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규률을 엄격히 세우시여

전 문 섭

 

항일혁명투쟁시기 우리 조선인민혁명군대오안에서는 식량에 대한 규률이 매우 엄격하였다.

나라에서 식량을 계획적으로 공급하는 지금은 식량규률이라고 하면 주로 식량의 보관과 관리, 소비 등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는데 지난날에는 그와 함께 식량을 구입하는데서도 지켜야 할 규정이 엄격하였다.

그러한 규정을 위반하였을 때에는 리유여하를 불문하고 엄중성정도에 따르는 해당한 처벌이 적용되였다.

식량이 떨어져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할수 없이 인민들의 식량에 손을 대였다고 하여도 용서가 없었다.

또한 구입한 식량의 보관과 관리, 소비 등에 대해서도 규정이 엄격하였는데 그것을 위반했을 때에는 아무리 사소한것일지라도 규률이 적용되였다.

순간에 생사를 판가리해야 하는 불의의 정황에 맞다들려 식량을 미리 처리하지 못했을 경우에도 처벌을 면할수 없었다.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장구한 기간 그 많은 식량을 이어대기가 어려웠을것이다.

모든것을 자체로 해결해야 하였던 그 당시 우리에게는 무기와 탄약을 비롯하여 식량과 피복 등 무엇이나 다 긴장하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긴장한것이 식량이였다.

총은 한번 구하면 당대 쓸수 있고 피복도 한해에 한두벌이면 그만이지만 식량은 매일 없어서는 안되는것이고 그 량이 엄청나게 많으니 그것을 떨구지 않고 이어댄다는것은 정말 간단치 않은것이였다.

게다가 고정된 지역에서가 아니라 계속 류동하면서 싸우는 조건에서 총이나 옷은 메고 걸치면 되지만 식량은 힘껏 져야 한달분을 넘길수 없으니 보관과 운반이 또한 난문제였다.

지금처럼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 등 현대적인 운반수단을 동원하여 후방물자를 대여주지 못하는 당시의 조건에서는 모든것이 다 긴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긴장한것은 식량이였다.

그러므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항일무장투쟁을 개시하신 첫날부터 식량문제해결에 선차적인 주목을 돌리시면서 그것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들을 제시해주시는 한편 식량문제에 대한 엄격한 규률을 세우시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도록 하시였다.

지금도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소년중대에 있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식량문제와 관련하여 간곡하게 말씀해주시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 군건설에서 특기할 소년중대를 조직하신 후 각별한 관심을 돌리시여 소년중대원들을 보살펴주시였다.

어려운 행군길에서 소년중대원들의 배낭을 메여다주는 일은 례사로운 일이였고 지어 나어린 대원들을 업고 행군하시는 때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특히 소년중대원들이 배를 곯지 않도록 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식량사정이 곤난하여 전부대가 하루에 통강냉이 몇알씩으로 끼니를 에워야 할 때에도 우리 소년중대원들에게만은 끼니를 번지지 않게 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 차례진 몇알의 통강냉이와 죽그릇마저 들고오시여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신 일이 많다.

그런것도 모르고 그 죽그릇을 단번에 비우던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소년중대원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마음을 많이 쓰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대에 식량이 넉넉히 마련되여 우리의 식탁이 푸짐할 때면 제일 기뻐하시였다.

지금도 맛있게 먹는 우리들을 보며 환하게 웃으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이 선히 떠오른다.

그러시면서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들이 식량을 랑비하는데 대해서는 그것이 비록 사소한 현상이라도 놓치지 않으시고 차근차근 일깨워주시였다.

1937년 가을의 어느날 저녁이였다.

우리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람이 살아가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귀중한것이 무엇인가고 물으시였다.

그러자 모두들 밥, 집, 옷, 공기, 불, 물 등 제나름의 생각들을 터쳐놓았다.

