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는 인간에게 유해한가. 1편

서언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대마초를 떠올리면 ‘마약’ 이다. 연예인들이 몰래 피우다 뉴스에 나오는, 그래서 그 연예인들에 대해 한심한 눈초리로 경멸하는 것이 대부분의 반응이다. 대마는 현실적으로 법으로 금지된 약물이며, 일반인들의 인식 속에는 대마를 하게 되면 폐인이 되거나 환각 상태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엄격한 법적용에 대한 공포 때문에 스스로 대마를 할 생각도 없고, 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좋은 인식도 갖지않는다. 과연 그런가? 대마초는 과연 그렇게 위험하고 범죄화 할 만큼 중독성이 강할까? 헤로인, 코카인, 필로폰, 엘에스디 등과 같은 강력한 약물들과 동일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걸까? 이러한 의구심에 답하는 몇 권의 책이 있다. <대마를 위한 변명>(유현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삼과 사람>(문성호, 한국학술정보 펴냄), <대마초는 죄가 없다>(정현우, 동방미디어 펴냄) 등이 있다. <삼과 사람>외의 두 책은 현재 절판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앞의 두 책(대마를 위한 변명, 삼과 사람)을 가지고 있고 이 글은 이 두 책을 기반으로 쓰고 있다. 글 내용은 두 책에서 대부분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약간의 편집을 가해 작성되었다. 글 내용이 길어서 1, 2회로 나누어서 올린다.

마약이라는 단어는 얼핏 생각하기에 마약(魔藥)을 연상하기 쉽지만, 실은 ‘마’는 대마(大麻) 마취(麻醉)에서와 같이 삼을 가르키는 마(麻)를 사용한다. 한국에서 마약(麻醉)이란 단어의 기원이 대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나코틱(Narcotic)이란 단어를 쓰는데 무기력하다, 졸리다, 마비되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마코티콘(Marcόtikόn)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대마의 역사

대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737년으로 추정되며, 이 기록은 중국 신농(神農)씨가 그의 의서에 대마를 신비한 약초로 묘사하면서 말라리아와 생리불순 등의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적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8000년쯤으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인의 부장품에서 대마로 만든 직물이 발견되기도 했으므로 대마의 역사는 1만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000년경의 페르시아와, 그리스, 동인도, 로마, 아시리아 등지에서는 대마를 진통제 및 다양한 질환의 치료제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800년경이 되자 대마는 유럽과 아시아 각지에서 폭넓게 재배되는 작목 중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기원전 100년에 대마와 뽕나무를 이용해 원시적인 종이를 중국인들이 만들고, 서기 105년에 중국인 ‘채륜’이 제대로 된 종이를 만들었다. 원료는 대마가 주원료였다. 7세기에 이슬람권을 거쳐 유럽에 종이가 전래되고, 이슬람의 제지기술은 중국보다 앞선 것으로 이후 7백 년 동안 대마는 종이의 중요한 원료로 사용되었다.

19세기 유럽제국주의 시대를 전후하여 대마는 군수물자이며 전략물자로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유럽제국주의 시대는 해양의 시대였고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크고 튼튼한 배는 무역의 패권과 식민지 확장에 필수적인 요소로, 대마는 질기고 튼튼한 범선의 돛과 로프의 원료로서 유럽 국가들에게는 그야말로 전략적인 작물이었다. 그러므로 유럽제국들은 식민지 영토에 대마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 결과 식민지들에서 대마는 화폐로 대용되기도 했으며 기장 중요한 환금작물로 간주되었다. 아메리카 전역에서 대마농업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도 마찬가지였고 독립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톤은 자신이 대마 농장주이기도 했으며 대마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에 힘 쓴 장본이기도 했다.

이 시기 대마는 군수물자로서 뿐만 아니라 직물의 원료이자 약품이었으며 동시에 식품이었다. 19세기 초 호주의 두 차례의 대기근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대마였다. 대마씨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대마 잎은 가축들의 사료로 사용되면서 구황작물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

유럽 역사에서 대륙봉쇄령, 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워털루전쟁의 이면에는 대마가 있다. 이들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으로 일명 대마전쟁이라고도 한다.

