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백산마루 18


 
 

18

 

며칠후 밤 9시.

책임서기 전기철이 록화기의 스위치를 넣었다. 김일성동지께서 서재의 의자에 앉으시여 록화기의 형광판에 눈길을 주고계시였다.

《오늘은 발굴 첫날입니다.》

해설자(학자인듯싶다.)가 화면과 함께 종합적인 해설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바람 한점없이 개인 날씨여서 양지쪽은 비교적 따뜻하였지만 대기온도는 령하 16℃로서 몹시 쌀쌀하였습니다. 발굴작업은 무덤의 구획과 안길 입구를 찾기 위한 작업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날 오전에 무덤 안길의 입구와 묘역시설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 과정에 상돌과 그 받침돌 4개, 안길 입구를 확인하였습니다.

오후에는 무덤의 발굴구획을 확정하고 발굴장주변을 깨끗이 정리하였습니다.》

지대정리작업은 이미 리관직이 해놓은것이였다. 그렇기때문에 비록 하루동안이였지만 일자리가 많이 난것처럼 보였다.

《발굴 첫날에 발굴조성원들은 예견했던것보다 많은 작업량을 해제낌으로써 앞으로 발굴을 계획적으로, 성과적으로 진행해나갈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게 되였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화면에 반복되여 소개되는 이날의 소득물인 상돌과 받침돌을 주의깊이 다시 보고나서 손수 록화기의 스위치를 끄시였다.

 

이튿날 저녁 9시.

전기철은 매일 이 시간을 정해놓고 록화기를 돌려드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아무리 바삐 보내시다가도 시간을 정확히 지키시였다.

발굴 2일;

《오늘은 발굴구획을 더 확장하여 사방 10m정도의 구획을 정하였습니다.

발굴자들은 발굴을 빨리 끝내려는 한가지 생각으로 휴식도 뒤로 미루고 표토층을 제끼는 작업을 계속하였습니다. 다행히 여러날동안 톱밥으로 언 땅을 녹였기때문에 땅파기작업에서 겨울이라는 계절적조건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강동군안의 일군들과 인민들이 현장에 후방물자를 가지고 찾아와 발굴조성원들을 고무해주었습니다.》

화면으로 사람들의 표정들도 얼핏얼핏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표정들에는 우리의 방송보도물들에 나오는 대건설전투에 참가한 근로자들속에서 볼수 있는 그런 약동이 없었다. 환희와 랑만보다도 조심스럽고 지어 정중한 표정마저 어려있었다. 화면을 보시면서 수령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그래, 하는 일본새들이 돼먹었거던. 아무렴, 선친의 묘를 다루듯 해야지.》

그런 장면들이 자주 교차되였다. 시간이 퍼그나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수령님께서는 지루해하지 않으시였다.

오히려 화면이 꺼졌을 때는 수령님께서 약간 아쉬워하시였다.

《동무가 록화물을 다시 편집한게 아니요?》

《저···》

전기철이 솔직히 말씀드렸다.

《학술적인 문제와 관련이 없는 장면들을 몇장면 뺐습니다.》

《그럴줄 알았다니까. 래일부턴 그런 일이 없도록 하오.》

더이상 질책을 않으신 그이께서는 굳어진 표정으로 서있는 전기철을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하시였다.

《책임서기, 이건 내 어렸을 때 일이요.》

그이께서 뜻밖에 어릴적추억을 펼치자 전기철은 긴장해졌다. 그이께서 국사를 잊으시고 사담을 청하신것이다. 그는 수령님께서 이렇게 허물없이 앉아 인간적인 고백을 하실 때마다 크나큰 위인의 세계에 접하군 하였다. 오래동안 그이를 몸가까이 모시고있으면서 그를 매혹시킨 수령님에 대한 위인상중의 하나가 바로 지금처럼 격식없는 말씀을 주고받으실 때도 웅심깊고 통속적인 위인철학의 세계가 펼쳐진다는것이였다. 그때마다 그는 온 신경을 다 집중하여 그이의 말씀을 한마디한마디 기억속에 똑똑히 새겨놓았다가 기록하군 하였다. 후세에 전해줄 우리 수령님의 위인상을 과연 덕성실기들이나 기록영화화면들만으로 만족할수 있으랴. 그런 측면에서 전기철은 행운아이면서도 책임적인 사업을 맡아하고있는것이다. 지금도 그는 그이의 말씀을 통채로 머리속에 록음하고있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산당지기였다는것은 잘 알지? 그래, 남의 묘를 돌봐주는 묘지기였지. 내 고향집이라는것은 말하자면 상두막이나 다름없었고··· 헌데 말이요. 내가 너덧살쯤 되였을 땐데 하루는 우리 남리로 상여가 하나 올라왔소 . 원래 만경대가 풍수 좋은 곳이라 량반벼슬아치들이 자주 선산으로 쓰는 곳이였지만 그런 요란한 상여를 난 첨 봤소. 상제는 대동군에서도 손꼽히는 지주였으니까. 난 어릴적이라 할아버지를 쫓아 묘자리를 파는 곳에 가있었댔기때문에 그 일이 눈에 선하오. 글쎄 상여가 묘자리로 올라오다가 산중턱에서 멈춰서는것이였소. 상여군들이 발을 떼야 갈게 아니겠나. 람루한 차림의 상여군들의 어깨우에서 화려한 상여가 흔들흔들 그네를 타고있었소.