그리고는 밥이 왜 제일 귀한가, 공기, 집이 왜 귀한가 하면서 제가끔 제 주장이 옳다고 주석까지 달았다.

그중에도 밥이 귀하다는 대답이 제일 우세를 차지하였다.

떠들썩거리며 말하는 우리들을 웃음어린 시선으로 둘러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번에는 사람이 살면서 제일 참기 어렵고 힘든것이 무엇인가고 또 물으시였다.

그때에도 배고픈것, 졸음이 오는것, 추운것 등 대답은 각이했지만 배고픈것이 제일 참기 어렵고 힘들다는 동무들이 과반수였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두들 자기 생각을 옳게 말했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도 사람이 살아가는데서 제일 귀한것은 쌀이고 가장 참기 어려운것은 배고픈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 리유를 하나하나 다른것들과 대비하시면서 차근차근 말씀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하여 사람이 한끼를 굶으면 벌써 시장기를 느끼며 두세끼를 굶으면 맥이 없어 발걸음이 되지 않으며 다섯, 여섯끼를 굶으면 눈도 뜨기 힘들어 주저앉아 영영 일어나지도 못하게 된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한 배고픈것은 참기도 제일 힘든것이라고 하시면서 한두끼를 굶으면 생각도 눈도 먹는데만 팔게 되고 나중에는 리성을 잃고 혁명에 손해를 주는데까지 이를수 있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렇게 되면 아무리 뜻이 높던 사람도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서나 혁명하는데서나 식량이 더없이 귀중하다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세상에 태여나 매일 먹고 지내면서도 식량문제에 대하여 그날처럼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다른 동무들도 같은 생각인지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들으며 심중해졌다.

우리들의 마음을 헤아려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그러우신 음성으로 《그런데 요즘 이야기를 들어보니 소년중대에 밥을 흘리는 동무들이 있다면서.》라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몇동무들이 심각한 충격을 받고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우리들속에는 더러 밥을 랑비하는 현상이 있었다.

배가 고플 때는 죽그릇이 닳도록 밑을 긁어대던 동무들이 식탁이 푸짐해지니 밥을 흘리거나 국에다 밥을 말았다가 남기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구대원들이 주의를 주었지만 별로 띠끔해하지도 않았다.

소년중대에서 나이가 그중 많던 나자신도 그런 일을 보면 그저 아직 철이 없으니 그럴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 한알두알의 쌀에 대해 별로 크게 생각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들으니 가책이 커서 머리를 들수가 없었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더 크게 질책하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있은 일을 없었던것으로 치고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너그럽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가 먹는 쌀 한알, 소금 한g에는 동지들의 피와 땀이 스며있다는것을 잘 알고 귀중히 여기며 랑비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누구도 질책하지는 않으시였지만 우리들은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음날부터 우리 소년중대의 식생활은 판판 달라졌다.

부산스럽던 수저소리가 잦아들고 식탁에 흘리던 밥알이 없어졌다.

그후부터는 구대원들이 한끼를 먹으면 우리도 하루에 한끼를 먹으려고 하였고 배가 고파도 헤덤비지 않고 참을줄을 알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들뿐아니라 새로 들어오는 모든 대원들에게도 식량문제의 중요성을 알려주도록 하시였고 일상적으로 대원들속에서 식량의 구입과 소비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을 학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요구하시였다.

그때 우리는 식량을 주로 적을 치고 로획하거나 식량공작대를 파견하여 사들이는 방법으로 해결하였으며 인민들의 자원적인 원호를 받고 자체로 산짐승을 잡거나 산나물을 뜯어 보태는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어떤 경로나 그 무슨 방법으로 해결하든지간에 식량해결에서 엄격히 지켜야 할 준칙은 인민들에게 절대로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것이였다.

그러한 요구를 어겼을 때에는 그가 누구든 사정이 어떻든 용서가 없었다.

