롱불을 켜든것 같던 두눈에 생기가 없어졌고 늘쌍 웃음이 떠돌던 얼굴이 차거워졌다. 집안은 그늘이 덮이고 랭기가 떠돌았다. 례영이야말로 집안의 빛이였고 온기였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복순이였다.

조심스레 무엇을 물어봐도 《예.》, 《아니요.》가 고작이다. 한번씩 겪기마련인 처녀시절의 고민이라고 그저 넘겨버리기에는 딸의 심리변화가 너무도 심했다. 복순은 딸을 잘 안다. 그가 알고있는 딸은 남한테 속을 잘 주지 않지만 눈치가 빠르고 앉을 자리, 설 자리를 잘 가려 누구한테도 미움을 받지 않는 애이다. 그만큼 주위에 민감하고 그 어디에 내세워도 자기를 얼마든지 지킬수 있으리라고 은근히 자부해온 딸이다.

작년 설날에 집에 들렸던 딸의 연구실실장은 《막내로 자라서 그런지 버릇도 없고 이래저래 속썩일 일이 많겠습니다. 결함이 있으면 실장선생이 부모된셈치고 엄하게 신칙을 해주십시오.》하는 복순의 인사에 《아니아니, 그 반댑니다. 굳이 결함을 잡으라면 털끝만치도 결함을 드러내지 않는거라고 할가. 너무 똑똑해서 탈입니다.》라고 칭찬만 한보따리 하고 갔다.

딸이 이만저만한 타격을 받은것 같지 않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는것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자기를 반성하는것은 더더욱 아니였다. 무엇인가 마음을 독하게 가다듬은것만은 분명한데 무슨 작심을 했는지··· 늦도록 책상앞에 마주앉아 깊은 생각에 잠기는가 하면 잠자리에 들어서는 헛소리였다. 헛소리속에서 영식이란 이름이 새여나왔다.

딸은 분명 고민에 시달리고있었다. 그렇다고 결코 눈물을 쏟으며 죄를 청하거나 누구에게 도움을 바라 손을 내미는 성미가 아니라는것을 잘 알기에 복순의 속은 더 타는것이였다.

복순이는 례영이가 진웅이와의 관계를 비밀에 붙이고있었기때문에 진웅이란 이름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들에게는 자식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투시경같은것이 있다. 그 투시경으로 복순은 딸 례영이가 사랑에 빠져있다는것을 명백하게 보고있었다. 사랑에 빠진 시절의 처녀들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어머니의 륙감을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례영이가 어린시절 물에 빠졌다가 낯모를 총각애한테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복순은 례사롭게 내뱉는 례영이의 토막말에서 그리고 얼굴에 피여나는 홍조에서, 례영이의 가방에 언젠가 들어있던 패랭이꽃에서 그 모든것을 묵묵히 감수하고있었다. 모든 정보들을 한선에 쭉 꿰여 그가 추리한데 의하면 상대는 분명 물에 빠진 딸을 건져주었다는 그 《생명의 은인》이였고 력사학을 전공하는 례영이와 비교적 자매분야의 학자가 틀림없으리라는것이였다. 고향은 물론 강동일것이고 나이는 례영이보다 여덟살이나 우이라고 했으니 좀 많은감이 나지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거야말로 천상배필이라고 할수 있지 않는가. 그는 딸의 행복을 두손모아 빌었다.

자기의 인생경험을 봐서는 그런 총각을 맞는다면 아무래도 호의호식은 바랄것 같지 못했다. 그러나 맘고생만은 하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꼴인가. 딸이 야밤중에 얼음구멍에 빠져들 정도로 심리적타격을 받게 될줄이야···

다른 어머니들 같았으면 《야 이년아, 속시원히 말을 해야 알지. 이거야 에미속에 재가 앉아 어디 참겠냐!》하고 가슴을 쾅쾅 두드렸으련만 복순이 겨우 했다는 소리는 《살아가느라면 별의별 일이 다 있는데··· 총각한테 버림이라두··· 아니, 그러진 않았을거라구 믿는다만 그래두 혹시··· 이 에미가 뭘 도와줄수도 있지 않냐.》하는것이 고작이였다.