〈발이 안 떨어지누나, 안 떨어져, 맏상제 술 한잔 받지 않고 이승길을 하직할소냐. 고인의 분부노라, 맏상제는 얼른 술동이를 내여라.〉

하고 선소리군이 한소리 뽑으니 상여군들은 일시에 화답하고···

상제들이 바빠하더군. 베감투를 내리쓴 맏상제가 술을 동이채로 안고 허겁지겁 달려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상여군들에게 술을 붓더란 말이요. 상여군들이 이때라고 생각했는지 더욱 게정을 부렸소. 산아래서 중턱까지 올라오도록 장남, 차남, 손자, 손녀들의 음주대접을 차례로 다 받으며 상여가 흔들흔들 올라오던 그 광경이 눈에 선하오. 볼만 했소. 그 모습이 왜 내 기억속에 꽉 박혔는지··· 그걸 보고 우리 할아버지가 말했소. 〈저 지주도 오늘만은 사람다운데가 있어보이는군. 평생 사람질이라곤 할것 같지 못하더니.〉

지주가 자기 머슴들이나 소작인들에게 머리를 굽혀보기는 아마 그게 처음이였을거요. 말하자면 그게 상여군들에게 굽신거린게 아니라 바로 조상에게 굽신거린거지. 조상에게 조금이라도 루가 미칠가봐 그 오만한 지주마저도 그렇게 체면도 다 버렸던거요. 일전에 왕씨가문에서 올려보낸 편지를 보고 내가 느낀게 뭔지 아오? 그것은 자기 조상을 남달리 신성시하는 우리 인민의 미풍량속이요. 그게 오늘까지 단일민족으로 살아올수 있은 우리 인민의 민족성의 중요한 징표의 하나라고도 할수 있지.》

《수령님, 말씀의 뜻을 알았습니다. 저도 단군릉발굴에 저의 성의를 고이겠습니다.》

《누구나 그래야지. 이게 얼마나 큰 일인지 동무도 알지 않나.》

 

발굴 3일;

《오늘도 발굴에서는 일정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향불대돌과 무덤앞기단, 릉비대, 기적비대 등 돌구조물들을 찾아내고 묘역시설들을 확인하였습니다. 한편 강동군 교원재교육강습소 지도교원 홍사성의 도움으로 1963년에 강동군에서 작성한 단군릉조사자료(박진규와 홍사성이 함께 연구작성한것임)를 얻게 되였습니다. 단군릉조사자료에 의하면 1936년에 〈단군릉수호회〉와 〈단군릉수축기성회〉의 주최로 복구된 단군릉은 기단있는 돌칸흙무덤으로 방대형의 봉분으로 되여있고 그 한변의 길이는 7.5m이며 무덤앞에는 릉비, 단군릉기적비, 상돌, 망주석, 향토, 2개의 돌사자, 기와를 얹은 울타리릉문 등 묘역시설이 있었습니다. 무덤주변에는 돌을 깔았고 나무도 많이 심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봉분의 높이는 3m이고 릉비의 크기는 높이 80㎝, 너비 40㎝, 두께 10㎝였으며 릉비에는 한자로 세글자를 새겼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단군릉기적비에는 앞면에 한자로 단군의 업적을 찬양하여 쓴 글이 새겨져있고 뒤면에는 우리 글자로 단군릉수축경위가 간단히 적혀있었으며 단군릉수축에 돈을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새겨져있었습니다.》

김정일동지의 당부에 의하여 첫날부터 담당간호원이 수령님곁에 항시로 붙어있으면서 맥박과 혈압을 재고있었다.

수령님께서 흥분하실것을 예견하여 취해진 조치였다.