1850년대를 접어 들면서 대마는 석유화학기술이라는 새로운 기술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대마를 재료로 써야만 가능했던 종이의 생산이 유독한 아황산염과 염소를 이용해 나무를 재료로 해서 만든 종이의 등장이었다. 종이만이 아니라 대마의 독점적 지위를 위협한 것은 직물에도 나타났다. 나이론이나 레이온 같은 플라스틱 섬유가 그것이다. 환경에 있어서 최악의 재앙인 석유화학제품이었지만 당시로는 그런 것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지산업과 섬유산업에 있어서 대마는 20세기 시작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압도적인 경쟁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자 대마는 약리적 효과에 의해 조명되고 대마초의 여러 가지 효능들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후 대마초와 대마초의 성분을 추출한 약제들이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약제로서가 아닌 기호품으로서 대마초의 사용이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까지 대마에 대한 연구는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의학계의 보고는 찬탄 일변도라고 할 정도로 긍정적인 것이었다. 1894년 ‘영국 인도대마약물 위원회’의 연구가 내린 결론은 인도대마인 간자Ganja나 브항Bhang이 위스키와 같은 술보다 그 효과가 온건하다는 것이었다.

대마초의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 중의 하나인 ‘마리화나Marijuana’가 등장한 것도 이때이다. 1895년 멕시코의 혁명가인 판초 비야pancho Villa의 한 지지자가 만든 노래인 <라 쿠라라차La Curaracha>에서 ‘marijuana por fumar'(마리화나를 피운다)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되었다.

19세기가 저물면서 대마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20세기의 터널로 들어서게 되었다. 대마농업과 산업은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재배가 금지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대마를 이용한 제지산업과 섬유산업은 석유화학기술에 자리를 내주었고 대마는 더럽고 추악한 풀이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대마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지와 섬유 분야에서 대마산업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로운 기술로 변화에 적응하고 있었으며 또한 석유화학기술에 대해서도 우월한 경쟁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마가 그토록 비참하게 인류의 역사에서 급격하게 사라져간 그늘에는 면화나 석유화학기술의 발달이 아닌 전혀 다른 이유가 숨어 있었다.

대마는 어떻게 불법화가 되었나.

대마는 20세기에 와서야 금지되었으며 이때까지 대마는 수천 년 동안 전세계에서 약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도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대마씨앗을 마자인라 하여 귀한 한약재로 자유롭게 사용해 왔으나 최근 이것마저도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미국에서도 대마는 가장 처방을 많이하는 3대 약제 중 하나였다. 1937년 마리화나 세금법이 제정되어 대마가 금지될 대까지 대마는 가장 효능이 좋은 국소진통제, 근육이완제, 염증치료제, 경련치료제 등으로 쓰였으며,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누관(궤양, 상처 따위 대믄에 생긴 구멍) 치료제, 옥수수와 겨자씨 연고(찜질 약), 근육연고, 섬유습포(찜질 약) 등에 쓰였다. 대마는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약초에 속하며 아무리 써도 몸에 해독이 없는 가장 안전한 약초로 되어 있다.
이러한 대마라는 풀이 자유롭게 재배되지 못하고 인간에 의해 억압받게 된 역사는 불과 1백년이 되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인류와 함께 해온 대마만큼 강인한 생장력을 갖춘 식물도 흔치 않다.