《아뇨, 무슨 일도 없었어요.》

《아니다. 내 보기엔 잘 나가던것 같은데···》 《아이참, 뭐가 잘 나가요? 그러구 지금은 그 잘 나가던게 뒤집혀진것 같아요? 어서 일찍 주무세요. 난 랠 학위학직심의위원회에 가야 해요.》

딸이란게 얼마나 독하고 앙뚱스러운지 에미가 근접을 못하게 했다.

사연을 알아보지 않고는 못견딜 심정이였다. 하루는 집에 들어온 령감에게 조심히 물었다.

《여보, 당신네 그 과학원에 혹시 그런 총각이 있수?》

《그런 총각이라니?》

박진규는 역시 《덤덤하게》되물었다.

《고향이 강동인 그리구 나이는 한 서른서넛쯤 된···》

박진규가 생활에 세심하고 다감한 사람이였다면 《언어학연구소의 로총각》을 대뜸 떠올렸을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학문이외에 다른것이 오래 남아있을 자리가 없었다.

《이름은?》

《혹 영식이라던지···》

《영식이면 영식이지 영식이라던지는 또 뭐요?》

《글쎄 그걸 명확하게 알면 내가 묻겠수?》

《서울에서 김서방이나 찾소. 뚱딴지같은 이야기는 왜 꺼내가지구···》

박진규는 벌써 자기만의 생각에 잠겼다.

복순은 화가 나 돌아앉고말았다.

복순이는 딸의 입에서 나온 영식이라는 분명치 않은 이름 두자를 가지고 과학원으로 찾아갔다. 두명이나 되는 과학원의 《영식》이가 접수에 나왔다가 툴툴거리며 들어갔다. 복순은 자기 령감에게 하던 식으로 접수실의 마음 후한 아버지에게 루루이 설명하고야 진웅이를 만날수 있었다.

《그 사람이 분명할거우다. 요전에 며칠 안 보이기에 들어봤더니 군대나가기 전에 고향인 강동에 다녀왔다구 하는 소릴 들었수다.》

《군대에요?》

《사람이 진짜웨다. 그 나이에 연구를 하느라고 장가도 안갔는데 이번에 준전시가 선포되자 제일 선참 탄원했지요. 인차 군복입는다던것 같던데···》

좀 있어 진웅이가 나왔다.

복순은 그를 보는 순간 자기가 그려본 모색과 너무도 신통한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진중하고 사색적인 눈에다 이마가 훤칠했다. 키는 생각했던것보다 컸다.

복순은 자기 남편을 상상했던것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태연자약하고 모든 일에 무관심한 눈표정과 고집이 이만저만 아닐것 같은 두툼한 입술··· 자기의 생활경험에 의하면 저런 입술은 한번 닫겨지면 지레대질을 해도 열리지 않는다.

첫 인상에 복순은 《이 사람이구나.》하고 확신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로는 물에서 금방 나온것 같은 자기 딸의 청초한 모습과 비교해보면서 총각이 좀 겉늙어보인다는 아쉬움을 금할수 없었다.

진웅은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라는 속담을 다시 머리속에 떠올리며 복순을 맞았다.

수령님을 만나뵙고난 다음부터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커졌고 녀자로 해서 고민에 빠졌던 일이 부질없고 가소롭게 느껴졌다. 자기를 그처럼 못견디게 괴롭혔던 그 녀자의 존재가 모래알만치밖에 보이지 않았다. 인공지구위성에서 지구가 축구공만큼 보이는것처럼.

대동강기슭, 그 녀자와 처음 앉았던 그 의자에 복순이와 마주앉았다.

진웅은 여기서 례영이와 언약을 한 후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사실을 쭉 이야기한 다음 계속했다.

···어느날 그는 나를 끌고 여기로 왔습니다. 몹시 새삼스러웠습니다. 그새 우리는 모란봉기슭의 그《안락의자》에 많이 앉았지 여기로는 별로 오지 않았으니까요.

《연구사업이 잘 진척돼요?》

《자리가 푹푹 나오.》

《그게 누구덕인지 아시지요?》

《례영이 덕이라는 소릴 듣고싶어?》

《내가 하루에도 몇번이나 비는줄 아세요? 제발 오빠가 세상이 다 아는 그런 사람이 돼달라구···》

그는 또 내앞에 패랭이꽃 한송이를 내놓았습니다.

