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산마루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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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원에서는 발굴된 유골과 유물에 대한 연구분석과 과학적인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였다. 이 사업은 담당부원장인 리관직이 지도하였으며 원장인 김석진이 립회하였다.

김석진은 그자신이 력사학자였기때문에 립회자라기보다는 주요발언자였고 결론자였다. 연구분석사업은 이번에 발굴된 유골의 성격을 해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 단군릉에서 발굴된 사람뼈에 대한 인류학적감정;

이 사업은 고고학연구소 인류학연구실이 담당수행하였다. 해당 연구성원들은 처음 유골을 정리하고 깨진것은 복원하였으며 하나하나 정확히 실측하였다. 그에 기초하여 사람뼈의 개체수를 확인하고 성별과 나이를 감정하였으며 뼈의 크기에 근거하여 사람의 키를 측정하였다. 뼈는 주로 팔, 다리, 골반, 등뼈가 많고 그밖의 뼈들도 일부 있었다. 발굴된 사람뼈는 두 개체분으로서 모두 86개인데 그가운데서 비교적 잘 보존된 42개는 남자뼈이고 12개는 녀자뼈이며 나머지 32개는 뼈쪼각들이였다.

뼈에 대한 감정은 먼저 성별감정부터 진행하였다. 성별감정은 골반뼈와 몸뼈에 기초하여 진행하였다. 골반뼈에서 성적차이는 10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성성숙기에 이르러서는 뚜렷이 형성된다.

단군릉에서 발굴된 한쌍의 골반뼈는 두껍고 건강하게 생겼을뿐아니라 그 높이가 높고 좁으며 두덩뼈 아래각부위가 60°이하의 각을 이루며 두껍고 조잡하다. 그리고 밸뼈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것이 아니라 수직에 가깝게 위치하며 닫긴 구멍은 높고 비교적 둥글다. 두덩뼈결합부의 높이는 높고 귀모양면은 납작하며 그 옆홈은 형성되지 않았거나 좁고 얇게 나타날뿐이다. 골반뼈의 이러한 특징들은 남성의 유골이라는것을 말해준다. 녀자뼈의 성별감정은 골반뼈가 남아있지 않는 조건에서 팔, 다리뼈로 진행하였다.

녀자의 뼈는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고 얇으며 뼈의 겉면이 고르롭고 힘살이 부착되는 부위의 뼈주름도 상당히 약하게 발달되여있다. 단군릉에 묻힌 녀자는 로동을 모르고 자란 사람이므로 몸뼈의 그 어느 부분에서나 섬약한 녀성의 특성이 전형적으로 잘 나타나고있다.

단군릉에 묻힌 사람의 년령감정은 발굴된 유골에 기초하여 진행하였다. 남자의 나이는 골반뼈의 귀모양변과 두덩뼈결합에서 골질의 겉면이 붕괴되고 퇴화되여 없어지는 현상이 넓은 면적에 나타나있는것으로 보아 50~60살로 감정할수 있다. 이것은 남자가 당시로서는 아주 나이많은 늙은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녀자나이는 많은 뼈들에서 뼈머리와 뼈끝이 분리되는 경향이 인정되는것으로 보아 젊은 녀성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단군릉에 묻힌 사람뼈의 체격은 팔다리뼈의 크기에 의하여 측정하였다.

사람의 키와 팔, 다리뼈는 일정한 비례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팔, 다리뼈의 크기를 가지고 단군릉에 묻힌 사람의 키를 측정한데 의하면 남자의 키는 170㎝이상이였다. 이것은 당시로서도 키가 상당히 큰 사람이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다음으로 단군릉에 묻힌 사람뼈가 5 000년이상 보존될수 있겠는가 하는것을 담보하는 문제이다. 그러한 담보는 유골이 묻힌 지대의 매장조건과 많이 관련된다. 이 무덤의 매장조건이 사람뼈를 오래동안 보존할수 있은것은 첫째로 그것이 석회암지대에 묻혀있었기때문이다. 단군릉은 우묵하게 침식된 석회암사이를 깊게 파고 그 암반우에 무덤칸을 마련하였다. 따라서 유골은 빙회석과 같은 가용성광물질이 많이 용해되여있는 지하수나 물기의 침습을 많이 받을수 있었다. 광물질이 용해되여있는 지하수나 물기가 유골에 계속 작용하면 뼈세포속에 광물질이 석출되여 거기에 채워지고 또 삭아서 없어지는 빈자리에도 광물질이 들어가 자리잡게 된다. 이번 뼈에서 두드리면 약간 쇠소리가 나는 경향이 인정되는것은 그것이 화석화되는 과정에 있었기때문이다. 단군릉의 매장조건이 사람뼈를 오래동안 보장할수 있는 조건으로 될수 있은것은 둘째로 그것이 유골을 부식시키지 않는 토양속에 묻혀있었기때문이다.

