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도전》

《명도전》

 

한나라이후 중국에서 류통되였으며 조선의 노예소유자국가 고조선에서 많이 리용된 금속화페.

명도전이 발굴된 곳은 고조선령역에서는 20여개 지역이나 되며 5 000여개, 4 000여개씩 드러난 곳이 있는가 하면 최소한 수백개 또는 수천개씩 무더기로 드러나고있다.

당시 고조선사람들은 세죽리(평안북도 녕변군), 련화보(중국 료녕성 무순시)류형유적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평량화페로서의 명도전을 질그릇단지속에 넣어 외딴곳에 묻어두거나 돌각담 혹은 돌칸속에 넣어두었으며 나무껍질로 싸거나 나무상자 또는 나무곽속에 넣어 묻어두기도 하였다.

고조선유적들속에서 우리의 청동화페와 중국청동화페가 섞여서 무데기로 나온 사실은 고조선사람들이 진행한 대외물자교역과정에서 쌍방의 청동화페들이 국적의 구별없이 청동덩이로 환원되여 세계화페로서 거래되고 류통되였다는것을 증명해준다.

또한 당시 다양한 물품화페(가축, 모피, 곡물, 천, 조개껍질 기타)들속에서 명도전만이 모든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접수되고 류통될수 있는 물품화페로서 가장 일반성을 띠게 되였으며 다른 물품화페들은 유목지역, 해안지대, 농업지대 등 해당 물품화페의 생산지역에 대체로 한정되였다. 이처럼 명도전은 국내적으로뿐아니라 대외적거래에서도 세계화페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였다. 청동화페로서의 명도전이 국경을 벗어나 세계화페로 나가고 들어오는 경우에 여기에 표시된 이러저러한 글자나 문양표식은 그 가치를 평가하는것이 아니였으며 모두 알몸뚱이 청동덩이로, 가치대로 평가되는 평량화페로 환원되였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착취계급들수중에 외국청동화가 많이 저장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대외거래를 많이 하였다는것을 증명하는것이다.

국가가 법에 의해서 상징화페를 강제류통시켰을 때 그러한 상징화페는 국경을 넘어설수 없으며 오직 완전가치가 담보된 화페만이 해당 금속덩이로서 국경을 넘어설수 있다.

고조선에서 류통한 평량화페로서의 청동화페인 명도전은 그자체의 중량으로써 자기 가치를 나타내는 완전가치화페였으며 그것이 국경을 넘어 오갈때에도 국내화페와 세계화페를 갈라놓는 문제가 제기될수 없었다.

명도전의 이러한 성질로 하여 고조선에서도 자체로 주조되여 세계화페로, 국내화페로 리용되였다고 볼수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