나는 어릴적 강동의 수정천가에서 그가 주는 노랑나비를 받아들었을 때처럼 무엇이든 그에게 다 주고싶었습니다. 사랑뿐아니라 목숨까지도···

《례영이, 나한테 바라는게 뭐지? 동무가 요구하는것이라면 하늘에서 별도 따올테요.》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오빠의 그 진심이면 다예요.》

그는 행복에 겨운 눈빛으로 나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어마, 흰머리칼이 다 보이네.》하면서 희고 뾰족한 손가락으로 내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습니다. 흰머리칼을 감춰주는것이겠지요. 그때 나는 한가지만은 그에게 줄수 없다는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나의 생신한 모습이였습니다. 나의 얼굴에 어쩔수없이 고뇌의 빛이 어렸습니다. 그 고뇌는 목에 달아맨 방울처럼 때없이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울리면서 나를 괴롭혔습니다.

나보다 멋진 총각들이 로골적으로 곁눈질해 볼 때마다 그는 까맣고 고운 눈을 내리깔군 하였습니다. 이럴 때면 나의 마음속의 방울소리는 더 크게 울리며 나에게 참을수 없는 죄책감을 몰아왔습니다.

이 죄책감이 끝내 일을 치게 되였습니다.

개선문광장에서 청년절무도회가 열리였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거기로 갔습니다. 그가 끄는 바람에 가기는 했으나 그런데 습관되지 않았던 나는 그 자리가 거북하고 쑥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미안했습니다. 강동에서처럼 그가 불쌍해보였고 내 마음속에는 동정심이 솟구쳤습니다.

순간 그에게 젊은 짝패를 붙여주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눈에는 짝패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가는 총각들이 눈에 띄웠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젊고 미남들이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이게 례영동무가 아니요?》

하는 소리가 나더니 정말 례영이에게 붙여주자고 맘속으로 그려보고있던 멋쟁이청년 하나가 우리앞에 나타났습니다.

화장을 한듯 고운 얼굴에 굽실머리, 쭉 빠진 키, 정기도는 쌍가풀진 눈, 례사로운 눈길에조차 어떤 의미가 깃든듯 한 거동··· 거기에 옷맵시 또한 멋지였습니다. 세련된 총각이였습니다.

례영이도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것 같았습니다.

《례영이가 맞지?》

《누구세요?》

《날 모르겠소? 하하하··· 하긴 이젠 10년세월도 더 지났으니 몰라볼수밖에. 하지만 난 례영이를 첫눈에 알아봤소. 나 영식이요. 중학교동창 영식이!》

그제서야 례영이도 반색하더군요.

《정말 몰라보게 변했군요.》

례영이가 나에게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오빠, 인사하세요. 이 동무는 나의 중학교동창생이랍니다.》

나는 기왕이면 례영이의 중학시절 동무가 춤상대로 될수 있다는것이 더욱 기뻤습니다.

《오래간만에 만난것 같은데 함께 춤을 추면서 회포를 나누지.》

나는 무작정 그들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오빠, 정신 나갔어요?》하고 처음에 그는 거절하며 내 등뒤에 숨었습니다. 내가 거듭 설복하자 그는 마지못해 응하였습니다. 나는 둘이 손을 맞잡도록 해주고 춤판에 들여보냈습니다.

나는 광장주변에 놓인 의자에 혼자 앉아 구경했습니다. 나는 시야에서 그들을 인차 놓쳐버렸습니다. 원을 지어 빙빙 돌아가는 춤판에서 그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였습니다.

저절로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경쾌하고 률동적인 무도곡, 번쩍거리는 오색의 장식등, 춤판을 휘저으며 지나가는 전조등의 밝은 빛, 모란봉기슭의 춤판은 황홀경을 이루었습니다. 춤들은 또한 얼마나 잘 추는지··· 나의 마음은 즐거웠습니다. 그것은 그가 즐거워할것을 생각한데서 생긴것인지도 모릅니다.

얼마 지나서 그가 할싹거리며 나타났습니다.

그때 나는 그렇게 아름답게 핀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 얼굴에 형언할수 없는 흥분과 기쁨이 어렸는데 그것도 처음 보는듯 했습니다. 아름다운 밤경치가, 흥겨운 춤판이 그렇게 만든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여전히 마음즐겁게 앉아있었습니다.

《오빠.》 그가 할싹거리던 숨을 돌리고나서 말했습니다.

