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렬사 최승희

최승희의 유해가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치되였다.

애국렬사 최승희


평양대극장에서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공연이 진행될 때 관람자들속에는 젊은이들보다 나이많은 사람들이 많았다.

삼국시기(고구려, 백제, 신라가 함께 존재한 시기)를 시대적배경으로 한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는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용감히 싸운 조선사람들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써 60여년전 최승희가 창작하고 주인공으로 출연하였던 작품이다.

세계10대무용가의 한사람이였던 최승희는 현대조선민족무용발전과 조선무용의 무대화실현에서 특출한 공로를 세웠다.

그는 10여편의 장막무용극을 포함하여 300여편의 무용작품창작과 《조선민족무용기본》, 《조선아동무용기본》 등 수십편의 도서와 론문을 집필하였으며 인민배우, 공훈배우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무용배우들과 안무가, 연출가, 학위학직소유자들을 키웠다.

오늘도 애국렬사릉에 안치된 최승희의 령전대돌앞에는 그를 추억하며 아름다운 꽃다발들이 진정되고있다.

혜성같이 나타난 반도의 무희

1911년 11월 24일 서울에서 4남매의 막내로 출생한 최승희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노래며 체육에도 뛰여났다.

그는 키가 170㎝정도였고 남달리 아릿다운 용모를 가지고있었다.

어릴적부터 음악을 공부해온 그는 풍부한 정서와 뛰여난 예술적감각, 무용가로서의 모든 육체적조건을 다 갖추고있었다.

최승희가 무용가로 된것은 카프(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작가들의 뜻에 의해서였다. 숙명녀고를 졸업하고 무엇을 할것인가를 망설이고있을 때 카프에서 활동하던 오빠 최승일은 그에게 《조선에는 무용가다운 무용가가 없기때문에 조선의 현대무용을 개척해보아라.》고 하였다.

당시 카프의 영향밑에 조선문학예술의 각 분야에서는 민족성을 고수하기 위한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였는데 일본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고있던 시기였으므로 가혹한 검열제도에 의하여 시나 소설, 희곡을 통하여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발표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용은 말로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육체의 리듬과 률동으로 인간의 사상과 지향을 능히 표현전달할수 있기때문에 검열의 문을 쉽게 통과할수 있었다. 또한 당시형편에서 체격좋고 인물이 잘나고 예술적감수성이 풍부한 최승희로서는 무용계를 넉근히 개척할수 있었다.

최승희는 큰 용단을 내리고 15살때 부모의 슬하를 떠나 일본 도꾜로 갔다. 수업료는 고사하고 식비조차 낼수 없었지만 기어코 성공하리라 결심하고 잡일을 하면서도 훈련에 열중하여 석달만에 무대에 나섰다.

그는 첫 출연에서 예상밖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얼마후에는 일본땅에서 조선무용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3년만에 귀국한 최승희는 조선민족무용에 대한 탐구와 연구를 심화시켜 조선무용의 춤가락을 하나하나 현대적미감이 나게 다듬어놓았다.

주체22(1933)년 3월초 또다시 일본으로 간 최승희는 몇달만에 도꾜 한복판에서 첫 개인무용발표회를 열고 온 일본땅을 뒤흔들어놓았다. 당시 잡지 《음악선률》에는 만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춤추는것이 자기 개인이나 무용자체만을 위한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우에는 커다란 조선이라는 민족과 그속에 흐르는 따뜻한 혈류가 그 원동력이 되였다고 본다. 그 녀자의 머리에, 그 녀자의 가슴에 그리고 그 녀자의 혈관속에 흐르고있는 민족애야말로 그를 찬양하게 하는 조건인것이다.》

세계의 광활한 무대로

첫 개인무용발표회를 계기로 최승희는 일본뿐아니라 아시아에서 경쟁자없는 제1의 무용가로 떠올랐고 드디여 세계무대에 나서게 되였다.