세상이 아는 일이지만 지휘관이였던 장동무는 사정이 불가피하여 값을 물지 못하고 소를 끌고왔다가 철직되고 다시 소임자를 찾아 사죄하러 갔던것이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내용들이 있었는데 식량의 보관관리를 잘못했거나 랑비했을 때 그리고 식량을 보탬할수 있은것을 제대로 리용하지 않았을 때에도 처벌을 면할수 없었다.

산짐승을 잡은 경우 단번에 다 처리하지 못하여 나머지를 버렸거나 랑비하였을 때에도 규률이 적용되였다.

나도 식량보탬을 위해 산나물을 뜯어오라는 과업을 받고 떠났다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처벌을 받은 일이 있었다.

안도현 양초구의 어느 한 숙영지에서 있은 일이다.

그때 숙영지에는 위대한 수령님을 호위하기 위해 남은 기관총소대의 몇몇의 대원들과 우리 전령병들만이 있었는데 식량이 떨어져 고생하였다.

그렇지만 인원이 너무 적어서 보초교대도 제대로 할수 없는 형편이므로 기관총소대장은 식량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있었다.

우리는 할수없이 하루 한끼식 번지며 맨밥에 소금 몇알씩으로 끼니를 에웠다.

어느날 그렇게 식사하는것을 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노기띤 음성으로 소대장을 추궁하시였다.

어떻게 조직했기에 대원들이 식찬도 없이 소금만 먹게 하오.

산에 닥지싹이며 무수해가 많이 돋아났는데 산나물을 뜯어다 국이라도 끓여서 먹이면 맛도 있고 식량보탬도 할수 있지 않소.

소대장은 보초설 인원이 모자라서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오를 책임진 소대장이 그런것을 생각하지 못했다는것이 말이 되는가, 소대장은 근무를 잘 조직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대원들의 생활을 책임질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나 조직하기에 달렸다, 보초소로 나갈 때나 교대하고 들어올 때 나물을 뜯으면 매일 국거리라도 떨구지 않을것이 아닌가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소대장에게 전령병 3명을 데리고가서 산나물을 뜯어다 국도 끓이고 찬도 만들어 먹도록 하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소대장을 따라 나와 리동무, 한동무가 산나물을 뜯으러 가게 되였다.

우리 넷은 봄빛이 짙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봄냄새는 언제나 유별하였다.

겨우내 얼었다가 풀린 구수한 흙냄새라든가 갖가지 꽃이며 풀과 나무에서 풍기는 봄냄새를 맡으니 마음이 별스레 훈훈해졌다.

얼마간 걸어가니 푸른 주단을 깔아놓은것 같은 잔디밭이 나졌다. 그것을 보니 어린시절 풀밭에서 딩굴며 놀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는 저도 모르게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른 동무들도 걸음을 멈추고 아예 잔디밭에 허리를 쭉 펴고 드러누웠다.

정말 탐이 나는 멋진 잔디밭이였다.

씨름이라도 하며 한창 딩굴고싶은 생각이 불쑥 치밀어올랐다.

피가 부글부글 끓는 20살안팎의 시절이였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소대장이 마침 씨름이나 한판 해보라고 우리를 부추겼다.

리동무와 나는 서로 맞붙어 씩씩거리며 어릴 때 배웠던 씨름수를 다 동원하여 승부를 겨루었다.

그런데 힘과 씨름수가 비등하여 이겼다졌다 하여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사달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였다.

소대장이 이제는 그만하고 나물을 뜯자고 해도 진사람이 딱 한번만 더하자고 졸라서 또다시 씨름에 달라붙군 하였다.

우리는 씨름을 몇판 했는지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 잔디밭에서 딩굴었다.

그러다나니 나물뜯는 시간이 모자랐다.

후회막급하여 부지런히 손을 놀렸으나 우리는 나물을 얼마 뜯지 못했다.

그대로 돌아가자니 난처하기가 그지없었지만 명령받은 시간이 다되여서 우리는 하는수없이 반배낭도 안되는 나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뜯어온 나물을 보시더니 놀라와하시며 무슨 일이 있었는가고 물으시였다.