《자리를 좀 피해 앉으세요.》

《왜?》

《글쎄···》

《난 여기가 좋소.》

그러자 그는 발씬 웃고 춤판으로 사라졌습니다. 인차 되돌아나왔습니다.

《왜?》 나는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그 동무가···》

《그 친구가 어째서?》

《오빠 보는데서 춤을 못추겠대요.》

《별소릴··· 난 보지도 못하고있소. 또 내가 있다고 방해가 될 일이 뭐요?》

점도록 섰다가 돌아서는 그의 표정이 별로 새침해진듯 했습니다. 그때 벌써 어떤 께름한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고는 픽 웃어버리고말았습니다. 설마 례영이가 나를 피해야 할 그럴 일이 있을라구.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앞에 또 나타난 그는 이번엔 성난 표정을 짓고있었습니다. 이때 나는 그 어떤 반발심이 솟구쳐 딱 잘라버렸습니다.

그가 발칵했습니다.

《좋아요, 우리가 가겠어요!》

《우리?!》

나는 그 말이 몹시 귀에 거슬렸습니다. 벌떡 일어섰습니다. 나의 걸음이 왜 그런지 휘청거려졌습니다. 멀어져가는 나의 등뒤에서 《오빠!》하는 례영이의 새된 소리가 울렸습니다. 례영이의 목소리는 원래 맑고 곱지요. 들으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명랑한 목소리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 순간 례영이의 그 부름소리에는 노여움과 짜증이 력력히 내배여있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짜증을 내다니··· 내가 무슨 못할짓을 했다고···

그렇지만 나는 인자해지자고 맘먹었습니다. 그가 내앞에서 응석도 부릴수 있지 않는가. 한번만 더 부르면 돌아서서 그의 손목을 잡고 다른 곳으로 가리라 맘먹었습니다. 그런데 부름소리는 두번다시 울리지 않았습니다. 뒤돌아보니 그는 어느새 춤판으로 사라지고있었습니다. 졸지에 나는 례영이한테 부담스런 존재가 되여버렸습니다. 휘청거리며 《우리》를 피해가는 내 발걸음에 추가 달린듯 했습니다.

갑자기 술생각이 났습니다. 야외매대에서 술 한병을 사가지고 모란봉기슭의 그 《안락의자》있는데로 갔습니다.

나는 거기에 앉아 병뚜껑을 열고 목을 뒤로 젖혔습니다. 그러나 한모금을 넘기고는 그만 다시 마실 엄두를 낼수 없었습니다.

귀에 매달려 괴롭게 가슴을 찔러대는 《우리》라는 그 한마디를 잊으려고 했습니다. 허나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한마디는 예리한 칼날로 되여 나의 가슴깊이에 박히는듯 했습니다. 이때 례영이와 나사이에 그 어떤 상서롭지 않은 일이 생기리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내가 옹졸하다구요? 그럴수도 있지요. 그러나 어찌보면 내가 례영이를 너무도 믿었기때문이 아닐가요.

어머니, 우리란 어떤 때 쓰이는 말입니까?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 딸, 우리 님··· 가장 친근한 사이에 쓰이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불과 한시간도 못되는 동안에 우리사이로 되였습니다. 방금 내가 등을 떠밀어주었는데 그는 순식간에 나에게 등을 돌려댔단 말입니다. 그의 눈앞에 젊고 잘 생기고 의복 잘 입은 멋쟁이가 나이 들고 볼품없는 나를 가려버렸던것입니다.

나는 술을 마실줄 모릅니다. 한잔술에 벌써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습니다. 말짱한 정신에도 몸가누기가 힘들것 같던 그 느티나무가 서있는 경사지에 저의 몸을 뿌리내린듯 까딱않고 앉아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끝간데없이 이리저리 흔들거리고있었습니다. 감정은 자꾸 분출했습니다. 리해의 아량으로가 아니라 실망과 곡해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생각은 분노를 향해 치달아올랐습니다.

그는 춤판이 끝난 뒤 이슥해서야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방긋 웃으며 한다는 첫 소리가 《글쎄 여기 있을줄 알았다니까요. 딴데 더 찾아보지도 않고 곧추 여기로 왔어요.》하는게 마치 여기서 만나자는 약속이라도 하고 헤여졌던듯이 례사로운 기색이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가 나를 찾아 온데를 다 헤매다가 사색이 되여 나타났으면 했습니다. 곧추 왔다니 그런즉 그는 여직껏 그 멋쟁이와 시간을 보냈다는것을 나한테 다시 강조시키는것입니다.