미국과 프랑스, 벨지끄, 스위스와 이딸리아, 네데를란드, 도이췰란드와 미주를 한바퀴 휘감으며 진행된 최승희의 공연은 대단히 인기있었다.

그는 광고선전물에 일본말발음으로가 아닌 최승희로 쓰고 《코리안 땐서》라고 밝혀 조선의 무용가임을 당당히 주장하였으며 종목들도 《락랑의 벽화》, 《검무》, 《조선의 표박자》, 《고구려의 전무》, 《고려대장》, 《조선무희》 등 해학적인가 하면 사색적이고 서정적인가 하면 희극적인 조선무용들로 구성해놓았다.

최승희는 유럽에서 공연하는 전기간 항상 옥양목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하얀 보선에 코달린 백고무신을 신고 다녔으며 공연장소들에는 조선의 문물과 풍속을 보여주는 조상전래의 여러가지 골동품과 민속물품들을 전시하여 공연전부터 극장분위기를 조선풍으로 설레이게 하였다. 조선을 모르던 많은 사람들이 최승희를 통하여 조선을 알게 되고 조선력사와 민족을 알게 되였다. 가는곳마다에서 조선춤을 세계적인 극치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미국의 유명한 챠플린도 그의 공연을 보고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한 격찬의 파도에 떠실리우는 순간에도 최승희는 망국민의 설음을 페부로 절감했다. 현지 일본대사관 관리들의 끊임없는 감시로 숨도 쉴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고 수입이 떨어져 일류급호텔에서 빈민지대로 숙소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였고 미술가들의 모델노릇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사태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나라없는 망국노의 설음, 식민지예술가의 불우한 처지는 최승희로 하여금 가슴속에 피눈물을 삼키게 하였다.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국민총동원령을 내리고 예술인들이 의무적으로 《황군위문공연》에 나서야 한다고 강박하였다.

최승희는 날이 갈수록 일본의 제물로 될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더욱 똑똑히 깨닫게 되였으며 일본을 탈출할것을 결심하였다.

인생의 봄을 찾은 녀배우

8.15해방과 함께 최승희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를 맞이하는 남조선사회의 표정은 랭랭하기 그지없었다. 일본사람들앞에서 춤을 추었으니 친일분자라고 공격하였던것이다.

남조선을 타고앉은 미군정은 여러 악법들을 내들고 민주주의적이며 진보적인 예술인들을 대상으로 그 활동을 억제, 탄압하고있었다.

한편 북에서는 각지에 흩어져있던 과학자, 기술자, 문화예술인들이 평양에 집결되여 건국사업에 참가하고있었다.

이때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최승희를 불러주시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전설적인 분께서 자기를 아시고 친히 불러주신다는 놀라움과 기쁨속에 최승희는 1946년 7월 북행길에 올랐다.

그이께서는 명당자리에 있는 제일 좋은 건물을 내여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꾸려주시고 색갈고운 승용차까지 마련해주시였다.

또한 국가에 텅빈 금고밖에 없었던 시기 거액의 자금을 보내주시였으며 일본의 민족문화말살책동이 우심하던 때 일본춤이 아니라 조선춤을 추었으면 애국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고 하시며 그에게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이로부터 그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감사의 정을 담아 우리 나라에서의 첫 송가무용작품 《김일성장군님께 올리는 헌무》를 창작하였다. 작품은 제1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단연 1등을 하였다.

1957년 최승희는 드디여 민족의 자랑이고 국보인 《조선민족무용기본》(1, 2)을 내놓았다.

이러한 그의 공적을 평가하시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초대위원장, 인민배우로 내세워주시였으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후에는 그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이 크나큰 은정에 보답하기 위해 그의 딸인 안성희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조선무용발전을 위한 길을 걸었다.

세계무용의 대가이며 별이였던 최승희의 삶은 오늘도 영생의 언덕에서 조국과 더불어 빛나고있다.

2017-01-18 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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