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운동의 더러운 배신자

력사의 갈피에서

사회주의운동의 더러운 배신자

 

사회주의운동사에는 자기를 혁명의 길에 내세워준 수령의 믿음을 저버리고 배신한자들도 기록되여있다. 로씨야의 뜨로쯔끼도 그러한자들중의 하나이다.

뜨로쯔끼가 레닌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것은 1902년이였다.

로동운동에 잠시 참가하였다가 짜리당국에 체포되여 씨비리에서 류형살이를 하던 뜨로쯔끼는 류형지에서의 탈출에 성공하자 영국의 런던으로 갔다.

당시 런던에서는 레닌이 창당준비를 하고있었다. 레닌과의 첫 상봉은 뜨로쯔끼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어려운 생활처지에서도 레닌은 류형살이의 흔적이 다분한 뜨로쯔끼의 정상을 보고는 자기의 소지품까지 팔아 용돈을 쥐여주고 거처지도 마련해주었다. 몹시 감복된 뜨로쯔끼는 레닌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러는 그의 손을 잡으며 레닌이 함께 일하자고 하자 뜨로쯔끼는 《가장 현명한 스승이며 은인인 친형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기까지 하였다.

뜨로쯔끼는 레닌을 도와 혁명적출판물발간에 열중하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능란한 구변으로 로씨야운동가들과 맑스주의신봉자들에게 레닌의 위대성을 선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뜨로쯔끼의 이러한 행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저들의 편에 서면 새로 조직하게 될 당의 지도자로 추천하겠다는 기회주의자들의 유혹에 그는 량심도 의리도 맹세도 헌신짝처럼 줴버리였다. 원래부터 공명심과 출세욕이 강했던 그는 끝끝내 배신의 길을 택하였다. 1903년 로씨야사회민주로동당 제2차대회에서 멘쉐비크편으로 넘어간 때부터 뜨로쯔끼는 공산주의운동과 로동운동의 위험한 적으로 되였다.

뜨로쯔끼는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혁명승리의 가능성에 관한 레닌의 리론을 맑스주의의 《수정》인듯이 비난하고 《유럽합중국》으로 련합된 나라들이 동시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떠벌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레닌의 위업이 승리적인것으로 확정되여가는 형세가 조성되자 뜨로쯔끼는 그를 찾아가 죄책의 눈물과 함께 용서를 빌며 다시금 《충성》을 언약하였다. 그때가 바로 사회주의10월혁명이 성숙되여가던 1917년 7월이였다. 혁명의 결정적시각을 앞두고 레닌은 또다시 공산주의자로서의 아량과 믿음으로 뜨로쯔끼를 볼쉐비크당에 받아주었고 후날에는 당과 국가의 요직을 맡겨주었다.

지어먹은 마음이 사흘을 못 가듯이 대세에 따른 충실성, 사심이 앞선 충실성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뜨로쯔끼는 레닌이 병상에 들무렵 쓰딸린을 후계자로 지목하자 자기의 더러운 본색을 드러내고야말았다. 분별을 잃고 반레닌, 반쓰딸린, 반혁명책동을 광란적으로 벌리였다. 쏘련에서의 사회주의건설을 환상이라고 헐뜯었는가 하면 사회주의건설이 추진되자 초공업주의를 비롯한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특히는 프로레타리아독재의 기초를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레닌은 림종전야에 이자를 가리켜 《유다 뜨로쯔끼》로 락인하였다.

레닌이 서거하자 뜨로쯔끼의 불순한 행태는 더욱 로골화되였다. 결국 뜨로쯔끼는 출당되였으며 국외로 추방되였다. 그후에도 뜨로쯔끼는 로동운동의 변절자들을 긁어모아 제4국제당이라는 반혁명종파집단을 조작하고 1940년 외국에서 죽을 때까지 로동계급의 투쟁에 도전해나섬으로써 악랄한 배신자, 음모가로 력사에 더러운 자욱을 남기게 되였다.

뜨로쯔끼의 배신행위는 신념화되지 못한 충실성, 숭고한 도덕과 순결한 량심에 기초하지 않은 충실성은 수령에 대한 공고한 충실성으로 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주체109(2020)년 1월 17일 금요일 로동신문 본사기자 박송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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