《아니, 나는 금방 우연히 여기 왔소.》

나는 역증스레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순간 몸이 휘친했습니다. 머리가 휙 돌며 어지러웠습니다. 그가 황급히 부축하더군요.

《아이, 술을 마셨군요.》

그가 놀랐습니다.

나는 그를 뿌리쳤습니다.

그는 날더러 추태를 부린다고 쏭알거렸습니다. 여직 그렇게 행동해본적이 한번도 없는 내가, 술을 전혀 마실줄 모르는 내가 술을 먹었다고 하여 그 입에서 추태란 소리가 꺼리낌없이 튀여나왔습니다. 그래 내가 왜 술을 마셨는지 모른단 말입니까?

도대체 추태는 누가 부린겁니까?

무도회가 끝나자 청춘남녀들이 쌍쌍이 모란봉으로 올라왔습니다. 웃고 떠들며··· 그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웠습니다.

그 다음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그는 나를 대충 어루쓸어주고나서 집에서 어머니가 기다린다고 황급히 사라졌습니다. 아마 그 멋쟁이가 어디서 기다리고있던 모양입니다.

이튿날 나를 만났을 때 그는 어설핀 웃음을 띄우고 어제 밤은 미안하게 됐다고, 오빠에 대한 진심이야 변함이 있겠는가고 하면서 변명절반, 사과절반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이럴 때면 나는 그의 오빠였고 나의 눈앞에서 그는 수정천가에서 바들바들 떨고있던 소녀였습니다. 그래서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그후 우리들사이에는 별일없이 흘러갔습니다. 한달에 한두번밖에 만날 기회가 없으니 별일이 생길 계기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란봉도 오르고 거리도 거닐면서 이전처럼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는 색안경 하나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많은 돈을 주고야 살수 있는 고급제품이였습니다.

받아놓고보니 무도수로서 치레용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거절하자 그는 막무가내로 나에게 매달리듯 하며 그것을 끼워주었습니다.

《아이, 멋져라. 사람이 달라져보이는군요.》

그는 내 주위를 이리저리 돌며 손벽을 쳤습니다. 나는 어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보호안경이예요. 얼만지 알아요? 고급손목시계를 사고도 남아요.》

며칠후엔 자기 성의라고 하면서 고급양복 한벌을 또 내놓았습니다. 나는 넉넉치 못한 례영이네 살림형편에 대해 다소간 알고있습니다. 그 형편에서 얼마나 나에게 관심을 돌리고있는가 하는 고마음보다 앞서 나의 외모에 대한 불만의 표시라고 생각하니 불쾌감이 앞섰습니다. 이전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무도회장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에게서 종종 느끼게 되는 불쾌감의 련속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준 양복을 입고 안경을 끼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의 외모를 두고 그앞에서 늘 죄스러웠댔으니까요.

그런데 그만 보지 말아야 할것을 보게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늦어서 퇴근하면서 련광정에 올라 대동강의 밤경치를 구경하고있는데 유보도에서 한쌍의 청춘남녀가 거니는 모습이 눈에 띄웠습니다. 무심중에 본것인데 뒤모습에서도 녀자가 그라는것이 인차 알렸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영식이라는 동창생총각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로등빛에 큰 키는 물론 벗어넘긴 굽실머리가 헨둥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례영이를 굳게 믿고있었습니다.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일은 젊은 시절에 있을수 있는 일로 여기면서 무시해버렸던것입니다. 그리고 술을 마셨던 일을 그앞에서 사죄까지 했던것입니다. 더구나 그 일은 내가 만들어놓은 일이 아닙니까. 내가 그 총각과 춤판으로 등을 밀어보내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짓이였습니다.

어머니, 내가 련광정에서 가진 의심은 전혀 다른것이였습니다. 한가지 물어봅시다. 고급양복과 안경이 어머니네 집에서 나온것이 아니지요? 나는 학문에서는 몰라도 생활에서는 정말 락제입니다. 무도회장 일도 그래, 그것을 정말 례영이네 집에서 해준것으로 믿은것도 그래,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언젠가 그는 나를 보고 똑똑한 바보라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나란히 걷고있는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물건의 출처를 의심하게 되였습니다.