지구상에서 대마의 박멸에 가장 열성적으로 앞장섰던 것은 미국이었다. 이 나라는 세게대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발전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선택을 전 세계에 강요했고, 대마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대마의 불행은 미국에 그치지 않고 각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런 점에 의해 대마가 걸었던 불법화의 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마가 걸어왔던 고단한 역사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다른 나라와 미찬가지로 대마가 활발하게 재배되고 관련 산업이 융성하던 나라였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그 자신이 대마 농장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가 유품으로 남긴 한 권의 노트에 적힌 내용으로 대마 연구자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노트의 내용은 대마 재배지에서 수대마를 솎아내고 암대마만을 남기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대마 농장에서 암대만을 재배할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섬유나 종이의 원료가 아니라 해시시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해시시는 암대마의 잎과 꽃에서 수지를 추출하여 고체덩어리로 만든다.
물론 대마에 관한 한 조지 워싱턴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미국인들에게 대마는 면화나 밀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작물이었고 그 잎을 말아 피우는 것도 담배를 피우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대마의 첫번째 경쟁자로 등장한 것은 면화였다. 1793년 면화에서 면섬유를 분리할 수 있는 조면기가 발명된 이래 대마섬유산업에 대해 위협적인 경쟁력을 지니게 되었다. 섬유의 원료로서 대마가 경쟁자에게 자리를 조금씩 내주게 된 것과 달리 대마초의 의약적 사용은 급속하게 일반화되어갔다. 1850년대에 이르면 마리화나는 가장 널리 처방되는 약품 중의 하나였다. 당시의 처방전들에 따르면 마리화나는 식욕부진, 염증, 통증, 편두통, 히스테리, 우울증, 류머티즘 등 많은 질환에 치료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치료제로서의 마리화나의 사용은, 더욱 효과가 강력한 모르핀이나 주사제들의 사용이 빈번해지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의약품으로서의 마리화나 사용이 줄어든 대신 여가시간에 즐기는 기호품Recreational drug으로서의 마리화나 사용은 증가했다. 이른바 마리화나의 황금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마리화나는 작가와 예술가 그리고 유럽에서 이주한 초기 이민자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19세기 중반 해시시 애호가들의 모임인 ‘해시 클럽Hash Club’은 작가와 변호사 그리고 사회의 저명한 엘리트 지식인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미국의 주요한 도시들에는 예외 없이 해시 클럽이 존재했으며 모두 성황을 이루었다. 마리화나와 해시시에 대한 평가는 찬사 일색이었고 따라서 해시시는 당대 최고의 기호품으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20세기 초 마리화나와 해시시는 미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호품으로 자리를 지켰고, 대마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거나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였다.

농업과 산업에서는 조금씩 위축되던 대마는 바로 이 시기인 1916년 면화 조면기와 마찬가지로 대마의 박피기와 추수기가 발명되어 극적인 전기를 맞을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대마산업은 경쟁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이전의 기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전자동화 기계가 등장했다. 당시 이 기계를 소개했던 전문잡지 『포퓰러 메커닉Popular Mechanic』과 『메커니컬 엔지니어링Mechanical Engineering』은 ‘ 이 기계의 등장으로 대마가 다시 미국 제일의 작물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으며 당시의 여건으로 볼 때 이러한 예측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측은 적중되지 못했다.
전성기를 되찾던 대마에게 치명적이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대마 박피기와 추수기의 전자동화가 실현되기 1년 전인 1937년 12월에 공포된 ‘마리화나 세금법Marijuana Tax Act’이었다. 이 세금법은 대마의 재배나 마리화나의 유통을 금지하지 않았지만 등록의 의무화와 터무니없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으로 사실상 금지의 효과를 거둔 법이다.