 

발굴 4일;

밤 9시에 록화기는 여느날처럼 동작하지 못하였다.

며칠전 우리 나라는 일시 중지하였던 핵담보준수협정에 더는 구속되지 않을것이라는 원자력총국의 성명을 내보냈었다. 이것은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이 우리 나라의 평화적핵개발을 시비해나설 명분에 단호한 타격을 안긴 자주적권리의 행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선제타격을 계속 운운하면서 실전배비하였던 저들의 침략무력에 전투명령을 내리는 오만한 행동으로 나왔다.

정세는 전쟁접경에로 치달아갔다. 이런 조건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동지께서는 나라의 최고리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수령님과 이미 토의하신대로 준전시상태를 선포할데 대한 안을 놓고 건의해오시였다.

더는 서재에 앉아계실수 없게 된 김일성동지께서는 최고사령부에 가시였다. 그이께서 돌아오신 때는 밤 12시였다.

그리하여 이날 록화기는 예정시간보다 늦게 밤 12시에 가동하였다.

《오늘은 무덤의 외부시설을 찾는 작업을 계속 하였습니다. 오늘 무덤의 외부에서는 무덤앞 제단의 길다란 연석과 봉분의 기단돌 6개를 새로 찾아냈습니다. 제단연석 좌우끝에 각각 8각형의 망주석의 밑부분이 있었습니다.

무덤칸 앞부분발굴은 연도(안길)의 천정이 파괴되고 그안에 흙이 가득차있었으므로 천정부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파내려가는 방법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오늘 발굴에서는 안길의 벽선을 확인하였습니다.···》

전기철이 록화기를 끄고나서 주저하는듯 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저··· 래일부터는 제 시간에 돌리지 못할것 같습니다.》

《그건 무엇때문에?》

의아해하시는 그이께 전기철이 말씀드렸다.

《발굴대원 절반이상이 로농적위대원들입니다. 그들도 진지를 차지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 심중히 생각하시다가 강동군당책임일군을 찾으라고 이르시였다.

전기철이 곧 강동군당책임비서를 전화기앞으로 불러낸 다음 송수화기를 그이께 드리였다.

그이께서는 짤막하게 지시하시였다.

《책임비서동무, 단군릉발굴장에 나가보고 제기되는 문제를 풀어주도록 하시오!》

그러시고는 전화를 최고사령부로 돌리시였다.

《형편이 어떻소?》

긴장한 정세를 념두에 두고 하시는 물음이시였다.

《안심하십시오, 수령님!》

김정일동지의 대답은 의지와 신념을 피력할 때마다 하군 하시는 그 말씀이였다.

《고맙소!》

김일성동지께서는 비로소 송수화기를 놓으시였다.

 

발굴 5일;

《오늘은 무덤외부에서 1936년도 복구당시의 무덤외부마당을 확인하고 무덤에서 릉문까지 구간과 그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였습니다. 안길에서는 아래로 파내려가면서 현재 남아있는 천정돌을 완전히 들어내고 무덤칸의 동서남북 네 벽체를 완전히 확인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발굴에서는 무덤칸의 천정상태를 확인하고 무덤칸의 평면구조를 확인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발굴 6일;

《오늘은 무덤 안길안에 차있던 흙을 완전히 들어내고 안길페쇄벽상태를 확인하였으며 무덤외부에서는 1936년도 무덤복구당시의 외부마당을 기준으로 구획을 사방으로 더 확장하여 무덤주변을 완전히 정리하였습니다. 발굴에서는 무덤칸안의 벽체가 드러나게 함으로써 무덤전체의 평면구획을 확인하고 그 규모를 알수 있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한쪽벽체에는 도굴한 구멍이 뚫러져있었습니다. 그것이 일제가 오래전에 도굴하면서 남긴 흔적이라는것을 쉽게 알수 있었습니다. 발굴자들은 모두 격분을 금치 못해하였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록화기를 끈 다음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계시였다.

해방전 애국적인 문인이였던 장지연은 《위암문고》라는 자기의 저서에 일본인도굴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무덤안에는 옛 선인과 신령스러운 장수들의 모습이 사방 네벽마다에 그려져있었다는것을 기록해놓았다. 그런데 그 그림은 왜서 안 나타나는것인가.

우리 민족의 력사를 말살하려는 침략자들의 야만행위로밖에 달리 볼수 없었다.

 

발굴 7일;

《오늘은 무덤칸안에 쌓인 흙을 조심스레 파내려가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무덤칸 바닥우에 설치된 관대와 함께 그 주변에 흩어져있는 사람뼈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우시오!》

다급한 탄성이 울렸다.