나는 따졌습니다.

며칠을 두고 끈질기게 따졌습니다.

그는 침묵속에 까만 눈동자에 가랑하니 눈물만 담고있었습니다.

나는 침묵속에 바라보는 그 눈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눈은 나만을 바라보던 그런 눈이 아니였고 방황하는 눈, 흩어진 눈이였습니다.

내가 더 따지고들자 《오빠가 어쩌면··· 졸렬하군요!》하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떠듬거리는 그의 말속에서 《졸렬》이라는 한마디가 나의 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자 그에게서 《우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꼭같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 명랑한 목소리로, 소학교학생들에게 우리 글을 읽어주는 녀교원의 청맑은 소리로 오빠에 대한 진심만은 변하지 않았다는것,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것이라는데 대하여 또박또박 밝히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나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졸렬》이라는 한마디가 나의 뇌수를 꽉 채워서 그의 말을 받아들일 틈이 없었던것입니다.

나는 그의 존경하는 오빠였고 애인이였습니다. 나는 이것을 차례지기 쉽지 않은 행운으로 여기고 오빠로서, 애인으로서 그를 위해주었고 여기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선망하는 그의 눈빛에서 자기의 존재를 느끼며 남들처럼 잘 생기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해도 자존심을 가져왔습니다. 나의 삶과 희망, 행복의 총체라고 할수 있는 그것이 《졸렬》이라는 한마디의 폭탄에 박산나는듯 하였습니다.

어머니, 그 운명적인 순간에조차 나는 그를 놓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어가 부정확하고 진심을 잘못 표현할 때가 있었습니다. 언어학자인 나는 그것을 바로잡아주군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그랬으리라고 아니, 그랬을것이라고 강렬히 희망하여 그 자리를 참아넘겼습니다.

그는 학위론문을 준비하고있었습니다. 그가 쓴 론문의 수정가필을 내가 해주기로 되여있었기때문에 나는 번민속에서도 밤을 새워 가필을 끝냈습니다. 그 완성된 론문원고를 넘겨주게 되여있는 날이였습니다.

그는 나의 합숙으로 왔습니다.

자주 찾아오군 했으니 례사로운 일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례사로운 날에 완성된 원고를 보고 그가 기뻐하리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모든것이 뒤집어질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오빠, 그 물건 말이예요.》

《물건이라니?》

《양복과 안경··· 이제부터 더 묻지 말아주세요.》

나는 바싹 긴장해졌습니다. 그 물건의 출처를 아직 알아내지 못하고있던 나로서는 그 말에 사그라들었던 의심이 대번에 되살아났습니다.

그러자 그는 눙치려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개인비밀이 있을수 있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이에도?》

《···》

그는 말문이 막힌듯 입을 오물거릴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불시에 소리쳤습니다.

《그 멋쟁이한테서 나온거지?》

《···》

그는 침묵으로 동의하고있었습니다.

나의 입에서는 연거퍼 거센 소리가 튀여나왔습니다.

《무엇을 주고 그것을 받았소? 무엇을? 무엇을?!》

《아무것도 준것이 없어요!》

그가 맞받아 소리쳤습니다.

《아무것도 준것이 없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받을수 있단 말이요? 그래 그 멋쟁이가 자선가요? 례영이는 동정의 대상이구?》

《왜 그렇게만 생각해요? 그 동무는 선의의 감정에서 준것이예요.》

《례영이는 그 돈을 받을 때 자신이 부끄럽지도 않던가? 자존심도 없어?!》

《나는 그래 동창생의 성의를 받으면 안돼요? 그보다 더 큰것도 받을수 있지요. 그게 무슨 대수라구···》

그는 벌써 그 값비싼 제품이 작은것이였습니다. 그 멋쟁이한테서 더 큰것을 이미 받았을수도 있으며 또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순간 나는 그의 뺨을 후려갈겼습니다.

《이 너절한···》

내가 알고있는 그 순진하고 깨끗하던 례영이는 간데없고 화려한 물건따위에 현혹된 경망한 녀자가 눈앞에 있었습니다. 낯선 녀자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낯선 소리를 더이상 들을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름못할 슬픔에 빠졌습니다. 왈칵 쏟아져나오는 눈물을 감추느라 돌아섰습니다. 과연 례영이는 내가 무지개빛이 아롱이는 안경이나 눈에 걸치고 뽀얀 우유빛이 도는 양복을 입고 나서서 어깨를 살리고 다니는 그런 속물로 알았단 말입니까.