유골이 안치된 무덤의 토양은 산성이 아니라 뼈가 부식되지 않고 잘 보존될수 있는 전형적인 중성토양이다.

이상의 감정결과에 의하여 단군릉에서 발굴된 사람뼈는 이 무덤의 피장자의 유골이라는것을 확증할수 있게 하였다.

 

- 단군릉에서 발굴된 사람뼈에 대한 절대년대측정;

단군릉에서 나온 사람뼈의 절대년대를 밝혀내는것은 단군릉의 성격을 해명하는데서 관건적의의를 가지는 문제이다.

단군릉에서 나온 사람뼈에 대한 절대년대를 밝혀내는 연구사업에는 고고학연구소 년대학연구실, 김책공업종합대학 등 과학분야의 권위있는 연구사들이 참가하였다.

그때까지 세계적으로 연구개발된 절대년대측정방법은 방사선탄소-14법, 열형광법, 우라니움계렬법, 핵분렬흔적법, 아미노산정량법 등 10여가지가 있지만 그가운데서 측정시료의 제한을 받지 않는 전자상자성공명법(ESR)에 의하여 단군릉에서 나온 뼈의 절대년대를 측정하였다. 전자상자성공명법의 원리는 한마디로 말하여 우주선을 포함한 자연방사선원소들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동식물체나 광물이 받으면 받을수록 홑전자의 수가 많아지는데 이 홑전자의 수는 곧 물질에 체현된 시간의 루적량 다시말하여 지나온 시간으로 된다는것이다. 이 루적량을 방사선량으로 환산하고 그 물질이 묻혀있는 곳에서 1년동안 받은 선량으로 나누면 그 물질이 생긴 년대를 구할수 있다.

시료는 뼈의 치밑부분에서 몇그람 취하여 겉면은 2~5㎝ 벗기고 자기절구로 찧어서 가루를 내는 방법으로 가공하였다.

사회과학원이 가지고있는 현대적인 전자상자성공명장치로 루적된 선량을 측정하였다. 그리고 단군릉에 있는 지대의 년간 방사선량을 측정하였다. 여기에는 지대방사능측정기가 리용되였고 그 정확성을 검증하기 위하여 열형광선량계를 3개월간 매몰하고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단군릉에서 나온 사람뼈의 절대 년대는 지금(1993년 현재)으로부터 5 011±276년전이라는것을 확증할수 있게 되였다.

 

ㅡ단군릉의 피장자에 대한 해명

단군릉을 발굴하고 거기에서 단군과 그의 안해의 유골, 유물들이 발전되였으며 단군의 유골이 5 011년전의것이라는것이 확증됨으로써 단군릉은 명실공히 우리 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의 무덤이며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민족이라는것이 실지로 확증되였다.

단군릉이 발굴된 후 그 피장자, 단군릉의 성격문제를 해명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 과정은 오랜 세월 굳어져온 단군이 신화적존재, 전설적인물이였다는 관념을 버리고 단군이 력사에 실재한 고조선의 건국시조, 조선민족의 원시조라는것을 밝혀내기 위한 고심어린 과학연구과정이였으며 우리 나라 력사학, 고고학연구에서 다시한번 주체를 확립하기 위한 심각한 투쟁과정이였다.

단군릉발굴이전까지 단군무덤을 가짜무덤으로, 단군을 신화적존재로 여기면서 발굴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거기로부터 고조선의 국가기원을 기껏해서 기원전 10세기이전으로밖에 보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기성관념은 단군릉의 성격해명에서 커다란 장애가 되였다.

많은 학자들은 단군릉이 발굴되고 거기서 유골과 유물이 발굴되였을 때에 그것이 단군의것이라는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유골감정과 그 매장조건이 밝혀지고 그 절대년대가 측정된 이후에도 일부 사람들은 반신반의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뼈가 5천년동안 무덤속에서 썩지 않고 남아있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단군릉에서 발굴된 사람뼈는 우연히 무덤속에 들어갔다가 죽은 사람의것일것이라는 가설까지 내세우면서 단군유골의 존재를 부정해나섰다.

일부 반대론자들은 단군은 지금까지 신화적존재로 되여왔는데 그것을 지금에 와서 실재한 인물로 만들어놓으면 복잡한 문제가 제기될수 있다고 하였다. 지어는 유럽에서 신화적존재로 여기고있는 예수를 실재한 인물로 만들려다가 복잡한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까지 하며 단군의 경우도 그것과 비슷한 일이라고 하였다.

종래의 낡은 관념이 화석화된 어떤 학자들은 절대년대측정치를 그대로 접수하게 되면 고조선의 건국년대를 2천년이나 더 올리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서술하여온 력사와 고고학체계에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특히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전문가들은 청동기시대의 상한과 신석기시대의 하한문제를 들고나오면서 종전의 견해를 고집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반박을 받았는데 반박론자들의 앞장에 서있는 사람이 리관직이였다.