이 법의 제정을 주도했던 것은 연방마약관리국FBN, Federal Bureau of Narcotics의 국장인 헨리 안스링거Henry Anslinger였다. 그를 추천한 것은 앤드류 멜론Andrew Melon이었다. 후일 안스링거 처삼촌이 되기도 하는 멜론은 미국 6위의 은행인 멜론은행의 소유주로 경제공황기에 재무장관을 지내기도 하는 등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거물이었다. 재계와 정계에서 대자본의 이익을 옹호했던 멜론은 멜론은행의 대고객 중의 하나인 거대 화학자본의 소유주 듀퐁Dupont의 이해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았고 안스링거의 연방마약관리국이 듀퐁의 이익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1930년대 중반 농업 기술의 진보에 따라 등장한 대마 박피기와 추수기는 듀퐁에게는 대단한 위협이었다. 더불어 대마의 껍질에서 자동적으로 섬유를 추출할 수 있는 기계도 선을 보이고 있었다. 마리화나 세금법이 공포된 1937년은 듀퐁이 나일론과 레이온의 특허 그리고 목재펄프의 황화공정 기술의 특허를 확보하고 그 기술을 도입한 해였다. 섬유와 제지 모두에서 대마라는 경쟁자를 물리치지 않으면 새로운 사업을 선보이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던 듀퐁은 후버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멜론을 통해 강력한 로비를 벌였고 멜론은 자신의 처조카 안스링거를 앞세워 마리화나 세금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자본과 정치의 냄새나는 결탁이 미국 최초의 대마 금지법을 연출했지만 이 부패한 드라마의 등장인물은 듀퐁과 멜론만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인물은 월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f Hearst였다. 조셉 퓰리쳐와 함께 미국의 2대 신문왕으로 일컬어지는 허스트는 마리화나의 공격에 자신의 신문과 잡지들을 총동원해 듀퐁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대중적 비방캠페인을 줄기차게 전개함으로써 대마를 대중적으로 매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허스트가 대마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던 이유는 듀퐁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제지자본의 이익 때문이었다. 허스트가 소유하고 있던 제지공장들은 모두 목재펄프를 원료로 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또한 허스트는 이 공장들에 공급할 목재가 가득한 광대한 삼림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6년 미국 농무부가 발명한 대마펄프를 원료로 하는 기계화된 제지공법은 허스트의 제지산업에는 일종의 재난경보였다. 대마는 나무와 달리 매년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1에이커에서 생산되는 대마로 4.5에이커에서 생산되는 목재를 대체할 수 있는 이 공법이 1930년대 중반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어 보급될 조짐을 보이며 경보는 현실로 다가왔다. 허스트가 기존의 제지시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종이를 원료로 하는 잡지 산업도 난관에 부딪힐 것이 자명해졌다.

황색언론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허스트답게 그의 신문과 잡지들은 온갖 쇼킹하고 선정적인 마리화나 관련 보도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캠페인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인종차별주의였다. 허스트의 신문들은 ‘멕시코인과 흑인들은 게으르고 폭력적’이라는 편견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동시에 마리화나가 유색인종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주된 원인이라고 선전했다. 당시 허스트의 신문들이 마리화나와 관련해 유포한 스테레오타입은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백인 여자를 겁탈하는 멕시코인과 흑인’의 이미지였다.

마리화나가 아니더라도 허스트가 지향했던 황색언론의 이념은 이윤을 앞세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신문이었으므로 살인과 강도, 강간, 폭력과 범죄는 허스트의 신문들로서는 매일처럼 다루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허스트가 마리화나를 음해하기로 작정한 뒤로 허스트의 신문들은 왜 그런 범죄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복잡하고 허튼 소리를 지어내지 않아도 좋았다. 모든 것은 마리화나 때문이었다고 설명하면 족했던 것이다. 허스트는 1910년부터 시작된 멕시코 혁명으로 광대한 토지를 잃어버린 피해자 중의 하나였던 관계로 반反마리화나 캠페인에 흑인보다 멕시코인들이 더욱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황색언론들의 대대적이고 집요한 캠페인으로 마리화나에 대한 온정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인종차별주의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백인들의 의식은 급속하게 부정적으로 바뀌어갔다. 당시 미국약사회를 대표한 월리엄 우드가는 마리화나가 폭력을 유발한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청문회에서 증언했지만 법안 통과를 막지는 못했다.

마리화나 세금법으로 듀퐁은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그들이 얻은 이익은 지금도 새롭게 창출되어 듀퐁의 상속자들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2차대전 후 대마는 엄혹한 규제 아래 놓였고 재배는 금지되었지만 마리화나의 사용은 점차 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한 경직된 체제에서 벗어난 젊은이들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대중음악인들은 마리화나를 찬양하는 노래들을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고 또 자신들 스스로 기꺼이 마리화나를 사용했다. 젊은이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재즈음악계는 마리화나에 대해서도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다. 안스링거는 ‘재즈 뮤지션의 절반 이상이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다’고 주장하며 많은 음악가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강한 반발을 야기했다. 그러나 이제 마리화나가 폭력을 유발한다는 주장은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전쟁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일상적으로 유포되었던 맹목적 논리를 중단시겼고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보는 것만 믿게 되었다. 마리화나는 인간을 전혀 폭력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늘어갔다.