례영이라는 신기루는 그 순간에 공중루각이 되여 내앞에서 와르르 무너져내렸습니다. 그 페허에서 다시 돌아다본 례영이, 그는 봄시위에 떠내려갈번 한 나어린 철부지가 아니였습니다. 그는 자기식의 가치관과 생활관을 확립한 대학졸업생이였고 연구사였습니다. 내가 더이상 무엇을 말했댔자 그에게는 그것이 유교의 교리를 설교하는 서당훈장의 훈시만큼이나 어리석은짓으로밖에 달리 보일수 없었을겁니다.

어머니,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왜 잠자코 있습니까?

《자네가 뭐가 잘난 존재래서 남의 귀한 딸을 때리나? 그래 자넨 준것이 뭔가? 소시적에 그 패랭이꽃 한송이 꺾어준것밖에 없지 않나?》하고 저를 욕하실수도 있습니다.

옳습니다. 저는 례영이를 위해서 너무도 준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물건으로 표현할수 있습니까. 인간의 정을 돈으로 계산할수 있는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외에 더 줄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바라는것을 줄수 없다는것을 깨닫는 그 순간의 아픔만큼 저를 괴롭힌것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나는 례영이를 사랑했고 례영이의 아버지인 박진규선생을 존경했습니다. 박진규선생에 대한 존경은 다만 같은 지붕아래서 같은 연구사업을 하며 생겨난것이 아닙니다. 저의 존경은 이미 소시적에 뿌리내렸습니다. 그 뿌리를 심어준 사람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는 한마디 항변도 하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그를 때렸습니다. 그렇게밖에는 달리 행동할수 없었습니다. 순간적인 증오의 폭발이였습니다. 사랑이 열렬했기에 증오도 참을수 없는것이였습니다.

지금껏 사랑해온 녀자의 귀뺨을 때린 저의 심정을 리해해주십시오. 어머니, 제가 례영이를 차던진것이 아니라 그 멋쟁이가 례영이를 잠시 유혹했다가 차던졌을것입니다. 멋쟁이이름이 바로 영식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나온것이 분명한 안경과 양복을 례영이가 보는앞에서 활활 집어던졌습니다.

한동안 눈물을 흘리고있던 례영이는 《그따위것》이 그리 소중했던지 그것을 주섬주섬 싸안더군요.

방을 나서는 그에게 나는 소리쳤습니다.

《다신 내앞에 나타나지 마오!》

그후 딱 한번 다시 만나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가 찹쌀기름튀기 한개를 둘이 나누던 그 보통강가의 유보도 의자에서···

저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다음날 단군릉발굴현지로 떠나야 하는 몸이였습니다. 그보다는 다시 만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것입니다.···

진웅의 이야기는 예서 끝났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난 복순은 자리에서 무겁게 일어났다.

《바로 그날 우리 례영이가 얼음구멍에 빠졌네.》

《예?!》

진웅이가 놀라서 따라일어섰다.

《이젠 괜찮네. 출근은 한다네.》

진웅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떠오르더니 다시 랭정해졌다.

복순은 어떤 미련을 갖고 진웅의 입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돌아서고말았다. 진웅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복순이는 참지 못하고 딸의 머리를 쥐여박았다.

《이년아, 네가 보석을 버렸구나.》

《아니예요, 난 그이를 버리지 않았어요! 그이가 날 오해했을뿐이예요.》

《그래 영식이라는 녀석때문에 진웅이를 차버리지 않았단 말이냐?》

《말 못해요. 말 못하겠어요! 아, 어머니! 엄마···》

딸의 도고한 성곽은 어머니앞에서 허물어졌다. 그는 어머니의 무르팍에 어푸러져 태를 치며 울고있었다.

중학교시절 충수염수술을 한 딸을 눈물이 글썽해서 굽어보는 엄마에게 《엄마, 아프긴 내가 아픈데 울기는 왜 엄마가 울가.》하며 웃음을 짓던 그 딸이···

《얘야···》

복순이가 딸을 달래며 한마디 했다.

《그 사람두 인민군대에 탄원했다는가부다. 상처입은 마음이 오죽하겠느냐. 떠나기전에 속시원히 죄를 빌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