그는 발굴성과를 대번에 인정했고 발굴을 서두를 때와 마찬가지로 빨리 발굴보고서를 작성하여 수령님께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박진규만은 여전히 신중론을 고집하면서 일상적인 행동거지대로 뜨적뜨적하게 나왔다.

원장 김석진원사가 그의 편이였다.

그는 발굴보고서초안작성을 맡은 박진규에게 덤비지 말라고 일렀으며 발굴보고서초안에 대한 검토와 가필을 직접 맡았으나 남들이 보기에는 매우 굼뜨게 진행하고있었다.

그러자 리관직이 그에게 말했다.

《서둘러야지요, 서둘러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원사는 옛 제자에게 너그럽게 타일렀다.

《관직동무, 과학이란 덤벼서 되는게 아니지.》

리관직은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 당당한 부원장이라는것을 은근히 암시하면서 옛 스승에게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령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는 당비서 한응삼에게도 찾아갔다.

그의 말을 듣고 김석진에게 당비서가 찾아왔다.

《우리는 심사숙고했습니다. 바로 수령님의 권위를 생각했기때문에··· 그래서 박진규동무를 평가했고 관직동무에게 비판을 준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서 늦잡는것입니까? 수령님께서 바라시던 일이 드디여 과학적으로 해명됐는데···》

매사에 침착한 당비서도 이번만은 흥분한것 같았다. 당비서에게 원사는 간단히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비서동무.》

발굴보고서가 늦어지는데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원사가 고민에 빠져있기때문이라고 하였다.

···원사는 자기가 김정일동지께 편지를 올렸던 사실을 잊지 않고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우상이라고 믿었던 곳에서 유물이 나오자 그는 수령님께서 어떤 타산을 가지고 단군릉발굴을 강력히 내미시였는가 하는 물음앞에 자신을 세웠다. 지금 수령님의 타산이 옳았다는것이 판명되였다. 아, 원사이고 교수이며 박사인 자기는 왜 그러한 타산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원사는 그 사실에 당황했으며 고민하고있었다. 어느날 그는 박진규와 마주앉아 발굴보고서를 다듬다가 문득 물었다.

《진규동무, 어떻게 고고학자가 됐다구?》

《다 아시지 않습니까. 옛 유물(자기단지)이 든 전우의 배낭을 메고 왔다구. 벌써 대학입학 첫날에 말씀드린것 같은데요.》

《자세히 알고싶구만.》

원사의 고뇌가 어린 눈빛에는 그 어떤 갈망이 깃들어있었다.

박진규는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 배낭에는 피가 묻어있었지요. 우리는 전선을 넘다가 폭탄을 맞았습니다. 그때 전우는 몸으로 배낭을 덮었습니다. 내가 그의 품에서 배낭을 꺼내드니 배낭은 그의 가슴에서 솟구쳐오르는 피로 질벅했습니다.

그러나 유물은 한군데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전우는 말한마디 남기지 못했지만 피묻은 배낭은 많은 말을 하고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고학을 하게 됐지요.》

《그랬댔구만! 그랬댔어···》

원사가 고뇌속에 중얼거렸다.

박진규가 추억하듯 눈을 내리깔고있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나의 전우가 자기 부대를 리탈하여 혼자 남게 된것은 그 유물때문이였습니다. 불타는 절터에서 그 유물을 찾아내느라고 정신없이 돌아치다가 부대를 잃었거던요. 그는 내가 인솔한 대오에 와서 말했습니다. 〈진규동무, 조상의 땅엔 숱한 보물이 묻혀있습니다. 보물이···〉 지금도 그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음ㅡ 보물이란 말이지···》

원사의 말은 신음소리처럼 들렸다.

원사가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진규동무, 동무는 단군릉을 발굴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소?》

《어떤 생각이라니요?》

《그래, 학술적기초말이요. 아니, 그건 학술상의 문제가 아니지.》

원사가 금방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하며 계속했다.

《그건 관점이고 립장이요. 력사를 대하는···》

《아, 원장선생님의 물음의 뜻을 알만 합니다.》

《그래 어디 말해보시오.》

원사가 정색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단군릉 발굴결과는 단군이 평양에서 나서 평양에서 묻혔다는것을 말해주고있습니다. 단군유골이 5천년동안 존재할수 있은것은 그가 평양에서 나서 평양에서 묻힌 전제하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평양을 생각했는가 그 말씀이지요?》

《그렇소!》

《처음에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의 단군릉발굴의지를 깨달으며 어렴풋이나마···》

(그런데 원사인 나는 왜 아예 캄캄이였던가?)

원사는 마음속으로 몸부림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