결국 마리화나 금지론자들은 새로운 논리가 필요했고 역시 앞장 섰던 것은 안스링거였다. 1950년 ‘국무성 안에 2백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발언으로 시작된 매카시즘의 선풍은 안스링거에게도 제법 좋은 명분을 찾게 해주었다. 매카시즘으로 조장된 광포한 정치적 상황이 계속되자 1951년 안스링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로운 법안을 준비했다. 마리화나 사용자에 대한 처벌이 더욱 강화된 ‘보그스 법Boggs act’이었다. 이 법안의 심의 과정에서 안스링거는 역사에 남을 만한 대단한 이론을 공표했다. 무대는 의회의 청문회석상이었고 때마침 켄터키 렉싱톤의 공중보건병원에서 연구책임자로 있던 해리스 이스벨Harris Isbell 박사가 제출한 자료에 대해 안스링거가 답변해야 할 자리였다. 이스벨 박사가 청문회에 제출한 자료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마리화나 흡연자들은 대개 가볍게 취해 낄낄거리고 웃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단지 좋은 시간을 가질 뿐이다. 비틀거리거나 쓰러지지도 않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는다. 마리화나 흡연이 폭력적인 범죄를 야기한다거나 성범죄를 야기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마리화나는 흡연 후에도 불쾌함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마리화는 의존성도 없기 때문에 원한다면 아무 때라도 사용을 중지할 수 있다. 사실 담배 끊는 것보다 마리화나를 끊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안스링거는 이스벨 박사의 이 같은 자료 증언에 대해 청문회에서 이렇게 답변했다.

“마리화나의 위험성은 이런 것이다. 헤로인에 중독된 젊은이들의 50퍼센트 이상이 마리화나를 사용했다. 마리화나로 시작한 이들은 결국 헤로인에 손을 대게 된다. 마리화나에 대한 흥미가 반감되면서 마침내 주사기를 든 것이다.”

그 유명한 관문이론Gateway Theory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안스링거는 이 순간 약물사에 영원히 기록될 만한 위대한 신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마리화나 자체는 위험하지 않지만 마리화나를 피우게 되면 결국 헤로인에 손을 댈 것이다’라는 것이 안스링거의 주장이었다. 다시 말해, 마리화나는 누구나 인정하는 위험한 마약의 관문이 되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1951년에 만들어진 이 관문이론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별다른 수정 없이 그대로 이용되고 있다.

보그스 법안의 통과 후 안스링거의 관문이론은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마리화나가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도 마리화나가 헤로인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주장에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안스링거는 헤로인 사용자의 50퍼센트가 마리화나를 사용한 적이 있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예를 들어 안스링거의 주장은 헤로인 사용자도 담배를 피운적이 있다는 식의 반론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상상해 봐도 헤로인 사용자 중에 담배를 피운적이 있는 사람이 50퍼센트 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을 것 같지는 않다. 이후에도 안스링거는 자신의 관문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 연구조사의 결과라거나 증거들을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안스링거의 관문이론은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속은 비어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매키시즘의 광기에 짓눌린 분위기에서는 별다른 반론 없이 암묵적으로 수용될 수 밖에 없었다.

1960년대는 1950년대의 혹독한 탄압에 대한 저항의기운이 충만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마약단속법에 짓눌린 마리화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1년 TV 토크쇼 <존 크로스비 쇼>에 출연한 앨런 진스버그Allen Ginsberg와 저명한 작가인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 인류학자인 애슐리 몬테규Ashley Montague는 안스링거가 감히 누구도 들어갈 수 없도록 그어놓은 금기의 영역에 도전했다. 주동자는 진스버그였다. 그는 마리화나 피웠던 근사한 경험을 얘기했고 마리화나에 대한 단속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데에 그들 출연자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시인이며 고등학교 선생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진스버그는 60년대 신좌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이 사건으로 1960년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 시대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자유스럽고 개방적이며 진보적인 시대였다. 젊은이들은 모두 자유주의자 아니면 진보주의자였고 모두들 좌익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마리화나를 피웠다.