소대장이 나서서 자초지종 솔직히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무도 어이가 없으시여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이 주눅이 든 우리를 둘러보시다가 말씀하시였다.

따뜻한 봄날 잔디밭에서 마음껏 딩굴고싶은 생각이 누구에겐들 없겠습니까.

언제나 명랑하고 락천적으로 생활하는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놀음에 팔려 받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것은 혁명가의 기풍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물을 뜯는것을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임무로 생각하지 않은것이 더 엄중하다고 말씀하시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우리가 쌀이나 소금을 구할 임무를 받고 떠났다면 그렇게 씨름에 정신을 팔지는 않았을것이였다.

나는 머리를 들수가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들을 잘 먹이려고 그토록 애쓰시는데 수령님의 그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죄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이날 소대장은 따로 더 엄한 질책과 처벌을 받았고 씨름당사자들인 우리들은 주의처분으로 3시간씩 선초처벌을 받았다.

3시간동안 일정한 구획안에 서있는것도 간단치 않은것이였지만 그보다도 마음이 더 괴로왔다.

입대한 첫날부터 그토록 따뜻이 보살펴주시며 키워주신 위대한 수령님앞에 다시 나타날 면목이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원들의 식생활을 념려하여 전령병들이 해야 할 일까지 자신께서 하시며 우리들을 보냈는데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실컷 놀다가 돌아온것을 생각하니 부끄럽기가 그지없었다.

나는 범한 과오의 원인을 곰곰히 생각하였다.

문제는 머리에 탕개가 풀리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말씀하신것처럼 나물 뜯는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데로부터 생긴 결함이라는것을 깊이 뉘우쳤다.

전에는 어려운 식량공작임무도 훌륭히 수행하여 칭찬을 받았다.

오백룡동무의 지휘밑에 송화강건너에서 식량공작을 할 때였다.

낮에는 사복을 입고 강을 건너가서 밭에 선채로 있는 강냉이를 산 다음 밤에 이삭을 따서 떼에 실어 강을 건네다 비밀장소에 보관하군 하였다.

어떤 날에는 떼에다 싣고도 강냉이가 남아서 허리에 띠고 강을 건느군 하였는데 그것이 헐치 않았다. 살얼음이 끼는 찬물속에 뛰여드는것도 쉽지 않지만 강냉이자루를 허리에 두르고 물살이 센 강을 헤염쳐 건느기란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소를 얻어 뿔과 꼬리에 매달고 소허리에 바줄을 매고 그것을 붙잡고 건느기도 하였다. 그런속에서도 우리는 강냉이 한이삭 흘리지 않았다. 소꼬리에 매달렸다가 발길에 채여 정신을 잃으면서도 강냉이자루만은 놓지 않았다.

그러던 우리가 그리 어려운 과업도 아닌것을 수행하지 못해 벌을 받는데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니 낯을 들수가 없었다.

부끄럽기는 했지만 그 일은 나에게 있어서 자신을 깊이 돌이켜볼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였고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게 마음을 다잡을수 있는 계기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식량의 구입만 아니라 보관과 관리 등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규률을 엄격히 지키도록 요구성을 높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구입한 식량을 보관할 때에는 적들에게 발견되지 않게 장소를 잘 선택하여 부패되거나 짐승들에게 피해를 받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돌리도록 하시였다.

한편 식량을 랑비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자그마한것이라도 엄하게 규률을 적용하도록 하시였다.

날이 갈수록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이 장성강화되는데 겁을 먹은 일제는 우리의 식량공급통로를 막아보려고 갖은 발악적책동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식량 1kg을 피를 흘리며 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때문에 우리는 식량과 관련한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와 명령을 응당한것으로 받아들이고 지켰으며 그것을 어기는 현상에 대해서는 서로가 앞을 다투어 투쟁하였다.