전기철이 서둘러 스위치를 누르고 담당간호장이 놀라 혈압계를 들고 수령님의 건강상태를 살피려들었다. 그이께서는 옆에 다가서는 그를 뿌리치시였다.

《걱정마오. 난 일없소.》

그이의 얼굴이 해빛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정지된 화면에 관대우의 흩어진 뼈쪼각들이 드러나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 방안을 몇고패 돌고나서 다시 앉아 록화기를 가동시키시였다.

해설이 계속되였다.

《무덤칸과 안길의 전모가 오늘 발굴에서 완전히 드러나게 됨으로써 이 무덤이 중심안길을 가진 외칸의 돌칸흙무덤이라는것을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박진규를 비롯한 발굴조의 학자들은 현지에서 지금까지 발굴한 정형에 기초하여 학술적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박진규는 물론 모든 연구사들은 이 무덤이 고구려시기에 만들어진 무덤이라는데 대하여 다시한번 견해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무덤칸 바닥에서 발견된 사람뼈에 대하여 연구사들은 년대측정결과가 나온 다음에 연구를 계속 심화시켜야 하겠지만 우선 이 무덤이 단군의 무덤으로 간주되여온것만큼 거기에서 발굴되는 사람뼈는 응당 무덤의 피장자인 단군의 유골로 가정하는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시조릉으로 간주해오는 이 무덤에 우리 민족성원치고 감히 누구도 다른 시신을 들여놓을수 없다는 일치한 합의에 따른것이였습니다.

박진규는 사람뼈의 성격에 대하여 아직은 속단할수 없으며 그것이 누구의 유골인가는 현대적인 기술기재로 측정을 한 다음 그 결과에 의해서만 판단할수 있다는 신중론을 제기하였습니다. 연구진영은 무덤에서 사람뼈가 나온것은 이번 발굴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뜻밖의 결과라고 하면서 발굴목적의 중핵적문제를 해결하는데 실마리가 될수 있는 귀중한 성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설사 단군의 유골이라고 해도 그러자면 사람뼈가 이 지대에서 5천년동안 보존될수 있다는 과학적담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록화기를 보시고 해설을 들으시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록화기는 계속 동작하고있었다.

《오늘 현장학술토론회에서는 무덤에서 나온 사람뼈를 인류학적으로 감정하며 그 개체수와 성별 등을 알아내여 자연과학적인 년대측정방법에 의한 절대년대를 측정할데 대하여 합의를 보아 과학원에 통보하고 인류학, 년대학전문가들을 현지에 나오도록 요구하기로 하였습니다.》

록화기가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계시였다.

《책임서기동무, 발굴조를 련결시켜주시오.》

전기철이 주저하며 송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그를 제지하시였다.

《아니, 그만두오. 내가 끼여들면 그들이 부자연스러워할수 있지.》

김일성동지께서는 《록화기를 한번 더 돌리시오.》라고 당부하시였다.

그날 밤 김일성동지께서는 한잠도 주무시지 못하시였다.

 

발굴 9일 ;

《오늘은 무덤주변의 요역시설을 정리하고 봉분의 서남쪽 지점에서 지층상태를 확인하여 무덤칸이 당시 지표에서 1.2m깊이까지 파내고 만들어졌다는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발굴에서는 무덤칸바닥에서 사람뼈를 드러내는 세부작업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머리뼈는 보이지 않고 깨진 뼈들이 여기저기에 질서없이 흩어져 드러났습니다. 이것 역시 일제놈들의 도굴행위의 후과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사람뼈가 젖어있었으므로 얼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무덤칸안에 방열기를 설치하기로 하였습니다.》

 

발굴 10일;

《오늘은 일요일이였지만 발굴을 계속하였습니다. 오늘발굴에서는 무덤칸바닥에 설치된 관대들의 규모를 확인하고 바닥을 완전히 드러냈으며 무덤칸과 안길의 벽체도 완전히 정리하였습니다. 벽체에 붙은 흙을 참대칼로 뜯어내고 솔로 쓸면서 벽체정리작업을 하는 과정에 그우에 발랐던 회죽미장에 대하여 알수 있게 되였습니다. 발굴조는 해방전 애국적문인이였던 장지연의 문집 〈위암문고〉에 기초하여 단군릉에 벽화가 있을것이라고 여기고 그 벽화를 찾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벽체 회죽미장은 세번 하였는데 초벌은 돌짬을 메꾸고 두벌미장은 면을 맞추었으며 세벌미장은 벽화를 그릴수 있게 매끈하게 잘 발랐습니다. 때문에 벽화가 있을것으로 예견하고 여러차례 세밀한 관찰을 진행하였으나 벽체의 손상이 심하여 확인할수 없었습니다.