1961년 40대의 젊은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가 출연했다. 때를 맞추어 31년 동안 권좌를 지키던 헨리 안스링거가 물러났다. 후임으로 안스링거와 별 다르지 않은 그의 절친한 친구인 헨리 지오다노가 임명되었다. 케네디 행정부는 적어도 마리화나에 대해서는 개방적이고 온정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1963년 ‘마약 및 중독에 대한 대통령 고문위원회’는 마리화나를 아편과 같은 다른 마약들과 확실히 구분했다. (헤로인은 생아편으로 제조한다.)

1960년대는 매카시즘의 광풍과 비견할 만한 보수적 반동과 자유주의적 진보세력의 대립이 격화된 시대였다. 마리화나는 그 충돌의 현장 중 하나였다. 현실적으로 마리화나의 사용이 공공연해지면서 마리화나 합법화운동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진스버그가 주도한 레마LEgalize marijuana, LEMA는 미국 최초의 마리화나 합법화 운동이었다.

1960년대 마리화나는 허스트의 황색언론과 안스링거의 마약관리국이 쳐놓은 철창을 부수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마리화나는 더 이상 멕시코인이나 흑인 또는 범죄자들이 사용하는 약물이 아니었다. 신좌파운동의 활동가 중 하나였으며 이피Youth International Party, Yippie운동의 창시자였던 제리 루빈Jerry Rubin은 1970년 5월의 집회에서 마리화나를 이렇게 규정했다.

“마리화나는 당신을 범죄자이자 혁명가로 만든다.”

마리화나가 진보와 혁명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마리화나를 불법화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그에 따라 저항이 거세지면서 탄압도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1968년 FBI 국장 에드가 후버는 모든 관련 기관의 종사자들에게 ‘신좌파들 사이에서 마리화나와 마약이 광범위하게 유행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마약 사용 위반 혐위로 체포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는 지침을 전달했다. 1960년대 내내 마리화나는 단순한 약물이 아니었다. 마리화나는 권력과 진보세력이 충돌하는 전선의 일각을 점하고 있었으며 권력으로서는 진보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구실로, 진보세력에게는 운동의 상징으로 매김되었다.

1969년 존슨 행정부는 연방마약관리국과 몇 개의 조직을 통합하여 법무부 산하의 마약국Mureau of Narcotics and Dangerous Drugs, BNDD을 신설해 조직을 정비하여 멕시코 국경에 대한 대대적인 마리화나 밀수 단속을 시작했고, 이에 맞서 마리화나 합법화 운동가들은 1970년 ‘마리화나 법 개혁을 위한 전국조직National Organization for Reform of Marijuana Laws, NORML’을 조직했다. (놈NORML은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대표적인 마리화나 합법화운동 조직이며 뉴질랜드 등에도 조직되어 있다.)

미 의회는 1970년 ‘마약 중독 방지와 통제법Drug Abuse Prevention Control Act’을 공포했고 이 법은 마리화나를 스케줄1에 포함시킴으로서 의약적 목적으로도 마리화나를 사용할 수 없게 했다.

1960년대 말 미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첨예한 쟁점은 의심할 바 없이 2차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전쟁)이었다. 반전反戰은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전선이었으며 미국의 60년대는 이 전선을 사이에 두고 양 세력이 격렬하게 충돌한 시대였다. 마리화나는 이 시기에 반전과 평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1969년 11월 15일 워싱턴에서 25만명의 반전 시위, 닉슨은 시위에 주 방위군을 동원했고 실탄이 든 총을 지급했다. 1970년 켄트주립대학에서 주 방위군이 시위 학생들에게 발포해 4명이 살해되면서 시위는더욱 뜨겁게 달아 올랐다. 1971년 4월에는 다시 50만며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워싱턴에서 대대적인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같은 해 6월 13일에는 『뉴욕타임즈』가 미군이 북베트남 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조작했던 통킨만 사건의 진상에 관한 국방성의 1급 비밀문서를 시리즈로 폭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닉슨은 후일 ‘펜타곤 비밀문서 사건’으로 명명된 이 보도를 중단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페타곤 비밀문서 사건’이 터진 지 나흘 뒤인 1971년 6월 7일 비밀문서의 공개로 궁지에 몰리자 닉슨은 대중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을 선포했다. 최초로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다.