1939년 12월, 위대한 수령님의 령활한 지휘밑에 쟈신즈전투를 성과적으로 끝낸 부대가 백석탄을 향해 행군할 때였다.

행군에 앞서 전투에서 로획한 쌀로 밥을 지었는데 전부대가 먹고도 남아 한 대원이 지고가게 되였다. 그런데 그는 가던 도중 힘들다고 하여 밥을 모두 버리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격분을 금할수 없었다. 힘들면 나누어 지거나 다른 동무들에게 맡겨도 되겠는데 제멋대로 다 버리고말았으니 참을수가 없었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께 군중심판을 할것을 제기하였다.

부대가 백석탄에 이르자 군중심판이 진행되였는데 모두들 한결같이 동지들의 고귀한 피를 더럽힌 그런자는 죽음으로써도 과오를 씻을수 없다고 격분해하였다.

군중심판은 결국 그에 대한 엄한 처벌을 결정했다.

어떤 사람들은 밥 한배낭이 무엇이길래 군중심판까지 하는가 하고 생각할수 있지만 결코 그것이 작은것이 아니다.

우리가 백두산에서 싸울 때 밥 한배낭은커녕 밥 한술이 없어서 희생된 동무들이 많다.

임무수행중에 식량이 떨어져 나무뿌리며 혁띠까지 끓여먹다가 그것마저 떨어져 나무에다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고 간다, 내몫까지 싸워달라, 혁명승리 만세! 등의 글발을 남기고 희생된 동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다.

그들에게 미음 한술이라도 있었다면 살아서 오늘을 보았을것이다.

그러니 한배낭의 밥을 작다고 할수 없는것이다.

바로 그렇게 강한 규률을 세웠기때문에 개별적으로 결함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식량문제에 대해 옳은 관점을 가지고 규률의 요구를 철저히 지켜 한g의 쌀이나 강냉이 한알을 정말 귀하게 여기였고 식량보탬으로 리용된 짐승고기나 산나물 한잎도 랑비하지 않았다.

세상이 다 아는 그 간고했던 고난의 행군시에도 우리는 언 말고기 한쪼박 그저 버리지 않았다.

한주일이면 넉넉히 갈수 있는 길을 백여일이나 걸려서야 갔으니 그 기간에 얼마나 큰 곤난을 겪었겠는가 하는것은 능히 짐작하리라고 생각한다.

곤난중에서도 제일 곤난한것이 식량문제였는데 항일혁명투쟁의 전과정을 돌이켜보아도 그때만큼 굶은적은 없었고 먹을것, 못 먹을것 할것없이 험한것을 다 입에 넣어본적은 없었다.

사면팔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치며 행군하자니 쌀이 있어도 끓여먹을수 없어 날것을 씹었고 적들이 버리고간 말고기가 생겨도 구워먹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기를 뜯어내여 힘자라는껏 지고가면서 생채로 먹군 했는데 나머지는 그 위태위태한 정황속에서도 눈속에 묻어두었다가 다음에 가져다 먹군 하였다.

우리는 칡뿌리 한토막, 산나물 한줌으로 끼니를 에워가며 고난의 행군을 이겨냈다.

그러한 기풍이 몸에 배여 먹을것이 많이 생기고 정황이 급하지 않은 때에도 우리는 식량을 망탕 소비하거나 랑비하지 않았다.

바로 그렇게 했기때문에 우리는 혁명의 장구한 기간 그 많은 식량을 이어대면서 일제와 싸워 승리를 이룩할수 있었다.

식량은 예나 지금이나 귀중하다.

식량은 생활의 밑천이고 그 나라의 재부이다.

아무리 쌀을 많이 생산하여도 보관관리를 잘못하고 망탕 소비하면 나라의 쌀독이 줄어들고 결국 우리들의 밥그릇이 낮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날 혁명선배들이 그러했던것처럼 쌀을 귀하게 여기고 나라의 쌀독이 넘쳐나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