관대는 납작한 판돌쪼각을 3~4돌기정도로 쌓고 바깥쪽 면은 직선을 맞추었으며 그우에 회죽미장을 하여 매끈하게 하였습니다.

이날 오전중에 사람뼈에 대한 세부작업을 끝내고 실측과 사진촬영을 진행하였습니다.

현장에서 인류학자들이 초보적으로 감정한데 의하면 머리뼈는 없어지고 남자의 골반뼈와 남자, 녀자의 팔, 다리뼈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 무덤에는 주인공 남녀부부가 묻히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되였습니다. 오후에는 유관부문 책임자들이 모여앉아 학술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토론에서는 이 무덤이 단군의 무덤이 틀림없다면 이 사람뼈는 단군과 그 안해의 유골일것이라는 주장이 강하였지만 이번의 주역인 박진규와 일부 학자들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년대측정결과가 나오는것을 보아야 알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리관직부원장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절대년대측정결과에 의해서만 유골의 정체를 밝힐수 있는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 고고학자들은 단군의 무덤에서 발견된 사람의 뼈면 그것은 피장자인 단군의 유골이라는 방법론만은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박진규와 리관직부원장사이에는 약간한 언쟁이 있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언쟁 두측에 다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시면서도 박진규에게 자연 마음이 실리는것을 느끼시였다.

간호장이 와서 혈압을 재보니 혈압은 퍽 안정되여있는 편이였다.

 

발굴 11일;

이날에는 발굴정형을 수록하지 않고 발굴된 유물들에 대해서만 찍어서 올려왔다.

그에 의하면;

ㅡ 금동관 앞면 세움장식 : 웃부분이 복숭아씨모양으로 생기고 가운데 구멍이 있으며 아래부분은 곧게 되여있다.

ㅡ 청동쪼각: 좁고 길죽한 청동관인데 두껍게 도금한것으로 되여있다.

ㅡ 쇠관못: 모두 여섯개인데 삿갓모양의 대가리가 있다.

ㅡ 도기쪼각: 모두 회색이며 그릇살의 두께가 1㎝로서 퍽 큰 단지였던것으로 추측된다.

 

발굴 12일;

《무덤칸안에서 세부작업을 계속하였습니다. 오늘발굴에서는 무덤안길과 안칸이 련결되는 부근에서 금동띠패쪽 1개를 발견하였으며 무덤주변에서 고려시기와 리조시기의 기와쪼각들을 발굴하였습니다. 금동띠패쪽은 허리띠의 패쪽으로서 청동에 금도금한것입니다.

발굴현장에서 학술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이 무덤은 축조형식으로 보아 고구려시기의 무덤으로 5세기경에 만들어진것이며 금속판장식과 띠장식은 고구려시기에 만들어진것이라는데 대하여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여기에서 나온 뼈가 단군과 그 안해의 유골이라고 전제하는 경우 이 무덤은 단군을 숭배하던 고구려사람들이 평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동명왕의 무덤과 함께 료동에서 옮겨다 이장한것이며 왕관과 허리띠는 무덤에 유골을 넣으면서 고구려사람들이 만들어 넣어준것으로 볼수 있다는데 대하여 초보적인 합의를 보았습니다.

무덤주변에서 고려, 리조시기의 기와가 드러나는것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이 있었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며 이 무덤이 고려, 리조시기에 계속 보호되고 숭배되여왔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10여일간 저녁 9시면 1분도 어김없이 록화기를 보시였고 나머지 시간에도 전적으로 서재에서 책속에 묻혀계시였다. 당과 국가의 수반으로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단군연구에 바치실수 있은것은 두말할것없이 김정일동지에 의한것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최고사령부작전대에 계시면서도 록화필림을 먼저 보시고 자신의 견해를 달아서 수령님께 올리군 하시였다. 두분께서는 단군릉에서 유골이 나온데 대하여 함께 기뻐하시였으며 그 유골의 년대고증에 강한 기대감을 표시하시였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 즉 단군유골을 료동에서 이장해왔을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고 지어는 불안해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석진이 올렸던 편지를 다시 상기하시였다. 그는 편지에서 동명왕릉에서도 나오지 않은 피장자의 유골이 그 보다 몇천년전 무덤인 단군릉에서 나온다는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었다. 아무튼 그 문제는 유골의 측정년대가 나온 다음에 보기로 하자고 견해일치를 보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