1972년 재선된 닉슨은 1973년 마약국BNDD과 마약방지법 집행부ODALE, Office of Drug Abuse Law Enforcement 그리고 세관과 CIA의 관련 조직을 통합하여 마약관리국Drugs Enforcement Administration, DEA을 신설했다. 1972년 6월의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으로 닉슨은 탁핵을 거쳐 2년 뒤 사임에 이르게 되지만, 닉슨이 선언했던 ‘마약과의 전쟁’과 그 실행 기관인 DEA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미국 마약정책의 이념과 실천이라는 양대 근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결국 닉슨은 그 초석을 닦은 인물이었다.

전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한 미국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책을 국제적으로 확산 시켰다. 1961년 ‘유엔 마약 단일협약UN Single Convention on Narcotic Drugs’은 그 첫번째 성과였다. 협약은 마약의 소지와 사용, 유통과 수입, 수출, 제조와 생산을 의약과 과학적 용도에만 한정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대마를 마약에 포함시킨 것은 물론 25년 이내에 국제적으로 대마의 재배와 대마초의 사용을 근절할 것을 목표로 했다. 심지어 대마는 아편, 모르핀, 헤로인, 코카인,메타돈과 같은 강력한 마약과 함께 스케줄1에 포함되었다. 이런 비상식적 결과는 오직 유엔에 대해서 미국이 가지고 있었던 강력한 지배력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마는 세게 각지에서 별다른 제약 없이 재배되고 있었고 그 사용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과격한 반反대마 정책은 유럽과 아시아 이른바 동맹국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세계적으로 대마는 급속하게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1961년 마약 단일협약은 그 신호탄이었다.

유엔은 그 뒤에도 새로운 협약을 선보였다. 1971년 ‘향정신성 물질 협약Convention on Psychotropic Substances’은 마약과 달리 분류되는 향정신성 물질에 대한 국제협약으로서 향정신성 물질의 광고를 금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협약이었다. 1988년 ‘비엔나 마약 및 향정신성 물질 불법거래 금지협약Vienna Covention against the Illicit Traffic of Narcotic Drugs and Psychotropic Substances’은 1961년의 협약을 발전시켜 국제적 공조, 범인 인도 및 몰수 조항을 강화한 것으로 이 협약에서도 대마초는 엘에스디25LSD25, DMT(디메틸트립타민, Dimethyltryptamine)와 함께 스케줄1에 포함되었다. 유엔은 1061년 단일협약 이후 국제마약통제위원회INCB, 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Board를 설립하고 현재는 3개 협약의 이행을 감독하는 준사법적인 기구로 운영하고 있으며 가입국은 1백80여 개국에 이르고 있다.

미국의 마약과의 전쟁은 알려진 것처럼 국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89년 12월 파나마를 침공한 미군이 독재자이자 실권자인 노리에가를 체포해 미국으로 송환한 사건은 DEA가 개입한 작전 중 가장 악질적인 것이었다. 노리에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 작전에 동원된 미군의 무차별 폭격 등 이른바 ‘도시 전격전’으로 무려 3천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이 수행하고 있는 마약과의 전쟁이 국경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수행되고 있으며 얼마든지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했다. 또 그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수행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미국의 파나마 침공에 대한 진실을 알려면 ‘파나마 사기극’이라는 다큐멘터리를 검색해서 보시면 보다 자세히 알수 있다.)

한국에서 횡행하는 대마 금지론은 안스링거가 만들어낸 관문이론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대마를 하면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해 다른 마약에 손대게 된다는 논리가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다른 마약을 하거나 대마초를 피우기전에 그들은 뭘 했지?”
“담배 피고 술 마셨잖아! 그리고 커피도 마시고.”
이런 논리라면 술과 담배도 마약으로 규정해야 한다. 바로 이 논리가 한국 검찰이 지금 이순간까지도 고수하며 펼치는 논리가 되고 있다. 50년 도 더 된 비논리적이고 낡아서 용도 폐기해야할 논리를 말이다.
그기에 혼동논리가 하나 더 보태져 있다. 바로 이 논리야 말로 아주 저질인데다가 제일 큰 왜곡 논리가 있다. 즉 다른 마약의 현상과 대마 흡연시 나타나는 현상을 교묘히 엮어 사람들로 하여금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 수법이다. 혼동론자들은 대마를 하면 ‘잠 안자고, 함부로 돌아다니고, 불안하고, 불쾌감, 공황장애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약과 대마에 대해 전혀 아무 것도 모르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대마를 피우면 이들이 말하는 내용과 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푹 잠 잘 자고,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집안에 조용히 있으려고 하고, 안정되고, 기분 편하고, 느긋해지고, 남들에게 너그럽고, 평화스러워진다.’

한국에서 1976년에 제작된 홍보영화를 보면 대마를 피우면 아주 폐인이 되는 걸로 묘사되어 있다. 대마의 부작용에 대해선 이 혼동론자들이 말 한 대로 묘사했다. 대마를 하면 환각작용이 일어나고, 환청이 들리고, 자살을 하고, 겁 없이 차도에 뛰어들고…….
대마를 하면 절대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마구 허구와 혼동을 퍼뜨려 똥오줌 못 가리게 하여 지나온 세월이 장장 30년이다. 이 홍보영화에서 나오는 현상은 대마가 아닌, LSD를 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가지고 만든 것에 불과하다.

대마 반대론자들은 환각, 환청, 환시 등의 현상을 꺼내든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 거짓이다. 대마를 하면 이런 현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뇌의 모세혈관이 확장되며 혈류량이 증가하면서 감각능력이 높아지는 것이지 절대로 “환”자 들어가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마약수사 20년 된 베테랑과 한국 마약의 권위자도 대마에는 절대 이 “환’자 들어가는 현상은 없다고 지적한다. 잘 알기 때문이다. 영화배우 김부선 씨도 인터뷰에서 말했다. 대마 피우면 새처럼 훨훨 나는 기분이라 해서 했는데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이런 거짓말을 마약딜러가 아닌 전문가인 양하는 공인들이 대중매체에서 함부로 지껄이는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 사실 왜곡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즐겨 말하는 거짓말 중에 중독성이라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의존성, 금단성, 강화성, 내성, 독성, 이 다섯 가지 중에서 대마가 제일 낮은 수치를 보여준다. 이것은 소위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영국이나 미국에서 연구한 결과로 판명되었다. 심지어 대마는 커피보다도 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마는 술, 담배, 커피 등과 같은 세 가지 합법 물질보다 훨씬 안전한 물질임이 밝혀진 것이다.

한국에서도 실제로 지금까지 대마 피우다 혹은 그 폐해로 죽은 사람은 전혀 없다. 그러나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 먹다 죽은 사람은 여럿이 있다. 그리고 대마를 하고 흉폭 해지는 경우는 전혀 없다. 그러나 술 마시고 흉폭 해지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대마를 하고 운전하다 사고 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음주운전 하다 사고치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담배나 커피를 끊고 하루도 안 지나 금단현상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무척 많다. 그러나 대마를 끊었다고 해서 덜덜 떨거나 금단현상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과음, 줄담배, 줄커피 하는 사람은 많으나 대마는 한 번에 억수로 많이 하는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많이 해야 할 이유도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대마는 세 모금이 정량인데 여섯 모금 빨면 그대로 푹 잠에 빠져 피운 대마 그 자체가 아깝게 되고 헛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마는 항상 자신의 정량대로만 피우게 된다. -2편으로 계속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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